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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철+북 리딩/번역 이론

개인의 악덕v 공공의 이익-"꿀벌의 우화"

by 추홍희블로그 2011. 4. 20.

 

기독교에서는 개인의 "욕심"은 "악덕(vice)"이고, "절제"를 "미덕(virtue)"이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지금도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일어나면서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반발하여 인간의 현실적인 면에 주목하여야 국가가 부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들이 나타났다.  개인의 욕심은 악덕이지만 이러한 개인의 악덕도 사회전체적으로 보면 이익이 된다는 논리적 주장을 일찌기 펼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버나드 맨더빌(네덜란드 출신 영국 의사 1670년생 1733년 사망)이었다.


맨더빌은 1705년 “꿀벌의 우화”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는 책 제목 그대로, “꿀 벌의 우화: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 / 투덜대는 벌떼집: 정직해진 사기꾼들”, 개인으로써는 악덕이지만 공공 즉 사회전체에게는 이익이 되는 미덕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맨더빌은 "꿀벌의 우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배고픔이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게 하는 것처럼 국가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악덕이 필요하다.  미덕만으로는 한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 수 없다.” 

 

맨더빌의 주장을 다시 정리하면,  국가와 사회의 융성은 개인 각자의 악덕에 바탕을 둔다; 인간은 탐욕에서 일하고 자기 이익을위하여 남에게 잘한다; 이런 개인의 악덕이 사회 전체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회사의 한 부품으로서 각자 맡은 바 분야대로 잘 살아간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가 강제로 법으로 정직을 강제할 필요가 없다.  

 

7거지악 등 우리가 잘알고 있는 말대로, 무엇이 악덕(vice)이고 무엇이 미덕(virtues)인지는  다음 그림을 참조하고 상기해 보시라.

그림  보기.==>

 

 

 

아담 스미스와 꿀벌의 우화


맨더빌은 아담 스미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담 스미스는 맨버빌의 "꿀벌의 우화"에서  분업의 의미와 개인의 욕심이 사회적으로는 이익을 된다는 자본주의의 기초개념을 발전시켰다.  

스미스의 유명한 표현인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 동기 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기초개념이다.  스미스는 맨더빌의 주장과 같이, 부유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동기를 빠지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동기는 필요없도 결과만을 보면 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무슨 미덕이고 어떻게 악덕이 어떻고는 따질 필요가 없고, 단지  그 결과를 측정할 수면 된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유명한 말,“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 만드는 사람의 자비로움 때문이 아니라 제빵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그의 정성 때문이다."

   

울 마눌의 표현대로, "장사꾼에게 무슨 도덕을 따질 수가 있느냐!"라는 말과 같다.  장사꾼들은 모두다 자기자신의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동기는 누구나 다 똑같은데 개인적으로 탐욕이 지나치다든가, 왜 돈 벌려고 하느냐 그런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본 것이다. 

 

당시까지 교회에서는  개인 욕심은 나쁘다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런 주장은 인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개인이 일할 수 있게끔 모든 제약을 풀어주면 저절로 부유해 질수 있다고 스미스는 생각한 것이다. 그런  관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큰 부를 축적할 수 있고, 어떻게 그 부를 측정할 수 있느냐로 관심의 포인트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부의 근원과 측정 개념이 바로 "국부론"의 핵심이고 이것이 바로 근대경제학의 시작을 열어준 역작이었다. 

 

케인즈와 꿀벌의 우화

 

반면, 스미스의 경제 개념을 크게 비판한 케인즈도 마찬가지로 맨더빌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케인즈는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를 그의 대표작인 “일반 이론”에서 언급하고 있다.  케인즈는 벌꿀의 우화는 현실적인 인간형이 잘 그려내고 있는 철학인데 그런 내용의 책이 공공의 악으로써 당시 법률로 처벌받은 것은 잘못이라고  보왔다.   케인즈의  “절약의 모순”도 바로 맨더빌의 우화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과 같다.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

똑같은 책을 보고서, 아담 스미스와 케인즈 두 사람 다 맨더빌의 표현과 같이, “  이리하여 모든 구석이 다 악으로 가득한데 그래도 전체를 보면 낙원이었다”,  “구성의 오류”를 발견한 것이었다.

 

개인으로서는 악덕일지 모르지만 그런 악덕이 사회전체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수레바퀴와 같이 미덕이라는 것이다.
 

