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말과 글과 문화-사전의 가치와 위대성
정말 신라는 흉노족의 후손일까?
문무대왕 왕릉비문 속에 등장하는 “秺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을 “투후 김일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탈-진실사회에서 활개치는 인터넷 가짜글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지난 30년간 식민사학자들이 진행시켜 온 특히 KBS 방송 역사 스페셜 등 각종의 신문 방송에서 문무대왕 왕릉비문의 “투후”를 “김일제”로 해석하여 “신라인은 흉노족의 후손”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는 이들 때문에 역사 교육의 혼란스러움이 극한 상황에 다다른 지경이다.
그렇게 떠들어댄 이유 중 하나는 공자도 칭찬해 마지 않았던 우수한 한반도 동이 민족을 침략자 서방 강족 흉노족으로 변신시켜 민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만들어 내고, 그리하여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잠재하고 전해 내려온 자유민주주의 정통 민족성을 말살시키고, 식민지로 전락시켜 온국민을 노예화시키는 도구로 이용하고, 또 그렇게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선전을 거듭해 왔다. 삼인성호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 셋만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탈-진실 사회가 온천지를 판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어찌 보통사람들이 세뇌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무왕릉 비문 속의 “秺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은 “투후 김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투후 상구성”을 지칭한다는 추홍희 저자의 올바른 비문 해석 논지가 이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문무대왕릉비문의 “투후 제천지윤”에서의 투후는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이라는 가장 새롭고 가장 진실한 역사분석적 주장이 창천이사황천당립의 욱욱한 기세로 온 천지를 뒤덮을 것이다.
한서 공신표(功臣表)와 한서 유굴리전에서 “秺侯 商丘成”(투후 상구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사기 년표와 한서 김일제전에서 “秺侯 金日磾”(투후 김일제)를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투후가 김일제를 지칭하느냐 아니면 투후 상구성을 지칭하느냐를 두고서 누가 투후인지를 입증해 내는 그 역사적 임무는 역사가의 몫이다. 이런 임무는 역사를 모르면 해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필자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그리고 진서와 남북사 자치통감까지 여러 사서들을 통합한 결론으로서 문무대왕릉비 비문 속의 “투후 제천지윤”은 “투후 상구성”이라는 결론을 역사학적으로 도출해 낸 것이다.
이런 결론에 대해 일말의 의심하는 독자들은 가장 손쉽게 한자 사전부터 우선 펼쳐보라. “秺(투)” 한자를 중국어 사전에서 검색해 보기 바란다. “秺”(투) 한자를 강희자전이나 중국어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史記•年表】秺侯金日磾【前漢•功臣表】秺侯商丘成” 이렇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런 팩트를 접하는 순간 독자 모두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질해 터이고 독자들이 직접 확인한다면 저자의 책을 계속 읽을 필요가 크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1716년에 나온 강희자전 옥편을 펼쳐보면, 【史記•年表】秺侯金日磾【前漢•功臣表】秺侯商丘成- 이렇게 투후 김일제와 투후 상구성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껏 미국혁명이 일어난지 250년이 되어가고, 문무왕릉비문이 발견된 지 약 반오백년이 되었다. 추씨의 선조 추연이 2천년 전에 설파했던 우주천체의 운행법칙 오덕종시설에 따르면 250년의 시간은 다시 혁명의 씨앗을 뿌리는 추수의 시기가 되었다는 엄연한 추수잠동의 순환 법칙 주기임을 알려준다. 이런 우주의 순환법칙은 공자도 노자도 추연도 사마천도 분명하게 역사에 적시해 두었고, 광무제도 유비도 제갈량도 당태종도 문무대왕도 분명하게 말하고 역사에 적어두었다.
역사가 없다면 누가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 부모가 있기에 후손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뉴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말해주듯이 너무나 분명한 자연법 사상이다. 사과가 떨어진다는 곳에는 사과나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진리를 말해준다.
이 책은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이라는 역사적 기록들을 모두가 해석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역사의 진실의 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속의 불빛을 비추며.
“투후”를 “김일제”이라고 해석하는 한국인들에게
투후 상구성-반악의 서정부와 백제 흑치준 묘지명의 투후는 누구인가
투후를 김일제라고 해석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잘못을 한번에 깨부숴버리는 주장으로서 우선 강희자전을 즉시 펼쳐보기를 바란다. 한자옥편만 펼쳐봐도 투후 김일제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동안 왜 한국인들은 눈뜬 봉사가 되었고 코끼리 다리 만지는 장님이 되었고 귀마저 멀은 귀머거리가 되었고 벙어리 삼룡이 농아가 되었단 말인가?
