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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문무대왕릉비 비문뒷면 21행-22행 해석

by 추홍희블로그 2021. 11. 13.

비문뒷면 21

 

□□□□□□□□□□□□□鴻名與天長兮地久

 

(岡而久照)
/金玉葉 永保)鴻名 與天長兮地久
사랑과 형제애를 황금처럼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히 닳지 않고 단단히 하여라
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히 빛나리라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와 한없이 오래된 지구와 같이!

 

통일 왕국을 건설한 위대한 영웅적 인물 문무왕의 이름이 무궁토록 전해진다는 것은 국가가 존속되어야 하는 조건을 담보한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국가가 계속 안정되고 계속 번창해 나가기를 기원하는 말인 金甌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다. 

()는 작은 컵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金甌(금구)金屬酒器 뜻하는 단어이고 또 비유적인 의미로는 국토, 國土完整 국토안정의 뜻이 있는 단어이다. 남사 朱異(주이)전에 양무제가 한 말 我國家猶若金甌 無一傷缺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여기의 금구는 국토가 견고하고 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금강석이 나오는 높고 깊은 산처럼 국가가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믿음을 전하고 있는 말이다. 甌甌永固(구구영고)는 컵이 줄줄이 늘어선 모양처럼 영원하다는 뜻이다. 묘지 속에 금구를 넣어둔 것은 구구영고의 믿음과 소망의 뜻이 들어 있다.

신라 당시는 봉건 시대였으니 부모자식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형제애 직계와 방계간의 결속 일가의 단합이 중요시되었다. 인류 보편적인 부자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우애는 오늘날까지 인간 사회의 행복을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보루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의 내용을 金枝玉葉(금지옥엽)의 뜻으로 보충할 수 있다.  ()()맥의 뜻으로 새길 수가 있기 때문에 (금강)은 금지(金枝)로 새길 수 있다.   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청나라 진몽뢰의 싯구에 玉葉宗支貴이 나오는데 이를 참조하면 그렇다.  玉葉(옥엽)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① 아름다운 나뭇잎을 표현하는 말 ② 양간문제의 《詠云玉葉散秋影에 나오듯이 운채(云彩)를 은유하는 말 ③ 玉牒(옥첩)과 같은 말로써 황족(皇家譜系) 당나라 소방의 《享太廟樂章金枝繁茂 玉葉延長구절이 등장하는데, “玉葉宗支貴의 표현의 예처럼 황가자손을 ⑤ 당 원진의 싯구 解拈玉葉排新句에서와 같은 뛰어난 재질의 종이 優質箋紙를 ⑥ 명당(明堂)의 처마 당첨(堂檐)을 ⑦ 從臣觀玉葉 方愿紀靈符구절에서와 같은 궁전을 뜻한다. 玉葉(옥엽)은 이들 뜻에 더해서 ⑧ 당 낙빈왕의 忘筌玉葉開싯구에서와 같은 의미인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 友誼深篤의 뜻을 갖는 말이다. 금지옥엽(金枝玉葉)은 오늘날까지 귀한 자식이나 또는 왕족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이 금지옥엽의 뜻을 살핀다면, 새로이 세운 나라가 영원무궁토록 강고하게 존속되고 또 자손들이 번창하게 뻗어나가서 형제애로써 더욱 결속하여 나라가 더욱 단단해질 것을 염원하는 소망을 담은 표현으로써, 비문 20행의 끝과 21행 시작 구절 사이의 □□□의 내용을 보충하는 말로써 金枝玉葉(금지옥엽)을 쓸 수 있다.   

 

岡而久照

무궁토록 빛나라의 의미에 어울리는 시구절을 찾아보면, 당나라 흘간유의 시海日照三神山賦(以耀輝相燭 珠庭燦然為韻)”에 나오는岡而久照”(강이구조)의 의미가 여기에 어울린다.

 

 

  鴻名

 

鴻名(홍명)은 큰 이름 큰 명성 큰 명예를 뜻하는 말로 大名, 高名 대명이나 고명이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사마상여전에永保鴻名”(영보홍명) 표현이 나오는데, “前聖之所以永保鴻名而常為稱首者用此-‘이전의 성군이 머무르는 곳이 영원토록 큰 명성을 보전하고 언제나 최고 인물로 일컬어지게 됨은 이로 인해서이다’-이라는 이 구절의 의미를 따라서      鴻名의 결자 부분을千秋萬代 永保鴻名”(천추만대영보홍명)으로 메꾸어 볼 수 있다.
 

