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해석
문무왕릉비 비문 뒷면 해석
1행
▨▨▨▨▨▨▨▨▨▨▨▨▨▨▨▨▨▨丸山有紀功之將以」
“▨▨▨丸山有紀功之將以”은 ‘높은 산에 공적 기념비를 새길만한 큰 무공을 남긴 장군’라는 뜻이다. 명산대천에 공적비를 새기는 의미에 대해서 진시황제의 순수비 그리고 북한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을 참조하라.
丸山有紀功之將
丸山(환산)은 험하고 높은 산이라는 뜻이고, 丘山(구산)과 같은 말이다. “丸山阻順”(환산조순)의 구절이 당고종 건릉비 술성기에 나온다. 丸山有紀功之將(환산유기공지장)은 환산에다 공적을 기록할 정도의 높은 공을 쌓은 사람 그 장군 장수 將(장)이라는 뜻이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공적을 세워 놓았던 진시황제의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 같은 성격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산유기공은 丘山之功(구산지공)과 같은 뜻이다. 한나라 진림의 글에 “故乃建丘山之功 享不訾之祿” 구절이 나온다. 訾(자)는 계량(計量) 형량(衡量), 메저(measure)의 뜻이니 享不訾之祿(향불자지록)은 ‘헤아리기 어려운 큰 복록과 명예를 누리다’의 뜻이다. 높은 산에 기념비를 새길 수 있을 정도로 큰 공적을 남겼으니 영원한 영예를 누리시라는 이런 의미가 丸山有紀功之將以 이후의 결자 부분에 이어지는 문장의 내용으로 추측된다.
“▨▨▨丸山有紀功之將以”은 ‘높은 산에 공적 기념비를 새길만한 큰 업적을 남긴 장군’라는 뜻이다.
▨▨▨▨▨▨▨丸山有紀功之將以▨▨▨▨▨▨
진시황제의 순수비나 진흥왕의 순수비같이 높고 험한 산에다 기념비를 새길 정도로 큰 공을 세운 장군 즉 국가를 지켜내고 나라를 통일한 神佑國統(신우국통)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높은 그의 공적을 분명히 적어서 마땅히 후세들에게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이런 뜻의 구절이 여기에서 읽혀진다.
1행
원문 |
번역 |
(결자부분 내용 추측 보충) | |
丸山有紀功之將 | 높은 산에 기념비를 새길만큼 큰 무공과 커다란 업적을 남긴 장군 |
以 - -以(功於神佑國統 觀之分定而 享不訾之譽) |
(강토를 지켜내고 전국을 통일한 神佑國統신우국통의 헤아릴 수 없이 높은 문무왕의 큰 공적을 분명히 적어서 마땅히 후세들에게 전한다) |
비문 뒷면 2행
2행
□□□□□□□□□□□□□直九合一匡東征西□□□□
2행의 국편위 번역은, “곧바로9주를 일광(一匡)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
直九合一匡東征西」[1]
이를 4자 띄어쓰기로 재정리하면,
直 九合一匡 東征西□
(長驅進)直 장구진직
直 결자부분을 메꿀 수 있는 문맥상 의미가 통하는 표현을 찾아보면, “長驅進直”이라는 의미의 표현이 적절한 구절로 들어갈 수 있다. 長驅進直(장구진직)은 파죽지세로 거침없이 쳐들어가다, 승승장구하다의 뜻으로 長驅直入(장구직입)과 같은 말이다. 파죽지세로 쳐들어가서 그 다음 이어지는 표현인 “九合一匡구합일광하고 東征西 동정서벌” 했다는 의미가 된다.
九合一匡 구합일광
九合一匡(구합일광)은 一匡九合(일광구합), 一匡天下(일광천하)하고 그 뜻이 같은 말이다. 일광천하는 建立霸業(건립패업), 立國大事(입국대사)를 뜻하니, 나라를 일으켜 세운 그 큰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 관중이 제한공(齊桓公)을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관중의 공적을 “一匡天下 九合諸侯”이라고 기술했다. 九合(구합)은 多次會盟(다차회맹)을 뜻한다. 논어 憲問헌문에서 “桓公 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으로 기술했는데, 형병(邢昺)은 “言九合者 史記云 兵車之會三 乘車之會六”으로 풀이했다. 九合의 의미에 대해서 사기에서 제환공 때 제후들간의 군사 회맹을 세 번 했고, 편하게 수레 타고-乘車승거- 모인 회합 즉 평화 회합이 여섯 번 있었다는 역사를 인용하여 9번이나 모인 회맹 즉 여러 번의 회합을 가르키는 말로 풀이된다. 兵車(병거)는 군사 작전용 수레를 뜻하고 乘車(승거)는 우마뒤에 부인이나 노약자들을 태우는 수레를 뜻하니 전자는 군사회맹을 후자는 평화 회담을 의미한다. 전쟁회맹보다 평화회합을 두 배나 많이 했으니 그 공은 관중에게 있다고 관중을 높이 산 것이다.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 사람들은 대체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선호한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제환공을 보좌한 관중은 상업중시자이니만큼 기본적으로 도가에 속한다. 하지만 관중은 그의 정책이 실용주의자였던 만큼 어느 한 쪽으로 일방적인 치우침이 없었다. 비록 공자는 관중을 인자(仁者)라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유가에서 관중을 유가로 분류하려고 시도하였다.
一匡(일광)은 匡正(광정)을 이룬 것을 말한다. 양나라 임방의 상주문에 “伐罪吊民 一匡靖亂”의 표현이 나온다. 匡正(광정)은 糾正(규정), 改正(개정)을 말하니 요즈음의 말로 바꾸면 개혁(改革)이고 유신(維新)이고, 경장(更張)이다.
위의 설명을 통해서, 九合一匡(구합일광)은 “九合諸侯 一匡天下”의 줄임말임이 도출되므로, 이 구절은 ‘혼란하고 불안정한 시국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국편위가 “九合一匡”을 “直九合一匡”으로 보고 “곧바로 9주를 일광(一匡)하고” 이같이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고 잘못되었다는 점이 확연히 들어난다. 九合은 “9주”를 말한 것이 아님은 위의 설명을 통해서 명백하게 밝혀진다.
구합일광의 맨 처음 패권을 이루어냈던 제환공이 그 공은 관중에게 있다고 평가한 것처럼 관중은 탁월하고 출중한 국정담당자였다. 문무왕 또한 왕위에 오르기 전에 담당했던 국정 업무가 太宰府(태재부) 재상이었다. 태재부는 현재 정부 기관으로 치면 재무부장관에 해당한다. 문무대왕은 관중처럼 실용주의자로서 국가 재정을 튼튼히 쌓아 올렸던 것이고 그 바탕 위에서 삼국통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東征西 동정서벌
동정서벌 東征西伐인가? 西征北討 서정북토인가?
