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저서--------/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들어가기 서문

by 추홍희블로그 2022. 5. 24.

들어가기

 

서문

 

왜 한국의 학자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해 내지 못하는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지적 토대 그 기반 자체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학계 내부에선 아직까지도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Why? 왜 그럴까? 대체로 학자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속도가 느리다. Why? 오래 전에 정립된 자기 자신들의 이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기존의 이론과 모델과 시각으로는 현실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일어난다고 해도 자기들의 이론/모델/시각을 수정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왜 그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가? 그 이유는 학자들이 적용하고 있는 이론과 모델은 도구(tools)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도반공 목수들이 쓰는 콤파스나 잣대처럼 자신들이 쓰는데 평생 익숙해진 도구와 연장을 결코 버릴 수가 없다. 또 학계의 학자란 교실에서 배우는 학생들에게 교편만 잡는 일을 하다 보면 실제로 연구나 최신의 동향이나 실제 세상 돌아가는 실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크다. 그러므로 설령 학자들은 현실적인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현실에 대한 이론의 응용 문제에 무감각해져도 자신들이 손실을 보는 경우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학교 선생은 연구 결과로 책임을 지는 자리가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보답으로 교육부에서 월급을 타먹고 살아가는 부류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학교 선생들이나 학자들은 현실 적응 속도와 사고패턴의 변화 속도가 매우 느리다. 학계는 위기의 원인을 찾으며 고민하다가 시간만 허비하고 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케인즈의 유명한 말은 그의고용, 금리, 통화에 대한 일반 이론저서(1936)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경제학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의 사고는, 그들이 맞거나 틀리던 간에 상관없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세상은 이들에 위해서 움직여진다. 어떤 이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고 자신하는 실무자들도 사실은 이미 한물간 경제학자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스스로 이론을 창안했다고 지금 광적인 칭송을 받고 있는 학자들도 사실은 몇 년 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던 책에서 핵심을 베껴온 것이다.”

케인즈가 비판한 실물 경제 당국자들은 그나마 조금 나은 부류에 속한다. 왜냐면 비록 아무런 쓸모가 없던 구닥다리 책에서 베껴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을 한 흔적은 있지 않는가? 자신의 이론이나 지식이라고 해도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서 받아온 예전의 구닥다리의 가운데서 배우고 쌓아 올린 것이다.

역사가 발전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진보와 생존이 보장될 수 있었겠는가? 

진실의 추구가 없다면 어찌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겠는가?

 

 

한국의 문자-한문

한국은 한자를 썼던 고대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고, 또 현대는 한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단어를 바꾸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환경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며 문헌의 본문 의미를 고수하려는 문언주의- textualism-의 사고가 적용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한 상황이다.

요사이는통섭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데, 아마도 그것은 폭넓은 상식과 깊은 전문성-어찌 보면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인 성격을 갖는다-의 지식을 추구하는 경향 (통합, 융합, 통섭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을 강조하기 때문인 것 같다.

휴얼(Whewell) 1840“consilience”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기존의 잘 알려진 concordance 합치coherence 일관성, convergence 통합이라는 단어 대신 잊혀진 단어인 “consilience”가 오히려 희귀하여 그 의미가 훼손되지 않고 잘보전 preservation’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한국의 고대 사회 원형이 찾아지는 금석문을 해석할 때 휴얼의 설명이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사람의 본성은 창조적인 일을 남기려 하지 모방하는 일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입 안에서는 맴도는 잠자리처럼 수없이 맴돌다 겨우 새로운 표현을 하나 찾아내었다고 여기기도 했지만 단 한 줄의 하이쿠 표현도 제대로 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간 사람들의 글을 읽고서 모방 추종하여 어떤 큰 작업 하나 이뤄내지도 못했다. 다만 풀무질만 하였고, 시간의 낚시질만 한 것 같다.

