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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대혁명/행복의 경제학

케인즈 예언과 탈GDP시대의 전개

by 추홍희블로그 2015. 8. 13.

5.2.  케인즈 예언과 탈GDP시대의 전개

5.2.1 케인즈 다시 보기

5.2.1 빗나간 케인즈의 예언

 

케인즈는 마르크스가 죽은 해인 1883년에 태어났다경제학자 케인즈의 머리 속에 자리잡은 주된 의제 중 하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혜롭고 즐거우며 또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가?”이었다.

 

1차 세계 대전(1914-1918)의 전화로 유럽이 황폐화되고 지성의 힘이 흔들릴 때 케인즈는 러시아의 혁명의 예처럼 폭력이 수반하는 급진적 변화에 기대지 않고서도 자본주의를 절대 절명적인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1929년 뉴욕주식시장의 대폭락으로 대공황이 일어났다.  1930년대 대공황은 심각한 경제불황에 빠져들었고 실업자로 넘쳐났다.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의 시대”이었다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힘든 시대이었다거듭된 정부의 경제실책으로 인해서 실업은 비정상적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자본주의는 암울한 절망 속에서 빠져 들었다그러나 모두가 무력하게 손을 놓고 있던 암울한 절망의 시기에도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케인즈는 경제성장의 핵심이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자본주의는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케인즈는 담대한 주장을 펼쳤다케인즈의 담대한 희망은 그가 1930년 발표한 “100년 후의 경제 전망”이라는 에세이 “우리 손자 세대가 맞이할 경제적 가능성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서 잘 나타난다여기에서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자본주의가 단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삶의 여건들을 가져다 줄 수 있다자본주의의 엔진은 “돈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박관념에 의해 굴러가는 체제인데, 이것은 또한 선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자본주의는 복리(double interest: 복리의 위력에 대한 글 참조)의 위력이 작용하여 미래에 소득이 늘어나게 된다.  100년 후에는 사람들의 소득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보다 구체적으로 전망하면 이렇다만일 자본이 연2%의 비율로 증가하고 인구 증가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성이 연1% 증가한다면 1백 년 후 문명 세계에 살게 될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은 노력으로도 1920년대에 비해 4배에서 8배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게 될 것이다케인즈는 결핍의 시대가 사라지고 대신 풍요의 시대가 오게 된다고 전망하면서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정신적 풍요도 함께 성장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케인즈의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나타나는 문단을 보자“종교적 원칙과 전통적 미덕이 부활할 것이다탐욕은 악이고, 고리대금업은 범죄이며, “돈에 대한 애착”은 가증스러운 것이고, 미덕과 올바른 상식의 길을 걷는 사람은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단보다 목적을 더 높게 평가할 것이고, 유용성보다 선함을 선호할 것이다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루 시간들을 귀중하고 선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주는 사람들,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부터 직접적인 맛볼 수 있는 즐거운 사람들, 수고도 없고 걱정도 없는 들판의 백합꽃과 같은 사람들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1]

 

그러나 케인즈의 담대한 예언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오고, 실업의 위험이 사라지고, 노동시간은 적고, 풍요한 여가가 넘치고, 고상한 삶으로 충만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던 케인즈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케인즈의 예언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더 오래 일하게 되었고 (그로닝겐 통계에 의하면, 1973년 이후 미국의 1인당연간 근로시간이 204시간 더 늘어났다), 사람들의 삶은 행복하지 못하고, 빈곤과 실업의 문제는 아직 해결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요원하기 때문이다결핍의 시대가 사라져 더 이상 경제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던 케인즈의 예언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담대한 예언이 여지없이 빗나간 것처럼, 불행하게도, 케인즈의 낙관적 예언도 빗나가고 말았다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비관론이건 낙관론이건 선지자적 예언의 전망을 허용하지 않는 복잡한 체계인지 모른다.



[1] I see us free, therefore, to return to some of the most sure and certain principles of religion and traditional virtue—that avarice is a vice, that the exaction of usury is a misdemeanour, and the love of money is detestable, that those walk most truly in the paths of virtue and sane wisdom who take least thought for the morrow. We shall once more value ends above means and prefer the good to the useful. We shall honour those who can teach us how to pluck the hour and the day virtuously and well, the delightful people who are capable of taking direct enjoyment in things, the lilies of the field who toil not, neither do they sp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