맨더빌의 한 권의 저작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의 3거장중 두명의 그것도 정반대인 경제학 개념을 도출한 것은 고전의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맨더빌은 당시에 국가와 동렬이었던 당시 교회의 현실 유리적 자세가 국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水之淸者常無漁

 

맨더빌의 도덕론에 대한 주장을 우리 선인들로 말로 바꿔 말하면 바로  “水之淸者常無漁”이다.  즉 물이 너무 맑으면 오히려 고기가 살지 못한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듯이  사람이 도덕적으로 너무 결백하면 오히려 결점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地之穢者多生物
水之淸者常無漁
故君子當存含垢納汚之量
不可持好潔獨行之操”

 

이 "채근담"에 들어있는 격언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땅의 더러운 곳에는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지만
물이 맑은 곳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는 때 묻고 더러운 것도 용납할 수 있는 넓은 도량을 지녀야 하고,
깨끗함을 쫓고  혼자 고고한척하는 지조를 버려야 한다.


이 “수지청자무상어라”는 격언은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니 동양에서 훨씬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지혜라고 여긴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오랑캐의 침입을 받고 항복을 하고 말았는데

 

그 당시 선비의 자살을 하나 인용해 본다.

 

“장강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백생은 도륙을 당했다.  저 남한산성마저 아침 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함으로써 천지 사이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 아! 내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여 고향에서 숨어살고 나오지 말아라.”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374p,


그러나 망국의 울분을 이렇게 자살로 표현한다고 해서  온나라 백성이 다들 같이 들고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은 역사가 잘 말해준다. 


 

현실적 인간

현실적인 인간은 이기적이다.  자기 욕심에 사는 것이다.   남에게 지나치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바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의 결론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기치는 것이며 또 그러한 사기치는 본성이 국가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비현실적인 인간관을 가르치고 배운다.  이게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맨더빌의 주장을 일찌기  정규교육과정을 통해서 배웠다라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도를 훨씬 크게 높혔을 것이다.  그만큼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맨더빌의 표현대로, 사람들은 직업여하를 불문하고 모두가 속이게 마련이다.  “곳간에 인심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맨더빌은 풍자시 “뀰벌의 우화”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어떤 직업이든 어느 곳이든 사람들은 모두다 속이기 마련이고, 속임수 없는 직업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배고파야 음식을 먹게 되듯이  고상한 도덕만으로는 나라가 부유해 질 수 없다”.

 

 

 

지금은 아담 스미스가 살던 당시 18세기하고는 달리 교회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고 따라서 어느 누구도 개인의 욕심을 악덕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개인의 욕심을 비난하는 공산주의국가들이 모두 망한 지 이미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오래되었다 (북한은  이념만 사회주의국가일 뿐 그  겉과 속은 다른 나라이다).  


문제는 개인의 이기심이 극단적으로 제어될수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인간은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동물이 본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로빈슨 크루소같이 외딴 섬 절연고도에서 홀로 선독단자로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사회적 관계에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면 결국 맨더빌이 주장한 것과 같이,  훌륭한 정치가가 필요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관계로서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찰즈 다원의 진화론이 설파하는 것과 같이 자연도태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국가사회적으로 도덕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윈의 자연도태설


다원은 인간은 민족적 단위로 살아가기에 도덕성이 우수한 민족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다윈이 말하기로, 성도덕이 타락한 여자는 애를 낳지 못하고, 타락한 남자는 결혼은 못한다.  이렇게 헤픈 인간들은 병에 걸려들기 때문이다.  다원의 견해가 일리가 있기 때문에, 옛날 우리나라 왕들이 빨리 죽는 이유도 성도덕이 문란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여긴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 도덕성의 타락은  개인 혼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원이 말한 것처럼 도덕성이 떨어지는 민족은 도덕성이 보다 우수한 민족에게 잡혀먹혀 멸망하게 만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있기 때문에 우수한 정치가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왜 집단적으로 볼 때 도덕성이 우수한 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원의 주장을 직접 다시 읽어보자.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높은 도덕성 수준이 같은 부족내에서 한 개인이나 자손에게는 비교우위가 거의 무의미하지만, 높은 도덕성 수준을 고양하고  부유한 사람이 증가한 부족집단이 그렇지 못한 다른 부족집단에게 비교우위를 점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높은 애국심, 충성심 ,용기, 동점심을 갖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도울 자세가 되어 있고 또 공공의 선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부족은  그렇지 못한 다른 부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로 자연선택(도태)설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부족들간에는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을 대체해나가는 과정이 진행되므로 이과정에서  도덕성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며 이에 높은 도덕성 수준과 부유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점차 늘어날 것이다.”

