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합디다.
“Happiness does not lie in whether or not you have problems but in the way you handle them.”
항상 낙관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둠을 보지 말고 밝은 태양을 쳐다 보아야 합니다.
“Don't trust the clouds-trust the sunshine.
Don't set your compass by the flash of lightning-set it by the stars.
Trust the sun-don't trust the shadows.
Believe in your dreams-don't believe in your despairing thoughts.”
-로버트 슐러 목사 [Tough Times Never Last But Tough People Do!]-
하나님께서는 저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기 관점에서만 보고자 할 따름이지요.
만약 좋은 일을 하고자 하면
남들은 내가 내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무슨 목적이 있어서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가짜 친구와 진짜 적을 이겨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은 상처 받기 쉬운 세상입니다.
오늘 착한 선한 일을 한 것이 내일이면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원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머리 속 좁은 소인배에 의해서 암살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2등을 좋아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은 잘났다고 여기는 1등을 추종합니다.
지금까지 일 평생 가꿔온 재산이 하루 아침에 날라 갈 수도 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저 멀리 가야 합니다.
들려오는 저 세상 소리들을 무시하게 하옵소서!
고난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고
이제 떠날 때임을 느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절망하고 마침내 포기하게 될 때
창문을 닫고 방문을 닫고 침대 앞에 끊어 앉으십시오.
세상에 상처 받고 이제 고통으로 점철되어 번개가 바로 칠 것 같지요?
하지만 번개는 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괴로운 것이라는 남들의 충고 같은 말을 물리 치십시오.
왜 힘들게 산에 오르냐고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이제는 그런 반복적인 충고의 세상 말 들이 맞다고 느껴 오기도 할 것입니다.
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저 않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저 깊은 가슴 속에서 나오는 저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어 보세요.
여러분 자신을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고 벌떡 일어 나 보십시오.
당신은 저 산도 옮길 수 있고 저 평야를 나를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어떤 일도 해 낼 수 있습니다.
의심하고 유혹하는 저 세상 소리들을 무시하십시오.
그런 것들을 돌같이 던져 버리고 이제 자신을 믿으십시오.
당신은 죄수가 아닙니다.
당신은 다시 싸울 수 있습니다.
챔피언이 될 수 있습니다.
록키처럼 다시 일어나 우승할 수 있습니다.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남은 의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항상 앞만 바라 보고 당신의 앞 길만 주시하고 걸어 가십시오.
당신이 지금까지 배우고 읽힌 그것으로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빅토르 프랭클의 “인간의 의미에 대한 탐구 (Man's Search for Meaning)”
모두가 죽어 가는 절망의 수용소에서도 미래에 대한 신념으로 살아 난, 그래서 그의 실존 심리치료 의미치료 이론을 직접 검증한 빅토르 프랭클입니다. 자기 부모와 아내 형제들은 수용소에서 다 죽고 그 가운데 오로지 여동생 하나와 자기 혼자만 살아 났다고 하는군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한계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그 혹독한 한계 상황을 이겨 낸 인간 프랭클이 우리 같은 개인도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우리 인간은 자기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우리는 살아 나야 하고 행복은 따라 온다고 합니다.
단테가 지옥의 문으로 들어 갈 때 그 입구에 쓰여 있는 말 여기 들어 올 때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하는 말을 하였지요.
희망이 없으면 우린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린 살아 나야 하고 그럴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을 받아 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잇다는 말 그리고 고통과 죽음의 극한 적인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지식체계를 믿고 싶습니다.
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피난 갈 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비자를 자기 스스로 포기하고 빈에 남은 결과 나치 수용소로 끌려 갔습니다. 만약 그가 미국 비자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위험에 직면하기를 거부 했다면 그가 오늘 날 만큼 명예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극한 상황도 우리 하기에 따라서 극복되고 삶의 행복을 가져 올 것으로 믿습니다.
"의미치료에서 추론한 인간 본성 이론은, 의지의 자유 freedom of will,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 삶의 의미meaning of life의 세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
프랭클은 외부 조건에 의해 삶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에 대응할 반응은 우리가 자유롭게 취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외부 세력에 의해 당하기도 하고 또는 환경이 변화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다. 다만 그 힘을 다룰 입장을 정하는 것 그것도 우리의 자유에 속한다. 환경과 운명의 이중주 위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고 거기에 서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 또한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근원적인 자유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는 개인적인 책임이 따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기 때문에 부모도 배우자도 국가도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나의 삶의 의미와 목표를 대신하거나 채워 줄 수 없다.
프랭클처럼 극한 상황에서 고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삶이란 매일의 투쟁의 연속이고 끊임없는 도전인데 매 순간 나의 반응에 따라 축적된다.
사람은 희망을 찾아야 살 수 있다.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미래가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노력하기를 포기해 버릴 때 곧 얼마 못 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미래에의 믿음이 없으면 삶의 무게를 지탱해내지 못할 것이다. 다리가 성하지 못하면 일어설 수 없는데 굳게 먹은 마음의 강대함이 육신이 썩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걷지 못하면 죽는 수 밖에 없다. 눈이 멀게 된 외디푸스 왕이 걷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다.
프랭클은 나치 정권에 의해서 600만의 유태인이 비극적으로 죽어갈 때 부모형제 아내까지 모든 가족이 희생되는 처절한 아픔을 겪었다. 부모형제의 죽음을 목도할 때의 아픔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은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혼자 살아 남았다.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그가 스스로 밝힌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저항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문턱에서조차도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굳건히 한 결과이라는 것. 바로 그런 신념이 그를 죽음의 고통까지를 극복해 내게 했다는 말이다.
프랭클의 유명한 책 “인간의 의미에 대한 탐구 Man's Search for Meaning”를 여러 번 읽었다.
나치 포로 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모든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보석이나 옷가지는 물론이고 돈이 되지 않는 노트 등 가진 모든 것은 압수해 갔다. 의사이고 연구자인 프랭클은 그가 첫 저서로 출간할 초고를 지니고 있었는데 결사적으로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서 연구한 지적 창작물을 어느 누가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프랭클은 연구자의 본능으로 그것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의 답변만 나올 뿐이었다.
프랭클은 그 순간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원고 뭉치는 영혼의 분신이었는데 이것을 잃어버리는 비극 앞에서 삶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프랭클은 말하길 고통이나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삶을 긍정하라는 명령을 느꼈다고 한다. 프랭클은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가 오로지 원고가 출판되느냐 못되느냐에 달려 있다면 진정 그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살아 남으면 보다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장문의 연구 결과물보다 하나님의 명령문을 발견한 것 같은 작은 쪽지의 글귀 하나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프랭클과 같이 우리는 죽음의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영혼일 것이다. 영혼의 자유를 행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우리가 왜 사는지 그 소명을 깨닫는 것에서 나온다. 프랭클은 말한다.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고통 그 자체가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다. 프랭클과 같이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겪는 순간에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유의 의지를 선택할 때 우리는 다시 살아 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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