남의 텍스트를 그대로모방 copy” 하는 일을 창조적이 일이라고 내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타인이 이미 발표한 것을 모방하여 공표하는 것은 저작권법이 일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허용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모방은 창조적인 일과는 다르고, 창조적인 일은 진짜이지만, 모방은 가짜이고, 가짜로는 인간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창의적인 존재로서 자기만의 것을 가꾸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정치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자유와 속박의 문제로써 자유는 창의이고, 속박은 모방에 해당된다. 모방과 창조적인 일을 비유로써 쉽게 설명하는 데 벌꿀의 예를 자주 들고 있다.

 

에라스무스- 모방과 창조

 

에라스무스는 누구인가?  서양에서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키케로는 기원전 (BC 106-BC 43) 사람이니 동양의 한무제 (BC 156-BC 87) 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사람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 시조와 비슷한 때에 살았던 인물이다. 한편 네덜란드 사람 에라스무스(1466-1536)는 토마스 모어하고도 교류했는데 키케로의 시대하고는 약 1500여 년의 간격이 있는 인물이다.  마치 신라 진흥왕(526-576)하고 약 1500여 년의 시간적 간극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간적 간격을 갖고 있던 에라스무스가 키케로의 책을 번역할 때 어떻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에 대한 견해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 나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Decorum 데코룸

 

1500년이라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네덜란드라는 공간마저 차이가 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옳을까? 키케로가 살았던 당시의 표현 방식에 맞도록 바꾸어 쓰면 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키케로의 어휘와 문체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현재를 담을 수 있는 언어로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키케로가 사용했던 언어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키케로의 정신(spirit)을 판단하고 모방하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키케로가 당시 시대를 휘어잡을 만큼 웅변에 능했던 이유는 키케로가 언어를시의적절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시의적절함은 라틴어 개념 “Decorum”(데코룸)-(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당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살펴서 모두가 공감하는 예의 바르고 올바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을 번역한 단어이다. 키케로의 명성이 시의적절한 언어 구사에서 나왔다면 당시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통하는 말로 재번역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1500여 년 사이에모든 것이 바뀌었다” (“video mutata omnia”)는 것인데 어떻게 그대로 전달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언어도 바뀌었고, 사람도 바뀌었는데 어떻게 그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정신이 살아 있다면 올바른 의미가 전달될 수 있을까? 이건 불을 전하는 인간의 지혜를 논한 장자의 이야기로 쉽게 설명된다. 

 

불을 밝히는 지혜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장자에 이런 말이 있다.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손가락으로 땔나무를 계속 때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불을 전파시키는 데에는 그 한계가 없다. 하나의 장작나무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의해서 지펴진 불길을 타고 불을 밝히다 재만 남기고 꺼진다. 하지만 인간은 다시 불씨를 살리는 지혜를 통해서 영원히 불을 밝혀 왔다. 형체는 없이 사라진다 해도 그 정신은 불멸의 빛으로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리라.

성은 허물어졌고 사용하는 언어도 바뀌었지만 정신은 살아 숨쉬어 대대로 전해진다는영원불멸의 특성을 파악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에라스무스는 키케로의 저서를 살아 숨쉬는 언어로 다시 재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논리와 방법론은 한국의 역사를 해석하는데 좋은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벌꿀의 비유

 

에라스무스가 들고 있는 벌꿀의 비유를 읽어 보자.

“자연계에서 한 예를 보자. 벌은 벌집에 꿀을 모이기 위해서 하나의 수풀에서 재료를 모와 오는가? 그게 아니라 벌은 온갖 종류의 꽃, 잡목, 수풀 모두를 정말 열심히 날아다니지 않는가? 또 벌이 모아온 것 그것이 바로 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벌은 그들이 모아온 재료를 자신의 기관을 이용하여 액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이전의 꽃이나 수풀이 가졌던 향기나 맛은 가려낼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재료들이 적당한 비율로 서로 혼합된 것인데 벌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암양은 한 가지 풀로 뜯어 먹고서 우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암소는 온갖 가지 풀을 뜯어 먹고 또 풀에서 즙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즙에서 변화된 우유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Erasumus, Ciceronianus (The Ciceronian) at 82).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사람은 천명을 받는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귀한 확률인가? 사람이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시중에 떠도는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정자와 난자가 만날 확률은 3억분의 1이라고 한다. 로또의 당첨 확률은 814만분의 1이라고 하는데, 신문 방송으로 전하는 로또 당첨자는 매주 나오지만, 그 로또 당첨자 명단에 내가 포함될 확률은 평생 가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확률이 814만분지일이 아니라 3억분지의일이라면? 그런데 그처럼 어려운 확률을 뚫고 이 세상에 나온 우리들이라면 그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가?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허비하고 생각없이 살아왔다고 보여지지 않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나의 마음은 뛰노라.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가 자연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이어지길 바라노라.”

