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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cessity긴급피난

“나라야마 부시코”

by 추홍희블로그 2015. 7. 27.

나라야마 부시코단상

 

<사진,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영상 캡쳐>
(나라야마 부시코 영화에선 인간세상의 적나라한 본능이 나타나기에 우리나라 극장에서는 짤릴 부분이 많을 것임을 참고바람) 

 

누가 희생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홀어머니 오린(70)의 외아들 다츠헤이의 나이는 45살이고, 어린 아이 4명을 키우고 있는 가장이다.  오린은 나이 칠십이 되면 나라야마 순례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이다.  순례길은 버림을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죽음의 제물에 바쳐지는 희생자가 되고,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늙은 노모를 버려야 하는아들은 가해자의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라야마 부시코의 소설과 영화에서 노모를 버리는 아들은 비정한 아들로서 그려지고 있지 않다.  한편 옆집의 마타얀 할아버지는 자기 아들에 의해 강제로 산으로 끌려가서 계곡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다.  자기 아버지를 강제적으로 굴려 뜨려 죽이는 마타얀의 아들이나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어머니를 갖다 버린 오린의 아들이나 늙은 부모를 높은 산에 갖다 버린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똑같다.  둘 다 살인의 실행자로서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죽음의 결과를 가져온 측면에서 이 둘에게 도덕적 차이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차분하게 수용한 부모와 죽음을 순수히 수용하지 못하는 부모의 존재 차이 때문에 이 둘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라야마 부시코의 소설과 영화에서는 공동체내의 규범질서에 따라 죽음을 수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오린의 죽음 장면에서는 시신을 먹는 까마귀의 사라진 반면, 그 규칙을 거부하다가 강제적인 죽음을 당한 마타얀의 죽음 장면에서는 까마귀 떼가 몰려드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평화로운 죽음 good death’의 유무 여부에 따라서 죽음의 실행자인 사람의 도덕적 가치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인가?  죽음의 규칙을 실행하는 오린의 아들도 마음의 괴로움을 감출 수가 없고, 그러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가장 고급인 흰 쌀로 빚은 을 마시는 의식을 마련하고 거기에 참여한다.  노모를 버리기 전날 술을 먹는 의식에 참여하는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도 늙은 부모를 버렸다는 측면에서 공범자의 입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버렸다는 공범의식을 갖고 있을 것으로 기꺼이 술을 마시는 행위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생존의 필요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연하게 취급되는 노인 버리기의 체제하에서 서로 공범자가 되었고 이들은 (단순한 구경꾼들이 아니라 자신들도 늙은 부모를 버렸던) 공범자로서 이제 서로 동료 의식 comradeship을 갖게 되는 소위 야쿠자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죽음이 생존의 삶을 위해서 이뤄지는 죽음의 제의를 통해서 개별화에서 전체화하면서마을 사람들은 서로 결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폭력에 의해 유지하는 조직폭력배(갱단)의 문화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투키디데스의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야비한 갱단 문화를 설파하였다: “신성한 법을 지키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고, 대신 동료들간에 죄를 함께 지을 때 서로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1]

술은 자연이 마련해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위적 가공품이다.  술은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수단이 되고 공동체를 결속시켜주는 도구가 된다.  한 개인의 의식에서 공동체 전체를 이어주는 집단 의식으로 변화되는데 여기서 제의와 술은 변화의 도구로써 작용한다.  술과 제의는 도덕적 면죄부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의식과 거기에 쓰이는 술은 폭력에 의해 공동체를 유지해 가는 집단적인 주술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폭력의 제도는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적인 사회 통치 구조와 상통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같은 인간이라는 동료의식 friendship을 유지하려면 맑은 정신으로써 깨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공동체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강제적 폭력이 용납되는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양심이 집단적인 무의식에 의해 허물어지고 만다.  

치술령 망부석 바위 전설의 신라 이전 고대 원형 탐구

 

기어서라도(게걸음질을 치고,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들어가겠다라는 속어의 기원

 

