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서문
책을 펴내면서
이 책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대한 역사 교과서, 대학 참고서, 학계 연구서의 서술 내용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새롭게 역사적 진실을 밝혀낸다. 이 책은 문무왕릉비 비문 내용을 새롭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지금까지의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위”로 표기)가 문무왕릉비 비문을 번역하고 해석한 그 글과 내용을 정면으로 통박한다. 또 문무왕릉비의 정확한 해석을 통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저지른 역사 조작을 만천하에 밝혀내, 오천년 한국사의 비밀의 문을 열어낼 황금열쇠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 책은 학문의 전당에 들어선 대학생은 물론이고 교육자, 역사가, 박물관, 예술관 담당자, 문화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과 교수와 교사에게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책이다. 무엇보다 역사로부터 도피할 수 없는 한국인 모두에게 결코 놓칠 수 없고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행해진 기존의 학설이나 해석과는 정면으로 크게 차이가 나므로 역사의 혁명적인 과업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황금 시대와 한국인의 삶의 원형을 확인하고 다시한번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떨칠 위대한 한국인들이 대나무 우후죽순처럼 나타날 것을 기약해 주는 진실한 민족혼의 금등궤 황금사과상자에 해당할 것이다.
“진정한 학자란 기존의 학문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창조적 학문의 길을 걸어야 한다”. “삼국사기”가 완성된 해는 1145년, “삼국유사”가 편찬된 해가 1281년인데, 왜 이 책이 나온 2020년 때까지 그간 875년, 740년의 장장 유구한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비문 연구에 성공한 사람이 나타나지 못했을까?
“新羅文武王陵之碑”(신라문무왕릉지비) 이 비석이 682년 건립된 이후 지금껏 어느 누구도 비문에 쓰여 있는대로 그 역사적 진실을 찾아낸 사람이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차례가 오게 되었을까?
문무왕릉비 이 비석은 1795년경 발견되어 홍양호가 그 탁본을 구했고 또 김정희가 1817년 경주 천왕사 부근에 방치되어 있던 그것을 답사해서 확인해 봤다고 추사 자신이 말했다. 비문의 많은 부분이 마모되거나 소실되어 현재 비문의 일부만이 남아 있고 또 파편으로 전하고 있어서 비문의 전체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란 극히 힘든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비록 전체가 아닌 일부 파편이긴 하나 문무왕릉비의 탁본을 뜬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다. 그 결과가 현재 역사 교과서에 지금껏 실려 왔다. 지금까지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수많이 명멸해 갔지만 한국 역사의 기본 골격을 흔들만큼 새롭고 진실한 연구 결과는 별로 많지 않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나 무관심으로 인해서 간과하고 그냥 지나친 부분에서 다른 사람이 나타나 큰 보물을 발견하는 경우 대체로 여우의 신포도 비유와 같은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 책은 한국인의 그간의 학문 탐구의 태도와 자세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기를 요구한다. 이 책은 681년 문무왕 서거이후 1,338년의 긴 역사와 세월이 흐르고 난 오늘까지, 한국인이 간과하거나 놓쳐버린 매우 중요한 관점과 핵심을 집도의가 수술칼을 들이대듯이 날카롭고 세세하게 짚어내고, 현미경을 최초로 만들어서 미세한 세균의 움직임을 관찰한 업적을 이룬 레벤후크, 망원경을 우주로 내다보며 천체의 진리를 발견한 갈릴레오의 탐구의 자세로써 사마천 이후 역사 해석 분야에 있어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무늬가 반짝이는 만화경을 보는 것 같이 다양하고 흥미진진하며 무엇보다 새롭고 진실한 역사의 황금을 캐내 세계인 모두에게 던져 주고 있다. 이 책은 첨성대와 문무왕릉비와 더불어 천년 뒤에도 남을 한 권의 귀한 책이 될 것을 소망하고 기대한다.
하나를 어떻게 성취하는가?
