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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란 무엇을 말하는가?

by 추홍희블로그 2021. 8. 23.

2.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란 무엇을 말하는가?

 

2.1.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개념

 

2002정부 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준어로 정했다.[1]  동아일보 신문 기사 DB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검색해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이 두 단어가 가장 먼저 쓰여진 신문 기사는 1996 10 24일로 검색됨을 볼 때, 그리고 같은 신문 기사 DB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검색 건수는 2015 2월말 현재까지 368건이 검색됨을 볼 때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짧은 시기에 꽤 빠르고 폭넓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담론이 형성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사전적 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한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사회),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 정신에서 비롯된 말이다.”[2]

 

동아일보 신문 기사 DB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가장 먼저 쓰여진 신문 기사는 1996 10 24일로 검색되고, 이날 자 산업면에서 삼성물산에서 간행한 로마인 이야기의 책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싣고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신분에 뒤따르는 도의적인 의무를 지칭하는 말이다.  로마인들은 전투에 나설 때 항상 최고 지휘자가 선두에 섰다.  이 때문에 한니발과 집정관 10명과 원로원 위원 수 백명이 전사했다.  경영진과 지원부서는 로마귀족의 이 같은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을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에서의 개념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지칭하는 말로 설명되고 있다.  일반 학술 논문에서도 이 같은 사전적 정의를 따르고 있는데 사회의 고위직과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를 뜻하고, 대개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의식과 덕망이 높아야 한다고 번역하고 있다.[3]

 

프랑스어와 영어 사전적 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 말의 프랑스어 유래를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프랑스 사전을 찾아보자.  위키 사전을 찾아보면 불어사전과 영어 번역을 설명해 놓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 Whoever claims to be noble must conduct himself nobly. One must act in a fashion that conforms to one's position, and with the reputation that one has earned.”[4]

 

옥스포드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noblesse oblige: the inferred responsibility of privileged people to act with generosity and nobility toward those less privileged.”[5]옥스포드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는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배려를 하고 자선을 베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약자를 배려하고 자선을 베푸는 구체적 행동을 가르킨다. 

 

프랑스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과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프랑스 말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36년경이었다.이 말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도 발자크 (1799-1850)계곡의 백합소설에서 그 표현이 쓰여진 이후부터라고 한다.[6]  왜 프랑스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을까?  당시 프랑스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서 귀족 사회가 무너진 이후, 특권적 지배를 누렸던 달콤한 과거 즉 앙시앙 레짐에 대한 향수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었을까?  사실 작가 발자크는 프랑스 부르봉 왕정 복고(1815–1848)에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2.2. 상류지도층 인사들이 명예로운 행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은 이념일까 아니면 과학일까?

 

프랑스에서 타고난 신분 계급인 귀족들은 일반인들과 다르게 자신들의 의무를 죽음과도 맞바꾸며 진실과 양심을 실천하는 부류었을까?  하지만, 그런 전제하고는 반대로 오히려 지배계층의 타락과 수탈이 극심했다는 사실은 역사로 입증되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어떤 반박의 근거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귀족 지배층의 사치와 부패와 타락의 결정판이었던 루이 16세와 마리 마리 앙트와네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1793년 처형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상류층은 일반인과는 다르게 도덕성이 높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은 환상에 다름 아닐 것이고, 만약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침이슬처럼 쉽게 사라지고 마는 개념인 것 같다.  

