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장 제7막
가슴에 불타는 복수심
어떻게 복수에 성공할 것인가?
영웅의 조건
아마도 맡은 임무가 그토록 어렵지 않다면 영웅은 탄생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영웅의 한자 英자는 우리가 흔히 꽃부리 영 글자로 훈음을 하기에 英자의 의미가 용기 courage라는 뜻을 흘겨 버리는 우를 범하기 쉬운데 영웅의 英자의 의미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용기를 지닌 사람은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무서움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내는 사람을 지칭한다. 영웅 英雄이란 단어는 고대에서는 瑛雄 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였다. 구슬이 빛내는 광채는 갈고 닦아서 나타난다. .따라서 영웅은 모든 간난을 무릅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난을 극복하고 끝내 승리를 쟁취해 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불평불만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영웅은 시대가 만들어 탄생시킨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영웅적 지도자는 그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갈고 닦아서 구슬처럼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본다.
조셉 캠벌은 신화의 연구 방법을 통하여 영웅으로 탄생되는 영웅의 조건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데 거사를 계획했지만 그것을 이뤄낼 현실의 자원과 토양은 너무나 척박하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또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적의 경계는 삼엄하고, 아군의 무리들은 실기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늘어나는 가운데 계획한 일의 성공 여부에 대한 불안한 심리는 더욱 커진다. 이 때 지도자는 어떤 자세로써 부하들을 설득시키고 적의 경계심을 따돌릴 수 있는 묘안이 있을까? 적을 속이고, 자신까지를 속일 수가 있을까? 만약 탄로가 난다면? 전쟁의 승리는 사람, 자원, 전략의 이 3가지 주 요인을 어떻게 잘 동원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는데.
충신장 제7막
충신장 제7막의 무대 배경은 유곽들이 자리잡고 있는 교토의 기원에 위치한 ‘치리키 다방’이다. 인간의 색욕 본능이 여지없이 벌어지는 질펀한 곳이 이 지역 아닌가? 식욕과 색욕 본능이 나부끼는 이곳은 기생을 옆자리에 데리고 술판과 도박판을 벌이며 유흥을 즐기고 노는 곳이다. 술과 여자와 도박이 판치는 이곳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의 현장을 보여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곳에 숭고한 의지가 숨어 있다면 과연 그것을 믿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인간 세상은 진흙 속의 연꽃이 피어나듯이, 완전한 유토피아가 아니고, 질펀한 시궁창같이 디스토피아의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어느 누가 진흙 속에 연꽃을 피워내는 주인공이 될 수가 있을까?
지난하고 간난한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현실의 어려움을 참고 그것을 극복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서 이러한 조건의 성취할 구체적 인물의 영웅담을 잘 알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와신상담’의 고사성어로써 잘 알려진 월나라와 오나라의 국왕이었던 부차와 구천 간의 복수극이다. 충신장 제7막의 줄거리는 바로 이 와신상담의 고사에 그대로 어울린다.
유라노수케는 적의 감시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기온의 유곽에 혼자 진을 치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있다. 이러한 방종에 빠진 유라노수케는 자신의 부하로부터 그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왜 유라노수케는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까? 복수심에 불타 복수를 즉시 감행해야 한다는 부하의 의견에 대해 유라노수케는 반대하고 복수극을 포기하였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결정은 매우 심각한 고민 끝에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보자. 목숨을 담보로 기도한 쿠데타가 실패하면 바로 처형당할 것이고,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할복의 처벌을 받게 될 위험이 큰 일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의 일에서 어떻게 성공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에서 사람의 목숨 가치는 각자마다 각기 다른데 어찌 함께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마다 갚을 은혜가 다른데 어찌 목숨을 일괄적으로 버릴 수 있다는 건지 회의감에서 그만 두었다고 유라노수케는 말한다. 죽음의 가치가 각기 다를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죽음을 강요하는 쿠데타 계획을 실행할 수 없다는 유라노수케의 견해인 것이다. 이런 견해에 처자식의 입에 겨우 풀칠만 하고 살아갈 정도의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받지 못했던 최하급무사계급 아시가루로써 근무했던 헤이에몬이 반박한다. 겨우 5냥밖에 받지 못하는 자신과 같은 최하급무사나 일천오백석의 최고 녹봉을 받는 가신의 우두머리인 유라노수케나 주군에게서 받은 은혜에 있어서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이다. 봉건 신분 질서는 매우 엄격하게 정해져 있기에 자신과 같은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은 결코 높은 무사신분과 동렬에 나설 수는 없겠으나 ‘사람의 목숨은 한 번뿐’ 임으로 받은 은혜에 대해서 똑같이 보은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다음의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적정의 동향에 대한 최신의 정보를 담은 죽은 주군의 미망인이 보낸 편지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아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 때 유라노수케의 동태를 염탐할 목적을 띤 적의 무리 중 구다유와 반나이가 이치리키 다방으로 살며시 들어온다. 유라노수케는 유곽 방 속에서 이 밀서를 읽고 있는데 오카루가 이층 난간에 숨어서 반사되는 겨울을 통해서 편지의 내용을 훔쳐 읽는다. 한편 마루판자 밑에서는 구다유가 그 편지를 훔쳐 읽고 있다.