‘구슬도 꿰매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작은 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참나무도 도토리에서 나오듯이, 하나의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제
아무리 천하의 어려운 일이라도 쉬운 일부터 시작하면 풀리는 법이고, 제 아무리 천하의 큰 일이라고 해도 반드시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열자가 “우공이산”의 비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성공의 결정적인 측면 하나는 한 걸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결국은 실행만이 중요한 의미를 가져온다. 실행없이 탁상공론으로 맹자왈공자왈만 외친다면 어찌 한 걸음의 시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뉴튼은 사과 하나를 얻어서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아인슈타인은 E=m 공식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평정했다. 하나를 얻어서 온누리를 얻는다. 이 말의 의미는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이든지 간에 그것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하여 만약 그것 하나가 없으면 그 사람 그 조직 그 국가가 파괴되고 쓰러지게 될 만큼 가장 중요한 골간과 그런 척추등뼈같이 중요한 그것 수주화씨벽 보배같은 그것에 대한 경의와 존중을 의미한다. 또 세상만사는 한 끝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고, 운명은 마지막 한 순간에 결정된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이를 비유로 말하면 ‘삶은 일인치 게임’이고, 이론적으로 예를 들자면 카오스 이론이요, 경제학에선 한계이론이고,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 개념이며, 동양예술이론에선 “화룡점정”이요, 노자의 말로는 “세상 만물은 하나에서 생명을 나고 자라며, 제후와 왕은 하나를 얻어서 지도자로 올라서는 것이니, 모든 것은 하나인 바로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이다.
先虧一簣功(선휴일궤공). 같은 컵의 반쯤 차 있는 물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컵에 물이 반쯤 찼다고 보는 반면 어떤 이는 물이 반쯤 비어있다고 바라보는 그런 관점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자와 노자의 관점은 서로 정반대로 바라본다는 차이가 있다. 공자는 아홉길 높이의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서 쌓지 못하다 즉 ‘성공을 눈앞에 두고서도 실패할 수 있다’는 막판의 실수를 경계하는 입장이고, 반면 지극정성으로 최선을 다해 대업을 성취해낸다는 노자의 입장에선 화룡정점 즉 마지막 한 순간까지 한 줌의 흙이 모여서 태산을 쌓는다는 우공이산의 지혜가 성공의 법칙임을 말해준다.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는데, 실패냐 성공이냐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타율적 입장의 공자의 시각과, ‘난 해낼 수 있다’ 캔-두-정신(can-do-spirit)과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는 개척 정신, 긍정적 입장인 노자의 시각과는 실제적으로 그 차이가 존재한다. 사마천 이후 2천년의 역사가 흐른 뒤, 외람되게도 저자는 옛부터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총망라하여 그 중 간략하게 고증하고 시작과 결말을 종합 정리하여 사람의 성공과 실패와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법칙을 고찰했다. 우주만물의 법칙과 국가와 사람의 운명의 관계를 연구하고 동서고금중외 변화의 역사를 살펴서 최고의 권위가 있는 책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문무왕릉비 비문 내용에 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로 요청된다. 문무왕릉비에는 오천년 한국 역사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역사적 진실이 무궁하게 담겨져있는 한국사의 수주화씨벽 보배이다. 이 책은 사라진 성배를 찾아서 생빽쥐빼리의 어린왕자가 갈릴레오의 죽대롱으로 밤마다 화목토금 부열성을 여행하면서 단기필마로 가화 구루마를 타고 추노성지 목석진을 나서 유유히 흐르는 장강 적벽과 삼협의 물살을 타고 두백 촉한의 자취를 돌아 백이의 양산과 사마천의 한성과 유자산의 금릉을 배회하고 회남에 해당화 핀 청와의 토총과 조조 서문표의 눈물방울을 낙랑해로 쏟아내며 모인이 백경을 타고 소요유의 모험에서 얻은 하늘나라 엄부자모로부터의 선물이다. 저자는 진실을 왜곡하고 가짜 역사를 거짓으로 꾸며 낸 “화랑세기” 등 조작된 위서들이 현재 시중에 버젓이 떠돌아 다니면서 거짓과 혼란을 부추기는 말세의 혼탁을 일거에 쓸어 버리고자, 이순신 장군의 맹서문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삼척장검을 들고 하늘 앞에 맹세하니 강산도 감동하여 색깔을 바꾸는도다”의 결기를 담았다.
