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부에서 투후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당나라 이선이 투후를 김일제로 주해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피발좌임 분신니재(被髮左袵奮迅泥滓)”은 이민족이 다스리는 오랑캐 땅에 잡혀 들어가 치욕을 받고 그것을 딛고 일어선 소무와 장건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나라 이선은 “피발좌임 분신니재”를 ‘이민족 출신’으로 해석하여 서북쪽 오랑캐 땅을 지배하는 흉노족 이민족 북방민족 출신으로서 한나라에 귀순한 김일제로 인식하고 그와같이 주해를 달았다. 하지만 한족이 이민족 땅으로 들어가 구금되고 다시 금의환향한 사람과 원래 이민족 출신이 한나라로 귀순해 온 것은 그 출신 배경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둘다 이민족 땅에서 들어온 것은 동일한 점이지만 동쪽의 동이족 출신인가 아니면 서북쪽의 흉노족 출신인가는 서로 반대쪽에 위치한다는 다른 점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동이족은 상나라를 건설하고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정통 민족이다. 동이족은 변방 소수 민족이 아니라 주나라에 앞선 거대한 상나라 용산문화를 건설한 주역이다. 주나라가 동천하여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 천자국을 건설했는데, 중국의 중심 민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경우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출한 두가지 경유의 길로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였다가 거기서 잡혀 온갖 치욕을 받았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결국 금의환향한 사람을 반악의 서정부에서 “투후”로 지칭한 것이다. 반악은 韓(한)나라 고지에서 현령을 지냈고 그리하여 누구보다도 상나라와 한나라의 역사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반면 김일제는 이민족이 다스리는 오랑캐 땅 출신으로 어릴 때 귀순하여 교외 목장에서 말을 키우는 천한 직업에서 일약 황제의 곁을 지키는 고관대작 시중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인 서정부 작가 반악은 서정부에서 투후를 동이족으로서 서쪽으로 진출하였다가 외롭게 쓰러져간 이릉 또는 이광리 장군같은 사람을 가르키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투후 상구성을 가르킨다. 서정부의 “피발좌임 분신니재(被髮左袵奮迅泥滓)”의 표현은 오랑캐 땅에서 잡혀 포로 생활의 치욕과 갖은 고초를 겪다가 끝내 살아 돌아와 출세한 소무와 장건을 가르키는 표현인 것이다.
서정부 구절에서 “투후”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았으므로 투후 상구성과 투후 금일제 가운데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칭하는지 그에 대한 판단은 문장 전체 내용과 이 구절에 나타난 구체적 인물들의 전체적 문맥과 문장 내용상 상관성을 모두 함께 따져서 종합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사항이다.
당나라 때 이선의 주해에는 투후를 금일제라고 주석하고 그에 대한 근거로서 한서의 금일제전의 구절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놓았다. 한편 투후 상구성에 대한 전기는 한서에 나타나지 않고 다만 반란죄로 사형당하고 멸문지화를 입었던 유굴리의 전기 속에서 투후 상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이 등장하고 있고 또 한서 공신표에 투후 상구성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반악의 서정부에서의 “투후 충효순심” 구절에서의 투후가 투후 상구성인지 아니면 투후 금일제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당나라 이선의 주해는 투후 금일제는 생전에 제후의 봉작을 받지 않았다는 한서의 기록을 무시하였고 또 투후 상구성에 대한 기록은 주석을 달아 놓지 않았는데, 강희자전에서 투후 상구성과 투후 금일제 이 두 사람을 동시에 투후로 기록해 놓고 있음을 참조한다면 이선의 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서정부 작자인 반악은 산동성 그리고 낙양 즉 하남성 지방의 인재들 중 역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열거하고 그들을 닮아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기도록 조언을 하고 있다. 동남쪽은 인재가 많기로 소문나 있지 않는가? 항우에 대한 칭송가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구절 다음에 나타나는 말로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의 동남쪽 산동성과 예주와 동해안 지방은 인재가 많기로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맹자 공자 노자 순자 묵자 도주공 노반 등 모두 열거하기엔 종이가 모자랄 정도가 아닌가?
반악은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다만 팔왕의 난리통에 삼족이 멸족당한 역사의 아픔 속에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말았지만 투후와는 달리 다행히도 반악의 글들이 살아 남아 지금껏 전해 내려온다.
西征(서정)부는 서쪽 정벌이라는 뜻 그대로 서쪽 흉노족을 정벌한 사람들을 거론하고 있는 문장이다. BC 770년 주나라가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것은 서쪽 견융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주천도와는 반대로, 서정부는 동이족인 동남방 사람들이 서쪽 즉 서안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서북쪽의 흉노족을 정벌한 장군들과 그에 관련된 역사를 거론하고 있는 거대 서사시이다. 투후상구성은 흉노족 정벌 전쟁에 참가해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군이었지만 투후김일제는 흉노족에서 귀순투항한 사람이었으므로 서정부에서 거론한 인물군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서정부 구절과 유사한 표현이 들어 있는 한서에서는 “김일제”라는 이름이 거명되어 있는 반면 반악의 서정부에는 김일제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는 이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반악의 이 구절은 유신과 당태종과 무측천과 문무대왕 비문에서 서로 똑같이 발견된다. 반악과 유신 그리고 당태종과 무측천으로 이어지는 혈연관계가 같은 정서를 핏줄 깊숙이 간직해 온 것이다. 반악은 서정부에서 환관내시들을 경멸하고 있는데 따라서 금일제 같은 한무제 때 궁정내시를 칭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금일제는 대의멸친이라는 명분하에 죄를 지은 즉 자기 자식마저 죽이고서 권력에 아부아첨했던 궁정내시였지 않았는가? 금일제는 곽광의 부하로 외척 전횡세력의 꼭두각시였다. 충신효자라고 말하는데 충신효자라면 어찌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서 자기 자식마저 죽이는 그런 몰인정하고 비정한 사람이겠는가?
