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충신장 서두에 인용된 육가의 신어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맛을 알 수가 없다- 雖有嘉肴 弗食不知其旨也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맛을 알 수가 없고, 쓸모없이 버려지고 만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도 이와 같으리라. 비록 평화의 시기라기는 해도 무사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담대한 용기가 알려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늘의 별은 낮에는 해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밤에는 온 하늘에 흩어져 총총히 빛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1]
“雖有嘉肴,弗食,不知其旨也;雖有至道,弗學,不知其善也。是故,學然後知不足,教然後知困。知不足,然後能自反也;知困,然後能自強也。故曰:教學相長也。《兌命》曰:「學學半」其此之謂乎?”, 《禮記·學記》, 禮記卷十八. 이 “예기”의 원문을 한글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록 좋은 안주가 있다 하더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비록 최고의 원리원칙-도-가 있다 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좋은 가치를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배우고 나서야 그것의 부족함을 알 수 있고, 남을 가르쳐 보고 난 후에야 소통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부족한지를 먼저 깨달아야, 그것을 반성하고 연마할 수 있는 것이며, 소통의 애로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우쳐야 그 부분을 힘써 노력해서 해결해 낼 수 있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서로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서”에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배우고 익힘의 다른 반쪽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충신장 서두에 인용된 구절의 의미
맛이 좋은 음식은 향기가 솔솔 배어 나오고, 그 아름다운 향기를 숨길 수가 없다. 맛을 직접 보지 않고도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다면, 인간 사회의 일에서, 외부에 발생한 악을 보고서 내부의 변화를 점칠 수가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결론은 충신장의 서두의 두 번째 문장-“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이 밤이 되면 총총 빛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이 후단의 “たとへば星の晝見へず夜は亂れて顯はる” 표현은 육가의 신어 사무조에 등장하는 “星不晝見 日不夜照 雷不冬發 霜不夏降”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육가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소개되는 인물인데, “신어”의 이 부분은 신하가 군주를 치는 하극상이 나타나지 않는 순리를 설명하고 있고, 이 부분에서 노자 도덕경 제38장의 “상덕하덕”(上德不德)”의 논리를 전하고 있다. 신어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여름철에 서리가 내리는 법이 없고 겨울철에 천둥번개가 치는 법이 없다고 예를 들어서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이런 자연질서를 이해할 때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괴이한 천재지변이 일어나게 되지 않겠는가?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가 겨울철에 나타나거나 여름철새인 제비가 겨울에 나타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이상하고 혼란한 흐름이 나타나면 이러한 혼란의 시기를 제거하고 평화 시대를 되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자연의 변화와 운행의 법칙을 아는 능력이 있으므로, 어떤 외부의 변이 현상을 보고서 내부의 변화를 미리 감지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개별 사례를 모아서 하나의 원리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 이론인 것이고, 이러한 이론의 축적과 미래의 설계와 예측 가능이 지식의 힘이고 유용성이다.
육가의 신어 사무조에 등장하는 구절을 차용한 표현이라고 해서 공자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육가가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는 사상가라고 해도 신어의 부분에서 노자도덕경의 구절을 분명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노자 도덕경 제38장의 구체적인 표현에서 파악되듯이, 공자와 노자의 정치 철학은 분명하게 대립되는 측면이 강하다. “故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쓰이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쓰이고,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쓰이며, 의를 잃은 뒤에 예절이 쓰이는 것이다. 무릇 예절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은 충과 믿음이 박약하다는 것임으로 장차 어지러워짐의 시작인 것이다.” 노자는 이어서 그 꽃이 피어남보다 그 열매 맺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관점의 차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예를 강조하는 시기라면 그것은 오히려 충의가 엷어졌다는 현상을 역으로 진단해 주는 것이 아닌가? 미래 예측으로써 보면 곧 혼란의 시작을 알려주는 사전 경고의 측면으로 작용한다. 현실 정치에서 파악한다면, 예를 강조하면 공자가 우상시되고 이에 따라서 반면 노자의 도덕철학이 경시됨을 의미하는 것이다.[2] 노자는 꽃보다 열매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자 도덕경 제38장의 결론을 보자. 前識者,道之華,而愚之始.是以大丈夫處其厚,不居其薄.處其實,不居其華.故去彼取此. 노자는 외부의 화려함보다 내적 튼튼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3]
충의와 신의 loyalty and trust가 충신장의 전체를 내용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라고 볼 때, “예”를 강조하는 공자의 정치철학를 충신장의 주제로 삼는 것은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한국의 한 드라마의 표현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무엇이 보다 중헌디!”의 표현을 상기해 보라. 화려함과 내실 가운데 무엇이 보다 더 중요한가? 꽃보다 열매이지 않을까? 이 말은 꽃의 아름다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뜻은 거짓으로 조작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 왜?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짜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식적으로 꾸미고 조작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그것이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볼 때 보다 분명하게 깨달아지지 않는가?
