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사·철+북 리딩/책 읽기의 즐거움

톨스토이의 메시지

by 추홍희블로그 2010. 11. 21.

http://www.cyberspacei.com/jesusi/authors/crosby/tolstoy/tolstoy03.html

Tolstoy and His Message

톨스토이와 그의 메시지


By Ernest Howard Crosby

 

 

   

Chapter 3

제 3 장

Tolstoy's Answer to the Riddle of Life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

 

 

 

It is time now that we should form some idea of Tolstoy's opinions as a whole, and in order to appreciate their organic oneness we must try first to obtain his central point of view. This is best given, it seems to me, in his little treatise On Life. I remember well my first acquaintance with this book. I was living in Alexandria, in Egypt, at the time, and I chanced to pick up a French copy of it (De la Vie, translated by Countess Tolstoy) at a bookseller's in that city. I knew little of Tolstoy then. I had, however, read Anna Karenina years before, and been duly impressed by it, and afterwards I had read a collection of his practical essays on vicious habits, which had seemed to me rather narrow and ascetic, but which nevertheless had had the effect of making me stop smoking for three or four days -- no mean achievement at that time even for a Tolstoy. These recollections induced me to buy the volume On Life, and I took it home with me and read it through almost at one sitting on a Sunday. I cannot do better perhaps than to give a resumé of his argument in this book.

이제 우리는 톨스토이의 의견 전반에 대한 어떤 사상을 형성해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유기적 통일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그의 중심적 관점을 얻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그의 소 논문인 삶에 관하여 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이 책과의 첫 번째 대면을 잘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프랑스어 사본(De la Vie)을 그 도시에 있는 한 서점에서 우연히 사 보았다. 나는 그 당시 톨스토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나는, 하지만, 몇 년 전에 안나 카레니나 를  읽었었고 당연히 그것에 감명을 받았었으며, 그 후에 나는 악습들에 대한 그의 실용적 수필집들을 읽었으며, 그것들은 나에게는 약간 엄격한 금욕주의처럼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가 삼 사일 동안이라도 금연하는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 그 당시에는 심지어 톨스토이라도 사소한 성취가 아닐 것이다. 이런 기억들이 내가 삶에 관하여 라는 책을 사도록 이끌었으고, 나는 그것을 집에 가져 갔으며 일요일 하루 동안 한 자리에 앉아서 그것을 통독하였다. 아마도 이 책에 들어 있는 그의 논거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Most men, he says, lead only an animal life, and among these there are always some who think themselves called upon to guide humanity. They undertake to teach the meaning of life without understanding it themselves. These teachers are divided into two classes. To the first, composed of scientific men, Tolstoy gives the name of "Scribes." These it is who declare that man's life is nothing but his existence between birth and death, and that it proceeds from mechanical forces -- that is, from forces which we style mechanical for the express purpose of distinguishing them from life. It is only in the infancy of a science, when it is as yet vague and indefinite, that it can thus pretend to account for all phenomena of life. Astronomy made the attempt when it was known as astrology; chemistry assumed the same role under the name of alchemy; and today the science of biology is passing through a similar phase. While occupied with one or more aspects of life, it claims to embrace the whole. The other class of false doctors he calls the "Pharisees." They are those who profess verbally the tenets of the founders of the religions in which they have been educated, but who do not comprehend their real meaning and consequently content themselves with insisting on forms and ceremonies.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는 말한다, 오로지 동물적인 삶을 영위하며, 이들 중에서도 언제나 자기 자신들을 인류를 이끌어 가도록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일부가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면서 삶의 의미를 가르칠 것을 떠맡는다. 이 교사들은 두 가지 계급들로 나누어 진다. 첫 번째에게는, 학자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톨스토이는 "율법학자"들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바로 이 사람들이, 사람의 삶은 오로지 출생과 사망 사이의 존재이다, 그것은 기계적인 힘들로부터  - 즉, 삶과 구별하기 위한 명시적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기계적이라고 명명하는 힘들로부터 - 나아간다, 하고 선언한다. 그것이 그렇게 삶의 모든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척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모호하고 부정확할 때이며, 오직 학문의 초기에 있음이다. 천문학은 그것이 점성술로 알려져 있을 때 그런 시도를 하였으며; 화학은 연금술이라는 이름 아래서 똑같은 역할을 맡았으며; 그리고 오늘날 생물학이라는 학문은 유사한 단계를 거치고 있다. 삶의 한 가지 이상의 현상들을 차지하면서도, 그것은 전체를 포용한다고 주장한다. 위선적 학자들의 다른 계급들을 그는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말로서는 그들이 교육받아온 종교의 창시자들의 교리들을 고백하지만, 그것들의 참된 의미 이해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형식들과 의례들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The war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 that is, of false science and false religion -- have so obscured the definitions of life laid down ages ago by the great thinkers of mankind, that the Scribes are quite ignorant that the dogmas of the Pharisees have any reasonable foundation at all; and, strange to say, the fact that the doctrines of the great masters of old have so impressed men by their sublimity that they have usually attributed to them a supernatural origin, is enough to make the Scribes reject them. Because the speculations of Aristotle, Bacon and Comte have appealed to only a small number of students -- because they have never been able to gain a hold on the masses and have thus avoided the exaggerations produced by superstition -- this clear mark of their insignificance is admitted as evidence of their truth. As for the teachings of the Brahmins, of Buddha, of Zoroaster, of Lao-Tse, of Confucius, of Isaiah, and also of Christ, they are taxed with superstition and error simply because they have completely transformed the lives of millions of men.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 다시 말하면, 거짓된 학문과 거짓된 종교의 - 전쟁들은 몇 세대 전에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에 의해 내려진 삶의 정의를 너무 흐려 놓아서, 율법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교의들이 전혀 아무런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며;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옛날의 위대한 대가들의 교리들이 그것들의 숭고함으로 사람들에게 너무나 인상을 주어서 그들은 흔히 그들에게 초자연적 근원으로 돌린다는 사실은 율법학자들이 그것들을 거부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그리고 콩트의 견해들이 오직 소수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 그들은 결코 대중들에게 입지를 얻을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미신에 의해 만들어진 과장들을 피해나갔기 때문에 - 이 같이 명백히 하찮은 증거가 그들의 진리로서 인정된다. 브라만, 부처, 조로아스터, 노자, 공자, 이사야,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에 대해서는, 단순히 그것들이 수백만의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변형시켰기 때문에 그것들에 미신과 오해로 짐을 지우고 있다.