일인투명 족구천부
투후상구성같이 대역 불경죄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더라도 후손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기 희생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충신효자로 칭송받지 않는가? 투후김일제는 흉노족 이방인 출신의 궁정무사로서 동남방 동이족 사림 문사 출신들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투후상구성은 황실 종친이 맡는 선대 황제의 왕릉을 지킨 첨사로 종친이었기에 “투후제천지윤”이라는 표현에 논리적으로 어울리는 인물이지만 투후 김일제는 천자의 후손이 아닌 이민족 이방인 출신으로서 귀순투항한 사람이었기에 제천지윤이라는 표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투후 금일제는 고명대신으로 늙어 병사했기에 목숨을 버리면서 굳은 절개를 지킨 충신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투명이고절양(投命而高節亮)의 의미는 ‘황제를 모독했다’는 불경죄 판결을 받자 자결을 택해 절개를 드러난 인물인 투후 상구성에 어울린다.
이순신 장군이 말한 “一夫當逕足懼千夫”(일인당경족구천부) 표현 또한 그와 같은 의미이다. 일부당경족구천부는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병졸들이 두려워한다”는 즉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이런 뜻에서 더욱 발전하여, 오자병법의 설명대로 “一人投命足懼千夫” 일인투명 족구천부 즉 “한 사람이 결사항전 죽음으로써 일당천의 값어치를 해낸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必死則生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被髮左袵 奮迅泥滓(피발좌임 분신니제) 해석
被髮左袵 奮迅泥滓(피발좌임 분신니제)-이 구절에 대한 추홍희 번역해석이 이선의 주해와는 가장 크게 대비된다. 추홍희가 이렇게 장황하게 서정부 해설을 덧붙이는 이유는 당나라 때의 이선의 주해가 이 부분에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대신 추홍희의 해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내기 위해서이다.
논어 憲問의 被髮左衽 | 독음 | 번역 |
子貢曰:「管仲非仁者與?桓公殺公子糾,不能死,又相之。」子曰:「管仲相桓公,霸諸侯,一匡天下,民到于今受其賜。微管仲,吾其被髮左衽矣。豈若匹夫匹婦之為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 자공왈: '관중비인자여 환공살공자규, 불능사, 우상지.' 자왈: '관중상환공, 패제후, 일광천하, 민도우금수기사. 미관중, 오기피발좌임의. 기약필부필부지위량야, 자경어구독이막지지야 |
자공이 여쭈었다. '관중은 어진 자가 아니겠지요?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그는 죽지 않고 오히려 제환공(齊桓公)을 도왔으니 말입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서 제후들의 패자가 되어 천하를 바로잡았고, 백성들은 이제까지 그 덕택을 받고 있다.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몄을 것 즉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어찌 평범한 범부 사람들처럼 작은 의리를 따지고 스스로 물길또랑에 뛰어들어 죽어 남들이 알아보지도 못하는 삶을 살 것인가?' |
被髮左袵(피발좌임)-공자의 관중에 대한 평가
“被髮左衽” 헤칠 피, 터럭 발, 왼쪽 좌, 옷깃 여밀 임 이 피발좌임은 이민족 오랑캐의 풍습을 일컫는 말로 ‘이민족의 지배를 받다’의 뜻으로 쓰인다. 관중과 포숙아의 관포지교로 잘 알려진 관리자의 으뜸 그 관중이 제환공을 섬기며 제나라를 춘추전국의 부강한 패자로 만들었다. 제환공은 오랑캐들이 중원을 넘보지 못하게 주나라를 보호했다. 중원을 오랑캐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냈기에 좌천이 아니라 공자같은 교화와 높은 문화수준의 부유한 우위(優位)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 않았는가?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서 제후들의 패자가 되어 천하를 바로잡았고, 백성들은 이제까지 그 덕택을 받고 있다.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몄을 것 즉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진서 모용준전에 나오는 피발좌임 해석
진서, 모용준(慕容儁) | 번역 |
吾本幽漠射獵之鄉,被髮左衽之俗,歷數之籙寧有分邪!卿等茍相褒舉,以覬非望,實匪寡德所宜聞也 | 나는 본래 멀리 떨어진 황량한 사막의 수렵하고 사냥하는 곳의 출신으로 피발좌임 즉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 풍속을 지녔고 천운이 뒷바쳐서 올랐는데 어찌 경전 부록에 내 운수가 맞게 쓰여 있을 것인가! 경(卿)들이 나를 서로 받들고 칭찬하며 거들어 추거(薦舉)하는 것은 내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분에 넘치게 바라는 것으로 실로 과인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들어줄 만한 얘기가 아니오. |
褒舉: 褒獎薦舉(포장천거) 非望: 非分 希望, 未曾 期望, 분수에 맞지 않는 희망, 분에 넘치는 바람 |
右衽(우임)
빗살무늬 토기에서 보듯이 운명이 교차하는 우리네 삶에서, 좌로 가는 것은 좌천이요 즉 죽음의 바닥(abyss)으로 떨어지는 것이요, 우로 가는 것은 하늘로 승천하는 것 즉 비교우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소림사가 동쪽에 있는 바, 책 제목으로도 유명한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서쪽은 좌천이요 동쪽은 도약이다. 서쪽은 히말라야 곤륜산이 있는 곳으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좌천과 도약, 서쪽은 사막이요 동쪽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다. 바다가 있는 동쪽으로 가는 것의 역사적 표현은 한신과 유방의 대화, 한왕신의 대화, 상구성의 죽음 이 3가지 일화에서 역사상 나타난다.
흉노족에 영구히 귀순한 이릉은 좌임(左袵)의 옷을 입었고, 흉노족 귀순을 끝까지 거부하고 살아 돌아온 소무는 우임(右袵)의 웃을 입었다. 좌임은 소수이민족을 가르키고, 右衽(우임)은 중원 민족과 동이족 즉 중화(中夏)민족의 풍습을 말한다. 한서 종군(終軍)전에 “大將軍秉鉞 單于奔幕 票騎抗旌 昆邪 右衽” 구절이 나오는데 안사고는 “右衽 從中國化也”으로 주해를 달았다. 우임(右衽)은 의복(衣襟)을 말한다. 진시황제의 그 수많은 병마용에 의복을 걸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 않는가? 그 수많은 병마용 용사들은 모두 의복을 입고 있다. 의복은 인류의 문명을 상징하고 교화와 문화 민족을 의미한다. 의복과 관이 없으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복장에 남녀 구분이 있고, 비단길로 문명과 교화와 문화의 발전이 이어져 왔다. 외양으로 사람은 구별되는가? 여자와 남자의 복장의 옷고름은 서로 반대이다. 한복은 우임이다. 반면에 서쪽나라 흉노족들이 입는 두루마기는 좌임이다. 로마의 통막 토가(toga) 옷을 보라.