永保鴻名-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토록 남으리라.  天長地久-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또 영원하리라!

 

與天長兮地久

 

天長地久”(천장지구)는 세월은 가도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는 뜻으로 노자도덕경 제7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이 진리의 말씀이 너무 진부해져서인지 오늘날에는 오히려 그 심오한 뜻이 가려지고 만다는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山高水長”(산고수장)의 깊은 의미가 있는 말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듯이, 또 보통사람들은 시장에 가서 콩나물값은 조금 깎으려고 하지만 500조가 넘어가는 나랏돈 일년 예산의 쓰임새에는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또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2의 이해에는 머리를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영원하다 우주 천지가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자기 혼자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 도덕경 제7장 구절의 영어 번역을 옮기면, The universe is long lasting.  The reason that it lasts for long is because it doesn't live for itself. 

노자의 분석과 같이, 성인은 자기 혼자 살려는-자생(自生)- 이기심이 없는 무사(無私)함으로써 불로장생할 수 있다. 우주만물은 서로 주고 받고 맞물려 돌아 가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 하늘은 높고 땅은 넓다!

 

님은 가고 하늘도 침묵하지만,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고 말하며 재회의 약속을 믿는 까닭은 꽃이 피고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도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칠월 칠석날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가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되듯이 우리 민족의 종교 사상의 기초인 것 그 까닭의 배경은 재회부활의 믿음에 있다.

 



()는 문장 연결조사이고 감탄사로 쓰인다. 혜의 표현법은 초사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아마도 사람의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초사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 혜()라는 낱말의 쓰임새가 들어가는 것에 있다. 

 

()자에는 더불어라는 뜻이 들어 있지 않다.  국편위는 兮地久땅과 더불어 오래리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틀린 번역이다. 이 문장에서 여()자와 혜()자는 문장을 끝내면서 천장지구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을 하는 문언조사, 감탄조사에 해당한다. 

 

천장지구라는 말이 묘지명에도 흔히 쓰이는 상투어구에 가깝다 보니까 문언조사를 넣어서 새롭게 가다듬은 것이고 또 그와 같이 문미에 쓰여서 감탄사 기능의 조사를 첨가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천장지구는 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영원하다는 의미로써 高山流水(고산유수)와 같은 표현이다. 하늘과 땅은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 수백만 년 전부터 존재했기에 그 얼마나 유구한 존재이며 또 그와 같이 앞으로 얼마나 몇 백만 년을 더 갈 것인지 그 누가 산술계산이나 할 수 있을텐가? 그만큼 영원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우린 기껏해야 백년도 못 사는 한갖 미물임이랴!  하늘과 땅 앞에서 할 말이 없지 않는가?  다만 엎드려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 밖에!

 

항우가 천하쟁패에 실패하여 영벽의 절벽에서 생의 마지막을 절감하면서 읊은 垓下歌”(해하가)의 외침 한 마디에도 그 표현이 들어 있다. “虞兮虞兮奈若何”: 고민되네, 고민되네, 내 어찌할꺼나? 여기서 ()憂慮(우려), 고민, 걱정된다는 뜻의 낱말이다. 항우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결단의 순간에서 머뭇거리며 읊었던 “To be or not be”,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에 대한 사생결단의 순간에서 주저없이 살아남은 후손들을 위해서 자기 희생의 결단을 내렸다. 왜 항우는 권토중래를 위해서 도강을 하지 않았을까? 충분히 강을 건넜을 수도 있었으면서도.

 

사마천은 항우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고 평가했는데, "글은 사람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면 된다-“書足以記名姓而已”-고 여기고서 천하를 무력으로 정복하려던-“欲以力征 經營天下”- 자기 인식의 부족함을 깨달아서였을까? 왜냐하면 항우는권토중래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의 방법론을 두고서 직면한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자결을 택했기 때문이다. 항우의 자기 희생의 결과 항우의 나머지 집안 식구들은 유방의 한나라 황실로 편입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항우는 패자로서 자기 희생의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천하 쟁패의 실패에 대한 스스로의 잘못 人事”(인사)의 책임을 진 것은 물론이고.  

