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 卄五日景辰建碑 大舍臣韓訥儒奉 | 景辰 경진길일 건비입묘 | 426 |
후기 | |||
공자의 春秋(춘추)와 西狩獲麟(서수획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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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자도 진시황제도 한반도로 이민을 오고자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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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어떻게 기존의 황당무계한 설을 물리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는가? | 456 | ||
참고문헌 | 459 | ||
일러두기 | 461 | ||
“역사혁명” 책 주요 내용 요약 | 466 |
후기
공자의 春秋(춘추)와 西狩獲麟(서수획린)
공자는 춘추로써 공자가 되었다. 춘추가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어찌 공자가 있을 수 있었을까? 춘추하면 공자요 공자하면 춘추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孔子曰 後世知丘者以春秋 而罪丘者亦以春秋: “후세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또한 춘추 때문일 것이다.”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나는 하늘도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는 자는 아마도 하늘이 아니겠느냐.
춘추의 마지막 구절은 “西狩獲麟”(서수획린)이다. 서수획린은 공자의 절필지운이기에 더 이상 공자에게 그 의미를 직접 물어볼 수 없다. 그런데 이 마지막 춘추의 구절을 두고서 2천년이 넘도록 오늘날까지 부지기수의 학자들이 그에 대한 해설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완전하게 해석해내는 이가 없다.
공자가 타계하기 전 3년부터 춘추의 역사서를 쓰기 시작하다 한 사건이 일어났다. 노나라 왕이 서산에 사냥을 갔다가 기린을 잡았다는 그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을 보고서 공자는 슬퍼하면 “吾道窮矣”(오도궁의)라는 말을 남기고, 2년 후 죽을 때까지 더 이상 글을 쓰질 못했다. 서수획린은 공자의 절필지운이 된다. 대개 “내 도가 다했다”라는 공자의 마지막 글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해설서를 시도해 왔는데 쟁쟁한 유학자들 가운데도 시대에 따라서 각기 다른 해석을 낳고 있다. 주역에서 말하길, “積善餘慶”(적선여경)-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는 경사스런 일이 생기고, “泣麟傷鳳”(읍린상봉)-기린을 보고 울고 봉황을 보고 슬퍼한다. 사람은 각기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각자 사정에 따라서 해석이 달리 하거나 달리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춘추좌씨전의 “古之遺愛也”(고지유애야)의 해석대로,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그것을 말해준다. 니이체가 자신의 묘비명으로 적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영원하다”.
절필지운
서수획린의 의미를 나의 문무왕릉 비문의 해석에 적용해 보자. 서수획린에 대한 해석에서 각자의 경험과 각자의 지식과 각자의 믿음에 따라 자신들의 각주와 해설을 달을 뿐이고, 공자는 언제까지나 침묵한다. 죽은 이의 유언의 진실은 그가 불완전하게 남겼다고 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결코 온전하게 해석해 내지 못한단 말인가? 모두는 청개구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비가 오면 울어 제치기나 하는 청개구리의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공자가 서산에 지고 사라졌다고 해서 그의 글들은 봉해져야할 만큼 올바른 해석이 영영 불가능하다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공자가 비록 다 쓰지 못하고,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가 이미 남겨놓은 수많은 글들이 살아 있고 또 그와같이 춘추의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자가 전달하려고 한 그의 참뜻을 해석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문무왕릉비 비문 중에 현재 남아 있는 파편은 전체 비문 가운데 매우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해석할 수 없는 절필지운이라고 여기고 그에 대한 해석 작업을 더 이상 해내지 못한다고 여기고 그저 손을 놓아야 할까? 그건 아니다. 비록 적은 부분일지라도 아직도 남아 있는 부분이 존재하고 또 그러하기에 다른 수많은 역사서들을 참조하고 동원하여 어느 정도 정확한 복원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손인 우리들의 의무이고 몫이다. 문무왕의 선조가 남겼던 공자의 춘추 해석은 추연이 남겼던 공자의 춘추 해설서처럼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공자의 춘추는 좌씨춘추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등 이 3가지 춘추가 남아 있기 때문에 비록 100% 완전하지는 않더라고 우리의 가진 지식과 추리력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복원 작업이 가능하다.
나는 문무왕릉비 비문 연구와 첨성대 연구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 것이다. 세잔느가 자신의 사과 그림 하나로 전 유럽을 강타할 것이라는 대담한 선언처럼. 그리하여 천지개벽의 새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진실로 기대한다.
왜 공자도 진시황제도 한반도로 이민을 오고자 했을까?