<일본 다까마스총 벽화>
역사적으로 좌임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나폴레옹과 조지 워싱톤과 마르크스와 니이체의 사진 모습이다. 이들의 사진 모습을 참조하라.
조지 워싱턴 | 나폴레옹 | 마르크스 | 니이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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奮迅泥滓(분신니재)
서정부 문단 | 단어 설명 |
當光武之蒙塵,致王誅于赤眉異奉辭以伐罪,初垂翅於回谿不尤眚以掩德,終奮翼而高揮〈東觀漢記曰:馮異,字公孫,拜為征西將軍,與赤眉相距。上命諸將士屯澠池,為赤眉所乘,反走,上回谿阪 異復合兵追擊,大破之殽底。璽書勞異曰:垂翅回谿,奮翼澠池 左氏傳,臧文仲曰:天子蒙塵于外東都賦曰:天人致誅 東觀漢記曰:樊崇欲與王莽戰,恐其衆與莽兵亂,乃皆朱其眉,以相別識,由是號曰赤眉 尚書曰:奉辭伐罪 左傳,秦穆公曰:吾不以一眚掩大德 西京賦曰:遊鷮高翬 薛綜曰:翬,飛也 揮與翬古字通〉 建佐命之元勳,振皇綱而更維 〈佐命,已見西都賦 答賓戲曰:廓帝絃,恢皇綱 鄭玄周禮注曰:維,猶連結也〉 | 蒙塵: 전란으로 인해서 국왕이 피란 감, 蒙受風塵, 君主 因戰亂逃亡在外 赤眉: 漢 末 번숭(樊崇) 等 農民 起義軍 농민 반란군 적미난(赤眉亂)은 18년 산동성에서 번숭(樊崇)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왕망 반란군을 이른다. 27년 유수(劉秀) 광무제가 이를 평정하고 후한(後漢)을 열었다. 奉辭伐罪: 죄를 지은 자를 꾸짖고 책임을 물어 토벌함 垂翅: 垂翼 날개를 펴지 못하고 드리움 奮翼: 양 나래를 들고 일어나 펼치다, 振起鰓旁 兩鰭, 奮翅(분시) 즉 振奮而起, 가의(賈誼) 鵩鳥賦(복조부)에 “鵩乃嘆息舉首奮翼”(복내탄식거수분익). 尤眚: 過錯, 災難,疾苦, 過失 佐命: 古代帝王得天下, 上應天命, 輔佐帝王創業, 輔助 帝王 創業 功臣. 元勳: 立大功 人, 개국공신 皇綱: 三皇五帝 綱紀, 朝廷 紀綱 |
반악의 서정부 문단에 다음의 구절이 나타난다: “初垂翅於回谿 不尤眚以掩德 終奮翼而高揮”.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비록 회계(回谿)에서 날개를 펴지 못하고 추락하였으나, 작은 과오나 한번의 실수로 큰 덕을 덮을 수 없으며, 끝내는 날개를 펴고 높은 곳에 올랐다’.
공자가 관중의 공을 논하였듯이, 후한서 풍이전(後漢書•馮異傳)의 “垂翅回谿奮翼澠池”(수시회계분익민지)의 구절이 말하듯이, 큰 공을 작은 허물에 가리워 보지 못해서는 아니된다.
璽書勞異曰 赤眉破平 士吏勞苦 始雖垂翅回溪 終能奮翼黽池 可謂 失之東隅,收之桑榆 方論功賞 以答大勛 |
적미족을 깨뜨리고 평정시켰으니 병사들 모두 수고가 많았소. 처음에는 비록 회계전투에서 졌으나 마침내는 민지에서 분연히 일어나 격퇴했으니 아침에 잃었다가 저녁에 다시 찾아 거두었다고 할만하오. 공을 논하여 상을 내려 큰 공훈에 답하리라. |
정(鄭)나라 땅, 오늘날 삼문협시와 낙양 사이 위치한 곳. 垂翅: 垂翼 回溪: 풍이(馮異)군이 적미군과 격전을 벌인 곳, 東崤山阪 즉 오늘날 낙녕(洛寧) 근처. 奮翼: 振起鰓旁 兩鰭(양기), 奮翅, 人振奮而起. 垂翼(수익)과 분익(奮翼)은 지느러미(날개)를 펴지 못하고 드리우는 것과 날개를 펼치는 것 즉 반대말이다. 黽池: 오늘날 민지현(河南省 澠池縣) 桑榆: 桑樹+榆樹, 日暮, 황혼녘, 일이 끝난 이후의 단계, 晚年(垂老之年) 大勛: 大勛勞, 大功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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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馮異傳 |
奮迅泥滓(분신니재)
奮迅(분신)은 개가 날개를 펼치는 모습, 야수가 손살같이 뛰어 오르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 정신적으로 분발하고 신속(迅速)하게 뛰어가는 모습, 또 그같이 분발하고 일어서는 모습 진기(振起)하다의 뜻이다. 한번 실패는 병가지상사인데 어찌 한번의 과오나 실수에 연연해서는 큰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사람의 성공에는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서는 분발의 정신을 필요로 한다. 한번의 실수는 성공의 발판이 된다.
“始雖垂翅回溪 終能奮翼黽池 可謂 失之東隅 收之桑榆”(시수수시회계 종능분익민지 가위 실지동우 수지상유); “처음에는 비록 회계전투에서 졌으나 마침내는 민지에서 분연히 일어나 격퇴했으니 아침에 잃었다가 저녁에 다시 찾아 거두었다고 할만하오”
泥滓(니재)는 泥渣(니사), 污濁(오탁)물 쓰레기, 진흙탕물에 젖은 것 즉 치욕(恥辱)을 말한다. 반악의 서정부에서 “奮迅泥滓”(분신니재) 이 말에 대해서 당나라 이선(李善)의 주해는 이릉의 소무에 대한 편지 “與蘇武書”(여소무서)의 구절인 “言為瑕穢 動增泥滓”(언위하예 동증니재)을 인용하고 있다. 또 泥滓(니재)의 뜻에는 똥물로 천시(賤視)하는 것을 이르고, 또 그런 하찮은 지위(卑下 地位)를 비유하고, 또 진흙탕물이 튀기는 그런 오물의 세상 진세(塵世)의 뜻이 있다.
