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소설과 융(Jung) 심리학
박 광 자 (충남대)
『데미안』을 위시한 대다수의 헤세의 소설은 인간의 자기구현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자기(Selbst) 또는 자기구현(Selbstverwirklichung)이라는 개념은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며, 헤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융 심리학의 원형(Archetypus)이론으로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융 심리학의 측면에서 헤세의 소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1. 헤세와 심리학의 만남
헤세가 심리학과 만나게된 것은 피분석자의 입장에서인데 그 첫 만남은 십대에 이루졌다. 마울브론 신학교 시절에 기숙학교를 무단으로 이탈하는 사고로 (1892년 3월7일) 6개월만에 학업을 중단한 헤세는 4년에 걸쳐서 기도요법 치료를 받고 요양시설에 수용되기도 하였다. 바트 볼에서 자살을 시도한 후 헤세는 정신치료사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Christoph Blumhardt의 치료를 받았으며 슈테텐 의 요양소에 수용되기도 했다. 당시 헤세의 문제는 엄격한 가정교육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도덕적 결벽성, 또는 아버지와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년시절에 그가 겪은 이러한 갈등은『어린이들의 영혼Kinderseele』이나『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와 같은 초기 작품에 뚜렷하게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헤세는 이러한 갈등을『페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1904)의 성공으로 작가의 꿈을 이루면서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다.
그러나 헤세는 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다시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된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외부의 위협, 1904년에 결혼한 마리아 베르눌리 Maria Bernulli와의 불안한 결혼생활, 그리고 아버지의 사망으로 (1916) 인한 타격, 아들 마르틴의 입원 등이 그것이었다. 당시 헤세는 전쟁포로를 돕는 후생사업을 하며서 전쟁을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고 있었는데 스위스로 이주한 일에 대해서 독일로부터 심한 비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 밖에서도 매우 고통스런 형편이었다.
헤세의 첫 번째 정신과 치료는 1916년 3월 24일에서 4월 7일 사이에 있었다. 그 후 헤세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심리분석 치료를 루체른 교외의 존마트에서 계속하지만 (4월-5월, 12회) 그것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1916년 6월부터 1917년 11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매주 루체른으로 정신과 의사인 요젭 베른하르트 랑 Josef Bernhard Lang을 (1863-1945) 방문하여 3시간씩 60회에 걸친 치료를 받게된다. 랑 박사와의 대담을 통해서 헤세는 노이로제와 긴장감으로부터 많이 벗어 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아 Mia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헤세의 첫 부인 마리아 베르눌리는 1918년 8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융의 연구소가 있는 퀴스나흐트로 옮겨져 계속 심리치료를 받게된다. 헤세는 마리아 베루눌리와 1923년에 이혼하고 다음 해에 루트 뱅어Ruth Wenger와 결혼하지만 3년 후인 1927년에 다시 이혼을 하게 된다. 1925년 12월에서 1926년 3월, 즉 루트 뱅어와 별거하면서『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를 쓰는 동안 헤세는 다시 랑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헤세는 융을 1917년 9월 7일에 처음 만났는데 융에게서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기에 헤세는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은 이러한 초기의 만남 동안에 여러 번 바뀌었는데 그의 강한 자의식은 어떨 때는 마음에 들기고 하고, 어떨 때는 그것이 내게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헤세는 융을 만난 지 닷새후인 9월12일에 꿈속에서『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을 만났다고 한다. 헤세는 심리학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정신적인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러한 만남을 창작에 응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에 걸쳐 즉『데미안』,『동화 Maerchen』,『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Klingsors letzter Sonmmer』과『황야의 이리』를 집필하는 동안 헤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융의 심리학이었다. 헤세는 1918년에「예술가와 심리분석 Kuenstler und Psychoanalyse」이라는 글을 프랑크푸르터 차이퉁Frankfurter Zeitung에 발표했으며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잡지「비보스 보코 Vivos Voco」에「심리분석에 관하여. 보레세스토르에서의 5회의 강연 Ueber Psychoanalyse: Fuenf Vorlesungen in Worcestor」이라는 글도 썼다.
