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뒷면 20행
命凝眞貴道賤身欽味釋 葬以積薪 滅粉骨鯨津嗣王允恭因心孝友冈」
국편위는 20행을 다음과 번역했다: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이러한 국편위의 잘못된 번역 해석에 대해서 나는 아래에서 자세한 설명으로 국편위 해석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命凝眞
凝眞
액체나 기체 같은 것이 엉기고, 엉겨 붙어 고체(固體)로 되다의 뜻 응고(凝固)되다, 응결(凝結)되다라는 뜻의 낱말이다. 이 엉겨 붙다의 뜻을 가진 凝(응)자는 명령을 엄정 바르게 하다-使教令嚴整는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역경 화풍정에 “象曰 木上有火 鼎 君子以正位凝命”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왕필의 주는 “凝者 嚴整之貌也 … 凝命者 以成教命之嚴也”으로 풀이하고, 凝(응)을 이루다-成성의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象曰 木上有火 鼎 君子以正位凝命- 나무 위에 불이 있는 것이 정鼎-솥의 모양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자리를 바르게 하여 천명을 완수한다. 布嚴凝之命(포엄응지명), 종교를 통해 본다면, 하나님의 가르침 그것을 엄정하고 바르게 했다는 뜻이니, 카톨릭에서의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에 가깝게 그런 의미로 새겨볼 수 있다.
凝자의 의미 嚴寒(엄한)의 뜻으로 嚴凝(엄응)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嚴命(엄명)이 있는데, 엄명은 아버지의 명령-父親 命令이라는 뜻이다. 엄명이 여기의 결자 부분을 메꿀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분골쇄신한 아버지 김춘추 태종 무열왕이 미처 다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해내라는 것 그것이 엄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여기에서 유언을 받들다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읽힌다. 따라서 “□命凝眞”의 결자 부분의 글자를 “嚴命凝眞”(엄명응진)으로 메꿀 수 있는데, 이 구절의 뜻은 ‘아버지의 엄한 분부-엄명-유훈을 진실로 이루었도다’.
국편위는 “ 命凝眞”을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주어 동사 목적어 부사 쓰임새의 문법능 무시한 잘못된 번역에 해당한다.
우리들의 동양화 미술 이론을 논할 때 진경 산수화라는 장르를 흔히 꺼내는데 이 때의 진경은 한자로 眞境진경 즉 도교 절애 있는 곳, 선경(仙境)을 의미하는 말이다. 채근담에서 “風括浪靜中 見人生之眞境” 표현이 나타나는데, 여기의 진경은 삶의 진정한 경계를 의미한다. 유신의 보허사에 등장하는 “凝眞天地表 絕想寂寥前” 구절에서의 凝眞(응진)경이 큰 산의 벼랑 끝 절벽에 위치한 암자 그 앞에 펼쳐지는 무애의 절경을 의미한다.
貴道賤身
貴道賤身(귀도천신)은 문무왕릉 비문에 나타나는 표현이다. 貴道-도를 중시해서 賤身-몸까지를 바쳤다고 말했는데, 도道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귀도천신과 도의 개념정의에 대해 잠깐 소개하기로 한다.
貴(귀)는 귀하게 여기다 즉 중시(重視)하다의 뜻이고, 道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도교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도(道) 도리(道理)를 말하니, 重道(중도), 敬道(경도)와 같은 말이다. 貴道(귀도)는 중도, 경도의 의미 따라서 그가 배운 바를 尊重(존중)해서 그대로 실천했다는 뜻이 된다. 천신(賤身)은 자기 몸을 지칭하는 겸양의 표현이다. 따라서 천신은 獻身(헌신)하다 희생하다는 뜻이 포함된다. 따라서 貴道賤身(귀도천신)은 도리를 중시하고-重道, 그 가르침을 높게 받들고자-경도敬道, 자기 몸은 천히 여기셨구나!-賤身 이와 같이 해석된다.
좀더 부연하면, 사람의 목숨에도 귀천이 있는가? 命有貴賤(명유귀천). 만약 있다면, 귀하고 천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걸까? 貴賤相懸( 귀천상현). 그래서인가, 선왕인 부모님의 엄명을 진정으로 실천하고, 도리를 다하는 것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몸까지 기꺼이 던져 바쳤던 말인가? 사기 진세가에 나오는 “天子無戲言 言則史書之”(천자무희언언즉사서지)을 상기해 보자. 성인은 말이 곧 법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것이고, 말이 곧 생명이니 자기가 한 말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것, 언행일치의 본보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여기서 도(道)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그런 당연한 ‘도리(道理)’라는 그 정도의 의미로만 해석될까? 道(도)는 일반적인 의미로써 학술이나 종교적 사상 체계를 말하는데, 이런 뜻으로 우리들이 흔히 쓰는 도학(道學), 수도(修道)한다는 말이 있다. 철학 사상가로써의 도가(道家)라는 표현을 하는데 여기에는 노자, 장자가 대표적인 인물이고, 종교적으로는 도교(道教)라고 지칭한다. 유교에서 공자를 시조로 모시고, 도교는 노자를 시조로 모신다. 도교는 노자의 철학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서 보여지는 태세신앙은 도교 신앙에 속한다. 문무왕릉 비문의 귀도천신 이 구절 또한 도교와의 종교적 연관성 없이는 설명되기 힘들다. 장례식은 종교 문화와 가장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데, 종교는 인간의 사후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貴道(귀도)는 도교의 종교철학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당태종 이세민의 유조에 들어 있는 구절인 道存物往(도존물왕)에서의 道(도)의 의미와 같은 맥락의 뜻을 갖고 있다.
道儒佛 도유불
625년 당나라 건국 시조 고조는 유불도 이 3교간에 우선 순위를 명확히 하고 도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고조는 당나라를 건국하면서 “三教之首 道居首”(삼교지수도거수)-도교를 으뜸 순서로 올려 놓고, 노자를 시조로 모시고 숭상하며 노자 사당을 건립하였다. “道先 儒次 佛末” 즉 ‘도교 제일, 유교 차선, 불교 말석’으로 말하며 도유불 종교간 지위와 순서를 명확하게 정한 당고조 이연의 종교 정책은, 도교파의 지원으로 현무지변에서 승리하고 후계자로 올라 선 당태종의 국정철학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天子下詔曰 老教孔教 此土元基 釋教後興 宜崇客禮 今可 老先 次孔 末後釋宗 이 구절의 조문과 같이, “老先 次孔 末釋”(노선 차공 말석)으로 정하며 도유불의 종교적 지위 순서를 명확히 정한 당고조의 하조문 내용은 당 서명사 승 도의가 편찬한 “集古今佛道論衡”(집고금불도논형) 高祖幸國學當集三教問僧道是佛師事에 실려 있다. 주성명의 책(周誠明, “唐人生命思想之多元探討”, 元華文創股份有限公司, 2017, 399쪽)에서는 이 이외의 다른 소스까지 소개하고 있음을 참조하라.
신라는 불교가 상대적으로 후대에 전해졌는데 그 이유는 도교의 영향이 워낙 크게 유지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하는 원효의 부석사 점거 일화 등으로 판단한다면 당시 종교간의 논쟁이 심각하게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이들 사서는 먼 후대인 12세기와 13세기 말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기사를 액면대로 따를 수 없는 사정이 존재한다. 또 신채호가 “조선일천년래제일대사건”로 규정한 유불선간의 종교 이념 전쟁 또한 12세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참고하라.
노자도덕경 제1장에 나타난 道(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치종교철학적 개념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문무왕릉 비문에서 貴道(귀도)-도를 중시해서 賤身(천신)-몸까지를 바쳤다고 말했는데, 도(道)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도(道)란, 요한복음 14장이 증거하듯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는 곧 예수 그 자신을 가르킨다. 영어 Way, Truth, Life, 이러한 말에 도가 해당한다. 그런데 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답시고 개념을 지어 정의를 내리는 순간 도에 대한 개념정의는 꼬이고 얽혀버릴지 모른다. 도라고 말하면 우리들이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 배운 “도덕”이라는 교과서가 상기되고, 그리하여 “바른생활” 같은 아이들 교과서에 아무런 형체도 없고 실체도 없는 개념 정의를 시도하고자 할 위험이 크다. 노자가 말한 도, 도교의 도는,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도리라거나 또는 “도덕” 책이나 “바른 생활” 교과서로는 설명이 불가한 개념이다. 어떻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도덕 책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우주의 빅뱅이론이나 DNA 구조론을 어찌 바른생활 책으로 설명할 것이며, 사람들의 생활에서 직접 나타나야 알 수 있는 그 사람다움의 도리를 어찌 바른생활 책이나 대학 윤리학 교과서에서의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편 도가 무엇인지를 꼭 끄집어내서 말하기는 힘들더라도 도가 무엇인지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도가 무엇인지 그 개념을 설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노자 도덕경 제1장은 선언하고 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노자도덕경을 번역하고 해석하고 설명했다.
도덕경 제1장의 구절은 보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 한문 구절을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잘난 듯 번역해 왔다. 하지만 그것들에 아직까지 빈틈이 발견된다.
도가 무엇인지 말로 설명이 가능하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무엇이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이름 지어 즉 개념 정의하여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념 정의가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정해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말이 나오기 이전에 세상 우주만물이 생겨났다. 하지만 말이 있고부터 우주만물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언어학 이론이 있겠지만 진리 인식에 있어서 말이 모태일 지 모른다. 따라서 진리를 개념 정의하고자 하는 욕심을 갖지 않으면 심오한 진리를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지만 진리에 대해서 무엇이다라고 단언을 내리는 순간 즉 그 무엇이다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실타래가 얼키고 설켜 버리고 꼬이고 만다는 것을 느낄 지 모른다. 이 심오한 진리-妙묘, 엉켜 붙어버린 실타래-徼요, 이 둘은 사실 서로 같은 점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나 방법론이 서로 다른 것에 불과하다. 이 둘이 심오하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 우주천체만물의 진리가 심오하고 깊은 것처럼 그것을 찾아낸 진리의 설명 또한 심오하고 깊은 내용이지 않는가. 이런 진리탐구의 방법(선험론과 후술론)이 바로 심오한 진리들을 찾아내는 진리발견의 입문인 것이다.
우주만물에 대한 진리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고, 다만 인간들이 그것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니 이 둘은 원래 같은 것이 아닌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상대성 원리는 우주만물 가운데 존재했던 것이고 또 그 양자물리학 공식 E=MC*2는 아인슈타인의 발견 이전이나 발견 이후에나 똑같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라고 이름 붙이고 그것을 발표하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다같이 심오한 진리이고 아인슈타인의 정리 공식 그것 또한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지 않는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요한복음은 선언하였는데, 사실 사람은 우주만물이 생기고 나서 즉 빅뱅이 이뤄지고 난 후 말씀이 생겨났으므로, 노자의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의 설명대로, 사람들이 말로 무엇을 설명하기 이전에 이미 우주가 존재했었고, 그 우주만물을 이해하고 찾아내기 위하여 말을 만들어내면서 그렇게 사람들이 인식을 확장할 수 있었고, 또 그런 말을 계속 만들어 내면서 우주만물에 대한 진리가 끝없이 생산되어 온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이전에도 우주만물은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다만 아인슈타인이나 뉴튼처럼 새로운 진리를 ‘발견’함에 따라서 인간의 지혜는 그에 따라 더욱 발전해왔다. 말이 없으면 어떻게 인간의 지혜가 축적되고 교류될 수 있었겠는가? 말은 有名 萬物之母 즉 우주만물의 모태임이 분명하다. 우리들을 소통하게 만드는 말이 없으면 우주만물이나 그에 대한 진리의 존재와 축적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지 않는가? 말이 도道인 것이다.
문무왕은 자기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진 사람이었고 또 그와 같이 그가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 낸 사람이었다는 측면에서 귀도천신의 본보기임은 분명하다.
欽味釋(軀) 葬以積薪
欽味釋
국편위는 고의로 마멸된 “釋 ”의 결자 부분 “欽味釋 “에 대해서 “欽味釋典”으로 메꾸어서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로 번역하였는데 현재까지 이런 번역이 마치 정설인냥 굳혀져 있다. 하지만 이런 번역과 해석은 크게 잘못되었다. 나는 국편위의 이런 번역에 대해 큰 오류가 있음을 지적한다.
왕이 祭天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선조 제사를 함께 올리는 先祖配祭를 配天(배천)이라고 하는데, 이는 “尊祖”(존조)의 의미이다. 한서 교사지하에 “王者尊其考 欲以配天 緣考之意 欲尊祖 推而上之 遂及始祖 是以 周公 郊祀 后稷 以配天” 구절이 나온다.
尊崇王室(존숭왕실)의 표현과 같이 존경하고 숭상하는 의미의 尊崇존숭이라는 말이 있다. 무측천의 표현에 “尊父之敬雖週” 구절이 있다.
금서룡이 “欽味釋 ”을 “欽味釋典”(흠미석전)으로 메꾸었는데 한국사학계는 그대로 이어받아서 쓰고 있다. 하지만 공자의 제사를 모신다는 뜻으로 전(奠)글자가 원래의 비문 구절의 글자였음이 보인다.
釋奠: 古代在學校設置酒食以奠祭先聖先師的一種典禮 “出征執有罪 反釋奠于學 以訊馘告” (《禮記‧王制》).
“欽味釋奠”(흠미석전) 즉 공자를 존경하여 공자가 죽을 때처럼 간단한 추모 비용을 동백나무잎에다 종이 지폐를 키워서 오늘날은 그것을 국화 한 송이로 대체한 것이다. 공자가 학생들에게서 학비는 비교적 많이 받았지만 죽고 난 후에는 자신의 장례 추모비는 동백꽃 하나로 족했다는 의미이다. 한신이 어머니 묘를 크게 만든 것 그런 것이 아니라 공자는 한신의 후장이 아니라 간단한 비용으로써 추모 받는 것을 대신한 것이다. 따라서, “欽味釋 ”의 결자 부분을 국편위가 “欽味釋典”흠미석전으로 메꾼 것은 순전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에 대한 어떤 논리적이거나 학문적인 증거를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 불교가 국교로 지정된 고려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화장식으로 장례식으로 치룬다고 여겨서인지 “흠미”와 “장이적신”이라는 구절 사이에 단순하게 “釋典(석전)”이란 말을 집어 넣었던 것 같다. 국편위는 “欽味釋 葬以積薪” 부분을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라고 번역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해석은 어떤 학문적인 증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이런 국편위 번역은 크게 잘못되었다. “釋典”(석전)이란 佛經(불경)을 뜻한다. 하지만 문무왕이 불교에 귀의했다거나 불경을 가까이 했다는 기록은 없다.