정보가 새면 일이 그르쳐진다는 병가지사를 모를 리가 없는 무가의 세계에서는 비밀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그 새어나간 정보를 습득한 사람 모두를 없애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 목숨을 담보로 비밀거사를 꾸미고 있는 비밀결사단체에서 만약의 비밀 누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가혹하리만치 원리원칙을 추구한다. 헤이에몬은 오카루의 오라버니인데 그는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원리원칙대로 사랑하는 친누이의 목숨까지 요구하는 단호함을 보인다. 오카루에게 죽어야 할 잘못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의 밀서를 훔쳐 본 죄라는 것이다. 자객은 생사를 담보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므로 (“身の上の大事とこそはなりにけり”, 충신장 제7막 중) ,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가차없이 죽게 될 것이므로, 오카루 또한 비밀을 안 이상 이제 죽을 목숨일 것이니,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오빠로부터 지금까지의 일어난 일 가운데 관련된 모든 비밀을 들어 알게 오카루는 오빠를 위해서 자기가 자결하겠다고 눈물을 흘린다. 헤이에몬과 오카루의 이 대목은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에서의 자객 섭정의 이야기와 큰 범위에서 닮은 것 같다.
유라노수케가 유곽에서 방탕한 행동을 하며 놀아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 때의 같은 가신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적진의 스파이가 된 구다유가 유곽으로 찾아와 유라노수케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자: “야아, 유라노수케, 바보같은 행동을 하는 척 시치미 떼지 말게나. 그대가 하는 일탈된 방종의 행동들은 실제로는 복수를 하기 위한 술책으로 보이는구만.” 상대방으로부터 이렇게 반박을 듣고,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지 모를 위기상황에 처한다면 이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처할 텐가?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복수극의 과정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이 일어나는 지를 유라노수케가 말해준다. 적의 의심을 회피하기 위해서 주군의 제삿날 적이 던져주는 오징어 고기를 선택의 여지없이 냉큼 받아 한 입에 씹어 삼켜야 하는 그러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힘든 고비들을 끝내 감수해 내는 유라노수케이다. 상대방의 수작을 그대로 받아 들여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행동을 보일 때 비로소 상대방이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므로, 즉 빨간 오징어는 주군을 상징하는 고기이므로 부모의 제삿날에는 절대적으로 금식하는 보통사람들처럼 행동할 것을 예측해서 구다유가 술수로써 건넌 것이었으니, 구다유처럼 음흉한 사람마저 할 말을 잃고 꼼짝없이 속아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를 통해서 보면 유라노수케는 세상의 비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거사 계획의 성공에만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속내에 감추어진 생각을 알 수가 없는 세상 사람들은 ‘그도 별 수 없이 주색잡기에 빠질 수 밖에 없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라는 등의 이유로 비난하지 않았겠는가? 혈서로써 맹세한 비밀 결사 조직의 부하들마저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게 될 때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차마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어려움을 유라노수케는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었을까?
이럴 때 유라노수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유라노수케는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스스로 밝힌다.
