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경제학자
1.
케인즈, 그는 누구인가?
1929년 10월 29일. 뉴욕 주식시장은 사상초유의 대폭락을 기록한다. 이후 펼쳐진 1930년대 대공황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절대절명의 경제위기를 가져온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를 구해내는 경제이론을 제시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이다. 케인즈는 대공황이라는 경제병을 치유함에 있어서 약방의 감초같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명한 경제학자 이름이다.
케인즈, 그는 누구인가? 키 크고 콧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은 한국인에게는 영락없이 이방인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케인즈는 경제학책에서 그렇게 많이 접한 이름이지만 한국인에게는 그의 사고와 삶이 웬지 익숙해 보이지 않는다. 정치와 문화가 다르고 경제현실이 다른 시공간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케인즈의 정치경제학의 사상과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케인즈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전인 1883년에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선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한 해전으로써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해이다. 국제적으로는 칼 마르크스가 죽은 해로써 자본주의의 부산물이 치명적 위기로 나타나던 시기이다.
케인즈는 40세가 채못된, 우리나라가 3.1절 대한독립을 선언한 그 해인 1919년에 1차대전 종전에 대한 경제적 효과를 논한 경제논문을 발표한다. 이로써 케인즈의 이름이 뉴욕타임즈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케인즈는 알프레드 마샬의 제자로서 고전파 경제학을 배웠다. 그러나 고전파 경제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케인즈로 성장하게 된다.
케인즈의 이름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 딜 정책”과 함께 자주 떠올려진다. 케인즈는 정부의 재정정책과는 떨어질 수 없이 꼭 등장하는 경제학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대공황 때의 가장 큰 현실경제 문제는 대량실업 문제이었다. 대실업 문제는 당시 정통주류경제학으로서는 해결해 내지 못한 가장 어려운 경제현실문제이었다. 화폐경제와 실물 부문을 배제하던 당대 주도적인 전통 고전파 경제이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케인즈의 현실경제 문제 해결 논리는 후에 “케인즈 혁명”이라고 불리며 그때까지의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바꾸며 큰 반향을 불러오게된다.
케인즈는 토지와 노동과 자본의 경제요소가 시장의 자기 조정능력에 따라 이뤄진다는 고전파경제논리가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파악했다. 케인즈는 저축과 투자 관계에서 고전파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졌다. 저축이 이자율 조정을 통해서 투자를 결정한다는 고전파 논리에 케인즈는 도전했다.
케인즈 이전의 고전파 경제학 이론은, 저축은 이자율이 높으면 따라서 높아지고 이자율이 낮으면 따라서 낮아진다고 보며, 반면 투자는 이자율이 낮으면 높아지고 이자율이 높으면 투자가 낮아지는 함수관계에 있다고 보왔다. 따라서 저축과 투자율은 토지와 노동 그리고 자본의 경제3대 자원을 완전고용 산출량을 달성하는 선에서 자기 조정 기구가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인즈는 이와 달리(항등식으로 본 고전파와 달리), 저축을 수입함수(방정식)로 보왔다. 또 투자는 향후 경제사정에 대한 예측을 포함한 사람들의 심리적 요소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한다고 보왔다. 케인즈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투자를 이자율 함수로 보지 않았다. 투자는 이자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다른 간접적인 수단에 달려 있다고 보왔다. 더 깊게 말하면 케인즈는 투자가 더 중요하며, 더 나아가 저축은 투자의 결과적 파생 함수로 보왔다. 즉 고전파 경제이론과는 반대로 이자율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자율이 투자를 결정하는 단적인 요인은 아니라고 보왔다. 이자율 수준을 통해서 투자가 이뤄진다는 시장의 자율성을 믿지 않았다. 즉 저축과 투자가 균형을 이룬다는 경제학 이론을 거부하고, 현실 경제에서는 불완전고용산출이 나타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바탕 위에서 경기부양을 통한 투자정책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케인즈의 “일반 이론”이다. “고용, 이자와 금융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는 책이 나온 때가 지금으로부터 75년전인 1936년이다.
“고용, 이자와 금융에 관한 일반이론” 이 논문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과 함께 새로운 경제학을 연 불후의 역작이다. 이로써 케인즈는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아담 스미스, 계획경제 경제학을 연 칼 마르크스와 함께 세계3대 위대한 경제학자중의 한사람으로 칭송받게 된다. 이들은 당대의 학문시각을 완전히 바꿔놓는데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자유방임주의는 경제문제를 시장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다. 대공황 당시 미국재무장관이었던 멜론은 1930년에 이렇게 말하여 대공황의 위기에서 국가의 방조를 정당시했다, “썩은 시스템을 도려내야 한다. 분수를 넘은 생활비와 상류의식은 내놓아야 한다. 사람들이 더 힘들게 일해야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도덕가치가 다시 살아나야 하며, 신기업가들은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더미를 치워내야 한다.”