삼국사기는 보장왕조에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집의 문을 닫음이 없고, 부인이 지조가 굳고 믿음이 있어 음란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데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가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한 것이다. 또 천성이 유순하여 3방(三方)과 달라서 공자(孔子)가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려고 하였던 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원문은 다음의 문장이다. “論曰 玄莬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 田蠶 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위 국편위 번역에서 “변두”는 대나무 죽기를 말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요사이 스시 초밥 먹듯이 대나무로 만든 깨끗한 죽기 밥그릇을 이용해서 깨끗하게 음식을 차려 먹는 뜻인데, 상징적인 의미로는 깨끗한 제삿상을 차려 먹는다 즉 조상들에게 제사를 반듯하게 드리며 선조를 공경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갖고 있다는 뜻을 갖는다. 三方(3방)은 삼면 서쪽 남쪽 북쪽의 지방을 지칭한다. 한반도는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는 군자의 나라이기에 남서북쪽의 오랑캐족속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반도가 얼마나 무릉도원이었는지는 진시황제도 인정했고 그에 앞서 성인군자의 대명사 공자도 인정했다는 사실로써 입증된다. 공자도 진시황제도 이민을 오고 싶어했던 신선이 사는 지상낙원 금수강산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이런 말을 처음으로 지어냈을까? 그게 아니었다. 똑같은 한문 문장이 북송 977-984년에 편찬한 “太平御覽”(태평어람) 조선전에 기재되어 있다. 또 1071-1086년에 편찬된 “資治通鑑”(자치통감) 원봉3년(BC108) 12월 기사에도 전재되어 있다.
또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도 똑 같은 원문이 적혀 있다. 따라서 김부식은 한서 지리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논(論)했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 왜냐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문장은 한서에서 그대로 훔쳐온 표절이고 조작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기의 생각을 적은 글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었다. 자기의 탐구된 견해가 아니라 한서 지리지의 문장 그대로 훔쳐온 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와 삼국사기 원문 비교
한서는 BC 206년 한나라가 수립된 해부터 전한이 망한 왕망의 신조 AD 23년까지 230년간의 전한의 역사를 반고가 편찬한 공식적 역사서이다. 다음과 같은 漢書 地理志 해당 문장을 보자.
“玄菟 樂浪 武帝時置 皆朝鮮 濊貉 句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為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為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飲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樂浪海中有倭人 分為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삼국사기나 한서는 똑같은 한문으로 쓰여진 사서이다. 보라, 김부식의 사론은 한서 지리지를 그대로 표절하고 조작했음이 즉시 확인되지 않는가?
삼국사기 vs 한서 지리지
삼국사기 | 한서 지리지 |
玄莬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 田蠶 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 玄菟 樂浪 ... 皆朝鮮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 犯禁八條 …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飲食以籩豆 … 吏見民無閉臧 …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
태평어람 | 자치통감 |
《漢書·地理志》曰 玄菟 樂浪 武帝時初置 皆朝鮮 獩貊 勾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 織作 樂浪 朝鮮 民犯禁八條 如淳曰 有其四 其四不見 相殺以當時償殺 相傷者以谷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娶無所仇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不淫辟 其田民飲食以邊豆 都邑頗放效 吏及內郡賈人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藏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相犯禁浸多 致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之不行 乘桴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 | 班固曰 玄菟 樂浪 本箕子所封 昔箕子居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為民設禁八條 相殺 以當時償殺 相傷 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娶無所售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野飲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桴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
김정희는 어떻게 기존의 황당무계한 설을 물리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는가?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신라 진흥대왕순수비)는 추사김정희가 밝혀내기 이전까지는 무학대사 왕심비(枉尋碑)[1], 고려시대의 도선국사비[2], 또는 몰자비(沒字碑)[3] 등으로 알려졌다. 추사는 1816년 7월에 북한산 비봉을 답사하고 나서 그때까지 무학대사비문으로 알려져왔던 비문이 실제로는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내고 금석학의 기여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부했다.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밝혀져 격파)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4]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김정희의 회고를 보다 자세히 인용하면 각주와 같다.[5]
참고 문헌
《海東金石苑》 巻1-4, 1853, 早稲田大学図書館.
《庾開府集笺注》巻一-巻十
《唐大詔令集》
《文選》
《二十四史》-(史記, 漢書, 晉書), 中華書局
《資治通鑒》
《柏杨白话版资治通鉴》
《三洞瓊網》
《道藏》
《正統道藏》
《中國道敎史》
《唐大宗傳》
《老子道德經》
《道敎小辞典》
《道敎大辭典》
《The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Daoism Handbook》
《The Encyclopedia of Taoism》
《The Grand Scribe’s Records》 9 vols, Indiana University Press.
