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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송원대에 나타난 九九消寒圖 구구소한도 형식

by 추홍희블로그 2021. 11. 12.

송원대에 나타난 九九消寒圖 구구소한도 형식

 

삼국사기의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의 구절의 문장 형식을 살펴보자.  이 구절 45자는 구구소한도 형식으로 분석된다. 

 

九九消寒圖구구소한도(寫九, 數九)는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 시작되었던 문장 형식과 풍속이기에 당나라 시대의 문무왕의 유조문 형식과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릉 비문에 쓰여졌을 만가시의 형식은 5 5자 형식의 보허사의 문장 형태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유조문 45자 문장을 9 9자 형식에 맞추어 띄어쓰기를 해 보면 다음과 같이 배열된다.

 

삼국사기 원문 구절 구구소한도 형식 배열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且山谷 遷貿人 代推移
吳王北 山之墳 詎見金
鳧之彩 魏主西 陵之望
唯聞銅 雀之名 昔日萬
機之英 終成一 封之土
   

강한 추위가 오는 겨울철엔 담장 밑의 따스한 햇볕이 그리운 시기이다.  우리 세시 풍속에 봄이 오는 입춘 절기에 문쪽에다 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대길건양다경이라는 글귀를 써붙이는 풍속이 있는데, 그와 같이 송원대에 북방의 민족들은 구구팔십일의 3개월 지속되는 기나긴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서 매일 한 글자씩 떼어 내려가는, 그 혹독한 3개월 간의 긴 겨울을 버텨내고 따스한 봄을 맞이한다는 겨울내기의 풍속으로써 구구소한도라는 풍속이 전해졌다고 한다.  입춘대길의 글귀를 써붙이는 풍속은 그와 같이 혹독한 추위의 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새봄이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겨울내기의 한 풍속이 아니었을까 나는 미루어 짐작해본다.

 

이와 같이 문무왕 유조문 중의 45자를 구구소한도 형식으로 분석해 보면,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송나라 이후 북방민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공 위협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당시 상황 그리고 김부식이 송나라가 아니라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당시 급박했던 국제 정세 속에서 금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역사를 조작하고 갖다 바친 망작임이 입증된다고 여겨진다.

 

국편위의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구절 번역은 오류를 범했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兔穴其旁 이 구절을 국편위는 다음과 같이 번역 해석했다.  또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하지만 위와 같은 국편위의 번역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편위가 번역한 대로 차는 라고 번역되기 보다는, 단순한 문언조사로써 같은 의미로 쓰였다.  金鳧금부는 글자 그대로의 뜻대로금으로 만든 물오리라고 글자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무리가 따르는 해석이 된다.  금이란 Gold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리로 주조한 청동물을 금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따라서 金人이라는 말과 같이 金鳧는 꼭 금이 아니라 청동주조물로 만든 금부를 말하고 또 金鳧금부는 제왕의 무덤에 부장하는 부장품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나라 왕은 유명한 오왕 합려吳王闔廬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오왕 무덤에서 금부를 볼 수 없다는 표현은 그 무덤이 이미 도굴되어서 제왕의 부장품을 더 이상 무덤 속에서 찾을 수 없다는 즉 무덤이 도굴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구절을 조금 다시 가다듬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어 가고, 인간 세상도 바뀌어 가느니.

북산의 오왕 무덤들은 도굴되어 부장품을 남아 있지 않고,

위나라 황제 조조의 무덤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대라는 이름만 전해질 뿐. 

지난 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천하의 영웅도 결국 무덤 속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네.

먼 세월이 흐르면 나무꾼과 목동이 그 위를 지나가며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파고 든다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음만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  死者 人之所必不免也 處必然之勢”.  모든 사람은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죽을 이 몸이거늘, 그래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떠나 보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때 하늘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는 듯한 격한 슬픔과 애통함을!  산천도 놀라 목이 메이고, 내리던 눈발도 멈추어 선 그 때의 극한적 슬픔을 기억하는가?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그 때의 아픔을!  오호애제 嗚呼哀哉 于時天震地駭 如天斯崩 如山斯傾.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구절의 표현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유신庾信의 애강남부의雙鳧永去一雁空飛”, “兔而窟穴, “指愛子而託人 知西陵而誰望 非無北闕之兵 猶有雲臺之仗”, 유신의 拟連珠의연주시 중雀台弦管空 望西陵之松“, 그리고 장재의 七哀詩칠애시에서의北芒何壘壘 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 皆雲漢世主”, “蹊逕登童豎 兔窟其中, “為萬乘君 為丘山土구절 등에서 차용한 표현인 것으로 추측된다.  문무왕릉 비문에서의 애도시 挽歌辭만가사의 문장에 이러한 표현 구절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비문이 깨어져 떨어져 나가 사라지고 마멸되고 만 안타까운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칠 증거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복원할 길이 없겠지만 문무왕릉 비문의 원래 문장의 내용은 장재의 칠애시와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보이는 挽辭만사 애도시의 표현을 인용하여 문무왕의 서거에 대한 극도의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한 문장이 비문의 내용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러한 원문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지 않았고 대신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역사를 조작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삼국사기에서樵牧歌其上 兔穴其旁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구절은 비문 원래의 문장 그대로를 전재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과 조작의 차이점을 가려낼 수 있을까?  삼국사기와 문무왕릉의 비문과의 비교에서 유일하게 같은 구절로 확인되는 문장은 “□牧哥其上 兔穴其傍 이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또 문무왕릉 비문의 東征西□”과 같은 뜻으로 삼국사기는 西征北討서정북토라는 표현을 썼다.

