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庾信의 “哀江南賦” 애강남부의 구절 “楚歌非取樂之方 魯酒無忘憂之用 追爲此賦 聊以記言 不無危苦之辭 惟以悲哀爲主” 표현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楚歌非取樂之方- 초가는
초사가 그렇듯이 슬픈 구석 애절한 노래를 말하니 ‘슬픈 노래를 불러도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 없고’라는 뜻이 되겠다.
초가는 사기 고조본기에 적혀있듯이 항우의 역발산혜기개세 7언의 해하가, 한무제의 추풍사가 대표적이다. 편편황조 4언의 황조가 그리고 먼 훗날 조선 개창 이성계가 부른 대풍가 또한 형초인의 노래 초가에 속한다. 유방 항우 한무제 이성계 등의 무사들의
전승곡 같은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형초인의 노래 초사이기에 기본적으로 이별가 애상적인 슬픈 곡조를 띠고 있다.
초가의 대표적인 이릉의 이별가나 항우의 해하가가 그렇듯이 말이다. 유신이 이 구절에서 로주와
초가를 댓구적 기법으로 사용했으므로, 로주는 다음에서 설명하듯이 남에게 접대받아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이해하고서 이 구절 초가의 뜻을 음미해 보면 초가는 유신이 직접 부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유방이 애첩 척부인에게
“爲我楚舞 吾爲若楚歌” 당신은 초나라 춤을 추면, 나는
초가를 부르리라는 말을 보면 유신이 쓴 초가의 뜻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자신이 직접 항우의 해하가를 불러도 슬픔을 가눌 길 없다는 애처로운 비탄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이해된다. 나라를 잃고 해외를 유랑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비탄의 노래를 불러본듯, 한국전에서 패배하고서 애상곡 테너 엄정행의 “비목”을 불러본듯,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비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불러본듯 어찌 망국의 비탄을 씻을 수가 있겠는가?
魯酒無忘憂之用노주무망우지용은 ‘독한 술을 마셔도 수심 깊은 마음이 가셔주지 않으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노주를 ‘독한 술’로 해석하거나 또는 ‘남에게 술을 얻어 마셔도”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魯酒로주가 담백한 술이니 탁한 술 탁주보다는
더 알코올 농도가 높은 정종이나 위스키 같은 담주가 로주의 맛이고 또 그런 고급스런 술을 손님에게 내놓은 접대용으로 쓰이는 술로써의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담박한 술을 담주라고 하는데 공자의 노나라에서 생산된 술 노주가 달달한 담주에
속한다. 노주는 담박한 술이니 오늘날로 치면 청주 정종 또는 와인이나 위스키가 된다. 이러한 종류의 술을 魯酒노주라고 부를 때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은 손님이 왔을 때 내놓는 고급스러운 술이라는
느낌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이런 측면에서 “노나라의
술이 싱거워 한단이 포위되었다”는 장자의 거협胠篋편에 나오는 얘기인
“魯酒薄而邯鄲圍”노주박이한단위의 의미는 손님에게 박정하게 대하면 안된다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의
교훈을 담고 있는 말이다. 장자의 비유는 국가간의 외교술에 관련된 말이긴 하지만서도. 와인처럼 담백한 맛을 내는 술이 보다 고급스런 술이지 않는가? 박정희가
신민경의 슬픔 노래로도 외로운 마음을 달랠 길 없어서 담백한 위스키 술 외국산 시바스 리갈을 마셔도 상심을 달랠 수 없었던 그때그시절을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전쟁과 외교의 기본적 틀을 짜고 있는 이론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에서 밝혀 놓은 힘의 이론이다. 4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인간의
질투와 시샘의 본성을 결코 버리기 어렵다. 국가간에도 이런 본성이 숨어 있어서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커지는 것을 사전에 막을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기에 전쟁까지를 불사하는 것이다. 누가 먼저 치는가? 무력을 키운 스파르타가 상대방 아테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투키디데스는 파악해 냈다.
