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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화+Culture Studies/나라야마 부시코

"나라야마 부시코"

by 추홍희블로그 2015. 8. 2.

 

II. “나라야마 부시코




 

고령화 사회-일본의 고려장 -“나라야마 부시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노인 늙어서 나이 70이 되면 강제로 산 속에 내버려졌다는 기로 전설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내려 오고 있는데 후카자와 시치로가 1956중앙공론楢山節考 나라야마 부시코” (이 楢山節考 제목은 참나무 산에서 들려 오는 어버이의 음성 노래 기원에 관한 연구라는 뜻을 갖고 있고, 영어 제목은 Ballard of Narayama”) 소설을 발표하였고, 이 소설은 두 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필자는 1958년의 흑백 영화를 비디오로 보고나서 전율적 공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일본의 고려장 (오바스테)” 전설을 다룬 나라야마 부시코의 줄거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나라야마는 가다가도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산간 오지[1]의 이름도 없는 마을이다.  먹을 식량이 부족한 이곳에서는 식량을 훔치는 것은 가장 나쁜 사람으로 처벌된다.”  식량을 훔치다가 발각되면 사과를 해야 하는데 사과를 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마을에서 추방을 당하는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사과는 처벌을 의미한다는 사과에 대한 동양작인 개념으로 인해서 동양인은 잘못을 범해도 사과하는 것에 인색함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의 신의 개념을 가진 서양의 자연법결정론 철학 사상에서는 사과는 곧 처벌이 아니라 용서와 관용으로 포용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것을 장려하게 된다.  영미법 국가의 경험론 철학에서 사과는 처벌과 두려움의 개념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개념에 속한다.  영미법 국가의 자연법결정론(인과응보론) 사상은 칼뱅의 심판의 하나님의 개념이나 또는 동양의 "천벌론과 응과응보론과는 결론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영미법 국가의 자연법결정론과는 사랑의 하나님의 개념을 결론으로 견지하므로, 결과에는 항상 어떤 근본적인 원인이 작동한다는 인과론 causation”의 일면에서는 동양의 천벌론과 인과응보론과 같은 선상에 있지만 처벌을 받고 속죄받는 동양의 천벌론응보론과는 결론이 약간 다르다.  사람이 제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해도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반대로 나쁜 의도에서 하는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선한 일을 하면 반드시 보답을 받는 것도 아니다.  백골난망의 은혜를 입어도 결초보은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논하는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와의 대화에서 밝혀지듯이 빚은 꼭 그대로 갚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사람은 꼭 살아서 보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이름을 남길 수가 있다.  내리사랑이라고 부모에게 받은 은혜은 자식사랑으로 되갚아질 수 있다.  개인과 전체적인 입장, 역사적인 시각에서 길게 조망하는 것과 목전의 이익을 두고 다투는 이익은 서로 상반될 수 있다. 

 

아무튼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을 완전하게 하고 발전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지, 사람이 죄지으면 무조건 처벌받아야 한다는 그런 심판이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개념이다.  왜 심판을 하는가?  사람이 행복하고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영화의 줄거리로 돌아가서 설명을 이어가자.  식량이 부족한 산간 벽촌 마을에서 살아가는 늙은 노인이 나이가 들면 식량만 축내는 존재로 손자들에게까지 놀림을 당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늙어서 건강하다는 것은 오히려 수치가 된다.  따라서 나이 70이 되면 자식들에게 부양의 부담을 주기 싫어서라도 자발적으로 순순히 떠나가 주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 되는 것 같고, 이와 같은 태도를 주인공 오린 할머니는 보여준다.

 

사람은 자신이 죽을 장소와 죽을 때를 정할 수 있는가?-“평화로운 죽음의 이미지

 

기근과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마을 공동체의 생존규칙에 따라 식량이 바닥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늙은 노인이 나이 70세가 되면 강제적으로 높은 산에다 버려지고 만다는 관습이 존재해왔다. 

 

주요 등장인물 중 늙은 노모 오린은 70살이 되기 1년 전부터 자신의 건강한 치아를 강제로 스스로 부러뜨려 가면서까지 스스로 남은 생을 포기하고, 아들과 손자들의 삶의 계속성을 지켜주려는 늙은 어머니의 정서를 실천하고자 한다.  오린은 지금까지의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에 순응해서 아름답게 인생을 끝마치고자 스스로 준비를 해간다. 

 

까마귀 먹이가 되는 건가!”

