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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대혁명/국부론의 종언

허울뿐인 풍요를 꿈꾸고 있는 한국인

by 추홍희블로그 2015. 8. 21.

허울뿐인 풍요를 꿈꾸고 있는 한국인


한국인들은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와 영화 속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 물건과 돈의 풍요가 넘치고 있다.  “경제 동물”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돈을 버는 것만을 인생과 사회의 유일한 목적으로 살고 있다고 세계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전쟁의 가난과 기아를 아는 사람들에게 가난은 공포 그 자체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전쟁을 겪은 부모들이 아직도 살아가고 있기에 물질과 돈에 매달리고,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는 시대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직은 어려울 것 같다.


전후 60년 사이에 근면한 국민성 덕분에 용캐도 이 정도로 풍요롭게 되었다고 정치가들은 자화자찬한다.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 가고자 국민들이 일어섰을 때 이들의 가슴 속에는 애국심과 국가의 절대적 권위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철학보다도 물질과 돈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전쟁세대의 체험에서 생겨난 필연이었다.

왜냐하면 정신주의에 기초한 판단은 계속 독선적 잘못을 향해 폭주했지만 물질과 돈을 얼마나 만들어냈다거나 하는 금전적 가치 판단은 누가 봐도 합리적인 객관적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과 돈은 건강과 행복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기도 했다.

지금은 “경제대국”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돈과 물질을 자랑하고 돈이 많다는 것을 계속 내세우는 상황에서 실은 그것밖에 내새울 것이 없는 사회의 빈곤함을 우리는 자각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인은 모든 것을 경제로 특화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려왔기 때문이다.

예컨데, “당신 나라의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이라고 질문했을 때, 스웨덴의 젊은이는 62%가 “복지”라고 답했다. 일본의 경우는 6%.


허울뿐인 풍요


한국의 풍요가 실은 뿌리가 없는 표면적인 풍요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고, 모래밭에 쌓아 올린 사상누각처럼 사치는 곧 무너지리라는 예감을 많은 한국인들이 마음 속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상시가 되어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불안과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었다는 쓸쓸함으로 강박증처럼 끝없는 공복감에 쫓기고 있는 한국인은 그래서 더욱더 돈을 모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기업이 투자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한없이 자기증식을 계속하는 것이 목적인 자본에게는 당연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돈과 물질은 본래 생활에 필요한 만큼 있으면 좋은 것이다.  인생에서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해서 즐거운 생활, 취미,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 인생의 충만감, 순수한 우정, 자연과 함께 있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충분하다면, 재테크와 머니게임에 한없이 눈을 붉히고 뛰어들 필요는 없다. 자본의 목적과 생활의 목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기업의 투자열기에 감염된 듯이, 주식매매와 리조트용 땅과 원룸과 맨션에 대한 투자, 마침내 교육도 투자, 교제도 투자, 휴일과 관혼상제 이 모두를 투자로 계산하는 것이 사회의 풍조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들까지 손해를 보면 손을 내밀지 않고, 약자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풍요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차분한 안도감과 인생을 즐기는 여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자연스레 솟아나는 타자에 대한 동정과 공감 등은 돈이 많은 한국사회에서 나날이 모습을 감춰가고 있다.


“돈을 버는 것과 인생의 행복감은 정말로 그렇게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 어느 쪽이 행복한 사회를 구성하는가를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어느 쪽이 여유있는 동정심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가에 따라서 사회적 안정의 정도가 판단되고 그것에 따라 그 사회에서 사는 것의 행복이 측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낮은 나라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풍요롭다고 말한다.  한국이 현재와 같이 되어버린 원인을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마음의 문제에서 찾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한국 사회에 지금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신문방송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부패 정치가와 부패 관료들의 뇌물사건은 하나의 상징일뿐이다.