 

천의인가? 인사인가?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To be or not to be”의 결단을 요구 받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여는 더불어, and, 뜻이 있고, 이런 예에 生死與共 있다. 한편 ()()와 같은 글자 의미로써 문미(文尾)에 쓰여 의문, 반문, 감탄을 나타내는 어기조사(語氣助詞)로 쓰이기도 한다. 논어 학이편에 이런 예문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자.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溫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공자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면 으레껏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공자께서 요구해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거기 사람들이 먼저 알아서 여쭙어 본 것입니까?- 求之與 抑與之與-  공자가 자애롭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에서 그런 정치에 관한 일을 들은 거겠지요. 공자께서 그것을 먼저 요구했다 해도 아마도 다른 사람이 요구한 것과는 달랐지 않았겠어요?-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이 문장에서의 억압하다는 뜻이 아니라 혹은,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문장 접속사로 쓰였다.  求之歟 抑與之歟?”- 요구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쪽에서) 먼저 준 것인가요? 이와 같은 예문과 같이, 여기서 and 더불어의 뜻으로 쓰인 말이 아니라 여의 뜻으로 의문을 나타내는 표시의문 어기조사語氣助詞 쓰였다.

 

21행 요약 정리


與天長兮地久”(여천장혜지구) 이 말을 국편위는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라고 번역 해석했는데, 이건 문장연결조사 감탄조사로써의 의미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어색한 번역에 해당된다.  자에는 더불어라는 뜻이 들어 있지 않고, 이 문장에서 여자와자는 문장을 끝내면서 천장지구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으로써 문언조사, 감탄조사에 해당한다. 천장지구는 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영원하다는 뜻으로 그 단순한 낱말 의미를 넘어서서 노자 정치종교철학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노자도덕경 제7장에서의 천장지구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고 새기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永保)鴻名-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토록 (천추만대까지) 남으리라.  與天長兮地久-하늘과 땅은 유구히 존재했고 또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

 

21

 

  鴻名-
(千秋萬代 永保)鴻名
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토록 (천추만대까지) 남으리라
與天長兮地久 하늘과 땅은 유구히 존재했고 또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

 

 

비문뒷면22

    卄五日景辰建碑    大舍臣韓訥儒奉

 

卄五日景辰

()情況(정황), 상황을 뜻하는 말로 年景, 景象 등의 말이 있다. 

()辰日(진일)을 말하고 吉日良辰(양진길일)이라는 말과 같다.  유자산의 주사원구가에서의 日至大禮 豐犧上辰표현이 상진을 길일이라고 보는 것을 말해준다. 

상진을 양진(良辰)이라고도 말하고 이 길일(吉日)의 표현하는 말로 佳辰(가진)이 있다.  송나라 응천장(應天長) 사에 恁好景佳辰이라는 표현이 나오니, 비문에서의 景辰景佳辰의 의미이다.  () 卄五日”(25)이 길일에 해당되었다.

음력 682 7 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682 9 2일이 되는데 이 날은 농력으로 (병진)일이었다. 따라서 경진(景辰) 길일에 해당되었다.

 

 

평양 남쪽 남포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 길일길시를 택일하는 5세기 초 당시 풍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음을 참조하라. 

1976년 발견된 남포 덕흥리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벽화 묵서에는 묘지의 방위각과 길지를 택하고-相地(상지), 길일을 택하고-擇日(택일), 좋은 시간대까지 정해 고르는-時選(시선)을 행하는 매장 풍습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 

 

周公相地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良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공 공자 무왕은 풍수지관을 경칭으로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번역은 묘지를 고르고 또 묘 쓰는 날짜와 그 시간까지를 길일로 택해서 모두 한결같이 좋았다는 의미이다.  또 이 구절의 앞에 나오는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乙酉묵서의 구절은 60갑자 세차 즉 목성의 공전주기 12년에 기초한 역법을 쓰는 태세신앙을 말해주는데 태세신앙은 곧 지신 신앙에 해당한다.  태세 지신은 목성의 운행주기를 따라 움직이고, 따라서 묘지나 건축 공사 등을 할 때 방위와 택일을 크게 중요시한 신앙이었다.  예전에는 건축 공사 등은 물이 흐름과 대지 기반 그리고 기상 여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 일이었으므로 방위 선택과 택일 선택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문무왕릉비의 건립 연도 추정

