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프랑스 칼레 도시의 함락과 역사적 진실
칼레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
칼레는 영국 해안 도시 도버에서 단지 33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프랑스의 국경 해안 도시이다. 이들은 서로 반대편의 해안가에서 육안으로 희미하게 관측된다.[1] 영국해협은 바다 밑으로 해저터널 Channel Tunnel이 1988년 착공 1994년 개통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기차가 달리고 있다. 양국간에 해저터널을 건설하여 철도를 놓을 계획이 태동된 시기는 185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부산과 대마도 간 거리는 52㎞ 떨어져 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관측 가능하다.
칼레 성의 함락과 지도층이 역할-역사적 사실-카이저의 희곡-“칼레의 시민”에서 나타난 역사적 허구
게오르그 카이저의 희곡 “칼레의 시민”에서는 칼레의 영웅으로 칭송 받아온 유스타슈 드 쌩삐에르 Eustache de Saint-Pierre가 자원한 항복 인질들의 불확실성에 오는 불안과 공포를 덜고 항복 인질로 가는 것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 자살을 감행한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그런 희곡의 결말과 같은 사회를 위해 개인적인 생명을 희생했다는 영웅적인 자살의 이야기는 작가적 상상력에 의존한 순전한 거짓이고 완전 허구임이 확인된다. 생 삐에르를 영웅적으로 묘사한 역사상 맨 처음 기록을 살펴 보자. 생 삐에르는 점령군인 영국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도시에서 추방된 다른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계속 칼레에서 자신의 부를 지키며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카이저의 희곡에서는 생 삐에르가 자살을 하고 그러한 자기 희생을 통해서 지도층에게 요구된 의무를 실현했다고 이야기를 구성하였지만, 사실 생 삐에르는 즉시 사면을 받았고, 영국 점령군의 통치하에서도 부를 축적해 나갔던 인물이다.[1] 일부 평자는 역사적인 고증에 근거하여, 심지어 생 삐에르를 애국자가 아니라 오히려 칼레 도시를 팔아 먹은 “반역자 traitor”로 규정하기도 한다.[2][3][4] 6인의 항복 인질은 성문 열쇠를 영국군에게 넘겼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물론 성문의 열쇠를 넘긴 대가로 성안의 사람들은 살려주었다는 항복조건이므로 이들을 반역자로 규정하는 단정적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원전으로 여겨졌던 Jean Froissart의“Chroniques”역사서에서 새로운 역사 고증에 의해 역사적 사실과는 틀린 부분이 상당히 존재한 것으로 드러난 이상 정확한 역사적 고증 자료에 근거한 반박을 보다 신뢰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러한 비판적 반박은 참고할 만하다.[5]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정서는 영웅적 이야기에 계속 매력을 느낄 것 같다. 영국군은 칼레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내쫓고, 그 자리에 영국 본국 사람들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칼레의 경우와 같이 역사상 영국군은 비록 적지를 점령했다고 해서 그곳을 전멸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시대부터 내려오는 역지사지의 현실적 역사관과 인간관에 기반한 점령 정책을 받아들인 결과인 것 같다.
당시 영국군은, (병자호란에서 청나라가 인조가 농성중인 남한산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대신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성안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장기 고립작전을 편 역사와 비슷하게), 칼레 성을 포위하고 성안의 먹을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고사작전을 전개했다.[6] 칼레 도시가 11개월간을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그때까지 먹을 식량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므로, 마지막 식량이 곧 바닥나고 굶어 죽을 상황에 이르자 항복을 한 것에 해당한다.
당시의 희생자는 힘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인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선택되어 성밖으로 내던져졌고, 이들은 양국 군대로부터 먹을 식량을 제공받지 못해 굶어 죽어갔다.[7]반대로 칼레의 성 안에서 남은 사람들은 힘있고 건강한 사람들이 다수이었다.