 

워즈워드의 시구절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의도와 달리 빗나가기 일쑤였다. 의도하고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우리들의 삶에서 내가 구원을 받을 징표는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나의 두 눈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책 하나가 있었다. 집 기둥에 걸어 매달아 놓은 책이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거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장백단이 다락방에 걸어둔 생선처럼 날마다 쳐다보고 자랐다. 그 책은명심보감이었다.  명심보감의 편자는 추계추씨의 선조 露堂(노당) 秋適 추적(1246-1317) 선생이다.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명심보감”과 어머니께서 물려 주신성경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도자기 굽는 사람 옹기 장사 상인을 무시하지 않고 꼭 챙겨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염황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케인즈의 말로 유명한 어구대로, “우리 모두는 결국은 죽는다”. 나의 선조에 대한 관심이 거슬러 올라가기까지는 수양대군이 정권을 찬탈하고 단종을 폐위시킨 1450년대이다.

 

단종이 유배지 영월로 쫓겨나 있을 때 단종이 사약을 받고 절명하기 전에 단종을 직접 만나 그를 위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추익한秋益漢(1383-1457)은 그 극소수의 사람에 속했다. 그런데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를 모셨던 시녀와 노비들이 죽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만 그 이외 다른 기록은 별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시퍼런 권력 앞에 어느 누가 단종을 만날 용기를 낼 수 있었겠는가? 시퍼런 권력 앞에 죽음으로 맞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마천의 지적처럼 기러기 털 하나에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우리들의 파리 목숨인데 우리는 왜 두려워하는 것일까?

 

추익한이 단종의 그 짧은 4개월 동안의 유배생활 동안 단종과 얼마나 자주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갯길 수라리재에서 단종의 혼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올 뿐이다. 하지만 그가 단종의 살아 생전 머루와 다래를 따다 드렸다 하니 최소한 여러 날에 걸쳐서 만남을 이어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이 깊은 산속 영월로 은퇴해 들어간 그 이유가 나는 무척 궁금했다.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고,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누가 가르쳐 주는가?-선조의 의미

 

내가 겨우 알아낸 것은 추익한이 영월 태백산으로 들어간 이유는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1274)가 그곳으로 들어간 이유하고 거의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희미한 내용뿐이다. 영월은 태백산이 위치한 곳이고, 태백산은 한반도의 중추부이자 심장부이고 태동의 성지에 해당한다.

 

사람의 행동을 이끄는 동기는 무엇일까? 단종은 겨울 서리가 곧 내리기 직전인 11 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로 등장하였으니 또 그만큼 훗날 사가의 조작이 가미된 불분명한 역사의 대표적인 표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관점은 권력의 등장과 몰락이라는 권력적 측면이 아니라 무릉도원 유토피아를 향한 근원적인 바람이라는 것에 있다.