물론 사람의 숨어 있는 의도를 어떻게 간파할 수가 있겠는가?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말이다. 개인간에도
질투와 시샘을 어떻게 내색을 쉽게 하는가? 하지만 공작새가 화려한 장식의 큰 날개를 펴면 꼬리를 안쳐도
무슨 시그널인지를 알 수 있지 않는가? 사람의
마음 밖으로 나타난 행동의 양식이나 패턴을 보고서 그 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가설에 전제하고 예측해낼 수 있다. 날씨예보와 같이 꾸준한 기초 데이터가
쌓이게 되면 가설과 예측의 새로운 과학적 사고 방법론을 인간 사회 과학 연구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산업혁명 이후 사회과학도 비약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뒤르껨, 막스 베버, 콩트의 사회학의 개척과 발전은 가설과 입증의 자연과학
방법론을 알 수 없는 속마음을 간직한 인간들이 서로 살아가는 인간사회를 연구하는데도 적용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뒤르껨이 “자살론”을 발간하면서 사회학을 기초를 다져 놓게 되었는데 그 1897년 책을
지금 읽어봐도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마찬가지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또한 마찬가지이고, 심리학
분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신에 한층 인기를 끌고 있는 “뇌신경과학”
분야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 마음의 연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결과이다.
투키디데스가 밝혀 놓은 전쟁과 외교의 기본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상대방 세력이 크게 성장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면 사전에 그것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기 마련이다. 한민족의 중흥과 부흥이 명약관화해지니 상대방인 일본으로서는 사전에 그 장치를 제거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대책이 된다. 민족 중흥이 완성되기 전에 일본으로서는 미리 선수를 칠 필요성이 컸다. 스파르타처럼 전면전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 비밀리에 정보부를 동원하여 전쟁과 외교의 기본술을 실행해 내는 것이 가장 값싼 수단이 된다.
만약 박정희가 용기가 있었던 영웅적 지도자였더라면 주변국의
두려움과 질투를 교묘히 방어해 낼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게도 박정희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용기가 부족했던
풍운아이었다. 왜 용기가 부족했냐구? 절제가 부족했다는 말이다. 권력의 행사도 절제가 필요한데, 인간으로서 본성인 섹스 본능을 절제하지 못해서 망했다는 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인조의 9고두배로
남한산성이 무너지고 청나라에게 끌려간 환향녀들의 수가 공식적인 기록으로 봐도 50만명이 넘는데, 채홍사가 박정희 앞에 갖다 바친 숫자가 200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중 절색미모 윤정희는 지금은 치매라며? 아무튼.
그건 그렇고.
그래서 서양에선 소크라테스가 밝혀놓은 이래 용기의 개념
속에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시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주류적 해석이다. 스파르타 사람들처럼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국민들을 용기를 진작시키고
단련시키는 것, 그런 군사적 용기가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 서시나
양귀비나 4인방 7공주를 백다발로 갖다 바쳐도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처럼 절제할 줄 아는 것 그것을 진정한 용기라고 보는 것이다.
3국 통일의 영웅 문무왕 또한 그의 왕릉비문에 실용적 외교술의
자세를 후손들이 갖출 것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문무왕릉 비문 비문 앞면 17행의 “ 近違鄰好 頻行 首鼠之謀 外信” 구절이 그것인데 이에 대한 나의 설명을 참조하라.**
** 문무왕릉 비문 앞면 17행 해석
近違鄰好
결자 부분의 내용은 전후 문맥상, “不忍坐視近違鄰好”로 메꾸어 볼 수 있다.
鄰好인호는 이웃나라와 선린우호 善鄰友好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不忍坐視 불인좌시는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린우호관계를 위반하는-違 일을 근처에도 허용하지 않겠다 즉 요즈음의 제로-톨레랑스 정책처럼 조금이라도 위반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정책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근처에도 못가게 하는 不近違불근위의 정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단호한 정책도 뒤에 나오는 구절처럼 처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경할 수 있다는 외교 정책 유연성의 지혜를 병행한다는 말하고 있다.
頻行빈행은 병행竝行한다는 뜻의 단어이다. “百嘉備舍 群神頻行” (國語, 楚語下). 무엇을 병행한다는 말인가? 바로 수서지모를 병행하면서 선린우호 정책을 기조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선린우호 관계를 상대방이 먼저 깨뜨리는 것에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또 외교라는 것은 상대방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측면이 강하므로 상황을 판단을 경직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수시로 기조를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의 정책을 추진한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결자된 부분의 외교 정책 내용은 아마도 “外柔內剛”외유내강의 정책과 어떤 움직임의 배후를 중요시하게 취급하는 “螳螂捕蟬 黃雀在後” 당랑포선 황작재후의 외교 군사전략을 서술하고 있을 것으로 강하게 추측하고 싶다.