문무왕 시대는 당나라에서 국교가 도교인 것과 마찬가지로 도교가 그 절정을 구가하던 시대였음을 상기하라. 무엇보다 문무왕릉비 비문 원문 자체에서 “歸道賤身”(귀도천신)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적혀있다는 역사적 팩트를 상기하라.
서수획린과 절필지운
분명한 궐문은 분명하게 궐문으로 두어야 훗날 다른 사람들이 해석을 구하는 방법이나 그 길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혼자만의 주장을 마치 옳은 것 인양 억지로 내세우는 세태는 비판받고 지적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한 예로 비문 판독자 동국대 황수영 같은 사학자는 불교 도그마와 편견과 왜곡 정도가 강하게 나타나 그 논문의 진실성이 의심된다. 비록 공자 시대가 지나면 겸손함과 신중성을 찾아보기 힘든 세태가 지배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문장 중에서 이해가 안되는 글자나 빠진 글자가 있는 궐문闕文은 궐문으로 남겨 두는 것이 보다 옳을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 “나는 그래도 사관이 탈루된 글자나 이해가 안가는 글자가 있으면 빼놓고 공란으로 남겨두는 것을 보았고, 말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타게 하였는데, 지금에는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진 것 같으네!”
葬以積薪장이적신과 欽味흠미의 뜻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화장식으로 장례를 치룬 것은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 일찍이 도교에서 행해지던 장례풍습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국가에서 금지하자 사라지게 되었다. 요즈음 영국 같은 화장식으로 장례식을 치르는 경우가 대세인데 영국은 불교 국가가 아니고 기독교 국가임을 보라. 일본은 화장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나라로 가장 대표적인데 일본인들이 거의 모두가 불교신자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여담이니까 깊이 들이 가서 자세한 설명은 피하겠지만, 일본에서 최초의 화장식은 707년 문무천황(文武天皇) 화장식이 그 시초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볼 때 문무왕의 화장식 전례가 일본에 전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欽味釋 葬以積薪
欽味흠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欽敬玩味(흠경완미)의 줄임말이다. 欽敬(흠경)은 흠복하다 경복(敬服)하다 흠모하다 경모하다 欽佩尊敬(흠패존경)의 뜻이다.[1] 玩味는 뜻을 잘 생각해 보고, 깊이 새겨 보다, 음미하다의 ‘細細地體會其中意味’ 즉 ponder의 뜻이다. 미술품이나 화초들을 가꾸며 취미를 감상하다는 뜻으로 玩味(완미)를 쓴다.
그와 같이 어떤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
欽味(흠미)가 쓰인 예문을 찾아보면 위서(魏書) 조유(趙柔)전의 “柔爲之注解 咸得理衷 爲當時俊僧所欽味焉” 구절이 발견된다. 欽味(흠미)를 사전에서 살펴보면, 欽敬玩味(흠경완미) 즉 영어로 admire의 뜻, 존경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권위있는 사람들은 허리띠 패를 착용했는데, 그래서 권위 있고 존경받는 것을 欽佩敬重(흠패경중), 欽佩尊敬(흠패존경), 欽佩(흠패), 欽敬(흠경)이라고 말했다.
釋滯 석체
우리들이 곰곰이 생각해 본다는 경우는 것은 어떤 무언가가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을 경우일 것이다. 목에 무언가가 걸쳐서 넘어가지 않고 소화가 안되는 경우 체했다는 표현을 쓰는데 뭔가 막혀 있는 것을 풀어내어 의문을 해소하는 것을 辯疑惑釋凝滯(변의혹해석응체)라고 말한다. 깊은 의문을 푸는 것을 决疑釋滞(결의석체)라고 말한다. 갈홍(葛洪)의 抱樸子‧釋滯(포박자석체)편을 참조해 보자. 釋滯(석체)라는 단어의 뜻은 解疑釋滯(해의석체) 즉 解決 難疑 問題 어떤 풀리지 않고 꽉 막힌 문제를 해결해 내다의 뜻이다. 解釋難疑의 뜻인 釋疑(석의)와 비슷한 뜻이다. 진서(晉書)형법지의 “法欲必奉 故令主者守文 理有窮塞 故使大臣釋滯” 예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장이적신의 내용이 전혀 풀리지 않는 내용의 문제인가?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유신이 표현하듯 그가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 환군산인데 그는 사람의 정신과 몸의 관계를 땔나무와 불의 관계로 비유해서 설명해 냈고, 또 불교에서 신불멸론과 신멸론 사이에서 3세기경부터 열띤 논쟁이 일어났음을 참조해 보고 또 영광전부와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언급한 “영광불멸”의 문제는 익히 이론적으로 설명이 잘 되어 있었던 영역에 해당한다.
釋(석) 글자는 解-해의 解說(해설)의 뜻 즉 말로써 풀이하다 注釋(주석)하다는 의미의 낱말이다. 또 釋(석)은 석방하다의 낱말에서 알다시피 놓아주다의 뜻이 있다. 그래서 釋手(석수)는 손을 놓다-放手, 不釋(부석)은 놓지를 못하다 애도를 멈추지 못하다 letting go를 못하다 不能忘掉의 뜻이다. 초사 哀郢(애영)에 “心絓結而不解兮 思蹇產而不釋 마음의 울적함 풀리지 않고 생각은 막혀 잊지를 못하네”의 구절이 이와 같은 뜻이다.
또 釋(석) 글자는 석가를 뜻하니 석가모니를 釋氏(석씨)라고도 쓴다. 하지만 문무왕릉비문의 내용에서 불교의 개념은 전혀 등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비문에서 “貴道賤身”(귀도천신)했다는 표현을 분명하게 썼지 않았는가? ‘도(道)의 가르침을 높이 귀하게 여겼고 자신의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라고 바로 앞 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무슨 근거로 국편위는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이와 같이 얼토당토않게 번역해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석전(釋典)이 아니라 석전(釋奠)
석전(釋典)이 아니라 석전(釋奠)이다. 즉 부처의 석전이 공자의 경전의 가르침이고 그런 공자에 대한 추모제를 의미하는 석전(釋奠)이란 말이다.
국편위는 “欽味釋典”으로 메꾸어서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로 번역하였는데, 현재까지 이런 번역이 마치 정설인냥 굳혀져 있다. 하지만 이런 번역과 해석은 크게 잘못되었다. 나는 국편위의 이런 번역에 대해 큰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반박한다.
금서룡이 “欽味釋 ”을 “欽味釋典”(흠미석전)으로 메꾸었는데 한국사학계는 그대로 이어받아서 쓰고 있다. 하지만 석전과 같은 뜻인 공자의 제사를 모신다는 뜻으로 석전(奠)자가 원래의 비문 구절의 글자였을 것이다. “欽味釋奠”(흠미석전) 즉 공자를 존경하여 공자가 죽을 때처럼 간단한 추모 비용을 동백나무잎에다 종이 지폐를 끼워 넣어서 예의를 표한 것 즉 오늘날은 그것을 국화 한 송이로 대체한 것이다. 공자가 죽고 난 후 자신의 장례 추모비는 동백꽃 하나로 족했다는 의미이다. 공자는 한신의 후장이 아니라 간단한 비용으로써 추모 받는 것을 대신한 것이다. 공자는 후장이 아니라 소박한 소장을 원했고 이 소장은 불교식 화장이 아니라 땅에다 묻는 유교식 토장을 말한다.
귀도천신 바로 앞구절은 “ 命凝眞” 구절인데 이 결자부분은 “嚴命凝眞”(엄명응진)으로 메꾸어 본다면 ‘아버지의 엄명을 정말로 이루어냈도다!’의 뜻으로 번역해석된다. 이 “嚴命凝眞 貴道賤身”의 뜻은 달리 말하면 “生盡其孝 死盡其忠”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표현을 번역하면, ‘살아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했고 죽어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완수했네’.
釋之
여기서 “欽味釋 “에 들어갈 내용의 말은 “葬以積薪”과 그 후 결자부분의 “ 滅”의 내용을 곰곰이 잘 생각해본다는 의미의 말이 연결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뜻의 글자가 바로 지시대명사 연결사 之지이다. 영어의 which, that의 기능의 ‘之’이다. 이런 역할 쓰임새의 之의 예문을 시경의 구절에서 찾아 보자.
“乃寢乃興 乃占我夢 吉夢維何 維熊維羆 維虺維蛇 大人占之 維熊維羆 男子之祥 維虺維蛇 女子之祥” (시경, 小雅 斯干).
잠자고 일어나 / 지난 밤 내 꿈을 점쳐보니 / 좋은 꿈 길몽이긴 한데 그게 무슨 뜻인지? / 흑곰, 대웅이 나온 꿈이었네. / 살무사와 뱀이 나온 꿈이었네. / 어르신께 점쳐달라고 하니 / 흑곰, 대웅은 / 사내아이 태어날 징조이고 / 살무사, 뱀 꿈은 / 딸아이 태어날 징조일세.
여기의 “大人占之”(대인점지) 표현이 그것이다. 간 밤에 꾼 꿈 그게 무슨 뜻인지 해몽하는 것을 “占之”(점지)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현대 정신분석 심리학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을 보라. 모든 학문의 본령이자 입문이자 결론은 사물 현상에 대한 이해와 해석(釋) 영어로 interpretation이지 않는가? 연구논문 서치엔진을 찾아보면,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연구 논문 제목에 “interpretation” 단어가 들어간 제목이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釋之”는 “占之”하고 같은 뜻이므로, 시경 사간의 “대인점지 유웅유비”의 문장구조와 비문의 “흠미석지 장이적신”의 문장 구조는 동렬구조이다.
따라서 “釋 “를 “釋之”로 연결하면 “欽味釋之“가 되어 “欽味釋之 葬以積薪”(흠미석지장이적신)의 구절로 메꾸어진다. 여기서 釋(석)은 풀이하다, 해석하다의 의미이지, 불경을 뜻하는 “釋典”(석전)의 뜻이 아니다. ‘장이적신이라는 그 뜻을 곰곰이 되새겨 생각하고 풀이해 보니’라는 의미가 된다. ‘나뭇단을 쌓고 불태워 화장식으로 장례식을 치르었다는 문무왕의 장례식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薪盡火傳 靈光不滅”의 뜻이 있지 않는가? “薪盡火傳”(신진화전)은 ‘땔나무의 형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형체와는 다르게 다른 나무에 옮겨 붙어 불씨를 계속 이어간다’는 뜻이고, 이 말은 불이 그렇게 계속 이어지듯이 우리 사람들도 비록 몸은 없어 사라진다고 해도 정신과 마음은 다음 세대에게 계속 이어진다는 것, 또 불과 같이 사람의 정신 또한 영원하다는 뜻의 “靈光不滅”(영광불멸)의 뜻과 상통한다. “靈光不滅”(영광불멸)의 의미 그 의미를 아닌가? ‘아! 참으로 문무대왕답도다!’
정도자의 “신불멸론”
“釋之”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담긴 또 다른 예문 하나인 정도자의 “신불멸론” 중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보자.
“有斯難也 形神有源 請為子循本而釋之 夫火因薪則有火 無薪則無火 薪雖所以生火 而非火之本 火本自在 因薪為用耳 若待薪然後有火 則燧人之前 其無火理乎 火本至陽 陽為火極 故薪是火所寄 非其本也 神形相資 亦猶此矣 相資相因 生塗所由耳 安在有形則神存 無形則神盡 其本惚恍不可言矣 請為吾子廣其類以明之 當薪之在水則火盡 出水則火生 一薪未改 而火前期 神不賴形又如茲矣 神不待形 可以悟乎”. (鄭道子, 神不滅論, 弘明集券五).
여기서 ‘釋之’(석지)라는 말 대신에 그것과 똑같은 의미의 다른 말을 쓴다면 “釋文”이 적절할 것 같다. ‘釋文’(석문)은 “經典釋文”(경전석문)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문자의 독음(讀音)과 뜻을 해석하다, 고문자(古文字)를 고증하여 그 잣구의 의미를 해석하다, 주석하다, 영어로 말하면 어노테이션(annotation)의 뜻이다. 그러므로 “장이적신”의 의미를 곰곰이 해석해 보니, “신진화전”, “영광불멸”이라는 뜻이 있지 않는가? 대대손손 영원히 남을 위대한 문무대왕이시여! 당신은 경진씨-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이어받은 왕답게 정말 믿음직스럽고 공경스럽구나!
神不滅論(신불멸론) 대논쟁
왜 불교에서 “形神生滅論”(형신생멸론) 대논쟁이 벌어졌는가? 불교는 우리의 전통 종교가 아니라 인도 힌두교에서 파생되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유입되고 전래된 외래종교였다. 사마담의 논육가요지에 불교의 요지는 들어 있지 않다. 대개 변혁의 시기에 외래종교가 유입된다. 조선말기에 기독교가 유입된 것을 상기하라. 단순도식화의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한계를 수긍하고서 도식적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도교는 유신론, 유교는 무신론, 불교는 이 둘을 결합하고 통합을 시도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는데, 불교에서 그 지파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삼국사기에 짧은 최치원의 분석 문장을 참조하라. 그런데 궁극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종교적 믿음이 과연 통합이 될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후손들로 자처하는 조상이 같다고 하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도가 상통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7세기 이후 진행된 기독교와 이슬람 대립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종교는 바둑의 흑백의 문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o, x 이지, 둘 다를 함께 어우를 수 있는 육면체 주사위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분야이고, 따라서 사람의 죽음은 오로지 한 번뿐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터스가 말한 것 같이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굴 수는 없는 법이고, 한 번 흘러간 물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流水不歸(유수불귀). 두 번의 죽음은 없는 법이라면, 어떻게 죽음을 통합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 한편 공자의 유교는 요즈음의 표현으로 말하면 휴머니즘, 인간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교는 유일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교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지낸다는 측면에서 최소한 정령의 존재는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정도자의 신불멸론과 환군산자의 新論形神(신론형신론)을 참조하라. 환군산자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기 이전의 사람이다.
薪盡火傳
薪盡火傳(신진화전)은 장자(莊子)의 養生主(양생주)에 나오는 柴雖燒盡 火種仍可留傳 구절의 설명대로 땔나무는 불이 다 타고나면 사라지지만 불은 영원히 전해진다는 뜻에서 불굴의 정신이 이어지는 인류의 전통,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영원한 인류의 지식 승계와 전통의 뜻을 함의하고 있다.