Turning from the futile strife of Scribes and Pharisees, we should begin our researches with that which we alone know with certitude, and that is the "I" within us. Life is what I feel in myself, and this life science cannot define. Nay, it is my idea of life rather which determines what I am to consider as science, and I learn all outside of myself solely by the extension of my knowledge of my own mind and body. We know from within that man lives only for his own happiness, and his aspiration towards it and his pursuit of it constitute his life. At first he is conscious of the life in himself alone and hence he imagines that the good which he seeks must be his own individual good. His own life seems the real life, while he regards the life of others as a mere phantom. He soon finds out that other men take the same view of the world, and that the life in which he shares is composed of a vast number of individualities each bent on securing its own welfare, and consequently doing all it can to thwart and destroy the others. He sees that in such a struggle it is almost hopeless for him to contend for all mankind is against him. If, on the other hand, he succeeds by chance in carrying out his plans for happiness, he does not even then enjoy the prize as he anticipated. The older he grows, the rarer become the pleasures; ennui, satiety trouble and suffering go on increasing; and before him lie old age, infirmity and death. He will go down to the grave, but the world will continue to live.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무익한 투쟁들에서 떠나,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확신을 가지고 아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나"에 대해 탐구들을 시작해야만 한다. 삶은 나 자신의 안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삶을 학문은 정의할 수 없다. 아니, 내가 학문이라고 여김을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삶에 대한 나의 개념이며, 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오직 나 자신의 정신과 육체에 대한 지식의 확장에 의해 배운다. 우리는 내부로부터 사람은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며, 그것을 향한 갈망 그리고 그것의 추구가 그의 삶을 구성한다. 처음엔 그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삶을 의식하며 그러므로 그가 추구하는 유익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개인적 유익이어야 한다고 상상한다. 자기 자신의 삶은 마치 진정한 삶처럼 보이며, 반면에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을 단순히 환영으로 여긴다. 그는 곧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똑같은 시각을 가지며, 그곳에서 그가 공유하는 삶은 방대한 숫자의 개인들로 구성되며 각자는 그 자신의 행복을 확보함에,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파멸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에 열중한다. 그는 그러한 투쟁에서 그가 그에게 맞서는 모든 인류와 경쟁하는 것은 거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한편에, 만일 그가 우연히 행복을 위한 자신의 계획들을 실행함에 성공한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상하던 상급을 누리지 못한다. 그가 늙어 가면 갈수록, 즐거움은 더욱 희소해지며; 권태, 포만, 고민, 및 고통은 증가해 가고, 그 앞에는 노령, 허약 및 사망이 놓여 있게 된다. 그는 무덤으로 내려 갈 것이나 세상은 계속해서 살아 갈 것이다.