이렇듯긴급피난이나 정당방위의 행위가 일어나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는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그런 상황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희생자로 삼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것은 인간사회의 엄연한 현실적 진실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카이저의 희곡 “칼레의 시민”[8]은 이런 역사적 진실을 아예 무시해 버린 역사적인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카이저의 희곡에서 가장 영웅적인 행동을 한 인물로써 도시에서 부유하고 도시 행정을 책임졌던 사회 지도층 인사였던 “생 삐에르”가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가장 절박한 순간을 해결해 내는 역으로 이야기의 구도와 결론을 설정했지만, 사실 생 삐에르는 자살하지 않았고, 그는 자유롭게 풀려나 자신의 부와 지위를 지키며 천수를 누렸다.[9]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서 국가적 담론 형성을 전개해 나갈 때 나타나는 중요한 문제점을 우리나라의 가상적인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시기하고 비슷한 시기의 외국의 역사이어서 나름대로 상상력은 충분히 발휘해서 거짓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어떤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또 그런 이야기가 제 아무리 문학적 가치를 지녔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이성계장군이 위화도회군 전투에서 죽었다고 가정하고서 이야기를 전개하거나, 또는 이순신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고 가정하고서 소설을 전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가치는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최고 부유층 사람이 희생적 의무를 다했다거나 또는 그러한 영웅으로 미화하는 모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은 거짓된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10][11] 특히 역사적 진실을 결여한 희곡에 바탕을 두고서 전개한 우리나라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 즉 사회지도층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견해는 인간사회의 본성을 고려할 때 올바른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다.
역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보면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수행한 일이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또 그들은 의무를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한 것도 아니었다
칼레의 시민들도 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과정에서 프랑스 도시 칼레의 시민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1년을 저항하다가 식량이 바닥나자 끝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안될 극한 상황에 도달했다. 칼레의 성안에서 맹렬히 저항해 왔던 칼레 시민들은 결국 항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영국왕은 포위당한 칼레 성안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였는데 그것은 영국침공군에 맞써 저항을 결의한 상위 귀족 계급과 하층 노예민을 제외하고서 대신 자유시민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 6명을 뽑아 칼레 시를 대표하여 항복 사절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고, 이들 대표자 6명의 목숨을 담보로 나머지 전체 칼레 시민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마치 점령군의 포고령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12] 대표자 6인이 항복 사절로 나올 때의 행동수칙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항복 의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바로 그것은 총기를 소지함이 없이 목에 밧줄을 매고, 복장은 남루한 옷을 걸치고 나올 것이며 또 성문을 열 성문열쇠를 가지고 나와야 된다는 것을 항복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러한 항복 조건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국에 항복할 때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3배고두레의 치욕을 당한 “삼전도의 눈물” 항복 의식과 대동소이하다고 여겨지며, 그러한 항복 의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자와 승리한 측 사이에서 관계된 당연시한 전범규칙에 속했다고 보여진다.
칼레 시를 대표하여 항복사절로 나간 6인 대표는 영국군과 항복 조건을 협상한 것도 아니었고, 항복 조건에 대한 협상이 완료된 후, 단순하게 항복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 나갔을 뿐이었다. 이들은 손에 어떤 무기 하나 들지 못하고 맨손으로 적군에 끌려간 항복인질에 불과한데 과연 이들이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고 추측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들 6인 대표는 성이 실질적으로 함락된 순간 단순히 형식적인 항복의식의 한 과정으로써 끌려 나온 인사들에 해당되었다고 추측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이들은 그동안 1년간의 버티며 격렬하게 저항해온 소수의 책임자급을 처형하겠다는 점령군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항복 요구 조건에 따라 나섰던 것이지, 항복 하기 전에 어떤 담판을 시도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들이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했다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다만 전쟁에 패배하여 점령당한 패배자의 심정을 다독거리는 목적에서 자기합리화의 시도는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는 정도이고 또 그런 역할을 문학 작가(구전이든 실전이든)가 담당했다는 것은 더 자세한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병자호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삼전도에서 혹독한 항복의식의 치욕을 당한 조선국왕과 그 신하들이 과연 영웅적인 행동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항복조건을 놓고서 서로 의견을 달리한 김상헌과 최명길의 논쟁을 포함하여.)