서정부 단락에서 열거한 인물 리스트
역사를 회고해 보면
소하
조참
위상
병길
이런 명재상들과
蕭何(소하)
蕭何(소하, ?-BC 193) 강소성 출신으로 유방이 한나라를 개국한 후 소후(蕭侯)에 봉해지고 승상에 올랐다. 나라의 기틀을 정한 여러 법률을 제정한 법률가이었다.
曹參(조참)
曹參(조참, ?-BC 190) 강소성 출신 재판 담당 관리로 출발하였는데 유방 밑에서 군사전공을 세웠다. 개국공신으로 평양후에 봉해졌다. 소하의 승상 자리를 이어받고 그의 국정철학을 그대로 펼쳤다.
魏相(위상)
魏相(위상, ?-BC 59)은 BC 66년 한선제 때 승상에 발탁되었고 고평후에 봉해졌다. 易經(역경)에 밝았다. 한서 반고가 위상과 병길을 “유방의 한나라 개국의 기초를 닦은 으뜸 공신은 소하와 조참이었고, 한선제의 중흥기를 이끈 재상은 위상과 병길이었다는 명성을 들을 만하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한선제 때 흉노와 강화를 맺었으므로 흉노 출병 반대론에 대한 그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邴吉(병길)
邴吉(병길, ?-BC 55)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 곡부 사람으로 노나라 재판관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승상을 지냈다. BC 92년에 일어난 무고지화 위태자 반란 사건 때 병길은 위태자의 자손을 숨겨 몰래 키워 주었는데 그렇게 살아 남은 무제의 손자가 후에 황제에 오른 한선제로서
이런 인연으로 병길은 박양후에 봉해지고 재상에 오르게 되었다. 병길 스스로 한선제를 몰래 키웠다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실이 결국 황제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병길이 위상의 승상 자리를 이어 받아 한선제의 중흥 시기를 이끌었다.
辛慶忌(신경기)
辛慶忌(신경기, ?-BC 12)는 흉노 서역 강족을 정벌하여 이름 높은 장군 신무현(辛武賢)의 아들이고 아버지를 닮아서 흉노와 서역 족속들을 굴복시킨 장군으로서 한성제 때 중임을 받고 주천(酒泉)태수 우장군 좌장군 등을 지냈다. 그의 전기는 한서 권69 신경기전에 실려 있다.
李廣(이광)
李廣(이광, ?-?)은 흉노와의 전쟁을 70여차례나 치룬 백전노장의 장군이었다. 사마천은 “적을 만나 싸울 때는 용감했고, 부하 군사들을 인자하고 자애롭게 대했고, 명령이나 규정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여, 군사들이 모두 이광을 따르고자 했다. 그 이광 장군의 전기를 여기에 쓴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군인으로서 이 정도의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이광의 아버지는 진시황을 저격하려고 유명한 자객 형가를 고용하였다 실패한 연태자단을 섬겼다가 연나라가 망하자 한고조 유방에게 넘어온 장군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손자까지 삼대에 걸쳐서 장군을 배출한 병가의 유력 가문이다. 사마천의 변호로 더욱 유명해진 이릉이 이광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는 60평생 70여 차례나 전투를 치루며 국가에 큰 공을 세웠고 부하들을 사랑하고 베풀어 청렴결백했던 장군이었지만 결국 공신작위 하나 받지 못하고 새카만 부하에게 죄를 취조당할 상황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자결을 택했던 이광 장군이었고, 아버지는 실권자에게 개죽음을 당했고, 자신이 항복했다는 이유로 고국에 남아 있는 처자식을 사형시켜 버린 고국인데 무슨 삶의 의미가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소무의 말은, “不辱君命”(불욕군명)이었다. 임금의 명령에 복종해야 된다고? 그래야 임금의 위신이 서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과 가문을 멸문해 버려놓고서 조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은 무슨 명분이 있다는 것이며 충과 효의 의미가 무엇인가? 귀국하면 부귀영화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이릉이 귀국의 회유를 거부한 이유는 이렇다. “丈夫不能再辱”(장부불능재욕): 사람은 두번 다시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두 번의 실패는 없다고 실패를 성공의 거울로 삼는 대장부에게 치욕을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피하고자는 사람의 자기 보전 본능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 경제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위험 회피보다 손실 회피(loss aversion) 경향이 크다. 인생은 도박판이라고 전쟁에서의 큰 공을 노리는 군인일지언정 사람들은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회피하려는 마음이 훨씬 크다는 것이 요즈음의 다니엘 카네만 등의 행동심리학의 이론으로 입증되지 않는가?
衛青(위청)
衛青(위청, ?-BC 106) 한무제의 위황후의 동생으로 무제 때 중용되어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올랐고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BC 127년 흉노를 대파했고 BC 119년에도 곽거병과 함께 흉노의 주력 부대를 섬멸한 무력정벌의 큰 공을 세웠다. 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위청의 아내이다. 평양공주는 원래는 조참의 증손인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였으나 그가 일찍 죽어서 미망인이 되자 위청에게 개가했다.
霍去病(곽거병)
霍去病(곽거병, BC 140-BC 117) 위청과 하동평양 동향출신으로 위청과 외조카 사이이다. 관직이 표기장군에 이르렀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 BC 121년 흉노를 대파하여 서역통로인 하서지구를 개척하였고 BC 119년에도 흉노군을 대파하였는데 이 때 김일제와 망하라 망통 등 흉노의 고위층 상당수를 포로로 잡아왔다. 곽거병이 전사하자 그의 공로를 높이 산 한무제가 그의 묘를 크게 조성해 주었다.
신경기
이광
위청
곽거병 이런 명장군들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 원정을 나갔다고 적국에 사로잡혔으나 20년동안이나 전향을 거부하며 버텨오다 끝내 살아서 돌아온 소무,
먼 타국까지 무력의 위세를 떨친 장건,
이들은 문화 전파와 교화를 통해서 세상 질서를 바로잡았는가 하면
무력원정을 통해서 황제의 위엄을 선양하고 높혔다.
蘇武(소무)
蘇武(소무, ?-BC 60)는 BC 100년에 중랑장에 임명되어 흉노정벌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혀 19년동안이나 먼 北海(북해) 호수에 격리 억류되었으나 BC 81년에 한나라가 흉노와 휴전강화를 맺자 풀려나 귀국하였다. 이릉과 소무간의 편지가 남아 전해 온다.