東征西伐(동정서벌)은 동쪽과 서쪽의 나라들을 정벌(征伐)했다는 뜻이다. 征伐(정벌)은 무력을 동원하고 군사 작전을 펼쳐서 실력으로 외국을 제압했다는 말이다. “東征西▨” 결자 부분은 상식적으로 “동정서벌 東征西伐”이라는 표현으로 쉽게 추측된다. 그런데 이 문무왕릉 비문 표현을 삼국사기에서는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삼국사기에는 “西征北討”으로 기록되어 있다. 西征北討는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의 뜻이다. 삼국사기 보장왕 기사에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舉滅之 或以爲 大軍東征 …”으로 적고 있다. “648년 6월 (음력),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다, 황제가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하였다고 하여 명년에 30만 무리를 동원하여 한 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대군이 동으로 정벌하려면 모름지기 한 해를 견딜 식량을 준비하여야 하고, 가축과 수레로는 실어 나를 수 없으니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서남북의 국경을 비문에서 분명하게 나누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라. 비문 앞면 해석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는데, 비문에서 동거, 남린, 서승, 북접이라고 기술하며 동서남북의 방향을 엄격히 구분하고 국경을 기술하고 있음을 다시 상기하라.
진흥왕 순수비에도 나오는 문장 표현이고 평양 남포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도 적혀 있는 “태세 신앙”은 방향감각을 매우 중요시한다. 왜 동남쪽을 중시하는가? 지구의 자전과 천체의 기울기하고도 연관이 되어 있는 문제이다. 조선 땅이나 평양은 본시부터 우리 선조의 땅이기에 굳이 별도로 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을 괴롭힌 주요 적들은 서쪽의 갱족과 북동쪽의 흉노족속이었고, 남동쪽의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서쪽 침입자들이었고, 동남쪽의 왜인들이었다. 서정북토나 동정서벌을 외국을 정벌했다는 뜻에서 거의 의미의 차이가 없는 말이긴 하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의 성격에서 본다면 그 차이는 확연하게 구분되기도 한다. 수나라의 그것과 수나라를 엎고 일어선 당나라의 정벌사는 차이가 나타난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국사 편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국가의 전쟁 참전 기록을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고 또 조작했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는 국경의 확정에 대한 기사들은 아예 깡그리 제외시켜 버렸다. 진흥왕 순수비에서 분명하게 명시해 놓은 국경선과 그 범위를 깡그리 무시하고 빠트려 놓은 삼국사기의 국사 편찬의 배경과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한자는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언어의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Chinese written characters have remained essentially unchanged for more than 2,000 years”, (National Geographic, December 1999, Forum).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게재된 위와 같은 독자 투고란의 의견이 흥미로웠다. 2천년 전의 사마천의 시대 당시나 2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거의 똑같은 한자로 소통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시대도 한문 원문을 쓰는데 왜 1천년 전 삼국사기를 편찬할 고려시대 때에 한문 원문을 빠트리고 달리 조작한단 말인가? 오랑캐 족속들과 김부식 도당이 저지른 국사 조작과 망작의 폐해가 여실히 드러난다. 삼국사기의 조작과 망작임을 마침내 입증해 낸 필자의 작업의 처음은 삼국사기의 기술이 왜곡되었다는 울분을 참지 못해서 단기필마로 뛰어들고 시작되었다. 손빈은 다리를 잃고 전쟁이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자 불후의 손자병법을 썼고, 굴원은 유배당하고 나서 인구에 회자되는 명문장 이소부를 지었으며, 유신은 적국에 사로잡혀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자 불멸의 명문 애강남부를 썼다.
누군가 글은 어둠을 밝히는 횃불과 같다고 말했는데, 사마천이 열거하듯이 춘추전국시대 난세 때 제자백가가 탄생하고 난세 때마다 명문들이 나타났지 않았는가?
2행 요약
□□□直- (長驅進)直 |
파죽지세로 거침없이 쳐들어가서, 승승장구했다. |
九合一匡 | 혼란하고 불안정한 세상을 수습하고 분열된 국가를 통일했다. |
東征西□- 東征西(伐) |
동쪽과 서쪽의 나라들을 군사 정벌했다. |
비문 뒷면 3행
▨宮前寢時年五十六」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宮前寢時年五十六」 결자부분에 들어갈 내용을 추측해 메꾸어 본다면,
(하늘의 뜻을 받아 근본을 지켜 내고자, 평생 올곧은 생각을 견지하고, 세상일에 초연하면서, 오로지 지극정성으로 득도하여, 하늘의 뜻을 실천하려는 큰 뜻을 품고), 적폐로 피폐해진 바깥 세상을 바르게 펴고자, 친히 동정서벌 무력원정을 나서면서, (바람결에 머리를 말리고 눈비로 몸을 씻으며, 차가운 밥 먹으며 따뜻한 방 안에서 편히 자보지도 못했는데) 아아!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하늘도 무심하지요! (문무대왕께서 소나무 우거진) 행궁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문무대왕의 나이는 향년 56세이었습니다.
▨宮前寢
正寢정침-壽命終結正寢
국편위는 “ ▨宮前寢” 부분을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으로 번역했는데, 이런 해석은 크게 잘못되었고 큰 오류를 범했다. “□▨宫前寢”은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의 뜻이 아니다. “궁 앞채”라면 궁전이 아니라는 말인가? “궁 앞채”라면 궁전 앞의 민가라는 뜻인가? “궁 앞채”라는 표현이 우리말로 이해가 되는가? 문법에도 어법에도 맞지 않는 표현이지 않는가? 임금이 사는 곳이 “궁전”인데 무슨 생뚱맞게 얼토당토않게 “궁 앞채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正寢정침
壽終正寢(수종정침)이라는 말은 마지막 목숨을 자기 집 정실에서 거두었다는 의미이다. 正寢(정침)은 路寢(로침)이라고도 말한다. 춘추공양전에 나오는 구절의 의미와 같이, 路寢(로침)은 왕이 일을 처리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써 보통 사람들의 의미로는 자기 집의 거실(居室), 정실(正室)을 지칭한다. 자기 집에서 죽었다는 말은 병이나 다른 의외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자연사(自然死亡)했다는 말 즉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의미이다.
前寢(전침)은 “前朝後寢”(전조후침)의 표현을 연상시킨는데, 전조후침은 “風水寶地”(풍수보지) 즉 풍수상 최고 길지를 의미한다. 예기 월령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寢廟畢備 註 前曰廟 後曰寢 以廟 是接神之處 尊 故在前 寢 衣冠所藏之處 對廟爲卑 故在後”; 침(寢)과 묘(廟)가 다 갖추어졌다고 말하는데 그 중에 앞에 있는 것을 묘라 하고 뒤에 있는 것을 침이라 한다. 묘는 신과 접촉하는 곳으로 높기 때문에 앞에 있고 침은 의관을 보관하는 곳으로 묘에 비해 낮기 때문에 뒤에 있다.