 

한편 같은 마을 이웃집에 사는 늙은 노인 마타얀은 마을의 관습인 나라야마 공양길가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치지만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잡혀서 그녀의 아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모욕적으로 산으로 끌려가, 새끼줄로 묶인 채 깊은 계곡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이를 츤보유스리를 당한다고 마을사람들은 말한다..  마을 공동체의 규범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당하는 처벌인 것이다.  귀막고 흔들기 츤보유스리는 마타얀처럼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 결국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나라야마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마타얀이 굴러 떨어진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 보니 골짜기 아래에서 회오리 바람과 같이 풀썩 검은 연기가 올라 오는가 싶더니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날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리저리 날고 있던 까마귀 떼가 늙은 노인이 떨어진 골짜기 아래쪽으로 향해가는 까마귀 떼를 보고 까마귀 먹이가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저렇듯 많은 까마귀 떼라면 아마도 계곡에 즉사한 하얀 시체는 한 순간에 먹여 치울 수 있지 않을까!  나라야마에는 까마귀가 많이 살고 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시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까마귀의 먹이는 죽은 동물의 송장이니까.  새 또한 물고기처럼 먹이 있는 곳에 살아가는 까닭은 불문가지다.

 

나라야마는 까마귀가 많구나라고 말하며, 그 많은 까마귀에 놀랐다.  까마귀는 새로 보이지는 않았다.  검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동작이 느리기 때문에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이런 까마귀에 대한 표현은 필자가 본 까마귀 모습과는 다르다.  그리고 김현승 시인의 까마귀에 대한 시에서 표현되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라.)  여기서부터는 더 많은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조금 가면 헐벗은 산 같은 장소가 있고 거기는 바위만이 있다.  거기에서도 백골이 눈이 온 것처럼 주변이 하얗게 될 만큼 널려 있어서, 아래만 보면서 걷는 다츠헤이는 백골을 피해서 가려고 해도 눈이 아물아물해서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츠헤이는 이 백골 중에는 살아 있었을 때의 모습을 본 사람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2]  

 

나라야마 순례길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떠나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노인을 두고서 나라야마 순례를 떠났다고 말한다.  (일본인은 거의 절대 다수가 매장 대신 화장을 택하는 장례 문화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볼 때 나라야마 공양길을 떠난다는 표현이 보다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와 천주교가 불교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고려하여 순례길또는 참배길의 표현이 보다 나을 것 같다.)  나라야마는 참나무를 말하는데 참나무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등과 같이 오래 사는 장수 나무를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이와 같은 보통 기대 수명에서 인생칠십고래稀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인명재천이고 또 비록 의학 기술과 삶의 수준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던 예전의 기준으로 볼 때 사람 나이 70이면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나라야마산은 참나무가 우거진 높은 산이고, 이 높은 산으로 순례 길을 떠나는 사람은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을 골라 잡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하다.  눈이 내리면 사슴도 꿩도 움직이기 힘들게 되는 자연의 상황상 한 늙은이가 산 속에 버려지면 동사하기 십상일 것이다.  마을 전설에 소금장수집 할머니는 운이 좋아, 산에 가는 날인데 눈이 내리니까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노래가 내려 온다.  사실 주인공 오린 할머니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는 내가 산에 갈 때는 반드시 분이 내릴 거야라는 다짐도 계절의 자연 법칙에 순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모는 우리 아들은 착한 놈이다!”[3]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하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부모는 죽는 순간에 까지 자식 걱정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늙은 노모 오린은 행여 마음씨 착한 큰 아들의 마음이 여려서 자신을 산으로 올려 보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 아들이 할마시, 내년에는 나라야마에 올라갈까 おばあやん, 來年は山へ行くかなあ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안심을 한다.  그러나 큰 아들은 노모를 버려야 하는 마음에서 못내 무겁고 착잡하다.  그것을 오린은 눈치챈다.  오린은 다츠헤이의 얼굴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랬더니 갑자기 다츠헤이가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겨울을 넘기는 것도 힘들고, 나라야마 공양길에 수행하는 것도 힘이 드는 것이다.  내년에는 나라야마에 올라갈까며 좀 전에 말해줬지만, 지금까지 오래 동안 나의 나라야마 공양길을 생각해 왔던 것을 알자 아들이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린은 다츠헤이 곁에 다가가서 헝겊을 가만히 들었다.  다츠헤이의 눈가가 반짝이는 것 같아 바로 뒷걸음질쳐 물러섰지만, “눈이 반짝거리는데 눈물이 난 것 아니겠지?  이런 약한 놈이면 큰 일이다. そんないことったものだ[4]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지켜 내려온 지혜들 예컨대 산에 가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집을 나갈 때는 아무도 못 보도록 하고 나가야 한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다 보지 않는다등의 터부나 조언은 행여 부모를 버릴 때 인간적인 양심이 솟구쳐서 공동체가 살아남는 규칙을 실행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현실적인 대책인 것이다. 

 

큰 아들은 늙은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올라 늙은 노모를 높은 산 바위 뒤에 내려 온다.  그가 산 중간쯤 내려오는데 어머니의 소망대로 큰 눈발이 날리는 것을 본다.  상서로운 조짐의 서설이 내리는 갓을 본 큰 아들은 이를 전하고자 어머니를 내려 두고 온 높은 산의 바위 길을 다시 달음질로 달려 올라간다.  어머니 소원대로 정말로 눈이 내리네요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하는 마음에 단 숨에 다시 산꼭대기 바위 앞에 이른다.  거기 눈 내리는 바위 앞에서 신발을 벗고 방석을 깔고 앉아 묵주(염불) 기도를 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칠십 노모는 눈 내리는 죽음의 바위 앞에 방석을 깔고 앉아 오로지 염불 기도를 올리면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큰 아들은 말한다.  어머니, 눈이 내려서 운이 좋네요. 運がいいや、雪が降って”.  그러나 어머니는 그저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들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손짓만을 보낸다. 

