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icial Review a Political Party-A Comparative Study of Korea, Germany, U.S. and Australia
정당 해산 헌법 재판-호주 편-
호주 연방 대법원 정당 해산 헌법 재판 케이스
저자 추홍희
정당 해산 헌법 재판-호주 편
호주 대법원 케이스 해설-
1. 호주 공산당 해산 사건의 역사적 의의
2. 공산주의 국제적 팽창에 대한 자유 세계의 공포
3. 공산당 해산 법률의 제정 과정
4. 공산주의자에 대한 태도-형법상
내란 선동죄
4.1.
공산당원 친소 발언 형사처벌
4.2.
공산당 사무총장 샤키 형사처벌
5. 공산당 해산 법률 입법 취지
6. 공산당 해산 법률 제안 설명- 멘지
수상 연설문
7. 공산당 해산 법률안에 대한 야당의 반응
9.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 위헌무효 헌법소송 제기
10.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무효 판결-The
Communist Party Case
10.1.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소송 헌법 재판
10.1.1. 사실 개요
10.1.2. 법적 쟁점
10.1.3. 판결 주문
10.1.4. 판결 이유
10.2.
위헌 무효 판결 이유
10.2.1. 권력 분립과 사법부 독립의 원칙
10.2.2. 입법부와 행정부 행위에 대한 사법부 심사
10.2.3. 급박하고 현존한 위험의 존재와 법원의 인지
10.2.4. 국가 안보는 정책 판단의 영역인가
10.2.5. “법의 지배 rule of law”
10.2.6. 죄형 법정주의와 소급입법 금지 원칙
10.2.7.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민주•대의•정당 정치의 토대
11.
위헌 무효 판결에 대한 정부 여당의 반응
12.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으로 공산당 해산 추진
13.
누가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인가?
Judicial Review a Political Party-A Comparative Study of Korea, Germany, U.S. and Australia
정당 해산 헌법 재판-호주 편-
1.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의 역사적 의의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호주 연방 대법원[1]의 위헌 무효 판결 케이스[2]는 가장 대표적인 헌법재판 사례중의 하나로써 법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 사건이다. 로스쿨의 헌법 과목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도 언급되는 유명한 케이스이다. 호주 헌법학의 권위자 원터톤은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무효 판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3]
“호주연방대법원이 1950년의 공산당 해산 법률을 위헌무효로 판결한 사건은 호주 헌법 체제상 가장 영광스런 승리의 역사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1950년 공산당 해산 법률은 공산당과 그 연관조직들을 불법 단체화하고 또 위험하고 잠재적인 위험성이 있는 공산주의자라고 정부에 의해 판명된 사람들의 국민 기본권을 제약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다시 말해 그 법률은 모든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약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잠재했었다. 대법원의 판결은 법의 지배 원칙을 공고하게 굳힌 영광스런 승리이었고, 정부가 이에 반발하여 정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헌법을 개정하려고 실시한 국민투표가 부결된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투표의 부결은 한국 전쟁이 부채질한 반공주의 집단 히스테리가 휩쓸던 당시 상황에서 매우 놀라울 정도로 의외의 결과이었다. 비록 국민투표 부결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오랜 영향을 주고 있긴 하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위헌 무효의 판결은 생생히 살아 있고 또 기본적 법원칙을 확인해주는 사례로써 현재도 1951년만큼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 모든 위대한 헌법 판례들이 그러하듯이, 공산당 해산 위헌무효 판결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4][5]
2. 급박한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자유 세계의 공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출간된 1848년 이후 근 1백년 동안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이념은 전세계로 날로 확대되어 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자유 진영 미국과 공산 진영 소련 사이의 냉전 Cold War 기류는 날로 깊어갔다. 1946년 영국의 처칠 수상은 소련의 위협을 경고한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6]을 하였고, 1945년 소련의 독일 분담 점령 이후 1949년 10월7일 동독에서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국에선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고 공산당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인해서 자유 세계의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공포는 현실적으로 크게 느껴졌다. 자유 진영의 종주국 미국과 영국이 느끼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은 호주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호주와 미국은 언어와 법률 제도 문화를 비롯하여 민족성이 같은 앵글로 색슨족에 뿌리를 함께 할뿐만 아니라 유럽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이민국가라는 점에서 외부 침입세력에 민감한 태도를 나타낸다는 사실들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이들 5개 국가들[7]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협정을 맺고 있어 외부 간첩 대처 등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보 교류는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앵글로 색슨족 국가들에서 반공주의 정치 사회적인 흐름이 동시에 전개되는 이유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카톨릭 단체가 출간한 반공주의 책자들을 그대로 모방한 책자들이 호주에서도 널리 유통되었다. (아래 그림 참조).
1950년 2월 9일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 국무부내에 공산주의 간첩이 존재하고 이들을 색출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반공주의 매카시즘 물결을 주도하여 갔다. 소련은 독일의 히틀러 나찌 정권에 맞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급격히 부상할 수 있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였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도의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고 공산당 정권을 수립하였고,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업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한국 전쟁이 터졌다. 1950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였다.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북베트남에서 수립된 공산정권은 베트남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54년 제네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인접국의 공산 정권의 수립으로 인해서 공산주의 “도미노 효과”[8]의 공포가 호주 뉴질랜드에게 느껴졌다. 당시의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외부 호주 또한 공산주의 세력에 넘어가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표현해 준 한 주간지의 만평 (1954.7.21일)을 참조하라.
미국 1947.11.1.
출간
호주 멜버른 1949년 출간
캐나다 퀘백주 1947년 출간
*“더욱 가까이, 더욱 분명하게, 더욱 치명적으로 Nearer, clearer, deadlier” 무서운 공산주의자들이 곧 우리를 잡아 죽이려 달려 온다는 공포감을 묘사한 1950년 불리틴 게재 만평.
* 카톨릭 뉴스-위클리 1954년 7월 21일자. 공산주의 체제를 힘없는 토끼들인 자유 세계 힘 없는 토끼들로 상징되는 자유 세계 나라들을 집어 삼키는 공룡 같은 거대 조직으로 공산주의를 그려내고 있다. 티베트, 북한,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말레이지아 이들 아시아 인접국들이 공산주의에 차례로 먹혀가는 것을 보면서 놀란 모습을 하고 있는 호주를 그려내었다.
3.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년 제정 과정
공산당 해산을 총선 공약으로 제시함
호주 공산당의 당원 수는 2차 대전 중 한 때 최고 20,000여명에 이르렀고, 공산당은1944년 퀸즈랜드주의 주의원 한 명을 배출하였다.[9] 2차 대전 종전 후 공산당 당원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호주의 인구 구성상 노동자 비율이 높아 노조의 활동이 활발했고 특히 그 가운데 부두 항만, 광산, 철도 노동조합 등 강경파세력의 지도부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1948년 당시의 정부는 사회주의 노선의 노동당 정권이었다. 노동당 정부는 1947년 은행의 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 은행 국유화 법률은 연방대법원의 위헌 무효 판결을 받고 은행국유화가 무산되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1949년 광산 파업 사태를 주도하였고 이러한 파업 사태에서 정부는 급기야 전기 생산을 위해서 군대 병력을 동원하고서야 파업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러한 어수선한 정국이 전개된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보수연립정권은 총선 공약으로 공산당 해산을 내세웠고 반공주의 캠페인을 주도하였다.[10] 보수당 당수의 정강 장책 연설에서 반공주의 선거 캠페인의 내용이 잘 드러났다.
1949년 11월 10일 당시 야당이었던 보수당의 당수 멘지 Menzies 의원의 총선 공약 연설 중 공산주의 불법화 공약에 관한 부분 번역은 다음과 같다:
“[보수당이 집권하면]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금지하겠습니다. 공산주의를 합법적인 정치 이론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큰 관용을 베풀어 왔습니다. 우리들은 자유를 양보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일어난 일련의 심각한 경제계의 혼란들이었습니다. … 현 정부 여당은 공산주의자들을 정부 위원회에 임명했습니다. 정부는 최근의 탄광 파업 사태에 대해 뜨거운 여론이 들고 일어나선 후에야 개입하려는 것에서 또다시 이러한 줏대 없는 무용한 짓을 보여주었습니다. … 공산주의자들은 종교, 선량한 정부, 법과 질서를 극도로 기만하는 우리의 적입니다. 외부의 적인 침략자 소련 제국주의의 위협이 없다면 오늘날 진정한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호주에서 공산주의는 낯선 외계인이고 파괴적인 해충입니다. 저희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게 되면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금지하겠습니다. 공산당은 내란선동적이고 불법적인 조직으로 판명되어 해산될 것입니다. 파산관재인이 파견되어 공산당의 자산을 처분할 것입니다. 항소할 수 있는 권리는 주겠지만, 검찰총장은 다른 단체들도 유사 공산주의자 단체로 판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것이며 공산당이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면 이들 새로운 단체 또한 금지할 것입니다. 이제 공산당의 당원은 단 한 명도 정부에 취직할 수 없으며 고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합법적인 노동 단체에도 취업할 수 없도록 취업 자격조건을 새로이 정하겠습니다. 내란죄나 내란 선동 행위에 관한 법률들을 재정비할 것이며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러한 법률에 따라 유죄를 받게 되면 정부나 노동 단체에 취업하는 것이 금지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법률들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우리 같은 선량하고 양순한 국민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는 곳에서는 어중간한 미봉책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국민이 이길 것입니다.”[11]
보수당 정권은 총선에서 승리한 즉시 총선 공약으로 내세운 공산당 해산 계획에 따라 1950년 4월 27일 공산당 해산 법률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은 의회의 토론 과정을 거쳐, 1950년 10월 19일 상하원 의회를 통과하였다.[12] 공산당 해산 법안은 의회를 통과한 지 하루 만에 총독의 서명을 받고 다음 날인 10월 20일에 즉시 발효되었다.
4.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부의 태도-형법상 내란 선동죄로 형사 처벌
적국과 전쟁을 치르는 전쟁 중에서 이민국가들의 문제는 적국 출신의 이민자들이 모국에 대한 협조자가 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중에 미국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 이민자들에게 강제 소개령을 발동하였던 사례[13]와 마찬가지로 호주는 공산주의자들을 가상적국인 소련에 대한 동조자라고 여기고 이들을 별도 격리 수용할 방안까지 마련하였다. 소련의 공산 혁명 정권 성공과 미소간의 냉전 기류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국가 충성에 대한 의심은 커졌는데 이들에 대한 경계심을 확인하는 질문은 만약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소련에 동조할 것인지를 확인하는 가상적인 내용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만약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에 가담하지 않겠느냐는 의심과 경계심이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정치 사회의 분위기이었다.
4.1. 번즈 케이스 Burns v Ransley
1949년 6월 14-15일 변론, 1949년 10월 7일 판결[14]
공산당 당원 번즈 Burns는 1948년 9월 15일 보수당과 재향군인회가 마련한 공개 토론회에 초대되었다. 토론 주제는 “공산주의는 개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이었다. 토론회가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에서 방청객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공산 소련과 서구 자유 세계 사이에 곧 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를 현재 상황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공산당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번즈는 “만약 호주가 그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면 공산 소련과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 사이일 것입니다. 그것은 반혁명적인 전쟁이 되겠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질문자는 “그것은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답변을 주세요!”라고 다그쳤다. 이에 대한 번즈의 답변은 이러했다: “좋습니다. 우리들은 그 전쟁에 반대합니다. 우리들은 소련 편에서 싸우겠습니다. 그게 직접적인 답변입니다.”[15]
번즈의 “소련 편에서 싸우겠다 fight on the side of Soviet Union”는 발언을 문제 삼아 번즈는 형법상의 내란 선동죄로 기소되었다. 번즈는 판사 앞에서 약식 재판을 받고 6개월의 징역형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번즈는 이에 대해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2-2의 팽팽한 의견으로 나뉜 가운데 대법원장의 결정의견으로 번즈의 유죄를 확정했다.
4.2. 공산당 사무총장 내란 선동죄로 형사 처벌
1949년 8월 15-16일 변론, 1949년 10월 7일 판결[16]
1949년 공산당 사무총장 샤키 Sharkey는 내란 선동죄로 형사 처벌을 받았디. 샤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1949년 유럽의 공산주의자 지도부는 공산 소련군이 침략자를 추격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들에 들어오면 공동의 적에 저항하기 위해서 국내 노동자 계층이 소련군에 가담할 것이라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3월 3일 시드니 최대 일간지 기자가 공산당 사무총장이었던 샤키에게 전화를 걸러 이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을 물었다. 사키는 즉답을 회피하고 좀더 생각을 정리해서 다음날 답변을 주었다. 그의 인터뷰 답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소련군이 침략자들을 추격하기 위해서 호주 땅에 들어온다면, 호주 노동자들은 소련군을 환영할 것입니다. 붉은 군대가 나찌 정권하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켰을 때 전유럽의 노동자들이 그러했듯이 호주 노동자들도 침략자를 추격하는 소련군을 환영할 것입니다. 저는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의 발언에 지지를 보냅니다. 소련 군이 호주를 침략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고 또 상상으로나 가능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저는 소련이 전쟁에 돌입하는 경우란 오로지 소련이 공격당했을 때에나 가능하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만약 소련이 공격을 당했을 때라도 호주가 소련군에 의해 침략을 받을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전쟁을 막아내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고 또 전쟁 이념에 반대하여 국민 대중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공산당은 또한 노동자 계급이 정권을 잡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만, 만약 호주의 파쇼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력을 쓴다고 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무력에는 무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을 권고할 것입니다.”[17]
하지만 문제의 선동발언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의 눈높이에서도 형사처벌이 될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또 비판 발언의 범주내에 해당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검찰은 “만약 소련군이 침략자들을 추격하기 위해서 호주 땅에 들어온다면, 호주 노동자들은 소련군을 환영할 것”[18]이라는 공산당 사무총장 사키의 1949년 3월 4일 인터뷰 발언에 대해서 1949년 5월 30일 내란 선동죄로 기소하였다. 샤키는 7월 20일 배심원 재판을 받고 배심원의 유죄 평결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샤키는 대법원까지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은 5-1 다수의견으로 상고를 기각했다.
번즈와 샤키의 내란선동죄 사건에서 반대의견을 낸 딕슨 대법관과 맥티에르난 대법관의 소수의견이 보다 설득력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사건들에서 내란선동에 대한 의도 seditious intention가 완전히 입증되었다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19] 딕슨 대법관의 판단 이유 구절을 인용한다.
“본 상고심에서의 법적 쟁점은 국가 주권의 문제나 헌법상 정부의 권한 범위내의 문제인지 여부가 아니라 공산주의자인 피고인[20] 또는 공산당이 소련과의 전쟁 시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의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피고인은 자신의 첫 번째 답변에서 분명하게 말하기를 자신은 그러한 전쟁을 비판하고 또 공산당도 그 전쟁을 반대한다고 표명했다. 이런 발언으로 피고인이 청중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 자신의 노력에 포함된 어떤 의도를 전달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피고인은 자진해서 의견표명을 한 것도 아니었다. 청중들의 국가나 정부에 대한 태도는 피고인의 고려 대상에 들어있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질문이 재차 반복해서 주어지고 또 기준별 답변[21]의 상황에서 전달된 피고인의 대답과 매너는 스스럼 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결의를 나타낸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공산당이 어떤 과정을 택할지에 대한 자신의 확신 이외에 방청객을 설득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존재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피고인의 답변은 질문자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방청객에게 마음의 태도를 바꾸게 하려는 목적을 이루고자 한 적극적인 시도가 아니었다. 단지 답변을 함으로써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날지 모를 우발적 상황에서 어느 쪽을 택할 지에 대해서 의견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의 의견에 영향을 받을 지도 모를 사람들의 국가나 정부에 대한 태도는 다만 간접적으로나 결과적으로 관계될 뿐이고 또 그런 추정을 피고인으로 탓으로 돌릴만한 직접적이고 중대한 목적 내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가정적인 상황에 따라 말을 한 것이었다. 피고인은 국가 기관과의 밀착 또는 불화를 주제로 직접 연설을 한 것이 아니었다. 질문 또는 답변의 의도에서 정부나 헌법에 대한 적대감, 대립감, 불만은 나타나지 않았다.”[22]
딕슨 대법관은 국가의 안녕, 질서 또는 선량한 정부를 위험에 빠트리게 하기 위해서 국민의 각기 다른 계층 간에 반감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말을 꺼냈다는 발언을 근거로 내란선동죄로 처벌하려면 형사법상의 기본 원칙인 범죄의 고의가 보통 일반인들의 기준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어야 하는데 피고인의 해당 발언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 과정에서 나온 말로써 내란 선동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어떤 적극적인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23]
5. 공산주의의 위협 정도와 공산당 해산법의 제정 의도
멘지 수상은 공산당 해산 법률의 정당성으로써 공산주의로부터의 위협을 들었다.[24] 그는 위험의 증거들로써 스탈린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 공산당의 팜플렛 등을 거론했다.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 수립”, “부르죠아 타도”, “폭력적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룩한다”등의 공산당 혁명 이론을 거론하였는데 이러한 정부의 전략은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다수의 국민들에게 먹혀 들었다. 정부는 국민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엎고 공산당 강제 해산 법률안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25]
1950년 4월 27일 멘지 수상은 법률안 제안 설명에서 호주 노동 조합 단체 지도부에 53명의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매카시즘 (약2개월 전인 1950년 2월 9일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 국무부내에 205명의 공산주의자 간첩이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행태를 모방해 나갔다. 국민들은 전기전력 생산에 필수적인 탄광 노조의 강경 파업 사태 등으로 큰 불편을 겪었으며 또 다수의 국민들은 극단적인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공산당 강제 해산 법률안에 찬성하는 여론은 갤럽 여론 조사에서 80%까지 높이 나왔다.