그러나 헤세는 심리학과 예술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는 심리학을 과대평가하지 않았으며 심리학을 문학의 목표나 구조상의 원칙보다 우위에 두지도 않았다. 헤세는 "그(작가)가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정신)분석자는 그 꿈의 해석자"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랑 박사를 모델로 했다는, 고대의 여러 종교와 상징에 관해 박학다식한 피스토리우스에 대해서 싱클레어가 경탄과 동시에 비판의식을 가졌던 것과 비슷하다. 헤세는 심리학자들이 문학작품을 심리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한편 여러 저서에서 괴테와 횔덜린을 즐겨 인용하고 있는 융은「심리학과 문학 Psychologie und Dichtung」(1930) 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으며 제임스 죠이스의『율리시즈 Ulysses』에 관한 독자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융은 문학의 상징성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시 예술의 본체는 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 유년시절의 환경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헤세(1877-1962)와 융(1875-1961) 사이에서 놀랄만한 유사점을 발견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헤세는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아버지와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많은 이국적인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헤세는 엄격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는데『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헤세에게도 기독교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은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다.
헤세보다 2년 앞서 스위스의 동북부 투르가우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융도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목사였다. 어린 시절 융은 사랑이 넘치는 존재이며 동시에 심판자인 신에 관하여 골똘히 생각했다고 한다. 심령술에 관심을 가지게된 융은 의학도로서 결국 정신과를 택하게 된다. 1907년에 빈에서 융은 프로이트를 만났지만, 프로이트가 거의 모든 정신의 문제를 성(性)으로 귀착시키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내면을 신화와 종교적 표상 등을 통해서 규명하려는 융의 입장 차이로 두 사람은 결별을 고하게 된다.
귄터 바우만 Guenter Baumann은「C. G. 융 심리학으로 조명한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이라는 논문에서 헤세에게는 목사관 신드롬(Pfarrhaus-Syndrom), 즉 특출한 지성과 감수성이 깊은 죄책감 및 열등감 콤플렉스와 결합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횔덜린이나 니체 뿐만 아니라 융의 경우와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는 소년 중에는 자신이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 열등감,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헤세의 경우 자서전적인 요소가 강한『어린이들의 영혼』이나『데미안』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헤세가 심리치료를 받을 때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미안』에서도 싱클레어의 자기구현은 밝은 세계와 더불어 어두운 세계를 함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에 대한 예배도 해야 한다"라고 데미안은 말한다. 바우만은 부모에게서 비롯된 존재론적인 죄책감이 이렇게 헤세로 하여금 악의 합법화를 주장하게 만들었음을 지적하면서, 융이 <그림자>(악)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으로 개성화 또는 자기구현에 있어서는 전체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라고 말한다.
융이나 헤세는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정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융은 원시심성과 정신분열증 환자의 세계, 그노시스 수도승의 세계와 동방의 지혜, 인도의 요가, 노자의 철학, 티벳의 밀교(密敎), 그리고 선(禪)의 세계를 포용하였다. 융은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인간 정신의 전일성(Ganzheit)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즉 마귀의 세계, 물질의 세계, <소위 악>이 더 보충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아 신학자간에 많은 찬반의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헤세 역시 동양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백치』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러시아인들에게서 새로운 인간상을 발견했으며『데미안』에서는 그노시스트들이 세계의 창조자라고 부르는 데미우르크(Demiurg)와 배화교의 사상까지 수용하고 있다. 헤세는 "신의 목소리는 시나이에서, 성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사랑과 아름다움과 신성의 본질은 기독교에 있는 것도, 고대에 있는 것도, 괴테에 있는 것도, 톨스토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너의 안에, 너의 안과 나의 안에, 우리 모두의 안에 있다. " 라고 말하고 있다. 융과 헤세 두 사람에게 가장 큰 관심은 기독교적 이원론의 극복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헤세는 1차대전 기간 동안 융의 분석심리학을 접하게 되었으며 내적인 친화성으로 인해 그 후 융의 사상에서 많은 자극과 영향을 받았다. 심리치료 기간에 성립된『데미안』은 물론이고『싯다르타』와『황야의 이리』에 이르기까지 융의 심리학은 세계대전에서 1930년까지 소위 헤세의 중기의 문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헤세 소설의 대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자기구현의 개념은 물론이고, 융의 원형이론 역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대입이 가능한데, 자기(Selbst),그림자(Schatten), 아니마(Anima) 등의 개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자기구현(Selbstverwirklichung)과 자기(Selbst)