 

엄니, 눈이 와서 운이 좋네이런 말을 하고 나서, “나라야마에 올라가는 날에라는 구절의 노래 가사를 붙어서 말을 걸었다.  오린은 머리를 아래 위로 끄덕이면서 다츠헤이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내밀어 돌아가라고 흔들었다.  다츠헤이는, “엄니, 정말로 눈이 왔어라고 외치고는 달아나는 토끼같이 달려서 나라야마를 내려갔다.  나라야마의 규칙을 어긴 것을 누가 알지 않을까 하며 계속 뛰면서 나라야마를 내려갔다.[5]

 

노모를 나라야마에 내려 놓고 온 아들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집 대문으로 힘없이 들어서는데 집에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바로 어젯밤까지 함께 먹고, 자고, 살아 온 가족의 일원이었던 할머니를 온 아비를 보고서 어떤 책망도 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삶의 질서인양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소금장수집 할머니는 운이 좋네.  눈이 내리는 날에 나라야마산에 순례를 떠났으니까. 塩屋のおとりさん運がよい 山へ行く日にや雪が降る.”

 

소설의 말미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문을 열려고 했을 때, 마츠얀이 헛방 쪽에서 나왔다.  크게 부풀은 배에 맨 그 띠는 어제까지 오린이 매고 있던 폭이 좁은 줄무늬의 띠였다.  마츠얀이 열고 나온 헛방 속에서는 어제 밤에 오린이 꼼꼼히 개어놓은 솜옷을 벌써 게사카치가 등에 걸고 책상다리하고 앉아 있었다.  옆에는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어제 밤에 남긴 술을 마시고 취한 것 같이 넋 잃은 눈으로 목을 기울이면서, “운이 좋다, 눈이 와서, 할머니는 정말로, 운이 좋아, 진짜로 눈이 오다니 運がいいや、雪が降って、おばあやんはまあ、運がいいや、ふんとに雪が降ったなあ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6]


 

고려장의 원인- 고부간의 갈등에서 오는가?

 

사카자와의 나라야마 부시코의 해석과는 다르게, 노인 버리기가 고부간의 갈등에서 온다고 말하는 일본의 민간설화가 존재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모님을 유기하고, 나면 어떤 사람인들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늙은 노모를 유기하고 난 후의 몹시 불편한 마음에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들 수가 없어 상심에 잠겨 있다가 산 위에 비추는 달을 보고서 개심하고 다시 노모를 데려왔다는 설화는 야마토 모노가타리에 소개되어 있다.  이를 번역 소개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여기서 노모를 생모가 아닌 큰어머니로 대체한 것은 도덕적 격렬성을 유화시키는 도구적 장치에 해당할 뿐이고 공동체내에서의 생존 규칙상 생모와 양모의 차이가 어떤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나노 지방의 사라시나라고 하는 곳에 한 남자가 살고 잇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큰 어머니가 부모처럼 돌보아 주었다.  이 남자의 아내는 주위에서 마음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비뚤어진 사람이었다.  큰어머니가 늙어서 허리가 굽어진 것을 보고 늘 미워했다.  남편에게 큰어머니가 마음씨 사납고 아주 못된 사람이라고 말했으므로 남편도 옛날과 다르게 큰어머니에게 소홀히 하는 일이 많았다.  이 큰어머니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몸이 꺾일 정도로 허리가 심하게 휘었다.  아내는 이 모습을 보고서 큰 어머니를 귀찮게 여겼다.  이제까지 죽지도 않고 잘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서, 남편에게 나쁘게 일러 바쳤다.  그리고 깊은 산 속으로 데리고 가사 꼭 버려두고 오시오하고 남편을 윽박질렀다. 남편은 아내에게 시달린 나머지 그렇게 하지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달이 아주 밝은 밤에 큰어머니 절에서 귀한 법회가 열린다고 하니까 같이 가시지요, 보여드릴 테니까하고 말했다.  큰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여 등에 업혔다.  높은 산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서둘러 산을 올라가 내려오기 힘든 높은 산봉우리에 내려놓고서 도망쳐 왔다.  큰어머니가 이봐 이봐하고 불렀지만,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도망쳐왔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아내가 큰어머니 욕을 하며 고자질을 할 때에는 화가 나서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부모처럼 함께 살아 온 큰어머니 생각에 매우 슬픈 마음이 들었다.  산 위에 달이 아주 밝게 떠오르는 모습을 꼼짝 않고 생각에 잠겨 바라보다, 밤새도록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슬픈 생각에 다음과 같이 노래를 읊었다.  내 마음을 달랠 수가 없구나.  사라시나의 오바스테산(오바捨테山)을 비추는 달을 보고 있자니.”  이 노래를 읊고서 다시 산으로 가서 큰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 후부터 이 산을 가리켜 오바스테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음을 달랠 수가 없다고 말할 때, “오바스테산이라는 말을 대구로 예로 드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7] 