당랑포선 황작재후의 고사는 오월춘추에서 자세하게 취급하고 있는 외교 군사 정책의 기본에 속한다. 삼국사기에서도 취급해 놓고 있다. 성동격서 전격전을 보더라도 모든 군사 상황은 어떤 배후 없이 움직이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 군사작전은 손자병법이 말하듯이 상대방 적을 속이는 일이 기본인데, 이런 측면에서 바로 눈 앞에 전개되는 일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도와 음모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螳螂捕蟬 黃雀在后 당랑포선 황작재후
螳螂 捕蟬于前 不知黃雀 在其後 黃雀 捕螳螂于前 不知挾彈者 在其後.
나무 위의 매미 한 마리가 울고 있는데, 그 바로 뒤에는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덮쳐 물려고 하고 있고, 그런데 이 순간 사마귀 뒤에는 꾀꼬리 한 마리가 호시탐탐 사마귀를 잡아먹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사냥꾼이 이 새를 잡으려고 활을 쏘아 맞추자 새가 떨어졌고, 그래서 새를 주우려다 사냥꾼은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먹이사슬 고리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배후가 누가 있는지를 알아 차려 위험을 피할 수가 있다. 매미는 사마귀에게 먹힐 것 같지만 사마귀는 새에 잡아 먹힐 것 같지만 새를 잡았다고 좋아할 것 같지만 뜻하지 않는 함정에 걸릴 수가 있어 의도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하는 수가 허다하다. 이해타산의 계산을 재빠르게 잘할 지 모르지만 이익과 손해의 계산을 어느 시점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바로 자기 이익이 될 것으로 알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빼앗고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 것이라 해도 남에게 빼앗기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항상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경구가 아니겠는가? 사람의 눈은 뒤를 쳐다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잡아 먹히지 않을까? 사람 눈이 뒷통수에 달려 있다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수시로 뒤돌아보는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장자莊子의 山木산목편에 나오는 당랑포선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새겨보자. “睹一蟬 方得美蔭而忘其身 螳螂執翳而搏之 見得而忘其形 異鵲從而利之 見利而忘其眞 … 噫 物固相累 二類召也”.
그 때 매미 한 마리가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자기의 몸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데 또 사마귀 한 마리가 숨어서 매미를 잡으려고 하는 생각에 그 자신의 형체를 잊고 있었다. 거기에 까치 한 마리도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으니, 그 역시 자신의 참모습을 잊고 있지 않은가. 장자는 이들을 보고서 놀라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다, 우주만물은 본디 서로 맞물려 있고, 이익과 손해는 서로를 불러 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首鼠之謀
首鼠
수서는 수시 首施라는 단어와 같은 뜻이다. 쥐의 속성이 무엇인가? 쥐는 꾀가 많고 영리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실험실의 모르모트 심리학 연구에 단골손님으로 대우받고 있지 않는가? 쥐는 쥐구멍을 들어오고 나갈 때도 주위를 항상 살피고 경계한다. 이쪽저쪽 이리불쑥 저리불쑥 이리갈까 저리갈까 들어갈까 말까 단번에 결정해서 드나들지 않고 수시로 좌우를 살피고 행동을 결정한다. 수서양단 首鼠两端. 이런 쥐의 속성에 따라 首鼠수서는 주저躊躇하다의 뜻, 성급히 결정하지 않고 지연하여 다시 생각해 보는, 그렇게 좌시하고 관망觀望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표현인 “緩則首鼠 急則狼顧” 완즉수서 급즉랑고, 후한서의 "二虜首施” 이로수시 등이 그 예이다.
수서지모란 그런 쥐의 속성처럼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좌시하고 관망하는 지혜 즉 좌고우면 지연 정책을 쓴다는 뜻이다. 이런 수시 유연성의 정책은 정책의 근본기조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수서지모를 병행한다고 말한 것이다.
유신의 애강남부에서도 이런 수서지모의 지혜를 설파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但坐觀於時變 本無情於急難”. 시대 상황의 변화에 급히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앉아 좌시하고 바라보고, 갑자기 일어나는 재난상황에는 놀라서 허둥지둥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라-無情.
외교정책은 상대방의 숨어 있는 의도를 알아차리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아니된다. 당랑포선 황작재후의 경구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말이다. 적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고 또 세상 정세는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국내 내부를 확실히 챙기고 외부의 상황에는 유연하게 대하는 외유내강의 노자철학이 지극히 타당하고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外信 安之
外信외신 다음의 결자 부분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후 문맥상 어느 정도 유추해석은 가능하다.