병자호란에서 항복 의례를 행하는 사람은 최고책임자인 인조이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경우도 항복 의례는 당연히 칼레 시의 최고행정가에 속하는 인물이 적장 앞에서 무릎을 끓어야 했음이 마땅하다. 따라서 행정을 담당했던 책임자급에서 항복사절을 나가는 것은 어떤 영웅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패배한 측에서 어떻게 영웅이 나온다는 말인가? 만약 있다면, 전쟁에 패배한 사람들이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의 심리적 방어기제에 해당할 것이다. 항복 사절로 행정책임자가 나가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을 마치 영웅적인 행동으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청태종에게 항복의례를 직접 행할 수 밖에 없었던 (적군이 요구한 사항을 그대로 따른 것일 뿐인데도) 인조를 두고서 임금님이 직접 나가서 항복하였고 그런 결과 그나마 백성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고 역사를 왜곡 오도하고자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1637년 인조는 “3배9고두 三拜九叩頭”의 항복의식에 따라서 적장인 청태종에서 한 번 절 할 때마다 머리를 3번 땅바닥에 부딪쳐야 했는데, 청태종은 머리가 땅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9번도 훨씬 넘게 머리를 땅에 치게 했으며 그래서 인조의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굴욕과 치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13]
항복사절로 스스로 나섰던 칼레 시민의 대표자 6인에 대해서 사후에 영웅적인 각색을 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서 병자호란 때 항복사절로 적국 청국에 잡혀갔던 김상헌과 3학사를 영웅시하는 이유와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하지만 항복사절은 항복사절일 뿐이다. 항복사절의 일행이 제 아무리 고귀한 행동을 했다고 쳐도 그런 행위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전란으로 인한 혹독한 패배의 후유증을 치유해 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가가 항복한 원죄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영웅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실제로 칼레 도시는 항복 후 무려 200년 간이나 영국의 점령 통치하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패배 후 자기합리화를 위한 목적으로 역사적 허구를 동원하여 거짓되고 조작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전쟁에서 패배한 죄과를 단죄하지 못한 이중의 죄과를 부담하게 되어,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데 오히려 큰 장애물을 설치하고 마는 우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허구적 희곡에 의존한 역사 인식과 담론 전개의위험성
근대 “국가의 성립” 원칙으로서 철학적 기초를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람이 다같이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었던가? 누가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기준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할 일이다. 인간인 이상 누구도 목적적인 존재인지 수단으로 여겨서는 아니 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일단 접어두고, 공리주의 철학의 기초를 생각해 보자. 한 예로 2차 대전 중 일어난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일어난 가상의 사례를 다룬 “처절한 정원” 소설에서 드는 예를 보자. “우리 네 사람 다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느니, 한 사람이 희생하여 나머지 세 사람을 살리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이란 질문에 대해서 이런 대답을 한다. “죽고 사는 일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거나 또는 어떤 사람의 목숨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지위가 높아서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또 악에 동조하는 것이다.”[14]
한편 유교적 이념에서는 가족적 온정주의가 정당화되는데, 불가피하게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때 그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거나 자신의 가족이 해당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지위와 신분상 힘있고 돈 많은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이 자신이 희생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먼저 나서는 모습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이 가정의 전제는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은 의무감이 특출해서 자기 희생을 무릅쓴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라미드 상위층의 결자해지적 해결책을 게오르그 카이저의 희곡 “칼레의 시민”에서 제시하였다고 본다.[15][16]
