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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정치경제학/선거의 심리학

파블로프의 개 vs 슈로딩거의 고양이

by 추홍희블로그 2015. 8. 11.
유권자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즉 자극에 생각없이 그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Schrödinger's cat”의 개념이 떠오른다.  좋은 소식도 되고 나쁜 소식도 될 수 있다는 이중성이다. 그렇다고 (또는 그런 이중성 때문에 사람의 판단력은 비이성적이고 한정적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하나의 이벤트를 중첩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헛것을 본다거나 환상을 본다고 하지 않는가?
 
“슈로딩거 고양이”는 이벤트가 벌어진 경우 죽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둘 다 함께 일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이벤트가 벌어지기 전에는 둘 다가 겹쳐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중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틀린 명제이다.  
 
사람들은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다 알고 있듯이 행동하고 또 자연 현상처럼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처럼 확실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과연 미래 예측도 그러할까?  아니지 않는가?   꿩 먹고 알 먹고 알 먹고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환상을 보고, 또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게 될까?

슈로딩거의 고양이 실험에서 상자 속의 고양이는 “분명히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고양이가 살아 있을 확률은 50%, 죽어 있을 확률도 똑같이 50%”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위 개념이 시사하듯이, 사람은 “파블로프 개 Pavlov’s dog”로써 “자극 stimulus”에 조건 반사적으로 “반응 response”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극과 반응 그 사이에 공간이 존재한다.  생각하는 “공간(space)”이 존재한다. 이 공간은 벽이 아니라, 생각하는 공간이고, 소통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사람은 이 공간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게 된다.  최소한 “파블로프의 개”가 생각 있는 “슈로딩거의 고양이”와 싸우고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그렇게 사람은 역설적인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