張騫(장건)
박망후(博望侯) 장건(BC 164-BC 114)은 BC 138년 먼 서역변방 사막의 나라 대월씨(大月氏)국에 파견나가는 사신 일행에 자원하여 서역에 나갔다가 인질로 잡혀서 흉노 땅에서 10년을 넘게 머물며 거기에서 처자식까지 얻었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 흉노가 장건일행을 더욱 서쪽으로 끌고 가려고 할 때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하여 근방의 대원(大宛), 대월지(大月氏)국 등으로 전전했다. 그후 126년 귀국하는 도중 흉노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흉노의 내란을 틈타 도망쳐 한나라 장안으로 복귀했다. 위청(衛青, ?-BC 106)의 BC 123년 흉노 공격전에 참가하여 세운 전공으로 박망후(博望侯)의 작위를 받았다. 博望(박망)은 天門山((천문산)으로도 불리는 국경 요새에 해당되어 역사상 주요 접전 지역이었다. 한서 장건(張騫)전에 “騫 以校尉從大將軍擊 匈奴 知水草處 軍得以不乏 乃封 騫 為 博望侯” 장건을 대흉노 전공으로 박망후에 봉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2년후 이광(李廣)장군과 함께 흉노를 공격하다가 크게 실패하여 군법상 사형을 당할 뻔했으나 서인으로 강등되어 목숨만은 부지하였다. 사마천이 군대 장수로서 그토록 크게 칭송한 비장군 이광은 이 때의 흉노전 실패로 끝내 제후 작위를 받지 못했고 BC 119년 자결했다.
장건은 BC 119년에도 오손국 대원국 대하국 안식국 등 서역국가들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어 이들과 연합책을 모색하였다. 이 때 서역의 비단길을 개척하고 여러 나라간의 도로를 개설하여 주변 나라와의 신뢰와 상호 이해관계를 높이고 선린교역과 평화체제를 구축했다. 장건은 BC 115년 귀국하여 외국 사신 접대와 각 나라간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대행인(大行人)의 관직을 수행하다 1년 후 세상을 떴다. 대행인의 관직은 육조 장관의 관장 업무로 보면 국가간 외교와 전례를 담당하는 예조판서에 해당하였다. BC 104년 한무제가 대행(大行)의 관직을 대홍려(大鴻臚)로 개칭했다. 투후 상구성은 BC 91년 일어난 무고지화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투후에 봉해지고 어사대부로 승진하기 전까지 대홍려직을 지냈다.
서정부에서 震遠(진원)이라고 표현한 배경은 이렇듯 먼 서역국가들에 파견되어 힘을 바탕으로 한 외교술을 펼친 장건의 경력을 두고서 한 말이고 이런 장건을 소무와 함께 한 구절로 포함시킨 배경에는 소무가 19년 동안 흉노에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는데 먼 북방 호수에서 격리 구금되었어도 전향하지 않고 끝내 돌아와 한나라를 위해서 봉사한 사실과 같이 장건 또한 11
년 동안 흉노에 억류되었어도 굴복하지 않고 되돌아와 외교술을 펼친 사실이 있다.
국가가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고,
아까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절개를 드높인 충신에는,
충효지심이 돈독하고 깊었던 투후가 있고,
떠날 때를 알고 은퇴하여 유유자적 은일의 삶을 즐긴 육가가 있다.
秺侯(투후)
투후 충효순심의 투후는 商丘成(상구성)을 가르킨다. 상구성에 관한 글을 참조하라.
陸賈(육가)
陸賈(육가, BC 240-BC 170)는 초나라 출신으로 정치외교가이었다. 한나라 건국 공신으로 잘 알려진 장량이 군사상 책략가라면 육가는 외교술의 대가에 속했다. 육가는 진시황의 진나라가 망한 주요 원인과 한나라의 건국의 배경을 이론적으로 심층 분석하여 한나라의 통치술을 ‘문무 병행’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신어”의 저자이다. 육가는 유가적 문치주의에 경도되기 보다는 “行仁義 法先聖”(행인의법선성)의 도가 사상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유방이 죽고 난 뒤 여씨의 전횡 시기에 물러나 있다가 도가의 문무병행의 국정통치술을 펼친 한문제 때 다시 중용되었다. 육가는 유방이 항우와 맺은 강화 조약 등을 검토하는 등 주변 제후국들과의 관계에 정통하여 유방의 외교정책을 입안하고 수립한 전략가이었다. 육가는 문무 병행의 국정철학을 논한 한고조 때의 드문 문신이지만 동시에 남월에 출정한 군 경력이 그의 철학과 전략을 대변해 준다. 육가는 지금의 베트남인 남월에 출정하여 조타를 남월왕으로 옹립하고 남월을 한나라의 우호 제후국으로 만든 군사와 외교술의 대가이었다.
서정부에서 이런 육가를 투후와 같은 구절로 묶어서 표현한 배경을 보자. 투후 상구성은 어사대부에 임명되기 전 ‘대홍려’직을 맡고 있었다. 대홍려는 육경 구경에 속한 직위로 육조판서로 치면 예조판서에 해당한 직위이었다. 승상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직에 조선시대의 재상에 속한 지위였고 어사대부는 관리들의 감찰과 탄핵을 맡은 장관으로서 그 위치는 판서 장관보다는 높고 승상보다는 낮은 위치에 속했다. 대홍려는 주변 제후국들과의 관계를 담당한 바 주된 업무는 제후왕들을 접대하거나 황실종친 인사들을 관리하고 국가 제례를 주관하는 일이었다. 당연하게 대홍려직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문서와 지식에 통달하여야 했고 외교술에 능해야 했다. 육가가 맡았던 업무 분야와 투후 상구성이 맡았던 대홍려직이 같은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악의 서정부에서 육가와 투후를 병렬적 구절로 같은 구절로 묶은 배경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육가가 제후국 왕들과의 관계에 능했고 주변국과 외교술에 뛰어난 문신이면서도 남월에 출정한 뚜렷한 군사상 공적을 세웠던 바와 같이, 투후 상구성 또한 대홍려직 문신이었지만 무고지화 태자의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진압한 군대 지휘자로 활약했고, 그 후 흉노를 정벌하러 서역에 출정하여 적군과 격전을 치루었고, 귀국한 장군으로서 군사상 업적 또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철학 사상적으로 보면, 육가가 문무병행의 도가적 입장에 있었고, 그 당연한 결과로 한문제 때 중용되었는 바 투후 상구성 또한 한문제의 사당을 지킨 첨사로 마지막 생을 마감한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육가와 투후 상구성과의 관계는 보다 분명해 진다. 이런 측면에서, 소하 조참 위상 병길 등의 명재상과 이광 위청 곽거병 들의 명장군들의 묶음과는 달리 육가와 투후를 같은 한 묶음으로 처리하여 또 다른 유형 즉 “문무 병행”의 대표적 사례로서 들고 투명과 절개를 드러낸 육가와 투후를 반악의 서정부는 “暨乎秺侯之忠孝淳深 陸賈之優游宴喜”(기호 투후 지충효순심 육가지우유연희)으로 표현한 것이다. 육가를 유가로 분류하기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도가적 사상은 “충신장”이 서두에서 육가의 신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것과 육가의 상인 출신 배경을 보면 분명하게 확인된다. 참고로 충신장의 서두를 부록으로 소개한다.