선린우호 수서지모 당랑포선 황작재후 외유내강의 외교 정책의 기조하에서 당연히 외국에게 신임을 얻고 안심시키는 外信安之외신안지의 정책을 펼칠 것임은 분명하다. 우방은 우방답게 신뢰를 지속시켜 나가는 외교정책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이들 5개국이 각기 나라들이 위치한 지리적 상황은 서로 지구의 반대 끝이지만 왜 같은 나라처럼 서로 신뢰하고 국내외 안보 정보까지 상호 교류하는 신뢰체계를 형성 유지하고 있겠는가?
상대적인 관계는 유연성을 지녀야 성공한다. 외유내강은 개인 처세의 득도술만이 아니라 剛中柔外 외유내강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작동시켜야 함이 옳다.
문무왕릉 비문 앞면 17행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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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違鄰好- (不忍坐視)近違鄰好 |
이웃나라와의 선린우호 관계를 조금만 해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단호한 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
頻行 首鼠之謀 |
처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경할 수 있다는 외교 정책의 유연성의 지혜를 병행하였다. |
外信 - 外信(安之) |
(선린우호 수서지모 당랑포선 황작재후 외유내강의 외교 정책의 기조하에) 외국에는 신임을 얻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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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김춘추와 같은 전쟁과 외교 그리고 인간 본성의
약점인 자기 절제를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하의 비난을 받게 된 비운의 인물이었다. 과3공7이라고 변명하지 말라. 박정희는
주색잡기의 함정에 빠져든 사실을 깨닫지 못한 천추의 잘못을 범했다. 그리고 우방국의 신뢰를 확보해 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10.26 궁정동 총소리가 울리던 그 해 미국 대통령 카터가 방문했지만 카터는 주한미군
부대 병영에서 외박을 할 정도로 미국과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어찌됐건 주색잡기의
함정에 빠져들게 만든 원초는 일본이 제공하였다. Why? 박정희는 술과 여자가 아니면 외로움을 달래기가
힘들었는데 그건 아내가 이방인의 흉탄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아내 육영수를 저격한 범인이
문세광이라면 문세광은 비록 조총련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니 일본인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군의
본성을 잃게 만드는 원초적 본능 필살무기 중 하나는 미인계에 있다. 마타하리처럼 반간계 미인계를 쓴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정보전쟁의 기본술책이지 않는가? 주색잡기에 빠져들지 않더라도 적국의 방해공작은
뻔히 보일 정도로 흔하지 않는가?
하지만 천하의 대장군 이광은 분봉작위도 받지 못했고 결국
치욕을 받는 것 대신 차라리 자결을 택했다. 사마천이 웅변적으로 남겨 놓았듯이, 사람은
죽고 나서 평가받는다. 투키디데스가 입증해 놓았듯이, 사람들은
전쟁의 시작과 끝나고 나서의 평가는 달라진다. 측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 인간들은 불을 보고 구경할 때와 직접 화마가 자기집에게 닥칠 때의 대처는 분명하게 다르다. 그리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역사적 평가는 달라진다. 아무튼 사마천은
묻고 또 물었다. 죽음에 직접 직면해서 어떻게 죽었느냐로 사람은 평가받는다.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법을 지키는 절제가 용기라는 것을! 어떤 경우에는 절제와 용기의 관계가 시소오의 관계나 양날의 칼이라고 볼
지 모르지만, 전장터에서 포로로 잡은 부녀자를 겁탈하는 것이 사졸의 용기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빠리
망나니에 불과할 따름이다. 시쳇말로
갖다 줘도 못먹는 것이 차라리 보통 사람들의 용기이리라.
한편 왜 공자의 노나라의 술이 좋다고 알려져 있을까? 노나라는 잘 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문성추노”라는 유신의 구절이 분명하게 말해주듯, 맹자의 고향 추나라와 공자의 고향 노나라는 비옥한 땅에 역사상 걸출한 인물들 거의 전부를 배출한 천혜의 고장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술은 기뻐서 한 잔 슬퍼서 한 잔, 이래도 한 잔 저래도 한 잔, 마시고 또 마시는 것이 술이다. 그래서 한 톨에 먹고 사는 하층 노동자도
마시고 천하를 다투는 준조절충의 제후나 앰버서도 술을 마신다. 비록 박동진옹의 광고용 톤이긴 하지만 ‘우리
술은 좋은 것이여~~~’.
