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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문무왕릉비 비문뒷면 5행-10행 번역 해석

by 추홍희블로그 2021. 11. 12.

5

□□□□□□□□□□□□□□□□□燒葬卽以其月十日大

 

燒葬 화소장

燒葬소장은 불탈 , 연소하다의 뜻이니, 火葬 화장으로 장례식을 치루는 것을 말한다.  력도원의 수경주水經注有一道人命過燒葬 燒之數千束樵 故坐火中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燒葬소장은 평소 고인이 쓰던 물건을 불태우는 것-焚燒送葬物 분소송장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화장식 장례는 순임금부터, 도공의 신 범려와 서시가 그러했듯이 서주의 도교적 종교 장례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기원전 21세기 이전의 오랜 역사에 걸친 장례식이었다. 당연히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장례식 방법이다. 삼국사기에서 문무왕 유언을 전하면서 依西國之式 以火燒葬이라고 기술했는데, 이에 대한 국편위는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라고 번역하고 서국에 대해서 西國 인도를 가리키는데,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불태워 火葬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서국의 의식은 바로 火葬 뜻한다라고 주해를 달았다. 하지만 화장식 장례 방법은 불교의 전래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고유의 장례 방법에 해당하기 때문에 인도로부터 전래의 불교의 영향이 아니다.

西國”(서국)이라는 단어는 ① 춘추공양전에 나오는 周公 東征則西國怨 西征則東國怨이라는 구절에서 보이는 뜻처럼 서쪽 지방에 분봉받은 제후를 뜻한다 ② 중국의 서쪽 지방 西域 ③ 불교 발상지 ④ 삼성퇴 유적이 발견된 그리고 제갈량과 유비의 촉한으로 잘 알려져 있는 西蜀서촉 즉 오늘날 사천성 지방에서 건설된 나라를 의미한다.  유백온의 촉가즉 촉나라 상인들이라는 표현, 소식의 싯구에 諸葛 來西國 千年愛未衰 今朝游故里 客不勝悲이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西蜀서촉을 지칭한다.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시가 있는데 여기의 귀촉도의 구체적 역사적 대상이 촉나라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댐인 삼협대가 위치한 거대한 양자강의 물길에서 삼성퇴의 문명이 일어났던 그곳을 말한다.  문무왕의 선조가 유비의 촉한과 직접적인 혈연관계로써 역사상 나타나므로 문무왕 유언에서 말하는 서국은 서촉 또는 서주로써 이해된다. 서주는 徐方”(서방)으로 동해왕의 영토이었고, 상나라의 태동지였고 공자의 노나라 맹자의 추나라 그리고 도공의 범려, 또 그 이전의 동이족 백이숙제의 고죽국, 양나라 중심지 양산이었다. 서국을 단지 불교의 발상지 인도를 가르키는 인도와 동의어로 이해되어서는 아니된다.

 

 

(즉이)(수이) 같은 뜻의 낱말로써 무엇무엇에 이어서 곧바로 뜻이다. 유언에 따라 모년모월모일 어디에 장사지냈다는 그런 뜻으로 묘지명에 흔한 표현이다. 진자앙이 묘지명 가운데 即以某年月日 葬於西嶽習仙鄉登仙裏之西麓 遵遺命也표현이 있다. 

(즉이)라는 말을 쓰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장례식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 비문 행의 내용일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遂以送王 이런 내용이 뒤따를 같다.  送喪(송상)喪家行列(상가행렬), 영구를 장지로 보내는 것을 이른다. 같은 동의어로 送殯(송빈), 送葬(송장)이 있다. 사람이 돌아가시면 즉 상을 당하면 빈소를 차리고 조의를 받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장식을 치루게 되는데 이 망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날을 送王之日(송왕지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망자를 떠나 보내는 송왕의 장례식을 화장식으로 거행했다는 뜻이다. 화장의 장례식을 지금에서는 불교식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화장식은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었던 중국 고유의 장례법에 속했다는 사실을 참고하라.  중국 고유의 종교는 도교와 유교이다.  불교는 다신교에 속하는 힌두교가 주된 종교인 인도에서 유입된 외래종교이었다. 

 

其月十日

其月十日기월10일이라는 문장 표현을 두고서 삼국사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대로 문무왕이 서거한지열흘만에 장례를 치루었다는 기사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문무왕릉 비문에서 분명하게 국장으로 치루었다고王禮”(왕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고 있기 때문에, 국장을 10일 이내에 치룰 수는 결코 없으므로 그런 삼국사기의 기사는 조작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운명하면 빈소를 차리고 염을 하고 조문객을 맞는 등 국가 예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장례식 이전에 해야 될 예법대로 최소한의 적법절차를 지켜나가야 하기 때문에 국장을 10일만에 치룰 수가 없었다.

孟冬十月

여기서其月이라는 표현은 결자된 부분에서 설명하다 있는 것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추측컨대 당태종의 예처럼 4월 장례식 즉 7월 달에 운명한 사람을 4개월에 걸쳐서 국장을 준비하고 안장식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시간적 개념이므로 그해 10월 달에 화장식을 거행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앞에서 孟冬맹동이라는 시간개념을 기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맹동은 음력 10월 달을 말한다. 그래서孟冬十月맹동시월이라는 관행적 표현으로 흔히 쓴다. 지금껏 전통으로 내려오는 조상들의 시제를 10월 달에 지내는 것을 볼 때 음기숙숙한 음력 10월 달은 장례식 치루기에 가장 좋은 시기에 속한다. 맑은 하늘에 아직 눈이 내리기 전 숙연한 음력 10월의 기상을 상기해 보라. 결자된 부분에서 맹동이라는 음력 10월을 지칭했을 것으므로, “孟冬十月이라는 반복적 표현 대신 시간 대명사 기 처리하여기월 其月-그달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맹동시월이라는 표현이 있었기에 기월 10일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월10일은 문무왕이 운명한 음력 7월달이 아니라 맹동10월 즉 음력 10 10일을 지칭한다고 해석된다. 

망자의 사망시간이 중요하고 장례식 또한 길일을 택일해서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장례기일을 중요하게 취급하여 명시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개시 날자도 택일을 하고-이런 의식은 진흥왕 순수비에서도 확인된다. 상량식도 택일을 하고 장례식도 택일을 하는 이유는 그것을 미신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기상조건 일기예보의 확률에 따라 예식을 치루려는 가장 합리적인 경제학적 요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심리학적 요인도 있겠지만 우선 기상요건을 미리 살펴보는 합리적인 행동에 속한다고 본다.