薪盡火傳(신진화전)을 사전에 찾아보면 薪火相傳과 같은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薪火(신화)는 횃불, 우리 어릴 적 소나무 방울에 불씨가 남아 옮겨 붙는 관솔불, torch, 火炬(화거), 불을 뜻한다. 불씨는 다른 장작 나무가 다 타고나서도 그 장작나무 형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형체와는 다르게 다른 나무에 옮겨붙어 불씨를 이어간다. 그래서 불씨는 대대상전(代代 相傳) 대대로 전해진다-代代流傳(대대유전). 사람은 몸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자손과 후손을 통해서 상속되는데, 나무가 불을 이어가듯이 계속 살아 남는다는 비유인 것이다. 여기서 불에 타는 나무는 사람의 몸 형체이요, 불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비유된다.
薪盡火傳(신진화전)의 출처는 指窮于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문장이 나오는 장자의 양생주이다. 火傳은 불씨가 꺼지고 나도 다시 살아 나 이어지듯이 어떤 물건의 물질이나 정신의 정수가 대대로 이어진다-代代流傳(대대유전)의 뜻이다. 화전(火傳)은 양나라 왕승유의 예주묘지명의 구절에도 나타난다, “思魯連之辭賞 慕田疇之高蹈 而火傳川逝 長途已迫”. 여기의 川逝(천서)는 강물이 흐르듯, 세월이 흘러도의 뜻이다. 그러므로 指窮于爲薪火傳也不知其盡也 번역은, “불씨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기름을 붓고 땔감을 태우면 기름이 다 타더라도 불은 차례대로 옮겨져서 그 끝이 없이 계속 타오른다.” 사전에서의 영어 해석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As one piece of fuel is consumed, the flame passes to another.”
여기서 指(지) 글자를 기름 지방 뜻의 脂(지)를 가르키는 말이라고 의역하는 것이 장자의 구절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하는 측면이 있어서 이와 같이 해석했는데, 指(지) 글자는 손가락이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에서는 ‘旨’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 그러므로 취지라는 말처럼 意義(의의),目的(목적)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점에 입각하여 장자의 구절은 땔나무가 다 타고나서도 불씨는 계속 이어진다는 결론을 알기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爲薪(위신)은 여기서 爲(위) 글자는 取(취) 글자의 의미 즉 取柴薪(취시진)의 의미이므로, 窮於爲薪(궁어위신)은 땔나무가 다 타고 나더라도, 화전(火傳)은 대대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땔나무는 다 타버리고 난다 해도 불 자체는 그 땔나무가 있는 한 계속 옮겨 가는 거니, 어느 누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다-不知其盡也. 땔나무가 다 연소되더라도 다시 땔나무를 갖다 대면 불은 옮겨 붙는다.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 타듯이 사람의 삶 또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땔나무와 불과의 관계를 비유해서 우리 인류의 삶에서 비록 우리 몸뚱아리는 유한하고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 정신은 면면이 이어진다는 대대상전의 의미를 설명한 말로 이해된다.
穀神不死
穀神不死(곡신불사)는 “온천명”에 등장한다. 薪盡火傳(신진화전)의 의미는 穀神不死(곡신불사)의 뜻과 그 맥을 같이한다. 곡신불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설명한다.
노자 도덕경의 “谷神不死 是謂玄牝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구절이 있는데,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다. “곡신불사”를 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있는 계곡”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원불멸의 계곡의 정신이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경우 등 해석 나름대로 의미가 통한다. 노자는 현빈지문이라고 말한 것은 김용옥이 해석하는대로 아이를 낳는 여자의 가물한 그곳을 가르키든, 아니면 태산 입구에 있는 천문을 말하든, 예수가 적절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말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해석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노자가 말한 본질적인 ‘여성성’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말이다. 어찌됐든 영생불사의 그곳이 있다면 물과 불이 서로 만나는 지점 즉 확 트인 분기점이 그곳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우리 속담에 ‘빙탄불상용’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노자의 철학을 이해한다면 그 말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곡신불사’를 그러한 영원불멸의 정신이 있다는 정신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천문이나 계곡이나 여성의 검은 그곳이나 그 같은 ‘수동성’이 신비스런 생명력을 이어가는 요체라고 보는 것이다. ‘요철’과 같은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모습으로 모든 기구가 만들어 있음을 볼 때 이 세상은 절구와 절구통같이 어느 한 쪽만으로는 부족하고 서로 힘을 합쳐서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해서 내려찍는 절구보다 그것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절구통이 더 중요하다고 보더라도 절구통의 존재는 절구가 없으면 또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면이 즉 밑에서 받쳐 주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전쟁 전략론으로 말하면, 공격보다는 수비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며, 겉으로 드러나기는 쉽지 않지만 승리에 꼭 필요한 것은 여성적인 자기 희생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밑받친다는 의미에서 자기 희생적인 뜻이 강조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러한 우주만물이 움직이고 작동하는 기본적인 음양의 원리원칙을 기초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자의 곡신불사(谷神不死)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The immortal spirit of valley (vast and void) is like a magical uterus (a place for reproduction) . The door into the magical uterus is like the seed of heaven and earth (the universe). The seed seems to pass on and on, it can never be used up.
이 세상을 이어가는 영원한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높은 곳 또는 깊숙한 곳 또는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과 같은 것인데, 이를 남녀간의 성질로 보면, 남성적인 공격성보다 여성적인 수동성이라고 본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보고서 항상 겸손의 자세를 강조하고 또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용의 정신을 강조한다. 노자가 강조한 여성적 가치 페미니즘의 가치를 국가통치 정치철학으로 전면에 내세운 나라는 중국의 당나라이었다. 모란꽃은 여성을 상징하는 꽃이다. 당나라는 모란꽃을 국가의 통치철학을 대표하는 국화로써 채택했다.
왜 모란이 여성을 상징하는 꽃일까? 모란의 꽃 모습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자주빛 꽃잎 속을 들여다 보면 노란 색의 꽃술이 둥글게 모여 있는 모습을 띠는데 마치 여성의 생식기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모란은 탐스런 큰 꽃잎이 피기 전에 마치 남자의 생식기 불알 탱자같이 생긴 머금은 씨앗이 줄기 위에 매달려 있고 그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씨앗의 모습은 확 터지는 알갱이 단과 같음으로 이를 따서 모란꽃을 한자로 牧丹(목단)이라고 표현한다. 모란은 양귀비꽃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이러한 모습에서 ‘목을 치다’ 즉 사람이 희생당하는 의미가 유래하였다. (오늘날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데 그 꽃의 상징적 의미는 어버이가 아이를 키워내는 자기 희생 정신을 기르는 것에 있다.) 오늘날 양귀비꽃을 전쟁 희생자를 기르는 현충일에 이 양귀비꽃을 가슴에 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양귀비꽃은 이렇게 희생자의 넋을 기르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잘난 체 하는 사람을 못봐주는 세태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으로 표현하고 있다. 목단 꽃의 모습은 씨앗을 터뜨려서 큰 꽃 잎을 피우는 자기 희생의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 된다. 여성의 생식기를 “자궁”이라고 말하는데 자식을 낳은 그곳을 의미한다. 과거 왕조 시대에서 태자가 거처하는 왕궁의 장소를 자궁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한자 자는 자주빛 紫(자)를 써서 자궁이라고 한 것이다. 태자는 장차 국왕이 될 신분이므로 아이를 낳은 여자의 자궁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자주빛은 이렇게 고귀한 신분의 탄생을 상징하는 색깔이므로 왕궁에서 태자가 거처하는 태실 이름으로 쓰였고, 모란은 탐스런 자주빛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꽃이다. 모란은 이렇게 그 꽃모양이 여성적인 여성적 가치를 크게 강조한 노자의 정치 철학을 채택했던 당나라에서 국화로써 위치를 점했던 것이다.
貴道賤身 欽味釋軀/欽味釋縛/欽味釋奠 葬以積薪
위에서 설명한대로, 釋滯(석체), 釋之(석지), 釋文(석문), 釋縛(석박), 釋奠(석전), 薪盡火傳(신진화전), 葬以積薪(장이적신), 神不滅論(신불멸론)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貴道賤身 欽味釋奠 葬以積薪”에서의 결자 부분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欽味釋奠(흠미석전) 또는 欽味釋軀(흠미석구)의 표현이 도출된다. 장례식을 치룰 때 영구를 극히 존중하고 마지막 예를 다해 표하는 그 모습을 상상하라. 천천히 운구를 옮기면서 최고의 예를 표하지 않는가? 그 때 존경하는 고인이 평소 행동과 남긴 말씀을 되새겨지지 않는가? 欽味(흠미)한다는 뜻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고인의 몸이 담긴 운구를 석방해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지펴 화장식을 치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표현으로써 釋軀(석구)가 어울린다. 釋軀(석구)와 같은 뜻의 단어로 捐軀(연구)가 있다. 捐軀(연구)는 국가와 정의를 위해서 기꺼이 생명까지를 포기하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 즉 舍棄身軀(사기신구), 爲國捐軀(위국연구)를 뜻한다. 欽味釋軀 葬以積薪(흠미석구 장이적신)은 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쌓은 나무 위에 관을 옮기고 화소장을 치르는 그 구체적인 장면 그리고 그에 대한 비유적인 의미를 말해준다.
釋
解釋(해석), 注釋(주석)하다의 뜻에서와 같이 해설하다의 뜻이 있고, 冰釋(빙석) 즉 얼음이 녹다는 뜻에서와 같이 解除(해제), 消散(소산)의 뜻이 있고, 범인을 保釋(보석) 허가하고 釋放(석방)하다에서와 같이 사면(赦免)하다, 놓아주다의 뜻이 있고, 춘추좌전의 “諸侯釋位 以間王政”(제후석위 이간왕정)-제후들이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왕정(王政)을 간섭하였다-구절의 뜻에서와 같이 放棄(방기)하다, 버리다, 舍去(사거)-놓고 가버리다의 뜻이 있고, 한서에서 자주 나오는 “釋服”(석복) 즉 옷을 벗는다-탈상하다-는 解脱(해탈)의 뜻이 있다.
釋軀(석구)는 ‘몸을 버리다’는 뜻이 되므로 석구는 捐軀(연구)라는 단어의 뜻과 같다. 捐(연)은 재단기금에 재산을 기부 출연하다의 뜻과 같이 자기의 귀중한 재화를 기꺼이 포기하고 희사하는 것을 뜻하는 낱말이다. 捐軀(연구)는 국가와 정의를 위해서 기꺼이 생명까지를 포기하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舍棄身軀(사기신구), 爲國捐軀(위국연구)를 뜻한다. 그러므로 앞서의 문장에 나오는 귀도천신과 비슷한 뜻이다.
결론적으로 欽味釋軀(흠미석구)는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문무왕의 희생 정신과 그의 유지를 받들고 그 깊은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면서’의 뜻이 된다.
정림사 평백제비에서의 “捐軀殉國之志” (연구순국지지)의 구절이 바로 欽味釋軀(흠미석구)의 뜻을 모방한 표현이 된다.
“欽味釋 葬以積薪”은 국편위의 번역대로의 “欽味釋典 葬以積薪” 흠미석전 장이적신의 문장이 아님은 이제 명백해졌다. 국편위는 “釋典”이라는 글자로 메꾸워서 “欽味釋典”(흠미석전)을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당태종의 비문에서와 같이 부처가 아니라, 釋奠(석전)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할 것이다.
貴道賤身 欽味釋奠(귀도천신 흠미석전) & 欽味釋縛 葬以積薪(흠미석박 장이적신)
비문 뒷면 20행의 “欽味釋▨ 葬以積薪”(흠미석▨ 장이적신) 부분을 “欽味釋典 葬以積薪”으로 해석해온 지금까지의 한국사학계의 결론을 적극적으로 반박하여, 나는 欽味釋▨ 부분을 欽味釋縛(흠미석박)으로 또는 欽味釋奠(흠미석전)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欽味釋▨ 葬以積薪”(흠미석▨ 장이적신)의 결자 부분을 “欽味釋典 葬以積薪”이 아니라 欽味釋縛 葬以積薪(흠미석박 장이적신)으로 해석할 때 보다 완벽한 의미가 통한다.
“釋縛焚櫬”(석박분친)은 중국어 성어 사전 등 거의 모든 사전에 적혀있는 한자성어이고 한자 옥편 사전에 설명이 들어 있는 글자이다. 중국의 역사서에도 그 사례가 많이 등장하는 성어이기도 하다. “欽味釋典”(흠미석전)으로 해석한 최초의 사람이 일제시대 식민사학을 개창한 경정제대 교수 “금서룡”이었다. 그의 육필원고를 보면 금서룡은 欽味釋▨ 결자부분을 “欽味釋典”(흠미석전)으로 창작하고 끼워 넣었다. 欽味釋典(흠미석전) 즉 “불경을 흠미해서 나뭇단을 쌓아올리고 화장을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貴道賤身 欽味釋奠(귀도천신 흠미석전) 즉 귀도천신의 공자를 흠미해서 장이적신했다는 의미가 문무대왕의 죽음에 맞는 내용이 된다. 흠미석전은 춘추좌전의 역사서 기록-昭公四年: “成王克許 許僖公如是 王親釋其縛 受其璧 焚其櫬-을 토대로 해석된다. 문무대왕은 삼국을 통일한 선구자이고 전쟁포로의 속박된 삶을 풀어준 성현이었다.
“欽味釋 葬以積薪” 부분을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라고 번역한 국편위의 해석은 단어와 어구와 구절과 문장과 전체 비문과의 의미 연결상 전혀 맞지 않고 크게 잘못된 해석이다. 만약 欽味釋典(흠미석전)이라면 비문의 글자를 고의적으로 마멸시키는 비문에 대한 테러행위를 감행했을 이유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비문 해석을 시도함에 있어서 마멸된 글자 한 글자를 메꾸더라도 그 글이 나타내는 단어와 구절과 문장과 전체 비문 내용과 연결지어서 부분과 전체적 의미가 서로 온전하게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서수획린의 의미를 각자 나름대로 해석한다고 해도 춘추의 역사와 공자의 삶 전체를 통해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고, 문무대왕릉비 비문 원문이 마멸 훼손되고 사라진 이후의 “欽味釋 ” 문장은 그 정확한 글자가 이미 사라진 이상 ‘절필지운’으로 여겨져야 한다. “欽味釋 ”을 “欽味釋典”(흠미석전)이라고 해석한 금서룡과 그 아류들이 저지른 잘못은 즉시 수정되어야 한다.