“한 나라가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면 그 문명은 국내적으로 사회적 분열을 겪거나 외부 군사적 침략의 위험에 노출되거나 경제적 식민지 노예 상태로 전락할 그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믿음의 상실이 가져온 결과로 인해서 문명이 쇠퇴하면 다른 종교나 다른 믿음의 체계에 의해서 고무된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대체되었다."[1]
문무대왕릉 비문의 “秺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는 한왕신(韓王信)의 후손으로서 상나라 동이족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무공을 세우고 고관대작을 지낸 역사적 인물로서 한서와 사기에 기록된대로 투후는 商丘成(상구성)을 지칭한다.
“秺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적혀 있는 문무대왕릉 비문은 한민족 역사의 기원을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보물이다. 반악의 서정부에서 표현된 “秺侯之忠孝淳深”(투후 지충효순심), 백제 흑치준 묘지명 가운데 “頹當 秺侯入仕 西戎孤□”(퇴당 투후입사 서융고신)은 문무왕릉 비문은 서로 연관적으로 해석된다.
① 반악의 서정부에 나타난 “秺侯之忠孝淳深”(투후 지충효순심)
반악의 서정부에서 투후(秺侯)의 정체를 알려주는 구절은 문무대왕 비문 구절 속에 등장하는 “투후 제천지윤”의 “투후”를 설명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사료에 해당한다. 서정부의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臨危而致勇奮投命而高節亮暨乎秺侯之忠孝淳深陸賈之優游宴喜”.
이 반악의 서정부 구절을 번역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의 큰 위기 상황에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사람이 있고, 아까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곧은 절개를 드러낸 충신이 있다. 이러한 사람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성이 돈독했던 투후가 있고, 물러날 때를 알고서 조용히 낙향하여 말년까지 유유자적 은일의 삶을 누렸던 육가가 있다”.
여기서 투후는, 韓信(한신)과 같은 황제의 한왕(韓王)의 후손으로 동이족 출신으로서 무공을 세우고 서쪽나라 홀로된 기러기-(퇴당 투후입사 서융고신(頹當 秺侯入仕 西戎孤臣)-가 되었던 한퇴당(韓頹當)을 이어받은 사람이 상구 성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서에 기록된대로 秺侯(투후)는 商丘成(상구성)을 지칭한다.
② 백제 흑치준 묘지명의 “頹當 秺侯入仕 西戎孤臣”(퇴당 투후입사 서융고신)
백제 흑치준 묘지명에 들어있는 투후 구절은 다음과 같다: “於維后唐 求賢以理 頹當 秺侯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片善斯紀”. 당나라 황제가 마땅히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이치를 깨닫고 동이족 출신 한퇴당 같은 뛰어난 인물을 썼도다. 또 동이족 한(韓)나라 후손 투후 상구성이 한나라 조정에 출사하였다가 서쪽 먼 변방의 (구석진 곳까지 서정을 나갔는데), 같은 동이족의 자손으로서 공적이 그들에 미치지 못함이 없을 정도로 구했으니 여기에 그들 보다 조금 뛰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기념한다.
③ 한자 사전에 풀이된 “秺”(투) 내용
1716년에 나온 강희자전 옥편에서 “秺(투)” 한자를 펼쳐보면 “【史記•年表】秺侯金日磾【前漢•功臣表】秺侯商丘成”-이렇게 “투후 김일제”와 “투후 상구성”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면 투후제천지윤 이 책의 내용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전율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2]
이 책은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투후 상구성의 역사에 대해 고증한 책이다. 상구성, 이 역사적 실제적 인물을 역사학적으로 밝혀내는 위대한 한 역사가의 임무를 함께 풀어보고 싶지 않는가?
투후 상구성 vs 투후 김일제
“투후 제천지윤”에 대한 해석을 두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을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서 “秺侯”(투후)에 대한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형사재판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범인으로 지목된 용의자A가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는 반대 증거로써 자신은 그 범행 현장에 있지 않았고 다른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alibi) 증거를 대면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런데 범행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경찰에 나타나서 A를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증인이 나타나면 용의자는 재판정에 서게 된다. 눈으로 봤다는 사실이 증거가 되는 재판증거법상 그렇다.
“투후”가 “김일제”임이 분명하다고 말한 경찰은 그 증거로써 범인을 죽인 그 범행현장에 오로지 김일제 한 사람 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증언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만약 김일제 변호인이라면 김일제 뿐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인 김일제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전혀 다른 사람인 상구성을 재판정에 내세울 수만 있다면 그동안 김일제가 범인이라는 경찰의 논리와 재판증거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한국의 넋나간 사학자들은 오로지 김일제가 범인이 분명하다고 아우성치고 난리쳐 왔다. 물론 “투후는 김일제”라는 주장이 역사책에 등장하기에 그런 주장 자체로는 틀렸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투후 상구성”이라는 보다 명백한 사실(팩트)을 미처 보지 못하고 단지 투후 김일제라고 맹목적인 추종만이 존재해 온 것이 큰 문제이다. 필자는 단순하게 이 팩트만을 공개해도 김일제가 진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는 유명한 변호인이 될 수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범행 현장에 동시에 존재하는 김일제와 상구성이라는 두 명의 용의자 중에 누가 범인인지 그것까지를 가려내는 검사와 배심원단의 역할까지 도맡아서 역사적 진실을 만천하에 낱낱이 밝혀내는 어려운 역할까지를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
사기 년표에는 “투후 김일제”, 한서 공신표에는 “투후 상구성”이 적혀있다. 강희자전 《康熙字典》 “秺” 글자 설명 페이지를 보라: 《康熙字典•禾部•六》秺:《廣韻》當故切《集韻》丁故切 ?音妒 地名 《史記•年表》秺侯金日磾 《前漢•功臣表》秺侯商丘成 《註》在濟隂成武 이와 같이 강희자전에는 “秺侯金日磾”, “秺侯商丘成” 두 가지 팩트를 소개하고 있다.