1. 이 책의 기여도
① 문화 국가론 “Kulturstaat”
우리나라 헌법은 “문화 국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헌법 제9조의 규정이 그에 해당한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가 문화를 보호하고 육성하고 창달해야 한다는 국가적 의무를 담당하고 있는 체제를 “문화 국가”(Kulturstaat)라고 말하는데, 이 문화국가론은 원래 독일의 헌법 이론에 기초한다. 그런데 독일은 우리나라 헌법 제9조와 동일한 규정을 주헌법에서만 규정하고 있고 연방헌법에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헌법적 규정으로만 본다면 한국이 독일에 비해 보다 상위 규범을 두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의 베를린 주 헌법 규정을 보자. 독일 베를린 주 헌법 제20조2항의 규정 독일어 원문은, “Das Land schutzt und fordert das kulturelle Leben.”, 이 조항의 영어 번역은, “The Land shall protect and promote cultural life.” 우리나라 헌법 조항은 “문화” 개념을 “전통 문화”와 “민족 문화”라고 규정하고 있어 일반적인 “문화” 개념보다 다소 제한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측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민족과 전통의 의미는 제한적 수식어구로 이해되든 그렇지 아니하든 대한민국 헌법은 한민족과 한국인의 삶을 다루는 최고기본법이므로 문화의 개념은 헌법 전체 포괄적 해석상 전통문화와 민족문화의 의미를 확장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전통”과 “전통문화”에 대한 개념을 “이 시대의 제반 사회ㆍ경제적 환경에 맞고 또 오늘날에 있어서도 보편타당한 전통윤리 내지 도덕관념이라 할 것”으로 해석한 헌법재판소의 판결(헌재 1997. 7. 16. 95헌가6등, 판례집 9-2, 1, 19) 내용을 보면, 전통의 역사성과 시대성을 말해주므로 꼭 제한적인 규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은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된 것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라는 표현 또한 사실적 묘사이다. 또 대통령의 취임 선서문 (제69조)은 다른 나라하고는 달리 특징적으로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라는 선서 조항이 들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문화 개념에 속하는 핵심 영역으로써 종교의 자유 (제20조), 학문의 자유 (제22조), 예술의 자유 (제22조), 교육을 받을 권리 (제31조), 지적 소유권 (제22조 2항) 등 문화 영역에서의 기본권 보장을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문화 국가” 원리를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문화관계법령을 제정하고 있는데, 그러한 법령으로 문화예술진흥법 등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 행정법이 시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 문화재보호에 관한 법률인 “문화재보호법”과 “박물관 및 미술관진흥법”의 관련 법규의 재정비가 즉시 요구된다. 문화의 개념은 거대한 물결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한류의 흐름이 잘 말해 주듯이, “문화 창조 경제(cultural and creative economy)”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이미 들어섰음을 볼 때, “문화 국가(Kulturstaat)”론을 기초로 이 책의 연구 결과가 새로운 국부 창조에 미칠 기여도와 그 범위는 매우 크고 넓다.
② 국제적 영향력 세계적 보편성 확인
이 책의 문무왕릉비 연구 결과는 한국내에 머무르는 협소한 정도가 아니라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의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인류 지식과 전통 전승의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평가를 불러올 것이므로 국제적 연구 결과에 해당한다. 또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더불어 높여줄 수 있고, 인류의 보편성을 확인하는 대단한 작업에 해당된다.
저자는 새로운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곧 도태되고 만다는 다윈의 통찰에서, 현재의 혼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의 생명력과 역사의 혼과 그 끈의 발견이 절실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하였던 작은 출발이 마침내 엄청난 국부의 창조를 낳고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결과를 이루게 되었다.
문무왕릉비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않으면 어찌 황금시대를 확인할 수 있겠으며 오천년 한국사의 비밀의 문을 열 수가 있겠는가? “금석이 국사보다 나은 점이 이와 같으니, 옛 사람들이 금석을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어찌 하나의 고물(古物)이라는 것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돌이켜 볼 때 이 40년 동안 깊숙이 숨은 것을 찾아내고 비밀스러운 것을 척발(剔發)하며 고심한 것이 어찌 호사가(好事家)가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한 것이겠는가?” “1천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고 스스로 밝힌 김정희의 회고담을 크게 능가할 저자의 결론이다.
