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떻게 임무를 달성해 낼 것인가?
“忠臣藏”(충신장)은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진수를 나타내준다고 흔히 말하는데 충신장 47인 의사들이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47인 무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 뜻을 세웠고 그 뜻을, 모든 난관을 뚫고 즉 최고권력에 맞서서까지 정해진 시간내에 한정된 자원으로 정해진 목표를, 달성해냈다는 것에 있다.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영웅으로 칭송받은 까닭은 한정된 자원과 제한된 시간 가운데 전략적으로 움직여 목표를 실행해냈다는 그러한 전쟁 전략의 성공과 또 그것을 이끈 사람의 정신의 위대함에 깊은 공감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가 죽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는 소크라테스의 삼단논법을 거들멱거릴 필요도 없이 장삼이사 초동목동도 다 알고 있는 진리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물과 공기는 무한정이라고 하지만 무한정인 물과 공기마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가능할 뿐인 원초적 제한성을 갖고 있다. “돈이 전부”라는 요즈음같은 극도의 이기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많은 황금과 다이아몬드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충신장을 흠모했고, 어릴 적 세웠던 목표를 내 죽기 전에 이룩해냈다. 모두가 버리고 간 돌 하나에서 세상의 진실을 되찾는 거대한 역사 혁명을 이끄는 문무왕릉비와 첨성대 연구 작업을 완성해낸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돈과 한정된 지식을 전략적으로 배분하면서 학해의 바다를 건너 어릴 적 세웠던 목표를 달성해낸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과연 옳은 말이지 않을까?
어떻게 임무를 달성해 낼 것인가?
조지 오웰은 글쓰기의 동기를 4가지로 들었는데 개인적 동기가 내게는 가장 강하다. 왜냐하면 언젠가 비문을 꼭 해석해내리라는 어릴 적에 품었던 꿈을 이제서야 이룬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진화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일어나고, 혁명의 꿈은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진다.[1] 내 가슴 속에 품었던 이제까지의 생각을 이 책을 통해서 이제 세상에 드러내니 감개무량하다. 장자가 말한 “盡其所懷 爲天下配”(진기소회 위천하배)의 포부로써 말할 수 있다. ‘도는 천하의 도이다. 그것을 품 속에 넣어 감출 수 만은 없다. 천하에 충만하고 후대 만세까지 행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같이 가슴 속에 품은 것을 흉금없이 털어 놓고,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한반도 선조는 역사와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추노성지 즉 공자와 맹자의 고향 노나라와 추나라에서 나온 사람들이고 따라서 공맹의 문화와 지식을 뼛속까지 지니고 있는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다. 멀리는 공맹성지 산동 동남해 바닷가 지역 맹모삼천의 나라인 추나라의 후손들로서 어찌 공맹성자의 가르침을 잊을 수 있겠는가? 맹자의 말씀은 욥기의 말씀에 그 의미가 같이 닿아 있고 그렇게 나의 삶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한 성인의 가르침이다. 그 맹자의 구절을 인용한다.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為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그러므로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마음과 심지를 괴로울 정도로 굳게 하고, 근육과 뼈대를 아프고 닳도록 하며, 몸을 굶주리고 핍박받게 하여,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일이 뜻대로 되지 않게 몰아가고 험란하게 만든다. 이는 참고 견뎌내는 마음을 불러내 일으키게 함이요, 이를 통해서 마침내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일까지를 해낼 수 있게 함이라.
人恒過 然後能改 困於心 衡於慮 而後作 徵於色 發於聲 而後喻:
사람은 허물이 있고 난 뒤에야 잘못을 고치게 되고, 마음이 고달프고 근심과 걱정으로 균형추를 잃고 난 뒤에야 작심하고 분발하며, 얼굴 안색이 변하고 큰 소리로 소리치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다.
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 然後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
나라가 온통 불법이 판치고 올바른 사람들이 없어지면, 결국 호시탐탐 노리는 적국이나 외부로부터의 환란을 방어해 내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 여튼 사람은 갖은 곤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남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며, 이리하여 편안하게 삶을 마치는 인생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2. 나는 어떻게 비밀을 풀었는가?