음력 10월 달을 다른 명칭으로孟冬이라 표현하는데, 당시는 농력에 따라 맹동이라는 표현이 익숙하게 쓰였지, 지금처럼 아라비아 숫자 12345678910가 익숙한 달력은 아니었다. 결자부분을 추측해 본다면, 孟冬繁霜 陰寒氣鬱寂肅 이라는 의미의 문장이 이 부분에 들어 있을 것 같다. 

구당서 본기 권5 고종하 개요원년 681 10월 기사를 보자.

冬十月 丙寅朔 日有蝕之 乙丑 改永隆二年 開耀元 曲赦定襄軍及緣征突厥官吏兵募等 丙寅 斬阿史那伏念及溫傅等五十四人於都市 丁亥 新羅王金法敏薨 仍以其子政襲位”.

개요원년 음력 10월달 정해일은 농력 서기 681 10 22일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2 7일이 된다. 개요원년 동10월 정해일에 신라왕 김법민이 서거했고 그의 아들 정이 왕위를 이었다고 적혀있다. 681년 음력 10 10일은 양력으로 11 25乙亥을해일이 된다.  따라서 문무왕릉 비문의 10 10일에 장례식을 치루었다는 구절은 구당서의 문무왕 서거일자와 거의 비슷한 날짜가 된다. 

그날 눈발이 날렸다는 해석 또한 첫눈이 내리는 계절이 11월말경이 되므로 당시의 기상 기후와도 거의 일치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기록한대로의 屬纊之後十日”(속광지후십일) 7 1일 운명했으므로 7 10일이 문무왕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이 아니라 겨울철 음력 10 10일이라고 합리적인 추측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문무왕릉 비문의 其月十日기월10일은 681년 음력 10 10일로 추측한다.


맹동10월 즉 음력 10 10일에 장례식을 거행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또 이 날은 하얀 눈발이 흩날렸다고 당일의 날씨 상태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장례식 때 하얀 눈발이 날리는 날이면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진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을 하얀 자작나무가 타듯이 불태우면서 저 세상으로 보낼 때의 마음 속 슬픔은 하늘에서 내려 오는 하얀 눈발에 적셔지지 않을까?  최선을 다해 뭇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사람의 마지막 길을 어찌 하늘인들 무심할 수 있겠는가?  우공이산이요 천지가 진동한다는 세익스피어의 희곡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 속에서 직접적으로 확인될 것이다. 

  

여기의 글자 판독을 일부는 화로 판독했는데, 다수는 유희애의 판독과 마찬가지로 로 판독했다.  나는 유희애의 판독을 따르고자 한다. “라고 판독하면 아마도 大王이란 지시대명사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글자판독을 로 하건 로 하건 여기 이 문맥상의 의미 내용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추측 가능해 진다.

다음의 결자부분을 추측해 본다면 아마도, 火燒之數千束樵 또는 火焚之數千積薪 이런 내용일 것 같다. 火焚之數千積薪 이런 구절로 화장의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했을 것 같다. ‘수천 다발의 땔나무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서 불을 태워 화장식을 거행했다’. 이런 화장식의 모습은 2017년 거행된 태국 푸미폰 국왕의 화장 장례식이 어느 정도 전형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유투브로 그 장면을 보면 아마도 문무왕릉 비문의 결자된 부분의 내용을 상상하고 추측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5행 요약

      燒葬 문무왕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장례의식을 화장火葬으로 거행했다
其月十日 이날은 맹동시월 즉 음력 10 10일이었다
     - (燒之數千束樵) 火焚之數千積薪)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수천 다발의 땔나무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서 불을 태워 화장식을 거행했다)

 

 

 

6

                  ▨▨▨天皇大帝    
천황대제(天皇大帝)께서

 

如喪皇妣耀魄寶 天皇大帝

수서《隋書 禮儀장에 “时迎氣 皆是祭五行之人帝太皞之屬 非祭天也 天稱皇天 亦稱上帝 亦直稱帝 五行人帝亦得稱上帝 但不得称天”으로 기술되어 있고, 진서 천문지에서 천황대제 자리를 勾陳宮中一星曰天皇大帝 其神曰耀魄寶 主御群靈執萬神圖으로 기술하고 있고, 661년 양형이 지은 渾天賦”(혼천부)에 나오는 天有北辰 衆星环拱 天帝威神 尊之以耀魄 配之以勾陳구절이 천황대제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천황대제의 별자리 모습은 무측천의 승선태자비에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북극성 자리 요백보에 대해서 유교에서는 정현의 주해와 같이 昊天上帝호천상제 (為天皇大帝者 耀魄寶也)로 부르고, 도교에서는 勾陳上宮天皇大帝로 부른다. 

 

    -如喪考妣 여상고비

 

考妣(고비) 돌아가신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순임금님이 돌아가시자 백성들이 마치 자기 부모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한다는 기록이 상서 순전에 보인다.  帝乃殂落 百姓如喪考妣. 제갈량이 유비의 죽음을 맞이하는 삼국지의 기록에도 똑 같은 여상고비 如喪考妣구절이 있음을 참조하면 문무왕릉 비문에서 결자된 부분    글자는 여상고비(如喪考妣) 구절이 아닐까 추측된다. 순임금님이나 삼국지 촉한 황제 유비의 죽음 때 사람들이 보여준 것처럼 문무왕의 서거를 마치 자기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도했다는 내용의 문장을 기술했을 것으로 보인다. 

古今圖書集成고금도서집성에 곡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문장을 읽어보면 애곡을 표하는 그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송서에 보이는 문장을 옮기면, “帝嗟悼之 河朔之人 望柩而泣”, 문상한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왕도 탄식하고 애도릉 표했고, 고향의 하삭 사람들 다수가 영전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 삼국유사에서의 표현과 비슷한 말로 望柩流涕라는 표현이 그런 애도의 표시 장면이다.  國人聞者 皆流涕에서 유체는 눈물을 흘리다의 뜻이다.  애강남부에서의 표현인 悽愴流涕(처창유체)가 같은 뜻이다. 