前寢(전침)의 의미
전침과 정침의 의미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무왕릉비문에서의 “前寢”의 뜻을 해석해 보자. 비문에서의 궁전은 “□□▨宫前寢” 구절은 “前寢”(전침)이라고 말한 것은 “正寢”(정침)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정침이란 壽命終結正寢, 즉 자기의 평소 자던 침대에서 조용히 목숨을 거둔다는 것을 말한다.
“前寢”(전침)은 문무왕은 자기 집 즉 궁전의 정실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둔 “壽終正寢”(수종정침)을 하지 못하고 갑자기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떴다는 죽음의 원인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즉 자연사가 아니라 병이나 다른 의외의 사고사로 서거했다는 의미이다. 자연사가 아닌 병사나 사고사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비문 뒷면 제19행의 黃熊表崇 俄隨風燭 忽 -의 문장으로 보충 설명된다. 황웅표수아수풍촉홀 이 비문 구절은 ‘좋지 못한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를 알려 주는 황웅 귀신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바람 앞에 촛불이 꺼지고, 홀연히 (별빛이 떨어지더니 그만 운명하셨다)’ 뜻으로 육십갑자도 지나지 않는 56세에 ‘갑자기 서거했다’는 의미이다.
죽음의 원인- 자연사가 아니라 枉死(왕사)-사고사
사람의 영혼은 正寝(정침)이면 하늘로 승천한다는 죽음관이 지배하였다. 사람의 자연 수명은 백세까지 (실제로는 한 수 부족한 것으로 이해하므로 90세 이상을 사는 경우를 천수를 누렸다고 본다) 사는 그것을 천수라고 말한다. 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 억울한 죽음이라는 관념이 있는데, 백세를 살지 못하는 경우란 전쟁이 나서 죽거나 또는 전염병 역병 기타 질병으로 죽는 것, 또는 살해되거나 불의의 사고사를 당하는 경우이다. 정침이 아닌 불의의 사고사를 당하는 경우를 “枉死”(왕사)라고 부른다.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아가는 고독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따라서 억울한 개인적인 사고사를 당한 개인의 죽음이 공동체 전체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이 전체 사회로 번지는 것을 막는 어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노력을 기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침이 아닌 경우 인간수명이 90세라고 볼 때 백수를 누리는 것을 천수라고 볼 때 그 이전인 56세에 세상을 떠났다면 아마도 질병이나 사고사나 전쟁 등 불의의 사고사 흉사로 사망했음을 시사한다. 국가의 왕이 갑자기 홀연히 세상을 서거했다고 비문에서 말하고 있음으로 문무왕은 ‘殉職’(순직)에 해당한다.
공간적 개념
“前”은 앞뒤 전후(前後)관계라고 말할 때의 시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前전은 전면前面에 나서다, 전방前方 앞쪽에 무엇이 보이다 앞으로 나아가다 전진前進하다, 앞 길이 창창하다 전도前途유망하다 이런 쓰임새처럼 공간적 개념을 포함하는 前전은 시공간적 개념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비문 이 3행의 “宮前”은 궁자 전의 글자들이 마멸되어서 사라지고 “▨宮前寢”궁전침 이 글자들만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결자 부분을 보충하여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寢침은 잠자다 수면 睡하다 침실寢室 취침 就寢에 들다 휴식 平息을 취하다, 제왕의 분묘 陵寢릉침이라는 말의 뜻이 있다. 宫寢궁침은 제왕의 사는 궁전 宮殿, 제왕이 수면 휴식睡眠休息을 취하는 뜻의 단어이다.
離宮
이궁(離宮)은 수도 서울이외의 왕이 시간을 보내는 곳 즉 별장을 의미한다. “▨宮前寢” 부분의 결자 부분을 보충하여 추측 해석한다면, “(離)宮 前寢”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궁은 행궁行宮이나 營宮영궁이나 車營거궁 등의 다른 동의어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문무왕은 자기 집의 路寢로침 거실居室 정실正室에서 서거한 것이 아니라 휴가중인 별장-이곳은 문무왕의 장골처로 삼국유사에 기재된 경주 감포의 감은사와 이견대가 위치한 곳으로 해석된다-에서 갑자기 서거했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時年五十六
시년은 향년(享年)과 같은 말이다. “日前在睡夢中壽終正寢 享年九十” 같은 표현이 한 예이다. 五十六 글자 이후의 결자 부분은 향년 56세이었다의 뜻으로 “歲”글자일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꼭 세(歲)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세자 없이도 56세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기에선 “孔子年七十三 …卒”, “而孔子年六十矣”이라고 기록했다. 향년 몇세라고 흔히 표현하지만 향년이라는 미칭 또한 굳이 필기할 필요성은 없다. 유비가 죽음의 병상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50세를 넘기고 죽으면 요절이라고 부르지 않고 천수를 다했다고 여긴다. 享年은 누릴 향자이니 살만큼 살았다 즉 천수를 다했다는 뜻으로 쓰는 경사라는 의미를 상기하라.
문무대왕이 東征西伐동정서벌하면서, 바람결에 머리를 말리고 빗물로 목욕하며-櫛風沐雨 즐풍목우, 뜨거운 음식 대신 차가운 한식 먹어가면서 따뜻한 방은 커녕 야전침대에서 쪽잠을 자가며-食不暇飽 席不暇暖 그렇게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몸바쳐 살았는데 하늘도 무심하지요 이게 무슨 청천벼락과 같은 말인가요 대왕이 홀연히 승하하셨습니다.
3행 요약
(歲次辛巳) | 신사년 서기681년 |
(營)宮前寢 | 병영 막사 행궁에서 문무대왕이 갑자기 서거하셨다. |
時年五十六 | 이 때 향년 56세이었다. |
4행
□□□□□□□□□□□□□□□□牧哥其上狐兔穴其傍
땔나무군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碑文비문의 구조와 성격
비문 헤더에서 분명하게 “文武王”문무왕, “王陵”왕릉, “碑文”비문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문무왕릉의 비문은 상장례 예식의례에 속한다. 사람은 한 번 죽는다. 人必有一死. 비문 碑文은 誄碑, 誄文(뢰문), 哀祭文, 哀辞(애사), 哀策(애책), 祭文(제문), 吊文(조의문), 墓志銘(묘지명), 行狀(행장), 輓歌(만가), obituary, eulogy 종류에 속한다. 이런 부류의 글은 오로지 한 번뿐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고 문상하는 성격의 글이다.
묵자墨子는 “誄者 道死人之志也”, 순자荀子는 “其銘誄繫世 敬傳其名也”라고 말했다. “道志”와 “傳名”이라는 말이 일러주듯, 양나라 유협의 뢰비誄碑에 대한 글을 읽어보라. 망자의 살았을 때의 덕행德行을 널리 선양하는 것이 그 목적 아닌가? 공자가 말한 誄(뢰)는 죽음을 슬퍼하여 망자의 행적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570년 이전에 태어난 노나라 사람이다. 공자는 기원전 479년 나이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죽음에 대해서 노애공이 애도를 표한 제문 誄(뢰)문을 보자. 좌전 노애공편에 나오는 孔子誄 공자뢰 전문은 사마천의 사기에도 실려 있다.