사마상여
왕포
양웅 같은 명문장가
馬相如(사마상여)
司馬相如(BC 179-BC 118)는 “상림부” 등으로 유명한 한나라의 대문장가로서 그의 자(字)가 長卿(장경)이다. 유비의 촉나라 수도인 촉군(蜀郡) 성도(成都) 출신이다. 이곳에는 당나라 두보가 움막을 짓고 살았던 곳으로 두보의 무후사가 있다.
王褒(왕포)
왕포(王褒, BC 90-BC 51) 자는 자연(子渊)이고 촉(蜀)군 출신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주경야독하여 육예와 초사에 능통한 사부가(辭賦家)로서 양웅과 더불어 “淵雲”(연운)으로 불린 명문장가이었다. 돈으로 사고 파는 노비가 종사해야 할 각종의 일을 꼬치꼬치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 노비계약문서 기록인 《僮約》(동약)의 작자이다.
揚雄(양웅)
揚雄(양웅, BC 53-18)은 자(字)가 子云이다. 어릴 적 지은 “甘泉賦”(감천부) 등의 사부(辭賦)로 일찍이 문명을 날린 명문장가이다. 논어와 역경을 통한 논한 저작 “法言”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
유향
유흠 같은 역사학계의 걸출한 인물들
司馬遷(사마천)
司馬遷(BC 145-?)은 字(자)가 子長(자장)이다. 사마천의 사망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기전 86년경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은 역사서 “사기”의 저자로서 불후의 이름을 남긴 사학자의 대가로 추앙받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흉노에 투항한 이릉을 한무제에게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 무고죄로 투옥되고 부형(腐刑)을 당했으나 아버지의 유언인 사기를 기필코 완성하고자 모든 치욕을 감수하며 끝내 “史記”(사기)를 완성하였다는 그의 한많은 이력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게 간직하고 있는 문무왕릉의 비문 해석과 관련되는 투후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검토되지 못한 분야인 바 나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劉向(유향)
劉向유향(BC 77-BC 6) 자(字)는 子政(자정)이다. 한나라 황실 종친으로 역사서 “說苑”(설원)이 유명하다. 홍경 석현의 환관 득세기에 투옥되었다.
劉歆(유흠)
劉歆유흠(BC 50-23) 자(字)는 子駿(자준)이다. 유향의 아들로서 부친과 함께 “山海經”(산해경)을 수정편찬했다.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三統曆譜”(삼통역보)를 펴냈다. 유흠은 왕망 정권 때 중용되었는 바 왕망이 황권을 찬탈한 후 관직을 개편하면서 한나라 때의 태사령(太史令)을 羲和(희화)로 개칭하고 천문역법을 담당하게 하였고 유흠을 천문관으로 임명했다. 왕망이 피살되자 유흠은 자살하였다. 대대적인 도서재정리 작업을 펼치면서“周官”(주관)을 經(경)으로 올리리는 등 유교경전화 사업에 큰 공을 올린 유향 유흠 부자이었다.
조광한
장창
왕준
왕준
왕장 같은 서울시장을 지내며 명망을 쌓은 행정가들
趙廣漢(조광한)
趙廣漢(?-BC 65)은 한선제 때 영천태수에 임명되었고 그 후 경조윤을 지냈는데 당시 실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행정을 살폈다. 소망지의 탄핵으로 요참형에 처해졌다.
張敞(장창)
張敞(장창)은 생졸연도는 미상이고 한선제 때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곽광이 전권을 휘두를 때 승상을 지낸 양창의 아들 양온이 대역죄로 사형을 당할 때 그와 교분이 있는 관리들은 죄다 파면되었는데 이 때 장창도 면직되었다가 후에 예주자사로 재등용되었다. 양온의 숙청 때의 권력생리를 경험해서인지 장창은 아내의 눈썹을 그려주는 일로 소일거리를 삼았는데 이것이 조정에 알려져 웃음거리를 사자 선제가 그에 대해서 채근하자 눈썹 하나 미동하지 않고 태연하게 “아무도 모르는 부부 관계의 재미 중에는 눈썹 그리는 일보다 더 심한 것이 많을텐데요”라는 대답에 황제도 그냥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거나 눈썹을 깔고 덤비면 권력자에게 화를 입지 않겠는가? 장창의 눈썰미는 눈썹 그리면서 권력생리를 터득했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장창은 위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꼿꼿해서 요참형을 당한 조광한과는 달리 생을 선종으로 마쳤는지 모르겠다. 공직사회에서 부담이 가는 일은 처리하지 않고 질질 끄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편한 처세술의 하나인데 이러한 질질 끄는 지체 지연의 문화 연명(延命)문화 즉 상사가 곧 바뀔 것 같으면 영이 잘 안서는 공무원 권력 생리를 말해주는 “五日京兆”(오일경조)라는 말의 출처가 한서 張敞(장창)전이다. 양온의 필화사건에 연루된 장창이 경조윤에서 곧 파면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자 자기 부하 한 사람이 상사에게 대들고 “오일 후이면 경조윤에서 목이 짤릴텐데 내가 왜 그의 명령을 따르겠냐?”고 말하며 상사의 명령을 듣지 않자 바로 즉결처분해 버렸다.