유희애는 다음과 적었다: “善德王陵下開耀元年金  撰名缺韓訥儒書碑斷損令存殘石四片案東國通鑑新羅文武王金法敏武烈王長子龍朔二年立開耀二年七月薨諡曰文武在位二十年”.  유희애는 문무왕릉비 건립 연도를 開耀 元年개요원년 즉 681-682년 사이에 비를 세웠다고 기재했다.  문무왕이 개요2년에 훙 서거했다고 적어 두었는데, 이 역사적 사실은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구당서 본기권5 고종하 개요원년 681 10월 기사를 보자.

冬十月 丙寅朔 日有蝕之 乙丑 改永隆二年 開耀元 曲赦定襄軍及緣征突厥官吏兵募等 丙寅 斬阿史那伏念及溫傅等五十四人於都市 丁亥 新羅王金法敏薨 仍以其子政襲位”.

개요원년 음력 10월달 정해일은 농력 서기 681 10 22일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2 7일이 된다.  개요원년 동10월 정해일에 신라왕 김법민이 서거했고 그의 아들 정이 왕위를 이었다고 적혀있다.  681년 음력 10 10일은 양력으로 11 25乙亥(을해)일이 된다.  따라서 문무왕릉 비문의 10 10일에 장례식을 치루었다는 구절은 구당서의 문무왕 서거일자와 실제로 거의 비슷한 날짜가 된다. 

그날 눈발이 날렸다는 해석 또한 한국에서 첫눈이 내리는 계절이 대체로 11월말경 또는 12월초 경이 되므로 당시의 기상 기후와도 거의 일치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기록한대로의 屬纊之後十日”(속광지후십일) 7 1일 운명했으므로 7 10일이 문무왕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이 아니라 겨울철 음력 10 10일이라고 합리적인 추측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문무왕릉 비문의 其月十日”(기월10) 681년 음력 10 10일로 추측된다.

 

당시 당나라 연호의 한해 시작은 10월 상달에 시작되었으므로, 요사이의 정월에서 12월 달력식으로는 햇수가 겹치게 보일 수 있고 또 재정이 시작되는 시기나 또는 계절 학기가 시작되는 시기가 태양력과 달랐다는 당시의 사정 때문에 훗날 사서 작성시 한 두해 차이가 나기 쉽다.  문무왕이 개요2년 즉 682년에 서거했다는 사실은 당나라에서 문무왕의 공식적인 국장 거행 시기에 당나라에서 조문 사절단을 파견했다는 그런 사실에 근거할 것 같다.  이런 구당서의 사서 기록에 의거하여, 나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문무왕의 장례식 날짜를 삼국사기에서 기재한대로의 7 10일이 아닌, 10 10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영호의 판독문은 삼국사기의 문구를 그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신빙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영호가 제시한 결자부분을 보충하는 문장 내용은 그 문장의 글자수가 비문에서 표기가능한 범위의 글자수를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고 또 이런 측면에서도 삼국사기가 기재한 문무왕의 유언문이 조작되었음을 시사해준다.

□□□□□□□□□□終成一封之上樵牧哥其上狐兔穴其傍
徒費資財貽譏簡牘空勞人力莫濟幽魂靜而思之傷痛無已如此之類非所樂焉屬纊之後依西國之式以火燒葬即以其月十日大

위와 같은 제시문은 52자이므로 비문에 새길 수 있는 최대 가능 글자수 44자를 훨씬 초과하는 문장이 된다.  따라서 이영호의 제시문은 그 근거가 미약하고 또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떻게 추사 김정희는 문무왕릉비 건립 연도를 잘못 추정하였을까?  앞에서 어떻게 추사 김정희는 비 건립 연대를 설명해 내는데 오류를 범했는지를 그 이유를 밝혀내는 설명을 기술했는데 그 부분을 참조하라. 

