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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감동깊은1001

당첨 주부의 삶

by 추홍희블로그 2005.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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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앞서나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은 아직까지는 늦다. 초고속인테넷가입자수와 핸드폰사용자수가 국민당 세계최고라고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아직까지는 상당히 세계적 수준과는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발전하는 한국 무시하는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 말이라고 치부하거나  자격지심이라는 반론 만으로는 부정기 힘든 시회구조적인 면이다.
 이제야 호주제가 폐지된다는 지경인데 벌써 후기페미니즘 을 논한다고 하면 반시대적 반동아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세계는 보수화 물결이 분명하듯이 페미니즘에도 이미 후기 페미니즘의 등장은 (페미니즘을 거부할 수 없듯이) 거부할  없는 사회현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성숙 단계에서 쇠락의 길로 바로 접어 들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세계적 추세는 (낙태법의 수정의 흐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강경 페미니즘은 전성기(heyday)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 나라는 이런 세계적 흐름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뒤치지는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벌써 후기페미니즘을 말한다는 것은 양성 평등을 제대로 누려 보기도 전에 다시 여성 굴레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반동인가 하면서 척박한 한국적 현실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치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페미니즘은 세계적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으며 양성불평등의 한국의 미개적 현실은 한국 여성들의 책임 부분이 훨씬 크다는 자각이 잇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 한국여성 유권자가 한국의 양성평등의 진보적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적 후보자에게 투표를 행사하기 보다는 호리혀 그 반대의 보수적 성향의 정당이나 그 정당 후보자를 지지한 반여성주의 행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미숙한 정치적 판단력은 페미니즘의 오류이다.


영화가 세상 이해의 바로미터가 되는 결정적 척도는 아니지만 영화는 사회 흐름의 일단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설명하는 기능은 충분히 하고 있기에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봄으로써 이런 후기 페미니즘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거다. 

 

요즘 처럼 자녀 낳는 것을 기피하는 그래서 인구감소를 우려하고 자녀를 낳으면 국가에서 혜택 보조를 받는 저출산 시대에서  영화는 10 자녀를 키워내는 '억척의 엄마' 고속성장기 1950년대 전형을 화면 시작으로 나타낸다.  현모양처 역에 어울리는 줄리엔 무어 의 연기로 더욱 가치를 높힌다.

 

 집안의 행복을 위해서 온가자 뒷바라지를 하였고 남편이 성공한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냈지만 그 성공도 불행을 잉태하고 '여자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때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을 나태낸 '가정은 결코 천국이 아니었어' 하면서 전형적 주부의 회의적 시각의 의문을 나타낸 줄리앤 무어의 영화 '천국(행복은) 멀리 'far from heaven' 영화가 2002년 개봉작이라면 그 결과가 역시 주부는 주부다워야 한다는 가정주부의 삶의 역설이 그 답인 2005년 이 영화인지 독자는 확인해야 할  것이다. 

 

'행복은 멀리'에서 줄레앤 무어는 남편만을 위해서 살아온 그래서 성공 사장 (이사) 자리에 까지 오른 남편이 어느 날 아내를 멀리하는 '동성연애자' 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도 신분이 낮지만 자기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마음 뜨거운 자기집 정원사에게 마음이 끌림을 알지만 결국 사랑한 남자를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 이 영화에서는 육체적 불륜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속 간음도 불륜이라면 할말이 없지만) 가정주부 줄리앤 무어의 고민의 답이 1950년대 여자가 주부의 역활로 회귀하자는 결론인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영화는 단순하지 않다.  직장과 집안 사이에 갈등을 느끼야 하는 요즈음 세상의 맞벌이 주부가  아닌 1950-60년대 이지만 애 들 키워내기에도 벅찬 '돈못벌어다주는' 그러면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무능력한 남편을 가지고 10 자녀를 키워내야하는 주부로써 

애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주부가 '글을 써낸다.(요즘으로 치면 프리랜서라고 당당한 직업이 되겟다.) 

그렇다면 영화는 가정과 일을 모두 해 내는 거기다가 여자의 잠재능력까지 발휘하여 여자의 정체성 위기 (내면 위기)를 격지 않는 그야말로 여자의 3중역활을 모두 해내는 '슈퍼우면'을 요구하는가?