靈光不滅 영광불멸
영광전靈光殿은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에 세워진 사당인데, 한경제의 비 정희가 낳은 자식인 노공왕 유여(?-BC 128)가 이곳의 제후로 있던 시절에 중건했다. 경제와 정희 사이에 낳은 자식의 후손으로는 유명한 삼국지 시대 촉한을 세운 유비 황제가 있다. 유방의 아들인 한문제와 한경제는 한무제의 어머니 두태후처럼 도교를 신봉하고 도교의 정치철학으로 한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진 현왕이었다. 왕연수가 영광전부 魯靈光殿賦에서 다른 궁전들은 전란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는데 오로지 영광전만이 살아 남은 이유를 서술했고, 여기에 皆見隳坏 而靈光巋然獨存 개견휴배 이영광규연독존 표현이 있다. 隳坏휴배는 毀壞훼괴, 廢棄폐기의 뜻이고, 巋然규연은 홀로 우뚝 선 모양을 뜻하고, 靈光영광은 영광전의 이름 이외에 다른 뜻이 있는데, 신비한 광채, 왕이나 성현의 덕택, 인간의 선한 본성, 碩果僅存석과근존 즉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큰 열매 그리고 이에 비유적인 의미로 오래 남아 전하는 위대한 사람의 뜻이 있다. 靈光영광의 靈은 靈氣(영기) 즉 살아 있는 정기(精氣)를 내뿜는 것의 의미와 통한다. 또 忽瞟眇以響像 若鬼神之仿佛 (홀표묘이향상 약귀신지방불) 표현이 나오는데, 그렇게 신기하게 쌓은 사당의 의미가 구름 속에 숨은 달처럼 희미해서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고 또 마치 죽은 사람처럼 금방 귀신이라고 나올 것 같은 그렇게 숨어 있는 그 무언가에 홀린 듯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숱한 전란 속에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 남지 않았을까?
또 영광전부 마지막 연에서 ‘그 모습 정말 신기하지만 전각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는 窮奇極妙 棟宇已來 未之有兮 표현이 나온다. 만약 화려한 전각들로 채웠으면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갈홍(葛洪)의 포박자 君道(군도)에 “鑒章華之召災 悟阿房之速禍” 경계 글이 있고, 진자앙은 “昔日 章華宴 荊王樂荒淫”이라고 탄핵했는데, 역사를 통해 보면 그런 유추가 가능할 것 같다. 왜 영광전만이 홀로 살아 남았겠는가? 그 명당 묘지에서 오묘한 광채의 빛이 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광(靈光) 말이다. 영광전부에 “蔥翠紫蔚 礧碨朅瑋 含光晷兮” 구절이 있다. 蔚(울)은 文貌 즉 禮文儀節(예문의절)의 뜻이고, 이는 순자의 예론에 나오는 忠信愛敬之至矣 禮節文貌之盛矣 구절이 이 뜻이다. 礧硌(뢰락)은 곽박의 산해경주에서 大石(대석)이라고 풀이했고, 朅瑋(걸위)는 珍琦, 光晷(광귀)는 日光(일광)의 뜻이다. 따라서 이 총취자울 뢰락걸위 함광귀혜 구절의 뜻은, ‘푸르른 들판에 우뚝 솟은 저 촘촘히 돌로 쌓은 대의 모습 정말 진기하구나, 햇빛을 품고 있음이여.’
왕연수는 영광전부에서 숱한 전란 속에서 홀로 살아 남은 영광전처럼 한나라 황실이 영원무궁하기를 기원했다. 神之營之 瑞我漢室 永不朽兮 신이시여, 보살피소서! 상서로운 우리 한나라 황실이 영원무궁토록! 그런데 왕연수의 영광전부가 나오게 된 배경이 한나라의 멸망 시기가 가까이 왔음을 예언해 준 것인지는 몰라도 한나라는 이 영광전부가 나온 지 (왕연수는 165년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약 60년도 안되어서 조조의 위나라에 나라를 넘기고 말았다. 천의인가? 인사인가?
유신은 불후의 작품 애강남부에서 영광전부의 “靈光巋然獨存” 구절을 따와서 “靈光巍然”이라는 표현을 남겼다. 이 표현은 자신의 나라 양나라가 망하고 타국에 억류된 자신의 인생역정 속에서도 석탑같이 후세들에게 영원히 남아 전할 장엄한 인류 역사의 의미를 담아둔 말이었다. 왕연수의 巋然(규연)이나 유신의 巍然(외연)이나 ‘저 높이’라는 高大(고대)의 뜻으로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유신의 삶은 비록 자신의 조상들처럼 전란의 풍진 속에 여러 곳을 옮겨야 했던 부평초 같은 삶이었다. 삼협의 방랑시인 詩聖(시성) 두보가 유신의 삶에 대해 “庾信平生最蕭瑟 暮年詩賦動江關”이라고 노래했다. 유신평생 최소슬 모년시부 동강관, 유신은 평생을 스산한 가을바람처럼 매우 쓸쓸한 삶을 보냈지만 그가 만년에 쓴 시와 글은 유유히 흐르는 양자강마저 울릴 정도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삼협댐이 있는 곳 초사를 통해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굴원[2]과 송옥과 두보가 있는 형주 강릉의 그 곳, 청산은 의구하고 거대한 양자강의 강물은 구비구비 동쪽으로 유유히 흐르는데 부딪쳐 부서지는 큰 강물결에 씻겨 갔는지 옛 영웅들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네, 滾滾長江東逝水浪花淘盡英雄(곤곤장강동서수랑화도진영웅).
하지만 유신은 비록 자신의 후손들이 세상 부귀영화와 절연되고 또다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영광(靈光) 즉 위대한 인물-꼭 유신의 가문 중의 큰 인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은 계속 전해지리라. 여기서 영광은 큰 업적을 나타낸 큰 인물이라는 뜻 이외에 우리의 감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인류의 마음 속에 면면히 살아 전해져 온 고귀한 정신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영광 그 영원의 불빛은 꺼지지 않고 끝까지 계속 살아 남을 것이라는 역사와 민족과 인류의 존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칭한다. 그런 굳센 마음은 사마천이 비록 몸은 망가졌지만 끝내 살아남아 부친의 유언을 완수해 내고 불후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그의 위대한 정신의 힘과 같다. 여기서 영광(靈光)이라는 의미는, 사람은 형체와 정신 즉 몸뚱아리와 마음 body and soul이라고 볼 때, 비록 몸은 사라져도 그 마음과 정신이라는 신비스럽고 신령스러운 빛나는 광채, 영원한 별빛과 빛나는 인간의 선한 본성은 계속 살아 남아 전해질 것이라는 그 영원불멸성을 말해 준다.
또 우리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DNA같이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영광(靈光)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이 있는데,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에서 살펴본다면 영광은 조상과 성현(聖賢)들이 전해준 덕택(德澤) 음덕을 뜻한다. 애강남부의 ‘靈光(영광)은 홀로 높이 남아 있으리라’는 표현에서 여기서 영광을 마지막잎새나 큰바위얼굴처럼 모든 산천초목이 변해도 끝내 변하지 않는 위대한 그것으로 해석한다면 물적으로는 화씨벽 수주보배나DNA같은 사리 엑기스가 되겠고 정신적으론 유심론 즉 사람의 몸은 죽어도 사람의 마음과 가슴과 정신과 혼백과 영혼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는 우리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웅변하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영광(靈光)은 ‘혼불’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인간세상이 끊임없이 변해 왔지만 소크라테스 노자 석가 공맹 예수 같은 성인철현은 영원히 전하고 있지 않는가? 이같은 역사인식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나는 애강남부에서의 靈光巍然(영광외연) 구절을 문무왕릉 비문의 결자 부분을 메꾸어 주는 표현으로 도입하였다.
문무대왕은 장례식을 화장식으로 치르어 비록 자신의 몸은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토록 살아 남아서 우리들 우리민족 우리국가를 무궁토록 보호하리라. 문무왕의 후세들을 위한 고귀한 사랑과 위대한 역사정신은 자손만대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문무왕이 이룩한 삼국통일의 위대한 업적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비추는 햇빛처럼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처럼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 문무대왕의 위대한 통일정신은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등대불처럼,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이 되어, 영원한 성화(聖火)로 타오르리라.
粉骨-粉骨碎身 분골쇄신
국편위가 “ 滅粉骨鯨津” 부분의 결자된 부분의 글자들이 무슨 글자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 또 문맥상 띄어쓰기 구조적 이해를 하지 않고서, “경진 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로 창작하고 번역한 것은 큰 오류을 범한 잘못이 있다. “ 滅”은 “不滅”의 뜻을 가진 단어로써 이해된다. “ 滅”은 “不滅”의 뜻을 가진 단어가 결자부분을 메꾸는데 문맥상 어울린다. 銘(명) 부분은 글자수를 4자 쓰기로 맞추어서 그렇게 4자 띄어쓰기 해서 문맥상 의미가 완전히 연결되어야 올바른 번역과 해석이 도출될 수 있다. “ 滅”은 “滅粉骨鯨津”에 연결되는 5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앞의 “ 滅” 4자 띄어쓰기로 문맥상 의미가 서로 연결된다.
여기서 “粉骨”(분골)은 “粉骨碎身”(분골쇄신)의 약자이다. 조국을 위해서 몸 바쳐 희생한 높은 충성심과 용맹함을 보여준 경진씨를 이어받은 왕, 경진씨의 후계자로서 정말 믿음직스럽다는 칭송의 표현인 것이다. 장례식 또한 용감하게 관습에 없던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치르는 것 또 그에 관련된 “영광불멸”의 의미를 깊이 새겨볼 때 정말 경진씨 태종 무열왕을 이어받은 왕으로서 진실로 공경스럽구나! 그렇게 느끼는 경의의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는 여담으로 타치만 하고 넘기지만 간단히 코멘트를 남긴다면, 일본에서 최초의 화장식은 707년 문무천황(文武天皇) 때가 그 시초라는 사실을 볼 때 문무왕의 화소장 장례가 일본에 전해진 것이 아닐까? 특히 문무천황이 백강전 전투에서 거의 전멸적 패배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라.
“粉骨鯨津嗣王允恭”(분골경진사왕윤공)의 구절에서 “粉骨”(분골)은 粉骨碎身(분골쇄신)의 의미, 분골(粉骨)은 粉骨碎身(분골쇄신)의 약자로 쓰였다. 분골(粉骨)은 ‘조국을 위해서 몸 바쳐 희생한 높은 충성심을 보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그 의미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편위는 얼토당토않게 “분골”을 “뼈가루를 날리셨네”-이렇게 엉터리로 번역한단 말인가?
“粉骨”(분골)과 같은 의미로 쓰인 표현을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찾아보자. “忠臣解骨 君子吞聲”, “荊山鵲飛而玉碎 隨岸蛇生而珠死”, “忠能死節”, “碎於長平之瓦”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장평의 기와처럼 부서졌네’의 표현은 중정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한 10.26 궁정동 사태 때 사형당한 중정부장의 부하가 최후진술에서 남긴 말이기도 하다. 유신이 애강남부에서 쓴 단어 충신 해골 “解骨”, “玉碎”, “珠死 “, “瓦碎”라는 단어들은 모두 “분골”과 같은 “분골쇄신”의 죽음이란 뜻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해 죽었다는 비유적 표현인 것이다. 유신의 “소원부”에서 “不暴骨於龍門”이라고 표현하며 “暴骨”(폭골)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또한 분골쇄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글은 소통하기 위해서 쓰여진다. 글이란 문맥상에서 그 의미가 찾아지는 것이고. 소쉬르의 언어구조주의 등 언어이론 등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지 않는가? 학문의 자유라고 해서 양심의 자유까지를 버리고 진리 탐구를 멈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 모르면 서로 토론을 통해서 그 틈을 메꿀 수가 있다. 노자도덕경 제4장의 의미가 그것이다. “하늘의 도는 매우 넓으니 어찌 크지 않겠는가? 대화와 연설의 말 속에 오묘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 있으니, 이렇게 하여 모든 분쟁이나 어려움을 풀 수 있지 않을까!” “天道恢恢 豈不大哉 談言微中 亦可以解紛”(史記, 滑稽列傳序).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기피하고 대신 완사적인 표현을 쓰는 것 아닌가?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쓴다. 사람은 오로지 단 한 번뿐인 죽음을 맞이하는데 어느 누가 죽음을 가볍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粉骨(분골)은 “粉身碎骨”의 준말 즉 목숨도 아끼지 않고 가벼이 여길 만큼 목숨 바쳐 헌신하다는 뜻-不惜生命이다. 남제서(南齊書) 왕승건(王僧虔)전에 “粉骨衛主 殊勛異績 已不能甄 常階舊途 復見侵抑” 구절이 보이고 자치통감 양무제 기사 중 “臣寧堪粉骨 報命讎門”이 나타나고, 또 소철의 편지 중에 “洗心改過 粉骨報效”의 표현이 나타나는데 분골은 모두 이와 같은 뜻이지, ‘뼈가루를 날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粉(분)은 밀가루로 되듯이 분쇄(粉碎)하다의 뜻이니, 粉身碎骨(분신쇄골) 분골쇄신(粉骨碎身)은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깨어지도록 노력하다 또는 그와 같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다는 獻身(헌신)을 비유하는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문무왕 671년 7월26일 기사[3] 가운데, “粉身碎骨 望盡驅馳之用 肝腦塗原 仰報萬分之一”(분신쇄골 망진구치지용 간뇌도원 앙보만분지일) 구절이 나온다: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번역문은 국편위).
肝腦塗原은 肝腦涂地(간뇌도지)와 같은 말으로써 아까운 죽음 惨死(참사)를 말한다. 간과 뇌 즉 해골이 들판에 너덜려져 있다는 뜻으로 사기 유경전에 나오는 문장인데, 죽음을 불사하며 희생을 감내하는 것을 말한다. 낱말 뜻 그대로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좋다는 정도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각오를 다지며 전심전력을 다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粉身碎骨(분신쇄골)의 뜻과 같은 말이다. 粉身碎骨 望盡驅馳之用 肝腦塗原 仰報萬分之一, 분골쇄신-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깨어지도록 그렇게 목숨 걸고 충성을 다하고, 구치지용-있는 힘을 다해 분주히 뛰어다니며 쓰여진 임무를 다하고, 간뇌도원-목 말라 간과 뇌가 들판에 내버려질 정도가 되어도 생명을 아끼지 않고, 만분의 하나라도 갚고자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미로 번역되는 이 구절을 국편위는 어떻게 번역했는가?