① 삼천년 동안 잠자던 트로이 유적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하인리히 슐리만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14세기경에 벌어졌다고 고고학적으로 규명되었다. 트로이 역사가 알려지게 된 것은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라는 문학작품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쓴 호머는 기원전 700년의 사람이므로 그가 트로이 전쟁을 배경을 묘사한 때는 토로이 전쟁이 끝나고도 그 후 약 5-6백년이 지난 시기였다. 비록 인걸은 간데 없지만 산천은 의구하다는 익숙한 싯구와 같이 호머가 묘사한 트로이의 산천은 실제 묘사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호머의 배경 묘사에 어려서부터 크게 감명 받았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에 의해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트로이의 유적이 1868년에 드디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슐리만은 어린 시절 호머의 문학 작품을 읽고서, 트로이의 성지가 실제로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가졌었다. 그는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리라는 어린 시절의 꿈을 쫓았고, 마침내 흙 속에 묻혀 3천년 동안 잠자고 있던 역사를 소생시키는데 크나큰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트로이 유적은 그가 발굴하기 전 그 자리 그곳 거기에 줄곧 있어왔다. 다만 사람들이 구성한 역사 속에서 잊혀졌을 뿐이다. 슐리만은 그 역사를 거슬러 어떻게 찾아냈을까? 그것은 첫째로 어려서 감명깊게 읽었던 호머의 작품이 전하는 바를 스스로 믿었고, 그 꿈을 일구겠다는 열의를 가졌으며, 그 꿈과 열정을 실천할 수 있는 도구를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슐리만의 업적을 이루게 만든 도구는 언어이었다. 슐리만은 모국어인 독일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영어는 물론 이고 라틴어와 그 이외 유럽 주변 여러 언어들을 망라할 정도로 여러 언어를 터득했던 바 그런 언어의 도구를 이용하여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 내는 개가를 올릴 수 있었다.
내가 글자를 배우기 이전 보았던 비석들에 새겨진 한문들을 보면서-어릴 적엔 읽어내지를 못했으니- 다음에 커서 언젠가는 제대로 의미를 깨우치리라는 의지를 다졌다. 역발산기기개의 항우가 어릴 적 “書足以記名姓而已”(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하다)고 말하며, 무력에 의한 패권 추구와 중원 통일의 꿈을 키웠는데, 나는 그와 반대로 영어 표현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펜은 칼보다 힘이 더 크다)는 뜻의 문화 덕화 교화의 가치에 보다 더 큰 비중을 두었고, 항상 ‘글의 힘’[2] (the power of language)을 믿었으며,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 신성시하며 책은 발뒷금치로도 넘지 않고 애완동물 다루듯 사랑했다. 우리집 기둥에 매달아 놓은 “명심보감” 책을 장백단이 매달아놓은 굴비고기 쳐다보듯 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꿈꿨다.[3] 할머니는 동짓달 시린 밤 손자들을 위해 다락방에 꼭꼭 감춰둔 군고구마의 정을 심어주셨는데, 우리들이 어렵게 살던 보릿고개 시절,[4] 어머니부터는 오태백의 겸양지덕을 아버지로부터는 엄격한 ‘충신장’의 길을 배웠다.