헤세는 1차대전을 전후하여 정신분석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났는데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는 그가 인간을 탐구하는 작가로, 인간에게 부여된 과제는 자기를 구현하는 것임을 인식한 일이다. 헤세가 세계대전 이후 서정적이며 향토적인 작가에서 인간의 자기구현의 과정을 탐색하는 작가로 변모했음은 지금까지의 헤세 연구가 공통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이다.『데미안』에서『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이르는 헤세의 소설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다른 성격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반복되는 주제, 즉 인간의 자기구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자기구현이라는 개념은 융의 심리학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 융은 그의 전기의 첫머리를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구현의 역사이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자기구현과 같은 의미로 융은 개인화(Individuation)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융에게 있어 자기구현이란 자기를 찾아 그것을 현실에 구현시키는 것으로, 이 작업은 자기원형(Archetypus des Selbst)을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자기구현의 첫 번째 과제는 자기를 찾는 일인데,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나의 전부, 의식에 나타나 있는 일회적이고 특수한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니 자기구현이란 다른 말로 하면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즉 자기구현의 핵심은 의식세계 뿐만 아니라 부정하고 싶은 무의식의 전체까지를 자기로 받이들이는 일이다. 헤세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업은 자기를 찾아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예를 들면『차라투스트라의 귀환 Zarathustras Wiederkehr』(1919)에서 그는 "너희들이 존재하는 것은 너희들 자신이 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데미안』의 서문에도 "나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우러나오려는 것만으로 살고자 했다. 그것은 왜 그렇게 어려웠던가? " 라고 탄식한다. 자기란 불완전하고 반쪽에 불과한 현재의 내가 아니라 무의식까지를 포함하는 완전한 미래의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도 포함하는 나이며, 설법의 세계와 관능의 세계를 합친 세계이며, 정신과 자연, 명상의 생활과 활동의 생활을 종합하는 세계이다.
융은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을 통일하여 완성된 전체를 이루도록 촉구하는 무의식의 형상을 자기원형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전일(全一)의 상징, 대극합일(對極合一)의 상징이다. 자기원형은 인간으로하여금 자기의 무의식을 깨우치고 그것을 의식화함으로서 잠재된 것을 모두 발휘하여 궁극적으로 의식된 전일의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자기원형은『데미안』에서는 데미안으로,『싯다르타』에서는 바수데바로,『황야의 이리』에서는 헤르미네와 파블로, 괴테, 모차르트 등의 불멸인 (die Unsterblichen)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이 자기를 발견하여 구현하는데 길잡이가 되는 이들은 싱클레어, 싯다르타, 하리 할러에게 모범적인 자기원형의 상(像)이 되고 있다.
헤세소설의 자기원형들 중에서 여성인 헤르미네는 하리 할러의 자기원형인 동시에 그의 아니마(Anima)가 되며, 그런 의미에서 헤르미네는 싱클레어에게 있어 베아트리체의 역할까지 함께하고 있는 셈이 된다. 주목할만한 일은 이러한 자기원형들이 양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미안의 모습은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고, 소년 같으면서도 성인같고, 시간을 초월한 모습이다. 이것은 베아트리체나 에바부인, 헤르미네 등의 양성적인 모습과 관련하여 헤세의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융은 인간이 무의식에 내재하는 가능성을 수용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자기구현 또는 개인화라고 하고, 헤세는 자기구현 또는 인간형성(Menschwerdung)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자기를 발견하여 그것을 의식화하고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마찬가지가 된다. 융의 제자인 폰 프란츠 Marie Louise von Franz는 소나무를 비유로 들어 자기구현을 이렇게 설명한다. 즉 식물의 씨는 미래의 그 나무 전체를 잠재적인 형태로 내포하고 있는데 흙, 바윗돌, 땅의 경사, 해나 바람에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씨앗에 내포된 식물의 전체성은 다양한 상황에 걸맞게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구현이란 자신의 내적인 인간본성을 남김없이 살도록 하는 과정이며, 다른 말로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남김없이 사는 것이 된다.