 

프랑스 작가 발자크는 산골짜기에 피어 있는 백합꽃 The Lily of the Valley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개념을 설명했다.  여기에서 멘토는 사랑하는 젊은 청년 귀족에게 앞으로 사회 생활과 사랑 그리고 정치계에서 성공하는데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갖추어 나가야 하는지를 충고해 주는데 그것은 귀족출신다운 명예로운 품성과 행동을 유지하라는 것과 고귀한 여자를 잘 선택해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 진출해서 성공하려면 거기에 필요한 덕목들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나서 그런 모든 것은 노블리제 오블리주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발자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을 설명한 다음, “정치계에서는 다른 측면들이 나타나므로, 개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원칙들은 국가적 이익 앞에 양보되어야 합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 말은 개인적인 이익은 국가 전체의 이익 앞에 희생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계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발자크는 이어서 말하기를, 최고권력자가 된 순간 독단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전제군주적인 위치에서는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을 적용하는데 애로가 나타난다. (최고권력자의 지위는 의사 결정 체계상 최고점에 서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발자크는 현재적 자신의 판단을 기율하는 조건으로써 미래적인 역사의 심판대라는 개념을 결론적으로 제시한다.  발자크의 글을 다시 읽어보자.  정치계에서는 다른 측면들이 나타나는데, 개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원칙들은 국가적 이익 앞에 양보되어야 합니다.  최고위직에 오르게 되면, 당신은 마치 하느님처럼,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단독 재판관이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당신은 더 이상 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법이 될 것이며,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화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심판을 내리는 대가로 당신 또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훗날 당신은 역사의 심판대 앞에 오르게 될 터인데, 진정으로 위대한 행동과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역사를 통해서 매우 자세하게 배우고 인식하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7], [8]

 

한편 남성이 여성에게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모두를 섬기고, 한 사람만 사랑하라! "Serve all, love one!"고 충고하는데, 이는 발자크가 설명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과는 배치된다.  영미국은 일부일처제를 고수한 반면 프랑스 같은 대륙국가들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였는데 인간본성상 두 사람을 동시에 섬기는 일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9]  이 소설에서 젊은 청년 귀족 팰릭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규범과는 어긋나게 정치 사교계에서 다른 여자들을 많이 사귀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인간의 내면적 도덕성이 얼마나 물거품처럼 실체가 없는 개념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10]

 

발자크가 설명하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을 길게 인용하기에 앞서서 소설의 줄거리를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영국, 독일, 러시아로 구성된 연합국 군대에게 1815년 패하게 되었고, 그 후 프랑스는 왕정이 다시 복구(1815–1848)된다.  이에 프랑스 대혁명(1789–1799) 외국으로 망명했던 귀족들이 속속 귀국하는데 귀족가문 출신인 모르소프 백작도 귀국하여 부인과 함께 한적한 시골 영지로 되돌아가 요양을 하고 있다.  백작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이름은 앙리에트인데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젊은 청년인 팰릭스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들은 서로 가까워져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유부녀인 앙리에트는 남편에 대한 정절 의무를 지키고, 젊은 팰릭스에게는 자신의 상류층 출신 배경을 이용하여 처세술을 조언하는 등 그가 사회 생활에 성공하기를 바라며 경제적 정신적 후원자의 역할을 맡는다.  팰릭스는 파리 중앙 정치계에서 성공을 거둔다.  성공한 남자에게는 여자들이 따르기 마련인데 팰릭스 또한 다른 여자들을 사귄다.  팰릭스와 앙리에트는 육체적인 사랑의 관계를 갖는 대신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플라토닉 러브 차원에 머문다.  앙리에트의 남편은 정신병에 걸려 요양을 하고 있는 처지인데 앙리에트 본인도 정신적인 고민을 하고 속으로 앓고 있다.  앙리에트는 정신적으로는 젊은 청년 귀족 팰릭스를 사랑하지만 남편에 대한 정절의 의무를 지키다가 결국 병으로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되는데 임종 직전 팰릭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고백하고 그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점을 후회하는 편지를 남긴다.  앙리에트의 죽음으로써 남편은 정신병에서 회복하게 된다.  이런 내용이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인 것 같다.  앙리에트는 귀족 출신으로써 상류층 마담에 속했고, 남편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우울한 환경 속에서 젊은 청년을 만나 서로 정신적 사랑을 나누며 사랑의 탈출구를 모색했지만 유부녀에게 요구되는 전통적인 정절의 규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진정한 사랑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후회하면서 죽어갔다.  한 마디로, 그녀가 장황하게 설파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덕목은 그들의 플라토닉 러브 사랑이야기만큼이나 실체가 없었던 것 같다.  귀족의 명예스런 의무라고 일컫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개념은 결국 연애 시절의 맹세와 같이 행동과 정신이 일치하지 못한 맹세적 선언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말의 유래를 살펴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그 개념이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지적해 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개념을 보다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 말의 의미를 맨 처음으로 자세하게 설명한 발자크의 글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고 보고 그 부분을 번역 소개한다.