트로이 유적은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해 왔고, 그 동안 유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 왔건만 오로지 슐리만의 호기심과 탐구 덕분에 새로운 발견이 성공한 것이다. 그의 발견은 어려서부터 꿈을 좇았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의 직관에 의해서건 지식을 추구한 노력에 의한 개인적 성취인가? 아니면 어떤 신의 계시에 도움을 받아서 이룩한 것일까? 나는 정확히 구분해내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시사하듯, 직관이든 계시이든 어떤 외부적 도움을 받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준비하고 꿈을 실행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② 나는 어떻게 비밀을 풀었는가?-“힌트와 추측일 뿐, 추측이 따르는 힌트일 뿐”
근대 사회학의 태동은 뒤르껨과 막스 베버에 의해서 정립되었다. 이들은 내가 아닌 다른 개인들의 행동을 통해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다는 지식터득의 방법론을 적용하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또한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자서전 등의 케이스에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사회는 구성원의 전체적인 합 이상의 그 무엇으로써, 구성원 개인들과는 독립적일지라도 그 구성원들에게 나타나는 행태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을 재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진실은 자기 자신이 직접 평가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정신분석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던 기초는 자신의 직접적인 외디푸스 콤플렉스 심리적 경험이었으며 또 그것을 다른 사람의 작품과 연결시킬 수 있는 상호 관찰 작용의 덕분이었다. 사람의 행동은 남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모방성, 행동성의 성격에 기인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분석과 사람들의 관계성은 노자 도덕경에서 또한 찾아진다.[5] 프로이트가 수긍했다시피, 비록 진정한 자기 분석이란 불가능한 작업에 해당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주고 받는 작업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금석문이란 남의 글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듣고서 객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대상이다. 여기서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엘리어트는 말했다. “힌트와 추측일 뿐, 추측이 따르는 힌트일 뿐”[6]. 이러한 나의 방법론을 대략 말하자면, 우선 개념을 정의(definition)하고, 이에 따라 분류해 나가고, 그것을 다시 재분류(subdivision, department) 세분해가는 체계적인 방법론에 해당한다. 이는 전제와 가정(assumption)을 먼저 하고 그 바탕 위에다 자신의 것을 추가하는 일 처리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법조인들이 이런 체계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아마도 동일한 개념에 대해 같은 정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논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론은 뉴튼의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기 때문이다”의 고백해서 알 수 있듯이, 선례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일구어 내는 통합적 방법론에 가깝다.[7]
나의 연구 방법론은 사전적 정의와 그 의미 설명을 추구하므로, 객관성(objectivity)을 확보하는 객관적인 분석(objective analysis) 태도를 취한 실증주의 (positivism) 방법론에 해당한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에서 나의 새로운 생각이 도출된다.
참고 문헌
나의 연구는
① 이 책을 완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판독문 문헌 자료는 《海東金石苑》(劉喜海(1794-1852)의 편찬 1881년 이명초당 발간)과 청나라 육심원(陸心源)의 편저 “唐文拾遺” (1888)이었다 이러한 지식 전승의 인류 보편성 확보에 큰 노력을 다한 편자들과 발행인 그리고 보존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② 기존의 번역과 해석을 제쳐 놓고, 오로지 비문 원문만 보고 나만의 번역 해석 작업을 홀로 완성해 내서, 기존의 번역과 해석이 내가 완성한 원문 해석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의 도전적 반론이 얼마나 또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객관적인 시각에서 합리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③ 문무왕릉비 비문 해석에 대한 나의 설명과 이에 대한 객관성의 확보는 漢文 중국어 사전의 설명에 의존하였다. 이 책을 씀에 있어 저자가 한문 원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서술하거나 인용하는 경우는 《漢語大詞典》《康熙字典》《辞海》 한어대사전과 강희자전과 사해 중국어 사전을 주로 이용하였다. 또 《新华字典》《现代汉语词典》 등의 중국어 사전 또는 간혹 일본어 漢和 사전을 참고한 적은 있으나, 한국에서 출판된 옥편이나 중국어 사전 등은 참조하지 않았다. 한자 사전은 대만과 중국의 한자 사전 사이트에 주로 의존하였다:
http://www.ivantsoi.com/; http://www.hydcd.com/; http://hy.httpcn.com/;
http://tw.ichacha.net/; http://www.zdic.net/; http://www.guoxuedashi.com/;
https://www.moedict.tw 그 이외 일본어 사전 goo 辞書 http://dictionary.goo.ne.jp/
옥스포드 영어 사전 https://en.oxforddictionaries.com/ 사용하였다. 다수의 漢典 인터넷 사이트가 한자 사전의 편리한 검색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이 책 속에서 한문의 뜻을 설명하거나 번역이나 해석함에 있어서 인용한 사전에 들어 있는 원문의 해당 페이지 쪽수는 밝히지 않고 생략했다.