그런데 유자산의 경우를 보자. 박정희가 빠져 대의를 그릇치고 만 주색잡기
그것 인간본성의 나약함인 그 주색잡기에 유자산은 빠져들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신은 사마천만큼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유신은 楚歌非取樂之方 魯酒無忘憂之用이라고 말하고 이와 같이 “애강남부”를 지은 동기를 적어 놓았다. 유자산은 초가를 불러봐도 나의 기쁨을 찾을 수가 없고, 귀한 술을 대접받아도 나의 슬픔이 가셔지지 않았고, 그래서 과거를
회고하면서 망국의 한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애강남부를 지었다고 “追爲此賦 聊以記言”의 표현을 분명하고 써놓았다.
애강남부를 영어번역하여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받은 그래햄은
추위차부료이기언을 “So looking back I wrote this fu, That it might
serve as a record”으로 번역하였다.[1]
유자산이 사관은 아니었다. 유신은 문학 작품을 짓는 문관이고 도교의 제주이고 성을 수비하는 군사를
지휘하는 대장군이었다. 유신은 적국에 사로잡혀 실권자 군인들의 검열을 받고 있는 당시 유신이 처한 상황에서 사관이 기록하는 “記事”의
가치는 자신에게 주어져 있을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대신 자신의 가슴 깊이 묻어둔
피눈물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지만 그것에 망국의 한을 기록한 “記言”의 사료로써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예언을 안고서 애강남부를 지었지 않았을까 싶다. 한서 예문지의 “古之王者 世有史官 左史記言 右史記事”이라는 설명에서 알다시피, 국왕이 한 일을 중심으로 그 일지를 담당하고 기록하는 기사 담당 사관뿐만 아니라 국왕의 언행을
담당하는 기언의 사관을 각기 두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담아 낸 기록이지만 記言기언의 사료로써의 기능 즉 역사의 영역으로 인정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데 오늘날 학문의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상황에서 역사학 전문가로서 역사선생이나 역사연구자 역사학도 거의 대다수는 유신의 애강남부를 단순히 중국의 문학을 다루는 중문학 분야에 한정시키고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분위기인 것 같지만, 이와 달리 애강남부를 사필로써 이해하고자
하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유자산이 이제 말년에 접어 들어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이
사라진 지금 고국을 잊고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왜 나라가 망했는지를 회고하면서 그것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후손들이 통탄의 교훈으로 되새길
것을 내심 부탁하는 목적에서 비록 간접적인 전달방식의 수단이긴 하지만 賦부라는 수필 형식의 문학작품을 동원하여 애절한 망국의 한을 노래한 “애강남부”를 지었다는 창작 동기를 이해하게 된다. 역사학 저자들의 견해를 읽어보면, 역사학은 지나간 일을 기록으로 남긴 것을 사료로 여기고 그것을 연구한다. 역사는 지나간 일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2]
과거의 기록이 있는 이상 그것은 역사학의 영역내로 편입될 수
있는 가치가 필요충분하게 존재한다. 역사학의
가치로서 애강남부를 평가한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3] 애강남부를 읽어보면 비록 몇날 몇시에 누가 무슨 일을 하였다는 육하원칙에
따른 명확한 기사는 적혀 있지 않지만 애강남부 문장 전체를 통해 역사적으로 자세하게 이해하면 양나라의 시작과 멸망 그 과정과 원인과 결과를 현장감
있고 진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면 무엇이 역사학의 본령이란 말인가?
우리들은 잘못된 학교 교육의 폐해 때문에 역사를 단순히 연대기를 외우고 그 단순 지식의 습득 여부를 평가받는 사지선다형 시험 교육 방법이 역사학의 공부 전부라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거의 다수였다.[4]
유자산은 “追爲此賦 聊以記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러기에 역사 기록으로서 가치를 염두에 두고서 애강남부를 지은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추위차부료이기언의 구절 다음에 유자산은 애강남부의 내용이 “不無危苦之辭 惟以悲哀爲主”이라고 말하며 망국의 한을 기록한 비탄의 내용 애가일 것이라는 애강남부 글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달아 놓고 있다. 그래햄은 이 부무위고지사유이비애위주 표현을 영어로 “Not without words of fear and suffering, It is still, at the core, a lament”으로 번역하였다.[5]
애강남부는 유신 자신이 창작 의도를 분명하게 말한 바대로, “자신이 겪은 두려움과 고난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망국에 대한 비탄의 심정이 주된 내용”이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직접 겪은 피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그 고난의 편력을 회고하면서 적은 글이지만 그것을 단지 개인사로 치부하지 말 것이며 망국의 한을 통탄한 “悲哀”비애가 주된 내용이니 공적인 국사로써 승화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는 심정을 담은 글이다. 사람들은 폐부를 찌르는 말 그러한 진실한 이야기에 뭉클한 감동 감화를 받고 둥근 눈물을 떨군다. “危苦”와 “悲哀爲主”의 표현은 聲無哀樂論성무애락론의 저자 죽림칠현 혜강의 琴賦금부에 나오는데 혜강의 음악이론의 의미대로, 애강남부는 나라가 망한 통탄의 심정을 읊은 것 즉 비통한 국사國事, 시대적 고난을 적은 내용의 글이다. 따라서 國史 역사로써 편입되고 이해되어야 함이 타당하다.
