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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수필/산보자의 명상록

약초의 성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얻는 힘

by 추홍희블로그 2015. 8. 3.

약초의 성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얻는 힘

 

성 레오나르드는 신비한 약초와 한방의학과 대체의학의 효능을 통해 아픈 팔다리를 낫게 하여 산과 들을 맨발로 자유롭게 달려 다닐 수 있게 하는 치유의 성인이고, 또 족쇄를 차고 감금을 당하고 속박과 굴레 속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결박된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선사하는 성인이다.  자유와 해방의 기쁨.  치유하기 위해서는 산 속의 수도원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산 속에 들어가면 들판을 나올 수가 없다.  자유와 구속은 시이소오 관계에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결박과 속박을 받아 들어야 한다는 것.  치유를 하려면 결박과 속박이 필요하다는 것.  이건 타율과 자율이라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고, 속박이라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치유의 희망을 갖고 있는 한 자율이고 자발적인 확신과 신뢰의 문제일 것이고 그에 따라 고통은 희망의 빛으로 경감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듣고 일어선, 그리하여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저는 꿈을 가지고 있다말하며 정의와 진실과 진리의 길을 걸었던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의 연설 구절과 의미가 상통한다.  어머니께서 당신이 젊었을 때는 성경 구절을 길게 외우기도 하셨는데, 사람의 기억력은 노화의 진행과 함께 쇠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유의 힘- 진실의 위대한 힘-익모초

 

“개똥도 약에 쓰려고 하면 찾기 힘들다는 속담이 있는데, 약용으로 쓰일만한 약초 캐기란 산삼 찾는 것의 반 이상은 될 정도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산과 들에 나가보면 쑥부쟁이, 백도라지, 구절초 등을 캐기도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어머니께서 자주 들렸던 한약방 중에 포항한의원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강장 보약 먹기 위해서 한의원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한방 치료의 효능을 얻기 위해서 한의원 단골 고객이기도 했다.

 

익모초는 초여름에 피는 연한 붉은색 꽃인데, 어머니를 이롭게 하는 풀이라는 뜻의 益母草라는 말에서 알다시피, 어머니 즉 여성에게 좋다는 한방 약재로 잘 알려져 있다.  익모초는 혈액 순환을 돕는 효능이 있어서 여성들의 생리통, 생리불순에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한방 약재로 쓰이기에 익모초는 어머니에게 이로운 풀임에 틀림없다.  익모초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것 같은데 이를 보면 선현들의 삶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좀처럼 TV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는다.  내가 본 적이 없는 드라마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겠지만 편의상 다른 사람의 전언에 따라 잠시 몇 줄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조선 18대 왕 정조 시대 홍국영은 당시 정권의 실세인데 그의 누이동생(왕의 후궁)이 뱃속의 아이를 사산하게 되고, 이 일로 왕비는 사산의 원인 제공자로 누명을 뒤집어 쓴다.  그런데 이 누명을 익모초가 밝혀주게 된다는 이야기다.  왕의 후궁이 평소 익모초를 달인 보약을 오랫동안 복용해 왔고, 또 뱃속의 아이를 사산했다는 날 직전까지 마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익모초는 자궁을 수축하는 효과가 있어서 임신 중에는 복용을 금지하는 한방 탕재에 속한다.  이러한 익모초에 대한 한방 지식에 기초하여, 왕의 후궁이 처음부터 임신을 하지 않았으며, 또 아이를 사산했다는 것도 조작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음모, 조작, 배신은 중앙정치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일어나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영역 같은데, 익모초는 한방약재의 효능뿐만 아니라 범죄의 비밀까지 풀어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모른다.  지식의 힘으로 거짓을 밝혀내고 자유를 되찾게 된 것이다. 

 

진실의 위대한 힘-“The truth shall set you free.” 

 

하지만 여기서 잠깐만 생각을 해보자.  최고 권력을 놓고 암투가 벌어지는 궁정정치에서 진실이 통할까?  사람들 셋만 모이면 남 얘기하는 것이 인간본성이라고 한다.  한자 간사스러울 姦자의 어원, “3인성호 4자성어의 유래를 알면 수긍이 간다.  사람이 3인 이상 복수가 모여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는 남의 것을 찬탈하려고 배반과 음모가 꾸며지고, 적반하장하고 조작하고 다른 사람에게 덮어 씌우는 무고죄를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저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탐욕이 넘치고 욕망이 불타오르면 사람들의 눈이 뒤집혀지는 경우까지 벌어진다. 

 

아담과 이브 단 둘이 사는 세상은 어디까지나 무릉도원이고 낙원이었다.  그런데 대리인인 뱀이라는 제3자가 나타나면서 낙원은 범죄로 얼룩지고 고통이 수반되는 타락의 장소로 변해 버렸다.  나는 수많은 케이스 사건들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경찰이 사건을 조작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덤블과 산더미 같이 쌓인 서로의 반박 증거 속에서 상호모순점을 발견해 내고 그들의 허점과 급소를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읽혔다. 