전쟁에서 패해 항복사절로 잡혀간 사람이 후세에 들어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
우리나라에서는 독일 출신의 작가 카이저가 쓴 “칼레의 시민들” 희곡을 중심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담론을 전개해 나가는 경향이 큰데, 사실 이런 태도는 역사 왜곡에 해당하고, 그리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실된 담론을 형성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칼레의 역사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생 삐에르가 보인 행적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고, 대신 역사적 허구에 바탕을 둔 희곡 각색 작품에 주로 의존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실과 소설적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 잘못 뿐만 아니라, 진실을 왜곡시켜 특정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의심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전쟁에서 승리한 에드워드3세 영국왕은 칼레시민 중 하층계급이 아니라 “칼레의 자유시민계급 중에서 6인을 항복 사절로 내보내면 이들만을 처형하고, 칼레 성의 모든 사람들은 살려 주겠다”는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칼레의 부유하고 지위가 높던 생 삐에르를 비롯한 다른 돈많은 상인계급의 부유층 인사 6명이 항복 사절로 자진해서 지원하였고, 이들은 성문 앞의 영국군에 항복해 왔다. 이들항복인질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다 남루한 옷을 입고 항복했는데, 이런 모습은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항복할 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 칼레의 6인만이 보인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들 항복 인질들은 한 명도 처형되지 않았고, 모두 살아 되돌려 보내졌는데, 영국의 입장에선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준 이유는 영국왕이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자고이래로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을 수 없이 벌여왔고, 서로 대항해 온 양국관계인데 영국의 입장에서 이들 6인의 항복안질들이 살아 돌아간 것의 주된 이유는 당시 영국왕의 왕비인 임신 중이어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한 결과라고 전해진다. 이런 견해는 버나드 쇼의 짧은 단막극 희곡 “칼레의 시민 6인”을 읽어보면 쉽게 수긍되는 것 같다.
칼레 시는 1347년 8월 4일 영국에 항복한 후 1558년 프랑스가 다시 점령하기까지 210년 동안 영국의 점령 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고려한다면, 점령군 영국왕의 자비에 의해서 항복 인질들이 풀려났다고 보는 견해가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항복 조건에 따라 점령군에 인질로 잡혀간 6명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눴고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남아 있는 역사적인 기록이 적어서 그것을 추측해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록으로알려진 Froissart의 기록은 대강의 모습만 그렸을 뿐이고, 6인의 구체적인 모습을 기록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기록마저 현재는 역사적 사실성이 의문시되고 있기도 하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 조각 작품에서 나타난 인물 묘사와 다른 희곡 등에서 묘사되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의 모습이나 대화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작가적 상상력에 따른 묘사이다.[17]
5. 로댕의 “칼레의 시민” 조각 작품에 대하여
로댕의 조각 작품-“칼레의 시민”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을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라고 설명하고 있는 한 그것은 상당히 애매모호하여 사회의 특징과 설명 개념으로써는 중대한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의식과 덕망이 높아야 한다”는 애매모호하고 실체가 없는 개념보다, 최소한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 Sacrificing yourself for others”, “투철한 시민 정신 Civic Heroism”, “영웅적인 희생 정신”,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 등을 포함한 보다 구체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로댕의 “칼레의 시민 대표 6인”조각 작품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천으로써 거론되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이해하려면 조각할 당시 프랑스의 국민적 교육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로댕이 “칼레의 시민” 조각을 만들 때 그의 기초적인 의도는 귀족층이 아닌 “일반 시민 lay people”이 중심이 된 “시민 정신”의 함양에 이바지하고자 함이었다.[18] 로댕은 귀족층을 강조하는 대신 일반 시민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로부터 칼레의 지도자로서 높이 추앙 받아 온 생 피에르 1인의 단독 동상 건립 취지에 반대하고 대신 일반 시민 6명 모두를 동등한 지위에 놓고서 칼레의 시민 6명의 조각품을 완성하였다.[19]
