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장 제9막의 주요 내용
충신장 제9막은 혼조와 그의 아내와 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제9막 대사에선 오늘날 경제 용어로 정착된 ‘눈사람 효과 snowball effect’를 떠올리는 눈 뭉치를 쌓아 올리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그 의미가 설명된다. 사람이나 돈이나 최소한 뭉쳐 모여야 보다 더 큰 일을 이룩할 수가 있다. 처음엔 미약하지만 나중엔 이자에 이자가 붙고, 사람이 사람을 낳아서 맨 처음과는 단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효과를 가져오는 복리 효과 또는 풍선 효과-인간 사회는 여러 사람이 서로 뭉쳐 모여 함께 일을 도모할 때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얀 설경에서 사생결단의 회맹의 약속을 하는 장면이 더욱 선명하게 보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9막의 이 장면은 도원결의 桃園結義 또는 사기의 자객열전에서 거사자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고 난 후 그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비장한 각오로 장도에 오르는 모습이 연결된다.
한편 제9막은 가부키 공연에선 중요하게 취급되는 단막은 아니다. 제9막의 내용은 때론 생략되기도 한다. 아마도 생략되는 이유는 전체 11막의 내용을 모두 동일하게 배분할 수 없는 공연 시간의 제한에 있겠지만, 다른 이유 하나는 혼조의 아내와 딸 그리고 유라노수케의 아내 즉 여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고, 또 부모가 자식을 줄이려고 칼을 내리치는 장면 등은 자객의 복수극이라는 충신장의 주제에서도 조금 가혹한 측면 등으로 여겨지는 등의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제9막에서 충신장의 주제를 저자가 직접적으로 암시한 가장 중요한 구절이 등장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써 제9막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대목으로 놓쳐서는 아니될 것이고 또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충신장의 주인공을 통해서 진정한 충신의 모델을 추구하고 제시하였다면 본다면, 충신장의 저자가 제9막에서 충신의 귀감은 “오자서가 아니라 예앙” 이라고 분명하게 밝혀 놓은 단언을 결코 가볍게 취급하거나 그냥 무심코 넘겨서는 아니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자서는 국왕 앞에 간언을 올리고 거사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처형된 춘추전국시대 인물인데 그가 죽음의 치욕을 받을 때 비웃음으로 응수하며 죽어 간 모습에서 오자서를 충의의 모범으로 여길 여지가 충분할 지 모르나 즉 막부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부지해주는 관학이 유학이었음을 볼 때 유교에서 충의의 귀감으로 여겨온 사람이 오자서일지 모르겠으나–(우리나라에서 성삼문 박팽년 등의 사육신이 사지가 오분팔절되며 처형될 때 비웃음으로 죽어갔는데, 쿠데타에 실패한 사육신을 충의의 귀감으로 여겨왔던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해 보라)-충신장이 의도하는 충신의 본보기는 예앙이고, 또 그 예앙같은 역사적인 인물에 유라노수케가 해당된다고 단언을 내린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오자서나 우리나라의 사육신은 계획했던 쿠데타에 실패한 인물이기 때문에 충의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 반면 예앙과 유라노수케-1701년의 아코 사건의 주인공-는 계획한 거사를 성공시켰으므로 충의를 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거사를 계획대로 성공시킨 것 즉 적을 죽이고 나서 자신이 스스로 죽는 것과 적을 죽이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서 죽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고다미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교토의 교외 지역 야마시나에 위치한 유라노수케의 집-혼조의 딸과 유라노스케의 아들이 약혼을 한 사이이니 고다미 신부의 시갓집이 되겠다-에 도착한다. 하지만 리키야의 어머니는 파혼을 요구하고 혼인식을 거부한다. 그의 남편과 아들은 내일 죽음의 전장터로 떠날 운명-유라노수케가 집 뒷마당에 눈으로 오층 석탑을 두 개 만들어 놓은 의미가 바로 그것을 암시한다-이기에, 젊은 처자를 평생 독수공방 미망인으로 보내게 할 수는 없을 터, 그러니 약혼자가 불행해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심정에 차라리 파혼하는 것이 낫다는 강경한 오이시의 주장에 고다미는 그에 대한 사랑을 변함없이 지키겠노라고 응수하며 만약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강경하게 반발하고, 도나세 또한 딸을 못나게 키워서 또는 집안이 미천해서 신부를 거부하는 걸로 잘못 여겨서 차라리 자기 손으로 자식을 죽여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강경하게 나온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고다미는 파혼하면 어머니의 손에 원망없이 깨끗하게 죽겠다고 단호한 결의를 보이고 이에 도나세가 그러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며 칼을 높이 쳐드는데, 이 극적인 순간 삿갓을 쓰고 피리를 부는 허무승이 나타나 ‘잠깐!’