미국의 시인 에머슨은 “온전한 역사란 없고 단지 자서전만이 있을 뿐이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런 측면에서도 유신의 작품을 역사로서 이해함이 타당하다. 역사는 수많은 사건에서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라면 라는 자서전처럼 일생 동안의 모든 일을 다 쓸어 담을 수 없고 발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위대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흐름을 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역사를 토마스 카알라일이 주장한 “위인전” the Great Man Theory 으로 부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취사선택이 결부될 수 밖에 없다.[6] 여기서 역사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가 속한 사회의 대변인”이라는 카아의 관점이 이해된다.
“임진왜란”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한국인과 일본인과 중국인이 평가하는 임진왜란의 역사는 다르게 씌여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명칭부터 서로 달리 쓴다. 중국은 “壬辰衛國戰爭” 임진위국전쟁이라고 전쟁 참전의 목적과 성격을 가미한 표현을 쓴 반면 침략을 일으킨 장본인 일본은 당시 천황의 연호를 사용하여 천황의 명령에 따른 정벌의 임무수행이라는 의미로 단순히 “文禄の役” 분로쿠노에키 또는 단순히 중국 진입이었다는 “唐入り”카라이리 이렇게 부른다. 일본어로 唐; 韓; 漢은 다 발음이 から로 같다. 명칭에서부터 자신들의 관점에서 보는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데 역사의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 세 나라의 각기 충돌되는 평가로는 학문은 유니버설이라는 명제를 만족시키기 힘들지 모른다. 역사는 후세에 의해 평가되지만 사건을 평가하고 역사책을 쓴 사람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도. 그렇다면 역사는 과학이 아니란 말인가?[7] 아니면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말로 해소될 수 있을까? “국경없는 의사회”에 속하더라도 여권은 있어야 그 활동이 가능하다.
망국의 한을 후손들에게 남긴 유신의 애강남부의 창작동기를 글의 전체를 통해서 파악하면 애강남부는 임금남의 “亡國大夫之血泪” 망국대부지혈루 평론대로 통한의 망국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망국의 한을 적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들이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 흔히 묻는 질문인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에 대해서 흔한 대답은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부합한다.[8]
영불간의 전쟁에 참전한 시라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영혼의 피”로써 쓴 글이라고 말하였는데, 애강남부는 직접적으로 육하원칙으로 쓴 글은 아니지만 원초적 진실이 담겨 있다.
비록 애강남부는 진인각의 평론대로 “古事今情 雖不同物 若于異中求同 同中見異 融會異同 混合古今”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섞어서 벌꿀 같은 보배를 탄생시키고 있어 구체적인 역사를 알지 모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는 글이긴 하지만, 1차대전 2차 대전에 참전한 아들이 고국의 부모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와 같은 그런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유신은 양나라의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탈출한 사람이다. 나라가 망할 지 모르는 암흑 속에서의 두려움과 절망감과 쓰라린 고통을 직접 생생하게 겪은 사람이다. 적국에 최후 교섭을 위해 떠났다가 압류되었고 이제 나라는 망해서 고국을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도 없는 신세가 된 유신은 비록 최고위층 신분과 타고난 문재로 인해서 적국에서 상응한 대접을 받고 목숨을 부지하고는 있지만 망국의 한을 어찌 달랠 수가 있겠는가? 오늘날은 소외와 귀속의 아이덴티티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지 모르나 군사부일체의 시대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자신의 부모의 죽음과 같이 엄중하게 여겨진다.
