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장의 마지막 단락인 제11막은 이 같은 “유능제강 약능제강 柔能制剛 弱能制強”의 구절로 시작된다.
이 인용 구절은 노자 도덕경 제36장의 “유약승강강 柔弱勝剛强” 의 표현과 똑 같은 의미이며, 육도삼략의 병서에 출전한다. 일본어 표현은 “柔よく剛を制し弱よく強を制するとは”인데, 이는 부드러운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고,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는 뜻이다. 제11막은 마지막 단막이니만큼 극적 위기가 해소되고 주제를 다시 설명하고 재강조하는 장이 되는데, 이 서두의 인용 구절 유능제강 약능제강 柔能制剛 弱能制強의 의미는 충신장의 주제이자 또 만고불변의 교훈이 되기에 충분하다.
노자도덕경 제36장을 가져오면, 将欲翕之, 必固張之.將欲弱之, 必固强之 -장차 수축하고자 하면 먼저 확장함이 필요하다. 장차 유약해지려면 먼저 강했기 때문이다.
將欲廢之, 必固興之.將欲奪之, 必固與之.是謂微明.
장차 없어지는 것은 먼저 흥했기 때문이다. 장래에 가질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을 미"명(내부우선발전론)"이라고 말한다.
柔弱勝剛强.魚不可脫於淵. 国之利器,不可以示人。- 부드럽고 약한 것이 모질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는 연못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느니, 사람들 앞에 국가가 보유한 예리한 무기들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이 구절의 의미는 국가를 총칼로 다스려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다.
충신장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거사 성공(또는 거사 성공 후 광명사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고 막부의 선고 결정을 기다린 의연한 행동)에 대해서 모두 잘했다고 칭찬이 대단하였다. 먼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충신의 본보기로서 전해지고 의사로서 받들어 지리라. 이들이 있어 국가(천황가)는 영원히 이어진다. 대나무 잎이 언제까지나 푸르듯, 이들의 영광은 영원무궁하리라. 삼인의 공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오동나무는 영원의 상징이다.
왜 혁명은 다리를 지나는 것일까?
전쟁은 끝났다. 정의는 실현됐다. ‘복수’는 성공했고 47인 무사들은 ‘충의’를 다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왜일까? 승리의 환호는 잠시일 뿐, 목표를 달성한 순간 또 다른 미묘한 긴장감이 돈다. 긴장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47인의 무사들은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응징한 수단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아코번의 47인 무사들은 폭력에 대해 비폭력무저항의 방식을 택했던 백이숙제와는 다르게 무력으로서 정의를 실현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47인 충신장 무사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장의 목을 베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성취했다는 측면에서 승리의 개가를 올린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복수는 실현했다. 그것은 분명 충의에 해당한다. 그런데 왜 주군에 대한 의리의 실현이 국가에 대한 충의의 실현과는 배치가 된다는 말인가? 달리 말해서 상관의 명령에 따른 부하의 행동에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말인가? 충과 효는 의리의 직선상으로 이해한다면 분명히 서로 배치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왜 충과 효는 서로 배치된다는 말인가? 국가와 부모는 일치하지 않는가? 그건 분명이 전쟁의 시기에선 그렇게 어긋날 수가 있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효라고 개념지을 때 전쟁으로 인해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은 효가 아니다. 그런데 이를 충으로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로 규우소우 室 鳩巣(1658-1734)는 처형된 아코번 47인 무사들을 충의를 다한 의사로 칭송하고, 이들이 처형된 바로 그 해에 시작하여 1703~1709년 사이에 이들에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을 수집하고 『赤穂義人録』을 후세에 남겼다.
하지만 여기에서 충과 효는 서로 배치가 됨을 알 수 있다.
왜 충과 효는 서로 일치가 되지 않는가? 그것은 죽음 때문이다. 죽음이 따르기 전까지는 충과 효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죽음 앞에서는 충과 효가 서로 일치하지 않게 된다.
죽음이 모든 것을 갈라 놓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누가 그 책임을 지는가?
충과 의를 다했다는 무사들의 행동에 대해 충의의 불일치에 의한 책임을 묻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은 살생을 금지한 법-자연법이든 실정법이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인의 폭력은 살생을 금지한 법 그 자체를 위반한 것이니 우리들은 그에 대해서 마땅히 책임을 져야 될 이중적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선 행위에 책임을 지고 47인의 무사들은 다시 죽음의 행진을 하는 것이다. 죽음은 오로지 죽음으로써 갚는다는 인류의 원초적인 원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원초적 죄를 씻길 주체는 국가이다. 47인의 무사들의 행위에 대해서 이들을 처형할 것인가 아니면 사면할 것인가의 최종적 선택은 국가-천황이든 막부이든-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47인의 무사들은 적장의 목을 따고 난 후 그것을 거사를 성공시킨 징표를 갖고서 거사의 명령을 내렸던 주군의 묘소가 있는 광명사로 행한다.