로댕의 조각“칼레의 시민”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로댕의 “칼레의 6인” 작품의 의도- 현대적 영웅 modern hero의 의미[20]
근대 이전까지는 칼레의 영웅은 당시 칼레 행정 최고 책임자였던 유수타쉬드 생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 1인이 칼레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아왔지만, 로댕은 1895년 “칼레의 여섯 시민”의 동상을 세우면서, 종래의 역사 인식을 거부하고 대신 행정부 고위 관료가 칼레를 구한 것이 아니라 칼레의 시민 6명이 똑같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을 내세우며 6인이 함께 한 모습을 조각하였다.[21]
1894년 “칼레의 시민” 동상을 제작한 오귀스트 로댕은 행정부 고위 공직자 또는 사회 지도층의 소수가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는다는 역사의 허점을 파악하고서 6명 모두가 똑같은 평형으로 같은 위치에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 동상을 만들었는데 로댕의 조각은 예술작품이므로 그 자세한 동기는 해석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로댕은 생 피에르 1인을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는 칼레의 전통적인 역사 해석 방법에 의문을 품고, 소수 지도층 1인이 아니라 그 대신 평등한 시민들이 모두 애국자가 될 수 있고 또 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또 그 의무를 다할 때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새로운 평등한 시민상을 고취시키고자 했다.[22][23]
근대 국가는 자유 시민 계급 “common people”이 주인이 되어 국가를 건설한 “시민 국가 commonweal”이다. 자유시민계급 citizens, common people은 귀족과 반대되는 “부르주아” 계급을 말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 사례로 흔히 인용하는 “칼레의 시민들”의 영어 번역은 "The Burghers of Calais"이고, 불어 원어 제목은 “Les Bourgeois de Calais”이다. 영어 “Burghers”은 불어의 “Bourgeois”와 같은 뜻으로, 불어 발음 그대로 “부르주아” 계급에 해당되는데 역사적으로 상인계급 즉 전쟁이나 농업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아니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계급을 의미했고 그 이후 “중간 계층 middle class”을 통칭하는 말로 쓰여왔다. 마르크스 공산주의 이론에서 “부르주아”는 “유산계급” 자본가계급을 뜻한다. 마르크스 개념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이해할 때 “중산층”계급으로 이해하기를 약간 힘들어하는 정서가 있지만, 부르주아는 귀족이 아니고 하층노예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오늘날의 “중산층”계층에 해당되고, 이를 “자유시민계급”이라고 불렀다. 이들 자유 시민은, 따라서 위로부터 지시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발적인 행위를 보다 우선시한다. “칼레의 시민 대표 6인”의 조각작품을 의뢰한 칼레 시의 의도와 과정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되어 있다.[24][25]
1884년 칼레 시는 “칼레의 6인” 조각을 당시 유명한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했고, 로댕은 이를 1895년에 완성했다. 로댕의 작품은 공모 11년 만인 1895년에야 빛을 보게 되었는데, 영웅적인 느낌을 주는 기존의 동상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 작품은 칼레 시청 광장에 바닥돌 위에받침대도 없이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로 세워졌다. 이 동상은 전통적인 영웅의 일인 동상이 아니라 6인의 동상의 한 군데 함께 모은 새로운 양식으로 세워졌다. 6인 각자의 얼굴 모습은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인간적인 번민을 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댕은 전통적인 영웅에서 느껴지는 공동체를 위한 담대한 자기 희생 정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한 용기를 그려내는 것에서 벗어나 다가올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고 번민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26]
항복인질의 자원자로 나선 이들 6인의 이름을 자원 순서대로 열거하면, 첫 번째 자원자가 Eustace de St. Pierre, 두 번째 Jean Daire, 세 번째 Jacques de Wiessant, 나머지 Pierre de Wiessant,Jean de Fiennes, Andrieu d’Andres 이다. 로댕의 동상 조각품에 나타난 시민 대표 6인에 대한 인물 묘사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Eustace de St. Pierre 유스타슈 드 쌩삐에르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칼레의 영웅으로 알려져 온 인물.