자기구현의 목표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의 단일성(Einheit), 융의 표현에 의하면 전일성(Ganzheit)에 도달하는 것인데, 자기구현에서는 한쪽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양쪽의 세계를 종합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전통적 기독교의 극복을 의미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선한 행동규범, 기독교적인 선(善)의 페르조나(Persona)만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러한 요구 때문에 소위 악이라고 명명되어 억제되어야만 하는 감정은 인간을 분열의 위기로 몰고간다. 자기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거부하고 싶은 자신의 나머지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 숨겨진 자아(Ich)의 이 어두운 면을 그림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림자는 그것이 처음 의식될 때에는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자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불량소년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는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악의 화신이자 자신의 그림자인 크로머와 대면한 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지도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선과 악, 신과 악마가 합쳐진 것이 자기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육을 받게 된다.
『클라인과 바그너』에서도 살인자 바그너는 삶에 지친 클라인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그를 따르며,『싯다르타』에서는 고빈다가 그림자로 싯다르타의 뒤를 따르고 있다. 지식인 하리 할러에게는 야성의 이리가 그의 그림자가 된다. 후에 할러는 마술극장에서 지성인인 평소의 모습과는 정 반대되는 자신의 가차없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황야의 이리는 전쟁놀이에서 재미를 느끼고, 모든 여자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마술극장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직시하면서 할러는 또한 인간이란 불변의 통일체가 아니라 임의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배운다. 할러의 자기구현은 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전 존재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구현이 단일성, 또는 전일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때 헤세에게 있어 그것은 선과 악, 정신과 자연, 부성적인 것과 모성적인 것, 지성과 관능, 외면과 내면을 통합하려는 노력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그 신〔기독교의 신〕은 선한 것, 고귀한 것, 부성적인 것, 아름답고 고상한 것, 감상적인 것이지. 그래 맞아. 그러나 세상에는 그것말고 다른 것도 있어." 라고 말한다. 도덕적인 하리 할러가 헤르미네와 그 동료들에서 학습받는 것도 선과 악의 경계선을 넘어 마술적으로(magisch), 즉 기존의 모랄을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새는 융 심리학에서 이러한 초월의 상징으로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고 하는데『데미안』에서도 싱클레어의 집 현관에 새겨져 있는 새의 문장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부영은 융에 있어 자기구현이란 농부를 농부로,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서양인을 서양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자기구현이 이루어질수록 사람은 평범하나 분수를 아는 사람, 반성할 줄 알며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헤세의 소설에서도 자기구현을 이룬 사람은 아웃사이더적인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자기구현의 마지막 단계에서 할러는 유모어라는 삶의 지혜를 배운 중년의 남자로, 싱클레어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가진 지성인으로, 싯다르타는 도(道)의 경지에 들어간 완성자가 된다.
「한편의 신학론 Ein Stueckchen Theologie」에서 헤세는 인간형성, 혹은 자기구현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철없고 무책임한 인간형성의 제1단계에서 일생을 보내며, 죄를 인식하여 절망에 빠지는 제2의 단계를 지나 신념과 축복, 또는 열반의 경지인 제3의 단계에 들어가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를 구현한 사람으로 헤세가 괴테, 모차르트, 부처, 노자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헤세가 말하는 자기구현이라는 것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죽음을 앞두고, 혹은 죽음을 통해서 자기구현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다. 싯다르타와 골드문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를 완성하며, 크네히트는 호수에 빠져 자연과 하나가 됨으로서 불멸의 세계로 들어간다. 융도 자기구현이 한 인간의 과제일 뿐 아니라 전 인류의 과업이라고 말하면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긴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완성에 가까운 자기구현을 성취한다고 말한다. 헤세의 소설에서는 정신(Geist)의 길을 꾸준하게 간 사람은 자기구현에서 실패를 하고 그 세계를 나와 자연(Natur)의 길을 간 사람은 자기를 구현한다.『싯다르타』에서 자기구현의 완성자는 평생토록 설법의 길을 간 고빈다가 아니라 세속으로 나온 싯다르타이며,『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는 조각가가 된 골드문트가 이룬 자기구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3. 동시성(Gleichzeitigkeit)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일 중에는 우연의 범주를 넘어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간혹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과성의 규칙과는 다른 법칙으로 융이 제시한 것이 동시성이다. 