《The First Emperor》
《隋唐道家與道敎》
《Taoist Meditation》
《Laughing at the Tao: Debates Among Buddhists and Taoists in Medieval China》
《Japan's Colonization of Korea: Discourse and Powe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http://db.history.go.kr/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1992.
《三國史記》
《三國遺事》
洪良浩, 耳溪集 권16.
예추이화, “李白 文 譯註”,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8.
일러두기
1. 책의 저자 추홍희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영미판례법국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호주 변호사가 되었으며, 뉴사우스웨일즈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러한 저자의 교육 배경과 실무와 학교 내외에서 쌓은 지식의 배경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학술 연구 조사 능력을 축적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2. 이 책을 씀에 있어 저자가 한문 원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서술하거나 인용하는 경우는 《漢語大詞典》《康熙字典》《辞海》 한어대사전과 강희자전과 사해 중국어 사전을 주로 이용하였다. 또 《新华字典》《现代汉语词典》 등의 중국어 사전 또는 간혹 일본어 漢和 사전을 참고한 적은 있으나, 한국에서 출판된 옥편이나 중국어 사전 등은 참조하지 않았다. 다수의 汉典 인터넷 사이트가 한자 사전의 편리한 검색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이 책 속에서 한문의 뜻을 설명하거나 번역이나 해석함에 있어서 인용한 사전에 들어 있는 원문의 해당 페이지 쪽수는 밝히지 않고 생략했다. 다음의 사전 검색 사이트 등을 이용하고 참조하였다. http://www.ivantsoi.com/; http://www.hydcd.com/; https://www.zdic.net/; http://hy.httpcn.com/.
3. 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고 또 이 책을 완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자료는 일본 와세다 대학 도서관의 1853년 유희애의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 그리고 중국에서 출판된 《唐大詔令集》《文選》《二十四史》 등이었다.
4. 道敎(도교)에 대한 이해는 노자 장자 문자 열자 등의 원전과 설명서를 탐독했고, 학문적인 연구서로써 기본서는 《Daoism Handbook》《The Encyclopedia of Taoism》을 완독하고 연구서들을 섭렵했다. 이들 자료들은 각주로 상세히 밝혔다. 사전은 《道敎小辞典》《道敎大辭典》을 활용하였다.
5. 와세다 대학의 《海東金石苑》에서 결정적 단서를 찾았고, 《Daoism Handbook》을 읽으면서 도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높이게 되었으며, 《The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을 읽으면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반악과 장재와 유신의 문장들을 《昭明文選》《庾開府集笺注》을 통해서 읽고 또 《前漢書》와 《晉書》와 《周髀算經》 등을 읽고나서 저자의 책의 시작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6. 사마천의 史記, 반고의 漢書, 방현령의 晉書는 《二十四史》를 이용하였다. 사마광의 資治通鑒은 柏杨白话版资治通鉴과 한국의 고전문헌번역DB를 참조하였다. 三洞瓊網을 포함 道藏도장은 正統道藏 정통도장을 참고하였다. 또 이런 자료들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 등 인터넷 제공 소스를 활용하였다.
저작권 지적 재산권
저자 추홍희는 이 책의 독창성과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은 저작권법상의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누구라도 저자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어떤 형태로도 임의로 인용하거나 복제할 수 없다.
© 추홍희 2020
『역사 혁명』 책 주요 요약
『역사 혁명: 문무대왕 유언 비밀 해제: 삼국사기는 이렇게 조작됐다』
이 책에서 밝혀내는 위 두 가지에 대한 진실은 고려시대 김부식 일당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역사 조작을 범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로 쓰여지게 된다. 문무왕릉비 비문 내용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이해를 통하여 삼국사기가 기술하고 있는 부분과의 차이를 들추어내고 그 진실을 밝히는 것 그리고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였다는 조작과 표절의 범죄 행위라는 사실을 밝혀내면 그것은 삼국사기의 역사 조작의 범죄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증거 스모킹건 smoking gun가 된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기사에서 문무대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유조문 전문의 전체 글자수는 350자이다.
① 이 중에서 238여 글자의 내용이 거의 전부 당태종 유조문을 그대로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이 책의 설명을 통해서 맨처음으로 밝혀낸다.
