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피오의 슬픔 - 빅토 위고
암담한 들은 아니었다, 음울한 하늘은 아니었다. 가을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보고 싶었다. 그는 찾았다, 마당을 또 외딴 집을. 그는 듣는다, 숲에서 그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이고 길은 험해져 울퉁불퉁 돌이 비어졌다. 지난 날에는 해일 수 없는 세월을 겪은 길가의 바위 숲은 이쪽은 줄어들고 저쪽으론 퍼졌다. 우리 둘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의 때는 지나갔는가? 우리 둘이 머물던 곳에는 다른 사람이 머물리라.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모두 다 볼 수 없기에 그렇다! 다른 사람들, 흠없는 남녀가 찾아오리라. 쓸쓸한 숲에 떨어지고 있는 나뭇잎은 그는 오래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들판에 대 자연이 아아! 그리워라, 감미로운 사랑의 모험. "오오, 이 서글픔이여! 어지러운 넋이여, 나는 알려 했다, 모든 것을 바꾸는 데는 실로 짧은 세월로 족하는도다! 우리 둘이 묵던 나뭇잎 방은 숲이 되었다! 우리의 들과 오솔길과 은신처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리라. 그래! 여기서의 우리 사랑은 허무였더란 말인가! 오오! 말하라 골짜기여, 맑은 시내여, 익은 포도여, 우리는 너희를 친절하고 주의 깊고 엄격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대답하라 해맑은 골짜기여, 대답하라 쓸쓸한 땅이여, 그대는 계속해서 무감동하게 우리를 지켜 보고 그대의 산이나 숲이 즉시 분별해 주는 망령의 모습으로 그대는 슬픔과 탄식마저 없이도 볼 수 있는가? 눈뜬 사물 하나 없는 어두움 속에 사랑하는 남녀가 "너희 살아 있는 자여, 죽은 자를 생각하라!" 신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목장과 샘과 이윽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가고, 신은 우리의 불꽃을 불어 끄신다. 그래라! 우리를 잊으라, 집이여 정원이여 나무 그늘이여! 너희는 우리 사랑의 반영 그것이기 때문이다. 정열은 나이와 더불어 사라지고, 그 어떤 것은 그러나 사랑이여, 그 무엇도 매혹스러운 너만은 지울 수 없다! 안개 자욱한 속에서도 빛나는 너, 타오르는 햇불, 계속 불타는 등불 ……. 너는 기쁨으로 그리고 특히 눈물로 우리를 사로 잡는다. 세월의 무게에 고개가 힘없이 수그러지는 날, 우리 흔히 꿈꾸듯 우리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 현실의 대상, 활짝 웃는 세계에서 멀고도 먼, 그리고 거기 어떤 빛도 비치지 않는 칠흑 속
이해와 감상 올랭피오는 올림포스산의 뜻으로, 세상 평판에 대해서 초연한 자세로 불가시의 세계를 내려다 보는 위고의 사상과 예술상의 상징적 분신이다. 이 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자연은 파리 남쪽 20킬로미터 지점인 비에브로골짜기. 애인인 줄리에트도루에와 함께 이 마을의 농가를 세내어 살면서, 부근의 숲과 언덕에서 매일 뜨거운 정열을 불태웠다. 올랭피오라는 분신이 탄생한 것은 그 때 그 자연 속에서이다. 이 시는 단순한 낭만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시 가운데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라마르틴의 '호수'와 뮈세의 '회상'과 더불어 낭만과 대시인의 3대 애정시로 꼽히고 있다. 참고 자료 위고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소설가 ·극작가. 브장송 출생.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출신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코르시카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지로 전전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부모의 화합이 원만하지 못하여 1812년부터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파리에 정주하였고, 그는 1814년부터 기숙학교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그는 문학에 흥미를 갖고 제2의 F.R.샤토브리앙을 꿈꾸었다. 181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콩쿠르에서, 이어 1819년 투르즈의 아카데미 콩쿠르에서 그의 시(詩)가 입상하였다. 그 해에 형 아베르와 함께 낭만주의 운동에 공헌한 잡지 《Conservateur Litt暴raire》를 창간하였다. 1822년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아델 푸세와 결혼하였고, 같은 해 《오드, 기타 Odes et po暴sies diverses》를 냈는데, 이 작품으로 루이 18세와 가까워져 연금을 받게 되었으며, 이 무렵의 위고는 왕당파이자 가톨릭적이었다. 이 밖에도 시는 《오드와 발라드 Odes et ballades》(1826) 《동방시집 Les Orientales》(1829),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 Han d’Islande》(1823), 희곡 《크롬웰 Cromwell》(1827) 등을 발표하였다. 처음에 노디에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낭만주의자들이, 이 무렵부터 그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 들어서 이른바 ‘세나클(클럽)’을 이루어, 사실상 낭만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한 의미로 《크롬웰》의 서문은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이라 할 만큼, 그는 고전주의를 비판하여, ‘삼일치(三一致)의 법칙’ 중에서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너무나 구차한 구속이라고 주장하였다. 1830년에는 희곡 《에르나니 Hernani》의 상연을 계기로 고전주의 지지파와 격렬한 투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1833년 애처(愛妻) 아델과 친구 상트 부브와의 추문으로 크게 상심하던 중 여배우 J.들루에와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날 무렵부터 위고는 인도주의와 자유주의로 기울어, 시(詩) 《가을의 나뭇잎 Les Feuilles d’automne》(1831) 《황혼의 노래 Les Chants du cr暴puscule》(1835) 《마음의 소리 Les Voix int暴rieures》(1837) 《빛과 그림자 Les Rayons et les ombres》(1840)와 희곡 《마리옹 드 로름 Marion de Lorme》(1831) 《왕은 즐긴다 Le Roi s’amuse》(1832) 《뤼 블라 Ruy Blas》(1838) 《뷔르그라브 Les Burgraves》(1843)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소설에는 불후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1831)가 있다. 1843년 딸 레오포르딘이 남편과 더불어 센강에서 익사하자, 비탄에 빠져 그로부터 약 10년간 문필을 중단하고 정치에 관심을 쏟았다. 1848년의 2월혁명 이후는 공화주의에 기울어, 1851년에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제정(帝政)을 수립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 결국 망명의 길에 올라, 벨기에를 거쳐 영국해협의 저지섬과 간디섬에서의 19년간에 걸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하는 《징벌시집(懲罰詩集) Les Ch泂timents》(1853), 딸의 추억과 철학사상을 노래한 《정관시집(靜觀詩集) Les Contemplations》(1856), 인류의 진보를 노래한 서사 《여러 세기의 전설 La L暴gende des si憙cles》(1859),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 Les Mis暴rables》(1862) 《바다의 노동자 Les Travailleurs de la mer》(1866) 《웃는 사나이 L’Homme qui rit》(1869) 등을 발표하였다. 그에게는 이 망명기간이 인생에서 가장 충실한 시기였으며, 파리에 돌아온 이후에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이 이 시기에 집필된 것이라고 한다. 1885년 그가 죽자 국민적인 대시인으로 추앙되어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팡테옹에 묻혔다. 위고의 생활과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웅대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이다. 다른 낭만파 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감상적인 요소는 그의 작품에서는 부수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생애의 반은 인류의 무한한 진보, 이상주의 사회건설 등의 낙관적인 신념으로 일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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