③ 토인비의 역사 연구
저자의 작은 연구 하나가 한국의 지식 교육 환경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틀을 바꾸는 어떤 획기적 계기로 작용하게 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는다. 순자가 파악한대로 작은 물방울 하나가 모여서 백천 강물을 이루고 연적 하나가 백천의 물꼬를 트고 대해로 다다르게 한다. 진실로 아름다움과 순수함의 고갱이를 간직한 위대한 한국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수많은 한국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될 밝은 미래의 큰 희망을 미리 내다본다. 수많은 세월의 흔적 속에 걷어내기 힘들 정도로 깊이 쌓여진 유교적 적폐 불교적인 적폐, 편견과 선입관 등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데 큰 방해 요소로 작동되고 또 무엇보다도 한국의 풍토병인 교과서 암기 위주의 교육 방법론과 천박한 지적 풍토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작업에 큰 힘을 보탤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살펴지는 바와 같이,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와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 시대에는 도교를 이단시하고 배척하였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배척의 시대적 잔존 유물의 영향력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한국적인 정치 교육 지형과 편향성을 곧바로 극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든 결코 진리를 탐구하는 진실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기 어렵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의 연구로 유명한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세계 종교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 막스 베버를 능가할 정도로 큰 업적을 남긴 역사가였는데, 그는 문명의 성공은 크게 종교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문화의 성공과 실패는 국민들이 믿는 종교에 밀접하게 달려 있다. 문명은 그 기반으로 삼고 있는 종교의 질(quality)에 의해 결정된다.” (토인비 대담).
토인비의 견해는 동양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데 있어서도 적용되는 탁견이다. 중국을 통일해낸 진시황제, 세계 최대의 제국을 형성한 한무제, 중국의 분열을 극복하고 민족 중흥의 대업을 이뤄낸 당태종, 몽골 이민족의 지배를 끝내고 중국의 부흥을 이뤄낸 명태조 주원장의 경우는 그들이 중화민족 정통 종교인 도교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면 아마 그같은 통일과 대제국으로의 성장을 이뤄내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토인비의 견해는 역사와 인간 문명의 성공에 대한 조건을 시사해준다.
“한 나라가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면 그 문명은 국내적으로 사회적 분열을 겪거나 외부 군사적 침략의 위험에 노출되거나 경제적 식민지 노예 상태로 전락할 그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믿음의 상실이 가져온 결과로 인해서 문명이 쇠퇴하면 다른 종교나 다른 믿음의 체계에 의해서 고무된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이러한 토인비의 견해는 신라의 발전과 멸망, 고려의 건국과 이민족의 침입, 조선의 건국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제국의 멸망, 대한민국의 발전과 한계의 대강과 족적을 설명해 준다. 종교는 세계사의 발전과 민족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세계관적 해석의 구체적인 틀과 정치 사회적 통합의 기능을 수행해 온 매우 중요한 제도에 속한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제도에 대한 해석이 배제되거나 올바른 접근을 하는데 큰 장애가 되거나 부족함을 노출하고 있다면 새로운 미래 창조를 열어가기란 매우 힘들다. 따라서 장애는 즉시 제거되어야 하고, 부족함은 바로 채워 넣어야 한다.
노자의 “애민치국”, 사랑과 화합으로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의 잠재적 인간성이 발현되고, 꿈과 희망이 실현되고, 국가 사회의 진보를 향한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인간 정신
과 민족 문화의 고갱이가 확인될 것을 기대한다.
2. 어떻게 임무를 달성해 낼 것인가?
“충신장”은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진수를 나타내준다고 흔히 말하는데 충신장 47인 의사들이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47인 무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 뜻을 세웠고 그 뜻을, 모든 난관을 뚫고 즉 최고권력에 맞서서까지 정해진 시간내에 한정된 자원으로 정해진 목표를, 달성해냈다는 것에 있다.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영웅으로 칭송받은 까닭은 한정된 자원과 제한된 시간 가운데 전략적으로 움직여 목표를 실행해냈다는 그러한 전쟁 전략의 성공과 또 그것을 이끈 사람의 정신의 위대함에 깊은 공감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가 죽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는 소크라테스의 삼단논법을 거들멱거릴 필요도 없이 장삼이사 초동목동도 다 알고 있는 진리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물과 공기는 무한정이라고 하지만 무한정인 물과 공기마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가능할 뿐인 원초적 제한성을 갖고 있다. “돈이 전부”라는 요즈음같은 극도의 이기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많은 황금과 다이아몬드는 다 어디로 갔을까? IT(외계인)이 훔쳐갔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충신장을 흠모했고, 어릴 적 세웠던 목표를 내 죽기 전에 이룩해냈다. 모두가 버리고 간 돌 하나에서 세상의 진실을 되찾는 거대한 역사 혁명을 이끄는 문무왕릉비와 첨성대 연구 작업을 완성해낸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돈과 한정된 지식을 전략적으로 배분하면서 학해의 바다를 건너 어릴 적 세웠던 목표를 달성해낸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과연 옳은 말이지 않을까?