夏 四月己丑 孔丘卒 公誄之曰 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屏余一人以在位 煢煢余在疚 嗚呼哀哉 尼父 無自律 子贛曰 君其不沒於魯乎 夫子之言曰 禮失則昏 名失則愆 失志為昏 失所為愆 生不能用 死而誄之 非禮也 稱一人 非名也 君兩失之
憖은 원愿意하다 損傷손상하다, 煢경은 홀로 남음 孤獨, 疚구는 심적 고통, 愆건은 죄과罪過를 뜻하는 낱말이다.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으셔서 이 늙은 한 노인을 남겨 두지 않고 데려가 버리고, 내 같은 못난 사람만 임금님의 자리에 앉혀 놓고, 홀로 되게 만들고, 그래서 마음의 고통만 안겨 주는구려. 아 슬프고 애통하다. 공자선생이여, 이제 내게는 중요한 법률 자문을 해줄 사람마저 없으니 난 어쩌란 말인가?
자공이 말했다. 임금님은 아마도 노나라에서 천수를 다해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공자님이 말씀하기를 예법을 잃으면 나라가 혼탁해지고, 명분을 잃으면 허물이 생기고, 대의를 잃게 되면 혼란이 생기고, 각자 제자리를 잃게 되면 죄과를 낳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살아생전에는 공자를 중용하지 못하고서 죽은 이후에 이렇게 애도를 표하는 것은 예에 합당한 것이 아니지 않겠어요? 그리고 (주나라 천자도 아닌 단지 제후왕에 불과한 노애공의 신분에 비추어) 자기 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으니, 임금님은 두 가지 잘못을 범한 것이 됩니다.
망자의 덕행을 칭송하고 후세에 전하는 내용이지 망자를 깎아내리고 비아냥거리는 비판이 비문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자아비판은 “죄기조”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가?
문무왕릉비 비문에서의 만가시, 장재의 칠애시, 망국지음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산과 골짜기도 변하고 인간세상도 변한다-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과 칠애시 관련성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구절인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구절의 표현은 인생무상을 노래한 장재의 七哀詩(칠애시)를 참조한 표현인 것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다음의 칠애시의 구절을 보라. 北芒何壘壘 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 皆雲漢世主 … 季世喪亂起 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 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 珍寶見剽虜 … 蹊徑登童豎 狐兔窟其中 … 昔為萬乘君 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 悽愴哀今古.
삼국사기의 유조문과 장재의 칠애시를 서로 비교해 보면 삼국사기 유조문의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은 장재의 칠애시 昔為萬乘君 今為丘中土의 5자 5자의 오언한시의 구절의 뜻을 6자 6자의 구절로 풀어 쓴 표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구절과 장재의 칠애시의 昔為萬乘君 今為丘山土 구절의 의미는 서로 같다. 삼국사기는 만승군 대신 ‘만기의 차량을 타고 호령하던 영웅’이란 뜻의 萬機之英(만기지영)으로 표현문구를 살짝 바꾸었으나 만기지영은 萬乘君(만승군)과 같은 뜻이므로 두 문장의 뜻은 서로 다르지 않고 같다. 만승군은 만승의 수레를 지휘하는 군대의 최고 지휘자 즉 천자 제왕을 지칭하는 말이다. 만기영(萬機英) 또한 천자 제왕을 지칭하는 말이니 둘 다 같은 의미가 된다. 삼국사기의 終成一封之土은 장재 칠애시의 今為丘山土의 표현과 그 의미가 서로 똑같다. 丘山土나 丘中土는 서로 같은 뜻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초목가기상호토혈기방) 구절은 문무왕릉 비문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문무왕릉비문의 파편에서 樵글자 부분은 떨어져 나가서 “□牧哥其上”상태인 바, 이 결자 부분의 글자가 “樵”글자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현재까지는 없다. 나는 “▨牧哥其上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 부분을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타난 표현인 牧兒(목아), 牧童(목동), 童牧으로 이해하여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문무왕릉의 비문 원문은 삼국사기의 표현대로의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이 아니라, 그 진실적 원문은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구절의 표현 글자 가운데 문무왕릉 비문 원문의 “▨牧哥其上 狐兔穴其傍” 구절의 글자를 서로 비교해 보면 한자 원문이 비롯 음과 뜻은 서로 같으나 원문 한자가 서로 다른 한자라는 사실을 상기하라. 문무왕릉 비문 원문의 구절은 “목동이 그 위에서 슬픈 애가를 부르니, 토끼와 여우마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번역된다.
결론적으로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의 만가사 부분의 구절 예컨대 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의 구절 등은 문무왕릉 비문 원문의 표현글자를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이고, 또 그 변형의 배경에는 장재의 칠애시의 蹊逕登童豎 狐兔窟其中와 感彼雍門言의 구절을 차용한 측면이 있다. 童牧哥其上의 표현을 삼국사기가 樵牧歌其上으로 바꾼 배경에는 칠애시 구절 感彼雍門言의 의미가 작동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雍門(옹문)은 최고의 거문고 악사로 알려진 역사적 인물인 옹문자주를 지칭하므로 옹문자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초목가기상의 표현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牧哥其上 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부분을 지금까지는 국편위의 번역대로 “樵牧哥其上 狐兔穴其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치 굳은 화석화되고 거의 정설화되어 왔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보다 깊은 천착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
삼국사기의 “樵牧歌其上”(초목가기상)이라는 어구의 표현은 초목동(樵牧童)이라는 주어 사람 童(동)이 없으므로 문법적으로 옳지 않은 표현이 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 童(동)이 생략된 표현으로 해석할 수가 있겠으나 그러면 싯구의 전체 맥락에서 이어진 경우에야 가능할 것이다. 초목가라는 표현은 당나라 시대 훨씬 이후인 송나라 서교徐僑(1160-1237)의 싯구절 “只有晚歸樵牧歌”에 나타난다. 칠애시의 저자 장재가 활동했던 위진남북조시대에선 童牧哥其上-‘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나라의 운명이 나의 운명임을 깨달아-感彼雍門言
예로부터 우리 삶은 ‘인생무상’이고 또 ‘국가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라는 공동체적 인생관을 많은 사람들이 가져왔다. 나라가 망하면 그 국민들은 노예로 잡혀 가거나 뿔뿔이 흩어져 유랑의 신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라가 망하면 자신 또한 죽는 것으로 여기는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왔던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인생관을 잘 알려주는 고사 하나가 맹상군과 옹문자주의 망국의 슬픈 노래 망국지음의 이야기인데, 이를 전하고 있는 유향(劉向)의 “說苑”(설원)의 기록을 잠깐 살펴 보지 않을 수 없다. 맹상군孟嘗君(?-BC 279)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서 역성혁명을 일으켜 전(田)씨왕조를 세운 사람이다. 雍門子周(옹문자주)는 당시대에 슬픈 거문고 음악을 연주하는 유명한 궁중악사였다. 맹상군과 옹문자주와의 음악에 대한 대화를 실은 설원의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세상의 식견 높은 사람들 중에 당신을 위해 마음이 아프고 코가 시큰거리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먼 훗날에는 사당에 제삿밥도 올리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고대광실은 무너지고, 구비친 큰 정원의 연못도 쉬이 흙으로 메워지며, 높은 무덤 또한 평지가 되어 푸른 풀만 돋아나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이 또 땔나무를 구하는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당신을 애처롭다고 서글퍼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존엄하고 귀하게 대우받던 맹상군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 줌 흙으로 변했다는 말인가?” 이에 맹상군은 눈동자에 눈물이 이슬방울처럼 맺히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옹문자주가 거문고를 꺼내서 연주하매, 낮은 음자리의 궁성과 징성으로 잔잔하게 시작하다가 비장한 느낌조의 우성과 각성으로 가볍게 휘몰아 치듯 한 곡조로 연주를 마치자, 맹상군의 눈물이 바닷물처럼 불어났다. 맹상군은 장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거문고 가야금 연주를 들으니 마치 내가 나라가 망하고 봉토를 잃은 파멸한 사람같이 느껴지는군요.”