이라는 말로 칼을 멈추게 한다. 이 피리 부는 스님은 변장을 한 혼조이었다. 충신장에서 변장의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아마도 손자병법-닌자 忍者-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유라노수케의 아내는 혼조가 주군이 모로나오를 칼로 내리칠 그 때 결사적으로 말리지만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혼조가 주군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혼인의 조건으로 혼조의 목을 요구한다. 남편이 직장을 잃고 실의와 좌절의 낙오에 빠지게 된 원인이 혼조에게 있으니 혼조가 원수라는 것이다. 원한과 비탄을 가져오게 만든 원수의 목을 가져오면 그 대가로 혼인을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허무승은 이 세 여자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었고, 그래서 무협지 영화의 전형적인 장면과 같이, 떨어지는 칼날에 사람의 목숨이 달아날 지도 모를 위기의 찰나 잠깐!만을 외치며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혼조는 진행되는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전후 사정을 모두 간파하였고 그리하여 자신의 목을 기꺼이 내놓겠다고 말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는 말 답게, 뛰어난 충신의 가문에 사랑하는 딸을 혼인시키는 것이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마땅하다는 견해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 것이다. 혼조의 아내도 딸과 같이 죽겠다고 나오는 강경한 태도를 꺾지 않았는데 혼조 또한 딸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비치는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우리말 표현은 일본에서는 “개구리는 올챙이에서 나온다” 는 숙어 표현과 같은 뜻이다. 유라노수케의 아들인 리키야는 명문 가문의 전통을 지닌 멋진 무사이고, 고다미 또한 무사 가문의 아름다운 딸로서 서로 백년가약의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세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부모들 사이에 일어난 잘못된 일 때문에 서로 원수지간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유라노수케는 결국 혼인을 허락하는데, 그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인연은 인연이고 한은 한이다 君子は其罪を惡んで其人を惡まずといへば 縁は縁恨は恨と” 는 논리로써 자식의 혼인의 문제를 부모들 간의 과거 인연의 문제로 연결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어차피 죽음의 전장터로 나서는 마당에 챙겨야 할 특별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논리로써 자식들간의 혼인을 허락하고, 자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비록 하룻밤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지막 밤을 함께 나누도록 허락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는 논리는 공총자의 형법론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데서 출전한다. (“古之聴訟者、悪其意、不悪其人”). 사람을 죽이는 자객의 행위를 어떤 측면에서 보아야 할까? 형법률이 완성된 현재의 법치국가에서는 어떠한 의도에서건 살인이 정당화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좌와 벌”에서 아무 쓸모작이 없는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병든 노파를 죽인 사람의 도구화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또 전쟁에서도 살펴야 할 적법절차가 존재하는 거고. 하지만 전시상황이었던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에선 살인죄에 있어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것 즉 살인의 저의, ‘의도’가 보다 중요시 취급되었다.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는 자가 승리하는 인간 사회의 삶과 죽음의 틀에서 벗어난 특수한 상황에 놓인 때이다. 이와 같은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자객은 분명한 살인 목적을 갖고 살인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이고, 또한 사마천의 사기에서의 자객열전에서 평화가 유지되는 조말의 경우를 제외한 네 명의 자객들은 의도한 목적을 달성했든 못했든 모두가 죽음의 대가를 동시에 치루었다. 마찬가지로 충신장에서도 불의한 사람을 처단하고자 한 계획 그 의도한 목적을 달성했던 46인의 의사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에는 이, 살인에 대한 살인이 결코 정당화되기 힘들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다시 제9막의 줄거리로 돌아가서.