어떻게 임무를 달성해 낼 것인가?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조지 오웰이 설명한 글쓰기의 동기를 인용하여 “역사 혁명: 문무대왕 유언 비밀 해제” 책 서문에서 장황하게 적어두었다. 오웰의 4가지 동기 중 개인적 동기가 내게는 가장 강하다. 왜냐하면 언젠가 비문을 꼭 해석해내리라는 어릴 적에 품었던 꿈을 이제서야 이룬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진화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일어나고, 혁명의 꿈은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내 가슴 속에 품었던 이제까지의 생각을 이 책을 통해서 이제 세상에 드러내니 감개무량하다. 장자가 말한 “盡其所懷 爲天下配”(진기소회 위천하배)의 포부로써 말할 수 있다. ‘도는 천하의 도이다. 그것을 품 속에 넣어 감출 수 만은 없다. 천하에 충만하고 후대 만세까지 행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같이 가슴 속에 품은 것을 흉금없이 털어 놓고,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3. 나는 어떻게 비밀을 풀었는가?
① 삼천년 동안 잠자던 트로이 유적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하인리히 슐리만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14세기경에 벌어졌다고 고고학적으로 규명되었다. 트로이 역사가 알려지게 된 것은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라는 문학작품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쓴 호머는 기원전 700년의 사람이므로 그가 트로이 전쟁을 배경을 묘사한 때는 토로이 전쟁이 끝나고도 그 후 약 5-6백년이 지난 시기였다. 비록 인걸은 간데 없지만 산천은 의구하다는 익숙한 싯구와 같이 호머가 묘사한 트로이의 산천은 실제 묘사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호머의 배경 묘사에 어려서부터 크게 감명 받았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에 의해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트로이의 유적이 1868년에 드디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슐리만은 어린 시절 호머의 문학 작품을 읽고서, 트로이의 성지가 실제로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가졌었다. 그는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리라는 어린 시절의 꿈을 쫓았고, 마침내 흙 속에 묻혀 3천년 동안 잠자고 있던 역사를 소생시키는데 크나큰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트로이 유적은 그가 발굴하기 전 그 자리 그곳 거기에 줄곧 있어왔다. 다만 사람들이 구성한 역사 속에서 잊혀졌을 뿐이다. 슐리만은 그 역사를 거슬러 어떻게 찾아냈을까? 그것은 첫째로 어려서 감명깊게 읽었던 호머의 작품이 전하는 바를 스스로 믿었고, 그 꿈을 일구겠다는 열의를 가졌으며, 그 꿈과 열정을 실천할 수 있는 도구를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슐리만의 업적을 이루게 만든 도구는 언어이었다. 슐리만은 모국어인 독일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영어는 물론 이고 라틴어와 그 이외 유럽 주변 여러 언어들을 망라할 정도로 여러 언어를 터득했던 바 그런 언어의 도구를 이용하여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 내는 개가를 올릴 수 있었다.
내가 글자를 배우기 이전 보았던 비석들에 새겨진 한문들을 보면서-어릴 적엔 읽어내지를 못했으니- 다음에 커서 언젠가는 제대로 의미를 깨우치리라는 의지를 다졌다. 역발산기기개의 항우가 어릴 적 “書足以記名姓而已”(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하다)고 말하며, 무력에 의한 패권 추구와 중원 통일의 꿈을 키웠는데, 나는 그와 반대로 영어 표현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펜은 칼보다 힘이 더 크다)”는 뜻의 문화 덕화 교화의 가치에 보다 더 큰 비중을 두었고, 항상 ‘글의 힘’ (the power of language)을 믿었으며,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 신성시하며 책은 발뒷금치로도 넘지 않고 애완동물 다루듯 사랑했다. 우리집 기둥에 매달아 놓은 “명심보감” 책을 장백단이 매달아놓은 굴비고기 쳐다보듯 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꿈꿨다. 할머니는 동짓달 시린 밤 손자들을 위해 다락방에 꼭꼭 감춰둔 군고구마의 정을 심어주셨는데, 우리들이 어렵게 살던 보릿고개 시절, 어머니부터는 오태백의 겸양지덕을 아버지로부터는 엄격한 ‘충신장’의 길을 배웠다.