粉骨鯨津 嗣王允恭
“粉骨鯨津 嗣王允恭”의 구절을 번역한다면 ‘분골쇄신한 경진씨를 이어받은 왕으로서 진실로 믿을 만하고 공경에 받기에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왜 이렇게 믿음과 공경에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는가? 그건 장이적신과 그 어떤 것-신진화전 영광불멸-의 깊은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문무대왕이 바로 그것에 어울리는 케이스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아 정말 그렇구나!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는 평가가 아니겠는가? 문무대왕 비록 그의 몸은 갔지만 그의 위대한 정신은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라는 마땅한 선언인 것이다.
하늘의 도는 매우 넓으니 어찌 크지 않겠는가? 대화와 연설의 말 속에 오묘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 있으니, 이렇게 하여 모든 분쟁이나 어려움을 풀 수 있지 않을까! “天道恢恢 豈不大哉 談言微中 亦可以解紛”(史記, 滑稽列傳序).
금은 모래밭 속에 함께 섞여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세상에서 날카로움을 감추고 얽힌 실타래는 풀어가며 서로 화해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삶의 태도는 화광동진(和光同塵), 노자도덕경 제4장의 “解紛”(해분)의 의미를 깨우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粉骨鯨津
“粉骨鯨津”(분골경진)의 표현은 문무왕의 아버지 김춘추는 전쟁에서 기꺼이 몸바쳐 희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분골쇄신의 경진씨’를 이어받은 왕-사왕(嗣王)으로서 문무왕은 允恭(윤공)하다 즉 진실로 믿음직스럽고 공경스럽다. 분골쇄신한 무열왕처럼 아버지 무열왕을 이어서 분골쇄신한 문무왕임을 의미한다.
鯨津(경진)은 유신 애강남부에서의 “大則有鯨有鯢 小則為梟為獍”(대즉유경유예 소즉위효위경) 구절의 의미를 참조하고, 고래 鯨(경)은 바닷물고기 중 가장 큰 물고기임을 볼 때 큰 고래 大鯨(대경)으로 바꾸어서 표현할 수 있다. 介鲸(개경)은 대경(大鯨)을 뜻하는 말이다. 당 유우석의 답조가에 “介鯨得性方逍遙 仰鼻噓吸揚朱翹”의 표현이 나오는데 개경은 대경과 같은 뜻이다. 또 동해상 큰 파도를 東海鯨波(동해경파)로 칭하는 것을 볼 때 鯨(경)은 큰 대자하고 같은 뜻으로 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7세기 후반 일본의 내전 당사자들인 大津皇子 大海人皇子 등 이러한 성씨 이름에 나오는 大海人(대해인)이나 大津(대진)의 문자 뜻이 큰 바다를 건너는 나루터 漢津(한진) 큰 나루터 鯨津(경진)의 의미하고 서로 통한다. 大津(대진)과 鯨津(경진)이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진 말임을 볼 때 신라 문무왕이 일본 왜국을 점령하고 통치하였다는 감추어진 역사가 곧 현실로 들추어 날 것이다.
여기의 “粉骨鯨津”(분골경진)의 鯨津(경진)은 비문 앞면 3행의 “鯨津氏”(경진씨)를 지칭하는 사람이름에 해당한다.
비문앞면 3행에서는 “鯨津氏”(경진씨)라고 호칭하며 氏(씨)라는 경칭을 붙였는데 비문뒷면 명 부분 이 구절에서는 “氏(씨)”가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명의 4자 글자 수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故孔氏之訓可資釋氏”라는 구절에서처럼 공자 석가를 공씨 석씨로 쓸 수 있다.
한편 사람을 지칭하는 명칭에 꼭 씨자의 경칭을 붙여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자의 신불멸론의 문장에서 “수인씨”를 씨자를 생략해서 “수인”으로 쓰고 있는 것처럼 가능하면 줄여서 써도 의미가 확연하게 통하는 경우 줄여서 쓴다. “若待薪然後有火 則燧人之前 其無火理乎”. 燧人氏(수인씨)는 인류 최초로 불을 발명하였다는 인류의 조상으로 혹자는 삼황의 위치에 놓고 추앙되는 그런 신격화된 인물에 속하는데, 때론 “燧人”(수인)으로 쓰고 있음을 참조하라. 幼學瓊林에서는 유소씨 수인씨 복희씨 성인 모두를 씨를 빼고 쓰고 있음이 발견된다. “有巢構木為巢 而民知居處 燧人鑽木取火 而民知飲食”. 한비자의 다음 예문에서도 씨를 빼고 줄여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有聖人作 鑽燧取火 以化腥躁 而民悦之 使王天下 號之曰燧人氏”. (한비자, 五蠹).
이와 같이 이해하면 비문뒷면 명 부분에서의 鯨津(경진)은 비문앞면 3행의 “鯨津氏”(경진씨)를 지칭하는 인명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粉骨鯨津(분골경진)은 ‘분골쇄신의 경진씨’이라고 해석된다. 여기의 鯨津(경진)은 문무왕의 선왕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지칭하는 인명의 의미인 것이다.
“粉骨”(분골)은 粉身碎骨(분신쇄골)의 준말이다. 粉骨鯨津(분골경진)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기꺼이 국가를 위해서 충성과 헌신을 다한 경진씨-태종무열왕 김춘추’ 이와 같이 번역된다. 그러므로 “粉骨鯨津”(분골경진)을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이와같이 번역한 국편위의 해석은 크게 잘못된 번역임이 바로 확인된다.
嗣王允恭
嗣(사)는 繼承(계승)의 뜻이고, 后嗣(후사)라고 말하면 자손(子孫)를 뜻한다. 嗣王(사왕)은 선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선왕의 후계자 왕-繼位之王을 뜻한다. 공영달의 소에 “云嗣王某 言此王繼嗣前王而立也”으로 설명하고 있듯이, 새로이 건국한 왕이 아니라 전왕의 지위를 승계받은 왕-繼承王位을 말한다. 嗣子(사자)에 관한 묘지명의 일반적인 표현이 “嗚乎哀哉 某月 葬於某原 嗣子某官” 이런 양식으로 표현되는데 사람은 죽어도 자기를 이어받는 후손이 있기에 인류 문명은 영원이 이어가지 않는가?
상서 요전에 “允恭克讓”, 공자가어의 “昔 堯 治天下之位 猶允恭以持之 克讓以接下”, 한서 서전하(敘傳下)의 “太宗穆穆 允恭玄默”, 위지 견초전에 “曹公 允恭明哲 翼戴天子” 등의 예문이 보인다. 克讓(극양)은 자신을 억제하고 남에게 잘 양보하다-能謙讓의 뜻이다. 玄默(현묵)은 清靜無為, 無事의 뜻으로 설명된다. 允은 앞서의 윤무윤문의 뜻에서와 같이 신실(信實)하다, 마땅하다 公平得當의 뜻이고 允은 믿을 信(신)으로 풀이되고, 恭(공)은 恭敬하다 공손하다 정중하다의 뜻이니, 允恭은 信實(신실)하고 공경(肅敬)스럽다 마땅하다 恭勤(공근)의 뜻으로 해석된다.
嗣王允恭(사왕윤경)의 뜻은, 粉骨鯨津(분골경진)-분골쇄신한 경진씨-선왕인 태종무열왕(先王金春秋)을 지칭함-를 이어받은 왕으로서 신실하고 공경스럽다.
因心孝友
因心(인심)은 모전에서 因(인)을 親(친)으로 풀이하고 있고, 인심은 인애지심이 깊은 것 親善仁愛之心(친선인애지심)을 뜻한다. 仁愛(인애)는 사람이 어질고 자애롭다는 뜻이다. 구당서에 “當履運而承天 則因心而追往 此先王之明訓 聖人之茂典也” 구절이 나온다.
孝友(효우)는 우리들이 흔히 쓰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다’는 말의 한자 표현이다. 부모를 잘 모시고 받드는 것-事父母孝順, 그리고 형제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우애가 깊은 것-兄弟友愛가 우리의 전통적 윤리관이었다. 모전에 “善父母為孝 善兄弟為友”의 구절, 당나라 한유가 쓴 묘지명에 “以聰明孝友為父母所偏愛”(이총명효우위부모소편애)의 구절이 보인다.
‘문무왕이 태종무열왕의 후계자로서 그 왕위를 이어받을 왕으로서 정말 믿음직스럽고 마땅히 공경받을 만하다’는 말을 바로 앞의 구절에서 표현했는데, 인심효우(因心孝友)는, 그런 국왕다운 국왕으로서의 문무왕의 사람됨과 그 근본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를 파고 들어가 본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기 때문이라는 그 이유를 말한 표현이다.
孝友(효우)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다’는 말의 한자 표현이다. 부모를 잘 모시고 받드는 것을 事父母孝順(사부모효순)이라고 말하고, 형제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우애가 깊은 것을 兄弟友愛(형제우애)라고 말하는데, 이 모토가 우리의 전통적 윤리관이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열매를 맺었던 전쟁시대의 영웅이었다. 전쟁은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를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특수한 시간적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전장터에 나서면 누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 아무도 몰랐다. 중세의 흑사병 전염병이 휩쓸 때처럼 말이다. 한편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깊은 의미를 이해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죽음은 부활의 의미를 새기게 만든다. 재회와 부활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러온다. 견우와 직녀의 재회의 만남이 부활과 미륵 신앙으로 직결되는 이유가 죽음과 삶의 동전의 양면 야누스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재회의 기쁨은 실재한다. 영국여왕의 연설[4]이 말해주듯, 재회의 믿음이 있기에 삶의 의미를 찾으며 따라서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삶의 투쟁과 삶의 희망이 솟아난다.
因心孝友 罔
허흥식은 21행 마지막 罔 이 글자를 “罔”(망)의 글자로 판독하였는데, 유희해를 비롯한 다수의 판독자는 “冈”(강) 글자로 판독하였다. 강(冈)글자는 산등성이 산마루의 山岡(산강)을 뜻하는 글자이다. 반면 罔(망)은 無, 没有, 없다는 뜻의 글자이다.
罔(망)은 고대에는 그물 어망(魚網)을 뜻하는 “网”자와 같은 뜻으로 쓰였고, 冈(강)자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허흥식의 판독을 따라서 罔(망) 글자로 판독하고, 그러면 우리들이 흔히 글의 마지막에 축복을 기원하는 마무리 표현으로써 “망극호천”이나 “만수무강”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흔함을 볼 때 이런 罔極(망극)의 뜻이 여기에 적절한 표현으로 추측할 수 있다. 罔極(망극)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는 뜻으로, 사마천의 사기 태사공자서에 “受命于穆清 澤流罔極”- 황제의 은택(恩澤)은 끝없이-罔極 흐르고 있다는 표현이 있고, 한서 동중서전의 “朕獲承至尊休德 傳之亡窮 而施之罔極”의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에 대한 안사고 주는 “罔亦無也 極 盡也”으로써 망극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 “망극”이란 말은 자식이 부모에 대한 끝없는 애사곡 父母(부모) 無窮哀思(무궁애사)를 표현하는 말이다. 송나라 왕우칭의 묘갈명에 “豈惜一言 不慰罔極之心乎”이 표현이 있다. 한편 망극은 옳지 않다는 不正(부정)의 뜻도 있는데 이 사례는 가의의 조굴원부(吊屈原賦)의 “遭世罔極兮 乃殞厥身”-굴원은 무도한 세상 부정한 세상을 만나 끝내 스스로 몸을 던져 운명했으니- 표현이 있다.
망친에 대한 애도의 표현을 담은 시경 蓼莪(료아)편에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父兮生我 母兮鞠我…欲報之德 昊天罔極.” 鞠(국)은 키워주신 양육(養育)을 뜻한다. 이 구절의 의미는, ‘아버지 날 낳아주시고 어머니 날 길러 주셨네.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가 저 높푸른 하늘에 끝없이 넘쳐 흐르리.’
또 망극(罔極)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因心孝友冈 “의 결자부분은, 송사 악지(樂志)에 나오는 “孝思罔極 丕佑無疆”의 구절의 의미대로, “罔極丕佑”으로 메꾸고 볼 수 있다.
여기의 孝思(효사)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한없다는 효경부모, 효친지사(孝親之思)를 뜻하는 말이고, 丕佑비우는 크게 도와 주소서의 뜻이다. 그러므로 罔極丕佑(망극비우)는 ‘저 끝없는 하늘처럼 영원토록 후손들을 보살펴 주소서.’
하지만 유희애의 판독대로, “因心孝友冈 “의 결자부분의 “冈”으로 글자 판독은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冈 - 冈(金甌甌 永保)鴻名
문무왕이 태종무열왕의 왕위를 물려받고 위대한 영웅이 된 이유가 바로 “因心孝友”(인심효우)에 있다고 비문 찬자 김소경은 결론짓고 있다. 영웅적 인물인 문무대왕을 후손 만대가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자자손손 유전되어-流傳下去, 문무대왕의 큰 이름이 자손만대에까지, 높은 산의 바위처럼, 남산위의 소나무처럼, 영원히 알려지리라-永不磨滅, 이렇게 선언하고 또 그것을 부탁하는 문장으로써 결자부분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생각이다.
因心(인심)은 親善仁愛之心(친선인애지심)의 뜻 즉 仁愛(인애)와 같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씨를 뜻하고, 孝友(효우)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다’는 뜻 즉 부모를 잘 모시고 받드는 것과 형제 사이에 서로 우애가 깊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유희애의 판독대로 因心孝友冈 이 보다 적절한 판독으로 보인다.
“冈”은 풍수지리학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 지맥의 支(지)를 뜻한다. 물길을 찾을 때 용맥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백두대간(幹)에 수많은 지맥이 분파되는데 수많은 산등성이에서 평지로 내려오는 물길에 支龍(지룡)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산맥의 지파의 의미는 인간사회에서의 의미로는 자손이 번창해서 성경의 아브라함의 축복대로 지구의 끝까지 자손이 뻗어나가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많은 가지가 뻗어나가서 영웅적 인물 문무왕을 모든 세상이 알게 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문장으로 이해된다.