“코너에 몰린” 쥐(공산주의자). “반공주의 Anti-Red 법률안”이라는 몽둥이로 소련 공산주의 정권을 상징하는 공산주의 심벌 낫과 망치가 그려진 쥐를 코너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뷸리턴 게재 만평 1950년 5월 3일.
6. 공산당 해산 법률 제안 설명 멘지 수상의 연설[26]
“지난 총선 (1949.12.10)에서 전체 유권자 중에 적은 수인 총 87,958명이 공산당을 지지하였습니다.[27]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중요성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 줌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경제 산업체의 주요 단체들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엄중하지만 명료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그들이 가장 분명하게 의도하는 바대로 그저 소수의 반역자들이 우리 나라를 파괴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노조 집행부인 이상 그들의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놔두다가 그들이 다른 지위를 가질 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로 이것이 선택에 대한 답이겠지요-공산주의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그들과 싸우고 그들에게 어떠한 특권도 어떠한 성역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호주의 안보와 국토방위는 전쟁 시에 군대의 힘과 또 군을 지원하는 공장과 농장의 산업체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전쟁이 일어날 때 전국민적인 노력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 산업체들이 그치지 않고 잘 돌아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5중대 가 기적같이 갑작스레 솟아난다는 것은 유치한 생각입니다. 제5중대는 매우 잘 준비되고 미리 조직되어 있습니다. 파업과 태업을 통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의 냉전을 전개하는데 그 전쟁의 승패는 국가사회 전체가 작동하는 강함 또는 약함에 달려 있습니다. 2차 대전 중(1939-1945년)에 호주에서는 한 사람의 제5중대도 발붙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 서유럽에서는 방어되고 있는 전투적 공산주의가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동유럽과 남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시점인 1950년에 한 사람의 내부의 적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합니다. 광산, 철강, 기술자, 교통, 건축, 전기 산업은 주요 기간 산업체입니다. 이 법률에 따라 필요하다면 총독이 공표하는 대로 다른 산업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적은 소수의 그들이지만 5개 군단의 힘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극심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를 혁명전사 공산주의자들을 기간 산업체의 핵심 지위에 계속 내버려두는 것은 형법상 죄악에 해당된다고 호주 정부는 신중하게 판단합니다.”[28]
7. 공산당 해산 법률안에 대한 야당의 반응
1950년 당시 미국에서 맥카시 상원의원의 공산주의자 색출 발언이 터져 나온 시기에 영국과 호주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반공산주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종전 후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이 컸던 세계 정세 속에서 호주의 공산당 해산 법률안은 여론의 지지를 크게 받고 있었다. 해산 법률안이 1950년 4월 27일 의회에 정식 회부되자 야당인 노동당은 법률안 통과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1950년 5월23일 야당 노동당 대표의 반대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치인들과 그와 같은 부류 그리고 언론에 의해 형성된 전국적인 히스테리 분위기 속에서 제정된 것 같다. … 이에 결부된 히스테리와 두려움 콤플렉스는 국민들에게 행해질 중대한 사법정의의 위축을 초래할 지 모른다. 군중은 중대한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투표를 던진 군중들이었다.”[29]
하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은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엎고 있었으므로 야당의 반발은 법률안 통과 저지라기 보다는 법률안 수정안정도에 머물었다. 누군가 공산주의자로 거짓 신고한 것만으로도 공산주의자의 혐의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혐의를 벗어내려면 자기 스스로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반대로 입증해야 된다는 법률의 국민 기본권 침해를 우려하였던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 침해 부분만을 약간 손질한 야당의 수정안이 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원을 통과하였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이러한 노동당 수정안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23일 법률안은 일단 잠정 보류되었다. 야당 노동당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 틈을 노리고 정부는 정부여당의 원안을 고수하였다. 정부여당은 9월 28일 공산당 해산 법률안을 의회에 재회부하였고 곧이어 상하원 동시 해산안을 들고 야당을 압박하였다. 국민 여론은 정부 여당을 크게 지지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상하 양원을 동시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정부 여당의 정치적 책략은 야당에게 크게 불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1950년 10월 16일 노동당 최고 집행부가 들어서서 소속 의원들에게 정부여당의 원안대로 법률을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마련하였다.[30] 이리하며 노동당의 수정안은 폐기되고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부여당의 원안대로 10월 19일 의회를 통과하였다. 법률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마자 바로 다음날인 10월 20일 총독의 법률안 서명으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즉시 정식으로 발효되였다.
8. 공산당 해산 법률-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
공산당 해산 법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공산당은 불법단체로 판명되고 따라서 강제 해산되며 공산당의 재산은 보상없이 강제 몰수한다. (2) 공산당 관련 단체(노동 조합 등)에 대한 불법 단체 판명 권한은 총독에게 위임한다. 이들이 국가의 안전과 방위에 위협을 준다고 총독이 판정하면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강제 해산되고 재산은 몰수된다. (3) 총독의 권한으로 국가의 안전과 방위에 위협이 주는 사람은 공산주의자임을 판정할 수 있고, 이들은 정부 기관이나 노조단체 등에 취업이 금지된다.
이러한 내용의 호주의 공산당 해산 법률은 미국의 1946년 스미드 법률, 남아공화국의 1950년 공산주의 진압 법률, 호주의 1916년 불법 단체 법률 등을 기초로 해서 제정되었다. 하지만 법률 제정자들은 공산당을 강제 해산하려는 것에는 헌법상의 장애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고민하였다.[31] 정부 내각 회의에서도 전투적인 노조단체들의 강경 투쟁에 대한 대처 수단으로써 별도의 강제적인 법적 조치를 취할 마땅한 수단은 없고 단지 노조 스스로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논의되었다. 강경 파업 사태에 대해 군병력을 투입하여 강제 진압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이것도 노조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논의되었다.[32]
연방정부(호주는 내각제 정치 체제이므로 정부와 입법부는 엄밀하게 분리되지 않고 내각cabinet동일체로써 책임을 진다)가 헌법이 정한 목적내에서만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고 있는데 정당을 불법단체화하려는 법률을 제정하기 해서는 정당이 국가 방위의 위협이 된다는 논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50년은 2차 대전이 이미 끝난 지 4년이나 지난 평시 상황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국가 안전에 큰 위협을 주는 대상이고 따라서 국방 목적상 정당을 강제 해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국방 목적 그 자체를 궁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33] 이러한 헌법상의 장애를 회피하고자 9개 조항의 법률 제정 배경과 목적을 상술하는 법률 취지문을 법률 전문에 삽입시켰다. 법률 전문에다 이 법률이 국방[34]의 목적상 필요하다고 법률제정권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했다.
공산당 해산 법률이 헌법이 부여한 입법부의 제정 권한들에 속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점을 미리 해소하기 위하여 통상적인 법률과는 다르게 특별히 전문과 취지문을 삽입하고 거기에 법률 제정의 타당성을 미리 법기술적으로 잘 규정해 놓았다. 법률 취지문에 헌법 51조에서 열거하고 있는 의회의 입법권에 따라 국가의 안전과 방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한다고 분명하게 법률 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여 놓았다. 헌법 51조 해당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의회는 본 헌법에 의거하여 연방의 평화, 질서 및 선량한 통치를 위해 다음 사항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다. ……(xi). 연방 및 각 주의 육해군 방위, 연방 법률의 시행 및 유지를 위한 무력의 통제……”
법률 취지문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하였는데 제4조는 “호주 공산당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설명한 바대로의 공산주의 기본 이론에 따라서, 정권을 잡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수립할 수 있을 혁명적인 상황 (호주공산당이 혁명적인 소수자로써 활동하고 있는)의 도래를 돕거나 고무하려는 활동 또는 운영에 관계하는 경우”[35]라고 규정하고 있고, 또 3조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기를 “공산주의자란 함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발전시킨 공산주의의 목표, 정책, 이론, 원칙 또는 교범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을 말한다.”[36]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 정의는 규정의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해석의 관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큰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예컨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구별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바로 직전의 집권여당이었던 노동당의 당원들이나 노조단체의 지도부들 중에 자신들의 이념성향을 마르크스 이론에 기반한 “사회주의자”라고 여겼던 당시의 정치 사회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나 레닌이 주장했던 목표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산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유럽 다수의 국가들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중도좌파 정부의 경우 자신들의 정당 명칭을 “사회주의자 Socialist”라고 부르고 있다. 서구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자들과는 구별된다.[37] 더구나 정치적 이념이란 좌우를 획일적으로 나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누구를 공산주의자라고 분류 판단하느냐의 문제는 자의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법의 잣대는 기준이 모호하고 방대해지는 고무줄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것이다.
4조에서 호주공산당은 불법 단체로써 판명되고 따라서 법적 해산을 위해서 법정관리인이 임명한다고 규정하였다.
또 5조에서 공산당 이외의 다른 단체들의 불법단체 판정은 총독의 단독 권한으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는데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옹호하는 또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정책 결정이 좌우되는 공산당 부속 기관은 불법단체로 판정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이 단체 지도부에 있지만 그 단체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지 않는 단체들도 불법단체로 판명될 수 있다는 위험이 크게 존재하였다. 설령 공산주의 이념에 경도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그 활동에 연계되는 것이 아닌 것이 대개의 경우이기도 하였는데 이들 또한 정부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공산주의자들로 판명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였다.
6조와 8조의 규정으로 공산당의 연관 단체들이 불법 단체로 판명되면 강제 해산되고 이를 위해서 법정관재인을 선임하게 되어 있었다.
공산당이 불법단체화되면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의 지도부에 포진하고 있었던 부두, 항만, 탄광, 철도 노조 등 강경파 노조단체들 또한 불법화되고 강제 해산이 될 것은 분명하여 그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이런 시각을 반영하는 한 노조단체의 항변은 옮기면 다음과 같았다: “세계적인 경험을 통해 보면 정부가 한 정당을 강제 해산시키게 되면 정치 이념과는 상관없이 항상 다른 정당을 억압하고 또 노동조합 지도부를 재판절차도 없이 투옥함으로써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하는 전조임을 알 수 있다.”[38]
7조1항에서 불법단체의 구성원이나 지도부에 속해 계속적으로 조직원으로 남아서 활동하거나 또는 자신이 불법단체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어떠한 것이라도 소지하고 있거나 내걸고 있는 경우들을 포함하여 사정을 알고서 고의적으로 불법 행위를 지속하면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 규정은 예컨대 불법단체로 판명된 공산당의 배지나 팜플렛을 들고 다닌 경우에도 형사 처벌될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국민 기본권을 크게 박탈하는 것이었다.
9조에 의해 총독[39]은 공산주의자 혐의가 있는 누구라도 공산주의자로 판명되면 형사 처벌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형사처벌을 구체적인 행위가 아닌 단지 공산주의 이념을 지녔다고 해서 처벌한다는 것은 형사법원칙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경우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증거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고 9조4-5항에서 규정하였는데 이는 형사법의 기본 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되었다.[40]
9. 공산당 강제해산 법률에 대한 위헌무효 헌법 소송 제기
공산당과 10여 개의 노동조합 단체들은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연방정부가 그러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위헌 무효임을 확인하는 헌법 소송을 연방대법원에 즉시 제기하였다. 공산당과 해당 노동조합 단체들은 대법원에 공산당 해산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법률안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은 기각되었다. 대신 대법원은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판명하는 절차와 공산당 건물의 압수 절차를 대법원의 헌법 재판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임시적으로 중지시켰다.
정부는 이러한 대법원의 직무 정지 가처분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10월 20일 공산당 자산을 강제적으로 압수하기 위해서 파산관재인을 임명하고 공산당의 전국 사무실에 대한 압수 수색 절차를 전격 단행하였다.
공산당 해산 법률이 통과된 지 1주일도 안된 1950년 10월 25일 당시 노동당 부대표를 맡고 있던 에바트 의원은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서 평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부두노동자 단체의 변론을 맡기로 하였다. 야당의 지도부 의원이 당시 여론이 매우 불리한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강경 노조 단체를 변호한다는 결정은 노동당이 여론의 공격에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매카시즘의 당시 상황에서 야당의 지도부 당의 제2인자 인물이 공산당을 법정에서 변호한다는 것은 공산당의 동조자이거나 지지자로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 의원으로서 공산당의 법정 변론을 맡은 결정에 대해서 당 고위지도부에서는 “윤리적으로 타당하고, 변호사로서 당연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바보스런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41] 하지만 노동당 대표는 에바트 의원이 대법원에서 공산당의 변론을 펼치는 일은 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의 인권 변호사로서의 명망과 법조인의 양심에 따른 개인적인 행동으로써 이해해 주었다.[42] 실제로 에바트 의원은 헌법 소송에서 훌륭한 변론을 수행해 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난 뒤 실시된 총선에서 에바트 의원은 “자유의 수호자 대 공산주의의 수호자”라는 선거구호를 내건 2차 대전 참전 영웅인 상대후보로부터 크게 고전하고 간신히 243표차로 의원직을 유지하였다.
10.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
10.1. 헌법 재판 과정
변론 1950년 11월 14-17, 20-24, 27, 28, 30일,
12월 1, 4, 6-8, 11-15, 18, 19일.
판결 1951년 3월 9일[43]
10.1.1. 사실 개요
1950년 10얼 19일 법률안이 통과된 즉시 공산당과 10개의 노조단체들은 위헌무효법률이라고 주장하고 헌법 재판을 통한 법정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반발하였다. 이들은 총독의 법안 서명이 이루어진 지 2시간 만에 대법원에다 법률안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였다. 대법원은 헌법 소송이 제기된 지 1달이 채 지나지 않는 시기인 1950년 11월 14일부터 정식으로 헌법 재판을 진행하였다. 대법원 판결이 다음 해 3월 9일 내려졌으니 헌법 재판 기간은 4개월이 걸렸다. 이것은 매우 신속한 재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미국의 경우 1949년 진행된 공산당 핵심 지도부에 대한 형사 처벌 건에 대한 위헌 소송에서 대법원의 합헌 결정은 1950년 12월 4일 변론을 하고 1951년 6월 4일 판결이 나왔다. 미국의 경우 미국공산당 CPUSA에 대해 공산주의 활동 불법단체로 판명하게 만든 근거 법률인 1950년의 국가안전법에 대한 위헌 소송이 제기된 지 약 10년 만인 1961년 6월 5일 미국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독일의 공산당 해산 결정은 1951년 11월22일 정부가 제소한지 약 5년이 걸친 1956년 8월17일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
10.1.2. 주요 쟁점
호주는 미국처럼 각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다. 각 주는 국민 생활에 관해 모든 법률 제정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연방 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은 오로지 연방 헌법 51조에서 열거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공산당 해산 법률의 근거는 헌법 51조가 열거하고 있는 국방권에 의존하였다.[44] 정부는 공산당 해산 법률 제정 근거가 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헌법 규정으로 “국방권 defence power”에 있다고 보고 법률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법률 취지문에 공산당이 국가의 안전과 방위에 큰 위협을 초래한다고 규정하였다. 법률 쟁점은 공산당의 존재가 국가 방위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대상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실 인정의 문제인지 그리고 공산당의 해산이 국방권을 동원하여야 할 정도의 문제인지 그리고 이런 입법 근거가 헌법상 존재하는지가 주요한 초점이었다. 다시 말해 연방 정부가 무엇이 국방에 위험이 되는지 여부에 대한 사실 판단의 권한을 갖고 있는지 또 그것을 법률에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 또 만약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공산당 해산 법률과 국방권은 서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련성[45]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대법원은 법률 판단을 내려야 했다.