④ 道敎(도교)에 대한 이해는 노자 장자 문자 열자 등의 원전과 설명서를 탐독했고, 학문적인 연구서로써 기본서는 《Daoism Handbook》《The Encyclopedia of Taoism》을 완독하고 연구서들을 섭렵했다. 사전은 《道敎小辞典》《道敎大辭典》을 활용하였다.
⑤ 《Daoism Handbook》을 읽으면서 도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높이게 되었으며, 《The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을 읽으면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반악과 장재와 유신의 문장들을 《昭明文選》《庾開府集笺注》을 통해서 읽고 또 《前漢書》와 《晉書》와 《周髀算經》 등을 읽고 나서 저자의 책의 시작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⑥ 사마천의 史記, 반고의 漢書, 방현령의 晉書는 《二十四史》를 이용하였다. 사마광의 資治通鑒은 柏杨白话版资治通鉴과 한국의 고전문헌번역DB를 참조하였다. 三洞瓊網을 포함 “道藏”(도장)은 正統道藏(정통도장)을 참고하였다. 또 이런 자료들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 등 인터넷 제공 소스를 활용하였다.
③ 왜 여지껏 큰 성과와 발견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창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가?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유명 대학도서관 그리고 전자도서관 검색 등의 방법을 통해서 관련 연구서들을 섭렵하고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저자가 찾고 싶었던 연구 결과 내용에 가까운 자료는 찾질 못했다. 그리하여 황야를 걸으며 혼자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또 나의 생각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하는 글들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일이 자구 하나 하나 해석을 스스로 확인해 나갔고 또 다른 사람들이나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였다. 대신 나의 글을 완성한 후, 세상의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8] [9] [10]에서의 태도를 견지하며, 평가받을 것을 스스로 약속했다. 이러한 나의 자세는 상앙의 상군서에서 스스로 배웠고, 상군서의 구절을 각주로 인용한다.[11]
새로운 발견은 외부적 시각에서 전혀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한 성취해내기 쉽지 않다는 와호장룡의 어려움이 있거나 또는 어떤 직관적이거나 계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직관력을 가지기 힘든 이유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습관적 태도에 있다. 만약 나의 연구 결과 가운데 직관이나 계시적인 생각이 통했다면 그것은 한국과 여러 외국의 문물과 사고를 직접 겪어 보고 스스로 통찰한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발견의 과정에서 어떤 내적 가슴 속에서 나오는 영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내가 우주천체의 근원적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성적 능력으로써가 아니었다. 지성은 발견의 과정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적 가슴 속에서 튀어 오르는 무언가에 있는데-그것을 직관 또는 무엇을 하려는 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해결책이다.”[12]
우주 질서의 법칙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인간은 거기에 이미 존재한 진리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삶을 발전시켜 왔다. 우주는 ‘빅뱅’하고 원자 분자 운동처럼 잠시도 쉬지 않지만, 뉴튼 아인슈타인 등 위인들이 말해주듯이 인간은 침묵 속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천체를 관측한 뒤 그가 발견한 진리를 담은 책 제목을 “별의 메신저”라고 붙인 것은 사람은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천체 관측과 원자 운동(DNA 나선구조)의 발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외양과 실체는 다를 수 있다. 사람의 논리와 감성과 이성에 의한 ‘해석 작업’(interpretive process)이 없다면 진리는 발견되기 힘들다.
권위에 짓눌려 완전성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니이체의 지적을 참고로 적어둔다.
[1] 한비자, 화씨지벽 설명 부분 이하 참조. “夫珠玉 人主之所急也 和雖獻璞而未美 未爲王之害也 然猶兩足斬而寶乃論 論寶若此其難也 今人主之於法術也 未必和璧之急也 而禁群臣士民之私邪 然則有道者之不.也 特帝王之璞未獻耳”. 또 ‘희망’에 대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국가 개입의 필요성과 정당성 주장한 “페비안 협회” 이념-영국 노동당 이념 기초-을 참조하라. (Pease, “The History of the Fabian Society”, 1916).
