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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대혁명/행복의 경제학

케인즈 다시 보기: 우리 후손 세대가 맞이할 경제적 가능성

by 추홍희블로그 2015. 8. 13.

5.2.2.    케인즈 다시 보기: 우리 후손 세대가 맞이할 경제적 가능성

 

자본주의에 대한 케인즈의 낙관적인 전망이 왜 실패로 귀결됐는지 그 이유를 규명해 보는 하나의 시도로써 유명한 경제학자 18명이 모여 16편의 논문을 모와 2008년 단행본으로 “케인즈 다시 보기: 우리 후손 세대가 맞이할 경제적 가능성 (Revisiting Keynes: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을 펴냈다.  2008년은 대공황 이후 가장 극적으로 주식시장 대폭락을 가져온 금융위기가 일어난 해다. 

 

일과 돈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은 노후의 안락한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저축을 할 여유가 없다.  대부분 죽도록 뼈빠지고 일해야 되고, 여가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케인즈의 예언과 달리,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저축과 노동의 문제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케인즈가 소득분배의 문제를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스티글리츠는 소수의 자본가에게 보다 많은 소득이고 집중되고, 비숙련 단순 임금노동자의 소득은 정체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실질소득은 늘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노동자들의 소비 욕망이 광고에 의해서  부추기에 지기 때문에 노동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성장 이론의 대가 로버트 솔로는 기술진보와 자본 축적으로 인해 자본이 노동을 쉽게 대체함에 따라 노동의 수요가 줄어들고 또 단위임금도 낮아지게 되어 노동자들이 더 일을 하여야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빈곤문제의 해결은 아직도 요원하다.  또 절대적 빈곤 문제를 해결한 선진국에서도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시장경쟁경제체제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여가 부족과 개인과 사회의 신뢰 후퇴를 가져다 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면에서 케인즈의 낙관적 전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따라서 케인즈의 총량 경제 정책, GDP 숭배 전략은 그 타당성을 상실했다고 보여진다.  그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여야 효과적인 처방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인즈 다시 보기: 우리 후손 세대가 맞이할 경제적 가능성 (Revisiting Keynes: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은 이러한 경제 문제에 대한 경제학 대가들이 나름대로 고뇌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촉발을 계기로 깨어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이상 경제성장을 절대선으로 맹목적으로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 경제 구도에서 중요시되는 경제 총량 성장은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GDP 기준 자체에도 큰 오류가 있음을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확인해 주었다.  영국 미국 EU등의 최근 연구가 말해주듯이 GDP 대안지표의 개발 필요성이 절실하다.  성장 지상주의가 맹목적으로 통하던 시절은 지났다.  경제성장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성장론의 가정은 현실과는 큰 괴리가 나타났다.   경제학자들의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가 가열차게 논의되어야 한다.   케인즈가 파악한 것과 같이 국가마다 개발 성장단계가 다르고, 개인간의 소득수준이 다르다는 측면에서, 개인과 사회, 국가, 국제간의 능동적인 협력적 모색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또 인간사회의 자체의 불안정성 때문에 개인적 도덕성이 물질적 탐욕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어려움이 크다는 점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인간 삶의 불안전성 그 자체가 사회 정의와 선한 삶에 대한 열정을 작동하게 만든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개선의지가 인간 본성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케인즈의 젊은 시절 한 일화에도 등장한 하나의 비유를 들어본다.  두 사람이 가난과 빈곤으로 피폐해진 마을을 지나칠 때, 전형적인 보수파는 “매우 비참하고 불행하다, 하지만 가난은 나랏임금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전형적인 진보파는 “이런 비참한 광경을 그대로 둘 수 없고,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대체적으로 이렇게 두 부류의 상반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서 진실이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본성을 자기이익추구에 있다고 가정하는 경제모델은 위기상황을 예측도 할 수 없었고, 또 위기를 극복할 수도 없었다.  삶의 위기는 인간사회에서 수시로 일어난다.

 

선한 삶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사람들이 왜 살아가고 개인과 사회의 선한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떨칠 수 없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다음의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읽어보면 케인즈의 경제 문제 해결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19148월에 막을 내린 그 시대는 인류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얼마나 예외적인 시절이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고 생활수준은 낮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운명에 꽤 만족했었다.  그러면서도 평균 이상의 능력이나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으로 탈출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리하여 과거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왕들도 꿈꿀 수 없었던 편의와 안락과 문화시설을 적은 비용과 최소한의 노력만으로도 누릴 수 있었다.  런던 사람들은, 침대에서 아침 차를 홀짝거리면서 전 세계의 진귀한 물건들을 전화로 주문하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제시간에 문 앞까지 배달된 물건을 받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와 동시에 동일한 방법으로 세계 어느 지역이든 천연자원이나 새 기업에 자산을 투자하고, 수고도 걱정도 할 필요 없이, 투자의 과실과 이익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혹은 그는 상상력이나 정보가 권해 주는 대로, 어떤 대륙의 왠만한 자치제 주민들의 선의에 자기 재산을 안전하게 맡기기로 결정할 수도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값싸고 안락한 교통수단을 즉시 확보해 여권이라든가 그 밖의 형식적 제약 없이도 지구상 어디든 갈 수 있었고, 근처에 있는 은행으로 하인을 보내 필요한 귀금속을 공급받아서, 종교와 언어와 관습이 낯선 외국 땅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런 상황이 더욱 개선될 것이며, 일상적이고 확고하게, 앞으로도 영원하리라고 간주했다는 점이다.[1]



[1] 케인즈, “설득의 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