 

兔之悲 호토지비

 

비문 구절의 兔穴其旁 兔之悲호토지비를 표현한 뜻으로 쓰였음이 분명하다.  호토지비 즉 여우와 토끼는 서로 원수지간이지만 그 원수지간의 동물도 상대방이 죽으면 슬퍼할 줄 알고 그래서흐느끼며 제 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호토지비의 의미로써호토혈기방을 쓴 것이라고 이해된다.  애강남부의 兔而窟穴호토이굴혈, 칠애시의 兔窟其中호토굴기중, 문무왕릉비문의 兔穴其旁호토혈기방은 모두 거의 같은 뜻의 글자로 쓰여진 구절이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거의 의미가 같은 애도시의 표현이지만 각각 쓰인 문장에서의 내용과 그 의미는 각각 달리 해석된다.  장재의 칠애시의 兔窟其中호토굴기중은여우와 토끼가 무덤 근방에 굴을 판다즉 영웅의 무덤이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헐고 황폐화된다는 인생무상을 뜻하는 구절로 쓰였다.  유신의 애강남부에서의 兔而窟穴호토이굴혈은예전에는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황폐화된 곳이었지만 천자의 기운이 피어 오르면 여우와 토끼가 굴을 파고들 수가 없게 된다는 뜻으로 쓰여서 장재의 칠애시의 뜻과는 반대의 의미가 된다. 

 

그러면 문무왕릉 비문의 兔穴其旁 뜻은 어떠한가?  문무왕릉 비문 구절은 무덤의 황폐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여우와 토끼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굴 속으로 들어가 애도를 표한다兔之悲호토지비의 뜻으로 쓰였다.  ! 목동아의 가사 내용처럼, 양나라 시대 임방의 구절에 나오는 兔成穴 童牧哀歌호토성혈동목애가의 의미로 해석해야 함은 분명하지 않는가? 

 

국편위의 삼국사기 구절의 번역은,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국편위는 “□牧哥其上 兔穴其旁”의 구절은 이 문장 바로 앞의 구절을 이어받아 즉 지난 날의 영웅도 죽으면 여우와 토끼가 무덤 옆에 굴을 판다는 의미로 번역 해석하고 있다.  이는 장재의 칠애시의시간이 지나면 모든 무덤이 황폐화된다는 인생무상의 의미를 반영하게 된다.  장재의 칠애시가 나온 배경은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 상황에 있다.  혼란한 시국에서 전쟁이 자주 발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사회였다.  당시 사람들의 인생관이 어떻게 변해 갔겠는가?  사람들은 인생무상의 절망감에 휩싸여 들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요에흥타령이 만가로 전용되고 있는 것, 아리랑의 가사들이 역설적인 의미로 전용되는 것, 근대 일본에서 에도 막부 정권의 말기로 접어 들면 초기의 신성한 섹스가 방탕무도한 포르노로 변질되는 것, 이런 사례들을 통해 보면 모두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낱말 낱개의 의미로써 잘못 해석하고자 할 때는 문맥의 의미를 잃고 오해를 하거나 그 본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문서 조작을 하지 않아도 세월의 변천과 함께 언어의 의미 또한 변하고 그리고 시대상황이 변하면서 언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간세상의 이치인데, 언어 해석의 다툼이 아니라 아예 문서를 조작한다면 그것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가 된다.

 

아 목동아! 목동애가 兔成穴 童牧哀歌

 

양나라 시대 임방의 싯구절 兔成穴 童牧哀歌에서 동목애가라는 표현이 나온다. 

 

목동과 애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1913년 영국에서 나타난 대니보이만큼 현재 국제적으로 알려진 노래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그 대니보이의 가사 아 목동아 대니 보이 Danny Boy 가사를 여기에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Danny는 다니엘의 애칭이니 사자의 밥이 되었다가 살아 남은 다니엘의 이야기를 상기하면 된다.  대니보이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바로 직전에 나타난 전쟁과 죽음에 관한 노래이다.  성경의 다니엘서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예언서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 않는 면이 있긴 하다.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아이덴디티 독자 고유성을 지켜낼 것인가?  여기선 어려운 사회과학적 분석은 차치하고 우선 대니보이의 가사부터 재음미해 보자.

 

아 목동아, 피리, 피리 소리를 불러다오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산마루에서 골짜리로 울려 퍼지네

여름이 가면 장미꽃은 시들어 떨어지겠지.

그 땐 너도 가야 하는가?  그렇다면 난 기다릴 거야.

하지만 다시 초원이 푸르른 다음 해엔 에 너도 다시 돌아오겠지.