[2] Words do indeed make worlds. Saying what we believe and believing what we say. ‘言靈信仰’을 참조하라. 한편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조지 오웰의 언어의 타락에 대한 우려를 참고하라. 또 프랑스 한림원의 탄생과 그 의무 그리고 프랑스의 원형 프랑스의 정신을 계승하고 전승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자 최후의 보루로써 심혈을 쏟아 발간하는 프랑스어 사전 편찬 임무의 프랑스 한림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역할을 참조하라. 참고로 짧게 보충하면, 오웰은 정치와 영어의 관계에 대해서 짧게 평했는데, 정치의 타락과 영어의 타락은 상호 밀접하게 영향을 준다고 봤다. “In our time, political speech and writing are largely the defence of the indefensible”. 우리 시대에 정치적 말하기와 글쓰기는 대체로 방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방어이다. 홍길동이가 말한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세상에서는 추상적인 완곡화법-euphemism유퍼미즘-은 거짓말이나 기득권 체제 유지의 선전 수단이 된다. 한편 ‘PC’가 사회를 변혁시키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볼 수 없다. ‘Political Correctness’ 또한 정치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장치가 된다.
[3]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한시도 빠지고 않고 얘기하신 추씨 가문의 선조 노당(魯堂) 추적(秋適, 1246-1317) 선생이 펴낸 “明心寶鑑”(명심보감) (16세기 말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서양 최초의 동양서 번역에 해당하는 책으로 20세기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영어책명은 “The Precious Mirror of Bright Mind”), “명심보감” 이 책을 장백단이 기둥동량에 매달아두며 매일 쳐다본 굴비고기와 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쳐다보면서 자랐다. 나는 언제나 언어의 마력을 믿는다. ‘글의 힘’에 대한 신앙적 형태는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보다 쉽게 확인된다. 일본 신도의 코토다마 신앙 ‘言靈 信仰’(언령 신앙)이 그것인데, 이러한 글의 힘은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면 초기 심리학자로 유명한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 이론-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은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최근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에 가깝다.
[4] 추홍희, “이스털린 경제학” 책 가운데 빗나간 케인즈의 예언을 설명하는 다음 부분을 참조하라. 케인즈는 마르크스가 죽은 해인 1883년에 태어났다. 경제학자 케인즈의 머리속에 자리잡은 테마 하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혜롭고 즐거우며 또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가?”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의 전화로 유럽이 황폐화되고 지성의 힘이 흔들릴 때 케인즈는 러시아 혁명의 사례 같은 폭력이 수반하는 급진적 변화에 기대지 않고서도 자본주의를 절대절명적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1929년 뉴욕주식시장의 대폭락으로 대공황이 일어났다. 1930년대 대공황은 심각한 경제불황에 빠져들었고 실업자로 넘쳐났다.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의 시대”이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힘든 시대이었다. 거듭된 정부의 경제실책으로 인해서 실업은 비정상적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암울한 절망 속에서 빠져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무력하게 손을 놓고 있던 암울한 절망의 시기에서도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케인스는 경제성장의 핵심이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케인즈는 그의 담대한 주장을 펼쳤다. 케인즈의 담대한 희망은 그가 1930년 발표한 “100년후의 경제 전망”이라는 에세이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우리 손자 세대가 맞이할 경제적 가능성) 논문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는 단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삶의 여건들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자본주의의 엔진은 “돈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박관념에 의해 굴러가는 체제인데, 이것은 또한 선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복리(double interest)의 위력이 작용하여 미래에 소득이 늘어나게 된다. 100년 후에는 사람들의 소득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망하면 이렇다. 만일 자본이 연 2%의 비율로 증가하고 인구 증가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성이 연1% 증가한다면 1백년 후 문명 세계에 살게 될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은 노력으로도 1920년대에 비해 4배에 서 8배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예측에 따라 케인즈는 결핍의 시대가 사라지고 대신 풍요의 시대가 오게 된다고 전망하면서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정신적 풍요도 함께 성장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케인즈의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나타나는 문단을 보자: “종교적 원칙과 전통적 미덕이 부활할 것이다. 탐욕은 악이고, 고리대금업은 범죄이며, “돈에 대한 애착”은 가증스러운 것이고, 미덕과 올바른 상식의 길을 걷는 사람은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단보다 목적을 더 높게 평가할 것이고, 유용성 보다 선함을 선호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루 시간들을 귀중하고 선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주는 사람들,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부터 직접적인 맛을 볼 수 있는 즐거운 사람들, 수고도 없고 걱정도 없는 들판의 백합꽃과 같은 사람들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케인즈의 담대한 예언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오고, 실업의 위험이 사라지고, 노동시간은 적고, 풍요한 여가가 넘치고, 고상한 삶으로 충만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던 케인즈의 예언은 실현되지 못했다. 케인즈의 예언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더 오래 일하게 되었고 (그로닝겐 통계에 의하면, 1973년 이후 미국의 1인당연간 근로시간이 204시간 더 늘어났다), 사람들의 삶은 행복하지 못하고, 빈곤과 실업의 문제는 아직 해결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핍의 시대가 사라져 더이상 경제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던 케인즈의 예언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담대한 예언이 여지없이 빗나간 것처럼, 불행하게도, 케인즈의 낙관적 예언도 빗나가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비관론이건 낙관론이건 선지자적 예언의 전망을 허용하지 않는 복잡한 체계인지 모른다.