 

단종이 권력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자 그를 함께 따라온 노비들도 죽어간 것은 분명하다. 권력 세계에서 권력추구 다툼에서 실패하면 사형을 당하는 경우는 흔하다. 사육신의 죽음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왜 양민이던 추익한이 단종의 죽음에 비통해 하고 죽음을 택했던 그 까닭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추익한의 죽음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으로써 확인하긴 힘들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안평대군의 죽음에 대해서도 역사의 기록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판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지난 나이든 노인이고 일개 양민에 불과했던 추익한이 단종과 함께 한 그의 죽음의 역사가 어찌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세조의 권력 찬탈 과정과 단종의 죽음을 둘러싼 당시 정국 사정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죽음의 의미

 

유교 사회에선 죽음이 터부시된다. 그래서 조선이 일제에 패망한 1910년 그 순간에도 순국을 선택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로지 매천 황현 단 한 사람이었다. 황현은 절명시 槿花世界已 難作人間識字人”, “무궁화 이 강산 이미 가라앉고 말았네. 이런 말세의 세상에 살면서 지식인 노릇하기가 정말 어렵구나구절로 밝혔듯이, 나라가 망해도 어느 한 사람 누구도 항거한 사람이 없다는 자괴적 현실을 인식하고서 자신 혼자서라도 죽어서 500년 조선의 국가에서 글을 배운 학자로서 망국에 맞이하여 그가 어떠한 처신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겨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지식인 계급의 대표성을 부여한 것이다. 왜 사대부 고관대작 등은 입하나 열지 않고 숨죽인 상황에서 잔반 사족의 말단 향리에 불과한 그만이 세상에 항거하고 절명을 선택했을까? 

 

추익한은 계층의 대표성을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은퇴한 일개 양민이었고 따라서 그의 죽음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구우일모의 죽음에 불과하였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죽음을 스스로 택했던 것일까? 추익한의 죽음은 내게 사마천이 고사리를 캐먹고 죽어간 백이숙제의 고사를 사기열전에 맨 처음 케이스로 소개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 세상은 어떠한가?

 

노자가 말한 대로 말세의 세상일지 모른다. 노자의 말을 다시 확인해 보자.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是爲盗竽 非道也哉”. “정부는 나눠져 있고, 논밭은 황폐하고, 창고는 비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날카로운 칼을 휴대하고, 음식을 싫증날 정도로 많이 먹고, 재물과 돈이 남아 넘친다. 이런 사람들을 도둑놈들-도괴-이라고 부른다. 이런 것은 도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결정적 순간

 

백이숙제는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고도그것을 모르는 권력자들에게는 어떤 다른 대응 수단이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어갔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많지 않다. 사마천이 백이숙제열전에서 인용한 공자의 말을 들어봐도 그것이 확인된다.  공자는 말했다. "부귀라는 것이 뜻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마부와 같은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옛말로 내려오는 9폭 치마가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날 자기 자신의 뜻대로 직업이 구해지고 자기들 뜻대로 자식들에게 좋은 학교 보내고 직장을 물려줄 수 있는가?  

 

왜 사마천은 백이숙제를 제1장에다 올렸을까?

 

불후의 역사서사기의 저자 사마천이백이숙제에 관한 이야기를 열전70중에서 가장 중요한 첫째 장 제1장에 할애한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백이숙제 편에는 우리들에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화제로써 더욱 유명해진 공자의 말이 인용되고 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차가운 계절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르고 조락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은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 말은 세상이 오염되고 흐려져 혼란한 그 때에 청렴한 선비가 드러나게 된다는 세상의 이치를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의 의문이 즉시 제기된다. 그렇다면 왜 선비는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을 사전에 미리 막지 못한다는 말인가? 만시지탄이라는 것일까? 전도서의 기록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일까?

 

한편 세상의 법칙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사마천의 기록대로, 天道無親 常與善人”: "하늘의 법칙은 공평 무사하고,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이 어느 한편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공평하다는 것이고 또 그 하늘의 손길은 항상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는 이 말은 노자 도덕경에 나온다. 그런데 사마천이 제기했던 의문처럼, 현실에서는 적용되기 어려울 만큼 그 반대의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명제의 진실성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천명무상이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정권 찬탈의 역사를 비롯하여 사마천이 들고 있는 도척이나 다른 동서고금의 사례를 볼 때 천도가 있는지조차 의심시된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When the year is cold, on ly then does on e know that the pine and cypress are the last to lose their leaves. 사마천은 공자의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의 구절에 앞서, 노자의 “天道無親常與善人”(천도무친 상여선인)[1] 구절을 먼저 적고 있.