국방권 이외의 다른 주요 반론은 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 사이의 권한 다툼 그리고 사법부 독립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요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연방 의회가 가지는 있는 헌법 51조6항과 34항에서 열거한 법률 제정권한의 범위를 일탈한 내용의 법률이므로 위헌무효가 된다.
② 법률의 전문 preamble에 규정된 사실 판단의 내용들이 법률의 타당성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러한 사실 규정이 진실하지 않음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들을 제출할 수 있어야 된다.
③ 직접적인 법률을 제정하여 호주 공산당을 해산하고 또 공산당 관련 단체들을 불법화하고 또 개인들을 총독으로 단독 권한으로 공산주의자로 판정할 수 있는 이런 권한들은 사법부의 권한을 침탈하는 것이므로 불법무효가 된다.
④ 법률의 재산의 강제 몰수에 관한 규정은 헌법 51조 31항의 “공정한 조건”에 자산 취득의 규정을 위반한 것이므로 무효가 된다.
⑤ 연방법에 따라 설립된 노동조합 단체들은 여러 주 사이에 연결된 활동을 하는 지도부를 두고 있고 헌법 92조에서는 주 상호간의 통상과 왕래 활동을 막는 법률 제정을 금지하고 있다. 정당 단체, 노동조합 단체 그리고 이들의 지도부는 여러 주에서 서로 연계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각 주 사이의 활동을 통제하는 법률은 제정될 수 없다.
⑥ 자발적 단체가 정당한 법률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사법부의 판단을 거치지 않는 연방 법률로써 강제 해산시킬 수가 없다.
⑦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자발적 단체인 정당에 대해서 강제 해산을 시킬 연방 법률은 제정될 수 없다. 이는 헌법상 허용될 수 없다.
단독심리에서 대법원 전원 합의부로 넘어 온 항소심에서 대법원이 판단하여야 할 법률 문제는 다음과 같이 특정된 질문이었다.
"1.(a) 공산당
해산 법률 규정의 합헌 또는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이 사법 판단 또는 사실 확인 또는 공산당 해산 법률의 전문과 취지문 4조-9조에 규정된 내용(해당자인
원고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이 사법 판단인지 또는 사실 확인인지에 따라서 달라지는가?
1.(b) 원고들이 공산당 해산 법률이 연방 정부의 입법권한을 일탈하였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공산당 해산 법률에 규정된 사실들을
뒤집는데 필요한 증거들을 제출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46]
2. 1번의 두 질문에 대해 어느 하나라도 ‘아니오’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면 공산당 해산 법률은 원천 무효가 되는가 아니면 원고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만 무효가 되는 일부 무효가 되는가?”[47]
공산당 케이스처럼 상급심 법원이 판단할 법률 문제를 특정해서 항소한 재판을 “case stated”이라고 부른다. 케이스 스테이트는 법률심리만을 한정하는 항소심의 성격을 갖는다. 한국의 헌법재판에서 “재판의 전제”가 되는 경우에 법원은 헌법재판소에 법률심의 판단을 요구하는데 그와 같은 경우의 법률심과 비슷하다. 대법원에서 헌법 소송이 시작되었지만 대법원전원합의부는 사실심리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법률적인 측면만을 검토하는 최종항소심 재판을 진행했다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은 하급법원에서의 확인된 사실 확정 statement of facts 부분에 대해서는 재검토를 하지 않고 다만 대법원의 판단은 법률심리에 한정시킨 것이다. 헌법 71조의 규정에 따라 대법원은 최고의 지위를 가진다. 헌법 73조 규정에 따라 모든 사건에 있어서 대법원의 판결은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final and conclusive 효력을 갖는다. 이렇게 대법원은 최후 최종 종국적인 판결을 내리므로 사실 판단에 대한 오류가 일어날 수 있는 사실심리[48]는 하급심에 맡기고 대신 최종적 법률심리를 통해 하급법원을 통제하는 것이다.
10.1.3. 판결 주문
대법원은 1951년 3월 9일 공산당 해산 법률[49]에 대해 위헌 무효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의 판단 이유는 호주는 현재 전쟁 상태에 있지 않는 상황이므로 정부가 단체를 금지하거나 해산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또 공산당 해산 법률은 무죄추정[50]의 원칙을 위반하여 공산당과 당원에 대해 공산주의자라는 판정을 내리고 있는 바 공산당이 주는 위협의 정도가 무죄추정의 원칙을 바꾸어야 할 만큼 크지 않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판결 주문은 위의 재판에 전제된 특정된 법률 질의에서의 대답으로 주어졌고 다음과 같다.
“1. (a) 아니오.
1.(b) 아니오.
2. 공산당 해산 법률은 법률 전체로 원천 무효가 된다 The whole Act is invalid.[51]
3. 소송 비용은 피고 정부가 원고[52]들에게 부담한다. 사건을 딕슨대법관에 환송한다.”[53]
10.2. 판결 이유
연방 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은 오로지 연방 헌법 51조[54]에서 열거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공산당 해산 법률의 근거는 헌법 51조가 열거하고 있는 국방권에 의존하였다.[55] 그렇다면 공산당이 국가 방위 military defence에 큰 위협을 초래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임이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공산당의 존재가 국가 방위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대상이어서 국방권을 동원하여 해산할 수 있다고 정부는 주장한 것이다. 사법부도 당시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이 주는 정치적 상황과 국민여론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56] 하지만 대법원은 정부의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대법원의 판단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대법원은 만약 공산당이 국가 방위를 위협할 정도의 위험의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을 판단하는 권한은 정부에 있지 않고 대법원이 가진다고 판결한 것이다.[57] 다시 말해 연방 정부는 자신들 스스로 무엇이 국방에 위험이 되는지 여부에 대한 사실 판단을 법률에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법률의 제정은 연방정부의 법률제정권한의 일탈 ultra vires[58]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과 국방권과 상대한 관련성이 존재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그러한 연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59]
위헌 무효 판결 대법관 개별 의견 분석
1951년 3월 9일 호주연방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 위헌무효임을 선언하였다. 7명의 대법관 중에 6명의 대법관[60]은 모두 공산당 해산 법률의 위헌성을 확인하였고, 단지 레이셈 대법원장만이 소수반대의견을 냈다. Dixon, McTiernan, Williams, Fullagar, Kitto 5명의 대법관의 판단 이유는 거의 비슷하다. Webb 대법관은 조금 다르게 법기술적인 이유를 들었다. 대법원은 6-1의 다수의견으로 위헌무효임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공산당 케이스의 판결문은 285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이다. 그만큼 판결의 어려움이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61]도 공산당 해산 판결문은 장문이긴 하지만 이들 판결문에서는 공산당 이론[62]과 공산당 활동 등 사실 확정의 측면을 많이 다루고 있는 반면 호주 공산당 케이스 판결문은 공산당 활동과 그 위협에 대한 사실 확정의 문제 보다는 순전히 법률적인 측면을 논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장문의 판결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0.2.1. 권력 분립과 사법부 독립의 원칙
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위헌 법률의 판단 이유로써 그 법률이 헌법상 부여된
입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의 범위를 일탈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대법원은 평화 시기에 정부가 자신의 의견에 따라 국가 안보나 국토 방위에
관련된 국방권에 의거하여 한 정치 단체를 강제 해산시키려고 하는 것은 연방 정부에게 주어진 고유 권한(부수적이든
묵시적이든 헌법에서 부여한)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위헌무효에 해당된다고 판결한 것이다.
Fullagar. McTiernan, Williams, Kitto 대법관은 해당 법률 5조(4)항과 9조(4)항에서 총독[63]이 국가안보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위험인물(개인이나 단체)이라고 판정한 결정에 대해서 사법 심사의 절차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사법 심사를 배제하는 법률은 사법권의 독립과 법의 지배 원칙에 어긋나고 따라서 그 법률은 무효가 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총독의 결정에는 잘못된 결정이 개입될 수 있다. 이러한 잘못에는 근거 법률이 잘못되어서 일어날 수 있고 또 총독의 사실 확인 finding of fact의 과정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이러한 잘못의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은 총독에게 부여된 법적 근거가 애매모호하다는 vagueness 것에서 찾아진다. 총독의 잘못은 국가 기관이나 호주의 방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를 총독은 위협이 된다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법률은 명확해야 할 것을 성립요건으로 하는데, 법률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경우는 “법의 지배” 원칙에 어긋나서 법률의 합법성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판단 이유를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상황에서는 정부의 국방권 행사와 국가 방위 목적 사이에 상관관계가 객관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따져 볼 필요 없이 즉 국방권을 발동해야 할 필요성의 여부를 묻지도 않고서 국방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그러한 비상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률이 발효될 시점에서는 현실적으로 닥쳤거나 또는 곧바로 닥칠 정도의 실제적이거나 급박한 중대한 무력 충돌 actual or imminent serious armed conflict이 존재하는 상황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무력 충돌이 존재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법률은 국방권 defence power에 근거하여 제정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국방권은 매우 특별한 권한이다. 국방권에 근거하려면 행정부나 입법부가 국가 방위상 필요하다는 정책적 판단을 요구하는데 만약 국가 내부적인 위협을 제거하는 것- 이것까지를 헌법상의 부수적인 권한이나 또는 묵시적인 권한으로 해석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국방권은 “실제적인 위협 actual threats”에 따라 발동되는 것이지 위협으로 여겨지는 perceived threats 위협 수준에까지 발동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아니다. 또 헌법상 행정부의 본질적인 권한 행사에 부수되는 권한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부수적인 권한 행사는 헌법의 전통적인 개념에 합치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헌법 개념에는 법의 지배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포함된다.[64] 법률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은 법의 지배 원칙에서 나오는 법률 요건이다. 만약 법률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경우라면 행정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반되는 부수적인 권한에 근거한 부대 법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법의 지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10.2.2. 입법부와 행정부의 행위에 대한 사법부 재심 Judicial Review
호주의 국가 체제는 연방헌법을 제정하면서 연방국가로 성립되었다. 이를 “헌법 국가 government under the Constitution”라고 말한다. 헌법국가라는 말은 국가 권력의 행사에는 제약이 따른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주정부가 아닌 연방 정부인 경우 특별히 헌법에 의해서 성립된 권력 통치 체제를 말한다. 따라서 연방 정부는 오로지 헌법 규정에 미리 정해 놓은 목적 listed subject matters 예컨대 통상권, 국방권, 납세권 등에 따라서만 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 그 이외의 다른 목적상 입법이 필요한 경우는 주 의회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행위를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다시 심사할 수 있다는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 제도에 대한 명문 규정이 헌법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헌법 3장 사법부 권한 행사 부분에서 사법 심사의 원칙이 존재한다는 점이 확인된다. 제3장에서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 separation of powers 원칙의 구체적 표현은 사법권 judicial power은 오로지 사법부만이 행사한다는 것 그리고 사법부는 사법권한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법권은 행정권이나 입법권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헌법 75조에서 대법원의 재판 관할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연방 공무원에 대한 집행 명령, 금지 명령 또는 집행정지 명령의 소송은 연방대법원이 원심을 행사한다.”는 조항은 사법 심사 제도를 구체적으로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65]
공산당 케이스에서 주요 쟁점은 입법부가 공산당 해산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있느냐의 여부이었다. 이 법률에서 입법 제정권한 여부를 다툴 소지가 있다는 것을 예정하고, 미리 법률 제정 취지문에다 국가의 안전과 방위의 목적상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며 법률의 타당성을 찾아 놓았다.[66] 그리고 입법부가 그러한 입법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여기서 판단의 핵심은 입법부의 그러한 입법부의 천명이 헌법에서 허용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대법원은 입법부가 그렇게 천명해 놓은 것은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국방 목적상 필요한 법률인지 또는 그렇지 아니한지 그렇게 원천적인 부분까지를 대법원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헌법상 대법원에게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헌법에 따른 마땅한 권력 행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임무는 연방대법원에게 맡겨져 있다. 즉 대법원이 헌법 해석의 최종적인 책임자이라는 결론을 확고부동하게 굳힌 것이다.
법률 제정의 권한의 존재 여부와 법률의 합법성을 가길 권한이 대법원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 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이 국방권의 범위내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헌법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풀라거 대법관은 “강물은 그 원천보다 더 높이 흐를 수 없다 a stream cannot rise higher than its source.”는[67]는 비유로 표현되는 헌법의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방권에 의거하여 최소한 전쟁시기에 위임된 사람의 의견에 따라 국방권이 발동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고, 또 그 의견에는 국방권과 의견의 법률적 효과 사이에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확립된 법원칙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는 선례 Lloyd v. Wallach[68]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강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다”는 비유적으로 표현된 헌법상의 기본 원칙에 대한 예외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슈림톤[69] 판례에서 딕슨 대법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국적인 결정은, 법적 통제로부터 완전 자유라는 점에서, 헌법상 재량 discretion이 허용되지 않는 성질을 갖는다…..만약 의도적으로 행사가 가능하다면 또는 허용될 수 있다면, 재량을 부여하는 법률이나 명령이 강제력을 가져오는 권한을 넘어서거나 넘어설 위험이 있다.” 물론 “재량”은 입법부 자신의 재량인 법률의 제정 바로 그것으로 행사될 수 있다. ……또는 제정된 법률의 작동에 의해서 법률적인 효력이 나타나는 총독 또는 장관의 재량일 수도 있다. 법률 또는 법률에 따라 행해진 행정 행위의 합법성이 법률 제정자, 또는 행위를 하는 사람의 의견에 달려 있어서는 아니된다. 합법성이란 그 법률 또는 그 행위의 결과가 해당 법률 자체의 합법성 여부가 달려 있는 헌법상 권한 범위 내에 있는 것을 말한다. 등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은 법률 제정자의 의견에 의해 등대라고 하는 어떤 것이라도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는 것이 아니다. 등대에 관한 법률 효력을 가져오는 법률 선포 proclamation[70]를 하는 권한과 총독의 의견에 의해 등대라고 하는 어떤 것이라도 비슷한 선포를 하는 권한은 전혀 다른 것이다. Lloyd v. Wallach 판례에서 확립된 법원칙이 일반 원칙에 대한 실질적 또는 명백한 예외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여기에서 검토될 필요가 없는 문제이다.”[71]
10.2.3.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존재와 법원의 인지에 의한 사실 확정 judicial notice[72]
대법원은 공산주의의 위협은 급박한 정세나 국내적 파업 사태들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 문제라고 보고, 그러한
사실 인정의 문제는 법원의 인지로써 증거 채택을 할 수 있는 성격이라고 보았다.[73] 그러나 대법원은 공산주의 위협이나 국제적 정세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74] 딕슨 대법관의 판결문 해당 단락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발전 단계의 초기 상태이든 현 단계이든지 간에 확인된 공산주의 이론을 검토하는 작업은 필요하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하는 모순적 적대감, 부패의 필연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혁명적 변화의 시기 도래,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 차후 진보를 위한 일정 기간 동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허용, 전세계로의 혁명 과정의 발전적 외연 확대, 혁명의 예정된 특혜를 좀더 폭넓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반혁명으로부터 공산주의의 기존 체제를 보호하고 또 혁명 과정의 발전을 일시적인 패배와 지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혁명의 전파를 돕고 신속히 할 필요성, 이런 것들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에서는, 행동을 불러오게 만드는 신념과 내각제 정부가 국내외 사태에 대해 내리는 해석은 정부가 공산주의 이론의 신봉자의 교의와 가르침에 대해 갖는 안색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 존재한다. 그 안색은 추종자들이 그들의 이론에 대해 갖는 것과 동일할 필요는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직접 말하는 것 이상의 반응에 대해 좀더 공격적이거나 악의적인 해석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것은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정보에 의해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정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없다면 잘 알려진 급박한 국제 정세를 검토하는 일은 더욱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정권 장악, 서유럽 동맹 결성을 위한 브뤼셀 협정, 베를린 봉쇄와 공수 작전, 대서양 협정, 중국이 공산당 정권에 넘어간 것, 대만 문제로 일어난 사태, 북한의 남한 침공과 이에 대한 유엔의 반격, 유엔 총회와 유엔 안전보장회의 상임 이사국 회의에서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들과 영국과 미국의 앵글로 색슨 국가 및 서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고조된 외교적 갈등 이런 사건들이 바로 최근에 일어났다. 호주의 국내 문제들에 대해 국방권을 발동해야 할 사태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문제에 해당하는 한 산업계에서 일어난 심각한 파업 사태-정부가 얻은 정보 소스를 이용하여 정부가 판단할 영역의 범위 내에 속할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75]
10.2.4. 국가 안보는 정치적 정책 판단의 영역인가?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레이셈 대법원장은 국가 안보 문제는 정치적인 결정의 성격을 가지므로 정치적 책임을 지는 입법부의 몫이지 사법부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레이셈 대법원장이 반대의견을 낸 이유는 국방 정책에 관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결정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므로 내부의 적 internal enemy을 다루는 분야도 마찬가지의 성격으로 정치적 결정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런 정치적 정책 결정에 대법원이 들어갈 틈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누가 적에 해당하고, 어떤 위험이 존재하는지, 또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들인데 이 같은 문제는 설령 사실확인을 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 확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에 그것은 정부의 정책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정치적인 결정의 문제이기에 국방정책 또한 2차 대전 때처럼 정치적 반대가 격렬하게 나올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국방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행정부의 몫이고 또 입법부의 몫이라는 판단한 것이다. 왜냐면 행정부는 의회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입법부는 전적으로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에 법원이 개입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는 오로지 정치적인 결정 political opinion으로 풀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레이셈 대법관의 견해로는 법원은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는 의회가 권한을 위임 받아 법률을 제정했으므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당하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76]
하지만 6명의 다수 대법관은 의회가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 법원이 판단할 임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공산주의 위협이 거센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평화시기이고 전쟁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입법부의 자신들의 판단만으로는 부족하고 객관적인 전쟁의 위협이 존재해야 된다고 판단했다.[77]
10.2.5. 법의 지배 the rule of law
공산당 해산 법률의 위헌무효 판결은 “법의 지배 원칙을 공고히 굳힌 영광스런 승리의 기록”이라고 역사적인 명판례로 길이 빛나고 있다.[78] 법의 지배 원칙이란 무엇을 말하고 또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호주 헌법에서 “법의 지배” 원칙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는 있지 않다. “사법 심사” 제도 또한 헌법 조문 어느 곳에서도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왜 헌법상 명문 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지배와 사법 심사의 원칙이 어떻게 가장 중요한 헌법 원칙들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들 원칙은 헌법상 명문 규정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대법원이 헌법 해석상 원칙으로 끌어내어 사건에 적용한 선례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의의가 큰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공산당 케이스는 미국 헌법에서 사법 심사 제도의 헌법 원칙을 확립한 마버리 판례 Marbury v Madison에 비견된다.