융의 동시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폰 프란츠는 찰스 다윈 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설을 예로 든다. 즉 연구에 열중하고 있던 다윈은 멀리 떨어진 모루카 군도에 있는 월리스 A. R. Wallace 라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어떤 글을 받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다윈의 주장과 거의 똑같은 주장이 써있었다는 것이다. 다윈이 전개시키고 있는 이론에 관해서 아무 것도 들은 바 없는 사람이 다윈에게 우연하게도 그의 학설과 똑같은 것을 써보냈다는 것이다. 초감각적인 지각을 통해서 정보가 전달되는 일은 위와 같은 동시적인 발견 또는 발명뿐만 아니라 꼭 알아야할 필요가 있는 일, 다시 말해서 친척의 죽음이나 소유물의 상실 같은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바 있는, 현실의 사건이 꿈으로 예시되는 경우에서도 동시성 현상은 설명될 수 있는데 가까운 사람이 꿈에 나타나 작별을 고하는 꿈을 꾸고 다음날 그 사람의 사망소식을 듣는 것 등이 그런 예라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동시성 현상을 무의식의 원형들의 작용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무의식에는 어떤 선험적인 앎이 내재되어 있는데 이 절대적 지식의 작용으로 사람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의식의 에너지가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무의식으로 흘러 들어가 강렬한 정감을 띤 원형들을 배열시키면서 무의식의 절대적 지식을 환기시킴으로서 일어난다고 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이 의식의 한계에 달했을 때 진지한 마음으로 물음을 던지고 역(易)의 점복(占卜)에 대답을 구하는 것, 즉 신탁(神託)에 의존하는 것이 바로 자기원형의 의도를 찾아가는 제식이라고 한다.『데미안』에 등장하는 수차에 걸친 의미있는 꿈, 수업시간에 데미안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싱클레어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일종의 독심술로 교사들의 심중을 제압하는 일, 전쟁의 예감 속에서 데미안이 요가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 역시 이러한 동시성의 작용 중의 하나이다.
『클라인과 바그너』에서 헤세는 동시성의 서술을 위해 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동시적으로 기술하는 <동시서술기법>을 택한다. 여기서 동시성은 초시간인 인식의 토대가 된다. 클라인은 물에 빠진 순간부터 목숨을 잃는 순간에 이르는 몇초 동안에 자신의 인생 40년을 되돌아본다.
"그의 곁에는 물 속의 물방울처럼 서로 바짝 붙어 다른 사람들 이 그를 향해서 헤엄쳐 왔는데, 테레지나가 헤엄쳤고, 노 가수가 헤엄 을 쳤고, 그의 전 아내가 헤엄을 쳤고, 그의 아버지, 그 의 어머니와 누이, 수천, 수천, 수천의 다른 사람들, 그리고 갖가지 형상과 집들, 티 치안의 비너스와 슈트라스부르크의 대성당, 모든 것이 서로 밀리고 밀 리면서 헤엄을 쳤다〔...〕.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인식이 그에게 온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죽음을 앞두고 클라인은 의식의 한계선에서 동시성의 체험을 한다. 물과 하나가 되어 커다란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유리알유희』의 크네히트의 죽음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그러나 물을 통한 동시성의 인식과 자기구현의 과정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은『싯다르타』가 될 것이다.『싯다르타』는 설법에서 자기구현의 길을 찾던 싯다르타가 세속으로 나와 사랑과 고통을 경험한 뒤 다시 그곳을 떠나 강가에서 바수데바라는 사공과 더불어 살면서 해탈의 경지에 드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융의 심리학에 있어서도 자기구현의 단계에서 결정적인 변화는 물을 건너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지만, 싯다르타는 강을 바라보면서 모든 고통과 공포는 시간에서 생기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강을 통해서 인생에서 시간만 지양하면 모든 과거의 생, 현재의 생, 미래의 생이 동시적인 것이 되고, 모든 것이 완전한 것으로, 브라만 (Brahman. 梵)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헤세는『싯다르타』에서 융의 동시성 개념을 시간의 지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시간의 차원을 벗어나 생각한다면 내가 부처이고, 돌이며, 동시에 도둑일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대상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진다. 싯다르타의 동시성에 대한 인식은 "모든 죄는 이미 그 안에 은총을 품고 있으며, 모든 어린아이들은 이미 백발노인을 그들 안에 가지고 있고, 모든 젖먹이들은 이미 죽음을,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의 단일성에 대한 인식과 연결된다. 단일성을 깨닫는 자리에서 객관적인 물리적 시간은 주관적 시간체험에 의해서 파괴된다. 그리고 동시성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의 투쟁을 그치게된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알고 나자 나는 나의 삶을 바라보았는데, 삶 역시 강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한낱 그림자를 통해서만 어른 싯다르타, 노인 싯다르타와 떨어져 있을 뿐이지 현실을 통해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前生)도 결코 과거가 아니었고, 그의 죽음과 범(梵)으로의 귀환 역시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변화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다양성과 단일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강물과 하나가 되는 것은 완성의 죽음이 되는 것이다. 초기작인『수레바퀴 아래서』에서『유리알유희』에 이르기까지 헤세는 물을 이러한 동시성 인식의 장소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강을 바라보면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간다.