이에 대해 국가가 사면령을 내리든가 아니면 유죄의 경우 처형이라는 극형 처벌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유배의 처벌을 내릴 것인지의 선고형량의 범위를 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정치적 고려에 달려 있을 것이다. 47인의 무사들의 행동은 결국 쿠데타 기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면이나 유죄냐 또 유죄일 경우 선고형량에 대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 순간에, 이들 무사들의 미래는 오직 국가의 선택에 달려 있다.
화수교
충신장에서 무사들이 화수교를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며 다리 이름을 ‘화수’라고 지었는데, 여기의 ‘화수花水’라는 말은 불교 개념이 다분하고 또 미묘한 감정들이 교차하여 꼭 집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우를 뜻하는 ‘경화수월 鏡花水月’의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무사들이 건넜던 다리의 실제 이름은 “영대교 永代橋”이었다.
무로 규우소우 室 鳩巣(1658-1734)는 처형된 아코번 47인 무사들을 충의를 다한 의사로 칭송하고, 이들이 처형된 바로 그 해에 시작하여 1703~1709년 사이에 이들에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을 수집하고 『赤穂義人録』을 후세에 남겼다. 47인 무사들이 처형된 바로 그 순간부터 즉시 충신으로 규정하였던 무로 규우소우가 “赤穂義人録”으로 책 제목을 달았던 뜻은 아코번 무사들의 거사가 무엇인가에 불을 당겼다는 그 행동의 목적과 취지를 살펴보면 의인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그의 결론에서 찾아진다.
충신장에서 무사들이 거사 성공 후 행진하였던 영대교 다리이름을 “화수교”로 칭하였는데, ‘화수’와 ‘화수 花穂’는 일본어로도 발음이 같은 동음이의어이다. ‘花穂’는 불을 당긴 스파이크 점화를 뜻하는 말이다. 47인 무사들이 무엇에 불을 당겼다고 그는 이해하였을까?
이에 대한 해석의 결과 막부는 47인의 무사들을 전원 처형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을 것 같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이 바로 충신장의 3인 공저자들이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주제에 해당할 것으로 나는 여긴다.
무사들이 거사에 성공한 후 화수교 다리를 건너 광명사까지 행진하는 모습을 보면 개선장군이라기 보다는 꽃상여를 타고 가는 느낌이 든다. 이들은 전투대오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입었던 전투복장은 무지개 빛깔처럼 형형색색이었음을 함의적으로 들여다 보면 그렇다. 47인의 무사들의 행진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상여행렬을 보면 삶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려 가는 길이 왜 그토록 화려할까? 생과 사는 동전의 양면이고 따라서 그 경계를 확실히 하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사즉생 생즉사’라고 하지 않던가? “길게 보면 우린 모두 죽는다.”
충신장의 주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다. 죽음의 문제만큼 가장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단어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모든 혁명에는 다리가 개입되지 않았는가? 이성계가 정몽주를 압살한 개성의 선죽교가 다리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5.16때 한강다리를 건너서 서울을 장악했던 것이요, 후조의 석륵이 ‘천교’를 건설했던 까닭도, 아코번 무사들이 ‘화수교’를 건넌 이유도 다리의 깊은 의미에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계획한 대로 승리한 전투에서 개선 행진하는 전사들이 화수교 다리를 지날 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고 미묘한 긴장감이 흐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지금 걷는 다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자유의 다리인가?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일까?
다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쌍방형의 길이다. 파리의 세느강에서 장발잔이 타고 쫓기던 것처럼 시간에 쫓기며 유람선을 타 본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다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쪽을 연결을 하는 통로의 기능을 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길목이다. 다리는 때로는 반역에 해당한다. 물결을 거스르는 역할을 하고 쌍방을 연결하는 ‘거래’를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라보 다리”는 미라보의 이름을 간직할 만 하다. 미라보는 42세로 처형당한 그의 삶이 말해주듯이 반역자이었다. 그는 자기 계급의 이해를 멀리하였고, 박터지게 싸우면서 아내하고 이혼했고, 독일과 영국의 외국 체제를 동경했고, 외국과 거래했다. 미라보의 삶이 말해주듯 “혁명”과 “사랑”이 공유한 금실타래는 “배반”이라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 혁명의 표시였던 “밤나무” 아래서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속이고 속였다. 혁명과 사랑이 공유한 한 가지는 진실은 바로 “배반”이라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모두 배반한다. 아폴리네르가 읊은 대로, 우리의 삶은 세느강처럼 길고 느리게 흘러가는데 왜 희망은 그토록 무참히 깨지고 마는 것일까?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은 얼마나 길고 더디던가?
그런데 삶의 희망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가 있을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지만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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