 

- 다윈,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

 

 

이와 같은 다원의 주장을 현대적으로 보다 쉼게 설명하고 있는  최근의 진화경제학이나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다음의 스캔 글을 읽어보시라. 
 

 

 

 

또한
“유한계급론”을 쓴  경제학자 베블렌은 말했다.  “본래의 노동자계급 사이에 있었던 위례적 규범의 쇠퇴, 바꿔 말해서 생활의 세속화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모든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문명의 말기적 증상의 하나이다.”

 


우리는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이 크게 당한 것은 잘 알고 있다.  미국은 서로 서로가 다들 속이기 됨으로써 절박한 금융위기를 맞게 된 것이었다.  미국이 크게 망한 이유도, 일본이 망한 이유도 바로 사람들 모두가 속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속이면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가 되었을 텐데, 너도나도 모두가 사기치고,, 또 그 사기를 치는 사람들을  통제를 하지 못하게 되는 지경으로 이르게 되니까 나라 전체가 망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 약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 등 개발도상국들이 더 잘살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다원의 자연선택(도태)설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맨더빌의 표현대로, 형평성과 공평성을 잃지 않도록 저울을 들고 있는 손이어야 한다.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 세익스피어의 "맥베드" 표현 참조==>

 

 

예전에는 시골촌장만 해도, 이들은 자기 절제를 할 줄 알았다.  식솔을 많이 거스린 양반들이 자기 절제를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공평심을 평가할 국가기관 자체가 모두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게 문제다.  미국을 번영캐 한 학교와 군대가 타락한 것이 그 증거이다. 

 

10% 썩은 사과 

 

예전부터, “ ‘썩은 사과”는 10%에 불과하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지배하였다.  맨더빌의 시도 풍자시이니까 사회전체적으로 모두가 다 섞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80:20 사회에서 사회적 균형을 달성할 수도 있다.  즉 “나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꼭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는 10%을 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전체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거꾸로 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맨더빌 표현처럼, 의사나 변호사나, 법관이나, 군인이나, 정치가나, 모두가 다 투기꾼하고 사기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비유가 조금 이상하지만, “벌레 먹은 사과”를 브랜드 로고로 쓰고 있는 “애플”사가 세계 최고 IT회사로 등장하는 것에서 보다시피,

 

“벌레 먹은 썩은  사과”(비유법으로써)가 10%가 아니라 오히려 90%가 되어버린 전도된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게 문제의 본질이다.


사람들이 모두 다 정직해야 나라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대법원 판사도 벌레 먹은 사과처럼 썩은 대법원판사가 있다.  바로 “신영철”대법원 판사다 아직도 떵떵거리면 대법원 법정에 나올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맨더빌 표현처럼 누구나 다 속인다.  속인다고 헤서 큰 문제도 아니다. 

 

사람은 다 속인다. 사람이 살면서 안 속이는 사람 누가 있는가?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이게 본성이다.  “노처녀가 시집가기 싫다”, 늙은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ㅋ”, “장사가 밑지고 판다”는 말 다거짓말이다.  “전쟁과 사랑에서는 무슨 수단이든지 다 정당화된다”.  이런 전쟁과 남녀간 사랑의 문제에서 안 속이는 사람, 어느 누가 있겠는가? 

 

남자는 여자에게 다 넘어가고 만다는 그리스 신화 설명. 글 스캔 하니 읽어보시라.  >

 

나폴레옹에게는 제국의 황제를 움직이는 나폴레옹의 애인인 조세핀이 있었고, 이명박대통령을 움직이는 실세는 잠의 여자인 김윤옥이다.  모든 여성에게는 허영심이 있게 마련인데 이 허영심은 결코 채울 수가 없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여자들은 비옥함과 동시에 탐욕을 가진 존재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 사람은  김윤옥이고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김윤옥에게 속박받는 존재라는 것.

 

“뱀장수 믿지 말라”고 하는데 사람들 모두 그런 거짓말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정력에 좋다면 뱀술에도 환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분별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견해에 따르면 광고가 안 먹혀든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들은 광고에 다들 먹혀들어간다.  “광고는 허가낸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광고에 큰 영향을 받는 존제이다. 

 

광고에 관한 글 스캔 하니 읽어보시라.

 

암스트롱과 토틀러 공저 <마아켓팅 입문>은 소비자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보며, 대학생들이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배운 경제학의 모든 가정들을 무시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3人成虎

 

사람 3명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  [삼인성호]의 고사성어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관계성 동물이다. 남의 말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

맨더빌의 “벌꿀의 우화”는 변호사 의사 성직자 군인 세리 행정가 정치가 사업가 장사꾼 일반백성 등 모든 직업과 사람들을 망라해서 이들의 "부정직"을 적나라하게 풍자하고 있는 시다.