동시성 사상은 동양의 사상과 연관이 있다. 융에 있어 동일성 사상은 서구의 사상과 더불어 중국의 도(道)와 역(易)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초에는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helm의 번역으로 중국의 사상이 독일에 소개되어 많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빌헬름은 도를 의미(Sinn)로 번역했는데, 융은 설명하기 어려운 이 도의 실체를 동시성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을 시도하였다. 도(道)의 상태는 한마디로 동시성의 인식상태, 형이상학적인 자아가 경험적 세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난 상태이다. 융에게 있어서도 동시성은 인과성의 법칙에 얽매인 서양적 관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헤세에서『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의 "모든 대립은 착각이다. 흰 것과 검은 것도 착각이고, 죽음과 삶도 착각이며, 선한 것과 악한 것도 착각이다"라는 구절은 노자를 상기시킨다.「짤막한 이력서」에서 헤세는 기차와 터널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다가 점점 작아져 기차를 타고 자신이 그리는 그림 속의 터널 안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빅토르의 변신』에서는 새가 꽃으로, 나비로, 수정으로 변하고 나무가 악어로, 물고기로 변한다.
『황야의 이리』의 마술극장 체험도 시공을 초월한 세계의 이야기이다. 마술극장에서 나온 할러는 "내가 오늘 어느 가면무도회에 가지 않았던가? 그 후로 백년이 지나갔다. 곧 연도(年度) 수도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태를 헤세는 동화적(maerchenhaft)인 상태, 마술적인 상태라고 부른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황야의 이리』의 마술극장의 <마술>이라는 의미도 확실해진다. 즉 마술극장이란 시간이 지양된 곳, 동시성의 인식을 하는 공간이란 뜻이다.
헤세의 초시간적인 이야기는『동방여행』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선뿐만 아니라 삶과 허구, 환상과 현실 사이의 벽마저 무너트린다. 여기에서는 허구 속의 인물과 현실의 인물들이 함께 여행단을 만들어 동방으로 가는데, 그들의 여행 목적지는 지리상의 어느 곳이 아니라 영혼의 고향, 영혼의 젊음이며, 어디에도 있는 곳,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동방여행단의 단원들은 동방으로, 중세로, 이탈리아와 스위스로, 10세기로, 부족사회로 여행을 한다.
『유리알유희』는 2400년대에 쓰였다는 2100년대의 인물의 전기로, 크네히트라는 인물자체가 20세기의 독자가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 설정되어 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시대에 지상에서 살았거나 그러한 생존을 가졌었다고 믿는 그런 남자의 복수적인 인생행로를 담을 것이다." 라고『유리알유희』의 집필에 즈음하여 헤세는 누이에게 쓰고 있다. 크네히트가 남겼다는『유리알유희』에 첨가된 세 편의 이력서에도 시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예를 들면「인도의 이력서」에서 주인공 다자Dasa는 샘가에 앉아서 찰나의 순간에 회전하는 삶의 수레바퀴를 경험한다. 그는 인생유전을 순간적으로 경험하면서 삶의 온갖 환희와 쓰디쓴 고통이 유희이며 가상, 미망임을 각성하게 된다.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서 그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갖게된다.「인도의 이력서」는 불교의 윤회설을 상기시킨다.