 

아내요 엄마요 자기자신인 3 역할의 완벽한 조화인 '수퍼우먼'이 후기 페미니즘인가?

아니면 현모양처

자기자신>엄마>아내    아니면 엄마>아내>여자의 모델인가?

 

영화에서 답은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자녀를 훌륭히 키워낸 엄마의 역활이다.   영화는 그 딸이 자기 엄마의 삶을 그려낸 책을 바탕으로  한 실화이기 때문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년 개봉) 처럼 자서전이 아니고 )' 1950 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천국은 멀리'=2002 개봉작'처럼 아내의 위치가 아닌 딸이 펴낸 엄마의 이야기이기에 '여자'는  가장 우선 순위가 '엄마' 라는 것- 이게 '후기 페미니즘'? 그렇다면 수퍼우먼위 포기인가 페미니즘의 포기인가?  나의 물음 (나를 신보수적 이라고 공격하는 것 미리 차단키 위해서) 이다.    

   

영화 제목은 'The Prize Winner of Defiance, Ohio.

도시 이름이 우연히도 Definance (반항) 이다.  무엇에 도전한다는 것인가?  영화에서는 제목처럼 간단하다.

 

영화의 정치성은 거부하지만 영화도 말이 바탕인바 제목으로 어떤 전달 의미가 있는지는 알아 볼 필요도 있다 (물론 이런 나의 호기심은 어제 글의 '빵과 튜울립"이라는 이태리 영화에서 '튜유립 투기' 역사로 '불륜의 투기'를 연관시킨 해석의 뛰어넘기 로 치부할 수 있는 개인적 평가일 뿐 인 우연이라는 것으로 영화의 작품성과는 별개인 그야말로 사족인 거다.

 

원작가 는 미국 오하이오 주 defiance 시에서 1950년대에 태어나 1969년에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영화 배경 그대로 1950-60년대 미국의 고속 성장기를 보낸 베이비 붐 세대이다.  1998년 자기 엄마가 죽고나서 책을 썼다고 한다.    오하이오 주라면 '오하이오의 강둑' 이라는 노래 처럼 강이 흐르고 있다.  defiance는 시는 오하이오 주 시골에 있는 도시이다.  최소한 시골과 도시의 분위기는 있을 테고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인디언들이 반항하는 격전지라는 인상을 도시이름에서 받는다.  (물론 도시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로또 당첨이 '되지도 않을 확률'에 도전(defiance) 하는  것이니 영화의 주인공처럼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 무모한 확률에 도전하는 거지만 그 도전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

 

영화를 후기 페미니즘의 단초로 연관시켰는데 우연의  일치이지만 분명한 제시는 말 그대로에 잇다.  제몯 등장의 도시 이름이지만 defiance 뜻은 나타난다.  페미니즘에 도전하는 것일 수도 도를 넘어서는 '역차별' 과도한 평등주의에 도전(PC) 일 수도 있다. 

 

오하이오 주는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당정권 부시 대통령을 결정적으로 탄생시킨 최후격전지 였다. 박빙의 오하이오 선거 결과에 따라 미국 대통령이 결정된 것이다.  이전 선거에서는 민주당우세였던 오하이오 주 도시와 농촌이 혼재하는 오하이오주의 선거판세가 보수 진보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확인해 준 것처럼 말의 우연은 여러 가지 해석으로 재미를 더하게 만든다.  최소한 나에게만은.    

 

요새 세상에 누가 10명을 자녀를 놓을 것이며 어느 주부가 방바닥을 딱고 잠자리를 쓸고 식탁을 딱고. 무능력한 남편 술주정을 받아주겠나먄. 

 

암튼 '수퍼 히로 Super Hero'는 남편도 자신도 아닌 '애들'이 평가한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보는 '애들의 눈'은 항상 정확하다. 우리 나라 말에 '애들 보고 참고 산다'는 말이 이것을 말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옳다고 확신한다.   암튼 주인공은 말한다. 

 

"Everything is Possible. 모든 것은 가능하다."  이게 나와 너 모두 누구나 도전해야 하는 '도전( defiance) 이다.

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