雍門子周以琴見乎孟嘗君 孟嘗君曰 「先生鼓琴亦能令文悲乎」 雍門子周曰 「臣何獨能令足下悲哉 臣之所能令悲者 有先貴而後賤 先富而後貧者也 不若身材高妙 適遭暴亂 無道之主 妄加不道之理焉 不若處勢隱絕 不及四鄰 詘折儐厭 襲於窮巷 無所告愬 不若交歡相愛無怨而生離 遠赴絕國 無復相見之時 不若少失二親 兄弟別離 家室不足 憂蹙盈胸 當是之時也 固不可以聞飛鳥疾風之聲 窮窮焉固無樂已 凡若是者 臣一為之徽膠援琴而長太息 則流涕沾衿矣 今若足下千乘之君也 居則廣廈邃房 下羅帷 來清風 倡優侏儒處前選進而諂諛 燕則鬥象棋而舞鄭女 激楚之切風 練色以淫目 流聲以虞耳 水遊則連方舟 載羽旗 鼓吹乎不測之淵 野遊則馳騁弋獵乎平原廣囿 格猛獸 入則撞鍾擊鼓乎深宮之中 方此之時 視天地曾不若一指 忘死與生 雖有善琴者 固未能令足下悲也」 孟嘗君曰「否 否 文固以為不然」 雍門子周曰 「然臣之所為足下悲者一事也 夫聲敵帝而困秦者君也 連五國之約 南面而伐楚者又君也 天下未嘗無事 不從則橫 從成則楚王 橫成則秦帝 楚王秦帝 必報讎於薛矣 夫以秦 楚之強而報讎於弱薛 譽之猶摩蕭斧而伐朝菌也 必不留行矣 天下有識之士無不為足下寒心酸鼻者 千秋萬歲後 廟堂必不血食矣 高臺既以壞 曲池既以漸 墳墓既以下而青廷矣 嬰兒豎子樵採薪蕘者 蹢躅其足而歌其上 眾人見之 無不愀焉 為足下悲之曰 「夫以孟嘗君尊貴乃可使若此乎」 於是孟嘗君泫然泣涕 承睫而未殞雍門子周引琴而鼓之 徐動宮徵 微揮羽角 切終而成曲 孟嘗君涕浪汗增 欷而就之曰 「先生之鼓琴令文立若破國亡邑之人也」
장재 七哀詩(칠애시)
七哀(칠애)라는 말은 처참하고 처량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극도로 슬프고 아픈 상심을 말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캄캄한 밤을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때의 강조 부사로 쓰인 칠의 뜻이다. 칠애는 팔애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칠애는 전쟁과 반란, 전염병, 홍수나 강물 바다에 익사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극도의 슬픔에 빠진 아픈 마음을 표현한 애도시의 한 종류에 속한다. 칠애시로 잘 알려진 경우는 왕찬, 조식, 장재 이들 3인의 칠애시인데 이들 시의 주제는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전란으로 황폐해져 사람들이 인생의 허망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말세기의 심정을 담고 있다.
장재의 칠애시 1수
北芒何壘壘 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 皆雲漢世主 恭文遙相望 原陵郁膴膴 季世喪亂起 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 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 珍寶見剽虜 園寢化為墟 周墉無遺堵 蒙蘢荊棘生 蹊徑登童豎 狐兔窟其中 蕪穢不復掃 頹隴並墾發 萌隸營農圃 昔為萬乘君 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 悽愴哀今古 |
북망산 겹겹이 둘러 쌓인 사오십개가 넘는 저 높은 무덤들, 누구의 무덤들인지 물어보니 모두 한나라 왕릉이라네. 태평성대엔 한안제安帝공릉恭陵 한영제靈帝문릉 서로 쳐다 보이고 광무제光武帝원릉原陵 아름답게 보이지만, 말세가 되어 전란이 일어나면 맹수 같은 도적떼들이 무덤들을 파헤치고 지나가, 깊은 석실 구들방 문들은 다 열어 제쳐지고, 염한 옷들은 시체에서 떨어져 나부러지고, 진귀한 부장품들은 보이는 대로 약탈되었네. 왕릉은 허물어져 폐허가 되고, 주변의 담장도 사라져, 초목과 덤불 관목만 무성하게 자라나, 어린아이들이 그 위로 지나 다니고, 여우와 토끼들이 그 속에 굴을 파고 들고, 잡초만 우거진 황무지로 변해도 벌초 한 번 하지 않고, 황폐한 묘지는 개간되어 농민들의 경작지로 변했네. 어제까지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이었건만 오늘 작은 언덕의 한 줌 흙으로 변했구나! 거문고로 심금을 울려주던 그 옛날의 옹문자주의 말이 실감나네. 흘러간 무상세월에 마음은 애달프고 슬픔만 가득하네. |
한시원문 | 독음 |
北芒何壘壘 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 皆雲漢世主 恭文遙相望 原陵郁膴膴 季世喪亂起 賊盜如豺虎 毀壤過一抔 便房啟幽戶 珠柙離玉體 珍寶見剽虜 園寢化為墟 周墉無遺堵 蒙蘢荊棘生 蹊徑登童豎 狐兔窟其中 蕪穢不復掃 頹隴並墾發 萌隸營農圃 昔為萬乘君 今為丘中土 感彼雍門言 悽愴哀今古 |
북망하루루 고릉유사오 차문수가분 개운한세주 공문요상망 원릉욱무무 계세상란기 도적여시호 훼양과일부 편방계유호 주합리옥체 진보견표로 원침화위허 주용무유도 몽롱형극생 혜경등동수 호토굴기중 무예불복소 퇴롱병간발 맹례영농포 석위만승군 금위구중토 감피옹문언 처창애금고 |
장재의 칠애시 2수
한시원문 | 독음 |
秋風吐商氣 蕭瑟掃前林 陽鳥收和響 寒蟬無餘音 白露中夜結 木落柯條森 朱光馳北陸 浮景忽西沈 顧望無所見 惟睹松柏陰 肅肅高桐枝 翩翩棲孤禽 仰聽離鴻鳴 俯聞蜻蛚吟 哀人易感傷 觸物增悲心 丘隴日已遠 纏綿彌思深 憂來令髮白 誰雲愁可任 徘徊向長風 淚下霑衣衿 |
추풍토상기 소슬소전림 양조수화향 한선무여음 백로중야결 목락가조삼 주광치북륙 부경홀서침 고망무소견 유도송백음 숙숙고동지 편편서고금 앙청리홍명 부문청렬음 애인이감상 촉물증비심 구롱일이원 전면미사심 우래영발백 수운수가임 배회향장풍 루하점의금 |
북망산은 우리 민요 “성주풀이”의 사설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 명이더냐”의 구절로 익숙하듯이, 그리고 칠애시의 표현이 말해주듯이, 한나라 왕릉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명당 자리를 가르킨다. 한나라 왕릉뿐만 아니라 당나라 왕릉 21개 중 19개가 북산에 위치한다. 낙양 근처에 왕릉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원에 위치한 낙양이 중국의 역사 13개 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터인데 북산은 구릉지 비교적 낮게 솟아 오른 언덕 산에 가까워 천혜의 장지 길지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북망산은 무덤을 가르키는 일반명사화된 표현이기도 하다. 이 칠애시에 나타난 단어 北芒, 高陵, 家墳, 原陵, 一抔, 便房, 園寢, 頹隴, 中丘土 들은 모두가 墳墓(분묘) 무덤 묘지 왕릉 릉원 등 무덤을 가르키는 표현들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으로 망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언어란 사람 사이에 뜻의 전달과 상호 소통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표현들을 만들어 내고 더욱 복잡하게 발전되어 왔다. 