② Jean Daire. 장 대르는 나이 든 원로로서 성문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인데 자세가 똑바르지 않는 다른 5인과는 다르게 자세를 꼿꼿하게 유지하고 눈빛이 살아 있어 굳은 결의와 확신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젊은이 Pierre de Wiessant 삐에르 드 위상 Jean de Fiennes 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Jacques de Wiessant 자크 드 위상과 Jean de Fiennes이 손을 들고 제스처를 하는 모습, Andrieu d’Andres buries이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과는 대조 대비된다.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지위가 높은 Eustace de St. Pierre 유스타슈 드 쌩삐에르 그리고 원로이자 성문 열쇠를 갖고 있는 Jean Daire 장 대르는 다른 4인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고통을 느끼고, 주저하고, 확신하지 못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과는 대조 대비된다.
③ Jacques de Wiessant 자크 드 위상
④ Pierre de Wiessant 삐에르 드 위상, 자크와 삐에르는 형제 사이다. 고개를돌려뒤를돌아보고있는데뒤따라오는동생을독려하는듯하다.
⑤ Jean de Fiennes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
⑥ Andrieu d’Andres buries 로댕 조각에서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사람
[1] Jean Froissart, “Chronicles”, Penguin Classics, 97-110.
[2] Richard Swedberg, “Auguste Rodin’s The Burghers of Calais: The Career of a Sculpture and its Appeal to Civic Heroism”, Theory, Culture & Society April 2005 22(2): 45-67, http://www.soc.cornell.edu/faculty/swedberg/2005%20Auguste%20Rodin's%20The%20Burghers%20of%20Calais.pdf.
[3]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을사보호강제조약을 맺은 을사오적 이완용은 친일파 입장에선 일본의 무력으로부터 강제 점령을 막아낸 영웅적 인물로써 미화시킬 수도 있을 테고 (터무니가 없는 것이지만), 일본 입장에선 일본에 자발적으로 부역한 협조자로 분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일강제합방 이후 이완용은 일본제국으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고, 부와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와 한국인의 입장에선, 을사오적은 나라를 적국 일본에 팔아먹은 반역자로 기록되어 역사적 단죄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이완용이 일제치하에서 귀족칭호를 받고, 부와 권력을 쥔 지도층 인사였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귀족층에 편입된 을사오적이 귀족다운 내면적 도덕과 외적 품행을 나타냈다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4]Jean-Marie Moeglin, “Les Bourgeois de Calais: Essai sur un Mythe Historique (The Burghers Of Calais: An Essay On A Historical Myth), http://www.theguardian.com/education/2002/aug/15/highereducation.news. 참조.
[5] Swedberg, 각주 29.
[6]Jean Froissart, “Chroniques”, ch I, http://www.hrionline.ac.uk/onlinefroissart/browsey.jsp?pb0=BookI-Translation_142r&img0=&GlobalMode=standard&img0=&pb0=BookI-Translation_141v&GlobalWord=0&div0=ms.f.transl.BookI-Translation&disp0=pb&GlobalShf=&panes=1
[7]Jean Froissart, “The Chronicles of Sir John”, Ch 145, http://www.maisonstclaire.org/resources/chronicles/froissart/book_1/ch_126-150/fc_b1_chap145.html
[8]Kaiser, “the Burghers of Calais”, Kaiser’sPlays Volume One, 1985.
[9] Swedberg, 각주 29.
[10] Moeglin, J, “Les bourgeois de Calais: Essai sur un mythe historique”, Paris: Albin Michel, 2002.
[11] 650 Years Later, History Repeats: The Burghers of Calais & Auguste Rodin. http://www.prx.org/pieces/105789/transcripts/235544; http://www.theguardian.com/education/2002/aug/15/highereducation.news.