그러나 케인즈는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들며,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시장기구가 아니라 그대신 국가가 나서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 시스템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균형이나 붕괴로의 수렴없이 만성적으로 정상 이하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완전, 혹은 거의 완전한 고용이란 매우 드물고 단기적인 현상이란 증거가 있다.” 케인즈는 당시에 “일반 이론”으로 자리잡고 완전 고용 상태가 오히려 일시적이고 그와 반대인 “불완전 고용”이 보다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책 제목에서 부터 붙이며 당시의 주류 견해에 대해서 담대하게 도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실업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만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케인즈의 경제논리는 정치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그리고 케인즈의 아이디어는 자본주의의 최대의 위기였던 대공황에서 대량실업의 문제를 해결해내게 된다. 이러한 케인즈의 논리는 당시 지배하던 자유방임주의의 정통경제학 사고를 거부하는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같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케인즈의 빛나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새로운 사고를 열 수 있었던 문화지식적 배경은 케임브리지대학 동창생들로 모여진 “블름즈베리 그룹”이라는 지성인 모임으로 공고해진다.
모임멤버들은 철학 미술 음악 문학에 관해 활발하게 토론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위대한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버지니아 울프도 함께 활동한다. 그러나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이러한 인너서클 모임활동은 케인즈를 동성연애자등으로 공격하게 만드는 등 케인즈를 일견 부정적으로 이해하게끔 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2차대전을 통해서 영국 경제를 이끌어간 케인즈는 2차대전 종전이 된 바로 다음해인 1946년에 갑자기 운명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가 죽고난후 20여년이 흐른 뒤 케인즈의 경제학은 전세계에 걸쳐 정통경제학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미국의 가장 유명한 시사주간지 “타임”은 1965년 커버스토리에서 “이제 우리 모두는 케인지언이다”라는 미국대통령의 말을 제목으로서 삼으면서 그의 경제학적 위치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70년대까지는 케인즈라는 이름만으로 경제학의 토론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물가상승은 크게 일어난 스태그플레이션현상이 닥친 어지러운 60-70년대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케인즈 경제학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결국 케인즈경제학은 주류경제학자리를 밀톤 프리드만을 대표로 하는 통화주의자에게 내어주게된다.
198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을 해결해내며 약 30년간 세계적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케인즈의 전설적 위치는 잊혀진듯 하였다.
80년대 이후 전통 주류경제학은 민영화와 탈규제화를 부르짖는 시장만능주의가 주도해 나간다. 밀톤 프리드만은 “케인즈는 죽었다”고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정점에서 2008년 금융위기가 폭발하게 된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가장 최악의 경제불황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한 때 경제학의 우상화의 위치에서 끌어내려진 채 조롱하거나 무시당하면서 잊혀진듯 하였던 케인즈의 이름이 다시 크게 부활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친 이후 다시 “우리 모두는 케인즈주의자이다”이라는 말을 합창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위기가 저절로 해결되는 법은 없다. 2008년 이후 미국 영국 일본 호주 한국등 각국이 시장에 직접적으로 즉시 개입하여 엄청난 재정정책과 통화금융정책을 펼친 면에서 우리 모두는 케인즈주의자임을 증거한다.
현재 세계경제는 다시 고실업과 물가상승 경기침체, 외환위기, 기축통화흔들림등 현주류경제학적 사고로는 풀어낼 수 없는 경제문제들로 어지렵혀 있다.
케인즈는 1944년 브레튼 우즈 협정 체제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국제 경제 체제 마련에 큰 영향을 미친 실무 국제 경제 전문가이었다. 케인즈는 말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죽게 마련이다”. 결국 해가 지지 않는 영국 제국은 무너졌고, 중국 경제와 인도경제의 부상으로 “팍스 아메리카”를 구가한 미국의 수퍼경제대국 위치는 지고 있는 지금의 세계 경제 현실이다.
지금 세계경제는 새로운 무역마찰과 외환 금융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급격하게 새로운 통화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경제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금융경제 현실에 직면해 있다. 바로 케인즈가 말한 바대로 새로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타개책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케인즈는 말했다, “경제학자와 정치철학가들의 사상은, 그들이 옮고 그르던간에, 사람들이 흔히들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사실, 세상은 그외의 다른 것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다. 누구의 지적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다고 믿는 실용주의자들도 대개는 이미 죽은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일 뿐이다.”
새로운 세계 경제 현실과 미래의 방향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케인즈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절박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경제학은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외과적 수술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음울한 학문”이라고 도 말할 수 있다. 외과의사같은 엄격한 현실적 기술과 강단을 필요로 한다. 이론과 실제를 다루는 사람의 눈은 거시와 미시적 혜안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의 담대한 해결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인류의 무궁한 발전과 행복을 위한 중단없는 전진을 위해서.
당대의 정통파에 대해서 도전한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 뉴튼, 아인슈타인, 다원 들과 같은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각으로 도전했던 그들은 이미 죽은 과거의 사람들이 되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의 사고가 현재의 시각에서도 모두 적절하는지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우리는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지성인의 업적을 통해서 해결해내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내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위대한 선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뉴튼의 이말처럼, 위대한 현인들은 모두 자기들보다 앞서 간 위대한 인물들의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탄생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위대한 선각자들의 사상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케인즈 전기를 내고 케인즈의 생애와 그의 경제학적 사상과 업적에 관하여 가장 권위자로 알려진 영국 워익대학의 스키델스키의 “케인즈” 전기를 기본으로 삼는다. 케인즈의 생각을 올바르게 받아들여 어려운 경제현실을 이겨내는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경제이론은 현실 문제를 해결할 때 의미가 있다. 지식은 직접 자신의 삶에 연결되어야한다. 다이어트에 관해서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다이어트를 실천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관한 지식은 국가와 자신의 삶에서 직접적으로 적용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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