 

   天皇大帝

내가 감히 추사 김정희를 뛰어넘었다고 말하면 그런 건방진 말을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문무왕릉 비문 뒷면 6행에 나타난 구절인  天皇大帝  “에 대해서 추사는 여기의천황대제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해 내지 못한 결과 문무왕릉 비문의 건립 시기를 잘못 추정했다.[1]


騮識駿骨(화류식준골)라는 말이 있다. 즉 준마가 천리마를 알아보고 천재가 수재를 알아 본다. 이 말은 노자도덕경 제41장의 상사 중사 하사의 개념에 상통한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듣고 나면 신실하게 행동으로 옮기려 한다. 중간치기는 진리를 듣고 나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긴가민가한다. 하빠리는 진리를 듣고 나면 어이없게도 크게 비웃는다. 만약 하빨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진리가 어떻게 나오던가? 갈릴레오가 그랬듯이 뉴튼이 그랬듯이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처음엔 다들 무시당하고 비웃음을 샀지 않는가? 제눈에 안경이고, 여행도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며, 안목은 사람 따라 다르고, 사람은 제능력껏 알아보는 것이다.


하사下士 내가 여기서 하삐리 하빨이라는 비칭을 썼지만 하사(下士) 개념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점이 있다는 것을 덤으로 적고 싶다. 절절하사(折節下士)는 삼국지 위지 원소전에도 나오는 구절인데, 비록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유능한 현인에게는 자기 몸을 낮추고 굽혀서 절을 하며 예를 갖추고 모신다는 경현하사(敬賢下士)의 뜻인데, 이와 비슷한 말로는 구현하사(求賢下士) 예현하사(禮賢下士) 겸공하사(謙恭下士) 등의 표현이 있다.

 

 

왜 추사 김정희는천황대제의 의미를 잘못 해석했는가?


여기서천황대제 天皇大帝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종교상 어휘로써 이해해야 함이 보다 옳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추사 김정희처럼 관직명이거나 특정인의 시호로 이해하는 경우, 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말 위험성이 크다. 추사는 문무왕릉 비문 파편이 발견된 1796(정조 20) 이후 조금 먼 시간이 지난 시점인 1817년에 경주를 직접 답사하고 그 때 사천왕사에서 문무왕릉 비문 하단 부분을 직접 수습했다고 밝혔다. 이후 추사는 천황대제天皇大帝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문무왕릉비가 687 8 25일 혹은 9월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추사의 이 논문에 따르면 천황대제 天皇大帝라는 명칭은 당나라 고종高宗 시호이므로 당고종이 운명한 해인 683년 이후에라야 가능하다는 논리에 입각하여 684년 이후부터 신문왕 재위 기간 중경진 景辰 25”'을 만족시키는 날짜 즉 일간지를 추적하여 그에 해당되는 687 8-9월 무렵이 문무왕릉 비문의 건립 시기라고 주장한 것이다.


高宗(고종) 당나라 제3대 황제로 649년부터 683년까지 삼십사년 동안 임금으로 지냈다. 책부원귀에 따르면, 묘호(廟號) 고종이고 시호(諡號) 天皇大帝(천황대제)이다. 추사는 유배 귀양살이로 많은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평생 행정관료로 살아온 그의 신분과 가계의 배경으로 보아 정치행정적 용어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 추사는 그같은 자신의 출신 배경과 유교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 그의 의식 구조에 제한성 때문에 자신이 직접 답사까지 하면서까지 비범한 관심과 흥미를 갖고 추적하면서 문무왕릉 비문 해석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지만 안타깝게도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고말았다는 사실은 유감이지 않을 수 없다. 문무왕릉의 비문에서천황대제의 단어를 종교적 의미 즉 도교에서의 천황대제를 지칭하는 의미로 이해했다면 아마도 비문의 진실적 발견에 보다 근접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
천황대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진서 천문지를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천문지 사료에 설명된 자료를 바탕으로 천황대제를 별자리 천문지식 영역에서 이해하면 결론이 도출되는데, 이에 따라서 나는 비문에서 명시한천황대제는 당고종의 시호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도교에서 말하는 종교적 의미 그리고 별자리 천문 지식 영역에서의천황대제를 뜻한다.

 

 

천황대제와 선계 승천

천황대제가 어떤 힘을 갖고 어떤 지위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백제평정비 大唐平百濟國碑銘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같은 묘사는 천황대제를 바르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왜곡되게 표현했음으로 올바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측천이 지은 승선태자비의 비문 구절 가운데 천황대제의 모습을 진실되게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자.

寥廓出寰區之外 驂鸞馭鳳 升八景而戲仙庭 駕月乘雲 驅百靈而朝上帝 元都迥辟 玉京為不死之鄉 紫府旁開 金闕乃長生之地”.

이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세상 속세를 벗어나니 하늘은 넓고 탁 트여 광활하구나.  새들과 함께 신선의 길로 날아가네.   화려한 무지개색깔 그곳을 넘어 신선이 사는 선경에 다다르네.  달나라 수레를 타고 구름을 타고 꾀꼬리 새들(새는 천사를 의미함)을 이끌고 옥황상제를 뵈올 듯한데.  신선이 사는 그곳은 저 멀리 아득하네.  달나라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지향이라고 했는가?  신선이 사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사방으로 열려 있다지. 신선이 사는 불로장생의 그곳 말일세.

 

寥廓(요곽)空曠(공광), 深遠(심원)하다, 널리 탁 트여 있다의 뜻이고, 寰區(환구)人世間(인간세상) 즉 속세를 뜻하고, 鸞鳳(란봉)은 신비스런 란새와 봉황새를 합쳐 부른 말이고, 驂馭(참어)는 몰다, 이끌다의 뜻이로, 驂鸞馭鳳(참란어봉)仙道飛升(선도비승)의 뜻이다. 八景(팔경)八景勝(팔경승) 八采景色(팔채경색)의 뜻이고, 仙庭(선정)仙境(선경)의 뜻이고, 上帝(상제)天上萬物主宰神(천상만물주재신)을 지칭하고, ()는 몰다. 빨리 달리다의 뜻이며, 百靈(백령)百靈鳥(백령조) 즉 우리말로는 새목소리가 아름다운 종달새나 꾀꼬리에 해당한다. 玉京(옥경)은 달(月亮-월량)의 별칭이고, 紫府(자부)仙人居所地(선인거소지)의 뜻이고, 旁開(방개)廣開(광개), 四旁展開(사방전개)의 뜻이며, 元都(원도)神仙居所地(신선거소지)의 뜻이고, 金闕(금궐)仙人居所地(선인거소지), ()은 멀다의 (), 먼 곳에 숨어 있다의 뜻이고, 長生(장생)은 장생불로,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한다.