 

지키지 못할 맹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 맹세를 한다?

 

어느 누군가의 말대로 사랑과 전쟁에선 이기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고, 또 키케로는 적국이신의가없기때문에일단거짓맹세를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않아도된다고말했다.  사실 키케로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상대방이 알지 못하도록 은폐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싸움터라고 비유하는데, 상류층들은 자신의 죽음마저 마다하고 희생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일까?  발자크는 사랑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사람들이 맹세한 첫사랑을 지키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은 엄연한 사실인 것 같다.  이것은 행태 경제학자들의 여러 논거들을 통해서 잘 밝혀주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해 볼 필요까지도 없이, 바로 자신들의 사례를 돌이켜 본다면 수긍하리라. 

 

우리들이 불륜이란 말을 쓸 때는 육체적인 사랑이 결부된 경우를 말한다.  팰릭스와 모로소프 부인과의 정신적인 사랑을 불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사랑이든 육체적인 사랑이든 그런 영역은 그들 사이의 사적 영역에 머물 뿐이고, 정치와 법의 공적 영역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국가에서 논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은 정신적인 사랑-플라토닉 러브 같은 사랑과 도덕을 논하는 사적 영역이 아니라, 추구하는 이익이 서로 충돌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인 정치와 법의 세계에서 논하는 개념임을 상기하여야 한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어느 누군들 사람으로서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는 고귀한 품성과 태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또 그런 수준은 언제 어디에서든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명예로운 태도를 보여준 사람들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성에서 나올 것이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지 않고서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질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높은 내면적 도덕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발자크의 소설 The Lily of the Valley”에서 묘사되는 산골짜기의 한 송이 아름다운 백합꽃처럼한없이 아름답고, 그 향기는 온 산골짜기에 흘러 넘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높은 도덕성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를 비판할 수 있는 어떤 타당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다만 그토록 아름답고 향기 좋은 백합꽃이 산속에서 홀로 숨어 있다면, 공동체 사회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2.3.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개념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우리나라에서는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을 대개 사회적 신분 계급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말하는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또는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의식과 덕망이 높아야 한다는 뜻으로 개념을 정의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를 사람은 지위에 걸 맞는 처신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영어 사전적 정의하고는 약간 차이가 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간 진행된 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의식과 덕망이 높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개념짓고자 시도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평등사회에서 개념이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지위와 신분의 높고 낮음을 전제하고 있어 구시대적 봉건 질서로의 환원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개념에 가깝다고 보여지므로 자칫 잘못하다간 평등한 시민 사회의 건설에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우려를 지적하고 싶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옥스포드 영어 사전의 풀이대로, 자신들보다 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하는 구체적 행동을 지칭한다고 이해된다. 

 

사람의 덕망과 고귀한 가치는 지위의 고하라는 신분적 요소에 의해서 차이가 난다는 결론을 제시하는 논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근대 사회는 인격의 차별성이 아니라 인격의 개별적 완전성에 기초하고 있음은 더 이상의 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토크빌이 미국 사회와 유럽 사회의 차이점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논한 바대로, 유럽국가에서 귀족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유럽국가는 대부분 지금도 형식적으로 왕정을 유지하고 있다.  왕정을 유지하는 영국과 영연방국가들에서 현재까지 “Sir”의 호칭을 받는 기사 신분 제도를 계속 부여하고 있는데 그와 같이 귀족계급이 현존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명예로운 행동을 보여야 하고 또 누구나 그런 능력을 가졌으며, 이런 점에서 어떤 차별적 구분을 나눌 근거가 없다.