 


 

고려장을 한 날은 왜 눈이 내리는 걸까?- snow과 물 water의 속성

 

하얀 눈은 검은 대지의 모든 것은 덮는다.  모든 것을 용서한다.  비록 끝내지 못한 일이 있더라도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덮어진다.  또 포근한 눈은 망자의 상실에서 오는 분노와 슬픔을 잠재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눈은 물로 이뤄져 있다.  물은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에서 잘 설명하고 있듯이 세례의 의미를 갖고 있다.[8]  여기서 잠깐 포이에르바하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논한 요지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비판

 

휴머니즘 종교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종교 a religion not of God, but of man, a religion of humanity”라고 말한다.  조지 엘리어트의 견해는 특히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결과이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들이 신을 믿는 모든 종교가 실제로는 인간의 본성, 필요,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빚어낸 외재화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고 즉 인간의 주관적인 필요와 기대 실현을 위해서 인간이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도구 방편 unconscious objectification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9]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의미는 사랑 love 경외 admiration 동감 sympathy 연민 pity 인간 사이에의 희생 sacrifice of man for man에 있다고 보고 인간 관계 그 자체가 바로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말했다.[10] 

 

포이에르바하는 진정한 종교적 의미는 인간의 내적 이기적 욕구에서 만들어진 추상적인 신에게 바쳐질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행할 때 그 의미가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구해낼 수 있는 주체 the savior is nobody but human라고 파악하고, 신을 인간의 위치로 from God to Man 끌어내렸다.  기독교는 신은 사랑 God is Love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는 역으로 사랑이 신 Love is God”이라는 의미가 도출된다고 주장했다.  사랑은 신성보다 더 높은 능력이자 진리이며 따라서 사랑은 신을 정복한다.”[11]

 

이와 같이 볼 때 동료 감정 fellow-feeling (In love the reality of the species becomes a matter o feeling.)”은 동지애, 인간애 humanity와 동의어가 된다.[12]  사랑이 인간을 결합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종교의 본질이라면,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인간 동료애 man’s love for man”는 자기애만큼 거의 종교적인 것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타인에 대한 희생은 인간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한 인간의 최고의 본성적 표현인 것이다.  사랑과 공감으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그 자체가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와 같이 엘리어트가 주장한 휴머니즘의 개념을 비유적으로 쉽게 설명한다면, 천수답을 짓는 삼한시대 사람들의 종교가 태백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며 천지신명이시여! 비나이다! 하늘이시여! 우리를 도와 주소서! Heaven help us!라고 하늘에 고사를 지내는 기우제의 종교이었다면, 휴머니즘은 고통으로 점철된 인간 사회의 개선을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서로 돕자! Help one another의 사랑과 우애와 협동의 실천 정신으로 무장하여 공동 저수지를 만들며 인간사회의 개선과 발전을 도모하는 실천적인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다.

 

휴머니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장 쉽고 잘 표현해 주는 휴머니즘의 신조를 보자.  이것은 기독교의 사도신경과 거의 비슷한데 다만 신의 위치가 인간으로 대치된 것 같다.  휴머니즘은 무엇인가?”란 책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는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휴머니즘의 신조

 

나는 내가 우주 천체의 중심이라는 것과

나와 똑 같은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전체 인류 가운데 한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했고 또 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을 공유하고 있으며,

필요, 욕구, 감정, 지성, 지식 추구 등은 모든 인류의 보편적이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속한 인간 종족이 생존하는 한 나는 결코 죽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내 자신을 보호해 줄 위대한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좋겠지만, 아무튼 내 자신을 보살피는 것은 내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공동 선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믿으며 또 그 이유는 우리들이 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들은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필연성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다.[13]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영상 캡쳐.

 


(영화에서 까마귀의 형상이 크게 부각된다.)