신선이 거처하는 곳은 주위로 산봉우리가 줄줄이 보이고 일출을 볼 수 있으며 아래로 구름바다가 보이는 그런 깊은 산 속 벼랑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북송의 황정견이 도를 묘사하는 구절 萬丈祝融插紫霄 路當窮處架仙橋 上觀碧落星辰近 下視紅塵世界遙”-이 구절 또한 승선태자비에서 묘사하는 선계의 모습 그것과 의미가 상통한다. 

한편 백제평정비라고 말하는 그것에 실려 있는 구절의 표현을 살펴 보자.  原夫皇王所以朝萬國 制百靈 清海外而舉天維 宅寰中而恢地絡 莫不揚七德以馭遐荒 耀五兵而肅邊徼”.  대저 천자(天子)가 만국(萬國)에게서 조회를 받고 백령(百靈)을 지배하는 까닭은 해외(海外)를 맑게 해서 천유(天維)를 일으키고 환중(寰中)에 자리를 잡아서 지락(地絡)을 넓힘으로써, 칠덕(七德)을 드날려 먼 오랑캐의 땅을 어거하고 오병(五兵)을 빛내 변방을 고요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의 백제평제비의 한글 번역은 국편위의 번역을 그대로 가져왔다).

 

승선태자비에서의 百靈”(백령)은 백령조를 지칭하므로 즉 아름다운 새소리를 내는 종달새나 꾀꼬리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반해, 백제평정비에서의 백령의 의미는 신선이 사는 곳 그런 풍류에 대한 의미는 사라지고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파악하라.  

 

도교에서 삼청존신은 원시천존 영보천존 도덕천존이다.  도교에서 天皇大帝(천황대제)는 병권을 쥐고 있어 핵심적인 파워를 행사하는 사람이고 그러기에 높은 위치에 존재한다.  성조황고선덕여왕이 두모신앙, 자미신앙, 부작신앙에서 병권을 장악한 천황대제이었다.  구진상궁 천황대제는 병권을 쥐고 있는 그 파워가 말해주듯, 궁궐의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화덕진군인 성모 두모원군에 대해서는 太上玄靈斗姆大聖元君本命延生心經경전을 참조하라.

문무왕릉 비문에서 천황대제의 의미는, 장례식에 참석한 래회장자(來會葬者)들이 시신이 안치된 수천다발의 나무 쌓인 화장식 주변을 빙 둘려 쌓고 지켜보고 있는 마지막 가는 길인 송왕의 의식을 마치 천사들과 신하들에 함께 데리고 옥황상제에게 올라가는 승선의 모습에 견주어 보고 그 화장식 거행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승선태자비의 표현대로, “仙庭 駕月乘雲 驅百靈而朝上帝의 모습으로 그리며 群臣陪臨 佇立以泣”(군신배림 저립이읍)의 화장 장례식 거행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천황대제는 추사가 잘못 파악한 대로의 당고종의 시호로써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천황대제는 정치행정적인 용어의 의미로써 쓰인 것이 아니다.  비문에서 천황대제라는 말은 화장식의 거행 장면 모습을 신선이 하늘을 노니는 승천-망자의 죽음에 대한 완곡적 표현법- 모습에 비유하는 표현 기교로 쓰였다.  따라서 결자 부분의 문장 내용은 아마도 이러한 신선의 원유 모습을 그려 내고 있는 내용일 것으로 추측된다.  신선의 원유 모습은 굴원의 초사 遠遊”(원유)에서 잘 그려 놓고 있다.  그것을 음미해 보라.  수많은 래회장자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화장식이 거행되면 나무다발에 불이 당겨지고 그러면 하얀 연기가 마치 구름처럼 피어 올라가는데 그런 엄숙한 장면에서 망자가 신선처럼 하늘나라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가월승운하고, 그렇게 신선이 천상낙원으로 승천하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지 않는가? 

 

耀魄寶 天皇大帝

위와 같이 천황대제를 이해하면, “    天皇大帝의 결자 부분의 세 글자는 耀魄寶 天皇大帝일 것으로 추측된다.  요백보 耀魄寶 구진상궁 천황대제를 지칭하는 대칭어임으로 요백보와 천황대제는 같은 의미이다. 

耀魄寶(요백보)는 사전에 찾아보면 별자리 天帝星(천제성)을 말하는데 이 별은 北極五星(북극오성)에 속한다. 星經(성경)의 천황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天皇大帝一星 在鉤陳中央也 不記數 皆是一星 在五帝前座 萬神輔錄圖也 其神曰耀魄寶 主御群靈也.  主御群靈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승선태자비의 驅百靈而朝上帝이라는 구절의 묘사하고 상통한다. 晉書(진서) 천문지에서도 “鉤陳口中一星曰天皇大帝 其神曰耀魄寶 主御群靈 執萬神圖-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나라 양형이 611년 지은 渾天賦(혼천부)에서  天有北辰 眾星環拱 天帝威神 尊之以耀魄 配之以勾陳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주위의 별들을 둥근 환으로 거느린 중앙 별자리가 요백보 천황대제이다. 북극성은 북두칠성에서 기준점으로 찾아지는 별이고, 이 북극성이 후대의 문창성과 같으냐 아니면 다른 별자리이냐를 놓고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다.  하늘의 뜻을 전하는 사자 즉 천사가 문창성이 되는 거고, 그런 천사들의 별들을 거느리는 중심별이 요백보 구진상궁 천황대제이기 때문이다.  구당서 예의지를 보면, “圓丘所祭昊天上帝為北辰星耀魄寶”, 원구단에서 제를 지내는 대상 호천대제를 요백보라 부른다고 적혀 있다. 호천은 유교에서 부르는 명칭이고 주나라의 상징이다. 도교에서는 옥황상제라고 부른다.  北辰星拱(북진성공)이라고 말하는데 북진-북극성은 항상 제자리에 있기 때문에 뭇별들을 빙 둘러 앉은 형태로 거느리고 있다-群星環繞. 천황대제 앞에 耀魄寶” (요백보)라는 말을 덧붙인 그 이유는 천황대제라는 말의 해석에 오해가 안 생기도록 특정하여 강조한 의미가 있다.  