딕슨 대법관은 법의 지배 원칙은 묵시적인 implication 헌법 규정으로 해석된다기보다 헌법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있는 불문율과 같은 가정 assumption에 해당된다고 그의 판결문에서 설명했다. 법의 지배 원칙은 사법부 독립의 원칙 등의 개념과 같이 영미법의 전통적인 법 개념에 따른 불문율로써 당연히 헌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인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시적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헌법상의 원칙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기초적인 법원칙에 의해서 입법부가 스스로 사법권한까지를 행사하려는 법률은 무효가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79]
‘법의 지배’ 원칙은 독일법 계통에서의 ‘법치 국가 Rechtstaat’의 개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유럽연합 조약 Treaty on European Union 6조는 “유럽연합은 회원국에 공통된 원칙인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권에 대한 존중, 법의 지배라는 원칙에 기초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회원국 모두가 법적으로 지킬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80] 하지만 법의 지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에 대한 개념을 법적으로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81]
2005년 9월 국제변호사협회 집행위원회 결의문에서 “법의 지배는 문명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 법의 지배는 모두가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투명한 절차를 확립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보호해 주는 원칙들을 준수하도록 한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꼭 집어서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법의 지배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 시도하는 대신에 법이 지배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나열하였는데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사법부, 무죄 추정, 공평한 공개 재판을 지체 없이 받을 권리 등이 법의 지배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법적 개념에 대해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법적 개념을 시도한 영국의 빙햄 대법관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 같다. 그는 먼저 법적 개념 시도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법률을 만드는 사람들은 법조문에 사용되는 용어를 정확히 정의하여 오해의 소지나 법원이 잘못 해석할 여지를 없애려고 한다. … 중요한 개념을 정의하는 규정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해봄 직하다. 그런데 그런 규정은 없다. 법의 지배에 대한 별도의 정의 규정을 두지 않는 것은 다이시 교수의 정의가 별다른 반박없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아닐 것이다. 법률안을 작성하는 사람들도 법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법의 지배에 대하여 다이시가 내린 정의에 회의를 표명하는 스승들 밑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의 지배에 대한 정의 규정을 두지 않은 것은 법의 지배를 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 규정을 두는 대신 법의 지배가 무슨 뜻인지를 규정해야 하는 사건이 제기되면 법관이 이 문제를 판결하도록 맡겨두기로 결정하였다고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법의 지배에 대한 정의가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과 관련되어 형성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며 새롭게 등장하는 견해나 상황에 조응하여 진화할 수 있다. 법의 지배에 관한 기존의 헌법적 원칙이 제정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면 소송당사자자들이 이 규정을 원용하는 것은 시간문제다.”[82]
빙햄 대법관은 이런 단서를 붙이고서 법의 지배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법의 지배라는 헌법 원칙의 핵심은 모든 개인과 단체(공공기관과 사적 단체를 포함하여)는 공개적이고 또 법제정 이후에 효력이 발생되는 제정법에 따라 법원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는 법에 구속되고 그런 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83] 빙햄은 8가지 요소로 법의 지배를 설명했다.[84] 빙햄의 설명에 따르면 법의 지배의 가장 핵심은 실제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의 독립에 있다. 사법부는 절차적 정의를 그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법부와 행정부의 가장 큰 차이점이 갈라진다. 판례법 국가들에서 대법원이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라는 인식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인정되고 있다.
호주공산당 케이스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유는 대법원이 바로 이러한 법의 지배 원칙을 재확인하였고 실제적인 효력을 갖고 있는 판례이기 때문이다. 비록 공산당은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당원과 지지자 수가 줄어들어서 스스로 해산되었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을 위헌 무효로 선언했던 대법원의 살아 있는 판결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판결이 힘을 잃고 집행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구체적인 사건에서 살아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면 (예컨대 한국의 대법원이 유신헌법 당시에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였다가 (그 당시에 대법원은 행정부의 힘에 굴복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이후에서야 사후적으로 위헌무효로 돌리는 한국의 사법부 전통과는 결코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힘들 것이다. 행정부가 독단적인 지배를 누린 국가전체주의 전통을 가진 대륙법국가들과는 다르게 사법부가 행정부의 행위를 통제하고 행정부보다 우위에 서 있는 사법심사의 법과 전통을 가진 영미국같은 판례법 국가들은 법과 역사와 전통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85] 만약 호주 대법원이 1951년 나라를 휩쓸던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참작하고 다수가 지배하는 행정부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에 굴복하였다면 ‘사법부 우위의 사법 심사’[86] 제도의 전통은 무너졌을 것이며 따라서 공산당 케이스는 두고두고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선례의 중요성과 법적 의의는 사후적인 부검에서 그 의의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법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을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실제로 적용되고 집행되었느냐의 여부 즉 당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행동하고 결단했느냐의 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의 지배에 대한 법적 개념은 판례법국가와 대륙법 국가의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공산당 해산 사건에서 영미 국의 판례법은 위헌 무효로 선언한 반면 독일의 경우는 합헌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판례법과 대륙법국가의 사법부 독립의 전통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법의 지배’에 관한 개념을 맨 처음 본격적으로 정립해 내었던 다이시 Dicey (1835-1922년) 옥스포드대 교수가 1885년에 출간한 “헌법학 개론”[87]에서 설명한 ‘법의 지배’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해당 부분을 번역한다.[88]
“영국 헌법의 특징으로써 법의 지배 절대성을 들고 있는데 이 절대적인 법의 지배 원칙이라는 하나의 표현에는 최소한 세 가지의 상호 연관적이면서 뚜렷이 구별되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When we say that the supremacy of the rule of law is a characteristic of the English constitution we generally include under one expression at least three distinct though kindred conceptions.
법의 지배-1-일반법의 절대적인 우위 absolute supremacy of the ordinary law
첫째, 일반적인 법적 절차에 의하여 확립된 법을 분명하게 위반하였다는 것이 일반 법원에서 확인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형사처벌이나 신체 또는 재산상의 손해를 받지 아니한다는 원칙이다. 이런 의미의 법의 지배 원칙은 광범위하고 자의적이며 재량적인 권력을 가진 권력자가 행사하는 통치체제하고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First] that no man is punishable or can be lawfully made to suffer in body or goods except for a distinct breach of law established in the ordinary legal manner before the ordinary courts of the land. In this sense the rule of law is contrasted with every system of government based on the exercise by persons in authority of wide, arbitrary or discretionary powers of constraint.
법의 지배 –2-법 앞에 만인 평등 equality before the law
영국 헌법의 특징으로써 드는 법의 지배 절대성 원칙이 가진 두 번째 의미는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일반법원의 관할하에 있고 그러한 일반적인 재판의 법적 절차에 따른다는 것이다.
[Secondly],
not only that with us no man is above the law, but (what is a different thing) that here every man, whatever be his rank or condition, is subject to the ordinary law of the realm and amenable to the jurisdiction of the ordinary tribunals. In England the idea of legal equality, or of the universal subjection of all classes to one law administered by the ordinary courts, has been pushed to its utmost limit. With us every official, from the Prime Minister down to a constable or a collector of taxes, is under the same responsibility for every act done without legal justification as any other citizen. The Reports abound with cases in which officials have
been brought before the Courts, and made, in their personal capacity, liable to punishment, or to the payment of damages, for acts done in their official character but in excess of their lawful authority. A colonial governor, a secretary of state, a military officer, and all subordinates, though carrying out the commands of their official superiors, are as responsible for any act which the law does not authorise as is any private and unofficial person.
영국에서는 법 앞의 만인 평등이라는 사상이나 또는 일반법원에 의해 집행되는 하나의 법체계에 모든 계층이 보편적으로 기속된다는 원칙은 최고의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89] 영국의 모든 공무원-위로는 수상에서 아래로는 순경이나 말단 세무직에까지의-은 법적 정당성이 결여된 모든 행위에 관하여 일반시민과 마찬가지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법원 판례를 보면 공무원이 공무 수행 중에 행한 행위이었지만 정당한 권한을 넘는 경우에는 해당 공무원은 재판에 회부되고 (공무원 신분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처벌을 받거나 손해 배상의 책임을 진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식민지의 총독 장관, 군장교, 상관의 명령을 수행한 하부 관료에까지 모든 공무원은 법이 부여한 권한을 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사인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진다.
법의 지배 –3-헌법은 일반법의 결과물
[Thirdly]
We may say that the constitution is pervaded by the rule of law on the ground that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constitution (as for example the right to personal liberty, or the right of public meeting) are with us the result of judicial decisions determining the rights of private persons in particular cases brought before the Courts; whereas under many foreign constitutions the security (such as it is) given to the rights of individuals results, or appears to result, from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constitution.
헌법 밑바탕에 법의 지배의 원칙이 스며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헌법상의 일반원칙(예컨대 개인의 자유권이나 집회참가의 권리 같은)은 법원에 제기된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일반인의 권리를 선언한 법원 판결의 결과물로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반면에 다수의 외국 헌법은 이와 같은 개인 기본권에 대한 보장이 확보된 것은 헌법의 일반원칙으로부터 도출된 결과로 보인다. ….
…
정부 형태는 인간의 의지나 힘에 의한 산물이라고 결코 여길 수 없는 인간의 일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는 이론은 비록 정연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형태이긴 하지만 어떤 정치적 사건-영국 헌법이 여기에 포함된다-이 한 순간의 결단에 의해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고 또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결과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권리를 위하여 법원에서 진행된, 통상적인 의미에서 장기간에 걸친, 투쟁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밝혀 준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 헌법은 법원의 판사가 만든 헌법이고 따라서 헌법의 표면에 판례법의 장단점을 모두 갖고 있다.
the dogma that the form of a government is a sort of spontaneous growth so dosely bound up with the life of a people that we can hardly treat it as a product of human will and energy, does, though in a loose and inaccurate fashion, bring into view the fact that some politics, and among them the English constitution, have not been created at one stroke, and, far from being the result of legislation, in the ordinary sense of that term, are the fruit of contests carried on in the Courts on behalf of the rights of individuals. Our constitution, in short, is a judge-made constitution, and it bears on its face all the features, good and bad, of judge-made law.
영국에서도 개인의 자유권은 인신보호법과 같이 헌법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보장되고, 확대 적용되거나 확인되기 때문이다.”
In England the right to individual liberty is part of the constitution, because it is secured by the decisions of the Courts, extended or confirmed as they are by the Habeas Corpus Acts.
(다이시가 결론적으로 재정리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헌법의 기본 원칙을 구성하는 ‘법의 지배’ 원칙은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거나 세가지 다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법의 지배는 자의적 권력의 행사와는 대립되는 의미로써 일반법의 절대적인 최고위치와 우월성을 의미하고 이에 따라 행정부의 자의성, 비상대권, 광범위한 재량권의 존재를 부정한다. 영국인은 법에 의해서 통치되는데 이는 영국인은 오로지 법을 위반한 경우에만 처벌될 수는 있으며 법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처벌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법의 지배는 법 앞의 만인 평등, 또는 일반법원에 의해 집행되는 일반 법에 모든 계층이 똑같이 동등하게 따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의미의 ‘법의 지배’는 일반시민에게 적용되는 법에의 복종 의무나 또는 일반 법원의 관할권으로부터 공무원이나 특정인이 면책될 수 있다는 이론을 거부한다. 영국에는 프랑스의 “행정법”이나 “행정재판소”에 상응하는 개념이 존재하기 어렵다.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갖고 있는 “행정법”이라는 개념의 밑바탕에는 정부나 정부 공무원이 관련된 사건이나 분쟁은 일반법원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고 따라서 특별 기관이나 다른 행정 기관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들어 있다. 이런 개념은 영국의 법에는 전혀 알려진 바 없고 진실로 영국의 전통과 관습에 근본적으로 들어맞지 않는다.
셋째, ‘법의 지배’는 법적 형식의 헌법 즉 다른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성문 헌법 규정에서 나오는 법원칙들이 영국에서는 개인 기본권의 원천적 소스가 아니라 일반법원에 의해서 규정되고 집행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공식으로써 사용된다. 한마디로, 법원과 의회에 의해 형성된 일반 사법상의 원칙들이 국가와 국가공무원의 지위를 판단할 때에도 확대 적용되는데 이는 곧 헌법은 하나의 일반 법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Summary
That "rule of law," then, which forms a fundamental principle of the constitution, has three meanings, or may be regarded from three different points of view. It means, in the first place, the absolute supremacy or predominance of regular law as opposed to the influence of arbitrary power, and exdudes the existence of arbitrariness, of prerogative, or even of wide discretionary authority on the part of the government. Englishmen are ruled by the law, and by the law alone; a man may with us be punished for a breach of law, but he can be punished for nothing else. It means, again, equality before the law, or the equal subjection of all classes to the ordinary law of the land administered by the ordinary Law Courts; the "rule of law" in this sense excludes the idea of any exemption of officials or others from the duty of obedience to the law which governs other citizens or from the jurisdiction of the ordinary tribunals; there can be with us nothing really corresponding to the "administrative law" (droit administratif) or the "administrative tribunals" (tribunaux administratifs) of France. The notion which lies at the bottom of the "administrative law" known to foreign countries is, that affairs or disputes in which the government or its servants are concerned are beyond the sphere of the civil Courts and must be dealt with by special and more or less official bodies. This idea is utterly unknown to the law of England, and indeed is fundamentally inconsistent with our traditions and customs. The "rule of law," lastly, may be used as a formula for expressing the fact that with us the law of the constitution, the rules which in foreign countries naturally form part of a constitutional code, are not the source but the consequence of the rights of individuals, as defined and enforced by the Courts; that, in short, the principles of private law have with us been by the action of the Courts and Parliament so extended as to determine the position of the Crown and of its servants; thus the constitution is the result of the ordinary law of the land.