 

사마천은 이같은 세상의 권력과 부귀와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 위해서 역사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열전의 제1장에다 백이숙제편을 실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추익한의 죽음은 사마천이 제기한 백이숙제의 문제와 연결되고 있으며 또 단종과 안평대군을 관통하는 끈인현묘지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역사를 조명하고 복원하는데 일고할 가치가 있다고 내가 생각해 본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천리대 도서관 소장된 안평대군의 夢游桃源記”(몽유도원기)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탐구를 부추겼다.[2]

 

무릉도원

 

한국인의 조상은염황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의 제1차적 소스인 682년의 문무왕릉 비문에서도 분명히 확인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의 필연성에 입각하여 나는 진나라 시대부터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까지 그리고 신라의 기원에서부터 고려 조선과 현대에까지 통시적으로 통틀어 죽은 역사와 산 역사를 함께 엮어 불멸의 정수를 정련해 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나의 평소 의문이었던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과 풍신수길은 천도에 대한 이해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을까? 만약 하늘의 길이 있다면,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미국의 멜빌이 생각하는 천도는 얼마만큼 차이가 있을까? 대기만성이라는데, 시간은 얼마만큼 나의 길을 기다려 줄 수 있을까?

 

Calling

 

세종대왕이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글을 창제한 이후로 한국인들이 서로 통하는 데서 불편함을 겪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게 되었다고 여기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는 참된 소통을 하지 않고 눈감고 귀막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소통의 불편을 느낄 수 못했을 뿐이라는 것. 그러면 세종대왕 이전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한국의 기원의 문제는 한문에 의존하였던 관계로 아직까지도 한국인들이 정확한 이해를 하는데 많은 애로를 겪어왔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서 혼란이 가중되고 진실이 왜곡되는 안타까움을 보고서 한민족의 기원의 문제에 대한 금석문들을 한글로 보다 정확하게 번역해보고자 싶은 시도가 태몽의 현몽처럼 꿈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나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의미를 잠깐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나 역사학에서의 재현은 법에서의 재현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재현 representation 재현세 re-presence  

 

법에서의 대리인이나 대표성의 개념을 논하기 이전에 일반적인 재현 또는 대표성의 개념을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소설가 최명희의 소설혼불에서 (10-13pp) 그가 표현한 말을 보자. 최명희는 그가 왜혼불을 쓰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면서 이렇게 얘기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끊임없이 혼불을 쓰게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니 첫째로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은 나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이중에서도 무엇보다 나는 느낌을 복원해 보고 싶었다. 느낌이란 추상적이고 소모적인 것이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느낌이야말로 우리 혼의 가장 미묘한 부분을 아름답고 그윽하게 혹은 절실하고 강렬하게 수놓는 무늬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모든 방면의 자료는 도서관이나 민속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료와 사물들을 어떻게 정서화하고 감각화해서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생생하게 느끼며 만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복원이 단순한 기록의 재생에 그치지 않고 어제와 오늘을 이으면서 참된 우리 삶의 모습과 우리 정신의 원형질에 가까이 가는 사다리 칸 한 개로 살아나기를 감히 원하였다.”

 

인용한 글이 조금 길긴 하지만 내가 한국인의 원형을 탐구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데 최명희의 생각을 빌어오는 것이 필요해서이고 또 최명희가 장편소설을 쓴 의도를 조금은 소개할 필요성이 있어서이다.

 

버지니아 울프의재현에 대한 생각과는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최명희의 소설보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더 많이 읽었다) 재현과 진실이라는 관계는 법이나 문학이나 역사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3]

 

내가 여기서 재현의 문학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니까 장황한 설명이 별도로 필요로 하지 않겠지만, 여기 서문에서 한 마디만 거들자면 재현이란 보편적 일반성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우선 정의한다.