충신장의 첫 머리
충신장은 다케다 이즈모, 미요시 교라쿠, 나미키 센류 이3인의 공동작품이다. 충신장은 일본의 역사와 문학이 함께 녹아 들어 있는 전체 일본 문화가 들어 있는 거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嘉肴有といへども食せざれば其味をしらずとは。國治てよき武士の忠も武勇もかくるるに。たとへば星の晝見へず夜は亂れて顯はるる。” 이 충신장 첫 구절의 표현은 “예기”에서 그 출전이 찾아진다. 嘉肴(かかう)ありといへども食せざれば其の味はひを知らずとは 国治まって善き武士の忠も武勇も隠るるに 例えば星の昼見えず夜は乱れて顕(あらは)るる” 일본어 사전의 풀이를 인용해 보자: “嘉肴ありと雖も食らわずんばその旨きを知らず”[4]
“충신장”의 첫 머리는 위의 인용된 표현으로 시작된다.
우리 속담에 ‘똥인지 된장인지는 직접 손으로 찍어 먹어 봐야 한다’는 우격다짐을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사람과 역사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그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릴 수 있는 지의 여부를 함의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내가 요약 설명하는 충신장의 줄거리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충신장의 줄거리를 1막에서 11막까지 각 단락별로 나누어서 대략적인 설명을 곁들어 보도록 한다.
“충신장” 제1막 내용
“충신장” 제1막 무대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무로마치 막부 말기 스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 벌어진 일이다. 제1막의 무대 배경은 학이 소나무 언덕을 노닐고 있는 병풍 그림이 있는 “鶴岡八幡宮”(스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 벌어진다. “충신장” 제1막의 내용을 짧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역사적으로, 1338년 2월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토벌하고 교토에 거처를 마련한다.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스루가오카 하치만궁을 짓고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파견 진주시켰다. 이 궁을 지키고 있는 책임자는 고노 모로나오, 모모이 와카사노스케, 엔야 한간이다. 이 등장인물들은 역사적으로 실제 인물들이고, 충신장의 이야기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기록한 “태평기”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1701-03년에 걸쳐 일어난 아코 사건에 통합하여 연결시키고 있다. 가마쿠라 궁전을 지키고 있는 이들 고위 책임자들에게 요시사다가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투구를 하치만궁에 안치하라고 한다. 투구의 진위 여부를 놓고 이들이 서로 이견을 나타나게 됐는데, 다다요시는 한간의 아내인 가오요에게 투구의 진품 여부를 가려내게 한다.
투구의 진실-그는 누구인가?
실제로 투구의 진품 여부에 대한 판정을 놓고서 격론이 벌어진 때는 1656년이었다. 1656년 닛타 요시사다가 전사한 전장터 근처에서 투구가 발견되었는데, 이 투구의 주인이 감정 끝에 닛타 요시사다로 밝혀졌다. 요시사다는 천황에 충성한 군대 장수이었다. 다시 충신장 1막의 설명으로 돌아가서 이어간다.
투구는 가나의 알파벳 순서대로 47인의 투구가 일련번호로 매겨져 있기에 그 전투에 참가한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투구의 주인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외부의 객관적 표시가 없더라도 충신장의 첫 서두의 구절의 의미로 짐작한다면, 투구라는 것은 투구의 쓴 사람의 향기가 배어 있는 것이므로 사람의 독특한 향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투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어렵지 않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투구 속엔 땀이 배어 있고 그 향기가 배어 있어, 머리 속의 향기는 밖으로 품어 나오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의 가치는 안에서 닦은 대로 저절로 우러나오게 된다.