통일 왕국을 건설한 위대한 영웅적 인물 문무왕의 이름이 무궁토록 전해진다는 것은 국가가 존속되어야 하는 조건을 담보한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국가가 계속 안정되고 계속 번창해 나가기를 기원하는 말인 “金甌”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다.
甌(구)는 작은 컵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金甌(금구)는 金屬酒器를 뜻하는 단어이고 또 비유적인 의미로는 국토, 國土完整(국토안정)의 뜻이 있는 단어이다. 남사 朱異(주이)전에 양무제가 한 말 “我國家猶若金甌 無一傷缺”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여기의 금구는 국토가 견고 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금강석이 나오는 높고 깊은 산처럼 국가가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믿음을 전하고 있는 말이다. 甌甌永固(구구영고)는 컵이 줄줄이 늘어선 모양처럼 영원하다는 뜻이다. 묘지 속에 금구를 넣어둔 것은 구구영고의 믿음과 소망의 뜻이 들어 있다.
嶔 뽀족이 솟은 탑처럼 높은 산을 嶔(금)이라고 말한다. 저 하늘높이 우뚝 솟은 바윗돌처럼 영원하여라의 뜻을 지닌 표현이 담겼다고 새긴다면 岡崟/(嶔)玉葉/(甌甌)의 글자 표현을 쓸 수 있다.
비문 20행 번역 정리
이상과 같이 비문 20행의 구절 표현 내용을 살펴본 바, 이 20행의 구절은 4자 띄어쓰기 구조로 비문을 재정리하고 이 행의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嚴命凝眞 貴道賤身 欽味釋縛 葬以積薪 (薪盡火傳) 穀神不死 靈光不滅[5] 粉骨鯨津 嗣王允恭 因心孝友 岡
아버지의 엄한 분부-엄명을 진실로 이루었네.
도를 중하게 여기고, 자기 몸은 천히 여기셨네.
나라를 위해 희생한 그 뜻을 존경하고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불을 태워 화장식으로 장례식을 치르었네
나무는 타고 나서 재가 되어도 불은 다시 타오르듯이 인간의 정신은 자자손손 면면히 이어간다네.
신진화전처럼 곡신불사처럼 인간의 정신은 꺼지지 않고 영원하다네.
목숨을 돌보지 않고 기꺼이 몸바쳐 충성을 다한 분골쇄신의 경진씨-태종무열왕 김춘추-를 이어받은 왕으로서 정말 믿음직스럽고 공경스럽네.
그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까닭이리라.
(저 높은 산의 우뚝 솟은 바위처럼 영원무궁토록 문무왕의 그 큰 이름이 자손만대까지 전해지소서!)
이 구절을 4자 띄어쓰기 구조로 끊어서 번역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嚴)命凝眞 | 아버지의 엄한 분부-엄명-유훈을 진실로 이루었도다 |
貴道賤身 | 도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 가르침을 높게 받들어, 자기 몸은 천히 여기셨구나! |
欽味釋(縛) | 나라를 위해 희생한 그 뜻을 존경하고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
葬以積薪 | 나뭇단을 쌓고 불을 태워 화장식으로 장례식을 치르었네 |
(薪盡火傳) (穀神不死) |
땔나무가 불타고 나서 그 형체가 사라진다 해도 불은 다른 나무에 옮겨 붙어 불씨를 계속 이어가듯이, 사람의 정신과 전통은 다음 세대에게 영원히 전해진다. 씨앗은 다시 되살아나니 영원하다네 |
(靈光不)滅 | (비록 몸은 사라진다고 해도) 신비스럽게 빛나는 정신과 마음은 꺼지지 않고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지리라! 고귀한 정신이 스며들어 있는 뛰어난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으리라! |
粉骨鯨津 | 목숨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몸바쳐 헌신하고 충성을 다한 분골쇄신의 경진씨(태종무열왕 김춘추) |
嗣王允恭 | 그 선왕 경진씨(태종무열왕)를 이어받은 왕으로서 정말 믿음직스럽고 공경스럽도다! |
因心孝友 | 그 까닭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기 때문이리라 |
岡(金甌甌 岡(金玉葉甌甌 永保)鴻名 與天長兮地久 | 사랑과 형제애는 황금처럼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히 닳지 않고 단단하니, 자손만대까지, 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히 빛나리라!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와 한없이 오래된 지구와 같이! |
비문의 명 부분은 원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餘下拜之碣迺爲銘曰 o o o」
▨▨侍星精▨▨▨▨▨▨▨▨▨▨▨▨▨▨▨▨▨
▨▨▨域千枝延照三山表色盛德遙傳」
▨▨道德像棲梧▨▨▨▨▨▨▨▨▨▨▨▨▨▨
▨▨▨▨允武允文多才多藝憂入呑蛭尊」
▨▨九伐親命三軍▨▨▨▨▨▨▨▨▨▨▨▨▨▨▨▨ ▨威恩赫奕茫茫沮穢聿來充役蠢」
▨▨欽風丹甑屢出黃▨鎭空▨▨▨▨▨▨▨▨▨▨▨ ▨雄赤烏呈灾黃熊表崇俄隨風燭忽」
▨▨命凝眞貴道賤身欽味釋▨葬以積薪▨▨▨▨▨▨ ▨滅粉骨鯨津嗣王允恭因心孝友冈」
▨鴻名與天長兮地久 o o o oo o o o o o o o o」
위 명 부분을 4자 띄어쓰기로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侍 星精▨▨ ▨▨▨▨ ▨▨▨▨ ▨▨▨▨ ▨▨▨▨ ▨▨▨域 千枝延照 三山表色 盛德遙傳」
▨ ▨道德像 棲梧▨▨ ▨▨▨▨ ▨▨▨▨ ▨▨▨▨ ▨▨▨▨ 允武允文 多才多藝 憂入呑蛭 尊」
▨▨九伐 親命三軍 ▨▨▨▨ ▨▨▨▨ ▨▨▨▨ ▨▨▨▨ 威恩赫奕 茫茫沮穢 聿來充役 蠢」
▨▨欽風 丹甑屢出 黃▨鎭空 ▨▨▨▨ ▨▨▨▨ ▨▨▨雄 赤鳥呈灾 黃熊表祟 俄隨風燭 忽」
▨命凝眞 貴道賤身 欽味釋▨ 葬以積薪 ▨▨▨▨ ▨▨▨滅 粉骨鯨津 嗣王允恭 因心孝友 冈」
▨鴻名 與天長兮地久 ooo o o o o o o o o o」
위의 4자 띄어쓰기를 결자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侍 星精 … 域 千枝延照 三山表色 盛德遙傳」
道德像 棲梧
… 允武允文 多才多藝 憂入呑蛭
尊 九伐 親命三軍 … 威恩赫奕 茫茫沮穢 聿來充役
蠢 欽風 丹甑屢出 黃▨鎭空
… 雄 赤鳥呈灾 黃熊表祟 俄隨風燭
忽 命凝眞 貴道賤身 欽味釋
葬以積薪 滅 粉骨鯨津 嗣王允恭 因心孝友
冈□□□ □□鴻名 與天長兮地久
비문뒷면 21행
□□□□□□□□□□□□□鴻名與天長兮地久
岡(岡而久照) /岡金玉葉 永保)鴻名 與天長兮地久 |
사랑과 형제애를 황금처럼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히 닳지 않고 단단히 하여라 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히 빛나리라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와 한없이 오래된 지구와 같이! |
통일 왕국을 건설한 위대한 영웅적 인물 문무왕의 이름이 무궁토록 전해진다는 것은 국가가 존속되어야 하는 조건을 담보한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국가가 계속 안정되고 계속 번창해 나가기를 기원하는 말인 “金甌”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다.
甌(구)는 작은 컵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金甌(금구)는 金屬酒器를 뜻하는 단어이고 또 비유적인 의미로는 국토, 國土完整 국토안정의 뜻이 있는 단어이다. 남사 朱異(주이)전에 양무제가 한 말 “我國家猶若金甌 無一傷缺”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여기의 금구는 국토가 견고하고 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금강석이 나오는 높고 깊은 산처럼 국가가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믿음을 전하고 있는 말이다. 甌甌永固(구구영고)는 컵이 줄줄이 늘어선 모양처럼 영원하다는 뜻이다. 묘지 속에 금구를 넣어둔 것은 구구영고의 믿음과 소망의 뜻이 들어 있다.
신라 당시는 봉건 시대였으니 부모자식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형제애 직계와 방계간의 결속 일가의 단합이 중요시되었다. 인류 보편적인 부자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우애는 오늘날까지 인간 사회의 행복을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보루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岡□□□”의 내용을 金枝玉葉(금지옥엽)의 뜻으로 보충할 수 있다. 岡(강)은 支(지)맥의 뜻으로 새길 수가 있기 때문에 金岡(금강)은 금지(金枝)로 새길 수 있다. 枝와 支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청나라 진몽뢰의 싯구에 “玉葉宗支貴”이 나오는데 이를 참조하면 그렇다. 玉葉(옥엽)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① 아름다운 나뭇잎을 표현하는 말 ② 양간문제의 《詠云》의 “玉葉散秋影”에 나오듯이 운채(云彩)를 은유하는 말 ③ 玉牒(옥첩)과 같은 말로써 황족(皇家譜系) ④ 당나라 소방의 《享太廟樂章》에 “金枝繁茂 玉葉延長” 구절이 등장하는데, “玉葉宗支貴”의 표현의 예처럼 황가자손을 ⑤ 당 원진의 싯구 “解拈玉葉排新句”에서와 같은 뛰어난 재질의 종이 優質箋紙를 ⑥ 명당(明堂)의 처마 당첨(堂檐)을 ⑦ “從臣觀玉葉 方愿紀靈符” 구절에서와 같은 궁전을 뜻한다. 玉葉(옥엽)은 이들 뜻에 더해서 ⑧ 당 낙빈왕의 “忘筌玉葉開” 싯구에서와 같은 의미인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 友誼深篤의 뜻을 갖는 말이다. 금지옥엽(金枝玉葉)은 오늘날까지 귀한 자식이나 또는 왕족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이 금지옥엽의 뜻을 살핀다면, 새로이 세운 나라가 영원무궁토록 강고하게 존속되고 또 자손들이 번창하게 뻗어나가서 형제애로써 더욱 결속하여 나라가 더욱 단단해질 것을 염원하는 소망을 담은 표현으로써, 비문 20행의 끝과 21행 시작 구절 사이의 “岡□□□”의 내용을 보충하는 말로써 金枝玉葉(금지옥엽)을 쓸 수 있다.
岡而久照
‘무궁토록 빛나라’의 의미에 어울리는 시구절을 찾아보면, 당나라 흘간유의 시 “海日照三神山賦(以耀輝相燭 珠庭燦然為韻)”에 나오는 “崇岡而久照”(강이구조)의 의미가 여기에 어울린다.
鴻名
鴻名(홍명)은 큰 이름 큰 명성 큰 명예를 뜻하는 말로 大名, 高名 대명이나 고명이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사마상여전에 “永保鴻名”(영보홍명) 표현이 나오는데, “前聖之所以永保鴻名而常為稱首者用此”-‘이전의 성군이 머무르는 곳이 영원토록 큰 명성을 보전하고 언제나 최고 인물로 일컬어지게 됨은 이로 인해서이다’-이라는 이 구절의 의미를 따라서 “ 鴻名”의 결자 부분을 “千秋萬代 永保鴻名”(천추만대영보홍명)으로 메꾸어 볼 수 있다.
永保鴻名-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토록 남으리라. 天長地久-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또 영원하리라!
與天長兮地久
“天長地久”(천장지구)는 세월은 가도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는 뜻으로 노자도덕경 제7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이 진리의 말씀이 너무 진부해져서인지 오늘날에는 오히려 그 심오한 뜻이 가려지고 만다는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山高水長”(산고수장)의 깊은 의미가 있는 말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듯이, 또 보통사람들은 시장에 가서 콩나물값은 조금 깎으려고 하지만 500조가 넘어가는 나랏돈 일년 예산의 쓰임새에는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또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2의 이해에는 머리를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영원하다 우주 천지가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자기 혼자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 도덕경 제7장 구절의 영어 번역을 옮기면, The universe is long lasting. The reason that it lasts for long is because it doesn't live for itself.
노자의 분석과 같이, 성인은 자기 혼자 살려는-자생(自生)- 이기심이 없는 무사(無私)함으로써 불로장생할 수 있다. 우주만물은 서로 주고 받고 맞물려 돌아 가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 하늘은 높고 땅은 넓다!
님은 가고 하늘도 침묵하지만,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고 말하며 재회의 약속을 믿는 까닭은 꽃이 피고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도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칠월 칠석날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가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되듯이 우리 민족의 종교 사상의 기초인 것 그 까닭의 배경은 “재회”와 “부활”의 믿음에 있다.
兮
兮(혜)는 문장 연결조사이고 감탄사로 쓰인다. 혜의 표현법은 초사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아마도 사람의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초사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 혜(兮)라는 낱말의 쓰임새가 들어가는 것에 있다.
혜(兮)자에는 “더불어”라는 뜻이 들어 있지 않다. 국편위는 “兮地久”을 “땅과 더불어 오래리”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틀린 번역이다. 이 문장에서 여(與)자와 혜(兮)자는 문장을 끝내면서 “천장지구”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을 하는 문언조사, 감탄조사에 해당한다.
“천장지구”라는 말이 묘지명에도 흔히 쓰이는 상투어구에 가깝다 보니까 문언조사를 넣어서 새롭게 가다듬은 것이고 또 그와 같이 문미에 쓰여서 감탄사 기능의 조사를 첨가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천장지구는 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영원하다는 의미로써 高山流水(고산유수)와 같은 표현이다. 하늘과 땅은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 수백만 년 전부터 존재했기에 그 얼마나 유구한 존재이며 또 그와 같이 앞으로 얼마나 몇 백만 년을 더 갈 것인지 그 누가 산술계산이나 할 수 있을텐가? 그만큼 영원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우린 기껏해야 백년도 못 사는 한갖 미물임이랴! 하늘과 땅 앞에서 할 말이 없지 않는가? 다만 엎드려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 밖에!