영국 법 제도의 특징으로써 ‘법의 지배’ 이념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이 말은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법의 지배’란 첫째, 법을 어겼다는 사실이 영국의 보통법원에서 보편적인 법원칙과 절차에 의해서 분명히 판명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처벌받거나 신체 또는 재산상 불이익을 당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하게 확립된 법원칙이다.
둘째, 영국헌법의 특징으로서 ‘법의 지배’를 거론할 때 그 의미는 어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뿐만 아니라 또 어떤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보통법에 따르게 되고 Everyone is subject to the law 또 재판권의 행사는 보통법원에 귀속된다는 것을 뜻한다.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한다 Be you never so high, the law is above you."[90] 이런 법원칙의 존재는 1733년 풀러 박사의 기록에 등장한다.
셋째, 영국 제도의 특징으로써 법의 지배 또는 법적 정신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드는데 이 말은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영국 헌법 질서에 법의 지배의 개념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영국은 법원에 제기된 구체적 사건들에서 법원 판결의 결과로 당사자들 사이에 권리를 확정 짓는데 이러한 법원 판결의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권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의 헌법상 근본적인 원칙들이 확립되었다고 보는 반면 유럽 대륙법 국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법률의 일반적인 원칙 규정에서 도출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91][92]
법원의 실제적 역할과 힘-법원에 제기된 구체적 사건들에서 법원 판결의 결과로 헌법상의국민의 기본권들이 확립됨
판례법 국가들은, 헌법에 명시적인 규정이 있는 대륙법 국가들에 비해서, 헌법에 명시적인 규정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법부의 판결로써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제도를 보다 강력하게 보장해 왔다는 사실은 비교법적으로 확인된다.
호주공산당 케이스는 판례법의 전통적인 개념인 법의 지배와 사법부 우위 원칙을 분명하게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 사건에서 입법부가 국가의 안전과 방위의 필요성에 따라 사법부가 아닌 기관이 공산당을 불법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였지만 이에 대해 대법원은 “강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다 a stream cannot rise higher than its source.”는 말에 비유하며, 의회의 법률 제정권은 헌법에 의해서 제약을 받고 있으며 또 헌법의 최종적이고 종국적인 해석권한은 대법원이 맡고 있음을 선언했다.
1950년 공산당 해산 법률에서 헌법이 부여한 입법부의 제정 권한들에 속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점을 미리 해소할 목적으로 통상적인 법률과는 다르게 특별히 전문과 취지문을 삽입하고 거기에 법률 제정의 타당성을 미리 법기술적으로 잘 규정해 놓았다. 즉 법률 취지문에 헌법 51조에서 열거하고 있는 의회의 입법권에 따라 국가의 안전과 방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한다고 분명하게 법률 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여 놓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러한 법률 문제의 최종적인 판단 권한은 대법원이 가지고 있음을 선언했다. 정치권의 힘이 가장 강력한 시기에서 (사법부의 독립이 위태로운 시기가 된다) 대법원은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무엇이 헌법 원칙인지에 대한 해석 권한을 가진 기관 즉 헌법의 최종적인 권위자는 행정부나 의회가 아니라 바로 대법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판결로써 확인한 것이다. 이는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판결 직후 국민투표 실시를 몰고 올 정도로 정치적인 반향이 대단히 컸던 대사건이었다. 호주공산당 케이스를 하나의 “획기적인 epochal” 판결이라고 칭송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93] 대법원이 최고의 지위에서 최후 최종적인 심판자의 종국적인 역할을 맡게 된 사실은 대법원 스스로의 험난한 법의 투쟁의 결과라는 정치적 법역사적인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판례법국가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행위는 최종적으로 사법부에 의해 재검토 대상이 되므로 사법절차를 배제하는 법률[94]은 위헌에 해당될 것이다.[95] 호주 헌법은 사법 권한의 행사는 오로지 독립적인 사법부만이 행사한다고 호주 헌법 3장 사법부 조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헌법 71조는 “연방의 사법권은 연방 최고법원과 연방 법원 및 기타 법원에 부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법권은 오직 법원에 귀속되기 때문에 사법권을 다른 기관인 행정부나 입법부가 행사한다면 그것은 헌법 해석상 용인될 수 없는 문제이다. 사법권은 법원에 의해 행사된다는 헌법 규정은 사법부 독립의 원칙과 권력 분립의 원칙을 말해준다.
공산당 해산 법률에서 총독의 단독적인 판단으로 공산주의 단체 또는 개인을 공산주의자로 판정하는 경우에는 사법 심사의 절차를 규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총독의 행위도 사법 심사의 대상에 해당되므로 사법 심사를 배제한 법률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호주헌법은 국민 기본권을 보장하는 권리장전 조항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권리장전의 조항의 존재 여부하고 상관없이, 행정부의 독단으로 형사처벌을 할 수 없다는 원칙은 헌법상의 사법부의 권한 조항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다.
10.2.6. 죄형 법정주의와 소급 입법 금지 원칙
딕슨 대법관은 역사를 통해서 보면, 민주국가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유린하는 경우는 행정부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말하고 헌법에서 직접적으로 그것을 막도록 한 이유를 설명했다.[96] 미국 헌법을 만든 미건국의 아버지인 매디슨 (1751-1836년)은 “폭력적이고 갑작스런 권력 찬탈 행위에 의해서보다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점진적이고도 은밀한 제약에 의해 국민들의 자유권이 축소되는 사례가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고 말했다.[97]
딕슨 대법관은 권력을 행사하는 행정부에 의해 국민의 자유가 제약될 위험성이 보다 높기 때문에 사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보여준 것이다. 이 부분은 변론 과정에서 대법관과 변호인 사이에 열띤 토론이 오갔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위험인물이라고 여기면 한 밤 중에 처형해도 된다는 말인가?”, “오늘은 공산주의자 차례라면, 내일은 내 차례라는 말인가?” 행정부의 독단으로 국민을 범죄자로 가두고 처벌하는 법률(Bill of Attainder)[98]은 죄형법정주의[99] 원칙에 어긋나 법률 무효가 된다. 비판하는 입이 무서워서 그 사람의 혀를 잘라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100]
국방권은 오직 전쟁 시기에만 행사되는 것으로 제한적이다. 그리고 전쟁 시기에는 국민 기본권의 제한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해석은 정해진 원칙이 아니다.[101] “Inter arma enim silent leges” 이 라틴어는 키케로가 전쟁 시기에 적용되는 로마법의 원칙을 표현한 말이다. “전시에는 법이 유보된다” (In times of war, the law falls silent.)”는 뜻으로 전쟁과 같은 국가 위기 시기에는 국민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논거로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전시 유보 원칙은 2차 대전 이후 서구민주국가에서 더 이상 유력한 법원칙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지 않다. 대신 “전시에도 법의 지배의 원칙이 지켜진다 amidst the clash of arms, the laws are not silent”는 원칙이 보다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시에도 민간인에 대한 기본적 인권이 축소 제약되어서는 아니된다.[102]
10.2.7.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민주·대의·정당 정치의 토대
호주공산당 케이스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권은 확인되지 못했다. 헌법상 보호되는 정치적 기본권 측면에서의 위헌무효라는 의견이 변론에서 제기되긴 하였지만 대법원은 정치적 기본권 측면에서의 논의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공산당 당원으로써 유일하게 주의회 의원을 지낸 패터슨 변호사는 공산당을 위한 변론을 통해서 다음의 같은 주장을 펼쳤다.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체제는 대의제 정부 형태인데 대의제 정부는 정당 정치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민주주주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려면 정치적 의사 표명의 자유가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공산당 해산 법률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헌법 체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은 위헌 무효가 되어야 한다고 변론에서 주장했다.[103]
하지만 대부분의 대법관은 오늘날 같으면 당연하게 보장될 정치적 기본권의 측면에서는 법률 검토를 다하지 못했다. 다만 레이셤 대법원장만이 한마디 언급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기본권은 중요한 쟁점이 아니어서 받아들일 만한 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더구나 정부는 법률 제정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단체라고 해서 다른 일반 결사 단체하고 달리 특별하게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104]
대법원은 딕슨, 맥티에르만, 윌리엄스, 키토 대법관이 언급한 바대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행정부의 입법권의 일탈의 헌법 위반에 해당되어 그 법률 전체에 대해서 원천적인 무효가 됨을 선언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기본권 측면이나 다른 법적 쟁점들에 대해서 별도로 크게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 해산에 대한 위헌 소송이 오늘날 다시 벌어진다면 정치적 기본권 침해에 대한 부분이 보다 주요한 법률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자세하게 논의될 성격이라는 예상은 누구든지 쉽게 동의할 것이다.[105]
1901년 발효된 호주 헌법은 미국의 수정헌법과 같이 국민 기본권 보장에 관한 권리장전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호주 헌법은 미국과 독일 등 기본권 보장이 헌법 조항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와는 차이가 난다.[106] 미국이나 독일 등의 헌법과는 다르게, 국민 기본권을 보호하는 권리장전 내용이 헌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호주 헌법의 취약점이 노출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행정부의 독단으로 형사처벌을 할 수 없다는 원칙은 권리장전의 조항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헌법상 사법부의 독립 조항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그러나, 권리장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특히 1951년 당시 매카시즘의 정점에서 있었던 국내외의 정치적 압박을 고려할 때[107] 호주 대법원의 공산당 해산 위헌 무효 판결은 대단한 법적 의의를 가진다고 짐작된다.[108]
호주연방대법원은 공산당을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서 국방권에 근거하여 법률을 제정할 만큼 국가 방위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편 연방 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은 연방 헌법 51조에서 열거한 경우에만 행사 가능한 반면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는 주의 고유 권한으로써 국가 방위에 위험이 초래되는 행위에 대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각주의 고유권한으로서 특별 법률을 제정하여 형사 처벌할 수 있느냐의 문제하고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109] 이런 견해는 플라거 대법관의 의견이었고, 키토 대법관은 연방 정부 체제가 아닌 단일 정부 처제라면 법률제정권한의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대법원은 번즈와 샤키 사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형법(the Crimes Act 1914)의 내란 선동죄 sedition로 처벌하는 규정은 위헌이 아니라고 이미 판단했었다. 번즈와 샤키는 내란 선동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까지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미국의 1951년 데니스 판결과 마찬가지로) 유죄확정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연방 정부가 공무원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110]이 있으므로 의회가 정부 공무원 채용 때 공산주의자를 배제하는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의회가 국민들 가운데 공무원 신분과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를 공산주의자로 판정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111] 이는 형식적인 법률 제정권한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인 헌법 내재적인 제약성을 뛰어 넘어설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의 공산당 해산 위헌 무효 판결에 대해서 자유 문명세계의 뒤통수를 치려고 한 공산주의 마수를 “되던지기 The Throwback”한 것으로 평가한 뷸리틴 만평 (1951년 3월 14일).
11. 대법원 위헌 무효 판결에 대한 정부 여당의 반응
정부여당은 공산당 해산 법률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으나 1951년 3월 9일 호주연방대법원은 이 법률안에 대해 위헌무효의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의 위헌법률 판결이 나온 지 1주일 만에 정부여당은 상하원을 동시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초강경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의회를 통과한 공산당 해산 법률이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위헌 무효가 됨에 따라서 공산당 해산 법률이 무위로 되돌아가자 보수당 정부는 반공주의의 국민 여론을 등에 엎고 야당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1951년 4월 28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여당 멘지 정부는 하원과 상원(총선 실시 이전의 상원은 야당노동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에서 모두 다수의석을 차지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실시된 총선 결과는 하원에서 집권여당의 보수당 소속 52명, 국민당 소속 17명이었고, 야당 노동당은 52의석을 차지했다. 상원은 정부여당이 32석(자유당 27명 국민당 5명), 노동당이 28석을 차지함으로써 상원에서도 보수당이 다수당으로 올라섰다.
12. 국민투표 Referendum를 통한 헌법 개정의 방법으로 공산당 해산 추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멘지 정부는 대법원에서 위헌 법률 판결이 난 공산당 해산 방침에 대해 헌법을 개정하여 공산당을 해산시키겠다는 방침을 밀어 부치고 찬반 투표의 국민투표[112]를 추진하였다. 정부가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개정을 의도했던 까닭은 연방대법원의 위헌 법률 선언 효과를 되돌리기 위한 목적 즉 공산주의를 대처하는데 정부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었다.
1951년 9월 2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대법원의 위헌 법률 선언이 나온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민투표는 헌법에 51A조의 특별 규정을 삽입하고자 하는 정부여당의 헌법개정안에 대해 국민들의 찬반 여부를 묻는 간단한 형태였다.[113] 그 질문은 하나는 다름과 같았다: “당신은 “헌법 개정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권한) 법률 (1951년)로 제안된 헌법 개정 법률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정부여당이 제안한 법률 내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다룰 입법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위헌 법률을 판결한 요지가 입법부는 그러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헌법에서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국민투표를 통해서 헌법에 명시적으로 그러한 법률 제정 권한을 부여하게 되면 정부의 의도대로 공산주의자를 대처하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어떤 헌법적 제약이 사라짐을 의미하였다. 연방대법원은 헌법에 직접적인 구속을 받는다. 헌법이 법률보다 상위의 지위에 위치한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헌법 개정이 통과되었다면, 정부가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헌법적 제약이 제거되고 정부는 전제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국민들의 여론은 반공주의 흐름을 지지하고 있었다. 갤럽 여론 조사에서 찬성 여론은 국민투표
선거일 2달 이전인 7월달
80%에 달했다가 8월달 73%로 약간 떨어졌다.[114]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법률 제정 근거를 헌법에 삽입하고자 하는 국민투표가
거의 통과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야당인 노동당은 국민의 양심에 호소하는 선거전략을 전개했다. 이 때는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헌법 재판에서 부두항만 노조를 대변했던
인권변호사 출신의 에바트 의원이 노동당의 당수가 되어 국민투표 부결 선거운동을 지휘하였다. 공산당 대처 법안을 지지하는 여론은
80%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부결시키려는 야당 노동당의 선거운동이 승리할 가능성은 비관적인 상황에 가까웠다.
<노동당의
국민투표 반대 캠페인과 보수당의 국민투표 찬성 캠페인 선거 광고를 비교한 것.
>
하지만 국민투표 결과는 찬성 2,317,927표, 반대 2,370,009표로써 헌법개정안은 찬성표 49.44%에 머물러 과반수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대법원의 위헌 법률 판단에 대해서 정부여당이 유권자의 정치적 힘으로 다시 뒤집으려던 정치적 시도가 헌법 앞에 무릎을 끓게 된 것이었다.
정부여당이 공산주의의 위협에 적극 대처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추진했던 국민투표[115]가 부결된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헌법 개정안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호주국민들의 보수적인 정서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116] 또 당시 매카시즘의 절정기에서 정부의 공산당 강제 해산 방침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다수이었으나 대법원에 의해서 위헌 무효의 판결이 난 사안을 다시 국민투표에 회부한다는 것에 대한 경계 심리와 국민기본권 침해에 대한 우려가 반영되었을 것이다.[117] 다수의 국민들은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 기본권을 잠재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전제적인 권한을 내주는 것까지를 수긍한다고는 보기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야당 노동당의 헌법개정안 반대 캠페인은 국민의 자유 기본권 침해에 대해 의로운 반대투표를 던져달라고 국민의 양심과 정서적인 면에 주로 기대었고 또 이러한 선거 캠페인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반공주의 물결이 거세었던 당시 정치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도 공산당의 강제 해산 국민투표안은 끝내 부결되었다. 국민투표 부결의 승리에 대한 의의는 다음의 말로써 충분히 공감된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 다음 번 선거에서 시정될 수 있지만 헌법 개정의 문제에서 한 번의 판단 오류를 범하면 그것은 자유와 정의로 짜여진 민주주의 옷감을 통째로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118]
<“호주의
전통: 독재 정권에 “아니오 No”라고 외쳐라!” 국민의 자유권이 위협을 받을 때 호주국민들은 언제나 아니오!를
외쳤다고 하면서 공산당 해산 법률 국민투표에 반대표를 던질 것을 호소하는 리버티 1951년 8월 28일자 1면>
13. 누가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인가?