 

 

누가 희생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홀어머니 오린(70)의 외아들 다츠헤이의 나이는 45살이고, 어린 아이 4명을 키우고 있는 가장이다.  오린은 나이 칠십이 되면 나라야마 순례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이다.  순례길은 버림을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죽음의 제물에 바쳐지는 희생자가 되고,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늙은 노모를 버려야 하는아들은 가해자의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라야마 부시코의 소설과 영화에서 노모를 버리는 아들은 비정한 아들로서 그려지고 있지 않다.  한편 옆집의 마타얀 할아버지는 자기 아들에 의해 강제로 산으로 끌려가서 계곡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다.  자기 아버지를 강제적으로 굴려 뜨려 죽이는 마타얀의 아들이나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어머니를 갖다 버린 오린의 아들이나 늙은 부모를 높은 산에 갖다 버린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똑같다.  둘 다 살인의 실행자로서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죽음의 결과를 가져온 측면에서 이 둘에게 도덕적 차이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차분하게 수용한 부모와 죽음을 순수히 수용하지 못하는 부모의 존재 차이 때문에 이 둘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라야마 부시코의 소설과 영화에서는 공동체내의 규범질서에 따라 죽음을 수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오린의 죽음 장면에서는 시신을 먹는 까마귀의 사라진 반면, 그 규칙을 거부하다가 강제적인 죽음을 당한 마타얀의 죽음 장면에서는 까마귀 떼가 몰려드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평화로운 죽음 good death’의 유무 여부에 따라서 죽음의 실행자인 사람의 도덕적 가치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인가?  죽음의 규칙을 실행하는 오린의 아들도 마음의 괴로움을 감출 수가 없고, 그러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가장 고급인 흰 쌀로 빚은 을 마시는 의식을 마련하고 거기에 참여한다.  노모를 버리기 전날 술을 먹는 의식에 참여하는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도 늙은 부모를 버렸다는 측면에서 공범자의 입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버렸다는 공범의식을 갖고 있을 것으로 기꺼이 술을 마시는 행위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생존의 필요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연하게 취급되는 노인 버리기의 체제하에서 서로 공범자가 되었고 이들은 (단순한 구경꾼들이 아니라 자신들도 늙은 부모를 버렸던) 공범자로서 이제 서로 동료 의식 comradeship을 갖게 되는 소위 야쿠자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죽음이 생존의 삶을 위해서 이뤄지는 죽음의 제의를 통해서 개별화에서 전체화하면서마을 사람들은 서로 결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폭력에 의해 유지하는 조직폭력배(갱단)의 문화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투키디데스의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야비한 갱단 문화를 설파하였다: “신성한 법을 지키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고, 대신 동료들간에 죄를 함께 지을 때 서로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14]

술은 자연이 마련해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위적 가공품이다.  술은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수단이 되고 공동체를 결속시켜주는 도구가 된다.  한 개인의 의식에서 공동체 전체를 이어주는 집단 의식으로 변화되는데 여기서 제의와 술은 변화의 도구로써 작용한다.  술과 제의는 도덕적 면죄부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의식과 거기에 쓰이는 술은 폭력에 의해 공동체를 유지해 가는 집단적인 주술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폭력의 제도는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적인 사회 통치 구조와 상통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같은 인간이라는 동료의식 friendship을 유지하려면 맑은 정신으로써 깨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공동체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강제적 폭력이 용납되는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양심이 집단적인 무의식에 의해 허물어지고 만다.  

 


 

기어서라도(게걸음질을 치고;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들어가겠다라는 속어의 기원

 

우리가 버림을 받을 때 (예컨대 정치인이 공천에 탈락한 경우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 대학시험에 낙방을 한 사람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입학을 하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 뒷문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라는 속어를 쓰는 경우를 흔히 본다.  늙고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여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바다 게처럼 옆으로 슬금슬금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는 한서린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왜국에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망부석이 되었다는 치술령 고개의 박제상 부인의 망부석 바위 전설” (망부석 바위 전설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김제상 부인의 치술령 망부석 전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망부석 바위 전설은 전국적으로 산포하고 있는 큰 바위(바우)” 전설의 전형에 속한다. 큰 바위 전설이란 미국의 러시모아 산의 대통령 인물조각상과 큰 바위 얼굴소설이 잘 말해주듯 바위와 큰 인물이 연결된 전설이다)고산 바위에 버려진 늙고 병든 할머니가 바다 게가 되어 돌아왔다는 전설과 속담에 연결되어 있음을 추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충성을 강조하는 국가권력이 강대해지면서 기로(고려장) 전설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창부수의 아내 정절 의무를 강조하는 불교,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라 망부석의 전설로 변형 조작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자세한 근거와 정확한 고증 여부는 차치하고서) 문학적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최소한 망부석전설은, “깊은 산 바위 위에 시체로 널려 있다나라야마 부시코의 문장 표현이 암시해 주듯이, 고대 상장례의 한 풍습이었던 순장풍장의 모습이 엿보이는 전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뒷문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라는 속어가 있는 데 이에 대한 기원을 생각해 볼만한 근거가 나라야마 부시코이기도 하다는 것을 필자는 말하고 싶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주제가 노래를 살펴보자.  노래가사를 대강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멀리 떨어진 별채 구석진 방에 홀로 버려진 할머니

귀신 같은 이빨은 남아 있어 음식만 축내고 있네.

 

아버님, 창문을 열어 먼산을 쳐다보세요.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고 벌거숭이 나무가 되었네요.

 

아버님, 이제 등에 지게를 지고

높은 뒷산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네요.[15]

 

소금장수집 할머니는 운이 좋데요.