The real life, then, is the life outside him and his own life, which originally appeared to him the one thing of importance, is after all a deception. The good of the individual is an imposture, and if it could be obtained it would cease at death. The life of man as an individuality seeking his own good, in the midst of an infinite host of similar individualities engaged in bringing one another to naught and being themselves annihilated in the end, is an evil and an absurdity. It cannot be the true life.

그러면, 진정한 삶은 자기 바깥의 삶과 자시 자신의 삶이며, 그것은 원래 중요한 한 가지처럼 나타났으며, 결국 하나의 기만이다. 개인의 유익은 사기이며, 만일 그것이 성취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 앞에 멈출 것이다. 서로를 망하게 함과 궁극에는 전멸됨에 열중하는 유사한 개인들의 무한히 많은 무리 한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개인으로서 사람의 삶은 악이며 불합리한 것이다. 그것은 참된 삶일 수 없다.

Our quandary arises from looking upon our animal life as the real life. Our real life begins with the waking of our consciousness, at the moment when we perceive that life lived for self cannot produce happiness. We feel that there must be some other good. We make an effort to find it, but, failing, we fall back into our old ways. These are the first throes of the birth of the veritable human life. This new life only becomes manifest when the man once for all renounces the welfare of his animal individuality as his aim in life. By so doing he fulfils the law of reason, the law which we all are sensible of within us -- the same universal law which governs the nutrition and reproduction of beast and plant.

우리의 난처함은 우리의 동물적 삶을 참된 삶으로 여기고 있음에서 생겨난다.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삶은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에 우리의 참된 삶은 우리의 의식을 깨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틀림없이 다른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이라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실패함으로써, 우리의 옛날의 방식들로 후퇴한다. 이것들이 진정한 인간의 삶의 탄생의 첫 번째 진통이다. 이런 새로운 삶은 오로지 사람이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서 자신의 동물적 개인의 행복을 단호히 포기할 때에 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성의 법칙을 완수하는 것이며, 그 법은 -  짐승과 식물의 성장과 재생산을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보편적 법칙 -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있음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Our real life is our willing submission to this law, and not, as science would have us hold, the involuntary subjection of our bodies to the laws of organic existence. Self-renunciation is as natural to man as it is for birds to use their wings instead of their feet; it is not a meritorious or heroic act; it is simply the necessary condition precedent of genuine human life. This new human life exhibits itself in our animal existence just as animal life does in matter. Matter is the instrument of animal life, not an obstacle to it; and so our animal life is the instrument of our higher human life and should conform to its behests.

우리의 참된 삶은 이런 법칙에 대한 우리의 기꺼운 순응이며, 학문이 우리에게 주장하라 하는 것처럼, 유기적 존재의 법칙들에 대한 우리의 몸의 본능적 종속이 아니다. 자기 부정은 새들이 그들의 발 대신에 날개를 사용하듯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칭찬 받을 만한 또는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진정한 인간의 삶에 앞서는 필요 조건이다. 이처럼 새로운 인간의 삶은 동물적 삶이 물질에 구현되는 것처럼 우리의 동물적 존재 안에 구현된다. 물질은 동물적 삶의 도구이나 그것에 대한 장애는 아니다; 그처럼 우리의 동물적 삶도 우리의 더욱 숭고한 인간적 삶의 도구이며 그 요청에 따라야만 한다.