이 싯구를 번역할 때 무덤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것을 표현해 낼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무덤이라는 한 단어로 그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인간 세상사 가운데 한 단면을 모두 총괄해서 표현해 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름 모를 비목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왕릉 아방궁의 개인분묘가 있고 공동묘지가 있고 공동묘지에도 국립묘지가 있고 공원묘지가 있고 가족묘지가 있고 선영이 있으며 또 만인총 무명용사탑 등 다양한 형태로 나눠진다. 언어의 다양성은 혼란과 파괴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인류는 서로 보다 정확한 소통을 통해서 언어의 다양성을 계속 확장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張載
張載(장재)는 서진西晋시대(266-316) 문학가로 촉군蜀郡태수를 지냈다. 왕조교체와 정치 사회 혼란이 극도로 심했던 팔왕의 난(291-306) 시기에 정치 참여를 하였다가 처형당했던 반악과는 달리 장재는 이 혼란의 시기에 관직에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하지만 장재는 칠애시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한나라 왕조가 붕괴된 정치 혼란의 상황을 인생무상의 의미로 쓸쓸히 비웃고 있는 바 그런 장재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반면 潘岳반악(247-300)은 효성이 지극하였고, 정통중화왕조를 복원하고자 북방오랑캐의 침입에 맞섰던 비장미를 간직한 문학가였다. 반악은 당시 민중들에게 특히 부녀자들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반면 장재는 민중들의 혐오를 받은 인물이었다.
반악이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끈 이유 중에는 죽은 사람에게 애도의 정을 잘 표현한 문학가였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정치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갔는데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을 잘 표현한 애뢰(哀誄) 비문(碑文)의 대가로 알려진 반악이 민중들의 애통한 마음 애도지정을 달래 주었을 그런 당시 시대상황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정치 혼란기에 명철보신의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정치 사회 혼란기에 그것을 수습하기 보다 그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하거나 세상을 조소하는 비겁함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라는 점을 반악과 장재의 삶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장재와 반악의 삶과 문학에 관련된 내용은 진서(晉書) 그리고 문선에 실려 있다.
송원대에 나타난 九九消寒圖(구구소한도) 형식
삼국사기의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의 구절의 문장 형식을 살펴보자. 이 구절 45자는 구구소한도 형식으로 분석된다.
九九消寒圖구구소한도(寫九, 數九)는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 시작되었던 문장 형식과 풍속이기에 당나라 시대의 문무왕의 유조문 형식과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무왕릉 비문에 쓰여졌을 만가시의 형식은 5자 5자 형식의 보허사의 문장 형태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유조문 45자 문장을 9자 9자 형식에 맞추어 띄어쓰기를 해 보면 다음과 같이 배열된다.
삼국사기 원문 구절 | 구구소한도 형식 배열 |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
且山谷 遷貿人 代推移 吳王北 山之墳 詎見金 鳧之彩 魏主西 陵之望 唯聞銅 雀之名 昔日萬 機之英 終成一 封之土 |
강한 추위가 오는 겨울철엔 담장 밑의 따스한 햇볕이 그리운 시기이다. 우리 세시 풍속에 봄이 오는 입춘 절기에 문쪽에다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건양다경)이라는 글귀를 써붙이는 풍속이 있는데, 그와 같이 송원대에 북방의 민족들은 구구팔십일의 3개월 지속되는 기나긴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서 매일 한 글자씩 떼어 내려가는, 그 혹독한 3개월 간의 긴 겨울을 버텨내고 따스한 봄을 맞이한다는 겨울내기의 풍속으로써 구구소한도라는 풍속이 전해졌다. 입춘대길의 글귀를 써붙이는 풍속은 그와 같이 혹독한 추위의 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새봄이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겨울내기의 한 풍속이 아니었을까 미루어 짐작된다.
이와 같이 문무왕 유조문 중의 45자를 구구소한도 형식으로 분석해 보면,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송나라 이후 북방민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공 위협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당시 상황 그리고 김부식이 송나라가 아니라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당시 급박했던 국제 정세 속에서 금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역사를 조작하고 갖다 바친 망작으로 여겨진다.