나라야마 순례 길을 떠나는 날 함박눈이 내리니까.

 

하지만 지독히 추운 날씨이건만

순례 길의 할머니는 솜옷도 걸치지 않아 얼어 죽겠네.

 

뒷산 높은 바위 밑에 할머니를 버리고 왔다네.

밤중에 참게가 기어서 집으로 들어온다네.[16]

 

우리 나이 70이 되면

우리는 나라야마 순례 길을 함께 떠나야 하겠네.[17]

 

 

일본말은 우리말과 같이 존대어와 하대어가 발달된 언어이다.  우리말에 어머니” “모친” “자당” “엄마” “엄니” “어무니호칭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바깥나라 외국인들은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할머니” “할망구” “할매” “할마시” “할멈” “조모등의 표현도 말을 하는 사람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문맥상 의미가 약간씩 달라진다.  일본어도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많다.  소설과 영화의 표현도 약간씩 달리 느껴질 수 있다.  소설 원문 표현의 塩屋のおとりさん運がよい 山へ行く日にや雪が降る.” 불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O Tori-san de la Maison au sel sa chance est bonne, Le jour qu'elle va à la montagne il neige.”  소금장수집 할머니는 운이 좋네.  산에 가는 날에 눈이 내리니까.”  여기에서 운이 좋네. 눈이 내리는 날에 나라야마산에 순례를 떠났으니까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 속담에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는데 이 말에선 시간의 전후 관계가 분명하지만, “나라야마 부시코에선 떠난 날이 마침 눈이 내려서 좋은 것인지 (이런 해석으로 보면 눈은 노모를 버리고 온 살아 남은 자들의 도덕적 양심의 걸림돌을 해소시키는 상징이 된다), 아니면 눈이 내리는 겨울 날 마침 떠나서 좋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런 해석은 먹을 양식도 다 떨어져 한 겨울에 누가 떠나지 않으면 누군가가 굶어 죽을 것이므로 노모가 떠났다는 사실은 그 대신 자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죽음으로 떠난 결과가 강조된다), 이런 두 가지 해석은 약간의 뉘앙스가 차이가 있다.  소설과 영화에서 분명하게 아들이 노모를 지게에 지고 높은 산에 버리고 온 후에 눈에 내린다.  따라서 살아 남은 자들의 도덕적 양심적 걸림돌을 해소시키는 눈의 상징적 역할이 강조된다.  비가 얼어서 눈이 된다.  눈과 비는 물 water이 본질이다.  물은 죄를 씻는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는 세례의 의미를 갖는다.  물은 목욕재계, 세례의 수단이다.

 

하지만 전설상의 노랫말- 아버님, 창문을 열어 먼산을 쳐다보세요.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고 벌거숭이 나무가 되었네요.  아버님, 이제 등에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네요.”을 참조하면 냉혹한 공동체의 실존적 삶의 규범- “제로 섬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세가 강조된다.  다시 말해 보릿고개의 현실에서 이 힘든 겨울을 넘겨 살아 남으려면 누군가가 이 겨울에 죽어가야만 한다.  제로 섬 사회에서의 엄연한 적자생존의 규칙이 작동되고 또 이것을 찬미한다.  산촌에서 가장이 산에 올라 간다는 말은 그 자체로 좋은 의미이고 당연한 일이다.  심마니가 약초를 캐러 가는 것도, 땔감을 구하려 산에 오르기 때문에 산에 가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필요적 수단이자 방편이다.  높은 산간 지방에는 겨울에는 항상 눈으로 덮여 쌓인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고, 사람이 죽는 것 또한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순응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자연스런 결과인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강제적인 이유와 나이 기준으로 강제적인 배제 규칙이 이뤄진다는 점에 대해 인간 사회의 기초로써 합리적인 의문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느냐이다. 

 

오로지 생존법칙만이 통용되는 격리된 사회에서라면, 나이 70이 되면 강제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고의적인 살인인지 아니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인지 여부는 관심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고의적 살인이란 동사 또는 기아로 죽도록 깊은 산에 노인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것을 행위 acts를 말하고, 부작위에 위한 살인이란 거기서 동사 또는 기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는 방기 omissions을 말한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작위 또는 부작위 acts or omissions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 긴급피난이냐 정당방위이냐의 논란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가해자-에 대한 심판이지, 이미 죽은 자의 입장에서 따져보는 억울한 죽음을 피는 신원적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죽어나가야 하는 제로 섬사회에서 늙고 병든 노인을 갖다 버리는 것은 불가피하고 절박한 상황긴급피난 Necessity”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인생칠십고려장제로 섬사회에서 삶의 연속성을 지켜나가려는 하나의 정해진 규칙이고 또 그 같은 측면에서 장자상속의 법칙과 동일선상으로 확립된 사회적 질서에 속한다.  장자상속 또한 삶의 연속성을 지켜나가려는 경제적 이익에서 생겨난 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을 불가피하게 죽일 수 있다는 근거는 예컨대 “necessity killing”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18]  오늘날은 만약 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경우 국가 담당 공무원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 homicide by nonfeasance”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눈밭 속에서 술 취한 아내를 그대로 방치한 결과 아내가 동사했다면 남편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미국의 사례 Territory v Manton 19 Pac. 387 (1888) 참조).