그렇지 않다면 골짜기는 눈으로 덮여 적막해지겠지.  

해가 나든 숨든 나는 여기에 나타날 거야.  

해가 나든 숨든 나는 여기에 나타날 거야.  

오 목동아, 오 목동아, 난 널 사랑해

하지만 네가 다시 돌아올 땐 꽃들은 모두 시들어 졌을거야.

내가 죽었거든, 뭐 이미 죽었을 테지만

내 묻혀 있는 곳을 찾아 내어

무릎 꿇고 내게 작별인사라도 해주렴.

 내가 그걸 들을 수는 있을 꺼야.  내 무덤을 사뿐히 밟는 소리까지

그러면 내 무덤은 더욱 따뜻해지고 아늑해질 테지.

네가 고개 숙여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네가 다시 올 때까지 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테야.

 

나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牧哥其上 兔穴其傍 구절의 결자 부분을 위진남북조 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童牧으로 이해하고 童牧哥其上 兔穴其傍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童牧哥其上 兔穴其 동목가기상 호토혈기방

 

童牧哥其上 兔穴其傍목동가기상호토혈기방은, 목동이 그 위에서 슬픈 애가를 부르니 토끼와 여우마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제 굴 속으로 들어가네.  童牧哥其上 兔穴其傍 장재의 칠애시의 蹊逕登童豎 兔窟其中 구절과 닮아 있다.  七哀詩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시이기 때문에 만가하고 성격을 같이한다.  이 구절은 삼국사기에 전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무왕 유조와 비문 비교 분석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이 구절의 전후 문맥상의 의미와 그 표현기교를 함께 살펴 볼 필요성이 크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보자.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兔穴其旁.  삼국사기의 이 구절에 대한 국편위의 번역을 보자.  ()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1 ()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2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1  越絶書》에 吳王 합려가 죽어 虎丘山 장사지냈는데, 血池 만들고 黃金珠玉으로 鳧鷹 만들어 띄웠다고 한다.  2  鄴都故事》에 曹操 일찍이 銅雀臺 짓고 즐기다가 죽음에 이르러 아들들에게 부탁하기를내가 죽은 후 나의 伎人 동작대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臺上 6 설치하고 밑에 細布 치고 아침 저녁으로 등을 바치게 하며 朔望에는 앞에서 伎樂 연주케 하고 너희도 때때로 西陵墓田 바라보라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가 전한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兔穴其旁 구절의 글자수 형태는 6 6, 5 5자 형식이다.  이런 글자수 파격은 운과 율의 격을 중시하는 한시 구조와 형태에 어울리지 않는 측면을 보여준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이 구절의 글자수 형태는 1 4 4, 2 4, 2 4, 2 4, 2 4, 2 4, 2 4, 5 5 글자수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문장 글자 수의 구조는 운율을 중시하는 한시 구조 더욱이 당시 오언한시나 보허사의 형태에는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문무왕릉 비문의 애도시 원문을 그대로 전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의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구절에 대한 국편위의 번역은,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국편위는 이렇게 두 구절을 한 문장으로 묶고서 해석하였으나, 한시에서 구절의 글자수가 6자에서 5자로 급변할 때 그 문맥상 연결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장재의 칠애시 전문을 다시 보라.

 

삼국사기의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구절 부분은 장재의 칠애시北芒何壘壘 高陵有四五 借問誰家墳 皆雲漢世主그리고 유신의 애강남부의知西陵而誰望 非無北闕之兵”, “李陵之雙鳧永去의 의미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왜곡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庾信유신의 의연주擬連珠시에서의雀台弦管空 望西陵之松구절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살짝 바꾸어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장재의 칠애시는 한 때의 영웅들의 무덤도 시간이 흐르면 모두 폐허가 된다는 인생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도 결국 잊혀지는데 하물며 우리 보통사람들의 죽음은 무얼하랴,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의미를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패배적 조소적 소극적인 의미를 크게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기본적으로 만가사는 망자에 대한 애도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어떤 비판이 끼어들기 힘든 측면이 있다.  국편위가 번역 해석을 함에 있어서, 문무왕릉 비문에 대해서 장재의 칠애시와 유신의 애강남부를 비롯한 시구절과의 연관성을 전혀 언급조차 해내지 못하는 있음은 심히 유감이고 안타깝다.  애도시의 의미와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그에 대한 해석이 엉뚱한 의미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무지에서 범하는 잘못은 누구의 책임인가?  지금은 이천으로 이전하였지만 이전에 남한산성 아래 송파구에 주둔하던 육군 교육사령부나 육군 교도소에서 저녁 6시 나팔소리가 장중하게 울려 펴지면 군영에 갇힌 자들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은 만감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관현악 나팔소리가 어디까지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양나라가 반란군에 접수되고 외국 침략자에게 유린당해 도성이 무너질 때의 참담한 상황을 묘사한 구절 그리고 위나라 조조가 죽음의 병상에서 남긴 유언 내용 등은 미래세대를 위해서 현 세대가 죽음을 불사하고 국가사직을 지켜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책무를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