천하의 맹상군도 망국의 설움에 달구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는 옹문자주의 슬픈 거문고 비탄의 음악 망국지음의 이야기를 상기한다면 애강남부의 애가는 예루살렘의 함락과 바빌론 포로 생활의 고통 그 망국의 한을 적은 구약 성경의 예레미야 애가[9]를 능가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구약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인 것처럼 애강남부는 한국사의 내용으로 편입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충분하다. 따라서 애강남부의 내용의 망국의 비탄함을 간직한 수필이나 노래의 성격이 들어 있다고 해서 역사가 아니라고 그것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투키디데스가 말했다시피, 역사에 전설 같은 영웅담이 들어가지 않으면 무미건조하고 흥미가 반감될 지 모르나 역사책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 팩트를 있는 그대로 진실을 담아내야 한다. 망국보다는 난세 극복의 영웅적 인물 묘사를 선호하는 것이 정치가들이나 보통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도를 높일 수 있을 지는 모르나, 과거의 사실에 대해서 진실 그대로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인류의 영원한 유산에 대한 신성모독이고 학문적 방기이고 직무유기이고 양심의 방치에 해당한다.
피눈물이 나는 망국의 한을 회고하면 어찌 비탄하고 통탄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망국의 진실을 알기 때문에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으로써 가치를 생각해 보면서 유신은 그것을 극복해 내었을 것 같다. 사람은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모든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린다. 유자산이 “死生契闊”사생계활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다. 이승과 저승의 구분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최소한 우리들의 목숨은 언제 어디서 죽을 지 모르지 않는가? 아무튼 유자산은 국가와 사회 가계와 한 사람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를 애강남부라는 수필의 형식으로 “역사적 기록”으로써 남김으로써 유신은 자신과 사회와 국가와 역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했던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애강남부가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부라는 형식의 문학작품으로 써있긴 하지만 애강남부는 국가와 개인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통찰을 적은 글임으로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분석한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제국의 흥망사“ 역사서에 비견될 수 있으며, 로마제국의 역사를 서사시로 써낸 버질 Virgil의 “Aeneid” 아이네이스에 견주되며, 유자산이 극복해 낸 것은 사마천의 그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신은 사마천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냈기에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 이유가 아닐까? 만약 박정희가 역사의 의미를 깨닫고 프랭클 같이 “삶의 의미”를 찾았다면 어찌 궁정동 밤의 파티 주연 주색잡기에 빠져들
수 있었겠는가?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서도. 아무튼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모호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개인의 운명은 분리되기 어렵고 동일시된다.
다른 측면에서 한 마디만 보태보자. 망국의 통탄함을 적을 유신의 애강남부를 신라사람들은 어찌하여 통일 신라의 힘으로 승화시켰을까? 진흥왕 순수비에 적혀 있는 내용에서 유추되는 사실이지만 양나라가 망하고 그 유민들이 대거 신라로 유입해 온 이민 역사는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梁양나라가 망한 후 100년여만에 신라가 통일한국을 이루게 되는데, 국가의 멸망을 반사경으로 되새기게 되면 국가 부흥의 새로운 장을 써낼 수가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것과 같이 국가의 생존과 멸망 또한 그 경계가 모호하다. 모호한 경계 속 혼돈 속에서 진리가 찾아진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양나라 망국의 후손들은 깨우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신라가 통일 한국을 이뤄낸 배경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핀다는 자유민주주의론과 진흙탕 연못 속에서 연꽃이 핀다는 것, 모랫밭에서 사금파리를 깨낼 수 있다는 말은 서로 그 의미가 통하는 말이다. 삶은 동전의 양면 야누스적이라는 것, 결국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정신력 반응에 달려 있지 않는가? 도전이 아니라 응전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
투키디데스의 역사 책의 구절을 읽어보자. 거기 1장에 나오는 연설문을 인용한다,
“우리 선조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버리지 않고 견뎌내고, 운보다 지혜로써, 힘보다 용기로써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어 이 국가가 최고로 누리고 있는 오늘의 번영을 일구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선조들보다 못한 못난이가 되지 말아야 하고 대신 어떻게 해서든 적에게 타격을 가해서 훼손당하지 않고 온전한 나라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될 것이다.”
나는 사마천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내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망국의 한을 글로 남긴 유신의 글들을 통해서 문무왕릉의 비문을 복원해 낼 수 있었다. 통일 영웅에 대한
나의 복원 작업은 고난한 과정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하늘은 침묵하지만 나의 “김소경”에 부치는 글이 사마천의 임소경에 보내는 편지의 의미 그리고 유신의 애강남부의 의미와 같은 선상에 있기를 고소원한다. 나의 글은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순수함과 성스런 인격체로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어떤 거짓과 꾸밈이 없이 오로지 진실만으로 글을 쓰고자 했다. 내 글쓰는 손은 사람들 영혼 위에 임재하신 크나큰 하나님의 선하신 손끝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믿으며 나의 부족함과 세상을 향한 존중감을 항상 깨우치고
있다. 비록 장지명산과 운대에 보관하여 그 취지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다 마침내 전국적으로
알려지리라는 사마천 같은 예언은 장담할 수 없겠으나 사람 많은 시장통에 내걸려 이 몸의 불효와 어거스틴의 원죄를 씻을 수가 있다면 어찌 여한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80:20 사회, 20/20 인간의 조건에서, 사마천이 말한 “士爲知己者用 女爲說己者容” 사위지기자용 여위설기자용,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여자는 자기를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위해 용모를 꾸민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물론 현대의 남녀평등시대에서 어찌 남녀간을 구분하고 가릴 수가 있겠냐만 어찌됐든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원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마슬로우의 인간본성 단계이론이든 아니면
오로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 주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건 아니건 말이다.