공산당을 해산시키겠다는 방침을 총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집권한 정부여당이 발의하고 야당의 동의를 얻어 의회를 통과하여 정식 발효된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그것도 국민 여론의 절대다수(80%까지 달했던)가 지지한 법률에 대해서 연방대법원이 원천적인 위헌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것은 당시의 공산주의 위협이 극에 달한 국제적인 냉전 상황과 파업 사태 등 어지러운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함께 고려해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진 판결이었음은 분명하다. 공산당 케이스는 헌법 해석의 역할을 담당함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헌법 해석의 문제는 행정부의 행위에 대해 최종적으로 사법부가 통제하는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의 뛰어난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호주공산당 케이스는 권력 분립 the separation of powers과 법의 지배 the rule of law에 관한 헌법 원칙을 재확인해 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결이다. 비록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과 독일에서의 공산당 해산 판결과 비교해 보면 헌법 해석에 있어서 사법부 우위의 판례법 국가들의 뛰어난 법적 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보수당 정권으로 바뀌면서 대법원과 연방 정부와의 사이에 누가 더 큰 힘을 갖고 있는지 대립하는 권력 게임의 양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미국의 제퍼슨 정부 시대에 사법부의 독립의 가져온 위대한 판결인 미국연방대법원의 1803년 마버리 사건과 비견된다. 마버리 사건은 미국연방대법원은 사법부의 기초를 놓은 법원조직법의 법률 조항을 위헌무효임을 선언하며 (그 결과는 연방대법원 자신의 권한 일부분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었다) 작은 이익을 희생해 가며 더 큰 사법부의 독립을 쟁취한 사건으로서 미국 대법원의 2백 년 역사를 통하여 길이 빛나는 전통적인 사례로 기억되고 또 현재까지 살아 있는 법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마버리 사건과 같이 호주의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은 사법부의 독립과 권력 분립의 원칙, 법의 지배[119]에 자유민주주의 헌법 기초에 관한 빛나는 영광의 승리의 기록으로서 전통적인 사례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만약 호주대법원이 (독일의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같이)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합헌의 결정을 내렸다면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영미 판례법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당 해산 법률의 합헌성을 인정해 준 오명의 역사를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대법원은 사법부 독립의 원칙을 행정부가 정치적 힘을 가장 높이 발휘했던 시기에 나타난 공산당 해산 심판 사례에서 확인해 주었다.[120] 행정부와 입법부의 모든 행위는 최종적으로 사법부의 심사 대상이 된다는 사법 심사 제도의 전통은 사법부의 독립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호주 공산당 케이스를 “획기적인 epochal” 판결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는 분명하다.[121] 호주 대법원은 정부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까지 동의하고 상하원 양원을 통과하여 정치적인 합의를 이룬 그 법률에 대해서, 그것도 80%[122]에 이를 정도로 절대 다수의 국민 여론이 찬성하고 지지했던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단호하게 위헌무효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 위헌 무효의 판결은 당시 소련 공산주의 위협이 극에 달했던 국제 정세와 매카시즘이 정점으로 치닫던 국내 정치 상황을 감안하고 또 미국과 독일에서의 정당 해산 판결을 비교해 보면 담대한 판결이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와 같은 담대한 판결은 판례법 국가에서의 제도적 전통과 대법관의 양심이 아니고서는 감히 이뤄낼 수가 없을 “영광된 승리의 기록” (사후적으로 추존하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실제로 적용되었다는 의미)으로써 길이 남을 역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결론을 대신하여 원터톤의 평가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공산당 정당 해산 심판 케이스에서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자유권은 법원이 최후의 수호자인 ‘법의 지배’ 원칙을 공평무사하게 적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비록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사법부에 맡겨진 마땅한 권한을 엄숙히 행사하는 불편부당하고 불굴의 용기를 가진 법원이 독재정권을 막아내는 최후의 방어막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매디슨이 멋지게 설계한 ‘견제와 균형 checks and balances’의 헌법 이론-즉 국가 통치 체제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3부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스스로 통제된다’는 것-을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사법부 독립의 원칙은 갈등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 사법부의 판결을 이끄는 오로지 검증된 안내자는 바로 엄격하고 확실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법의 지배’원칙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123]
정당 해산 헌법 재판-호주 편-Judicial Review a Political Party-A Comparative Study of Korea, Germany, U.S. and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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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주 연방 대법원 High Court of Australia”을 한국에서 번역하기를 “High Court”라는 말을 그대로 축자 해석해서 “고등 법원”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법원체계상 “고등 법원”이 대법원 아래 단계에 있으므로 대법원을 “고등 법원”이라고 명칭하는 한국어 번역은 적당하지 않다. 호주연방 헌법 71조에 따라 호주의 “하이 코트 High Court”는 최고법원인 “연방대법원 federal supreme court”을 지칭한다. 호주연방국가는 1901년 연방 헌법 제정으로 성립하였는데 이때까지 존재하던 6개의 영국 식민지가 모여서 호주연방을 형성하였다. 연방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각주마다 대법원 supreme court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대법원의 이름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즉 새로운 헌법아래 생긴 연방최고법원을 일컫는 명칭으로 구별될 필요성으로 인해서 Supreme Court가 아니라 “High Court”라고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만약 외국 법원의 명칭을 역사성을 무시하고 축자번역하는 경우 해당 법원 체계를 이해하는데 오해를 불러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예컨대 미국 연방 대법원을 Supreme Court라고 부르는데 미국 뉴욕주의 주법원 체계에서는 “Supreme Court”가 원심(1심) 법원에 해당하고 주대법원의 명칭은 “Court of Appeals”이라고 부른다.
[2] 1951년 3월 9일 호주 연방 대법원이 판결한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에 대한 위헌 무효의 판례로써 판례 인용은 Australian Communist Party v The Commonwealth (1951) 83 CLR 1, [1951] HCA 5 이고, “공산당 케이스 The Communist Party Case”의 약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판례 표기를 이 책에서 “공산당 케이스” 또는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 등으로 쓰기로 한다. 이 법률의 영어 원문은 호주 정부 사이트 http://www.comlaw.gov.au/Details/C1950A00016 에서 읽을 수 있고, 이 판결문은 다음 호주 법 정보 제공 공익 기관 (AUSTLII) 사이트에서 이용 가능하다. http://www.austlii.edu.au/au/cases/cth/HCA/1951/5.html.
[3]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08.
[4] “Australian constitutionalism scored one of its greatest triumphs when the High Court invalidated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 That Act was designed to ban the Communist Party and affiliated bodies, and to restrict the civil liberties of persons declared by the Government to be dangerous or potentially dangerous communists. In other words, it potentially restricted the civil liberties of everyone. The High Court's decision, a celebrated victory for the rule of law, was followed by the defeat – remarkable at a time of anti-communist hysteria fanned by the Korean War – of a referendum to amend the Constitution to achieve the Government's objectives. Yet while a referendum defeat has lasting impact only in a negative sense, the Communist Party case lives on, and is as important a declaration of fundamental principles today as it was in 1951. As with all great constitutional decisions, the Communist Party case can only be understood in its historical and political context.”
[5]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08.
[6] 1946년 3월5일 미국의 미주리 주 풀톤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소련을 “철의 장막 Iron Curtain”에 비유하며 자유 세계의 단결을 통해서 소련의 위협에 맞써야 함을 주장한 그의 유명한 “평화의 원동력 The Sinews of Peace” 연설을 하였다. 자주 인용되는 처칠 연설이 구절: “오늘날 발트해의 수데텐란트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횡단하여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다. From Stettin in the Baltic to Trieste in the Adriatic,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
[7] 이들 5개국은 국가 안보에 관한 정보를 서로 직접 교류한다. 흔히 “5-Eyes"국가라고 부른다. 2차 대전 중 적국의 전파 암호 정보 해독을 위하여 언어와 문화가 같은 미국과 영국간의 긴밀한 협조 체계를 구축한 것에 바탕을 두고 종전 후 1946년 미국과 영국(다른 나머지 3개국은 영국의 식민지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이들을 대표하였다)간의 비밀 협정을 맺고 지금까지도 이들 5개국은 국가 안보에 관한 정보를 즉시 교류하고 있다.
[8] 도미노 확산 이론 The Domino Theory, 1954년 4월 4일 아이젠하워 기자회견에서 말한 내용: “You have a row of dominoes set up, you knock over the first one, and what will happen to the last one is the certainty that it will go over very quickly. So you could have the beginning of a disintegration that would have the most profound consequences.”
[9] 호주에서 공산당으로써 처음으로 주의원에 당선된 인물은 Fred Paterson으로서 패터슨은 1944년 퀸즈랜드 주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1947년 재선되었다. 패터슨은 변호사출신으로써 공산당 해산 케이스에서 대법원에서 공산당을 변론하였다.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Volume 15, MUP, 2000.)
[10] 1949년 11월 10일 당시 야당이었던 보수당 당수 (Robert Menzies)의 총선 공약 연설. http://electionspeeches.moadoph.gov.au/speeches/1949-robert-menzies.
[11] Ibid.
[12] 1950년 당시 호주 의회의 여야 의석 수 구성 분포는 121명의 하원에서 정부여당 74명 의원(55명 자유당 소속, 19명 국민당 소속)을 가졌고, 야당 노동당 소속의원은 47명이었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노동당이 그때까지 소속 의원 34명을 가졌고 정부여당은 26명의 소속 의원을 가졌다. Winterton, at 115.
[13] Korematsu v. United States 323 U.S. 214 (1944).
[14] Burns v Ransley [1949] HCA 45; (1949) 79 CLR 101 (7 October 1949).
[15] “All right, We would that war. We would fight on the side of Soviet Union. That’s a direct answer.”
[16] R v Sharkey [1949] HCA 46; (1949) 79 CLR 101 (7 October 1949).
[17] “If Soviet Forces in pursuit of aggressors entered Australia, Australian workers would welcome them. Australian workers would welcome Soviet Forces pursuing aggressors as the workers welcomed them throughout Europe when the Red troops liberated the people from the power of the Nazis. I support the statement made by the French Communist leader Maurice Thorez. Invasion of Australia by forces of the Soviet Union seems very remote and hypothetical to me. I believe the Soviet Union will go to war only if she is attacked, and if she is attacked I cannot see Australia being invaded by Soviet troops. The job of Communists is to struggle to prevent war and to educate the mass of people against the idea of war. The Communist Party also wants to bring the working class to power, but if fascists in Australia use force to prevent the workers gaining that power, Communists will advise the workers to meet force with force.”, R v Sharkey (1949) 79 CLR 121 at 137-138.
[18] If Soviet Forces in pursuit of aggressors entered Australia, Australian workers would welcome them.
[19] 1914년 형법 제24A조 내란선동죄로 형사처벌되는 경우 “any of the following intentions seditious: (a) to bring the Sovereign into hatred or contempt; (b) to excite disaffection against the Sovereign or the Government or Constitution of the United Kingdom or against either House of the Parliament of the United Kingdom; ….or “(g) to promote feelings of ill-will and hostility between different classes of His Majesty’ s subjects so as to endanger the peace, order or good government of the Commonwealth,” 하지만 같은 형법 조항에서 단서조항으로 정부 비판 발언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분명히 규정했다: it shall be lawful for any person: “(a) to endeavour in good faith to show that the Sovereign has been mistaken in any of his counsels; “(b) to point out in good faith errors or defects in the Government or Constitution of the United Kingdom or any of the King’s Dominions or of the Commonwealth as by law established, or in legislation, or in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 with a view to the reformation of such errors or defects; “(c) to excite in good faith His Majesty’s subjects to attempt to procure by lawful means the alteration of any matter in the Commonwealth as by law established; or “(d) to point out in good faith in order to their removal any matters which are producing or have a tendency to produce feelings of ill-will and hostility between different classes of His Majesty’s subjects.”
[20] 항고(상고)심에서는 원심에서 쓰는 용어인 피고 defendant, 원고 plaintiff 라는 용어 대신 항소인(상고인 appellate), 피항소인(appellee/respondent)이라는 법률용어를 쓴다. 또 연방법원이 담당하는 공법 public law분야는 각주가 담당하는 시민의 일상생활 영역인 형사법정이나 민사법정에서 흔히 쓰는 피고, 원고라는 용어 대신 청원인 Petitioner, 피청구인 Respondent이라는 단어를 쓴다. 여기에서 공산당 케이스는 대법원에서 원심이 시작되었지만 대법원전원합의체 최종판결은 단독심리로부터의 항소심 Case stated 판결이었다. 따라서 사실심리가 아니라 법률심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상고심의 판결문을 번역하면서 피고/원고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번즈와 샤키 사건이 형사재판이고 또 이들 사건은 형사재판 법기술상의 문제가 쟁점으로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번즈 사건은 1심에서 약식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대법원에서의 항소심 재판은 원심의 사실심리를 재개할 수 있는 재판의 성격이었기에 엄격한 법률심리만을 하는 샤키의 상고심에 비해서 항소 이유가 보다 크게 열려져 있었다는 법기술상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21] 딕슨 대법관은 피고인의 답변이 “기준별 답변 categorical reply”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준별 답변”이란 대답이 “예”도 될 수 있고 또한 “아니오”도 될 수 있는 답변을 말한다. 우리들이 흔히 “당신이 그 말을 무슨 뜻으로 했느냐?”라고 다그치게 되는 경우 즉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답변의 경우 “부정적인 의미로 했느냐? 아니면 긍정적인 의미로 했느냐?” 그렇게 질문을 재차 받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런 종류의 말로써 상대방의 기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 답변을 말한다. “yes or no”라는 의미에서 불가에서의 “선문답”하고 같은 성격일 것이다. 선문답의 성격이라면 예수처럼 직접적으로 행동하기를 외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법에서와 같이) 선동적인 발언으로는 볼 수 없다고 딕슨 대법관은 판단 내린 것이다. 나온 김에 참고로 보통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답변과 조건있는 답변을 종종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잠깐 추가설명을 한다. ‘한정 의견 qualified opinion’을 이해할 때 여기서 ‘qualified’라는 말의 일반적인 뜻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조건이 붙은 의견 표명에 대한 이해를 잘못 하는 경우가 흔히 발견된다.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회사의 재무제표에서 흔히 나타나는 설명을 덧붙인다. 감사의견 opinion은 감사보고서에는 재무제표 전체에 대하여 명료하게 표명된 감사의견이 기술되어 있다. 감사인은 재무제표가 일반적으로 인정된 회계처리기준에 따라 중요성의 관점에서 적정하게 표시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경우 ‘적정의견 unqualified opinion’을 표명한다. ∙한정의견 qualified opinion: 감사인과 경영자간의 의견불일치나 감사범위의 제한으로 인한 영향이 중요하여 적정의견을 표명할 수는 없지만 부적정 의견이나 의견표명을 거절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거나 전반적이지 않은 경우에 표명한다. ∙부적정 의견 adverse opinion: 감사인과 경영자간의 의견불일치로 인한 영향이 재무제표에 매우 중요하고 전반적이어서 한정의견의 표명으로는 재무제표의 오도나 불완전성을 적절히 공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표명한다. ∙의견 거절disclaimer of opinion: 감사범위의 제한에 의한 영향이 매우 중요하고 전반적이어서 감사인이 충분하고 적합한 감사증거를 획득할 수 없었고 따라서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의견을 표명할 수 없는 경우에 의견표명을 거절한다.
[22] R v Sharkey (1949) 79 CLR 121, at 118.
[23] 해당 사건에서 대법원이 판단하여야 할 주요 법률 쟁점은 다음이었다: The words in the circumstances in which they were uttered were capable of being expressive of a seditious intention within the meaning of the Crimes Act.
[24] 호주 공산당의 당원 수는 1945년 가장 피크 때 최고 2만 명까지 이르렀다. 미국 공산당의 당원 수는 후보 FBI 국장의 의회 증언에 따르면 최고 피크 때 4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 미국과의 인구 수를 비교 감안해 본다면 호주 공산당의 정치적 위세가 미국보다 더 강했다고 보여진다. 1960년대 초반에는 약 5천명 정도를 유지하다가, 1990년경에는 1천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결국 공산당은 당원 수 감소에 의한 재정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1991년 자진 해산하였다.
[25]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반공주의 물결은 비정상적인 알레르기 과민 반응 “anti-communist hysteria”이었다고 훗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가한다. Maher, L W. “Tales of the Overt and the Covert: Judges and Politics in Early Cold War Australia”; 21 Fed. L. Rev. 151 (1992-1993).
[26] 1950년 4월 27일 하원 공산당 법률안 회부 법률 제안 이유 설명.
[27] 87,958명은 총선에서 호주 공산당을 지지한 투표수로서 전체의 2.1%에 불과하여 정권에 현실적인 위협을 줄만한 정도가 전혀 아니었다. 호주공산당이 밝힌 공산당 당원 수는 피크에 달했던 1945년에 2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종전직후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수상이 법안 제출 연설에서 밝힌 바대로 공산주의자들의 규모가 국가 안보에 어떤 위협을 주는 수준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28] 1950년 4월 멘지 수상의 의회 법률안 제안 설명, “Debates” 1950, vol. HR207, p. 1995.