[12] “That six of the chief burghers of the city shall come out, their hands and feet bare, and with halters round their necks, and with the keys of the town and the castle in their hands. These will be at my mercy, and the rest of the town shall go free.” http://www.hrionline.ac.uk/onlinefroissart/apparatus.jsp?type=context&context=english_translations__toc_#book_i_2c_translated_from_besan_c3_a7on_bm_2c_ms__864
[13] “인조실록”에서 삼배구고두의 항복의식은 기록하고 있지만 인조의 머리에 피가 났다는 기록은 들어 있지 않다. 왕조실록은 후대에 들어서 작성하는 것이고 그것도 수정까지도 가능한데 국왕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수가 있겠는가? “항복”을 해놓고서도 역사서에는 그저 단순히 도성을 나왔다는 “하성”이라는 기록으로 유퍼미즘을 동원한 사초작성자의 태도였음을 기억하라.
[14] "If you let someone else have the power of life and death over you, or think yourself so high-and-mighty you can say one person's life is worth more than another's-if you do that, you abandon all dignity and collaborate with evil."
[15] 김용호, “게오르그 카이저의 깔레의 시민들 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상 연구”; GC Tunstall, “Light Symbolism in Georg Kaiser's "Die Bürger von Calais",
[16]Thick smoke swirls about your heads and feet and shrouds the way before you. Are you worthy to tread it? To proceed to the final goal? To do this deed–which becomes a crime–unless its doers are transformed? Are you prepared–for this your new deed? –It shakes accepted values–disperses former glory–dismays age-long courage–muffles that which rang clear–blackens that which shone brightly–rejects that which was valid! –Are you the new men? (114-5), J. M. Ritchie and Rex Last, Kaiser’s Plays Volume One, 1985.
[17]These six burghers stripped to their shirts and breeches there and then in the market-place, placed halters round their necks as had been stipulated and took the keys in their hands, each holding a bunch of them. Sir Jean de Vienne mounted a pony - for he could only walk with great difficulty - and led them to the gates. The men, women and children of Calais followed them weeping and wringing their hands.
[18] 로댕 창작 노트, 편지. 칼레 시 의회 기록. 용감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 "They are voluntarily bound to the same sacrifice but each of them plays the role suited to his individuality given his age and position" (Auguste Rodin).
[19] “Rodin described his intentions as follows: "It is the subject itself which (...) imposes a heroic vision of all six figures being sacrificed to one single communicative expression and feeling. The pedestal is triumphal, it has the rudiments of an arch of triumph intended to uphold, not a quadriga, but human patriotism, self-abnegation and virtue.” http://www.rodin-web.org/works/1884_burghers.htm.
[20] Swedberg, Sacrificing Yourself for Others: Civic Heroism and Auguste Rodin’s “The Burghers of Calais”.
[21] “The Burghers of Calais expresses the emotions of despair, defiance, and resignation. Rodin has captured these emotions in the roughly textured surfaces of the figures. He wanted the citizens of Calais to experience this heroic episode in their city’s history.”
[22] http://www.rodin-web.org/works/1884_burghers.htm.
[23] Swedberg, 각주 29.
[24]http://www.rodin-web.org/works/1884_burghers.htm.
[25] Swedberg, 각주 29.
[26]Benedek, AUGUSTE RODIN · THE BURGHERS OF CALAIS A Resource for Educator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칼레 성문의 열쇠를 들고 있는 Jean d’Aire>
칼레의 시민-로댕의 조각 의도
로댕의“칼레의 시민”-1인 동상이 아니라 6인 동상-시민의 평등성을 강조
우뚝 선 한 명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평등한 여러 시민들이 전체로서 as a whole 합력하여 이룩한 공동체 시민 사회의 위대한 힘
대개 영웅 동상을 세울 때는 한 사람을 위주로 세우는 것이 보통이고 또 우리나라 서원에서 유고 제사를 받드는 선현들의 숫자가 소수로 제한됨을 보더라도 6명이라는 다수의 사람을 영웅으로써 함께 칭송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임진왜란에서 순국한 이름없는 용사의 무덤인 “700의총”은 지도자의 이름도 나타나지 않는다.)