 

근대 국가의 성립원칙으로서 철학적 기초를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람이 다같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누가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가?  인간인 이상 누구도 목적적인 존재인지 수단으로 여겨서는 아니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일단 접어두고 공리주의적 철학 기초를 생각해 보자.  2차 대전 중 일어난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일어난 가상의 사례를 다룬 처절한 정원소설에서 드는 예를 보자.  우리 네 사람 다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느니, 한 사람이 희생하여 나머지 세 사람을 살리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이란 질문에 대해서 이런 대답을 한다.  죽고 사는 일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거나 또는 어떤 사람의 목숨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지위가 높아서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또 악에 동조하는 것이다.”[19]  한편 유교적 이념에서는 가족적 온정주의가 정당화되는데, 불가피하게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그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거나 자신의 가족이 해당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극단적이고 불가피한 절대적인 상황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을 도입하여, 가장 힘있는 사람이 스스로 나서서 희생을 치르겠다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가 있겠지만 그런 해결책을 게오르그 카이저의 희곡 칼레의 시민에서 제시한다.  하지만 그 희곡은 당시의 희생자는 힘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힘없는 사람들이 선택되었다.  긴급피난이나 정당방위의 극한적 상황에서는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그런 상황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오히려 힘없는 희생자로 삼았다는 사실은 인간사회의 엄연한 역사적 진실이다.  카이저의 희곡 칼레의 시민은 이런 역사적 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한 거짓(소설)이고 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칼레의 시민희곡이 제시하는 것과 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에 바탕을 둔 사회지도층의 헌신과 희생으로 극한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사회의 본성상 현실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분명하다.

 

다시 나라야마 부시코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문학상의 미묘한 표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차이가 정서상의 이해와 해석의 차이를 가져올 것인지 여부는 좀더 깊이 따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 언어, , 풍습, 문화의 차이를 떠나서 큰 어려움 없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원작 소설, 영화, 가요, 설화 그리고 영어, 불어, 한국어 번역상 미묘한 차이를 감안하여 나라야마 부시코의 말미에 나오는 주제가를 필자는 위와 같이 옮겨 본 것이다.

 

약자의 절규를 외면하는 것이 살아남는 지혜로 통하는가?

 

뒷산 높은 바위 밑에 할머니를 버리고 왔는데 밤중에 참게가 기어서 집으로 들어 온다는 노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람이 어린 아이 때는 세발로 게처럼 기어 다닌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희곡에서 나오는 아침에는 네발로, 점심 때는 두발로,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에 대한 퀴즈에 대합 말해주는 바와 같이, 사람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지팡이를 집고 다시 아이처럼 기어 다니게 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처럼 돌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 남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보는 것도 힘들고 노인 돌보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약자의 하소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것이 공동체에서 살아 남는 지혜에 해당할 것이다.  공동체의 규칙을 거부한 마타얀 할머니는 제발 살려달라는 하소연에도 아랑곳없이 귀막고 흔들기츤보유스리의 벌을 당하며 강제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밤 중에 아이가 울어 보채도 아이를 보는 사람이 귀를 막아 버린다면 우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약자의 아픔과 하소연에는 냉정하게 거정하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된다.  사람이기 때문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받겠지만 그런 마음의 찔림과 울림을 잊기 위해서 을 마시고 마음을 달래는 의식을 갖는다.  자신을 길러주신 노모를 버린다는 것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노래의 가사처럼, “수행하는 것은 쉽게 보여도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이며, 지게를 진 어깨의 무거움은 부모(윗돌)와 아랫돌(자식)의 연자맷돌에 끼어서 피고름이 날 정도로 힘들고 곤박한 인생험로일 것이다.

 

바다 게의 속성

 

바다 게 蟹는 서해 꽃게와 동해 대계가 유명한데 게는 야행성으로 낮에는 모래 속에 들어가 쉬다가 밤이 되면 움직인다.  바다 게는 캄캄한 밤에 일어나 먹이를 찾고 노래를 부르는 야행성의 동물이다.  그리고 바다 게 중 참게나 도둑게는 바다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민물 땅에서 산다.  도독게는 민물 강가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가 성장하고 죽을 때가 되면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가로 회귀하는 연어하고는 반대로 도둑게들은 바다 주변 산에서 굴을 파고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바다로 이동하여 해산가 암석에 알을 깐다.  게는 어릴 때 바다에서 낳아서 다시 산으로 들어오는데 산란기가 되면 어미 게는 썰물에 쓸려나가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이동하는 것이 게의 본능적인 행태이다.  게는 밤 중에 움직이는 야행성의 동물이어서 누가 밤 중에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하면 문을 열어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먹을 식량이 한정된 산간벽촌에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남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 살아남는 지혜가 된다. 