[5] 노자도덕경 제54장, “확고하게 뿌리를 세운 사람은 흔들려 뽑히지 않고, 확실하게 껴안은 사람은 도망가지 않는다. 자손이 제사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실천할 때 덕이 진실로 나타나는 것이며, 가정에서 실천할 때 덕이 넘쳐나며, 고을에서 실천할 때 덕이 날로 신장되며, 나라에서 행해질 때, 덕이 풍요롭게 되며, 세상 천하에서 행해질 때 덕이 보편적이 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덕은 자신이 직접 평가할 수 있는 것이고, 집은 다른 집을 통해서 평가되고, 고을은 고을로써, 나라는 나라로써, 세상은 세상으로써 평가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천하-(천하가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6] “이런 것들은 힌트와 추측일 뿐, 추측이 따르는 힌트일 뿐, 그 나머지는, 기도와 계율 준수와 극기와 사색과 실천 These are only hints and guesses, Hints followed by guesses; and the rest Is prayer, observance, discipline, thought and action”, 엘리어트 T.S. Eliot, <네 개의 사중주> 중 <더 드라이 샐비지즈> Four Quartets, The Dry Salvages (from stanza V).
[7] 뉴튼,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only by stand on the shoulders of giants.”
[8] THE MORAL OBLIGATION TO SPEAK THE TRUTH
“Some one will say: Yes, Socrates, but cannot you hold your tongue, and then you may go into a foreign city, and no one will interfere with you? Now I have great difficulty in making you understand my answer to this. For if I tell you that to do as you say would be a disobedience to the God, and therefore that I cannot hold my tongue, you will not believe that I am serious; and if I say again that daily to discourse about virtue, and of those other things about which you hear me examining myself and others, is the greatest good of man, and that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you are still less likely to believe me. Yet I say what is true, although a thing of which it is hard for me to persuade you.”
[9]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이 침묵하고 외국으로 나간다면 아무도 당신을 말리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여러분을 납득시키기에 큰 어려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말하는 식으로 내가 말한다면, 나는 하나님에게 불복종하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나는 내 입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심각하게 말한대도 당신은 날 믿으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 만약 사람의 도덕성이란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아름다움에 부합하는 영혼의 활동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 최상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담론과 또 이 법정에서 행해진 나에 대한 심문과 다른 증인들의 심문에 대해서, 물론 여기 이 법정에서 나와서 증언하지 않는 사람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매일 다시 토론한다고 해도 당신들은 그래도 나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합니다. 비록 이것은 내가 당신들을 설득시키기가 어려울지라도 말입니다.” 이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을 인용한 나의 번역에 대해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인구에 회자되는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철학적 탐구의 자세를 말한 그런 번역과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즉 법정 용어로 번역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생의 마지막에 직면했을 때는 오로지 영혼 즉 양심만이 남는다.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도덕적 의무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양심이고 영혼이다.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은 법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영혼의 울림으로써 말한 것이다. 사마천이 죽음으로써 거짓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말한 임소경에 대한 편지의 내용과 같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없어지지만 그 영혼은 살아 있다. 소크라테스, 사마천, 그것은 문무왕의 유언과 같다. 영혼의 울림 말이다. 나는 문무왕의 유언에 대해서 진실을 캐냈다. 나의 진실은 나의 죽음과도 같이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의 법정에 서지 않으려고 지구 끝까지 도망을 치면서까지 반대심문을 받을 기회를 꺼려했다. 하지만 결코 운명의 끈은 피할 수 없다. 내가 죽음의 사선을 넘고 눈사태 속에서도 살아 돌아온 감사함으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의 말을 믿어준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대하지 않을 것이고, 또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달리 대할 이유가 없다. 나의 말을 믿어준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믿어달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고 또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해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감사함을 가지고 있고 또 내가 죽는 날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은 하지 않겠는가?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음으로. 당신은 살기 위해.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을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The hour of departure has arrived, and we go our separate ways, I to die, and you to live. Which of these two is better only God knows).