영국 군대의 침입에 대항해서 1년을 버티다가 결국 칼레 시가 포위 함락당하게 되자 6명의 항복 인물을 누구로 정할 것인지의 놓고 고민하고 있는 항복 상황에서 무슨 영웅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의 칭호는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에 나타난다. 이순신 장군,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군에 승리를 거둔 넬슨 장군, 2차대전과 6.25 한국동란에서 승리한 맥아더장군의 경우가 그것을 말해주는 사례에 속한다. 영웅은 전쟁에 승리한 경우에 나타난다. 반대로 전쟁에 패배한 측은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르고 다수가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가 일반적인 역사이었다. 청나라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서 2개월을 못 버티고 (프랑스 칼레는 1년간이나 버텼다) 항복하면서 3배9고두레 무릎을 끓은 “삼전도의 눈물”을 흘린 조선시대 병자호란의 패배를 기억해 보자.
평등 사회 개념=시민 사회의 기초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 조각은 프랑스 칼레에 1895년 6월 3일에 처음 세워진 이후 세계 여러 도시에 흩어져 전시되고 있다.
1. 프랑스 칼레Calais
2. 프랑스 파리 로댕 미술관 the Musée Rodin
3. 영국 런던 빅토리아 타워 가든Victoria Tower Gardens
4. 스위스 바젤 미술관 the Kunstmuseum
5. 미국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the Rodin Museum
6. 미국 워싱턴 theHirshhorn Museum
7. 미국 워싱턴 the Sculpture Garden
8. 미국 파사데나 the Norton Simon Museum
9. 미국 스탠포드 대학Stanford Museum
10. 미국 뉴욕 theMetropolitan Museum of Art
11. 미국 뉴욕 Brooklyn Museum-New York City
12. 덴마크 코펜하겐 Ny Carlsberg Glyptotek
13. 호주 캔버라 the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14. 벨기에 브뤼셀Mariemont,Belgium
15. 이탈리아 베니스The Ca' Pesaro Museum, Venice
16. 이스라엘 예루살렘 the Israel Museum
17. 일본 도쿄 the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18. 한국 서울 삼성 미술관 (플라토 갤러리)
칼레 시청앞에 세워진 작품은 로댕이 직접 주물을 뜬 1호 작품인데 6인이 각각 떨어져 배치되어 있다. 반면 다른 곳은 한 받침대 위에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고, 6개 각각의 동상을 배치한 모습도 각각 다르다. 로댕의 이 작품은 먼저 점토 형상을 만들어 거푸집을 뜨고 청동주물을 부어 넣어 완성하는 청동주조물이다. 거푸집에 청동주물을 붓기만 하면 똑같은 작품을 복사하여 다수 찍어낼 수 있는 조작 구조물이다. 거푸집을 통해 나온 복사된 작품은 모조품이 아니고 오리지널 작품으로 인정되는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저작권자인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통해서 조각품이 만들어졌던 사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칼레의 시민들’작품이나, 런던, 이스라엘, 호주, 일본 등에 전시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주조물 복사과정을 통한 작품이라고 한다.[1]
한국에는 1999년 문을 연 플라토 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이 갤러리는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의 부인 홍라희 관장이 삼성생명 건물내에 만든 미술관이다.[2] 공공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담론 형성 과정이 삼성 재벌그룹이 주도하고 있다면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이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을 전시하고 곳을 보면 공공 미술관임을 알 수 있는데 공공 미술관이 로댕의 이 작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로댕의 조각가로서 유명세뿐만 아니라 그가 추구한 시민 교육 이념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 것 같다. 공공교육 기관에서 로댕의 작품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로댕이라는 조각계의 거장다운 이름값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바람직한 시민상을 길러내고자 하는 시민교육의 목적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6인 조각 작품은 소수지도층을 영웅으로 칭송하자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민은 모두 평등하고 또 시민 모두가 영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평등 사회의 시민상의 이념을 구현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로댕의 의도와 세계적인 미술관의 전시를통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에 대해 사회 지도층의 우월적 의무를 강조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http://www.okba.net/bbs.php?table=board_01&query=view&uid=257.
[2]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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