“楚歌非取樂之方 魯酒無忘憂之用 追爲此賦 聊以記言”. 애수의 소야곡 비가인 초가를 불러봐도
기쁨을 찾을 수가 없고, 귀한 술을 대접받아 마셔도 망국의 슬픔을 달랠 길이 없고 해서 자신이 살아
온 과거를 회고하면서 망국의 한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애강남부를 지었다고 말한 유신의 고백록 또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모호한 경계에 있는 우리들의
전통적 인생관에 비추어 조상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사마천의 선언을 따라서 나의 지난한 작업의 동기와 목적을 말한다면
투키디데스의 말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역사를 쓰면서 영웅담을 배제하면 듣기에는 흥미가 덜할 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건 또 인간 본성 때문에 같은 일이 반복되거나 혹여 그것과 유사한 일이
일어날 지에 관해서 진실 그대로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유용하고 값어치가 있다는 평가를 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어떤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역사 전체를
통해 인류의 영원한 유산으로 남도록 씌어졌다.”
[1] Graham, w., “Yu Xin Ai Jiangnan Fu Lament for the Sout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2] 역사는 기록으로 남겨진 recorded sources 자료만이 아니라 구술이나 노래의 형식으로 전승된 것 또한 역사에 포함된다. 호주의 원주민은 4만년이 넘게 구전되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3] 노경희, “유신庾信의 역사의식과 문학적 상상력- 애강남부哀江南賦 론論”, 중국학보 79권0호 (2017), 3-28.
[4] 지식을 얼마나 많이 습득했는지에 주안점을 두는 시험 평가 학습 모델 또는 주입식 강의 전달 교육 또는 방식 반복적 외우기 학습 방법론과 차별되는 탐구 학습 모델-inquiry based learning을 말한다. 탐구학습 모델은 교육학에서의 존 듀이 경험적 모델을, 실제적으로 영국식 교육방법론으로 이해된다. 탐구 학습 교육 방법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조하라. National Research Council , “How Students Learn: History, Mathematics, and Science in the Classroom”, National Academies Press, 2005.; Alison Kitson, A., and Husbands, C., “Teaching and Learning History 11–18 Understanding the Past”, Open University Press, 2011.; Lee, V., “What Is Inquiry-Guided Learning?”, New Directions for Teaching and Learning no. 129, Spring 2012 https://www.aacu.org/sites/default/files/files/InquiryGuidedLearning.pdf.; 유투브 “What is Inquiry-Based Learning?”, https://www.youtube.com/watch?v=QlwkerwaV2E.
[5] 각주 1.
[6] 에머슨의 표현은 "There is properly no history - only biography.", 카알라일의 표현은 “The history of the world is but the biography of great men.”
[7] 역사학이 아트인지 사이언스인지 여부에 대한 교사들의 견해에 대해서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Yilmaz, K., “Social Studies Teachers’ Conceptions of History and Pedagogical Orientations Toward Teaching History”, The University of Georgia, Athens, 2006.
[8] Arnold, J., “Hist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Devine T., “The Scottish Nation: A History, 1700-2000, Penguin Books, 2001.; 사마천, “태사공자서” “史記”; 이러한 책을 읽고 기본적인 나의 생각을 해봤다. 다음의 스턴스의 설명을 참조하라. 스턴스 열거: History helps us understand people and societies, History helps us understand change and how the society we live in came to be, The importance of history in our own lives, History contributes to moral understanding, History provides identity, Studying history Is essential for good citizenship, History is useful in the world of work., Stearns, “Why Study History?” (1998) AHA https://www.historians.org/about-aha-and-membership/aha-history-and-archives/historical-archives/why-study-history-(1998).
[9] 구약 성경 예레미야 애가哀歌 The Lamentations of Jeremiah, 에스겔 The Book of Ezek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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