6행 요약  
     
(
如喪考妣)
(문무왕의 서거를) 마치 자기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도했다.
   天皇大帝
(耀魄寶)天皇大帝
(화장의 장례식에서 자작나무단 위에 누어 있는 문무왕의 모습은) 요백보 천황대제는 주위의 별들을 둥근 환으로 거느리며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천황대제가 천사들을 이끌고 상서로운 붉은 구름을 타고 천상낙원으로 들어가는 신선의 승천 모습 같았다.

 

 

7

□□□□□□□□□□□□□□□□□王禮也 君王局量

왕례(王禮)에 맞았다. 군왕(君王)은 국량(局量)

 

王禮”(왕례)는 국가 최고의 예우로써 장례식을 치루었다는 의미이다. 문무왕의 장례식은 왕례 즉 국장으로 치루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기록한 대로 서거한 지 바로 10일만에 장례를 치루어 낼 수 없었음은 불문가지이다. 상식적으로 빠르게는 당태종의 장례식처럼 4월만에 장례를 치루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바, 4월장이면 7월 서거이니 장례식이 거행된 달은 맹동시월 즉 음력 10 10일이었다. 

 

王禮

 

王禮天子 禮儀를 뜻한다. 왕례는 제후왕의 -侯王之禮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천자 예의에 대한 禮記(예기), 明堂位(명당위)에 나타나는 구절凡四代之服器官 兼用之 是故 王禮也을 참조하라.  이 구절에 대한 정현의 주해는王禮 天子之禮也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비문에서 왕례(王禮)天子 禮儀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앞면에서투후 제천지윤이라고 분명하게 천자7묘를 지내는 천자의 후손임을 명시하고 있으므로 상장례 의례에서 천자의 예의에 준한다는 근거는 분명하다. 

()君王局 量數不可 數千萬人 來會葬者-제군왕급()부터 양수불가의 수천만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즉 장례식 참가자들이 온 거리를 가득 메우고 따랐다.

천자 예의에 대한 당연한 귀결로써 왕례야이후의 결자 부분의 내용은, ‘군왕급부터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수천만인의 래방회장례 참가자들이 문상하고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지까지 거리를 메우며 따랐다는 그런 장례식 안장식의 정황을 기술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君王局量□□□□□□□□□□”의 결자 부분을 한자 구절로 써본다면, “()君王局 量數不可 數千萬人 來會葬者 入國聞喪 仍從會葬之禮”.

여기의 ()자는 당국자, 사람의 기량(器量), 도량이라는 뜻 이외에 모임, 연회, 飯局(반국)이라는 뜻이 있고 또 이외에 部分(부분), 局面(국면), 彎曲(만곡) 등의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낱말이다. 無量(무량)은 제한이 없는 무제한적인 것,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뜻, 영어로 numerous의 뜻이다.

  君王局결자부분을군왕급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례 행렬을 따랐고, 이들로 거리가 가득 메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는 뜻으로 연결하여從君王局또는諸君王局으로 메꾸어 보고 싶다. 

왕례의 앞의 결자 부분은, “四月而葬 於西陵之原 文武 王禮也으로 메꾸어 볼 수 있겠다. 문무왕 장례식은 4개월장 국장으로 치루었으며 서릉원에 장사를 지냈고 시호를 문무라 한다. 천자7묘의 왕례이므로 문무왕에 대한 제사는 郊祭(교제)의 대상이다. 이런 의미의 구절 표현이 결자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지 않을까 나는 추측한다. 

한편 文武王 禮也으로 띄어쓰기를 달리해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생전에 국왕이 아니었던 사람을 사후에 추증하여 왕의 타이틀을 붙여준 사람의 시호는 주문왕처럼為文王 이렇게 왕이라는 표현을 쓰는 반면 생전에 제왕이었던 왕에게는 고조처럼高祖崩 諡曰高이렇게 표현함을 감안하여, 為文武 시호를문무라고 하였지, “문무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나는 文武 王禮也”-이렇게 띄어쓰기 하여 그 의미로써-앞에서 설명한대로- 해석한다.

 

7행 요약

(四月而葬 於西陵之原
文武 王禮也)
(장례식은 4월장 국장으로 치루었고, 북산 서릉원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를 문무라 한다)
□□□□□王禮也  장례는 天子禮儀 천자의 예로 거행했다. 따라서 문무왕은 교외 제사의 대상이 된다.
 君王局量□□□-
(/)君王局)
군왕급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장례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8

□□□□□□□□□□□□□□□□國之方勤恤同於八政

나라를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8(八政)과 같았다. …

 

국편위는八政”(팔정)의 의미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八政(팔정)의 의미에 대해서 나는 逸周書(일주서)의 의미대로, 부부 부자 형제 군신 (夫妻 父子 兄弟 君臣)의 여덟 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國之方

 

경사지민 편국지방 京師之民 偏國之方수도서울 시민이나 먼 지방의 백성이나 모두 다 같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과 애도를 표했다는 표현이 전후 문맥상 옳은 것 같으므로 “□國之方의 결자는偏國之方으로 메꾸어 볼 수 있다.

. 

장례식에 참석한 애도자들이 온 거리를 메우고 흐느꼈는데 그 수가 천리행렬을 이룬 것 같았다.  애도의 슬픔은 삼천리 전산야를 울리고 구름을 타고 넘었다.  行號巷哭 者數千萬 繒分塡咽 井陌千里 哀聲滿野 愁氣連雲 이런 의미의 표현이 결자부분을 형성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추측하고 싶다. 

 

勤恤同

 

同恤(동휼)伍之人 祭祀同福 死喪同恤 禍災共之”(國語)으로, 이에 대한 위소의 주해는 憂也이므로, 동휼(同恤)의 뜻은 一同憂傷의 뜻 즉 함께 상심하고 비통해 하고 근심을 나누다.  ()은 함께 염려하다 같이 번민을 나누고 동정(同情)을 표하고 동감하다는 뜻이다.  ()은 근조, 勤謹(근근), 진력을 다하다, 같이 애석해하고 아파하다의 憂慮憐惜(우려련석)의 뜻이다. 勤恤(근휼)은 이와같은 뜻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八政

 

八政(팔정)의 뜻은 대개 3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여기의 문맥상으로 통하는 해석은 일주서에서의 팔정의 의미로써 이해된다. “八政 夫妻 父子 兄弟 君臣 八政 不逆 九德 純恪” (逸周書, 常訓). 여기서 八政(팔정)逸周書(일주서)의 의미대로, 부부 부자 형제 군신 夫妻 父子 兄弟 君臣 이렇게 여덟 관계와 부류를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그런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 없이 전국민이 모두 다 함께 슬픔과 애도를 표했다는 의미가 된다. 京師之民(경사지민) 偏國之方(편국지방)- 즉 수도 왕경에 사는 시민이나 먼 지방의 백성이나 간에 그런 지리적 제약 조건을 초월하여 모두 다 함께 또 팔정(八政-부부 부자 형제 군신-)의 신분 계급의 차이나 그런 제약 조건들을 떠나서 모두 다함께 문무왕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거국적으로 슬픔과 애도를 표했다는 표현이 전후 문맥상 옳다.