 

그럼 과연 진실의 힘은 위대할까?  전쟁과도 같은 극한상황에서는 진실을 찾는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진실의 힘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이성적인 사고를 한다는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기초한다.  그런데 전쟁터와 같은 극한적인 싸움에서 무엇이 진실이겠는가?  권력을 놓고 싸우는 조직 사회는 제로섬 게임의 전투 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궁정정치는 더욱 그러하다.  세 사람 이상이 모인 인간 조직 사회는 언제 어디서나 궁정정치의 축소판이라고 볼 때, 진실은 바로 권력의 힘에 다름 아니다.  다만 그 기울기가 때에 따라 곳에 따라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조작된 주초위왕사건으로 사약을 받은 조광조부터 수많은 사초사건과 사화를 들춰보면, 조직 권력에서는 진실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법정에서 진실의 위대한 힘을 말하는 것은 법이 이념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모두에게 해당되고 적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진실의 힘이 위대하다고 말할 때는 최고권력을 넘어설 수 있을 때를 말한다.  그런데 200년 전의 궁정정치의 암투 속에서 진실이 밝혀질 법정이 존재한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그것은 오로지 최고 권력의 의중과 향배에 달려 있던 권력 시계추의 어디로 움직이냐의 문제였다.  정보의 유통과 해석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은 최고권력자이었기 때문이다.  후궁이 익모초를 달여서 만든 한방탕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누가 어떻게 입수했는지를 보아라?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내부 비밀 정보를 누가 고자질을 했을까?  순수한 밀고자가 있을까?  우리나라는 제주도 4.3 사건, 한국동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밀고자 사건이 등장하는데 밀고자는 불만이든 공익을 위한 제보이든 그 사건 배경을 이룬 다른 목적이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점은 신학적으로 보면 원죄에 해당한다.  이 원죄를 파고들 수 있는 힘은 유일최고권력자인 하나님이고 현실세계에겐 최고권력자이다.  당사자들은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특성 때문에 내부고발자가 나타나기 힘든 것이다.  고발자가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양심의 힘이 작동하지만 고발하는 순간 이 힘은 최고권력자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이 되고말고 마는 것이다.  내부고발자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익모초 사건으로 되돌아가서 보자.  후궁이 익모초 한방탕약을 달여 먹었다는 정보는 사생활에 관련된 순수한 내부 정보에 해당한다.  그런 사생활 정보를 갖다 바친 사람은 무슨 원한이 있거나 또는 반대파들에 매수 당해 어떤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궁을 처벌하기 위한 악의적 목적이 없었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때 밀고자는 진실을 캐내겠다는 양심에서 했을 리는 만무하다.  물론 궁중에 근무하는 모든 궁중 직원은 진실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고 보면 밀고자는 밀고가 아니라 진실 전달의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한 것이다.  그것이 양심에 관한 문제라면 달라진다.  하지만 권력다툼은 양심의 문제가 개입될 성격이 아니다.  단지 서로 대립하는 두 반대파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상황에서 그런 중요한 사생활 비밀 정보를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던가?  사생활에 관한 비밀 정보를 갖다 바친 밀고자 그리고 불법적인 정보에 접근한 권력자는 불법적인 행동이므로 이러한 원죄를 지게 되는데, “진실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이 불법을 저지르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고 만다.  물론 후궁 또한 탕약을 거짓으로 달여 복용하여 국가재정을 축낸 원죄에 책임이 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서 이들의 불법을 사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최고권력자밖에 없다.  개인의 사생활의 보호보다 국가적인 공익 목적이 크다는 이유로 밀고자는 권력과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이익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더 큰 파이, 더 큰 권력, 더 큰 부를 차지하기 위해서 세력간에 벌이는 이전투구의 장애서 실수이든 고의이든 떨어지는정보가 진실이라는 권위와 힘을 가지려고 하면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이 필요하다.  누가 그 해석을 하는가?  그것은 권력이 한다.  여기에서 권력과 권위의 근원을 캐는 문제는 결국 순환론적이 되고 만다. 

 

밀고자는 생존의 문제가 절박한 경우 즉 전쟁과도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일어나는데, 그런 극한상황에서 순수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자기이익을 추구하려는 생존적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진실을 추구한다는 표면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전쟁과 같은 극한상황에서는 의도와 표현이 불일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기란 원천적으로 매우 힘든 문제이므로 그런 노력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다.  전쟁에서 상대방의 총이 설마 사람을 죽이려고 하기야 하겠느냐 단지 겁을 주려고 공포를 쏜 거겠지 하면서 낙관적인 해석을 할 사람이 어느 누가 있겠는가?  전쟁의 경험과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바보 같은 사람밖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쟁에서는 무조건 살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것이 상책-주위상계 走爲上計가 최고의 생존법칙이라는 것은 손자병법의 36계를 읽어보면 잘 이해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가 하더니 언제부턴가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라고 말하는데, 무엇이 진실인가?  권력의 장에서 진실을 찾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 사람 또한 숨어 있는 실세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되는 대리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서는 전투에서는 진실이 없다.  다만 살아남아야 하고, 그것만이 위대한 진실이다.

 

어머니께서 젊으신 시절에 구절초 익모초 등의 약초를 캐고 약을 달여 드시기도 했는데, 낙상하고 무릎이 굳은 마지막 순간까지 치유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을 언제까지나 기대하였고, 그 희망의 창문을 항상 열어놓고 계셨다.  어머니께선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희망을 놓지 않으셨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다섯 처녀처럼 항상 희망의 등불을 켜놓고 계셨다.  하지만 이를 어찌하랴!  이제 어머니는 영원한 길로 떠나셨고, 그리하여 내가 어머니의 고통을 언젠가는 기쁨으로 전환해 드리라는 나의 위대한 희망은 거대한 착각이 되고 말았다.  이게 나의 슬픔이고 회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