王尊(왕존)
왕존(王尊)은 한원제(BC 75-BC 33)와 한성제(BC 51-BC 7) 때 탁 (涿)군출신으로 조실부모하였으나 경조윤(京兆尹)까지 오른 관리였다. 황하가 홍수로 범람할 때 대홍수를 이겨낸 인물로 이름 높았다.
王章(왕장)
王章왕장(?-BC 24)은 한성제 때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왕봉이 권력을 휘두를 때 직언을 서슴지 않고 간하다 투옥되고 옥사하였다.
王駿(왕준)
王駿왕준(?-BC 15)은 한성제 때 BC 23년 京兆尹(경조윤)에 임명되었다.
“삼왕”이란 문장 내용과 상황에 따라서 여러 다른 뜻을 가진 대명사로 쓰인 바, 서정부 여기서는 반악이 “3왕 윤경”이라고 말했으므로 문장내용상 경조윤을 거친 유명한 세 사람을 말한다. 한서 왕길(王吉)전에서 말하길 “前有 趙 張 後有 三王”이란 말이 회자되는데, 조 장은 조광한과 장창을, 삼왕은 왕씨성 3인 王尊(왕존)、王章(왕장)、王駿(왕준)을 지칭한다.
어정국
장석지 같은 명재판관들
어정국
于定國(어정국)
于定國(어정국, ?-BC 40)한선제 광록대부에 올랐고, BC 69년에 재판관인 廷尉(정위)에 임명되었다. 어정국은 웬만하면 풀어주어 사람들로부터 “어정국이 재판관을 맡으면서 원망과 탄원이 사라졌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BC 52년에 어사대부, 일년 후 다시 승상으로 승진하였고 서평후에 봉해졌다.
張釋之(장석지)
張釋之(장석지, ?-?)는 생졸연도 미상인데, 한문제 때 재판관인 廷尉(정위)에 임명되어 한경제 때까지 지내며, 불편부당하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린 공정무사한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사기”에 풍당과 함께 “張釋之馮唐”열전이 실려 있고, 한서에는 급암 정당시를 추가한 “張馮汲鄭”열전이 전한다. 장석지를 명재판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그의 판결 2건을 소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왜냐하면 사마천의 장석지에 대한 논평이 특히 지금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장석지는 법 앞에 만인이 공평하다는 “法不阿貴 刑無等级”(법불아귀 형무등급)의 생각으로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 공정(公正)하고 공평(公平)무사의 신조를 지켰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그의 친구를 보라’는 속담 “不知其人 視其友”(부지기인 시기우)의 출처이기도 하다.
급암 같은 정직한 관리로 명망 높은 사람들
정당시 같이 인재추천시 신뢰받는 사람들
급암과 정당시는 추가 김정희가 “세한도”에서 언급하면서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인물이다. 서정부의 “汲長孺之正直,鄭當時之推士” 표현은 한서의 장석지급암열전의 논평에 들어 있는 "汲黯 之正直 鄭當時 之推士 不如是 亦何以成名哉”의 부분에서 그대로 가져온 표현이다.
汲黯(급암)
汲黯(급암, ?-BC 108)은 字(자)가 長孺(장유)이다. 급암은 한경제의 태자의 가신 출신으로 한무제 때는 동해군태수를 지냈다. 愚直之臣(우직지신),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직언으로 이름이 높았다.
鄭當時(정당시)
鄭當時(정당시, ?-?)는 정환공(鄭桓公, ?-BC 771) 22세손이고 형양(滎陽)정씨 선조이다. 정당시의 부친은 항우의 부하로 근무하다 항우가 죽자 한나라에 귀순한 사람이었고 정당시는 한 경제 때 태자의 가신으로 임명되었고 한무제 때 제남군 태수에 임명되었다. 정당시는 겸손하고 사람 교제술에 밝았다. .
賈誼(가의)
賈誼(가의, BC 200-BC 168) 가의는 장사왕 태부, 양회왕의 태부를 지냈다. 따라서 유방의 한나라 개국 후 일어난 오초칠국의 반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이들과의 인연으로 인해서 가의는 정치적인 불운을 겪게 되었는데 가의의 이러한 정치적 불운이 춘추전국시대 초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하자 자살을 택했던 굴원과 비슷한 처지에 해당될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의는 굴원을 추모한 ”吊屈原賦”(조굴원부), 굴원의 생각과 같은 뜻을 실은 “鵬鳥賦”(복조부) 등으로 명문장가로 이름 높았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굴원과 가의를 함께 묶은 굴원가의열전이 전한다. 가의의 복조부는 우리들의 전통적 생사관을 말해주고 있어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성이 있으므로 복조부를 부록으로 게재하니 참조하기 바란다.
이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비단옷 휘날리며 구슬옥을 단 신발 걸음소리 쩌렁쩌렁 울려가며 궁정을 드나든 고관들이 다수이다.
이 가운데 머리카락을 묶지 않고 옷을 옆으로 접혀 입고 다니는 풍습이 있는 이적 외국 땅에 잡혀 들어가 치욕을 딛고 일어선 사람도 있고,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교분을 쌓고 의기투합하거나 돌아가는 판세를 미리 꿰뚫어 보고 기회를 포착하여 처세에 능한 사람도 있다.
또 한편으론 현저하게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일찍 꺾여버린 이도 있고, 재능이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높은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들 모두가 앞서 열거한 유명한 인사들처럼 맑고 신선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좋은 소문이 끊이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싶다. 리듬 있고 낭낭한 옷자락 소리가 내는 울림소리처럼 아름답게 이야기가 들려오기를 바라고 싶다.
왕음
왕봉
공현
석현 등 외척 환관 세력들이 득세하던 시절에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사방팔방으로 서울과 시골은 물론 온 땅이 꺼질 듯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그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듯,
王音(왕음, ?-BC 15)은 어사대부를 거쳐 BC 22년에 대사마 그후 거기장군이 되었고 앙양후에 봉해졌다. 왕봉의 아버지 왕금의 조카이다.
王鳳(왕봉, ?-BC 22) 한성제 때 외척 실권자로서 한원제의 황후 왕정군의 부친이다. 왕씨 4형제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나라를 15년간 찬탈하여 신나라를 세운 왕망을 왕봉이 발탁하여 신도후에 봉했다.