Life, then, is the activity of the animal individuality working in submission to the law of reason. Reason shows man that happiness cannot be obtained by a selfish life, and leaves only one outlet open for him, and that is Love. Love is the only legitimate manifestation of life. It is an activity which has for its object the good of others. When it makes its appearance, the meaningless strife of the animal life ceases.

삶은, 그렇다면, 이성의 법칙에 순응하여 작용하는 동물적 개인의 활동이다. 이성은 사람에게 행복은 이기적인 삶에 의해 얻어 질 수 없음을 보여 주며, 그에게 열려 있는 오직 한 가지의 출구를 남겨 두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삶의 유일한 합법적 표현이다. 그것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가지는 활동이다. 그것이 발현될 때에, 동물적 삶의 무의미한 투쟁은 멈춘다.

Real love is not the preference of certain persons whose presence gives one pleasure. This, which is ordinarily called love, is only a wild stock on which true love may be grafted, and true love does not become possible until man has given up the pursuit of his own welfare. Then at last all the juices of his life come to nourish the noble graft, while the trunk of the old tree, the animal individuality, pours into it its entire vigour. Love is the preference which we accord to other beings over ourselves. It is not a burst of passion, obscuring the reason, but on the contrary no other state of the soul is so rational and luminous, so calm and joyous; it is the natural condition of children and the wise.

진정한 사랑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어떤 사람들을 편애함이 아니다. 이것은, 보통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오로지 참된 사랑이 이식될 수도 있는 야생의 둥치일 뿐이며, 참된 사랑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행복의 추구를 포기할 때까지는 가능하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그의 삶의 모든 수액들이 고귀한 접눈에 양분을 주게 되고, 그러면서 늙은 나무의 몸통인, 동물적 개인은, 그것에 자신의 전체 활력을 부어 넣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과 다른 존재들을 일치시킴을 편애함이다. 그것은 이성을 흐리는 정열의 폭발이 아니라, 반대로 영혼의 다른 어떤 상태도 그처럼 이성적이지도 밝지도, 그토록 고요하지도 즐겁지도 못하다; 그것은 어린아이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의 자연적인 상태이다.

Active love is attainable only for him who does not place his happiness in his individual life, and who also gives free play to his feeling of good-will towards others. His well-being depends upon love as that of a plant on light. He does not ask what he should do, but he gives himself up to that love which is within his reach. He who loves in this way alone possesses life. Such self-renunciation lifts him from animal existence in time and space into the regions of life. The limitations of time and space are incompatible with the idea of real life. To attain to it man must trust himself to his wings.

적극적인 사랑은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두지 않는, 그리고 자신의 선의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유로이 구사하는 사람에게 성취된다. 그의 복지는 식물에 비치는 빛과 같은 사랑에 의존한다.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할지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에 닫든 그런 사랑에 자신을 맡긴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오직 삶을 소유한다. 그런 자기 부정은 그를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동물적 존재로부터 삶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은 진정한 삶의 개념과 양립되지 않는다.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자신의 날개들에 맡겨야 한다.

Man's body changes; his states of consciousness are successive and differ from each other; what then is the "I"? Any child can answer when he says, "I like this; I don't like that." The "I" is that which likes -- which loves. It is the exclusive relationship of a man's being with the world, that relation which he brings with him from beyond time and space. It is said that in his extreme old age, St. John the Apostle had the habit of repeating continually the words, "Brethren, love one another." His animal life was nearly gone, absorbed in a new being for which the flesh was already too narrow. For the man who measures his life by the growth of his relation of love with the world, the disappearance at death of the limitations of time and space is only the mark of a higher degree of light.

사람의 육신은 변한다; 그의 의식의 상태들은 연속적이며 서로가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어느 아이라도 그가, "나는 이것이 좋아; 나는 저것이 싫어"라고 하며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그가 좋아 하는 - 사랑하는 -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와 세상과의 배타적 관계이며, 그는 그 관계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으로부터 자신과 함께 가져 가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지극한 만년에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는 말들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버릇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의 동물적인 삶은 거의 사라졌으며, 육신이 이미 너무나 협소해진 새로운 존재에 흡수된 것이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사랑과 세상과의 관계의 성장에 의해서 측량하는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인 죽음 앞에 사라짐은 오직 더욱 숭고한 빛의 세기의 증거일 뿐이다.