 

우리 속어에 “게 거품을 물고 덤벼든다”는 말이 있다.  흔히 어떤 일로 궁지에 몰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상황을 극구 변호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행동을 표현하는 말이다.  바다 게가 거품을 낼 때는 아가미 호흡을 하는 게가 공기 중 호흡에 곤란을 느끼는 한계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개의 상황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게거품”을 물고 도움을 하소연하는 데도 외면한다면 게는 결국 죽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어린 아이가 야밤중에 도둑게처럼 배가 고파서 울거나, 또는 도둑게가 기어 들어왔다고 부모에게 도움을 구하는 소리칠 때 부모가 게는 밤 중에 울지 않는 법이리고 거짓말을 하며 아이의 하소연을 무시한다면 과연 그것이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고려장설화와 영화에선 노모를 버린 큰 아들이 노모의 손자가 노모를 버린 부모의 행동을 따라서 그대로 다시 재현하겠다는 손자의 경고를 말을듣고서 마음을 돌려 개심하여 다시 노모를 데려온다는 헤피 엔딩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옆으로 걷는 게의 단점을 보고 훈계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에서 이와 같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부전자전, 부창부수의 교훈을 말해 주는 이솝우화의 이야기를 여기에 언급하는 것이 우리나라 고려장의 설화가 말하는 권성징악의 해피 엔딩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게와 그 어미

엄마 게가 아기 게에게 말했다.
"
너는 어째서 그런 비뚤어진 걸음걸이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
그러자 아기 게가 말했다.
"
엄마, 제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엄마가 곧장 걷는 걸 보면 저 역시 그대로 걸어 보겠어요."[20]

 

 



[1]산과 산이 끝없이 이어져서, 어디까지나 산만이었다.”  山と 山か連っていて, ある.”

[2] 원책 at 190, 산전애, at 48

[3]やさしい奴!” 

[4] 원책 178-180, 산전애 39,

[5] おっかあ, 雪が降って 運がいいなあ”, 원문 193-194, 산전애 46.

[6] 원책 196-197.  산전애 44.

[7] 김용의, “한일의 기로설화 비교 연구”, 일본 연구 제25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2008, 311-332, 320-321.

[8] 포이에르바하, “기독교의 본질”,

[9] 언어 또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지만, 언어는 편의성을 위하여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를 반영한 인위적인 체계이다.

[10] “Relationships of man to man, all the moral relations are per se religious.”  Feuerbach, Eliot G., “The Essence of Christianity”, at 271.

[11] “Love is a higher power and truth than deity.  Love conquers God.”  Feuerbach, Eliot, “The Essence of Christianity”, at 53.

[12] Paris B., “George Eliot's Religion of Humanity”, ELH, Vol. 29, 4 (1962), 418-443, at 432.

[13] I am the center of my universe;

There is no one else quite like me.

I am part of the human species,

All who came before me and all who will come after.

I have things in common with all humankind:

Needs, drives, emotions, intelligence, and a thirst for knowledge.

As long as my specifies survives, I shall never die.

I have no need for a Greater Being to take care of me. 

While that would be nice, it is my responsibility to take care of myself.

Human beings strive to be good because we need to live in peace and harmony, not because we fear God.

-Bennett H, “Humanism, What's That? A Book for Curious Kids”, Prometheus Books, Amherst, NY, 2005.

[14] “The seal of good faith was not divine law, but fellowship in crime.” Thucydide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Book III. 82.

[15]山が焼けるぞ枯木ゃ茂る 行かざなるまい,しょこしょって.”

[16]お姥捨てるか裏山へ 裏じゃ蟹でも這って来る”  “這ってきたとて戸で入れぬ 蟹は夜泣くとりじゃない

[17] 영어 번역 영화 자막을 대강 옮기면 다음과 같다.

In a corner in the back room

My granny found herself a set of 33 demon teeth

Look outside.

Father the trees are all bare of leaves

Carry a wooden frame on your back

It’s time for you to go

Otori of the salt house is in luck for snowfall has come

On the day of her journey to Narayama

Even though it’s very cold

She couldn’t wear a paddled overcoat

To go to Narayama

Abandon granny in the back mountains

Crabs come crawling from the back mountain

When we turn seventy

We’ll go together to Narayama

Loss as lightness

Lightning the burden.

[18]文明は、らさず、らさず、らず、さざるべじ」 “A true civilization does not destroy mountains, defile rivers, tear apart villages or murder people.”

[19] "If you let someone else have the power of life and death over you, or think yourself so high-and-mighty you can say one person's life is worth more than another's-if you do that, you abandon all dignity and collaborate with evil.".

[20] “The Crab and Her Mother”, said an old Crab to a young one, "Why do you walk so crooked, child? Walk straight!" "Mother," said the young Crab, "Show me the way, will you? And when I see you taking a straight course, I will try and fol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