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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calling+힐링/아픔과 힐링

의미와 힐링 치유

by 추홍희블로그 2015. 8. 13.

왜 고로쇠 나무 수액이 만병통치약인가? –물도 달짝지근한 물이 있는가?

 

요즘은 지리산 근처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고로쇠 나무 수액이 건강음료수로 각광을 받고 있고, 따라서 농가의 주된 고수익 상품의 하나로 더욱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본다.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대표적인 곳은 지리산이다.  심산 유곡 지리산은 계곡의 맑은 물도 약수에 가까울 텐데 거기에다 고로쇠 나무의 수액이라면 약수 중에 약수일 것 같다. 지리산 근처뿐만 아니라 영남 알프스 산악지대인 가지산 간월산 지역에도 고로쇠 수액 채취가 활발하다.  영남 알프스 산비탈 이곳 저곳에 고로쇠 수액을 받는 하얀 색깔의 호스가 나무들 사이로 거미줄처럼 처져 있음이 보인다.  고로쇠 나무가 많은 마을은 건강음료수 웰빙 붐을 타고 고로쇠 수액을 파는 물장사를 잘하여 마치 대동강물을 내다 판 봉이 김선달처럼 가만히 앉아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을까?  한정적인 고로쇠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으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세상만사 새옹지마 塞翁之馬라고 하거늘, 산업화 혁명 와중에 낙오된 보릿고개의 험한 시절의 농촌이 이제부터라도 뿌린 만큼 거두는 자연법칙과 전화위복으로 최소한 부농으로 탈바꿈하는 날이 도래할 수도 있을지 모르는데,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것은 천지개벽의 새로운 세상이라기 보다는 위대했던 황금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그 때의 자연 질서가 회복된 것이리라.  요산요수이고, 물은 사람의 건강을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수이다.  모든 산비탈을 다 깎아 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지만, 만약의 위하여, “고로쇠 나무를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비유하는 정호승의 시구절을 기억하자.

 

고로쇠 나무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니

내 가슴을 뜯어가 떡을 해먹고 배불러라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니

내 피를 받아가 술을 해먹고 취해 잠들어라

나무는 뿌리만큼 자라고

사람은 눈물만큼 자라나니

나는 꽃으로 살기보다

꽃을 키우는 뿌리로 살로 싶었나니

봄이 오면 내 뿌리의 피눈물을 먹고

너희들은 다들 사람이 되라.

 

 

왜 고로쇠 수액이 만병통치약인가?        

 

고로쇠 나무는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활엽수 낙엽교목에 해당한다.  고로쇠 나무는 주로 계곡 근처에 자라고 있는데, 수액은 밤낮의 온도 편차가 클수록 좋은 조건인데 4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날씨 특성과 산과 계곡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상 고로쇠 나무가 잘 자라는 것은 당연하다.  고로쇠 나무 수액의 맛은 달짝지근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는데 사실 고로쇠 나무는 단풍나무과의 수액은 자당이 함유되어 있어 달짝지근한 맛을 보일 것 같다.  자당은 혈당 조절에 따라 피로 회복에 효과가 좋을 것은 당연한데 사실 등산에 힘들고 지치고 피곤한 목마른 상태에서 계곡물이라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고 그 물은 감로수가 되리라.  절에 가면 음료수를 “감로수”라고 말하는데, 왜 절의 물은 단맛이 날까?  육체적으로 허기가 진 사람이건 진리의 구도에 목말라 하는 수도승이건 아침이슬같이 맑은 물을 마시면 저절로 감칠 맛이 날 것 같다.  그러나 찬물도 순서가 있다”고 하니까, 가장 쉬운 “누워서 떡 먹기”보다 물 마시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사실 요사이 산에 가면 등산인구에 많아서 약수터마다 줄을 서는 것이 다반사이고 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고로쇠 수액은 이뇨효과로 위장병과 변비 환자에 좋은 것은 물론이고 신경통, 관절염 환자에게 좋다는 사실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 상식이다.  고로쇠의 효능이 이와 같은 까닭은 그 수액에는 4대 미네랄 성분이라 일컫는 칼슘, 칼륨, 마그네슘, 나트륨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로쇠 수액 sap은 그야말로 천연 쥬스이고, 천연 이온 음료로써 생체수 bio-water인 것이다.  이 생체수에는 칼슘, 마그네슘, 칼륨, 나트륨 등의 천연 미네랄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특히 관절염, 신경통 환자에게 좋다고 한다.  미역이 산후조리에 좋다는 것은 철의 미네랄 성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뢰쇠 수액이 우리 몸에 좋다는 이유는 철 성분이 많은 사과가 우리 몸에 좋다는 사실과 동일 선상에 있다.  서양에는 “하루에 사과 하나씩 먹으면 아플 걱정은 없다”는 속담이 있어, 사과가 무병장수를 대표하는 과일인데,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어딜 가나 약수터가 많은 사실이 잘 말해주듯이, 요산요수 “약수가 만병통치약”으로 전해진다.