弘恭(홍공, ?-BC 47)은 어려서 궁형을 받고 한선제 때의 환관이었다. 홍공은 중서령, 석현은 복야(仆射)에 임명되었는데 홍공 사후 석현이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石顯(석현, ?-BC 33)은 홍공과 같이 한선제와 한원제 때의 환관이었다. 원제가 병을 얻어 정사를 기피하고 환관이 달래주는 음악에 빠지니 환관의 전횡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한나라는 외척세력의 손에 놀아나 마침내 왕망(王莽, BC 45-23)의 찬탈(8년-23년)에 넘어가고 말았지 않았는가.
죽고난 후에 앞서 열거한 10여명의 명망가들의 반열에 과연 몇 명이나 견줄 수 있을까?
명성을 얻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지 않는가?
투후와 육가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臨危而智勇奮,投命而高節亮。暨乎秺侯之忠孝淳深,陸賈之優游宴喜
위기를 맞이하여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고, 아까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절개를 드높인 충신에는 충효지심이 돈독하고 깊었던 투후가 있고, 은퇴하여 유유자적 은일의 삶을 즐긴 육가가 있다,
육가(陸賈, BC 240-BC 170)는 초나라 출신으로 정치외교가이었다. 한나라 건국 공신으로 잘 알려진 장량이 군사상 책략가라면 육가는 외교술의 대가에 속했다. 육가는 진시황의 진나
라가 망한 주요 원인과 한나라의 건국의 배경을 이론적으로 심층 분석하여 한나라의 통치술을 ‘문무 병행’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신어”의 저자이다. 육가는 유가적 문치주의에 경도되기 보다는 “行仁義 法先聖”(행인의법선성)의 도가 사상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따라서 유방이 죽고 난 뒤 여씨의 전횡 시기에 물러나 있다가 도가의 문무병행의 국정통치술을 펼친 한문제 때 다시 중용되었다. 육가는 유방이 항우와 맺은 강화 조약 등을 검토하는 등 주변 제후국들과의 관계에 정통하여 유방의 외교정책을 입안하고 수립한 전략가이었다. 육가는 문무 병행의 국정철학을 논한 한고조 때의 드문 문신이지만 동시에 남월에 출정한 군 경력이 그의 철학과 전략을 대변해 준다. 육가는 지금의 베트남인 남월에 출정하여 조타를 남월왕으로 옹립하고 남월을 한나라의 우호 제후국으로 만든 군사와 외교술의 대가이었다.
서정부에서 이런 육가를 투후와 같은 구절로 묶어서 표현한 배경을 보자. 투후 상구성은 어사대부에 임명되기 전 ‘대홍려’직을 맡고 있었다. 대홍려는 육경 구경에 속한 직위로 육조판서로 치면 예조판서에 해당한 직위이었다. 승상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직에 조선시대의 재상에 속한 지위였고 어사대부는 관리들의 감찰과 탄핵을 맡은 장관으로서 그 위치는 판서 장관보다는 높고 승상보다는 낮은 위치에 속했다. 대홍려는 주변 제후국들과의 관계를 담당한 바 주된 업무는 제후왕들을 접대하거나 황실종친 인사들을 관리하고 국가 제례를 주관하는 일이었다. 당연하게 대홍려직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문서와 지식에 통달하여야 했고 외교술에 능해야 했다. 육가가 맡았던 업무 분야와 투후 상구성이 맡았던 대홍려직이 같은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악의 서정부에서 육가와 투후를 병렬적 구절로 같은 구절로 묶은 배경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육가가 제후국 왕들과의 관계에 능했고 주변국과 외교술에 뛰어난 문신이면서도 남월에 출정한 뚜렷한 군사상 공적을 세웠던 바와 같이, 투후 상구성 또한 대홍려직 문신이었지만 무고지화 태자의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진압한 군대 지휘자로 활약했고, 그 후 흉노를 정벌하러 서역에 출정하여 적군과 격전을 치루고 귀국한 장군으로서 군사상 업적 또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철학 사상적으로 보면, 육가가 문무병행의 도가적 입장에 있었고, 그 당연한 결과로 한문제 때 중용되었는 바 투후 상구성 또한 한문제의 사당을 지킨 첨사로 마지막 생을 마감한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육가와 투후 상구성과의 관계는 보다 분명해 진다.
이런 측면에서, 소하 조참 위상 병길 등의 명재상과 이광 위청 곽거병 들의 명장군들의 묶음과는 달리 육가와 투후를 같은 한 묶음으로 처리하여 또 다른 유형 즉 “문무 병행”의 대표적 사례로서 들고 반악의 서정부는 “暨乎秺侯之忠孝淳深 陸賈之優游宴喜”(기호 투후 지충효순심 육가지우유연희)으로 표현한 것이다. 육가를 유가로 분류하기도 하는 이가 많지만 그의 도가적 사상은 “충신장”이 서두에서 육가의 신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배경을 보면 분명하게 확인된다. 참고로 충신장의 서두 부분을 설명한 글을 부록으로 소개한다.
장건과 소무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銜使則蘇屬國,震遠則張博望;教敷而彝倫敘,兵舉而皇威暢
서정부에서 震遠(진원)이라고 표현한 배경은 먼 서역국가들에 파견되어 힘을 바탕으로 한 외교술을 펼친 장건의 경력을 두고서 한 말이고, 이런 장건을 소무와 함께 한 구절로 포함시킨 배경에는 소무가 19년 동안 흉노에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는데 먼 북방 호수에서 격리 구금되었어도 전향하지 않고 끝내 돌아와 한나라를 위해서 봉사한 사실과 같이 장건 또한 11년 동안 흉노에 억류되었어도 굴복하지 않고 되돌아와 외교술을 펼친 사실이 있다.
적국이 쳐들어오는 상황이나 적국으로 깊숙이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의 큰 위기 상황을 맞이하
여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사람이 소무와 장건이었다. 이들은 적국에 인질로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어도 굴하지 않고 끝내 살아 돌아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목숨을 담보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드러낸 충신이 아니련가? 이러한 장건과 소무의 경우처럼 외국으로 사신으로 가서 담판을 짓거나 외적을 소탕하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뤄내며 부국강병책을 실현하고 곧은 절개를 드러낸 충신의 부류에 충효로 이름난 투후 상구성이 있고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말년에 은퇴하여 은일의 삶을 누린 육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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