 

영미국에서 사회지도층이라는 특수 계층의 존재는 부정될 뿐만 아니라 사회지도층에게 요구되는 의무와 도덕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고방식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11]  영미국에서는 신분 귀천을 따지질 않고, 또 부자이건 빈자이건 차별 없이 국민 모두가 다같이 하나의 법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는 평등의 이념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영미국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원칙이 사회의 기초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사회지도층의 존재와 의무를 강조할 이유가 없다.  만약 영미국에서 특별한 계층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 지도층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의 보호원칙을 지칭하는 것 같다.

 

노블레스의 개념 즉 지위는 귀족 가문에서 타고났다는 봉건적 신분 질서에서 나오는 지위 그리고 고위공직에 임명됨으로써 얻어지는 공직자의 지위 이 두 가지 형태로 얻어진다.  이 두 가지 지위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구체성이 있는 반면 책임의식과 덕망에 대한 개념은 책임과 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책임의식과 덕망의 개념에 대해서 자선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영미국에서는 자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지칭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높은 책임의식과 덕망은 지위 고하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이 아니다.  오늘날의 평등 사회에서는 봉건적 신분 질서가 혁파되었는데, 지위가 높을수록이라는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한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 각자는 모두 자신에게 할당된 의무와 덕성을 추구할 인격성과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이념적 기초에서 로댕은 칼레의 시민동상을 완성했다고 한다.  행태경제학의 많은 논거가 말해주고 있기도 하지만, 자선을 행하는 동기와 능력은 우리들 모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12]

 

빈부의 격차 심화, 극한적인 경쟁 사회 구조, 재벌과 관료가 국가 사회를 이끌고 주도하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건전한 시민 의식이 배양되거나 함양되기가 어려웠다.  과거 한국에서는 평등 사회와 건전한 시민 정신의 함양 노력이 크게 고려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따라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 정의를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정부 관료와 재벌 등 상류층의 배타적 특권적 지위를 용납하는 신분사회로의 회귀로 흐를 위험성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영미국에서의 개념을 제대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4.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equality before the law

 

영미국에선 법의 지배라는 법의 절대성의 원칙이 통용된다.  법의 지배란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no man is above the law“는 의미뿐만 아니라모든 사람은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일반법의 적용을 받는다 every man, whatever be his rank or condition, is subject to the ordinary law”는 일반법 원칙이 통용됨을 의미한다.[13]  법의 지배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영국과 프랑스의 법 이념과 법 제도의 차이점을 설득력있게 논한 다이시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지금도 유익할 것 같다.

 

영국에서는 법 앞의 만인 평등이라는 사상이나 또는 일반법원에 의해 집행되는 하나의 법체계에 모든 계층이 보편적으로 기속된다는 원칙은 최고의 법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국의 모든 공무원-위로는 수상에서 아래로는 순경이나 말단 세무직에 이르기까지-은 법적 정당성이 결여된 모든 행위에 관하여 일반시민과 마찬가지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법원 판례를 보면 공무원이 공무 수행 중에 행한 행위이었지만 정당한 권한을 넘는 경우에는 해당 공무원은 재판에 회부되고 (공무원 신분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처벌을 받거나 손해 배상의 책임을 진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식민지의 총독, 장관, 군장교, 상관의 명령을 수행한 하부 관료에까지 모든 공무원은 법이 부여한 권한을 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사인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진다.”[14]

 


[1] 손용근,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양법학, 21(2007.8.), 167-174.

[2]고려대 한국어대사전”, 1254.

[3] 각주 184; 김해연, “언론 담화에 나타나는 사회지도층 인사에 대한 비판 담화 분석적 연구”, 텍스트언어학, 34 (2013.6), 33-62.

[4] “Here's what fr.wiktionary.org has to say about it (from the Dictionnaire de l’Académie française): noblesse oblige féminin

1. Quiconque prétend être noble doit se conduire noblement.

2. (Figuré) On doit agir en conformité avec la situation qu’on occupe, avec la réputation qu’on s’est acquise.