My brother, who is dead, acts upon me now more strongly than he did in life; he even penetrates my being and lifts me up towards him. How can I say that he is dead. Men who have renounced their individual happiness never doubt their immortality. Christ knew that He would continue to live after His death because He had already entered into the true life which cannot cease. He lived even then in the rays of that other centre of life toward which He was advancing, and He saw them reflected on those who stood around Him. And this every man who renounces his own good beholds; he passes in this life into a new relation with the world for which there is no death; on one side he sees the new light, on the other he witnesses its actions on his fellows after being refracted through himself; and this experience gives him an immovable faith in the stability, immortality, and eternal growth of life. Faith in immortality cannot be received from another; you cannot convince yourself of it by argument. To have this faith you must have immortality; you must have established with the world in the present life the new relation of life, which the world is no longer wide enough to contain.

나의 형제는, 죽었지만, 이제 그가 살아서 했던 것보다 더 강하게 영향을 준다; 그는 심지어 나의 존재 안으로 스며들어서 그들 향해 나를 끌어 올린다. 어떻게 나는 그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한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불멸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 뒤에도 계속 살아 갈 것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멈추지 않는 참된 삶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고 나서 심지어 그가 나아가고 있는 곳을 향한 다른 삶의 중심에 있는 빛 안에 살았으며, 그는 광선들이 자신의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반사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는 이런 제각기 사람들은 지켜본다; 그는 이런 삶에서 아무런 죽음이 없는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 간다; 한편으로 그는 새로운 빛을 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통하여 굴절된 후 그의 동료들에게 빛의 행위들을 증거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그에게 삶의 안정, 불멸, 그리고 외적인 성장에 대한 불변의 신앙을 준다; 당신들은 그것을 논리로서 납득할 수는 없다. 이런 신앙을 가지기 위해 당신은 반드시 불멸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세상과 함께 현재의 삶에서 삶의 새로운 관계를 확립했어야만 하며, 그러면 세상은 더 이상 그것을 담기에 충분히 넓지가 않은 것이다.

 

 

* * * * *

* * * * *

 

 

The above abstract gives a most inadequate idea of Count Tolstoy's philosophy of life, but it is sufficient to bring out the salient points, to wit, his idea of the failure of man's ordinary life, of the necessity, in the course of nature, of loving self-renunciation, and of the resulting growth in love, and the realization of immortality on earth.

위의 발췌문은 톨스토이의 백작의 철학적 삶에 대한 가장 불충분한 개념을 제시하지만, 두드러진 요점들을,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평상적인 삶의 실패, 당연히 그에 대한 필요성, 자기 부정을 사랑함, 그리고 그에 따른 사랑 안에서의 성장, 및 지상에서의 불멸성의 실현에 대한 그의 사상을 꺼내기에 충분하다.

"But this is sheer mysticism," is doubtless the first objection. Yes, it assuredly is, but that is no argument against it. Mysticism is nothing but the recognition of the invisible world as a palpable fact, and not as an abstract theory. All religions had their origin in mysticism, and in so far as they have wandered away from it just so far have they fallen into formalism. Mysticism is really religion at first hand, such as the faith of General Gordon, who used to say that he believed in the "real presence," meaning, as he explained, the actual manifestation of God in his own soul. It is not becoming for those at least who profess to put their confidence in Him who sai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to quarrel with the man who finds it there. In short, all Christians should be more or less mystics.

"그러나 이것은 그야 말로 신비주의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 두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 반대이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그에 아무런 반증도 아니다. 신비주의는, 추상적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질 수 있는 사실로서 인정함이다. 모든 종교는 그들의 기원을 신비주의에 두고 있으며,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버린 한 그들은 그만큼 멀리 형식주의로 빠져든 것이다. 신비주의는, 고든 장군의 신앙처럼, 처음에는 사실 종교이며, 그는 "현신"을, 그가 설명하는 바로는, 자기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실제적 나타남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에 그것이 있음을 발견한 사람과 다툰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If, then, admitting that the treatise On Life is in fact mystical, we compare it with the works of those to whom the name of mystic is usually given, we are at once struck by the remarkable sanity of the Russian author. The practice of exploring the unseen world is often dangerous for those who attempt it, but Count Tolstoy has escaped the vagaries of Boehmen, the visions of Swedenborg, and the hysterical excesses of St. Theresa. And the reason of his freedom from these extravagances is not far to seek. He opens a door into the vestibule, but it is not the door of mere contemplation, of quietism, of retirement into self. There is something morbid in the very idea of making deliberate excursions into another sphere. Here lies the mistake of the Christian ascetics, of the Persian Sufis, of the Hindoo Buddhists, and of the Theosophists of today. We may well suspect any form of religion which withdraws a man's interests and labours from this world; its corner-stone must be selfishness in spite of any disguises.