지금 우리를 몰아세우는 금전만능주의와 효율지상주의의 추구경향은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멈춰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생활을 풍요라고 느끼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을 돌아보면, 살인적 러시아워에 전철과 버스에 타지 못하고 처지지 않기 위해 타인을 밀어 제쳐서라도 올라타지 않으면 안되는 근로자와 학생들이 있다. 

대도시에서는 출근하는데만 한 시간 반, 왕복 3시간을 초만원인 차 안에서 계속 서서 출퇴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A씨 경우를 보자.

아침 6시반에 일어나서 7시에 집을 나서고 한 시간 반이 안 걸려 공장에 가 타임카드를 꽃아 넣는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8시반인 작업시작시간에 빠듯하게 맞춘다. 점심시간은 40분. 거의 매일 저녁 한 시간 반정도의 잔업이 있고 잠시 컵라면 등을 멋은 뒤 회사를 나서는 시각이 저녁7시다. 9시 가까이 되어서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머고 신문제목만을 잠시 훑고 전화를 걸거나 텔레비젼을 보고 목욕하면 11시가 된다. 다음 날 아침 6시반에 일러나기 위해서는 곧 잠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세탁과 청소와 요리 등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은 할 수 없다. 한국의 기업 전사는 그를 시중드는 아내가 없이는 회사 일을 할 수 없다. 가족의 단란함도 문화적 즐거움도 제쳐두어야 한다. 그에게 가정은 다만 잠을 자러 돌아가는 곳일 뿐이다.


“중년에 가까워지면서 가족 속의 고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귀중한 휴일에도 가족 사이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 자신의 인생에 관해, 아이들에 관해, 사회가 이르게 될 끝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일벌은 불안으로 내몰린 능동적 허무주의의 존재일 뿐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는 주 2일 휴무제가 도입되어도 휴일이 즐겁지 않다. 


아이들을 서두르게 하려고 “빨리” “똑바로 해”라고 말하면서 그때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즐겁고 행복한 생각들을 몇 번이나 했을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내 인생의 중요한 한 장면이었는데도 말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숙제와 시험에 쫓겨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모험을 즐길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학교의 관리와 시험경쟁에 허덕이고 있다.  아이들의 교육비를 벌기 위해 많은 주부들이 시간제로 일하고 부모와 아이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며 혼자 쓸쓸히 식사를 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주부가 시간제로 일하는 이유로 교육비 주택대출 노후대책 등이 항상 최우선으로 꼽히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지역사회에서도 이웃끼리 좋은 인간관계와 생활환경을 만들어내려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노인을 상대하는 사람도 없다. 입원한 가족 때문에 젖먹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는 엄마의 힘든 모습을 보고도 손을 내밀어 도와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의지가 약해지거나 욕심쟁이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효율성 추구 경쟁 사회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우정을 잊어버리게 하고, 사람들이 공유하는 미래에 대해 또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 전사가 되도록 길러지며, 기업 전사로서 살아가야 하고, 노후와 질병은 자기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Andreas Gursky, 99 Cent, 1999, chromogenic color print, 207 × 337 cm


한국은 지금 고층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난무하며 마치 일본이라는 나라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없는 것이 없는 한국사회 겉으로 보이는 삶은 매우 풍요롭게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의 속마음이야 어떤지 내가 알 길은 없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경제 동물”’이라는 것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일본처럼 긴 시간 노동과 열악한 복지와 파괴된 자연 환경 그리고 획일화된 금전만능주의와 효율성추구 경쟁 사회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과거 20년 동안 크게 변한 한국과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풍요롭다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오지 않는다. 


오랫만에 일본을 다녀오면서 한국은 일본의 잘못된 길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일본의 전철을 밟아가는 한국의 잘못된 모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 풍요란 무엇인가(豊かさとば何)か)”책에서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 대신 단어 하나만 살짝 “한국”으로 바꿔봤다.   많은 측면에서 어떤 경우에 보면 한국인지 일본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국이 일본의 부정적인 측면을 복사 모방 답습하고 있다는 모습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