 

建碑    大舍臣韓訥儒奉

왕릉비석을 건립한 날짜를 적고 있는데, 그 부분은 마멸되고 떨어져 나가고 없어져서 정확하게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卄五日景辰으로 적고 있다.  25일 경진 길일에 이 비를 건립하다.      12관등 대사직 신하 한눌유가 명령을 받들어 완수하다. 

建碑    

건비 다음의 결자 부분은 立廟饗祭입묘향제라는 표현이 적절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문무왕대에 지었다는 천왕사가 입묘향제의 사실을 입증해 줄 것이다.  진서 양羊祐양우전에 平生遊憩之所 建碑立廟 歲時 饗祭焉 望其碑者 莫不流涕 杜預因名為墮淚碑의 표현이 나온다.  歲時세시는 일변 사계절을 뜻하는 단어이다. 

 

大舍
대사는 관등명으로 隋書수서 東夷傳 新羅 보면, 신라 관등 체제에서 제12위에 속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 신 김  이라는 관등성명의 기술 양식에 비추어 본다면 대사 신 한눌유 봉이 글자 앞의 공간에 관직명이 들어 갈 있을 개연성이 높기는 하나, 비문을 비석에 새긴 대사 신 한눌유의 관직 명이나 출신부가 어떤 것인지는 이 부분이 결자 또는 비어 있는 공간 부분이어서 정학하게 알 수는 없다.

진흥왕 순수비 중 마운령비에 나타난 수행명단 기록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데, 대략 대사라는 관직이 무슨 업무를 담당하였는지 대략 추측할 수 있다.

진흥왕의 국경 순찰 행차에 수행한 사람들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마운령 순수비

       
관직(직업) 출신부 이름 관등
사문도인 沙門道人   법장 法藏, 혜인 慧忍  
대등
大等
훼부
喙部
거칠부지 朼夫智 이간
伊干
    내부지
內夫智
이간
伊干
  사훼부 沙喙部 영력지
另力智
잡간
迊干
  훼부
喙部
복동지
服冬知
대아간 大阿干
    비지부지 比知夫知 급간
及干
    미지
未知 (급진부지 珎夫知)
대나말 大奈末
(
나말
奈末)
집가인
執駕人
훼부
喙部
방혜
方兮  ·
대사
大舍
  사훼부
沙喙部
영지
另知
대사
大舍
이내종인 裏內從人 훼부
喙部
몰혜차
沒兮次  
대사
大舍 ·
  사훼부 沙喙部 비호지
非尸知
대사
大舍
약인
?
사훼부 沙喙部 위충지
爲忠知
대사
大舍
점인
占人  
훼부
喙部
여난
與難
대사
大舍
약사
藥師
  마지차
䔍支次
소사
小舍
나부통전 奈夫通典 본피부 ? 가량지
加良知
소사
小舍
▨▨ 본피부 ? 막사지
莫沙知
길지
吉之
급벌참전
及伐斬典
훼부
喙部
부법지
夫法知
길지
吉之
이내 ○
裏內
  길지
吉之
당래객
堂來客,
  50  
이래객
裏來客
     
외객
外客
     
○○   사간 沙干
조인
助人
사훼부 沙喙部 순지
舜知
나말 奈末

 


봉은 드리다, 바치다의 奉上 뜻으로 명령을 받들어 모시고 그 주어진 임무를 삼가 수행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侍奉시봉하다는 누구의 시중을 들다는 뜻이고, 奉祠봉사는 祭祀제사, 奉祀봉사는 제사를 받들고 모시다 供奉祭祀 뜻이다.

 

비문 22행 요약

    卄五日景辰建碑  25일 경진 길일에 이 비를 건립하다
大舍臣韓訥儒奉 12관등 대사직 신하 한눌유가 명령을 받들어 완수하다

 

신라 17관등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등수 이름 가능한 신분
1 이벌찬(伊伐) 진골
2 이찬()
3 잡찬(迊湌)
4 파진찬(波珍)
5 대아찬(大阿)
6 아찬() 6두품
7 일길찬(一吉)
8 사찬()
9 급찬()
10 대나마(大奈麻) 5두품
11 나마(奈麻)
12 대사(大舍) 4두품
13 사지(舍知)
14 길사(吉士)
15 대오(大烏)
16 소오(小烏)
17 조위(造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