동시성이 융에게 있어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원형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현상이라면 헤세에게 있어 그것은 세상의 단일성을 각성하게 하는 내적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성의 극복,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서술기법이라는 점에서 20세기 초반의 제임스 죠이스, 버지니아 울프, 로베르트 무질 등의 새로운 소설기법과도 연관이 있다.
4. 양성적 여성과 아니마
헤세의 소설에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 예컨데『유리알유희』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헤세 소설 속의 여성 인물들은 소설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첫 번째 그룹은 소위 여성적인 여성, 혹은 관능의 상징으로서의 여성이고, 두 번째 그룹은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여성, 조화와 단일의 상징으로서의 여성이다. 이 두 그룹의 여성들은 한결같이 주인공들의 자기 구현과정에 있어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첫 번째 그룹의 여성들은 정신의 세계만을 알고 그 세계의 가치만을 인정하려는 주인공들에게 자연의 세계를 알게 하는 매개자가 된다.『싯다르타』의 카말라,『황야의 이리』의 마리아,『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골드문트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리제에서 아그네스에 이르는 여성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은 개성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관능에 대한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성격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매우 관능적이지만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 여성들과 주인공과의 관계는 잠정적인 것이다. 그들은 주인공들과 일정한 기간, 단기간동안 관계를 맺을 뿐이다. 카말라는 싯다르타의 삶의 제2단계에서, 즉 그가 도시에 머무는 동안 싯다르타와 관계를 맺을 뿐이며, 마리아 역시 헤르미네의 지시에 따라 잠시동안 할러의 곁에 머물 뿐이다.
헤세의 소설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두 번째 그룹의 여성들, 즉 양성적인 모습의 여성들이다.『데미안』의 베아트리체와 에바부인, 『황야의 이리』의 헤르미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베아트리체는 "크고 날씬하며〔...〕똑똑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얼굴에는 우월감의 흔적과 소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남성의 복장으로 가장무도회에서 할러와 춤을 추는 헤르미네는 할러의 어린시절 친구를 기억나게 하는 모습이다. 에바부인 역시 "크고, 거의 남성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아들과 비슷하며, 모성의 모습과 엄격함의 모습, 깊은 열정의 모습, 아름답고 유혹적이며 아름답고 가까이 갈 수 없으며, 악마이며 어머니, 운명이며 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에 있어서 이원적인 것의 통합적 인식, 즉 단일성의 인식은 그들의 자기구현에 있어 중요한 과제가 되는데 양성적인 여성,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어머니의 상은 완전성에 대한 상징이 된다.『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어머니에게는 우아한 외모 아래 어딘가에 모든 무시무시하고 어두운 것, 모든 욕망, 모든 죄악, 모든 출생, 모든 죽음의 필연이 있었다." 나르치스의 자기구현은 이러한 어머니를 발견하여 어머니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발견한 어머니는 죽음이었으며 그는 행복 가운데 이 죽음의 팔에 안긴다. "어머니는 집시 여자 리제였고, 어머니는 스승 니콜라우스가 만든 아름다운 마돈나였으며, 어머니는 사랑, 쾌락이었고, 불안, 굶주림, 충동이기도 했지. 그러나 이제 어머니는 죽음이야. 어머니는 손가락을 내 가슴에 넣고 있어" 라고 조각의 완성을 촉구하는 나르치스에게 골드문트는 말한다.신화나 예술에 나타나는 모든 양성적인 존재는 완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헤세의 이러한 양성적인 어머니상은 융에 있어 모성원형(Mutterarchetypus)으로서의 어머니가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기도 하나 또한 죽음을 포용하는 이중적 존재라는 사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융은 남성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여성적 요소 즉 아니마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어머니라고 불렀는데, 이 아니마는 자아와 자기 사이의 중개자로서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폰 프란츠는 부정적인 아니마상(像)으로 독부(毒婦)나 마녀를, 긍정적인 아니마상으로 인류의 어머니인 이브,『파우스트』의 헬레나,『신곡』의 베아트리체, 아가(雅歌)에 나오는 술람의 아가씨 Shulamite, 모나리자, 성모 마리아, 불교의 관음보살, 회교도의 파티마 Fatima 등을 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니마상들이 본능적이며 생물학적, 성적인 여성상에서 고양된 정신적, 종교적인 여성상으로 단계가 나누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인류를 인도하는 최고의 아니마상은 관능적인 여성, 소위 말하는 여성적인 여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여성, 양성적인 여성이라는 것이다.