[29] “There is great danger that the hysteria and fear complex that has been aroused may result in grave injustices being done to individuals. The multitude can make grave mistakes. It was the multitude, by its vote, that sent Christ to be crucified.”
[30] 12명의 집행부 에서 8-4의 다수의견으로 정부여당의 원안대로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권고안을 채택했다.
[31] 호주 빅토리아주 공산당 활동에 대한 정부 특별조사위원회가 1949년 5월 19일 설치되고 (Victoria Government Gazette, 1949, vol. 2, p. 2831) 1950년 4월 28일 의회에 활동 결과를 보고하였다.
[32] (2001) 27(2) Monash University Law Review 253, at 274.
[33] 1950년 호주에는 5개의 정당이 존재하였다. 호주 공산당은 1920년 창당되어 2차 대전의 전시 상황속에서도 지속되었고, 1944년 주의회 의원 한 명을 배출했다.
[34] “necessary ... for the security and defence of Australia.” 의회의 입법권은 헌법 제51조에서 열거하고 있다. “의회는 본 헌법에 의거하여 연방의 평화, 질서 및 선량한 통치를 위해 다음 사항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다. 1. 타국과의 또는 주 상호간의 통상. ……6. 연방 및 각 주의 육해군 방위, 연방 법률의 시행 및 유지를 위한 무력의 통제……”
[35] “AND WHEREAS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in accordance with the basic theory of communism, as expounded by Marx and Lenin, engages in activities or operations designed to assist or accelerate the coming of a revolutionary situation, in which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acting as a revolutionary minority, would be able to seize power and establish a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36] ‘communist’ as ‘a person who supports or advocates the objectives, policies, teachings, principles or practices of communism, as expounded by Marx and Lenin.
[37] 러셀과 케인즈의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 참조하라. Russell, "Why I am Not a Communist", in “Portraits from Memory’; 케인즈, “소련에 관한 단상(1925) “설득의 정치경제학 Essays in Persuasion”중 (1931).
[38] Experience throughout the world has shown that the banning of one political party by a Government, irrespective of political ideology, has always been a prelude to suppression of other political parties and the smashing of Trade Unions with imprisonment of Trade Union Officials, in many countries without trial.
[39] 총독의 권한, S 61 of the Constitution provides:- "The executive power of the Commonwealth is vested in the Queen and is exerciseable by the Governor-General as the Queen's representative, and extends to the execution and maintenance of this Constitution, and of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40] 판결이유에서 밝히듯이 형사법의 기본원칙이 도치될 수 있는 경우는 특수한 전쟁 상황에서나 허용될 예외적인 현상이다.
[41] ‘ethically correct, professionally sound, and politically very, very foolish.’
[42] 보수당 정권에서 호주 수상(1975-1983년)을 지낸 맬콤 프레이저는 자서전에서 국민투표 반대 투쟁을 이끌어 승리한 에바트 의원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마 자신도 그때 반대표를 던졌을 것이라고 훗날 회고하였다. “He won, rightly. It was much to his credit; it said a great deal about principle and his readiness to support principles. Where do we see such courage today, such determination? Perhaps that is why bad policy has assumed a dominance in certain areas.” Simons And Fraser, Malcolm Fraser: The Political Memoirs, 2010, at 93.
[43] Australian Communist Party v The Commonwealth (1951) 83 CLR 1.
[44] “Military defence:s” 국방에 관한 일체 Subsection vi of section 51(the defence power) gives the Commonwealth government the power to make laws relating to 'The naval and military defence of the Commonwealth and of the several States, and the control of the forces to execute and maintain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45] There must be a real and substantial connection with the subject matter of power before a law can be held valid.
[46] 헌법 재판에서 원심에서 담당하는 법정 증거 조사를 통해 사실 확인의 판단까지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사실 확인에 대한 임무는 필요치 않고 순전히 법률적 판단만으로 최종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대법원이 판단을 말한다.
[47] "1.(a) Does the decision of the question of the validity or invalidity of the provisions of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depend upon a judicial determination or ascertainment of the facts or any of them stated in the fourth, fifth, sixth, seventh, eighth and ninth recitals of the preamble of that Act and denied by the plaintiffs, 1.(b) are the plaintiffs entitled to adduce evidence in support of their denial of the facts so stated in order to establish that the Act is outside the legislative power of the Commonwealth? 2. If no to either part of question 1 are the provisions of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invalid either in whole or in some part affecting the plaintiffs?", 판결문 at 129.
[48] Fact findings 사실 확정, 사실 인정, 사실 확인 등의 여러 단어로 쓰고 있다. 사실 판단은 배심원에 맡기고, 법률 판단은 판사가 행사하는 배심원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판례법 국가에서는 원심과 항소심의 구별, 사실 문제와 법률 문제에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대륙법 제도는 판사가 사실 판단과 법률 판단을 동시에 단독으로 행사하므로 fact or law에 대한 구분의 실익과 중요성은 판례법 국가들보다 낮다.
[49]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
[50] “무죄추정 innocent until proven guilty”의 원칙은 정부가 범죄 입증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부가 누구든지 공산주의자로 혐의를 씌울 수 있고 또 혐의자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즉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유죄추정의 원칙”을 도입하였다.
[51] 원고들이 확인을 구하는 헌법 소송이기 때문에 효력 범위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법에 “헌법재판소는 제청된 법률 또는 법률조항의 위헌 여부만을 결정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또 구체적 규범통제의 범주에 속하는 절차에서 심판대상의 위헌여부는 그것이 법원의 재판에 전제가 될 것이 요구된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통제 기속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의 헌법재판제도하고는 달리, 판례법 국가는 대법원이 모든 하급심을 직접 통제하므로 일단 선례가 확립되면 다음의 구체적 개별 사건에서도 (즉 일부 법률 조항만을 무효로 한다고 해도) 같은 효력을 나타날 것이다. 사법심사 judicial review 제도를 가진 영미법 국가들에서의 헌법 재판에서 법률 전체를 원천 무효로 선언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cf 미국의 1950년 공산당 해산 법률에서의 헌법 재판 결과 참조하라.) 연방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이 원고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일부 무효가 아니라 공산당 해산 법률 전체가 원천적으로 위헌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행정부는 대법원의 판결을 다시 뒤집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의 방법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52] 헌법 소송에 참여한 원고들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호주 공산당, 항만 부두 노조, 철도 노조, 건설 노조, 통합 기술자 노조, 선원 노조, 철강 노조, 탄광 노조. 그리고 이들 단체 원고들을 법적으로 대표하는 대표자 개인들 또한 원고로 참여하였다. 이들 단체는 법적으로 독립적인 소송능력을 가진 법인격 사단으로써 대표자 또한 소송의 당사자가 된다. 이들 단체들의 변론을 담당한 변호사들은 최고의 변호사들이었고 각자 별도 변호이므로 소송비용은 큰 편이었다.
[53] Communist Party case (1951) 83 CLR 1 at 285.
[54] S 51 “The Parliament has power, subject to this Constitution, to make laws for the peace, order and good government of the Commonwealth with respect to:- … (vi) the naval and military defence of the Commonwealth and of the several States, and the control of the forces to execute and maintain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55] Subsection vi of section 51(the defence power) gives the Commonwealth government the power to make laws relating to 'The naval and military defence of the Commonwealth and of the several States, and the control of the forces to execute and maintain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56] 공산당의 위협 수준에 대해서 대법원은 필요하다면 소송당사자들로부터 증거 채택의 과정 없이 직권 조사로써 증거를 채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를 judicial notice라고 말한다. 다수의 대법관들이 국내외에서 공산주의가 위협이 된다는 내용을 사실 인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57] The High Court held that the High Court itself had to judge what the facts were.
[58] 다이시가 미국에서의 ‘위헌’의 의미를 설명한 내용과 동일하다. 즉 설령 법이 국가이익에 합당할지라도 의회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 ultra vires에 해당되는 경우 위헌법률이 되는 것이다. 다이시의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연방의회가 제정한 법의 경우 위헌이라는 표현은 문제의 법이 연방의회의 권한을 일탈하여 제정된 것으로 무효라는 의미를 가진다. 미국인들이 연방의회의 법이 국가이익에 합당한 좋은 법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위헌’ 즉 월권에 의한 법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이야기하는 데 아무런 논리적 하자가 없다.”1915년판, Note VII.
[59] whether there was a sufficient connection between the Act and the defence power.
[60] 딕슨 대법관은 1925년 대법관에 임명되었고, 1952-1964년 대법원장을 지냈다. Latham 대법원장은 1922-34년까지 보수당으로 지역구 하원의원을 지냈는데 이 지역구를 멘지 수상이 물려 받았다. 보수당 정부에서 연방 검찰총장을 지냈고 1931-34년에는 부수상과 외무성장관을 지냈고, 1935년부터 1952년까지 대법원장을 지냈다. 레이셤 대법원장만이 반대의견을 개진한 것은 그의 정치적 경력과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61] 미국 공산당 케이스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v. SACB 367 U.S. 1 (1961) 판결문은 202페이지, 독일 공산당 KPD 케이스 판결문 (BVerfGE 5, 85)은 308페이지.
[62] 호주 대법관들은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의 위협이 분명하다는 것은 인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의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나 공산주의 이론의 위험성에 대한 고려를 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Dixon J, “If it is unnecessary to discuss the principles of communism, it is even less necessary to examine notorious international events.”, 판결문 at 197.
[63] 총독 Governor-General은 공식적으로는 의회의 수장이다 the head of the Australian parliament. 하지만 총독의 역할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고 그러한 상직적인 역할로써 모든 법률안이 정식 발효될 때 최종적인 서명을 하는 일 정도를 맡고 있다.
[64] a Constitution framed in accordance with many traditional conceptions, to some of which it gives effect ..., others of which are simply assumed. Among these I think that it may fairly be said that the rule of law forms an assumption.” 판결문 at 193.
[65] S 75(v) confers upon the High Court jurisdiction in all matters in which a writ of mandamus, prohibition or an injunction is sought against an officer of the Commonwealth.
[66] to pre‐empt the question of validity.
[67] 풀라거 대법관이 말한 “the stream cannot rise higher than its source.”의 비유법은 “강물은 그 원천보다 더 높이 흐를 수 없다”,“강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다”는 말로 직역되는데, 우리 속담의 “부모 없는 자식 없다”에 가까운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은 만물의 탄생에는 근원 source이 있고 항상 그 근원과 배경을 잊지 말라는 뜻이 있듯이, 법률은 불쑥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상위모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법의 근원, 법의 근거를 의미한다. 상위법에서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벗어나서 법이 행사될 수는 없다는 그런 법률의 한계, 법적 제약을 뜻한다. 중세 유럽(16세기경)의 고서에서 들어 있는 함부르크 시 법전 계통을 보여주는 그림을 참조하라. 또 법 계통은 “가계도 family tree”로써 이해하면 보다 쉬울 것이다. 어떤 법의 출현은 그 법이 나온 근거 소스 source가 있기 마련이다. 법의 근거를 법원 legal source라고 말한다. 법의 권위 authority는 이러한 법의 소스에서 나온다.
[68] Lloyd v. Wallach [1915] HCA 60.
[69] Shrimpton v. The Commonwealth (1945) 69 CLR.
[70] 법률 선포 proclamation 는 법률안에 공식 서명을 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말한다. 대통령에 정식으로 당선된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정식 활동하는 것은 취임식을 통해서이다. 당선인의 취임식은 상징적인 행사로써 누가 거부할 권한이 없다. 마찬가지로 법률안이 정식 법률로써 효력을 발휘하는 시점은 법률안에 서명이 완료된 이후이지만 서명권자가 어떤 실질적으로 서명을 거부할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징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호주 총독은 법률안에 서명권을 행사하는 헌법 기관이지만 상징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헌법 총독 조항 참조.
[71] 풀라거 대법관, 판결문, at 259.
[72] 법원은 법정 증거로 채택된 것에 한정하지 않고 법원 스스로 사실 여부를 직권으로 확정할 수 있다. 이를 ‘judicial notice’제도라고 한다. 대륙법계통의 법원에서 행하는 법원의 직접적인 사실 조사까지를 말하는 의미가 아니라 상식이나 공지의 사실들은 법정 증거에서 채택될 필요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사실 내용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일출이나 일몰시간 등 어떤 일상적인 법칙이나 공식 기록 같은 것은 사건 당사자에 의해서 법정 증거로 정식 제출되지 않아도 법원 직권으로 사실 판단에 있어서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이다. 공산당 케이스에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가 국가 안전과 방위에 위협이 되는지 여부는 공산당 관련 증인들이 법정에 출두하거나 또는 문서 증거들을 통해서만 법원이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형사법정이 아닌 것이다.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판단은 ‘대법관의 인지 judicial notice’에 의해서도 판단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공산당 케이스를 통해서 볼 때 한국에서의 진보당 해산 재판에서 증거 입증의 방법과 기준을 민사소송에 준하느냐 형사 소송에 준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하게 다투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힘들다. 딕슨 J International tensions of the time and the recent serious dislocation of industry as notorious. 판결문 at 197. 맥티에르난 judicial notice of the fact that communists engaged in a range of nefarious activities 판결문 at 208-210. “The limitation of the principle of judicial notice to facts which are notorious - which are so clear that no evidence is required to establish them - appears to me to prevent a court from ever reaching a conclusion based only upon such facts with respect to an issue of actual or potential public danger calling for the exercise of the legislative powers now under consideration.” 판결문 at 164.
[73] to take judicial notice of the existence of an emergency of this grave character. …..For there are a number of well-known facts relating to the Communist Party which I think are either within judicial knowledge as historical facts or so well known that the Court may take judicial notice of them.” 판결문 at 208-210.
[74] 딕슨 J, “It is needless to enter into a discussion of the avowed principles of communism, whether in earlier stages of development or in their present state.”……If it is unnecessary to discuss the principles of communism, it is even less necessary to examine notorious international events.”, 판결문 at 197. 공산주의의 위협과 국방권의 관련성 판단을 위해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사실 확정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대법원은 사실 판단을 내렸다. 전쟁시기가 아니라 평화시기이므로 그러한 공산주의 위협은 국방 문제까지 이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75] 딕슨 대법관, 판결문, at 197.
[76] “The exercise of these powers to protect the community and to preserve the government of the country under the Constitution is a matter of the greatest moment. Their exercise from time to time must necessarily depend on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 as viewed by some authority. The question is — ‘by what authority — by Parliament or by a court?”, 판결문 at 142.
[77] “[It] did not follow that the legislation could be justified since its operation was not conditioned on whether communists and communist bodies did in fact constitute a threat. The legislature may have believed they did, and the preamble could be taken as evidence of that belief. But legislative beliefs were not enough. The incidental and implied powers could be exercised only if their exercise was conditioned on the existence of an actual and judicially examinable threat.”
[78]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08.
[79] “The Constitution was framed in accordance with "many traditional conceptions." 판결문 at 193-4.
[80] “The EU is based: freedom, democracy,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and the rule of law.”, http://europa.eu/scadplus/constitution/objectives_en.htm#PRINCIPLES.
[81] 영국 헌법 (Constitutional Reform Act 2005) 1조에서 “the existing constitutional principle of the rule of law”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법률에서 이 법의 지배 원칙에 대한 개념 정의 조항을 두고 있지 않다.
[82] 빙햄 Bingham, “법의 지배”, 김기창 역, 이음, 2013, 22-23쪽.
[83] “[t]he core of the existing principle [of the rule of law] is that all persons and authorities within the state, whether public or private, should be bound by and entitled to the benefit of laws publicly and prospectively promulgated and publicly administered in the courts.” 다이시가 설명하듯이, ‘법의 지배’ 원칙의 핵심은 ‘절차적 정의’에 있다. 로즈는 이렇게 주장한다: “법의 지배의 핵심은 절차적 정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 관용, 정의 같은 민주 사회의 필수 덕목에 꼭 필요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것이다.” “the core of the rule of law is procedural: it is ‘a necessary, but not sufficient condition of other vital, civic virtues – freedom, tolerance and justice itself’ Laws, J, “The rule of law - form or substance?”, [2007] 4 Justice Journal 24. 학생들의 열띤 토론에 흔히 등장하는 ‘필요조건’인지 ‘충분조건’인지를 상기해 보고 법의 지배 원칙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교실에 책상은 충분 조건이고, 교실은 책상이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므로 교실은 필요조건이다.