 

메신저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갈릴레오의 단언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특수한 경험적 이야기를 다른 보통 사람들에게 전달 전파하는 역할 그런 특별함과 보편성이 서로 연결되도록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전달자이다. 이런 메신저에게는 남에게서 받은 명령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천사에 속하고 예언자(Prophet) 그룹에 속할 것이다. 메신저라고 해서 우편배달부처럼 무조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통한 전달이기에 자신의 새로운 해석 작업이 그 명령 전달의 핵심 과정에 들어간다는 측면에서 단순한 역참의 마부하고는 다르다. 부활이라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말씀을 세상에 전한다는 의지에서 예수의 부활의 사실을 처음으로 보고 그것을 알리고자 마리아가 단숨에 갈릴리 언덕을 내려 온 것처럼, 42킬로미터 마라톤 평야를 단숨에 달려와 우리가 승리했다는 단편을 남기고 쓰러져 간 마라톤 전사의 마음과 소망이 아닐까?

 

내가 고대 금석문을 번역할 때 고르는 말이나 단어와 그 의미 해석은 내 혼자 느끼는 의미를 적어내는 단순한 수필이나 산문을 짓는 작업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해 놓고 있는 것을 단순하게 따라가는 작업도 아니다. 내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고 또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쫓는 것이 아니라, 대신 나는 언어와 제도와 문화를 이어가는 어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봉사하는 진실한 수탁자(trustee)로서 인식하고 그 작업을 한다.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제3의 존재와의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완결된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EH 카아는 역사는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번역가가 번역을 할 때도 하나의 의미를 완성할 때 언어 규칙을 따를 의무가 있다. 글을 쓸 때 적용하는 문법이 있고, 사용 규칙이 있고, 정책적 사항이 있다.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만의 의견을 그냥 집어 넣지 않는다. 확립된 규칙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존중한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에 따라 해석자의 재량이 행사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재량권이란 자의적인 판단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해석 임무를 완결해 내는 것이 요구될 때 앞에서 말한 적용 규칙의 순서에 따라 허용된 범위 내에서 최상의 것을 골라내 완성을 시도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걸려들기 쉬운 해석 오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문언 해석의 원리원칙에 따라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을 어떻게 하는 걸까? 서두에서 꺼냈던 에라스무스의 벌꿀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 대한 비유로써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설명을 참조하라.

 

왜 한국의 고대사를 한글로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는가?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성경이 번역된 이후 400년 동안 영어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는 역사가 입증해 주기 때문에 달리 어떤 추가적 묘사나 설명이 불필요하다.

 

내가 한국인으로서 이런 작업을 시도하게 된 것은 명사십리 모래밭에서 금싸라기를 걸러내는 심정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1500년의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만약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동안 아무도 풀어내지 못했던 의문이 나의 작은 연구의 결과를 통해서 밝혀진다면, 그리하여 어떤 작은 영광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가 받은 대로 나의 부모형제의 공일 것이며, 따라서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는 일에 일로매진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워즈워드의 시를 인용하는 것이 나의 둔재를 드러내는데 보다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즐겨 암송했던 워즈워드의 시 구절을 가져온다. 

 

영원불멸의 초원의 빛이여!

저무는 해 주위로 몰려드는 구름은

인간의 필멸성을 지켜본 눈에는 차분한 색조를 띨 뿐이다.

또 다른 달리기 경주가 있었고 또 다른 종려나무 가지로 만든 모자를 얻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해주는 인간적인 마음 덕분에

그 마음의 부드러움과 기쁨과 두려움 덕분에

피어나는 가장 미천한 꽃 한 송이도 내게는 눈물 흘리기마저 힘든 너무나 심오한 생각들을 줄 수 있다.”[4]

 

 



[1] Heaven’s Way favors none, but always sides with good persons.

[2] 나의 근원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하여 세종이 일으킨 민족중흥의 횃불이 조기에 식어버린 계기가 되었다고 내가 결론을 내린 안평대군의 패배 그리고 무릉도원의 조건에 대한 내 생각을 이제 조금은 복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3] 루소, “Languages are made to be spoken, writing serves only as a supplement to speech. … Speech represents thought by conventional signs, and writing represents the same with regard to speech.  Thus the art of writing is nothing but a mediated representation of thought.”

[4] 워즈워드,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