② 또 삼국사기가 기술한 유조문 가운데 만가 애도시 부분인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55자의 구절은 장재의 七哀詩칠애시에서 차용하였다는 점을 맨처음으로 제기하고 그 근거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 둘 사이에 “▨牧哥其上狐兎穴其傍” 구절만이 문무왕릉 비문과 일치하는 문장 내용 부분이다. 이 초목가기상호토혈기방의 구절에서 삼국사기는 “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의 “歌”는 문무왕릉비의 “哥”를, “旁”은 문무왕릉비의 “傍”의 글자를 각각 바꾸어 쓴 것이다. 물론 歌는 哥, 旁은 傍과 서로 의미가 같고 글자의 쓰임새가 서로 통하는 같은 뜻의 글자이기에 서로 바꾸어 써도 전혀 의미의 변화는 없지만 삼국사기의 글자는 문무왕릉의 비문 원문의 글자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준다.
① 또 삼국사기가 기술한 유조문 가운데 경계문 구절인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의 32 글자의 내용은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 책으로 완성하여 태자에게 남겼던 “帝範”(제범)의 유훈 속에 들어 있는 내용임을 저자는 새롭게 밝혀낸다.
② 또 유조문의 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 12 글자의 문장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구절을 도용한 표절임을 밝혀낸다. 삼국사기의 “율령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는 의미의 “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의 12 글자 부분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律令格式 或有不便於事者 宜依前敕修改 務當政要 구절을 도용한 표현임을 밝혀낸다.
③ 또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 전문 350 글자 가운데, 55글자의 만가시 표현 구절: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의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 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는 이 구절 부분은 위진남북조 시대 장재의 七哀詩(칠애시)를 차용한 표현임을 밝혀냄과 아울러 이 부분의 45 글자는 문장 구성 형식상 고려가 북방민족의 국가에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시대 후기 즉 송원대에 유행했던 “구구소한도”의 형식으로 표현한 사실임을 제기한다.
이와 같은 사실과 분석에 따라, 삼국사기 문무왕의 유조문 중 문무왕의 장례식 관련 부분인 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구절의 13 글자 부분, 그리고 만가 애도시 부분인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구절의 55글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들은 당태종 유조문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밝혀낸다.
위의 짤막한 요약 설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의 전체 350개 글자수 가운데 305여 글자가 문무왕릉비 비문원문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쓰여있다는 것, 또 그것은 다른 글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한 표절의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이에 저자는 삼국사기의 문무왕의 유조문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한 역사 조작의 경악할만한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당태종 유조문을 번역 설명함과 동시에 국사편찬위원회 (이하 “국편위”로 표기)의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 해석에 있어서 잘못된 번역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해석을 제시하여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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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문무대왕릉비 비문 연구-비문후면』
발행일 2020년 5월 30일 제1판 제1쇄
저자 추홍희
발행처 이통장연합뉴스 출판부
발행인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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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22,000원 ISBN 979-11-969291-2-1
쪽수 480 사이즈 국판 (14.8*21cm)
표지디자인 K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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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정희, “此碑人無知者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2] 조인영의 “雲石遺稿” 중 僧伽寺訪碑記, “北漢之南 有僧伽寺 其上峯曰碑峯 自京師雲從街迤北 見峯顚一柱 兀然如人立 俗傳麗僧道詵碑 今沒字云 歲丙子秋 秋史金元春語余曰 吾上吾上碑峯 碑有殘字 實新羅眞興王碑也”.
[3] 당고종 건릉의 述聖記碑 술성기 비문이 훼손되었고, 무측천 武則天(624-705)의 비문은 아예 모두 지워져버린 속칭 무측천의 無字碑무자비 상황을 참조하라.
[4]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
[5] 국편위 번역,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compare.do?treeId=010604&levelId=hm_111_0070.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 ……(전략)……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병자년(1816년, 순조 16) 가을 내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마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 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 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마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 해인 정축년(1817년, 순조17) 여름에 또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隷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완당집』권1, 고, 진흥이비고.
……(前略)…… 此碑人無知者,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 嘉慶丙子秋, 余與金君敬淵游僧伽寺, 仍觀此碑. 碑面苔厚, 若無字然, 以手捫之, 似有字形, 不止漫缺之痕也. 且其時日簿苔面, 映而視之, 苔隨字入, 折波漫撇, 依俙得之, 試以紙拓出也. 體與黃草碑酷相似, 第一行眞興之眞字稍漫, 而婁拓視之, 其爲眞字無疑也. 遂定爲眞興古碑,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其翌年丁丑夏, 又與趙君寅永同上, 審定六十八字而歸, 其後又得二字, 合爲七十字. 碑之左側, 刻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 又以隷字刻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阮堂集』卷1, 攷, 眞興二碑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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