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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언어/시- Poema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by 추홍희블로그 2011. 11. 17.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리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
- 現代試選集『70年代젊은詩人들』(文學世界史, 1981)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84]


 


어느 志士의 傳記


 

김광규

 

관청에서는 그를 特異者라고 불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길바닥에 쓰러진 異敎徒를 보살펴
주었고, 젊었을 때는 교활하고 잔인한 强盜犯을 옹호했
으며, 나이가 들자 불온한 모임에 드나들며 地下運動을
벌였다.

세상은 언제나 亂世였다.
도저히 그는 편안하게 자고, 맛있게 먹고, 돈을 벌어
즐겁게 살 수가 없었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언제나 몸보다 마음을 앞세운 그는 수많은 逸話가 증
명하듯 크고 높은 뜻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死刑臺에 올라가기 전에 聖者처럼 태연할 수 없
었던 그는 담배 한 개비와 술 한 잔을 달라고 했단다.
그의 마지막 소원이 이뤄졌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자기의 몸과 헤어지게 된 순간 그는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르는 대신 연약한 인간이 되어 떨었던 것이다.
그의 志士답지 못한 最後가 나를 가장 감동시킨다.

 

- 現代試選集『70年代젊은詩人들』(文學世界史,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