항우가 천하쟁패에 실패하여 영벽의 절벽에서 생의 마지막을 절감하면서 읊은 “垓下歌”(해하가)의 외침 한 마디에도 그 표현이 들어 있다. “虞兮虞兮奈若何”: 고민되네, 고민되네, 내 어찌할꺼나? 여기서 虞(우)는 憂慮(우려), 고민, 걱정된다는 뜻의 낱말이다. 항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결단의 순간에서 머뭇거리며 읊었던 “To be or not be”,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에 대한 사생결단의 순간에서 주저없이 살아남은 후손들을 위해서 자기 희생의 결단을 내렸다. 왜 항우는 권토중래를 위해서 도강을 하지 않았을까? 충분히 강을 건넜을 수도 있었으면서도.
사마천은 항우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고 평가했는데, "글은 사람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면 된다-“書足以記名姓而已”-고 여기고서 천하를 무력으로 정복하려던-“欲以力征 經營天下”- 자기 인식의 부족함을 깨달아서였을까? 왜냐하면 항우는 “권토중래”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의 방법론을 두고서 직면한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자결을 택했기 때문이다. 항우의 자기 희생의 결과 항우의 나머지 집안 식구들은 유방의 한나라 황실로 편입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항우는 패자로서 자기 희생의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천하 쟁패의 실패에 대한 스스로의 잘못 人事(인사)의 책임을 진 것은 물론이고.
천의인가? 인사인가?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To be or not to be”의 결단을 요구 받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與
與여는 더불어, and, 和,同의 뜻이 있고, 이런 예에 生死與共이 있다. 한편 與(여)는 歟(여)와 같은 글자 의미로써 문미(文尾)에 쓰여 의문, 반문, 감탄을 나타내는 어기조사(語氣助詞)로 쓰이기도 한다. 논어 학이편에 이런 예문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자.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溫 良 恭 儉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공자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면 으레껏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공자께서 요구해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거기 사람들이 먼저 알아서 여쭙어 본 것입니까?- 求之與 抑與之與- 공자가 자애롭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에서 그런 정치에 관한 일을 들은 거겠지요. 공자께서 그것을 먼저 요구했다 해도 아마도 다른 사람이 요구한 것과는 달랐지 않았겠어요?-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이 문장에서의 抑은 억압하다는 뜻이 아니라 ‘혹은,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문장 접속사로 쓰였다. “求之歟 抑與之歟?”- 요구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쪽에서) 먼저 준 것인가요? 이와 같은 예문과 같이, 여기서 與는 and, 和, 더불어의 뜻으로 쓰인 말이 아니라 歟여의 뜻으로 의문을 나타내는 표시의문 어기조사語氣助詞로 쓰였다.
21행 요약 정리
“與天長兮地久”(여천장혜지구) 이 말을 국편위는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라고 번역 해석했는데, 이건 문장연결조사 감탄조사로써의 與와 兮의 의미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어색한 번역에 해당된다. 혜兮자에는 “더불어”라는 뜻이 들어 있지 않고, 이 문장에서 여與자와 혜兮자는 문장을 끝내면서 “천장지구”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으로써 문언조사, 감탄조사에 해당한다. 천장지구는 ‘하늘과 땅은 유구하고 영원하다’는 뜻으로 그 단순한 낱말 의미를 넘어서서 노자 정치종교철학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노자도덕경 제7장에서의 “천장지구”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고 새기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永保)鴻名-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토록 (천추만대까지) 남으리라. 與天長兮地久-하늘과 땅은 유구히 존재했고 또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
21행
鴻名- (千秋萬代 永保)鴻名 |
문무대왕 그 큰 이름 영원토록 (천추만대까지) 남으리라 |
與天長兮地久 | 하늘과 땅은 유구히 존재해왔고 또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 |
비문 뒷면 22행
卄五日景辰建碑 大舍臣韓訥儒奉
卄五日景辰
景(경)은 情況(정황), 상황을 뜻하는 말로 年景, 景象 등의 말이 있다.
辰(진)은 辰日(진일)을 말하고 吉日良辰(양진길일)이라는 말과 같다. 유자산의 주사원구가에서의 “日至大禮 豐犧上辰” 표현이 상진을 길일이라고 보는 것을 말해준다.
상진을 양진(良辰)이라고도 말하고 이 길일(吉日)의 표현하는 말로 佳辰(가진)이 있다. 송나라 응천장(應天長) 사에 “恁好景佳辰”이라는 표현이 나오니, 비문에서의 “景辰”은 “景佳辰”의 의미이다. 삭(朔) “卄五日”(25일)이 길일에 해당되었다.
음력 682년 7월 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682년 9월 2일이 되는데 이 날은 농력으로 丙辰(병진)일이었다. 따라서 경진(景辰) 길일에 해당되었다.
평양 남쪽 남포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 길일길시를 택일하는 5세기 초 당시 풍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음을 참조하라.
1976년 발견된 남포 덕흥리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벽화 묵서에는 묘지의 방위각과 길지를 택하고-相地(상지), 길일을 택하고-擇日(택일), 좋은 시간대까지 정해 고르는-時選(시선)을 행하는 매장 풍습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
“周公相地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良” 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공 공자 무왕은 풍수지관을 경칭으로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번역은 “묘지를 고르고 또 묘 쓰는 날짜와 그 시간까지를 길일로 택해서 모두 한결같이 좋았다”는 의미이다. 또 이 구절의 앞에 나오는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乙酉” 묵서의 구절은 60갑자 세차 즉 목성의 공전주기 12년에 기초한 역법을 쓰는 태세신앙을 말해주는데 태세신앙은 곧 지신 신앙에 해당한다. 태세 지신은 목성의 운행주기를 따라 움직이고, 따라서 묘지나 건축 공사 등을 할 때 방위와 택일을 크게 중요시한 신앙이었다. 예전에는 건축 공사 등은 물이 흐름과 대지 기반 그리고 기상 여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 일이었으므로 방위 선택과 택일 선택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문무왕릉비의 건립 연도 추정
유희애는 다음과 적었다: “善德王陵下開耀元年金 撰名缺韓訥儒書碑斷損令存殘石四片案東國通鑑新羅文武王金法敏武烈王長子龍朔二年立開耀二年七月薨諡曰文武在位二十年”. 유희애는 문무왕릉비 건립 연도를 “開耀 元年” 개요원년 즉 681년-682년 사이에 비를 세웠다고 기재했다. 문무왕이 개요2년에 薨훙 서거했다고 적어 두었는데, 이 역사적 사실은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구당서 본기권5 고종하 개요원년 681년 10월 기사를 보자.
“冬十月 丙寅朔 日有蝕之 乙丑 改永隆二年為 開耀元 曲赦定襄軍及緣征突厥官吏兵募等 丙寅 斬阿史那伏念及溫傅等五十四人於都市 丁亥 新羅王金法敏薨 仍以其子政襲位”.
개요원년 음력 10월달 정해일은 농력 서기 681년 10월 22일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7일이 된다. 개요원년 동10월 정해일에 신라왕 김법민이 서거했고 그의 아들 정이 왕위를 이었다고 적혀있다. 681년 음력 10월 10일은 양력으로 11월 25일 乙亥(을해)일이 된다. 따라서 문무왕릉 비문의 10월 10일에 장례식을 치르었다는 구절은 구당서의 문무왕 서거일자와 실제로 거의 비슷한 날짜가 된다.
그날 눈발이 날렸다는 해석 또한 한국에서 첫눈이 내리는 계절이 대체로 11월말경 또는 12월초 경이 되므로 당시의 기상 기후와도 거의 일치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기록한대로의 “屬纊之後十日”(속광지후십일) 즉 7월 1일 운명했으므로 7월 10일이 문무왕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이 아니라 겨울철 음력 10월 10일이라고 합리적인 추측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문무왕릉 비문의 “其月十日”(기월10일)은 681년 음력 10월 10일로 추측된다.
당시 당나라 연호의 한해 시작은 10월 상달에 시작되었으므로, 요사이의 정월에서 12월 달력식으로는 햇수가 겹치게 보일 수 있고 또 재정이 시작되는 시기나 또는 계절 학기가 시작되는 시기가 태양력과 달랐다는 당시의 사정 때문에 훗날 사서 작성시 한 두해 차이가 나기 쉽다. 문무왕이 개요2년 즉 682년에 서거했다는 사실은 당나라에서 문무왕의 공식적인 국장 거행 시기에 당나라에서 조문 사절단을 파견했다는 그런 사실에 근거할 것 같다. 이런 구당서의 사서 기록에 의거하여, 나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문무왕의 장례식 날짜를 삼국사기에서 기재한대로의 7월 10일이 아닌, 10월 10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영호의 판독문은 삼국사기의 문구를 그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신빙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영호가 제시한 결자부분을 보충하는 문장 내용은 그 문장의 글자수가 비문에서 표기가능한 범위의 글자수를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고 또 이런 측면에서도 삼국사기가 기재한 문무왕의 유언문이 조작되었음을 시사해준다.
□□□□□□□□□□終成一封之上樵牧哥其上狐兔穴其傍
徒費資財貽譏簡牘空勞人力莫濟幽魂靜而思之傷痛無已如此之類非所樂焉屬纊之後依西國之式以火燒葬即以其月十日大
위와 같은 제시문은 52자이므로 비문에 새길 수 있는 최대 가능 글자수 44자를 훨씬 초과하는 문장이 된다. 따라서 이영호의 제시문은 그 근거가 미약하고 또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떻게 추사 김정희는 문무왕릉비 건립 연도를 잘못 추정하였을까? 앞에서 어떻게 추사 김정희는 비 건립 연대를 설명해 내는데 오류를 범했는지를 그 이유를 밝혀내는 설명을 기술했는데 그 부분을 참조하라.
建碑 大舍臣韓訥儒奉
왕릉비석을 건립한 날짜를 적고 있는데, 그 부분은 마멸되고 떨어져 나가고 없어져서 정확하게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 卄五日景辰”으로 적고 있다. 삭朔 25일 경진 길일에 이 비를 건립하다. 12관등 대사직 신하 한눌유가 명령을 받들어 완수하다.
建碑
건비 다음의 결자 부분은 立廟饗祭입묘향제라는 표현이 적절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문무왕대에 지었다는 천왕사가 입묘향제의 사실을 입증해 줄 것이다. 진서 양‐羊祐양우전에 “平生遊憩之所 建碑立廟 歲時 饗祭焉 望其碑者 莫不流涕 杜預因名為墮淚碑”의 표현이 나온다. 歲時세시는 일변 사계절을 뜻하는 단어이다.
大舍
대사는 관등명으로 隋書(수서) 東夷傳 新羅에 보면, 신라 관등 체제에서 제12위에 속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 신 김 “이라는 관등성명의 기술 양식에 비추어 본다면 “대사 신 한눌유 봉” 이 글자 앞의 공간에 관직명이 들어 갈 있을 개연성이 높기는 하나, 비문을 비석에 새긴 “대사 신 한눌유”의 관직 명이나 출신부가 어떤 것인지는 이 부분이 결자 또는 비어 있는 공간 부분이어서 정학하게 알 수는 없다.
진흥왕 순수비 중 마운령비에 나타난 수행명단 기록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데, 대사라는 관직이 무슨 업무를 담당하였는지 대강 추측할 수 있다.
진흥왕의 국경 순찰 행차에 수행한 사람들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마운령 순수비
관직(직업) | 출신부 | 이름 | 관등 |
사문도인 沙門道人 | 법장 法藏, 혜인 慧忍 | ||
대등 大等 |
훼부 喙部 |
거칠부지 居朼夫智 | 이간 伊干 |
내부지 內夫智 |
이간 伊干 |
||
사훼부 沙喙部 | 영력지 另力智 |
잡간 迊干 |
|
훼부 喙部 |
복동지 服冬知 |
대아간 大阿干 | |
비지부지 比知夫知 | 급간 及干 |
||
미지 未知 (급진부지 及珎夫知) |
대나말 大奈末 (나말 奈末) |
||
집가인 執駕人 |
훼부 喙部 |
방혜 方兮 · |
대사 大舍 |
사훼부 沙喙部 |
영지 另知 |
대사 大舍 |
|
이내종인 裏內從人 | 훼부 喙部 |
몰혜차 沒兮次 |
대사 大舍 · |
사훼부 沙喙部 | 비호지 非尸知 |
대사 大舍 |
|
약인 ?人 |
사훼부 沙喙部 | 위충지 爲忠知 |
대사 大舍 |
점인 占人 |
훼부 喙部 |
여난 與難 |
대사 大舍 |
약사 藥師 |
마지차 䔍支次 |
소사 小舍 |
|
나부통전 奈夫通典 | 본피부 本?部 | 가량지 加良知 |
소사 小舍 |
▨▨ | 본피부 本?部 | 막사지 莫沙知 |
길지 吉之 |
급벌참전 及伐斬典 |
훼부 喙部 |
부법지 夫法知 |
길지 吉之 |
이내 ○ 裏內 |
명 名 | 길지 吉之 |
|
당래객 堂來客, |
50 | ||
이래객 裏來客 |
|||
외객 外客 |
|||
○○ | 지 智 | 사간 沙干 | |
조인 助人 |
사훼부 沙喙部 | 순지 舜知 |
나말 奈末 |
奉
奉(봉)은 드리다, 바치다의 奉上(봉상) 뜻으로 명령을 받들어 모시고 그 주어진 임무를 삼가 수행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侍奉(시봉)하다는 누구의 시중을 들다는 뜻이고, 奉祠(봉사)는 祭祀(제사), 奉祀(봉사)는 제사를 받들고 모시다 供奉祭祀(공봉제사)의 뜻이다.
비문 22행 요약
卄五日景辰建碑 | 25일 경진 길일에 이 비를 건립하다 |
大舍臣韓訥儒奉」 | 12관등 대사직 신하 한눌유가 명령을 받들어 완수하다 |
신라 17관등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등수 | 이름 | 가능한 신분 |
1 | 이벌찬(伊伐湌) | 진골 |
2 | 이찬(伊湌) | |
3 | 잡찬(迊湌) | |
4 | 파진찬(波珍湌) | |
5 | 대아찬(大阿湌) | |
6 | 아찬(阿湌) | 6두품 |
7 | 일길찬(一吉湌) | |
8 | 사찬(沙湌) | |
9 | 급찬(級湌) | |
10 | 대나마(大奈麻) | 5두품 |
11 | 나마(奈麻) | |
12 | 대사(大舍) | 4두품 |
13 | 사지(舍知) | |
14 | 길사(吉士) | |
15 | 대오(大烏) | |
16 | 소오(小烏) | |
17 | 조위(造位) |
후기
공자의 春秋(춘추)와 西狩獲麟(서수획린)
공자는 춘추로써 공자가 되었다. 춘추가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어찌 공자가 있을 수 있었을까? 춘추하면 공자요 공자하면 춘추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孔子曰 後世知丘者以春秋 而罪丘者亦以春秋: “후세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또한 춘추 때문일 것이다.”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나는 하늘도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는 자는 아마도 하늘이 아니겠느냐.