“구다유, 넌 사자몸 속의 기생충처럼 같은 놈이다. 주군에게 많은 봉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다른 혜택도 크게 받았던 너였음에도 불구하고, 주군의 적에게 달라붙어 적의 스파이가 되어서 우리들에 관한 정보를 몰래 염탐하고 거짓 정보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정보를 온통 갖다 바쳤다. 우리들 40여 무사들은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자식까지 이별하고 심지어는 평생을 같이 해온 아내까지 유곽에 팔아 넘기기도 했다. 그것은 오로지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선 순간부터 온종일 우리들의 머리 속을 차지한 것은 주군이 할복자살을 했던 그때와 그때 힘없이 당한 분노의 눈물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들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마음과 온 몸이 후벼질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 왔다. 특히 오늘밤은 주군의 기일 제삿날인데, 내가 부정을 탈 온갖 상스런 말들을 다 내뱉게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선 극도로 자제심을 갖고 신중하고 더욱 삼가는 마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런 내 면전에다 감히 어육포를 던질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내가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거부하지도 못할 것임을 알고서 느꼈던 격심한 마음 속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조상 삼대에 걸쳐 섬겨온 주군의 기일 날 내 목구멍에 고기를 삼켜 넘길 때 내가 느낀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내 사지와 온 몸 전체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고 내 몸 속 사십사개의 뼈가 아스러지고 부셔지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에이, 지옥에나 떨어질 사악한 악마 같은 놈아!”
유라노수케의 “折節下士, 致膽思嘗 절절하사 치담사상”의 자세와 행태 는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바로 ‘와신상담’의 역사적 내용이었다.
‘절절하사 折節下士’는 삼국지 위지 원소전에 나오는 구절인데, 비록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유능한 현인에게는 자기 몸을 낮추고 굽혀서 절을 하며 예를 갖추고 모신다는 ‘경현하사 敬賢下士’의 뜻인데, 이와 비슷한 말로는 구현하사 求賢下士 예현하사 禮賢下士 겸공하사 謙恭下士 등의 표현이 있다. ‘치담사상 致膽思嘗’은 바로 ‘와신상담 嘗膽卧薪 (司馬遷《史記・越王勾踐世家》:“越王勾路反國 乃苦身焦思 置膽于坐 坐臥即仰膽 飲食亦嘗膽也”)’의 역사적 내용을 말한다.
유라노수케는 역사상 부차와 구천이 와신상담의 역사 내용 대로 간난신고를 참고 또 참아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바대로, 구천은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서 7년 동안이나 땅바닥에 거적을 깔고 밤잠을 자고, 쓰디쓴 돼지쓸개를 입맛에 다시면서 어려운 날의 고생의 의미를 잊지 않고 되새겨가며 갖은 고난을 극구 참아 냈다. 보통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유라노수케는 와신상담의 고행을 끝내 감당해냈던 것이다. 오로지 복수를 성공시키기 위한 일념으로써.
하지만 유라노수케는 단지 원한을 갖고서 복수를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제9막에서 오자서와 자객열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미리 살짝 얘기를 맛본다면, 오자서는 고관대작을 지냈으나 국왕에 버림받자 원한에 사무쳐 자기 나라까지를 저주해가며 처형되었던 인물이었다. 유라노수케는 말하길, 자기가 삼은 충신의 모델은 오자서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사마천의 사기 “오자서열전”에 와신상담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라노수케가 삼았던 충신의 모델은 사마천이 칭송해 마지 않았던 자객열전 중의 한 명 바로 그 예앙이었다.
단지 원한에 맺혀서 쓸모없이 죽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리는 끝내 살아 남아서 즉 자신이 죽기 이전에 주군이 남기고 간 빚을 갚고 죽음을 택할 때 보다 의미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유라노수케는 그러한 특별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어려움을 감당해 낸 것이다.
우리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특별한 일을 성취해 낼 수 있을까? 빅토르 프랭클의 ‘삶의 의미 철학론’이 주장하듯이, 아마도 그것은 힘들지 않을까? 이러한 삶의 목적론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한다면 성공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은 희박할 것임은 분명하지 않는가?
유라노수케는 계획한 일을 성공시키고자 불타는 복수심을 마음 속에 감추고 갖은 어려움을 마다 하지 않았던 그 같은 인내력을 실천해 낸 영웅적 인물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충신장 대사에서, ‘중국에 예앙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유라노수케가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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