 

어릴 적 함께 자란 친구들, 문무왕과 함께 전장터를 누비고 함께 전우애를 다졌던 군인들, 궁정의 문무백관들 이들뿐만 아니라 전국민 모두가 다함께 애도를 표한 것으로 볼 때 전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었음이 바로 확인되지 않는가?

 

8행 요약

 

□□國之方
(京師之民
)之方
수도서울 시민이나 먼 지방의 백성이나 모두 다 같이
勤恤同於八政 부부 부자 형제 군신의 계급이나 신분의 제약을 떠나서 모두 다 함께 상심하고 비통해 했다.
  (친소관계, 지방, 출신신분이나 계급의 차이 없이 전국민이 모두 다 함께 슬픔과 애도를 표했다.)

 

 

 

9

□□□□□□□□□□□□□□□□贍歸乃百代之賢王寔千

국편위는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百代)의 현왕(賢王)이시요, 실로 천()( 성스러운 임금이셨다)” 이와 같이 번역 해석했다. 하지만 나는 글자판독을 이 아니라고 보고 그 대신 으로써 판독한다.  국내의 다수의 판독자는 實歸乃로 판독하고 있으나, 유희애는 글자를 온전히 판독하지 않고 다만 조개 패()만으로써 판독해 놓고 있다. 나는 유희애의 판독문에 의거하여 조개패변을 갖고 있는 한자 가운데 이 구절의 의미에 합당하는 뜻을 갖는 한자를 찾아내 메꾸고자 한다. 이 조건에 맞는 글자는 넉넉할 ()이다. ()(조개 패부)+ (이를 ; 넉넉할 담)으로 구성된 글자이다. 반면에 (갓머리부) + (꿸 관)으로 구성된 글자이다.

()은 공급(供給)하다, 滿足(만족)시키다, 충족시키다, 보조(补助)하다의 뜻을 갖는 낱말이다. 만족시키다의 뜻으로 쓰인 예는 안씨가훈의 儉節用以贍衣食구절이 있다. 글자가 충족(充足)시키다의 뜻으로 쓰인 예는 묵자 절장하편 亦有力不足 財不贍구절에서 찾아진다. 또 맹자 양혜왕에 此惟救死而恐不贍 奚暇治禮義哉구절에서 찾아지는데, 이 구절의 뜻은, “이래서는 죽는 것을 구제하기도 힘이 모자랄 판인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贍歸乃百代之賢王-이 문장은, 참으로 백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하는 현명한 군주라는 판단에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 그 백대의 현왕의 조건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실로 천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하는 성왕이었다는 뜻의 문장이므로, ‘천고의 영웅인물이었다또는천고의 귀감이 되는 성왕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 문선 晉紀總論》에 今晉之興也 功烈於百王”, 건릉 술성기의 興百王之絕典 播十紀之高躅표현이 나타나고 또 懲千古之蠹源 百王之典의 표현이 찾아진다. 따라서 비문의 결자 부분의 문장 내용은 아마도 이런 칭송을 묘사하는 글이라고 여겨진다. 

百代賢王 백대의 현왕

경사지민 편국지방 할 것 없이 가까운 수도에 살건 먼 지방에 살든 거리의 원근 차이 없이 전국민이 또 부부 부자 형제 군신 모두 신분이나 계층 차이 없이 다 함께 전국민이 다 같이 나와서 거국적으로 또 제후군왕급들의 해외 조문사절이 입국 문상하고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문무왕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과 애도를 표하고 그 애도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천리 행렬을 이룰 정도였음을 볼 때, 실로 백대에 한 명 나올까 마는 현명영명 국왕이요, 실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성인군주였다.  이렇게 문무왕이 죽어서도 전국민적인 애도와 추앙을 받은 것은 볼 때 백대의 현왕이요 천년의 리더가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명약관화하지 않는가? 

장례식에 참석한 애도자들이 온 거리를 메우고 흐느꼈는데 그 수가 천리행렬을 이룬 것 같았다, 애도의 슬픔은 삼천리 산야를 울리고 구름을 타고 넘는 것 같았다는 이런 애도 행렬을 묘사하는 한자 구절로 표현한다면, 行號巷哭 者數千萬 繒分塡咽 井陌千里 哀聲滿野 愁氣連雲 이런 의미의 표현이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거국적인 장도(葬途)행렬로 평가해 볼 때, 실로 천고의 영웅인물이 아니겠는가?

실로 천고의 영웅 인물

 

歸乃百代之賢王寔千□□□□” 부분의 결자는, 양나라 심약의齊故安陸昭王碑文에 나타나는 구절인譽滿天下 德冠生民 蓋百代之儀表 千年之領袖”, ‘명성은 만천하에 넘쳤고 보통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니 진실로 백대의 사표가 되고 천년의 영수-지도자로 남을 것의 의미로 새기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자 부분을 다음과 같이 메꾸어 본다.

贍歸乃百代之賢王
寔千年之領袖緬矣
실로 백대의 현왕이요
실로 천 년의 영수가 되리라


寔千年之領袖緬矣 뜻은 寔千古貽鑑百王緬矣의 구절과 그 뜻이 서로 같다. 문무왕은 백대의 현왕이고 또 그보다도 더 높은 영웅인물 즉 천 년동안 그 백대의 현왕들이 국정에 임할 때 참고해야 될 거울-瑩鏡(형경), 태감이 될 천 년의 영수(최고영도자)가 될 것이라며 한없는 칭송을 보내고 있는 헌송의 의미가 느껴진다. 