 

맨더빌의 시는 자연상태의 사람의 본성을 가두지 말고, 국가의 간섭 없이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국가가 융성한다는 동양의 노자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을 노래한 것이다.  꿀벌들이 각자 대로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에서 아담 스미스의 분업의 가치를 발견한 노래이다. 인간이 회사 조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칭송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 마디로 국가가 개인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다.  교회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정직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욕심이 있으며 누구나 속이는 세상인데 이는 자연 상태와 같다.  사람의 본성을 억누르고 정직하게 만들면 사회가 융성되지 못한다.  인간사회는 시장처럼 사기꾼도 있어야 하고 개인으로서는 악덕도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나라를 융성하게 만드는 기초가 된다. 

 

 

FABLE OF THE BEES: OR, PRIVATE VICES, PUBLICK BENEFITS

THE GRUMBLING HIVE: OR, KNAVES TURN'D HONEST

꿀 벌의 우화: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 / 투덜대는 벌떼집: 정직해진 사기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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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yers, of whose Art the Basis
Was raising Feuds and splitting Cases, [60]
Opposed all Registers, that Cheats
Might make more Work with dipt Estates;
As were't unlawful, that one's own,
Without a Law-Suit, should be known.
They kept off Hearings wilfully, [65]
To finger the retaining Fee;
And to defend a wicked Cause,
Examin'd and survey'd the Laws;
As Burglars Shops and Houses do;
To find out where they'd best break through. [70]

 

변호사들은 그 재주의 밑바탕이
싸움을 붙이고 소송건을 쪼개서 늘리는 것이어서
기록된 문서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 우기며
훔친 부동산에 속임수를 보탠다.
이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니
이것은 재판소송을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니라.
변호사들은 고의로 재판을 연기하고
수임료를 부르고 챙기며
무고한 소송을 방어한다 싶고
법률을 따지고 조사하는데
이는 마치 도둑이 가게와 집을 살피며
어디로 뚫고 들어가야 좋은지를 알아내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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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RAL


THEN leave Complaints: Fools only strive
To make a Great an honest Hive. [410]
T'enjoy the World's Conveniencies,
Be famed in War, yet live in Ease
Without great Vices, is a vain
Eutopia seated in the Brain.
Fraud, Luxury, and Pride must live; [415]
We [illeg.] we the Benefits receive.
Hunger's a dreadful Plague no doubt,
Yet who digests or thrives without?
Do we not owe the Growth of Wine
To the dry, crooked, shabby Vine? [420]
Which, whist its [illeg.] neglected flood,
Choak'd other Plants, and ran to Wood;
But blest us with his Noble Fruit;
As soon as it was tied, and cut:
So Vice is beneficial found, [425]
When it's by Justice [illeg.], and bound;
Nay, where the People would be great,
As necessary to the State,
At Hunger is to make 'em eat.
Bare Vertue can't make Nations live [430]
In Splendour; they, that would revive
A Golden Age, must be as free,
For Acorns, as for Honesty.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배울 점]
  

그러니 불평을 말아라.

 

바보들은 오로지
위대한 벌떼를 정직하게 만든다고 애를 쓴다.

세상의 편리함을 누리며
전쟁에서 이름을 떨치면서도 편안하게 사는 것이
큰 악덕들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은
머릿속에나 들어 있는 헛된 꿈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사기와 사치와 오만은
살아나야 한다.

 

이익을 받는 것은 바로 우리자신들이다.

배고픔은 끔찍한 재앙임에 틀림없지만
배고픔이 없다면 누가 밥을 먹을 것이며 또 살아가겠는가.

 

우리가 포도주를 얻는 것은
초라하고 말라 휘어진 포도나무덩쿨 때문 아닌가?.

포도나무덩쿨은 물가를 멀리하고
다른 나무를 목 조르며 숲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귀한 열매로 축복을 주는데
이는 바로 포도나무덩쿨이 묶이고 잘리고 나서이다.

 

마찬가지로 악덕도 이롭게 되는 것이
정의로 베어내고 동여맬 때인가.

 

아니다,

 

사람들이 위대해지는 것이
나라에도 필요한 것인데
사람은 배고파야 음식을 먹게 되듯이
순진한 미덕만으로는 나라를 잘살게 만들 수 없다.

 

황금시대를 되살리려면
사람이 자유로워야 하나니

 

도토리나 정직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