그렇다면, 삶에 관하여 라는 논문이 신비주의적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흔히 신비주의라는 이름이 주어지는 사람들의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당장 러시아 작가의 현저한 온전함에 부딪힐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탐구하는 행위는 종종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도 위험하다, 하지만 톨스토이 백작은 보이멘의 변덕들, 스베덴보리의 환각들, 및 성 테레사의 광적인 과잉을 탈피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도함 들로부터 그가 자유로운 이유는 멀리서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문간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 그것은 단순한 명상, 정적주의, 자아로의 침잠의 문이 아니다. 다른 영역 안으로의 의도적 탈선들을 행함의 사상 자체에는 어떤 병적인 것이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자들, 페르시아의 수피들, 인도의 불교인들, 그리고 오늘날의 신지주의자들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사람의 이익들 및 노동들을 빼앗아 가는 어떤 형태의 종교라도 의심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초석은 어떻게 위장하더라도 틀림없이 이기주의인 것이다.

Tolstoy's door to the mysteries, however, is simply active love for mankind. According to him, preoccupation in working for the happiness of others has a reflex action in the depth of our being which makes us feel eternal life. It is this intensely practical side of his mysticism which preserves his equilibrium. He simply says to us: "Renounce your selfish ends; love all men -- all creatures -- and devote your life to them. You will then be conscious of possessing eternal life, and for you there will be no death."

신비로 향하는 톨스토이의 문은, 그러나, 단순히 인류를 위한 적극적인 사랑이다. 그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동하는 것에 열중함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느끼도록 만드는 우리의 존재의 깊은 곳에 즉각적인 반응을 가진다. 그의 균형을 보존해 주는 것은 바로 이런 강력히 실용적인 측면이다. 그는 단순히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의 이기적 목적들을 포기하라; 모든 사람들을 - 모든 피조물 들을 - 그리고 당신의 삶을 그들에게 헌신하라. 그러면 당신은 영원한 삶을 소유함을 의식할 것이며, 당신에게는 아무런 죽음도 없을 것이다." 

So much for Count Tolstoy's philosophy of life. For some reason it took hold of me with a strange power. I was still a church member and went regularly to church, but I had no genuine faith, and was not sure of anything intangible, and now the simple teaching that it is man's higher nature to love -- that if he would only let himself love and renounce his selfish aims, he would enter a wider sphere, find his immortal soul, and in fact be born again -- all this struck me as a great new discovery. I leaned back in my study chair; I tried to love, and -- could I believe my own sensations? -- I did actually feel that I had risen to a loftier plane, and that there was something immortal within me. I remember going out into the garden and giving a small coin -- a half piastre -- to a little Soudanese boy who was playing there, and it seemed to me that no act of mine had ever given me so much pleasure, and for weeks after the novelty of the experience of loving was a continual delight. Nor was the change merely temporary, for since that day the world has never looked to me quite as it used to.