헤세의 소설에서 대표적인 아니마상은 애인이며 동시에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상은 주인공의 인생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베아트리체는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던 데미안을 성스러운 나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데미안이 전쟁터에서 전해주는 에바부인의 키스는 싱클레어에게 자기구현이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거리의 여자인 헤르미네는 절망에 빠진 지식인 할러에게 인생의 교사가 된다. 그리고 조각가가 된 골드문트의 마지막 목표는 그가 사랑했던 모든 여성들의 상이며, 이브의 상, 성모 마리아의 상이기도한 어머니의 상을 조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죽음이기도 하다. 나르치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각을 완성하는 대신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행복의 원천이자 죽음의 원천"인 어머니의 뜻에 따라 죽음이 첫사랑만큼이나 커다란 행복을 갖다줄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서 죽음을 받아들인다.
융은 모성원형이 대지의 곡신(穀神)과 같은 인격상뿐만 아니라 천국, 낙원, 교회, 바다, 정원, 나무, 샘과 같은 모성원형상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헤세에 있어 이 모성의 상은 예술, 죽음, 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도록 만들고, 골드문트 역시 어머니의 상을 좇아 조각가가 되지만 결국 어머니의 새로운 명령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인다. 싱클레어가 부상당한 채 데미안으로부터 전해 받는 에바부인의 키스 역시 죽음의 냄새를 담고 있다. 싯다르타가 삶의 지혜를 배우는 강, 또는 크네히트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호수 역시 여성적인 세계, 어머니의 상징이다.
헤세의 소설에서 익사는 어머니와 하나가 되는 것, 자연과의 합일을 뜻한다. 세상을 떠나면서 골드문트가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에게 하는 말, "하지만, 나르치스, 당신은 어머니가 없으니 나중에 어떻게 세상을 떠나려고 합니까" 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르치스의 삶은 학문과 종교의 세계, 헤세가 말하는 <아버지의 세계>로 일관된 까닭이다. 일생을 수도원에서 학문의 세계에 몸담아온 나르치스는 수도원장이 되었지만 사랑과 예술의 세계에서 방황한 골드문트가 찾게된 어머니를 마지막에 이르도록 결국 찾지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헤세의 소설에서 물은 선과 악의 저편, 행복한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익사는 어머니와의 포옹, 즉 근원과 종말을 결합시키는 것, 인류의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이다.『페터 카멘친트』에서 리하르트는 "보잘 것 없이 작은 남독의 어느 강 "에서 수영하다 목숨을 잃는다. 싱클레어에게 어머니는 "내가 물결따라 흘러들어갈 바다" 이며, 물에 빠져 죽은『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에게는 "지나간 인생의 즐거움이 마치 흘러가는 물결처럼 되돌아 온다." 개울가에 쓰러진 채 죽음과 대면하면서 골드문트는 "그때 나는 그것이 그녀라는 것을, 어머니가 내 곁에 와 있으며 나를 무릎에 안고 있음을, 어머니가 나의 가슴을 열고 나의 심장을 꺼내기 위해 손가락을 나의 갈비뼈 사이에 넣고 있음을 알게 " 된다.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가장 중요한 아니마상은 애인이며 어머니인 모성원형으로서의 어머니상인데, 이 어머니는 종종 죽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아니마상이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것은 세계의 단일성, 혹은 완전성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헤세의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최근 들어 더욱 더 많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으며 헤세의 소설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융 학파의 정신과 의사인 랑 박사에게서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시작된 헤세와 융 분석심리학과의 관계는『데미안』을 위시한 헤세의 소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헤세의 소설에서 주제가 되고 있는 자기구현이 융이 말하는 인간의 마지막 목표이며, 헤세 소설 속의 여러 인물들이 융 심리학의 그림자, 아니마, 모성원형, 동시성의 개념으로 그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질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헤세의 소설에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양성적인 여성의 모습인데 단일성, 혹은 완전성의 상징인 이 어머니는 헤세의 소설에서 자기구현의 완성단계에서는 죽음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융이 말하는 최고 단계의 아니마가 갖는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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