국편위의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구절 번역은 오류를 범했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兔穴其旁 이 구절을 국편위는 다음과 같이 번역 해석했다. “또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魏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하지만 위와 같은 국편위의 번역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편위가 번역한 대로 且차는 “또”라고 번역되기 보다는, 단순한 문언조사로써 夫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金鳧금부는 글자 그대로의 뜻대로 “금으로 만든 물오리”라고 글자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무리가 따른다. 金금이란 Gold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리로 주조한 청동물을 금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따라서 金人이라는 말과 같이 金鳧는 꼭 금이 아니라 청동주조물로 만든 금부를 말하고 또 金鳧금부는 제왕의 무덤에 부장하는 부장품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나라 왕은 유명한 오왕 합려吳王闔廬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오왕 무덤에서 금부를 볼 수 없다’는 표현은 그 무덤이 이미 도굴되어서 제왕의 부장품을 더 이상 무덤 속에서 찾을 수 없다는 즉 무덤이 도굴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구절을 조금 다시 가다듬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어 가고, 인간 세상도 바뀌어 가느니.
북산의 오왕 무덤들은 도굴되어 부장품을 남아 있지 않고,
위나라 황제 조조의 무덤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대라는 이름만 전해질 뿐.
지난 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천하의 영웅도 결국 무덤 속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네.
먼 세월이 흐르면 나무꾼과 목동이 그 위를 지나가며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파고 든다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음만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 “死者 人之所必不免也 處必然之勢”. 모든 사람은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죽을 이 몸이거늘, 그래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떠나 보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때 하늘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는 듯한 격한 슬픔과 애통함을! 산천도 놀라 목이 메이고, 내리던 눈발도 멈추어 선 그 때의 극한적 슬픔을 기억하는가?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그 때의 아픔을! 오호애제 嗚呼哀哉 于時天震地駭 如天斯崩 如山斯傾.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구절의 표현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은, 유신庾信의 애강남부의 “雙鳧永去 … 一雁空飛”, “狐兔而窟穴”, “指愛子而託人 知西陵而誰望 非無北闕之兵 猶有雲臺之仗”, 유신의 拟連珠(의연주)시중 “雀台弦管空 望西陵之松“, 그리고 장재의 七哀詩칠애시에서의 “北芒何壘壘 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 皆雲漢世主”, “蹊逕登童豎 狐兔窟其中”, “昔為萬乘君 今為丘山土” 구절 등에서 차용한 표현인 것으로 추측된다. 문무왕릉 비문에서의 애도시 挽歌辭만가사의 문장에 이러한 표현 구절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비문이 깨어져 떨어져 나가 사라지고만 안타까운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칠 증거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복원할 방법이 없겠지만 문무왕릉 비문의 원래 문장의 내용은 장재의 칠애시와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보이는 挽辭(만사) 애도시의 표현을 인용하여 문무왕의 서거에 대한 극도의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한 문장이 비문의 내용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러한 원문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지 않았고 대신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역사를 조작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삼국사기에서 “樵牧歌其上 狐兔穴其旁”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구절은 비문 원래의 문장 그대로를 전재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과 조작의 차이점을 가려낼 수 있을까? 삼국사기와 문무왕릉의 비문과의 비교에서 유일하게 같은 구절로 확인되는 문장은 “□牧哥其上 狐兔穴其傍” 이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또 문무왕릉 비문의 “東征西□”과 같은 뜻으로 삼국사기는 “西征北討”(서정북토)라는 표현을 썼다.
狐兔之悲 호토지비
비문 구절의 狐兔穴其旁은 狐兔之悲(호토지비)를 표현한 뜻으로 쓰였음이 분명하다. 호토지비 즉 여우와 토끼는 서로 원수지간이지만 그 원수지간의 동물도 상대방이 죽으면 슬퍼할 줄 알고 그래서 ‘흐느끼며 제 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호토지비의 의미로써 ‘호토혈기방’을 쓴 것이라고 이해된다. 애강남부의 狐兔而窟穴(호토이굴혈), 칠애시의 狐兔窟其中(호토굴기중), 문무왕릉비문의 狐兔穴其旁(호토혈기방)은 모두 거의 같은 뜻의 글자로 쓰여진 구절이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거의 의미가 같은 애도시의 표현이지만 각각 쓰인 문장에서의 내용과 그 의미는 각각 달리 해석된다. 장재의 칠애시의 狐兔窟其中(호토굴기중)은 ‘여우와 토끼가 무덤 근방에 굴을 판다’ 즉 영웅의 무덤이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헐고 황폐화된다는 인생무상을 뜻하는 구절로 쓰였다. 유신의 애강남부에서의 狐兔而窟穴(호토이굴혈)은 ‘예전에는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황폐화된 곳이었지만 천자의 기운이 피어 오르면 여우와 토끼가 굴을 파고들 수가 없게 된다’는 뜻으로 쓰여서 장재의 칠애시의 뜻과는 다른 의미가 된다.
그러면 문무왕릉 비문의 “狐兔穴其旁”의 뜻은 어떠한가? 문무왕릉 비문 구절은 무덤의 황폐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여우와 토끼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굴 속으로 들어가 애도를 표한다’는 狐兔之悲(호토지비)의 뜻으로 쓰였다. “아! 목동아”의 가사 내용처럼, 양나라 시대 임방의 구절에 나오는 “狐兔成穴童牧哀歌”(호토성혈동목애가)의 의미로 해석해야 함은 분명하지 않는가?
국편위의 삼국사기 구절의 번역은,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국편위는 “□牧哥其上 狐兔穴其旁”의 구절은 이 문장 바로 앞의 구절을 이어받아 즉 지난 날의 영웅도 죽으면 여우와 토끼가 무덤 옆에 굴을 판다는 의미로 번역 해석하고 있다. 이는 장재의 칠애시의 ‘시간이 지나면 모든 무덤이 황폐화된다’는 인생무상의 의미를 반영하게 된다. 장재의 칠애시가 나온 배경은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 상황에 있다. 혼란한 시국에서 전쟁이 자주 발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사회였다. 당시 사람들의 인생관이 어떻게 변해 갔겠는가? 사람들은 인생무상의 절망감에 휩싸여 들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요에 “흥타령”이 만가로 전용되고 있는 것, 아리랑의 가사들이 역설적인 의미로 전용되는 것, 근대 일본에서 에도 막부 정권의 말기로 접어 들면 초기의 신성한 섹스가 방탕무도한 포르노로 변질되는 것, 이런 사례들을 통해 보면 모두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낱말 낱개의 의미로써 잘못 해석하고자 할 때는 문맥의 의미를 잃고 오해를 하거나 그 본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문서 조작을 하지 않아도 세월의 변천과 함께 언어의 의미 또한 변하고 그리고 시대상황이 변하면서 언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간세상의 이치인데, 언어 해석의 다툼이 아니라 아예 문서를 조작한다면 그것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범죄가 된다.
아 목동아! 목동애가 狐兔成穴 童牧哀歌
양나라 시대 임방의 싯구절 狐兔成穴 童牧哀歌에서 동목애가라는 표현이 나온다.