트로이 유적은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해 왔고, 그 동안 유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 왔건만 오로지 슐리만의 호기심과 탐구 덕분에 새로운 발견이 성공한 것이다. 그의 발견은 어려서부터 꿈을 좇았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의 직관에 의해서건 지식을 추구한 노력에 의한 개인적 성취인가? 아니면 어떤 신의 계시에 도움을 받아서 이룩한 것일까? 나는 정확히 구분해내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시사하듯, 직관이든 계시이든 어떤 외부적 도움을 받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준비하고 꿈을 실행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② 나는 어떻게 비밀을 풀었는가?-“힌트와 추측일 뿐, 추측이 따르는 힌트일 뿐”
근대 사회학의 태동은 뒤르껨과 막스 베버에 의해서 정립되었다. 이들은 내가 아닌 다른 개인들의 행동을 통해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다는 지식터득의 방법론을 적용하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또한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자서전 등의 케이스에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사회는 구성원의 전체적인 합 이상의 그 무엇으로써, 구성원 개인들과는 독립적일지라도 그 구성원들에게 나타나는 행태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을 재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진실은 자기 자신이 직접 평가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정신분석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던 기초는 자신의 직접적인 외디푸스 콤플렉스 심리적 경험이었으며 또 그것을 다른 사람의 작품과 연결시킬 수 있는 상호 관찰 작용의 덕분이었다. 사람의 행동은 남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모방성, 행동성의 성격에 기인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분석과 사람들의 관계성은 노자 도덕경에서 또한 찾아진다. 프로이트가 수긍했다시피, 비록 진정한 자기 분석이란 불가능한 작업에 해당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주고 받는 작업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금석문이란 남의 글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듣고서 객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대상이다. 여기서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엘리어트는 말했다. “힌트와 추측일 뿐, 추측이 따르는 힌트일 뿐”. 이러한 나의 방법론을 대략 말하자면, 우선 개념을 정의(definition)하고, 이에 따라 분류해 나가고, 그것을 다시 재분류(subdivision, department) 세분해가는 체계적인 방법론에 해당한다. 이는 전제와 가정(assumption)을 먼저 하고 그 바탕 위에다 자신의 것을 추가하는 일 처리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법조인들이 이런 체계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아마도 동일한 개념에 대해 같은 정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논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론은 뉴튼의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기 때문이다”의 고백해서 알 수 있듯이, 선례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일구어 내는 통합적 방법론에 가깝다.
나의 연구 방법론은 사전적 정의와 그 의미 설명을 추구하므로, 객관성(objectivity)을 확보하는 객관적인 분석(objective analysis) 태도를 취한 실증주의 (positivism) 방법론에 해당한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에서 나의 새로운 생각이 도출된다.
참고 문헌
나의 연구는
① 이 책을 완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판독문 문헌 자료는 《海東金石苑》(劉喜海(1794-1852)의 편찬 1881년 이명초당 발간)과 청나라 육심원(陸心源)의 편저 “唐文拾遺” (1888)이었다 이러한 지식 전승의 인류 보편성 확보에 큰 노력을 다한 편자들과 발행인 그리고 보존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② 기존의 번역과 해석을 제쳐 놓고, 오로지 비문 원문만 보고 나만의 번역 해석 작업을 홀로 완성해 내서, 기존의 번역과 해석이 내가 완성한 원문 해석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의 도전적 반론이 얼마나 또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객관적인 시각에서 합리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③ 문무왕릉비 비문 해석에 대한 나의 설명과 이에 대한 객관성의 확보는 漢文 중국어 사전의 설명에 의존하였다. 이 책을 씀에 있어 저자가 한문 원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서술하거나 인용하는 경우는 《漢語大詞典》《康熙字典》《辞海》 한어대사전과 강희자전과 사해 중국어 사전을 주로 이용하였다. 또 《新华字典》《现代汉语词典》 등의 중국어 사전 또는 간혹 일본어 漢和 사전을 참고한 적은 있으나, 한국에서 출판된 옥편이나 중국어 사전 등은 참조하지 않았다. 한자 사전은 대만과 중국의 한자 사전 사이트에 주로 의존하였다:
http://www.ivantsoi.com/; http://www.hydcd.com/; http://hy.httpcn.com/;
http://tw.ichacha.net/; http://www.zdic.net/; http://www.guoxuedashi.com/;
https://www.moedict.tw 그 이외 일본어 사전 goo 辞書 http://dictionary.goo.ne.jp/
옥스포드 영어 사전 https://en.oxforddictionaries.com/ 사용하였다. 다수의 汉典 인터넷 사이트가 한자 사전의 편리한 검색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이 책 속에서 한문의 뜻을 설명하거나 번역이나 해석함에 있어서 인용한 사전에 들어 있는 원문의 해당 페이지 쪽수는 밝히지 않고 생략했다.