()은 실로, ()은 아득히 먼 천년까지 遙遠(요원)하다, 길이길이의 뜻이다. 백대의 현왕이요 천 년의 귀감이라는 말은 그가 후세의 모든 지도자의 귀감이 되고, 영원한 민족의 사표가 되리라는 뜻, 요즈음 말로 표현한다면, 문무왕은실로 천고의 영웅인물 寔千古英雄人物也에 해당된다.

聖王 성왕

재덕(才德) 능력과 인품 덕성이 보통사람들과 정말 다르게 매우 뛰어난 사람,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였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제왕-才德超群達 帝王 성왕(聖王)이라고 부른다.   예기(禮記)冠者 禮之始也 是故古者聖王重冠”, 좌전(左傳) 환공편의夫民 神之主也 是以聖王先成民而后致力于神의 사례를 보라.  이러한 의미에서 현왕(賢王)과 성왕(聖王)을 댓구적 표현으로 연결하여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贍歸乃百代之賢王

()는 돌아가다 返回, 回到本處 뜻뿐만 아니라, 趨向(추향), 추세 또는 結局(결국)이라는 뜻이 있는 낱말이다. 이 문장의贍歸乃는 추향 또는 결국에 이르는 뜻으로 쓰였다. ()은 원래, 本來(본래)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개시적인 最初(최초), 開始(개시)의 뜻을 갖는 낱말이다. 귀원(歸原)하면九九歸原의 성어처럼 원래의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쓰인다. 한편 이 귀원의 뜻은, 앞 문장의歸乃”(귀내)의 표현처럼, 미래에 대한 예측의 개념에서 결국에는 최초 개시적인 것의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년이 지나가고 보면 결국 문무대왕이 최고의 세상을 열었구나, 그런 천고의 성웅이었네,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예측적 단정의 표현인 것이다. 실제로 이제 천 년도 훨씬 넘은 일천오백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이 시점까지 한반도를 통일하여 위대한 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문무왕 단 한 사람뿐이지 않는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처럼,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풍신수길처럼 말이다. 贍歸乃百代之賢王 이 구절은 문무대왕은 백대의 현왕으로 평가받을 만큼 백대의 현왕의 조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지난 2천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본다면 이 문무왕릉비 비문의 기록에 쓰여져 있는대로 문무대왕 비문 기록자의 예언이 입증되는 것이 아닌가? 두번 다시 생각해 보자. 앞으로 다가올 미래 천년 동안에 걸쳐서 위대한 성웅으로 기록될 문무대왕이라면 그 문무대왕 또한 예전의 황금시대 천하태평성대를 열었던 요순우 임금님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든 중흥 군주가 아닌가? 성경의 표현대로 우리 인류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갈 뿐인데, 결국 미래라는 것도 부활의 개념이지 않는가? 조상 선조 부모가 있기 때문에 미래 세대 또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천체물리학의 이론으로도 입증이 되지 않는가? 병아리가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돌고 도는 기원의 논쟁에서 결국 승자는 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빅뱅 이론을 살펴 보라.   

백대의 현왕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표현은 미래 예측의 영역에 속한다. 문무왕 이후 백대가 지나봐야 사실이 가려질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나온 역사를 뒤돌아보건대 문무왕의 통일 시대만큼 한반도가 황금시대를 구가한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백대의 현왕일 것이란 평가를 나는 극구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조선시대 초기 성왕 세종대왕의 시기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민족중흥의 역사를 쓰긴 했지만 문무대왕 때 누리던 영토까지는 회복하지 못했고 또 여진족과 왜국 등 주변국과의 정치외교적인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문무대왕의 업적만큼에는 조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9  
□□贍歸乃百代之賢王 참으로 백대의 현왕이라고 말함에 부족함이 없다
寔千□□□□□□-
寔千(年之領袖緬矣)
실로 천 년의 영수로 남아
(영원한 민족의 사표가 될 천고의 영웅인물이외다)

 

 

10

             淸徽如士不假三言識駿

문무왕이 백대의 현왕이요 천년의 영도자이고 길이길이 빛날 민족의 사표라면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길이길이 빛나게 그 무엇을 해야 될 의무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그 하나가 문무왕릉을 세워 불멸의 천고의 영웅인물을 후세에 전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길이길이 빛나게 할 어떤 상징성 문무왕릉 충혼탑을 새기는 것이 어떻겠는가?  장례식도 그 때까지 내려온 전통에도 없는 새로운 방식인 화장식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문무왕이었으니 우리들 또한 어떤 새로운 형태로 그의 고귀하고 높은 숭고한 불멸의 그 영웅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건물을 남기고 길이길이 간직해 나가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당시 지도층은 물론이고 거국적인 여론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결론이 바로 문무왕릉을 상징적으로 건립한 배경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淸徽如士

()은 맑고 깨끗하다 담담하다 즉 맑은 물이 흘러내리듯 투명하고 막힘이 없다, ()는 아름답다 찬란하다 ()의 뜻이다. 清徽(청휘)는 청미한 음성이란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청조(清操) 즉 고상한 절개 節操 뜻한다. 사대부란 월왕 구천을 섬겼던 도공의 신 범려가 말하듯이, 유신이 애강남부에서 통탄하듯이, 주군이 욕을 당하면 자결하거나 깨끗이 물러나는君辱臣死”(군욕신사)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신하의 윤리 원칙이었다.

()는 문사 무사 변사 장사 (文士 武士 辯士 壯士)를 다 포함하는 사대부(士大夫) 계층 즉 최고 지도자하고는 구별되는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관리자 계급을 말하고 국왕을 보좌하는 신분을 말한다. 국왕은 전체를 아우르는 일을 하므로 아무래도 학문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대부에는 지식과 학식이 못 미칠 수 있는 현실적 한계를 갖는다. 그래서 국왕은 때때로 신하들로부터 머리를 빌리지 않던가? 

문무대왕은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머리가 명석하고 비상해서 少有好學 明晰秘象(소유호학명석비상) 준골천리 걸출한 준재였다.  학문을 숭상하고 배움 연마에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히 절차탁마한 그답게 항상 지식인층을 우대하고 존경하였고, 그의 학식은 지식인층 학문하는 사대부만큼 막힘이 없이 깊고 뛰어났다-淸徽輝如士大夫, 한 마디를 말하면 세 마디를 질문할 정도로 이해력과 통찰력이 높았으며, 불과 세 마디만 말해도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 있었다-不假三言.

 

不假三言.