목동과 애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1913년 영국에서 나타난 대니보이만큼 현재 국제적으로 알려진 노래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그 대니보이의 가사 아 목동아 대니 보이 Danny Boy 가사를 여기에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Danny는 다니엘의 애칭이니 사자의 밥이 되었다가 살아 남은 다니엘의 이야기를 상기하면 된다. 대니보이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바로 직전에 나타난 전쟁과 죽음에 관한 노래이다. 성경의 다니엘서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예언서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 않는 면이 있긴 하다.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아이덴디티 독자 고유성을 지켜낼 것인가? 여기선 어려운 사회과학적 분석은 차치하고 우선 대니보이의 가사부터 재음미해 보자.
아 목동아, 피리, 피리 소리를 불러다오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산마루에서 골짜리로 울려 퍼지네
여름이 가면 장미꽃은 시들어 떨어지겠지.
그 땐 너도 가야 하는가? 그렇다면 난 기다릴 거야.
하지만 다시 초원이 푸르른 다음 해엔 에 너도 다시 돌아오겠지.
그렇지 않다면 골짜기는 눈으로 덮여 적막해지겠지.
해가 나든 숨든 나는 여기에 나타날 거야.
해가 나든 숨든 나는 여기에 나타날 거야.
오 목동아, 오 목동아, 난 널 사랑해
하지만 네가 다시 돌아올 땐 꽃들은 모두 시들어 졌을거야.
내가 죽었거든, 뭐 이미 죽었을 테지만
내 묻혀 있는 곳을 찾아 내어
무릎 꿇고 내게 작별인사라도 해주렴.
내가 그걸 들을 수는 있을 꺼야. 내 무덤을 사뿐히 밟는 소리까지
그러면 내 무덤은 더욱 따뜻해지고 아늑해질 테지.
네가 고개 숙여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네가 다시 올 때까지 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테야.
나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牧哥其上 狐兔穴其傍” 구절의 결자 부분을 위진남북조 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童牧으로 이해하고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 동목가기상 호토혈기방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목동가기상호토혈기방)은, 목동이 그 위에서 슬픈 애가를 부르니 토끼와 여우마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가네.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은 장재의 칠애시의 蹊逕登童豎 狐兔窟其中의 구절과 닮아 있다. 七哀詩가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시이기 때문에 만가하고 성격을 같이한다. 이 구절은 삼국사기에 전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무왕 유조와 비문 비교 분석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이 구절의 전후 문맥상의 의미와 그 표현기교를 함께 살펴 볼 필요성이 크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보자.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兔穴其旁”. 삼국사기의 이 구절에 대한 국편위의 번역을 보자.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註1 위(魏)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註2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註1 《越絶書》에 吳王 합려가 죽어 虎丘山에 장사지냈는데, 血池를 만들고 黃金珠玉으로 鳧鷹를 만들어 띄웠다고 한다. 註2 《鄴都故事》에 曹操가 일찍이 銅雀臺를 짓고 즐기다가 죽음에 이르러 아들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은 후 나의 妾과 伎人을 동작대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臺上에 6尺의 床을 설치하고 밑에 細布의 帳을 치고 아침 저녁으로 酒•脯•粻•糒등을 바치게 하며 朔望에는 帳 앞에서 伎樂을 연주케 하고 너희도 때때로 西陵墓田을 바라보라”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가 전한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兔穴其旁 구절의 글자수 형태는 6자 6자, 5자 5자 형식이다. 이런 글자수 파격은 운과 율의 격을 중시하는 한시 구조와 형태에 어울리지 않는 측면을 보여준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이 구절의 글자수 형태는 1 4 4, 2 4, 2 4, 2 4, 2 4, 2 4, 2 4, 5 5 글자수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문장 글자 수의 구조는 운율을 중시하는 한시 구조 더욱이 당시 오언한시나 보허사의 형태에는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문무왕릉 비문의 애도시 원문을 그대로 전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의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구절에 대한 국편위의 번역은,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국편위는 이렇게 두 구절을 한 문장으로 묶고서 해석하였으나, 한시에서 구절의 글자수가 6자에서 5자로 급변할 때 그 문맥상 연결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재의 칠애시 전문을 다시 보라.
삼국사기의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구절 부분은 장재의 칠애시 “北芒何壘壘 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 皆雲漢世主” 그리고 유신의 애강남부의 “知西陵而誰望 非無北闕之兵”, “李陵之雙鳧永去”의 의미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왜곡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은 庾信(유신)의 의연주擬連珠시에서의 “雀台弦管空 望西陵之松” 구절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살짝 바꾸어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장재의 칠애시는 한 때의 영웅들의 무덤도 시간이 흐르면 모두 폐허가 된다는 인생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도 결국 잊혀지는데 하물며 우리 보통사람들의 죽음은 무엇하랴,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의미를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패배적 조소적 소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기본적으로 만가사는 망자에 대한 애도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어떤 비판이 끼어들기 힘든 측면이 있다. 국편위가 번역 해석을 함에 있어서, 문무왕릉 비문에 대해서 장재의 칠애시와 유신의 애강남부를 비롯한 시구절과의 연관성을 전혀 언급조차 해내지 못하는 있음은 심히 유감이고 안타깝다. 애도시의 의미와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그에 대한 해석이 엉뚱한 의미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무지에서 범하는 잘못은 누구의 책임인가? 지금은 이천으로 이전하였지만 이전에 남한산성 아래 송파구에 주둔하던 육군 교육사령부나 육군 교도소에서 저녁 6시 나팔소리가 장중하게 울려 펴지면 군영에 갇힌 자들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은 만감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관현악 나팔소리가 어디까지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양나라가 반란군에 접수되고 외국 침략자에게 유린당해 도성이 무너질 때의 참담한 상황을 묘사한 구절 그리고 위나라 조조가 죽음의 병상에서 남긴 유언 내용 등은 미래세대를 위해서 현 세대가 죽음을 불사하고 국가사직을 지켜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책무를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4행 번역
□□□□ | |
(昔為萬乘君 今為南山土) |
(어제까지 만기철마를 달리던 천승군 오늘 남산의 흙이 되었네) |
□牧哥其上 狐兔穴其傍- (童)牧哥其上 狐兔穴其傍 | 목동의 애가가 그 위에 울려 퍼지니 여우와 토끼도 슬퍼하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가네 |
[1]□□□□□□□□□□直九合一匡東征西□□□□ 이 결자부분의 내용을 추측 보충한다면, 沖虛精忠(沖虛超然 靜思精忠 赤心報國) 守一全眞 九合一匡 東征西伐 臨軍 櫛風沐雨 不遑暇食 席不暇暖 俄俄忽宮前寢 時年五十六歲
(하늘의 뜻을 받아 근본을 지켜 내고자, 평생 올곧은 생각을 견지하고, 세상일에 초연하면서, 오로지 지극정성으로 득도하여, 하늘의 뜻을 실천하려는 큰 뜻을 품었고), 적폐로 피폐해진 바깥 세상을 바르게 펴고자, 동정서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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