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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언어/ 詩-영시

승무

by 추홍희블로그 2015. 6. 17.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예능보유자 한영숙의 승무추는 모습으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춤의 하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고풍의상(古風衣裳)


하늘을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 저고리*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도라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추운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춰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눈 감고 거문고를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다. -  (문장 3호, 1939.4)


 승무의 창작 과정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바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 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 그 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靜止)하는 찰나의 명상(冥想)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官能)의 샘솟는 노출( 복사꽃 고운 뺨)을 정화(淨化)(별빛)시킬 것, 그 다음 유장한 취타(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皎皎)한 달빛과 동 터 오는 빛으로써 끝맺을 것.


 이것이 그 때의 플랜(계획)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 퇴고하는 데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 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요약하고 말았다. [조지훈, '나의 시 나의 시론']


 '나는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어떠한 과정을 밟는가 하는 데 대하여 졸시 '승무'의 작시 체험을 말함으로써 시의 비밀을 토로하겠습니다.


  내가 승무를 시화(詩化)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는 열 아홉 때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이 '승무'로써 나의 시세계의 처녀지를 개척하려고 무척 고심하였습니다만 마침내 이 보다 늦게 구상한 '고풍의상'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난산(難産)의 신(新)을 회태(懷胎)하기까지 나는 세 가지의 승무를 사랑하였습니다. 첫 번은 한성준(韓成俊)의 춤, 두 번째는 최승희(崔承喜)의 춤, 세 번째는 이름 모를 승려의 춤이 그것입니다.


  나는 무용 비평가가 아니므로 그 우열을 논할 수 없습니다만 앞의 두 분 춤은 그 해석이 나의 시심에 큰 파문을 던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승무에의 호기심을 일으켜 몇 번의 기녀(妓女)가 추는 승무에까지 이끌어 갔던 것이니 승무를 시화케 한 최초의 모멘트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참 승무를 보기는 열 아홉 살 적 가을이었습니다. 그 가을 어느 날 수원(水原) 용주사(龍珠寺)에는 큰 재(齎)가 들어 승무밖에 몇 가지 불교전래의 고전음악이 베풀어지리라는 소식을 거리에서 듣고 난 나는 그 자리에서 수원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밤 나의 정신은 온전한 예술 정서(情緖)에 싸여 승무 속에 용입(溶入)되고 말았습니다.


 그 밤 나의 정신은 온전한 예술 정서에 싸여 승무 속에 용입(溶入)되고 말았습니다. 재(齋)가 파한 다음에도 밤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없이 서있는 나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시정(詩情)을 느낄 땐 뜻 모를 선율이 먼저 심금을 부딪힘을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그 밤의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안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이듬해 늦은 봄까지 붓을 들지 못하고 지내왔었습니다. 춤을 묘사한 우리 시가(詩歌)로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아직 없을 때이라 나에게는 오직 우울밖에 가중(加重)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마디의 언어 한 줄의 구상도 찾지 못한 채 막연한 괴로움에 싸여 있던 내가 승무를 비로소 종이 위에 올리게 된 것은 내 스무 살 되던 해의 첫여름의 일입니다. 예술전람회에 갔다가 김은호(金殷鎬)의 '승무도(僧舞圖)' 앞에 두 시간을 서 있은 보람으로 나는 비로소 우려 78자의 스케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움직임을 미묘히 정지태(靜止態)로 포착한 이 한 폭의 동양화에서 리듬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지당한 발견이었으나 이 그림은 아까 기녀(妓女)의 승무를 모델 한 상 싶어 내가 찾는 인간의 애욕 갈등 또는 생활고의 종교적 승화 내지 신앙적 표현이 결여되어 그때의 초고(草稿)는 겨우 춤의 외면적 양자(樣姿)를 형상(形象)하는 정도의 산만한 언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통해서 내가 잡지 못해 애쓰던 어떤 윤곽을 잡을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나는 이 초고를 몇 날 만지다 그대로 책상 위에 버려둔 채 환상(幻想)이 가져오는 소위 시수(詩瘦)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 승무로 인하여 떠오르는 몇 개의 시상을 아낌없이 희생하기까지 하였으나 종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용주사(龍珠寺)의 춤과 김은호의 그림을 연결시키고도 왜 시를 형성하지 못했던가? 이는 오직 춤을 세밀히 묘사하면 혼의 흐름의 표현이 부족하고 혼의 흐름에 치중하면 춤의 묘사가 죽는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 정신과 육체, 무용과 회화(繪畵)의 양면성을 초극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초극하고 한 편의 시를 만들기는 또다시 몇 달이 지난 그 해 10월 구왕궁(舊王宮) 아악부(雅樂部)에서 {영산회상(靈山會相)}의 한가락을 듣고 난 다음날이었습니다. 아악부를 나서면서 나는 몇 개의 플랜(plan)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이 시를 이루는 골자(骨子)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입적(直入的)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 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 그 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하는 찰나의 명상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의 샘솟는 노출을 정화(淨化)시킬 것, 그 다음 유장(悠長)한 취타(吹打)에 닳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皎皎)한 달빛과 동터오는 빛으로서 끝막을 것, 이것이 그 때의 플랜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동안 퇴고(推敲)에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습니다. 퇴고하는 중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라 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전편 15행의 다음과 같은 시 하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시 전문 생략…오래 앓던 작품을 완성하였을 때의 즐거움은 컸다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처음 의도에 비길 때 너무나 모자라는 자신의 기법에 서글픈 생각이 그에 못지 않게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든 구상한지 열 한달, 집필한지 일곱 달만에 겨우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로써 나의 승무의 비밀은 끝납니다. 써 놓고 보니 이름 모를 승려의 춤과 김은호의 그림과 같으면서도 다른 또 하나의 승무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춤은 내가 준 승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춤추는 승려는 남성이었드랬는데 나는 이승(尼僧)으로 그림의 여성은 장삼을 입은 속녀(俗女)였으나 나는 생활과 예술이 둘 아닌 상징으로서의 어떤 탈속한 여인을 꿈꾸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이 승무는 나의 춤이 되는 까닭이 되기 때문입니다. 열 아홉의 아름다운 체관(諦觀)! 슬픔도 이렇게 즐겁고 볼 양이면 내가 어찌 시를 떠나서 살 법이 있으랴만 이러한 고심에 비하여 시가 얼마나 초라한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으니 이는 끝내 내가 시인이 아니고 말아도 서러울 리 없기 때문입니다. 뒷날 어느 선배는 나의 시에서 언어의 생략을 충고하였으나 유장(悠長)한 선을 표현함에 구슬같이 밝고 가벼운 언어만으로서는 도저히 뜻할 수 없어 오히려 리듬을 위하여 부질없는 듯한 말까지 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自然)한 해조(諧調)를 이루는 빈틈없는 부연(敷衍)은 생략보담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여기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 조지훈의 <시의 원리>(珊瑚莊刊, 1956)에서


 승무는 승려가 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