 

고로쇠 나무의 말의 기원- 사람의 뼈를 튼튼하게 만드는 미네랄 워터-“골리수 骨利樹”

 

요즈음 건강음료수를 판매하는 대형 재벌 회사는 대개 연구소를 두고 있는데 고로쇠 수액이 건강에 좋은 음료수임이 위와 같은 이유들로 잘 밝혀져 있다.  그런데 고로쇠 수액이 건강음료수임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과 전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좌정구도중이던 한 수도사가 득도하여 일어서려는데 끓고 앉았던 무릎이 펴지지 않아서 힘겨워 하다가 한 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려는데 그 나무 가지가 부러지면서 물방울이 떨어져 그 물을 받아먹고 나자 퍼지지 않던 무릎이 활짝 펴졌다고 해서 “골리수 骨利樹”라고 불렀다 한다.  이는 심산유곡에 절이 들어서 구도자의 이야기인데 예로부터 높은 산세로 인해 지형전략상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전투가 잦았던 지리산 지역에서 전투 중 병사들의 갈증을 화살이 꽂힌 나무에서 물이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그것을 생명수로 마셔 갈증을 해소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나무를 골리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로쇠”는 “骨利樹”의 우리말 편한 발음에 해당됨은 옛 문헌을 검토해 보지는 않았지만 일견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복수 발음 “ㄹ” 탈락 현상으로 “고리수”가 자연적일텐데 왜 “고로쇠”로 변형되었을까?  “무쇠팔” “무쇠다리”라는 말이 전해주는 것과 같이, 일반인들은 “쇠”처럼 관절이나 뼈가 튼튼했으면 기대했을 터인데, “쇠”가 들어간 이유는 일반인들의 그러한 기대를 반영하고 또 “철”의 미네랄 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육체 노동에 의존한 농업사회에서 튼튼한 뼈를 유지한다는 것은 생존뿐만 아니라 부를 낳은 조건이었다.  철은 포항제철이 생산하는 철강이 산업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실에서 알다시피, 철기 시대 때부터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가져오고 인간의 삶의 발전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로써 매우 중요시하게 여겼다.  고로쇠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철과 같이 사람들에게 고귀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께선 낙상 골절당하기 오래 전부터 평생을 좌골신경통으로 고생하셨는데, 그 때문에 고로쇠 나무에서 채취하는 고로쇠 약수에 관심이 많았다.

 

고로쇠 수액이 약수로 여겨지는 까닭은 이런 유기체적 약효 성분 측면뿐만 아니라 나무와 물 수액의 상징적인 측면에서도 찾아지는 것 같다.  왜 수액이 성수처럼 신성시되는가?

 

나무는 물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식목일 날 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거나 정원의 꽃 화분에 물주기를 해 보면 안다.  나무는 물을 먹고 사는데 나무에 물이 흐르는 것을 육안으로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나무 껍질을 벗기면 물기를 볼 수는 있지만 물이 흐르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무엔 물이 분명하게 흐르고 있다.  수액이 없으면 나뭇잎이 열매가 달릴 수도 없다.  나무의 수액은 나무의 뿌리에 스며들어 줄기를 타고 올라가 나무에게 삶의 기운을 불어넣고, 초록빛 잎을 자라게 하고, 그 잎이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게 만들고, 꽃을 피우고, 과일과 열매를 맺게 해준다.  분명하지만 보이지 않게 그 속을 흐르는 나무의 수액.  그와 같이 우리 사람도, 우리 사회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속에 사람 몸의 피같이 무언가가 돌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나 나무나 그 무엇이 없으면 고사하고 말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인다고 해서 확실한 것이 아닌 것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이 구절을 킹제임스성경으로 읽어보면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는 것 같다.[1]  믿음으로 실현될 현실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확신을 말한다.  다가올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짐으로 결코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현대어성경버전을 보자: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예전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도 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다시 말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수긍할 것입니다.



[1]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For by it the elders obtained a good report.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