[10] 880여년 전, 740여년 전 기재되어 그토록 오랫동안 국사의 위치로 점해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재 내용을 정면 반박하고, 또 문무왕릉비 파편이 발견된 이후 220여년이 지나는 동안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축적한 기존의 문무왕릉비 비문 해석에 대해 정면 반박하고, 또 1,340여년 전의 오래된 고문자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그동안 국가와 학계가 정해놓은 기존의 국사 지식을 정면으로 격파하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고 그만큼 어려운 일에 속하지 않겠는가? 이런 전차로 나는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진술을 준비했다. 사실 내가 법과대학에 입학하고서 맨 처음 읽은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소크라테스에 집착한 이유가 무언가 있었지 않을까?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표현한대로 우리 인생에서 앞서간 성현들의 위치가 이토록 남다를 수 있다는 것인지? 유신은 말했다. “天道回旋 生民預焉 死生契闊 靈光巍然!” 밤하늘의 별자리가 돌고 돌듯이 우리들의 삶 또한 예정되어 있고 돌고 돌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잠자리 비행기가 빙빙 맴돌듯이, 바다의 배가 선회하듯이. 삶과 죽음이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안개속을 헤메일 때처럼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하늘에는 신비한 광채가 빛나고 선조들이 남긴 덕택으로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위대한 성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만큼 분명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과 그림 하나로 유럽의 화단을 놀랍게 변화시킨 세잔느, 사과나무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튼, 빌헬름텔의 화살로 사과 맞추기 게임, 아담과 이브의 사과는 인류의 발전을 이룬 인간본성의 영광(靈光)이다. 그래서 영광은 영원히 빛난다. 靈光巋然(영광규연)!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나의 이름이 바다처럼 넓고 크게 빛나라! 이러한 뜻의 이름이 내 이름 “홍희”!
[11] “상군서”의 영어 번역은 J.J.L. Duyvendak, “The Book of Lord Shang” (1928), 'He who is concerned about the highest virtue is not in harmony with popular ideas; he who accomplishes a great work, does not take counsel with the multitude.'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거사에 참여하기를 머뭇거리는 사람은 어떠한 공훈도 얻지 못한다. 새로운 법을 신속하게 제정하는 결단을 내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판 여론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훌륭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할 수 있고, 독자적인 지식체계로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우둔한 사람은 일을 끝내놓고도 그것에 대한 이해를 전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싹이 트기도 전에 그 사유를 먼저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 세상 사람들과 의논을 나누기 보다 일을 먼저 성취해 놓고 그 기쁨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보다 낫다. 개혁정책에 성공한 곽언은 말했다: 최고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대단한 사람은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商., “商君書”, 更法편. “臣聞之 疑行無成 疑事無功 君.定變法之慮 殆無顧天下之議之也 且夫有高人之行者固見負於世 有獨知之慮者 必見.於民 語曰 愚者闇於成事 知者見於未萌民不可與慮始 而可與樂成 郭偃之法曰 論至德者 不和於俗 成大功者 不謀於衆”.
[12] “I did not arrive at my understanding of the fundamental laws of the universe through my rational mind. The intellect has little to do on the road to discovery. There comes a leap in consciousness, call it intuition or what you will, and the solution come 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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