三言(삼언)은 세 문장으로 끝내는 핵심 대화, 요즈음의 삼행시처럼 짧은 핵심구, 세 마디 촌평 등의 뜻이다. 전국책의 예문 구절을 보자.  人有請者曰 臣請三言而已矣 益一言 臣請烹 郭靖君 因見之 客趨而進曰 海大魚 因反走”.

대왕은 세 마디만 나눠봐도-不假三言(불가삼언)- 핵심을 훤히 꿰뚫어 볼 줄 아는 학식과 지식과 통찰력이 매우 뛰어난 출중한 인재였다. 

 

識駿嘗問(식준상문)

駿()은 신속하다는 뜻이고 신속하다는 뜻의 준골은 머리 두뇌 회전이 빠르다 그런 준재를 말한다.  준골(駿骨)은 양마(良馬) 천리마라는 뜻이 있지만 戰國策(전국책)에서 소개되는 고사성어로 인해서 걸출한 인재를 뜻하는 말로 굳혀진 말이다. 

 

불치하문

시경에 先民有言 詢于芻蕘”(선민유언 순우추요), ‘예전의 높고 어진 사람이라면 꼴베는 사람이나 나무꾼에게도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태도가 국가의 최고 지도자에게는 필요하다는 현자의 말씀이다.  

 

騮識駿骨”(화류식준골)라는 말이 있다. 즉 준마가 천리마를 알아보고 천재가 수재를 알아 본다.  노자도덕경 제41장의 상사 중사 하사의 개념에 상통한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듣고 나면 신실하게 행동으로 옮기려 한다, 중간치기는 진리를 듣고 나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긴가민가한다, 하삐리는 진리를 듣고 나면 어이없게도 크게 비웃는다, 만약 하빨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진리가 어떻게 나오던가? 갈릴레오에게 그랬듯이 뉴튼에게 그랬듯이 아인슈타인에게 그랬듯이. 처음엔 다들 무시당하고 비웃음을 샀지 않는가? 제눈에 안경이고, 여행도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며, 안목은 사람 따라 다르고, 사람은 제능력껏 알아보는 것이다.

折節下士(절절하사)는 삼국지 위지 원소전에 나오는 구절인데, 비록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유능한 현인에게는 자기 몸을 낮추고 굽혀서 절을 하며 예를 갖추고 모신다는 敬賢下士(경현하사)의 뜻인데, 이와 비슷한 말로는 求賢下士(구현하사) 禮賢下士(예현하사) 謙恭下士(겸공하사) 등의 표현이 있다.

총명현군이 어떻게 능력있는 사람을 쓰는 지에 대해서, 사마천의 史記 원앙황착열전에 나오는 구절과 자치통감 당태종조의 기사에 나오는 구절을 참조하여, 駿骨千里(준골천리)의 개념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결자부분의 내용을 骏骨千里 兼聽則明 偏聽則暗 從善如流 從諫如川 上日聞所不聞 明所不知 日益聖智-이런 내용으로 제시한다. 

廳訟(청송), 경청의 지혜

총명현군의 첫 번째 요건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고 도교 신앙이 특히 부작신앙의 제1원칙 또한 경청하는 것에 있다.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면 귀가 열려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성인군자들은 공자처럼 어눌하게 말을 할지는 몰라도 듣기를 잘하는 훈련된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 불소불통의 소통능력이 뛰어나려면 일단 먼저 듣기 훈련이 중요하다. 무소불통할 정도면 얼마나 총명하고 현명해야 할까? 묻고 답하기를 잘해야 한다.  즉문즉답할 수 있으려면 머리가 뛰어나야 한다. 이러한 뜻을 배경 지식으로 삼아서不假三言 識駿  부분의 결자를 추측해 메꾸어 본다면, “不假三言 識駿嘗問으로 하여不假三言 識駿嘗問 聞所不聞 明所不知 日益聖智”, 또는不假三言 識駿嘗問 兼聽則明 偏聽則暗 從善如流 從諫如川이런 내용의 문장이 문맥상 연결된다고 보인다.  여기서 ()은 맛을 보다 辨別滋味(변별자미)의 뜻이고, 상대방의 마음을 떠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駿嘗問言”(준상문언)의 표현은 조조의 아들 조식의 辯道論”(변도론)劉子駿嘗問言의 구절이 나온다.

 

왜 총명현군은 묻고 답하기를 즐겨 하는가?

그것은 능력있는 사람을 쓰려고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聰明賢君 欲求取賢 能有九德. 능력있는 지도자는 부하도 뛰어난 사람을 고르려고 한다. 반면 지도자감이 못되는 하사들은 혹시나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는 않는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쓰지 않으려는 천박함을 보이기 쉽다. 제왕이 토론하기를 그치고 주지육림에 빠져들면 나라가 망할 징조이기에 공자도 그 곁을 바로 떠났다.

사마천은 굴원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人君無愚智賢不肖 莫不欲求忠以自爲 擧賢以自佐”: 군주는 자신이 지혜롭든 어리석든 현명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충신을 기용하여 자기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찾아서 자신을 보좌하게 하는 만들었다.

그런데 왜 현왕이 나타나지 못하고 나라가 어지러운가?  사마천은 그것은 군주가 충신과 불충을 구별하지 못하고 현명함이 무엇인지 판단을 제대로 못한 군주에게 있다는 것으로 그에 대한 답을 했다. 근세 조선사나 가까운 현대사를 살펴보면 사마천의 평가는 옳다는 생각이 든다. 

10행 번역 요약

 淸徽如士 (그의 학식은) 학문하는 사대부 학자만큼 막힘이 없이 깊고 뛰어났다..
不假三言 한 마디를 말하면 세 마디를 질문할 정도로 이해력과 통찰력이 높았으며, 불과 세 마디만 말해도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 있었다.
識駿(嘗問) 준마가 천리마를 알아보고 천재가 수재를 알아 보듯, 문무왕은 판단력이 뛰어났고, 막힘없는 즉문즉답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는 질문능력 또한 뛰어났다. 

 

 



[1] “The meaning of the word is its use in the language”(단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달렸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구조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정의되는지 보다, 오히려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 사회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It is more important how the term is used in the common life of the community of speakers, rather than how it is defined in a logical system.”)  천황대제가 당시 언어 사용자(competent speakers) 가운데는 별자리 점성학의 생생한 살아 있는 의미로 쓰였겠지만 유교 사회의 최정점기 조선 후기 그것도 관료사회의 직업적 배경이 매우 강했던 추사로서는 신라 당시의 도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