《史記·年表》 사기 연표 해당 페이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二月己巳,光祿大夫霍光為大將軍 博陸侯 都尉金日磾為車騎將軍 秺侯 太僕安陽侯上官舛為大將軍. “都尉金日磾為車騎將軍 秺侯”. 그런데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죽은 때가 BC 90년 최소한 BC 88년 이전인데, BC 87년 일이 사기에 적혀있다면 이런 역사 기록은 사마천 사후 후대에 약간 가필되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문무대왕 왕릉비 비문의 투후는 투후 김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투후 상구성이라는 결론을 이 책은 이끌어낸다.
반고의 《漢書 功臣表》 한서 공신표를 찾아보면 ”秺侯 商丘成”이라는 구절이 보다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景武昭宣元成功臣表》
號諡姓名 | 功狀戶數 | 始封 | 子 | 孫 | 曾孫 | 玄孫 |
秺侯商丘成 | 以大鴻臚擊衛太子,力戰,亡它意,侯,二千一百二十戶。 | 延和二年七月癸巳封,四年,後二年,坐為詹事侍祠孝文廟,醉歌堂下曰「出居,安能鬱鬱」,大不敬,自殺。 | 濟陰 |
이와 같이 한서 공신표에는 “秺侯 商丘成”(투후 상구성)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한편 김일제는<한서 공신표>에서 “秺敬侯 金日磾”(투경후 김일제)로 기재되어 있다. <한서 공신표>에는 이렇게 “투후”가 아니라 “투경후 김일제”(秺敬侯 金日磾)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
秺敬侯金日磾 | 以駙馬都尉發覺侍中莽何羅反侯,二千二百一十八戶。 | 始元二年侯,丙子封,一日薨。 | 始元二年,侯賞嗣,四十二年薨,亡後。 | 孫 | 元始四年,侯常以日磾曾孫紹侯,千戶,王莽敗,絕。 |
한서 유굴리전에서의 투후 상구성 기록
위와 같은 한무제 때의 기사와 공신표에 나타난 기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은 한서 열전 유굴리전이다. 유굴리에 대한 기록은 漢書 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에 실려 있다. 유굴리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上曰 侍郎莽通獲反將如侯 長安男子景建從通獲少傅石德 可謂元功矣 大鴻臚商丘成力戰獲反將張光 其封通爲重合侯 建爲德侯 成爲秺侯 諸太子賓客 嘗出入宮門 皆坐誅”. 이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무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랑 망통은 반란세력의 주동자 여후를 체포하였고,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망통을 따라서 반란세력의 주요 협력자인 태자의 소부 석덕을 체포하였으니 가히 그 공이 크다.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반란세력의 주동자인 장광을 붙잡았다. 이런 공로로 망통을 중합후에 봉하고, 경건을 덕후에 봉하며, 상구성을 투후에 봉한다’.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의 빈객 모두와 과거 태자궁을 출입한 사람들 모두를 잡아다가 사형에 처했다.”
商丘成 秺侯 자치통감 기록
<자치통감> BC 91 정화2년조에 “상구성을 투후에 봉했다”는 기사가 적혀 있다.
“商丘成力戰獲張光 封通為重合侯 建為德侯 成為秺侯”.
[1] 토인비,“Each time a nation has lost faith in its religion its civilisation has succumbed to domestic social disintegration, foreign military attack or economic enslavement. The civilisation that has fallen as a result of the loss of this faith has been replaced by a new civilization inspired by a different faith or religion.”
[2] 추사 김정희 선생은 진흥왕 순수비의 세간의 알려진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일거에 변파했음에도 조선이 망해가는 역사를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추사 김정희가 당시 저작권법이 발달한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면 그래서 영미국에서 조선의 역사를 저술했었더라면 아마도 한국의 역사는 달라졌지 않았을까? 하지만 추사는 유배 감옥 생활을 오래했기에 세계의 당시 흐름에 부응하지 못했고 그 속에 갇혀있던 조선의 당시 상황적 한계 때문에 조선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 한계를 저는 파악하고서 저작권법이 보호되는 영미국의 진실적 탐구의 지적 흐름에 편승하고 부응하여 잘못된 한국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감히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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