우리가 버림을 받을 때 (예컨대 정치인이 공천에 탈락을 한 경우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 대학시험에 낙방을 한 사람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입학을 하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 뒷문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라는 속어를 쓰는 경우를 흔히 본다.  늙고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여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바다 게처럼 옆으로 슬금슬금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는 한서린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왜국에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망부석이 되었다는 치술령 고개의 박제상 부인의 망부석 바위 전설” (망부석 바위 전설은 삼국사기 기록에 전해지는 치술령 박제상 부인의 망부석 전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망부석 바위 전설은 전국적으로 산포하고 있는 큰 바위(바우)” 전설의 전형에 속한다. 큰 바위 전설이란 미국의 러시모아 산의 대통령 인물조각상과 큰 바위 얼굴소설이 잘 말해주듯 바위와 큰 인물이 연결된 전설이다.  치술령 바위 전설은 고산 바위에 버려진 늙고 병든 할머니가 바다 게가 되어 돌아왔다는 전설과 속담에 연결되어 있음을 추축해 볼 수 있다.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순장을 금지하게 되었고 그 이후 국가권력이 강대해지면서 충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기로(고려장) 전설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창부수의 정절 의무를 강조하는 불교,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라 망부석의 전설로 변형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고대국가이전의 현존 사료의 한계상 정확한 고증 여부는 논하기 힘듬) 문학적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망부석전설은, “깊은 산 바위 위에 시체로 널려 있다나라야마 부시코의 문장 표현이 암시해 주듯이, 고대 상장례의 한 풍습이었던 순장풍장의 모습이 엿보이는 전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뒷문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라는 속어가 있는 데 이에 대한 기원을 생각해 볼만한 소재를 나라야마 부시꼬의 장면에서 발견되는 것 같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주제가 노래를 살펴보자.  노래가사를 대강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멀리 떨어진 별채 구석진 방에 홀로 버려진 할머니

귀신 같은 이빨은 남아 있어 음식만 축내고 있네.

 

아버님, 창문을 열어 먼산을 쳐다보세요.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고 벌거숭이 나무가 되었네요.

 

아버님, 이제 등에 지게를 지고

높은 뒷산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네요.[2]

 

소금장수집 할머니는 운이 좋데요.

나라야마 순례길을 떠나는 날 함박눈이 내리니까.

 

하지만 지독히 추운 날씨이건만

순례 길의 할머니는 솜옷도 걸치지 않아 얼어 죽겠네.

 

뒷산 높은 바위 밑에 할머니를 버리고 왔다네.

밤중에 참게가 기어서 집으로 들어온다네.[3]

 

우리 나이 70이 되면

우리는 나라야마 순례길을 함께 떠나야 하겠네.

 

일본말은 우리말과 같이 존대어와 하대어가 발달된 언어이다.  우리말에 어머니” “모친” “자당” “엄마” “엄니” “어무니호칭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바깥나라 외국인들은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할머니” “할망구” “할매” “할마시” “할멈” “조모등의 표현도 말을 하는 사람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문맥상 의미가 약간씩 달라진다.  일본어도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많다.  소설과 영화의 표현도 약간씩 달리 느껴질 수 있다.  소설 원문 표현의 塩屋のおとりさん運がよい 山へ行く日にや雪が降る.”을 불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O Tori-san de la Maison au sel sa chance est bonne, Le jour qu'elle va à la montagne il neige.”   소금장수집 할머니는 운이 좋네.  산에 가는 날에 눈이 내리니까.”  여기에서 “… 운이 좋네. 눈이 내리는 날에 나라야마산에 순례길을 떠났으니까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 속담에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는데 이 말에선 시간의 전후 관계가 분명하지만, “나라야마 부시코에선 떠난 날이 마침 눈이 내려서 좋은 것인지 (이런 해석으로 보면 눈은 노모를 버리고 온 살아 남은 자들의 도덕적 양심의 걸림돌을 해소시키는 상징이 된다), 아니면 눈이 내리는 겨울 날 마침 떠나서 좋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런 해석은 먹을 양식도 다 떨어져 한 겨울에 누가 떠나지 않으면 누군가가 굶어 죽을 것이므로 노모가 떠났다는 사실은 그 대신 자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죽음으로 떠난 결과가 강조된다), 이런 두 가지 해석은 약간의 뉘앙스가 차이가 있다.  소설과 영화에서 분명하게 아들이 노모를 지게에 지고 높은 산에 버리고 온 후에 눈에 내린다.  따라서 살아 남은 자들의 도덕적 양심적 걸림돌을 해소시키는 눈의 상징적 역할이 강조된다.  비가 얼어서 눈이 된다.  눈과 비는 물 water이 본질이다.  물은 죄를 씻는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는 세례의 의미를 갖는다.  물은 목욕재계 (일반적), 세례(기독교 특유)의 수단이다.