④ 道敎(도교)에 대한 이해는 노자 장자 문자 열자 등의 원전과 설명서를 탐독했고, 학문적인 연구서로써 기본서는 《Daoism Handbook》《The Encyclopedia of Taoism》을 완독하고 연구서들을 섭렵했다. 사전은 《道敎小辞典》《道敎大辭典》을 활용하였다.
⑤ 《Daoism Handbook》을 읽으면서 도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높이게 되었으며, 《The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을 읽으면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반악과 장재와 유신의 문장들을 《昭明文選》《庾开府集笺注》을 통해서 읽고 또 《前漢書》와 《晉書》와 《周髀算經》 등을 읽고 나서 저자의 책의 시작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저자의 독서 여력과 참고 서적 목록은 저자의 “첨성대 연구: 문무대왕릉 나는 어떻게 발견했는가”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된다.
⑥ 사마천의 史記, 반고의 漢書, 방현령의 晉書는 《二十四史》를 이용하였다. 사마광의 資治通鑒은 柏杨白话版资治通鉴과 한국의 고전문헌번역DB를 참조하였다. 三洞瓊網을 포함 “道藏”(도장)은 正統道藏(정통도장)을 참고하였다. 또 이런 자료들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 등 인터넷 제공 소스를 활용하였다.
③ 왜 여지껏 큰 성과와 발견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창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가?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유명 대학도서관 그리고 전자도서관 검색 등의 방법을 통해서 관련 연구서들을 섭렵하고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저자가 찾고 싶었던 연구 결과 내용에 가까운 자료는 찾질 못했다. 그리하여 황야를 걸으며 혼자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또 나의 생각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하는 글들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일이 자구 하나 하나 해석을 스스로 확인해 나갔고 또 다른 사람들이나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였다. 대신 나의 글을 완성한 후, 세상의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 에서의 태도를 견지하며, 평가받을 것을 스스로 약속했다. 이러한 나의 자세는 상앙의 상군서에서 스스로 배웠고, 상군서의 구절을 각주로 인용한다.
새로운 발견은 외부적 시각에서 전혀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한 성취해내기 쉽지 않다는 와호장룡의 어려움이 있거나 또는 어떤 직관적이거나 계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직관력을 가지기 힘든 이유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습관적 태도에 있다. 만약 나의 연구 결과 가운데 직관이나 계시적인 생각이 통했다면 그것은 한국과 여러 외국의 문물과 사고를 직접 겪어 보고 스스로 통찰한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발견의 과정에서 어떤 내적 가슴 속에서 나오는 영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내가 우주천체의 근원적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성적 능력으로써가 아니었다. 지성은 발견의 과정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적 가슴 속에서 튀어 오르는 무언가에 있는데-그것을 직관 또는 무엇을 하려는 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해결책이다.”
우주 질서의 법칙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인간은 거기에 이미 존재한 진리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삶을 발전시켜 왔다. 우주는 ‘빅뱅’하고 원자 분자 운동처럼 잠시도 쉬지 않지만, 뉴튼 아인슈타인 등 위인들이 말해주듯이 인간은 침묵 속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천체를 관측한 뒤 그가 발견한 진리를 담은 책 제목을 “별의 메신저”라고 붙인 것은 사람은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천체 관측과 원자 운동(DNA 나선구조)의 발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외양과 실체는 다를 수 있다. 사람의 논리와 감성과 이성에 의한 ‘해석 작업’(interpretive process)이 없다면 진리는 발견되기 힘들다.
권위에 짓눌려 완전성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니이체의 지적을 참고로 적어둔다.
왜 역사학에서 정치 권력의 역사만이 주로 선택되었고 종교나 문학의 역사는 빠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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