In English:

1. Whoever claims to be noble must conduct himself nobly.

2. (Figuratively) One must act in a fashion that conformes with one's position, and with the reputation that one has earned.” http://en.wiktionary.org/wiki/Talk:noblesse_oblige

[5] “Oxford American College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at 921.

[6]Wiki Dictionary.

[7] “In the world of politics things wear a different aspect; the rules which are to guide your individual steps give way before the national interests. If you reach that sphere where great men revolve you will be, like God himself, the sole arbiter of your determinations. You will no longer be a man, but law, the living law; no longer an individual, you are then the Nation incarnate.  But remember this, though you judge, you will yourself be judged; hereafter you will be summoned before the ages, and you know history well enough to be fully informed as to what deeds and what sentiments have led to true grandeur.”, de Balzac, “Lily of the Valley”.

[8]법은 현재적 판단인데 왜 미래적인 개념을 동원한단 말인가?  사실 이 부분에서 영미국의 법의 지배개념과 충돌하는 것 같다.  이러한 미래적인 역사의 심판대라는 개념에 따른지는 모르지만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과거 사건에 대한 재심사건이 상대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지만 살인 사건에 대한 오심이 일어났고 그 결과 피고인이 처형되었다면(“효봉스님의 출가 동기는 일제 시대 때 판사로 근무할 당시 살인사건에 대해 오판을 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 대오각성하여 출가하게 되고 훗날 조계종 최고위직에 올랐다고 한다), 재심을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닌데도 법원에서 다시 판단하는 재심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재심 사건으로 인해서 역사를 되돌릴 수가 없는 법이고 (다만 국가 배상 또는 보상금이 따른다) 역으로 보면 재심 사건의 존재 그 자체가 법이 올바로 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역사상 사화가 계속 반복된 우리나라의 과거처럼 잘못하면 순환론에 빠져 들어 역사적 발전을 건설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던 법원이 훗날 정권이 바뀐 뒤에야 태도를 바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역사적 단죄를 대법원이 내렸는데 또다시 세월이 많이 흐른 현재 스스로 물어보자: 어디까지가 법이고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힘의 논리인가? 이 경우 역사의 심판대는 누구였는가?

[9]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두집 살림이 가능하다고 보는 프랑스 문화(대륙법국가의 오랜 전통이었던 일부다처제를 지칭)는 인간본성에도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10] “I behold you now armed with a youth that pleases, grace which attracts, and wisdom with which to preserve your conquests. All that I have now told you can be summed up in two words, two old-fashioned words, "Noblesse oblige." de Balzac, Chapter 2, “Lily of the Valley” (1836).

[11]영미국에서 사회 상류층은 무언가 특별하게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차별적인 시각으로써 지극히 배격될 개념에 속한다.  제 아무리 어떤 근거를 원용한다고 해도, “인종 차별적인 태도가 땅에 발 붙일 수 없을 만큼 사회 전체적인 합의가 이뤄진 영역의 한 예로써 미국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세계 과학 교과서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유명한 과학자도 잘 알려진 인물이고 사실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이기도 하였지만, 그가 백인우월주의 견해를 밝히자 전세계적으로 비판을 받고, 유명한 과학자의 반열에서 즉각 몰락한 처지로 변하고 말았다.

[12] 그것은, 누가복음 4 18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견디고 나서 공의를 시작할 때 첫 번째 선언한 행동수칙인가난하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주는 것에 해당된다.

[13]어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뿐만 아니라 또 어떤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보통법에 따르게 되고 Everyone is subject to the law 또 재판권의 행사는 보통법원에 귀속된다는 것을 뜻한다.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한다 Be you never so high, the law is above you."  미국적 표현으로는미국에서는 법이 왕이다 In American, the Law is king.”이라고 말한 토마스 페인의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14]다이시, “헌법학 입문”, 24,‘법의 지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