 

하지만 전설상의 노랫말- 아버님, 창문을 열어 먼산을 쳐다보세요.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고 벌거숭이 나무가 되었네요.  아버님, 이제 등에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네요.”을 참조하면 냉혹한 공동체의 실존적 삶의 규범- “제로 섬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세가 강조된다.   다시 말해 보릿고개의 현실에서 이 힘든 겨울을 넘겨 살아 남으려면 누군가가 이 겨울에 죽어가야만 한다.  제로 섬 사회에서의 엄연한 적자생존의 규칙이 작동되고 또 이것을 찬미한다.  산촌에서 가장이 산에 올라 간다는 말은 그 자체로 좋은 의미이고 당연한 일이다.  심마니가 약초를 캐러 가는 것도, 땔감을 구하려 산에 오르기 때문에 산에 가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필요적 수단이자 방편이다.  높은 산간 지방에는 겨울에는 항상 눈으로 덮여 쌓인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고, 사람이 죽는 것 또한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순응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자연스런 결과인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강제적인 이유와 나이 기준으로 강제적인 배제 규칙이 이뤄진다는 점에 대해 인간 사회의 기초로써 합리적인 의문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느냐이다. 

 

오로지 생존법칙만이 통용되는 격리된 사회에서라면, 나이 70이 되면 강제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고의적인 살인인지 아니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인지 여부는 관심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고의적 살인”(일본어 표현으로는 謀殺)이란 동사 또는 기아로 죽도록 깊은 산에 노인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것을 행위 acts를 말하고, 부작위에 위한 살인이란 거기서 동사 또는 기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는 방기 omissions을 말한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작위 또는 부작위 acts or omissions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 긴급피난이냐 정당방위이냐의 논란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가해자-에 대한 심판이지, 이미 죽은 자의 입장에서 따져보는 억울한 죽음을 피는 신원적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죽어나가야 하는 제로 섬사회에서 늙고 병든 노인을 갖다 버리는 것은 불가피하고 절박한 상황긴급피난 Necessity”의 논리로 정당화될지도 모른다.  인생칠십고려장제로 섬사회에서 삶의 연속성을 지켜나가려는 하나의 정해진 규칙이고 또 그 같은 측면에서 장자상속의 법칙과 동일선상으로 확립된 사회적 질서에 속한다.  장자상속 또한 삶의 연속성을 지켜나가려는 경제적 이익에서 생겨난 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을 불가피하게 죽일 수 있다는 근거는 예컨대 necessity killing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늘날은 만약 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경우 국가 담당 공무원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 homicide by nonfeasance”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눈밭 속에서 술 취한 아내를 그대로 방치한 결과 아내가 동사했다면 남편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미국의 사례 Territory v Manton 19 Pac. 387 (1888)참조).

 

근대 국가의 성립원칙으로서 철학적 기초를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람이 다같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누가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가?  인간인 이상 누구도 목적적인 존재인지 수단으로 여겨서는 아니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일단 접어두고 공리주의적 철학 기초를 생각해 보자.  2차 대전 중 일어난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일어난 가상의 사례를 다룬 처절한 정원소설에서 드는 예를 보자.  우리 네 사람 다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느니, 한 사람이 희생하여 나머지 세 사람을 살리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이란 질문에 대해서 이런 대답을 한다.  죽고 사는 일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거나 또는 어떤 사람의 목숨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지위가 높아서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또 악에 동조하는 것이다.”[4]  한편 유교적 이념에서는 가족적 온정주의가 정당화되는데, 불가피하게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그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거나 자신의 가족이 해당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나라야마 부시코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문학상의 미묘한 표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차이가 정서상의 이해와 해석의 차이를 가져올 것인지 여부는 좀더 깊이 따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 언어, , 풍습, 문화의 차이를 떠나서 큰 어려움 없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원작 소설, 영화, 가요, 설화 그리고 영어, 불어, 한국어 번역상 미묘한 차이를 감안하여 나라야마 부시코의 말미에 나오는 주제가를 필자는 위와 같이 옮겨 본 것이다


[1] “The seal of good faith was not divine law, but fellowship in crime.” Thucydide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Book III. 82.

[2] “山が焼けるぞ枯木ゃ茂る 行かざなるまい,しょこしょって.

[3] “お姥捨てるか裏山へ 裏じゃ蟹でも這って来る”  “這ってきたとて戸で入れぬ 蟹は夜泣くとりじゃない”

[4] "If you let someone else have the power of life and death over you, or think yourself so high-and-mighty you can say one person's life is worth more than another's-if you do that, you abandon all dignity and collaborate with ev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