춘추의 마지막 구절은 “西狩獲麟”(서수획린)이다. 서수획린은 공자의 절필지운이기에 더 이상 공자에게 그 의미를 직접 물어볼 수 없다. 그런데 이 마지막 춘추의 구절을 두고서 2천년이 넘도록 오늘날까지 부지기수의 학자들이 그에 대한 해설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완전하게 해석해내는 이가 없다.
공자가 타계하기 전 3년부터 춘추의 역사서를 쓰기 시작하다 한 사건이 일어났다. 노나라 왕이 서산에 사냥을 갔다가 기린을 잡았다는 그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을 보고서 공자는 슬퍼하면 “吾道窮矣”(오도궁의)라는 말을 남기고, 2년 후 죽을 때까지 더 이상 글을 쓰질 못했다. 서수획린은 공자의 절필지운이 된다. 대개 “내 도가 다했다”라는 공자의 마지막 글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해설서를 시도해 왔는데 쟁쟁한 유학자들 가운데도 시대에 따라서 각기 다른 해석을 낳고 있다. 주역에서 말하길, “積善餘慶”(적선여경)-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는 경사스런 일이 생기고, “泣麟傷鳳”(읍린상봉)-기린을 보고 울고 봉황을 보고 슬퍼한다. 사람은 각기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각자 사정에 따라서 해석이 달리 하거나 달리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춘추좌씨전의 “古之遺愛也”(고지유애야)의 해석대로,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그것을 말해준다. 니이체가 자신의 묘비명으로 적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영원하다”.
절필지운
서수획린의 의미를 나의 문무왕릉 비문의 해석에 적용해 보자. 서수획린에 대한 해석에서 각자의 경험과 각자의 지식과 각자의 믿음에 따라 자신들의 각주와 해설을 달을 뿐이고, 공자는 언제까지나 침묵한다. 죽은 이의 유언의 진실은 그가 불완전하게 남겼다고 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결코 온전하게 해석해 내지 못한단 말인가? 모두는 청개구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비가 오면 울어 제치기나 하는 청개구리의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공자가 서산에 지고 사라졌다고 해서 그의 글들은 봉해져야할 만큼 올바른 해석이 영영 불가능하다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공자가 비록 다 쓰지 못하고,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가 이미 남겨놓은 수많은 글들이 살아 있고 또 그와같이 춘추의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자가 전달하려고 한 그의 참뜻을 해석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문무왕릉비 비문 중에 현재 남아 있는 파편은 전체 비문 가운데 매우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해석할 수 없는 절필지운이라고 여기고 그에 대한 해석 작업을 더 이상 해내지 못한다고 여기고 그저 손을 놓아야 할까? 그건 아니다. 비록 적은 부분일지라도 아직도 남아 있는 부분이 존재하고 또 그러하기에 다른 수많은 역사서들을 참조하고 동원하여 어느 정도 정확한 복원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손인 우리들의 의무이고 몫이다. 문무왕의 선조가 남겼던 공자의 춘추 해석은 추연이 남겼던 공자의 춘추 해설서처럼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공자의 춘추는 좌씨춘추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등 이 3가지 춘추가 남아 있기 때문에 비록 100%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가진 지식과 추리력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복원 작업이 가능하다.
나는 문무왕릉비 비문 연구와 첨성대 연구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 것이다. 세잔느가 자신의 사과 그림 하나로 전 유럽을 강타할 것이라는 대담한 선언처럼. 그리하여 천지개벽의 새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진실로 기대한다.
왜 공자도 진시황제도 한반도로 이민을 오고자 했을까?
삼국사기는 보장왕조에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집의 문을 닫음이 없고, 부인이 지조가 굳고 믿음이 있어 음란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데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가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한 것이다. 또 천성이 유순하여 3방(三方)과 달라서 공자(孔子)가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려고 하였던 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원문은 다음의 문장이다. “論曰 玄莬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 田蠶 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위 국편위 번역에서 “변두”는 대나무 죽기를 말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요사이 스시 초밥 먹듯이 대나무로 만든 깨끗한 죽기 밥그릇을 이용해서 깨끗하게 음식을 차려 먹는 뜻인데, 상징적인 의미로는 깨끗한 제삿상을 차려 먹는다 즉 조상들에게 제사를 반듯하게 드리며 선조를 공경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갖고 있다는 뜻을 갖는다. 三方(3방)은 삼면 서쪽 남쪽 북쪽의 지방을 지칭한다. 한반도는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는 군자의 나라이기에 남서북쪽의 오랑캐족속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반도가 얼마나 무릉도원이었는지는 진시황제도 인정했고 그에 앞서 성인군자의 대명사 공자도 인정했다는 사실로써 입증된다. 공자도 진시황제도 이민을 오고 싶어했던 신선이 사는 지상낙원 금수강산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이런 말을 처음으로 지어냈을까? 그게 아니었다. 똑같은 한문 문장이 북송 977-984년에 편찬한 “太平御覽”(태평어람) 조선전에 기재되어 있다. 또 1071-1086년에 편찬된 “資治通鑑”(자치통감) 원봉3년(BC 108) 12월 기사에도 전재되어 있다.
또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도 똑 같은 원문이 적혀 있다. 따라서 김부식은 한서 지리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논(論)했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 왜냐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문장은 한서에서 그대로 훔쳐온 표절이고 조작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기의 생각을 적은 글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었다. 자기의 탐구된 견해가 아니라 한서 지리지의 문장 그대로 훔쳐온 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와 삼국사기 원문 비교
한서는 BC 206년 한나라가 수립된 해부터 전한이 망한 왕망의 신조 AD 23년까지 230년간의 전한의 역사를 반고가 편찬한 공식적 역사서이다. 다음과 같은 漢書 地理志 해당 문장을 보자.
“玄菟 樂浪 武帝時置 皆朝鮮 濊貉 句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為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為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飲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樂浪海中有倭人 分為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삼국사기나 한서는 똑같은 한문으로 쓰여진 사서이다. 보라, 김부식의 사론은 한서 지리지를 그대로 표절하고 조작했음이 즉시 확인되지 않는가?
삼국사기 vs 한서 지리지
삼국사기 | 한서 지리지 |
玄莬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 田蠶 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 玄菟 樂浪 ... 皆朝鮮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 犯禁八條 …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飲食以籩豆 … 吏見民無閉臧 …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
태평어람 | 자치통감 |
《漢書·地理志》曰 玄菟 樂浪 武帝時初置 皆朝鮮 獩貊 勾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 織作 樂浪 朝鮮 民犯禁八條 如淳曰 有其四 其四不見 相殺以當時償殺 相傷者以谷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娶無所仇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不淫辟 其田民飲食以邊豆 都邑頗放效 吏及內郡賈人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藏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相犯禁浸多 致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之不行 乘桴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 | 班固曰 玄菟 樂浪 本箕子所封 昔箕子居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為民設禁八條 相殺 以當時償殺 相傷 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娶無所售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野飲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桴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
김정희는 어떻게 기존의 황당무계한 설을 물리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는가?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신라 진흥대왕순수비)는 추사김정희가 밝혀내기 이전까지는 무학대사 왕심비(枉尋碑)[6], 고려시대의 도선국사비[7], 또는 몰자비(沒字碑)[8] 등으로 알려졌다. 추사는 1816년 7월에 북한산 비봉을 답사하고 나서 그때까지 무학대사비문으로 알려져왔던 비문이 실제로는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내고 금석학의 기여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부했다.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밝혀져 격파)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9]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김정희의 회고를 보다 자세히 인용하면 각주와 같다.[10]
일러두기
1. 책의 저자 추홍희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영미판례법국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호주 변호사가 되었으며, 뉴사우스웨일즈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러한 저자의 교육 배경과 실무와 학교 내외에서 쌓은 지식의 배경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학술 연구 조사 능력을 축적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2. 이 책을 씀에 있어 저자가 한문 원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서술하거나 인용하는 경우는 《漢語大詞典》《康熙字典》《辞海》 한어대사전과 강희자전과 사해 중국어 사전을 주로 이용하였다. 또 《新华字典》《现代汉语词典》 등의 중국어 사전 또는 간혹 일본어 漢和 사전을 참고한 적은 있으나, 한국에서 출판된 옥편이나 중국어 사전 등은 참조하지 않았다. 다수의 汉典 인터넷 사이트가 한자 사전의 편리한 검색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이 책 속에서 한문의 뜻을 설명하거나 번역이나 해석함에 있어서 인용한 사전에 들어 있는 원문의 해당 페이지 쪽수는 밝히지 않고 생략했다. 다음의 사전 검색 사이트 등을 이용하고 참조하였다. http://www.ivantsoi.com/; http://www.hydcd.com/; https://www.zdic.net/; http://hy.httpcn.com/.
3. 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고 또 이 책을 완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자료는 일본 와세다 대학 도서관의 1853년 유희애의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 그리고 중국에서 출판된 《唐大詔令集》《文選》《二十四史》 등이었다.
4. 道敎(도교)에 대한 이해는 노자 장자 문자 열자 등의 원전과 설명서를 탐독했고, 학문적인 연구서로써 기본서는 《Daoism Handbook》《The Encyclopedia of Taoism》을 완독하고 연구서들을 섭렵했다. 이들 자료들은 각주로 상세히 밝혔다. 사전은 《道敎小辞典》《道敎大辭典》을 활용하였다.
5. 와세다 대학의 《海東金石苑》에서 결정적 단서를 찾았고, 《Daoism Handbook》을 읽으면서 도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높이게 되었으며, 《The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을 읽으면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반악과 장재와 유신의 문장들을 《昭明文選》《庾開府集笺注》을 통해서 읽고 또 《前漢書》와 《晉書》와 《周髀算經》 등을 읽고나서 저자의 책의 시작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6. 사마천의 史記, 반고의 漢書, 방현령의 晉書는 《二十四史》를 이용하였다. 사마광의 資治通鑒은 柏杨白话版资治通鉴과 한국의 고전문헌번역DB를 참조하였다. 三洞瓊網을 포함 道藏도장은 正統道藏 정통도장을 참고하였다. 또 이런 자료들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 등 인터넷 제공 소스를 활용하였다.
저작권 지적 재산권
저자 추홍희는 이 책의 독창성과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은 저작권법상의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누구라도 저자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어떤 형태로도 임의로 인용하거나 복제할 수 없다.
© 추홍희 2020
[1] 이백의 명당부에 “欽明”흠명이라는 말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한글 주해를 참조하라, “欽明(흠명): 공경하는 마음으로 엄숙하게 살핀다. [王] 《상서⋅요전》에 “공경한 마음으로 살피고 지혜와 덕을 가졌다.”라고 했는데, 공안국전에 “‘흠’은 공경한다는 뜻이다.”라고 했고, 정현이 말하길, “공경하고 아끼는 것을 ‘흠’이라고 하고, 사방을 비추어 살피는 것을 ‘명’이라고 한다.”라고 했다.(《書⋅堯典》: “欽明文思.” 孔安國傳: “欽, 敬也.” 鄭玄云: “敬事節用謂之欽, 照臨四方謂之明.”)”, 예추이화, “李白 文 譯註” (서울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 문학박사 학위논문), (2018), 102쪽.
[2] 굴원의 초사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문학과 역사와 우주천체물리학의 결합적 측면을 생각해 보라. 또 빌 게이츠가 주도하는 “Big History” 프로젝트를 생각해 보라.
[3]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下十一年.
[4] “We will be with our friends again. We will be with our families again. We will meet again.” 2020년 코로나 전염병 사태를 맞이하여 극복의 의지와 희망을 피력한 연설문 중.
[5] 薪盡火傳 靈光不滅, 땔나무의 형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불은 다른 나무에 옮겨 붙어 불씨를 계속 이어가 꺼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지듯이, 비록 몸은 사라진다고 해도, 신비스럽게 빛나는 정신과 마음은 꺼지지 않고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이 아닌가!
[6] 김정희, “此碑人無知者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7] 조인영의 “雲石遺稿” 중 僧伽寺訪碑記, “北漢之南 有僧伽寺 其上峯曰碑峯 自京師雲從街迤北 見峯顚一柱 兀然如人立 俗傳麗僧道詵碑 今沒字云 歲丙子秋 秋史金元春語余曰 吾上吾上碑峯 碑有殘字 實新羅眞興王碑也”.
[8] 당고종 건릉의 述聖記碑 술성기 비문이 훼손되었고, 무측천 武則天(624-705)의 비문은 아예 모두 지워져버린 속칭 무측천의 無字碑무자비 상황을 참조하라.
[9]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
[10] 국편위 번역,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compare.do?treeId=010604&levelId=hm_111_0070.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 ……(전략)……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병자년(1816년, 순조 16) 가을 내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마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 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 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마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 해인 정축년(1817년, 순조17) 여름에 또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隷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완당집』권1, 고, 진흥이비고.
……(前略)…… 此碑人無知者,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 嘉慶丙子秋, 余與金君敬淵游僧伽寺, 仍觀此碑. 碑面苔厚, 若無字然, 以手捫之, 似有字形, 不止漫缺之痕也. 且其時日簿苔面, 映而視之, 苔隨字入, 折波漫撇, 依俙得之, 試以紙拓出也. 體與黃草碑酷相似, 第一行眞興之眞字稍漫, 而婁拓視之, 其爲眞字無疑也. 遂定爲眞興古碑, 千二百年古蹟, 一朝大明, 辨破無學碑弔詭之說. 金石之學, 有補於世, 乃如是也.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 其翌年丁丑夏, 又與趙君寅永同上, 審定六十八字而歸, 其後又得二字, 合爲七十字. 碑之左側, 刻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 又以隷字刻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阮堂集』卷1, 攷, 眞興二碑攷.
'저서-------- > 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무대왕릉 비문 연구-제2권-비문뒷면-차례 (0) | 2022.08.18 |
---|---|
『역사 혁명』 책 주요 요약 (0) | 2022.05.24 |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제5행-제19행 (0) | 2022.05.24 |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해석 (0) | 2022.05.24 |
인류의 지식 체계과 전승의 문제 (0) | 2022.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