톨스토이의 삶에 대한 철학은 그만 두기로 하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것은 이상한 힘으로 나를 사로 잡았다. 나는 아직 교회의 구성원이었으며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갔으나, 진정한 신앙은 없었고, 실체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이제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더욱 숭고한 본성이라는 단순한 가르침 - 만일 스스로 사랑하게 만들며 자신의 이기적 목적들을 포기하도록 한다면, 그는 더욱 넓은 영역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찾으며, 사실상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가르침 -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위대하고 새로운 발견으로 와 닿았다. 나는 내 서재의 의자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 나는 사랑하려 애썼다, 그리고  - 나는 나 자신의 느낌들을 믿을 수 있는가? - 나는 실제로 내가 고귀한 차원으로 올라 갔으며, 나 안에 어떤 불멸의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정원으로 나가서 조그만 동전 - 반 푼 - 을 그곳에서 놀고 있는 조그만 수단 아이에게 주었는데, 나의 어떤 행위도 그처럼 많은 즐거움을 준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으며, 사랑의 경험의 신기함 뒤 몇 주일 동인 기쁨의 연속이었다. 그 변화는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로 세상이 전혀 과거에 보이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It is in the light of Tolstoy's teaching in this book On Life, that we must approach his ethical works, My Confession, What to Do,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and the rest, for they all have their source in the religious conceptions of the former book.

오직 이 책 삶에 대하여 안에 있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을 전제함으로써, 우리는 톨스토이의 윤리적 작품들, 나의 고백,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및 나머지들을 접근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전자의 책의 종교적 개념에서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n the same way in the Gospels themselves, from which Tolstoy derives at once his principles and his practice, we find different phases of thought in the different books. The Evangelists draw truth from the same well, but some let down their buckets deeper than others. St. Luke is a practical hand-book for social reformers, and none more radical has been published since his day, but he scarcely reaches the source of the spring. He condemns riches as stoutly as Tolstoy; he, too, puts poverty upon a pinnacle, but from his Gospel alone we should hardly guess the reason why. It was left for St. John to lay open the divine source of self-sacrifice and to make known once for all the infinite power of love restoring men to unity with God and with each other, and he does it almost without reference to the practical results in life which the inspiration of that power must accomplish. St. Luke's Gospel is the necessary complement of St. John's.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서들 자체들에서도, 톨스토이가 그의 원리들 뿐만 아니라 그의 실천마저 그것들에서 도출하고 있는 바, 우리는 상이한 책들에서 상이한 사상 단계들을 발견한다. 복음주의자들은 똑같은 우물에서 진리를 끌어 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그들의 바가지를 다른 사람들보다 깊이 내린다. 누가는 사회 개혁자들을 위해 실용적인 지침서이며, 그의 시대 이후 더 이상 급진적인 것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그는 샘의 원천에 거의 도달하지 않는다. 그는 부유한 자들을 톨스토이처럼 세차게 비난한다; 그 역시 빈곤을 정상에 두지만, 우리는 그의 복음서 만으로는 그 이유를 거의 짐작할 수 없다. 자기 희생의 신성한 근원을 여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하나님 및 서로에게로 다시 연합하는 무한한 모든 사랑의 힘을 단호히 알리는 것은 요한에게 남겨졌으며, 그러한 힘에서 오는 영감이 반드시 성취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실용적 결과를 거의 언급함이 없이 행한다. 누가 복음은 요한 복음에 필요한 보충설명이다. 

Some one has said that as St. Peter first led the Apostolic Church, and then St. Paul, and finally St. John, so in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Era, St. Peter, represented by the Catholic Church, was the first leader, and after him St. Paul, the apostle of Protestantism and justification by faith, and that now again it is the day of St. John, the apostle of Love. There is much truth in this parallel. It is the spirit of St. John, which is, if I mistake not, the Age-Spirit of our times, the spirit with which Tolstoy is so impregnated. Does then this philosophy of St. John, which the Russian has adopted, give logical coherence to the seeming extravagances of his practical teaching, just as the Fourth Gospel supplies the motive for the startling injunctions of the Third?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사도 교회를 이끌었으며, 그 다음은 바울,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이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교 시대의 역사에서, 베드로는, 카톨릭 교회의 설명에 따르면, 최초의 지도자이고, 그의 뒤는 바울, 즉 개신교 및 신앙에 의한 정의 구현 사제라고 말했으며, 그것은 이제 다시 요한, 즉 사랑의 사도의 시대라고 말했다. 이런 평행선 상에는 많은 진실이 존재한다.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다면, 우리 시대의 시대 정신이며, 톨스토이에게 그토록 스며든 정신은, 요한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요한의 철학은, 러시아인이 채택한 것으로, 제 4 복음서가 제 3 복음서의 놀라운 명령들에 대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과 똑같이, 그의 실천적 가르침의 외관상 화려함들에 논리적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