혼조는 자객열전 형가 전에서의 번어기처럼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목표를 성공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기 목숨까지를 희생할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혼조는 유라노수케가 거사를 실행하기 전에 가장 결정적으로 찾고 있던 모로나오 저택의 도면을 건넨다. 형가가 진시황제의 암살을 시도할 시 숨겨간 최후의 무기는 칼과 지도이었다. 작전을 성공시킬려면 적의 동향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경비가 삼엄한 적진을 어떻게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바로 적이 거주하고 있는 성채에 관한 도면이었다. 도면없이 집을 지을 수가 없다. 도면은 군사 지도에 해당한다. 로드맵-지도 없이 군사 작전이 가능하지 않다. 그만큼 혼조가 건네 준 모로나오 저택에 대한 정보가 담긴 주택 도면은 가장 결정적인 정보에 해당된다. 어떻게 적의 견고한 수비를 뚫고 들어가 중과부적의 적을 처치하고 승리할 수 있는지 사전에 비책을 마련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유라노수케는 오랫동안 전투를 준비해 오면서 이 정보가 부족해서 결정적인 공격 개시를 미루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유라노수케는 혼조가 건네 정보 가치에 대해서 무가의 비서이고 공식교재인 손자병법과 육도삼략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크게 평가한 것이다. 유라노수케가 형가라면 혼조는 번어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비웃으면서 억울한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아 치욕을 감내하고서라도 끝내 복수를 하는 것이 충의의 길일까? 아무튼 실패가 아니라 성공해야 충의가 완성되는 것! 충의를 실현할 만반의 전투 준비를 끝낸 유라노수케는 드디어 어둠을 틈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바닷길을 택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한 장도에 오른다.
얽히고 설킨 우리 인간 세상에서 알렉산더의 칼처럼 한칼로 잘라 해결할 방도가 없을 것이며, 인간의 백팔번뇌 百八煩惱 의 괴로움 -(‘4고’는 생노병사의 인간으로서 태어난 기본적으로 갖는 4가지 괴로움에다 인간이 갖고 있는 성질에 의해서 4가지 괴로움이 더해진다는 ‘8고’의 고통을 가짐을 지칭하는 말이 8고이다. 4고에다 추가되는 4가지 괴로움을 불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이별해야 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애별리고 愛別離苦, 원수같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겪는 괴로움-원증회고 怨憎會苦,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은데 그것을 성취하지 못해서 생기는 괴로움-구부득고 求不得苦, 그리고 인간은 육체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오감 色聲香味觸의 감각을 갖고 있고 또 오음 즉 色, 受、想、行、識 matter, sensation, perception, mental formations, consciousness 개성, 감수성, 연상, 정신력,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고통을 느끼게 되는 오음성고 五陰盛苦 이렇게 8가지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이 눈 녹듯이 사라질 사정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내일이야 어찌되든 오늘 밤의 정사-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들 신랑신부의 합방은 눈을 다 녹일 정도로 뜨겁지 아니할까? 아무튼 오로지 단 한 번뿐이어서 더욱 애절하리라. 주는 것에서 도를 이루는 살인성인이 우주만물의 이치에서 보자면 찰나가 영원이긴 하지만.
이 밤이 지나면 죽음의 전장터로 떠나는 낭군에게 “오늘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내게 키스를 퍼부어 주세요”라고 절규하는 2차 대전 영화 미군과 파리지앵의 사랑이야기에서 주제가로 쓰였던 “베사메 무초 Besame Mucho”라는 노래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기에 떠나는 슬픔을 억제할 수 있다. 비록 그 만남이 이 세상이 아닌 내세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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