[84] 1. The law must be accessible and so far as possible intelligible, clear and predictable, 2. Questions of legal right and liability should ordinarily be resolved by application of the law and not the exercise of discretion, 3. The laws of the land should apply equally to all, save to the extent that objective differences justify differentiation, 4. The law must afford adequate protection of fundamental human rights, 5. Means must be provided for resolving, without prohibitive cost or inordinate delay, bona fide civil disputes which the parties themselves are unable to resolve, 6. Ministers and public officers at all levels must exercise the powers conferred on them reasonably, in good faith, for the purpose for which the powers were conferred and without exceeding the limits of such powers, 7. Adjudicative procedures provided by the state should be fair, 8. The state must comply with its obligations in international law, the law which whether deriving from treaty or international custom and practice governs the conduct of nations. Bingham T, “The rule of law”, (2007) 66 CLJ 67.
[85] ‘사법부의 독립’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도 다이시가 설명했듯이 대륙법국가와 영미판례법국가의 의미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86] 영미법 국가의 정치제도가 내각제 전통이 지배하는 측면에서 “의회 우위 the sovereignty of parliament” 전통이 지배한다고 종종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사실 판례법 국가들은 “사법 심사”의 제도가 확립되어 있으므로 사법부 우위의 국가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87] Dicey,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 of the Constitution”, 1885
[88] (i) that the state possesses no ‘exceptional’ powers (ii) that individual public servants are responsible to (iii) the ordinary courts of the land for their use of statutory powers. 한국은 행정부 소속인 법무부가 관장 변호사 그러나 판례법은 사법부 통치국가다 다이시 표현대로 권력분립이 아니라, 변호사도 officer of the court 법적으로는 당연히 임명도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89] 어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뿐만 아니라 또 어떤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보통법에 따르게 되고 Everyone is subject to the law 또 재판권의 행사는 보통법원에 귀속된다는 것을 뜻한다.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한다 Be you never so high, the law is above you." 미국적 표현으로는 “미국에서는 법이 왕이다 In American, the Law is king.”이라고 말한 토마스 페인이 잘 알려진 있다.
[90] 미국적 표현으로는 “미국에서는 법이 왕이다 In American, the Law is king.”이라고 말한 토마스 페인이 잘 알려진 있다.
[91] Ch IV,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 of the Constitution”, 8th ed. Macmillan, London.
[92] 이러한 다이시 Dicey의 관점은 독일 프랑스의 대륙법국가들에서 전제군주제의 국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크게 유린된 역사적 경험의 측면에서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진실된 의견은 영미판례법 국가들에서 대법원이 구체적 사건의 판결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온 역사를 고려한다면 충분히 입증된다. 반면 자의적이고 전제적인 행정부의 권력이 강화된 유럽 국가들의 역사를 보면 사법부의 독립 전통이 강하게 확립되지 못했고, 따라서 일반법원이 구체적인 사건에서의 판결을 통하여 기본적인 법원칙들을 하나 하나씩 쌓아 올려 갈 수가 없었다. 대신 나폴레옹 통일 법전,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 헌법 제정 등의 법역사가 말해주듯이 헌법을 제정하고 여기에서 일반적인 법원칙을 확립해내려고 시도했다.
[93] “It was a truly epochal.” “Reputation as a fearless defender of liberty under law was never higher.”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27*.
[94] 사법 심사를 배제하는 특별법 규정을 “ouster clause” 또는 “privative clause”이라고 부른다.
[95]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 헌법 원칙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해는 미국의 마버리 사건 Marbury v Madison을 참고하라.
[96] 딕슨 대법관 판결문 at 187-188. “History and not only ancient history, shows that in countries where democratic institutions have been unconstitutionally superseded, it has been done not seldom by those holding the executive power. Forms of government may need protection from dangers likely to arise from within the institutions to be protected. In point of constitutional theory the power to legislate for the protection of an existing form of government ought not to be based on a conception, if otherwise adequate, adequate only to assist those holding power to resist or suppress obstruction or opposition or attempts to displace them or the form of government they defend.”
[97] Speech at the Virginia Convention to ratify the Federal Constitution, 1788년 6월6일.
[98] “Attainder” 영미 판례법에서의 법률용어로써 “국민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을 뜻한다.” 판례법 국가들에서는 일찍이 사법부의 판결 없이는 누구도 기본권을 박탈할 수 없다는 원칙 즉 죄형법정주의가 정착되어 왔다. 미국 헌법 (Art I, s9, cl3)에서도 규정하고 있다. “No Bill of Attainder or ex post facto Law shall be passed.” 사법절차 없이 특정한 사람을 처벌하는 법률이나 소급입법의 제정은 입법부에 의한 사법권 행사로 삼권분리원칙에 위배되고 또 법의 지배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위헌이다. 한국에서는 1972년 유신헌법이 만들어지고 전제적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공포되었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ㆍ발의ㆍ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유언비어를 날조ㆍ유포하는 행위 등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비상군법회의 등에서 재판해 처벌하도록 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긴급조치들은 권력분립의 원칙과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 Bill of Attainder에 해당한다.
[99] Nullum crimen sine lege (no crime without law).
[100]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32.
[101] The Communist Party is the name of a world-wide movement which is organized as a political party in many countries and is the major and dominant party in the Union of Socialist Soviet Republics;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like the communist parties in other countries, is a political party formed in accordance with Lenin's conception of a world-wide political movement which would strive to establish a proletarian dictatorship and to impose Marxism everywhere; and by reason of these circumstances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manifests strong sympathy with the foreign and domestic policy of the government of the Union of Socialist Soviet Republics. It follows that if war occurred in which that State was the enemy or there was imminent danger of such a war, the Commonwealth could take preventive measures against communists and communist bodies just as it could against alien enemies resident in this country. But I cannot agree with the view that at the time this Act was passed there was a situation which provided a constitutional foundation for this Act. (at 209).
[102] 미국의 판례 Korematsu v United States 323 U.S. 214 (1944)를 참조하라.
[103] Douglas, R. Cold War Justice? Judicial Responses to Communists and Communism, 1945-1955, (2007) 29(1) Sydney Law Review 43;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SydLRev/2007/2.html.
[104] Communist Party case (1951) 83 CLR 1 at 169.
[105] Douglas, R. Cold War Justice? Judicial Responses to Communists and Communism, 1945-1955, (2007) 29(1) Sydney Law Review 43;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SydLRev/2007/2.html.
[106]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the implied constitutional freedom of political communication가 헌법상 기본권으로 확인되기까지에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Nationwide News Pty Ltd v Wills (1992) 177 CLR 1; Australian Capital Television Pty Ltd v Commonwealth (1992) 177 CLR 106; Lange v Australian Broadcasting Corporation (1997) 189 CLR 520.
[107]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헌법재판소는 공산당 해산의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과 비교하라.
[108] 한국에서는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전제적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공포되었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ㆍ발의ㆍ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유언비어를 날조ㆍ유포하는 행위 등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비상군법회의 등에서 재판해 처벌하도록 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긴급조치에 대해서 대법원이 위헌무효로 판결한 때는 사후적인 2010년 12월 16일이다.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 판결 2010도5986). 판례법국가와 다른 정치 법제도와 법문화를 감안하더라도 호주 대법원이 1950년 당시 매카시즘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를 다루는 법률에 대해 위헌무효임을 선언했던 사건은 그 의미가 실로 대단한 것에 해당된다는 여겨진다. 한국의 긴급조치는 근거 법률도 없이 이루어진 초법적인 조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전면 금지하거나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대법원은 위헌무효를 사건 당시에서가 아니라 40여 년이 지난 2010년 이후에야 사후적으로 위헌 무효를 선언했을 뿐이다. 위헌무효의 선언 시점이 사건 당시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거슬려 이루어졌다는 점은 차이가 크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대법원이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최후 보루의 역할을 담당해 온 판례법 국가들에서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사법부 통치 국가라고 이해된다. 판례법 국가의 법의 지배 전통은 행정부 독단이 종종 일어나는 전체주의 국가 체제하고는 크게 다른 점이라고 이해된다.
[109] Fullagar J, there was nothing preventing the States from banning the CPA in their own jurisdiction.
[110] 호주 헌법 51조 (의회의 입법권) “의회는 본 헌법에 의거하여 연방의 평화, 질서 및 선량한 통치를 위해 다음 사항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다. (1). 타국과의 또는 주 상호간의 통상…….. (39). 본 헌법에 의해 의회, 의회의 원, 연방정부, 연방법원, 연방의 부처 또는 공무원에게 귀속된 권한의 행사에 부수되는 사안…..”
[111] 미국의 본드 의원 Bond v. Flyd 385 U.S. 116 (1966) 사건에서 미국연방대법원은 조지아주 의회가 의원에 관한 법률 제정권한은 가지고 있으므로 의원 자격 심사에 관한 기준을 둘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할 수는 있다고 해도 의원의 기본권 제약을 일반 국민들이 누리는 기본권 수준보다 더 열악한 수준으로 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112] 호주연방헌법 128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개정의 절차적 요건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헌법 개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상하원에서 절대 과반수로 통과되고, 또는 상하원 중 각자 재통과되고, (2) 국민투표에서 전체 국민의 과반수로 통과되고, 또 과반수의 주에서 주민의 과반수를 얻은 경우-이를 “이중 다수결 double majority” 제도라 부른다-헌법 개정안이 성공적으로 통과된다. 호주는 연방국가이고 각주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연방 전체에서 투표총수 중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또 동시에 과반수의 주(즉 기본 6개주 중 4개주 이상)에서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보다 엄격한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호주 연방의 각 주는 절대 인구수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데 만약 연방 전체 국민의 과반수만 획득하면 국민투표가 통과되게 하면 인구수가 적은 주의 의사는 보호받기 어렵기 때문에 인구수가 적은 주의 의견을 보호하기 위해서 과반수의 주에서 찬성해야 된다는 이중다수결의 요건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국민투표의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국민투표법(절차규정) Referendum (Machinery Provisions)Act 1984 (Cth)’을 참조하라. http://www.comlaw.gov.au/Details/C2013C00200.
[113] “Do you approve of the proposed law for the alteration of the Constitution entitled “Constitution Alteration (Powers to deal with Communists and Communism) 1951"?”
[114] Douglas, R. Cold War Justice? Judicial Responses to Communists and Communism, 1945-1955, (2007) 29(1) Sydney Law Review 43, at 51, 54.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SydLRev/2007/2.html
[115]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에서 스위스에 기반을 둔 국민투표제도가 도입된 주된 이유는 정당 정치의 당파성과 정치적 부패 문제 때문이었다. 다이시는 국민투표의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민투표는 현재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는 의회다수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통제장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국민투표는 정당 정부가 노정시켜온 결함을 상당부분 치유해 줄 수 있는 제도이다. 국민투표의 장점으로 국민의 거부권은 그 자체가 민주적 제도인 동시에 그 소극적 성격 때문에 보수적 제도로 기능한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며 유권자와 다수가 유지하기를 원하는 법이나 제도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115]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국민투표 referendum’는 스위스에서 시작된 제도로 ‘국민의 거부권 the people’s veto”이라고 흔히 설명되는데 이는 국민투표가 유권자의 승인을 얻지 못한 중요한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 주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의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결과는 크게 대조된다. 한편 호주의 사례는 1952년 공산당 해산 국민투표에서 보여준 결과가 말해주는 것과 같이 다이시가 예견했던 대로 정당 제도가 가진 취약점을 치유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116] 1901년 1월 1일 발효된 호주연방헌법의 11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44번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헌법 개정의 국민투표가 성공한 경우는 단 8차례밖에 지나지 않는다.
[117]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Bill would have fared very differently in the Commonwealth Parliament and the Caucus rooms if there had not been in the background a High Court which, over a period of nearly half a century, had shown itself a vigilant defender of civil liberties.” at 177
[118] 국민투표 부결을 주도하여 승리한 야당 당수 에바트 (1894-1965년) 의원의 회견문 중, “The consequences of a mistaken vote in an election verdict can be retrieved. But an error of judgement in this constitutional alteration would tend to destroy the whole democratic fabric of justice and liberty.”
[119] 빙햄 대법관 법의 지배 개념 정의 참조. “To what extent is it consistent with the proper function of a court interpreting the Constitution to go beyond their essential, and generally agreed content, as a guide to the meaning of that text? This is a perennial problem, which may have significance in relation to the powers of the Parliament concerning judicial review of administrative action. The rule of law is not enforced by an army. It depends upon public confidence in lawfully constituted authority. The judiciary claims the ultimate capacity to decide what the law is. Public confidence demands that the rule of law be respected, above all, by the judiciary.” Gleeson 대법원장, 법원과 법의 지배 원칙, http://www.hcourt.gov.au/assets/publications/speeches/former-justices/gleesoncj/cj_ruleoflaw.htm.
[120] 사법부가 정치의 위력 앞에 굴복해 온 유럽 대륙법 국가들과는 비교된다.
[121] “Reputation as a fearless defender of liberty under law was never higher.”
[122] 1951년 6월 실시된 갤럽 여론 조사에서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찬성 여론은 80%에 달했다. Douglas, R., "A Smallish Blow for Liberty? The Significance of the Communist Party Case", (2001) 27(2) Monash University Law Review 253, at 253.
[123]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35.
[124] 이하 부분 번역은 “헌법학입문 (다이시 저)”을 잘 번역한 경새원의 “헌법학 입문” 한국어판 (안경환·김종철 옮김)을 전제한 것이다, 경세원에서 새로이 한문을 추가하여 새로운 번역판이 출간된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125] “자유권이라 함은 법이 허용하는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이다. 만약 어떤 시민이 법이 금하는 그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자유권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권한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헌법의 직접적인 목적으로 정치적 자유권을 상정하고 있는 국가가 하나 있다.” 바로 그 나라가 영국이다.
[126] “볼테르가 이웃 나라에 은신처를 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상황이 자의권이라곤 발 붙일 수 없는 제도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이상은 자유로움 그 자체이며 결코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좀더 너그러운 분위기를 숨쉬게 되고, 아무도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인신구속영장(1550-1790년 프랑스에서 행정부 발행)도 이유없는 구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민들 사이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127] 삼부회의 소집 이후에도 국왕이 인신구속영장에 의해 행사되던 권한을 전부 포기하기를 명시적으로 거부하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28] 프랑스의 노예상태를 바라보는 영국인의 정서에 대해서는 을 참조. 왕족과 피붙이라는 이유만으로 살인할 수 있는 권한까지 보유했었던 프랑스 귀족들의 무가벌성과 페레스 경의 상황에 대하여는 토크빌 글 참조 이런 취지의 법의 지배의 이상은 국왕이나 그 공복들이 어떠한 사면권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거나 최소한 이와 긴밀한 관련성은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130] 밀, 대의제 정부론, p4.
[131] Does parliamentary sovereignty still reign supreme?
If parliament is sovereign,
[133] 미국 인권선언과 마찬가지로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이 외국의 헌법학자들에게 알려진 대로 권리의 선언 특히 그 유명한 1789년의 세계인권선언과 유사한 일반원칙의 공표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인권선언과 여타 나라들의 권리선언은 내용에 있어서 서로 유사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본에 있어서는 유사성보다 대조성이 더 두드러짐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권리장전과 권리청원은 외국에서 사용되는 의미에서의 “권리의 선언”이라기 보다는 국왕을 상대로 하는 소송에서 국왕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임을 선언하는 국왕에 대한 사법적 선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유명한 두 가지 문서 속에 들어 있는 각 조항들(거의 모든 조항)이 국왕의 대권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효력이 발생한 특정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 헌법에 포함된 권리선언도 대륙국가들의 권리선언과 실제로 많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 헌법은 18세기적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헌법조문들로 입법부의 행위를 합법적으로 통제하려는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된다.
[134] 오늘날 영국에서 법 앞의 평등 원칙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폴록 경은 “의회는 1906년 노동조합 분쟁 처리법 Trade Disputes Act (the Act declared that unions could not be sued for damages incurred during a strike.)을 통해서 사용자 단체와 노동자 단체, 나아가 일정 범위 내에서 그들을 대리하는 자에게까지 특별한 면책권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법학은 정치계의 이 폭력적이고 몰지각한 활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우리는 단지 법원이 법적 정의의 원칙에 입각한 해결에 힘쓰고 있는 (어느 정도 성공한 합리적인 조치가 있기는 있었다) 문제들에 대하여 해외관할권을 통한 보다 심도 깊은 사법적 조치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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