충신장에서 등장하는 투구는 비유적인 의미가 있기도 하다. 사람의 머리에 해당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정치사회적으로는 국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상류귀족층을 지칭하니, 투구의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왕이 집무 중에는 익선관을 썼다. 예전 우리나라에서 조상들이 상투를 생명처럼 귀하게 취급했던 것과 같이, 무사는 투구를 보배처럼 여긴다. 투구가 귀족 무사층의 상징이라면 신발은 국가의 저변을 구성하는 하층민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충신장에서 게타의 표현적 의미-‘신발을 거꾸로 신는다’는 속설적 표현- 즉 배신의 의미 또한 크게 강조함을 느낄 수 있다.
사족- 향기에 대한 개인적 경험 하나
“충신장”에서 사람의 향기를 말한 취지는 사람의 고유 인격을 비유한다고 보여지는데, 필자가 신혼 여행 시절 교토 관광을 했던 추억을 떠올린다. 교토의 시내를 들어갔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일본임을 차이나게 알려 주는 것 중 그 첫째가 향불 피우는 냄새 같이 향내가 코끝을 진동하는 교토 시의 향 냄새이었다. 교토 시내의 향기는 나의 코를 찌를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창덕궁의 오래 된 고목 향나무의 향기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 체험이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을 테고 또 사람마다 오감은 차이가 나는 것이므로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산과 강의 모습이 한국과 거의 비슷하게 보이는, 향기가 독특하고 크게 느껴진 까닭은, 한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의 시기에 김포공항에 들어서면 농촌의 인분 냄새가 독특하게 외국적으로 느껴졌다는 미국인들의 체험담으로 미루어 보면, 사람이 맡는 향내는 외국적인 것 또는 같은 동질성을 확인하는 어떤 기준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향은 근래 들어 코코 샤넬로 대표되는 여자 향수품의 유행과 발전이 말해주듯 사회와 경제 발전의 하나의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조선말에 울릉도 향나무를 벌채 수탈해 갔는데, 한중일 세 나라에서 모두 향을 다 함께 좋아하는 이유는 문화적으로 중국의 남방 도교와 연결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난향”을 애호하는 일본인들에게, 쿄토의 향은 유명한데, 충신장에서 독특한 향기를 내뿜는 최고의 향으로 알려진 “蘭奢待”(らんじゃたい)란쟈타이를 언급하고 있다. 나라 동대사 정창원에 있는 이 유명한 난사대 향나무는 8세기 성무천황 때에 당나라에서 수입되었다고 한다. 왜 “난사대”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까? 蘭奢待는 “寒蘭のような優美で華奢な体つきの婦人を待つ気持”의 의미를 줄여서 “蘭奢待”라고 하였다고 말한다. “난은 그 모양이 아름답고 가냘프고 날씬한 여인의 몸매와 같아서 마치 여인을 기다리는 느낌이 든다.” 사람의 향은 오늘날 여인들의 향수가 상업적으로 판을 치고 있어서 사람의 향내의 의미가 달라졌을지 모르나 향의 원래적 의미는, 상가 조문식장에서 향을 피우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기림에 그 의미가 있을 않을까? “사람”, “사랑”, “삶”은 모두 어원이 같은 말에서 파생되었다. 충신장의 서두 표현을 앞에서 설명했는데, 그 구절의 출전은 “예기”라는 책에 나온다. 고기를 구울 때 독특한 향기가 나는데 사람마다 그 호오감의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제삿상 차림표를 “주자가례”에 따랐던 우리나라 옛 제사 풍습을 비교해 보면, 향내는 사람의 판단을 결정하는 하나의 요소가 아닌가 싶다. 즉 사람 각자의 개인적으로 좋고 싫어함의 호오감을 나타내는 감정적인 기준인 것이다. 충신장 첫 구절의 표현에서 향기를 비유한 말의 의미는 사람은 죽어도 이름을 남기고 죽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향나무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영원히 풍기기를 바라는 뜻일 것 같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에서 그윽한 향내를 품기는 향의 의미는 아마도 이와 같을 것이다.
“人は一代名は末代”
충신장에서 “사람은 한번 살다가 죽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는 표현을 “人は一代名は末代”을 쓰고 있다. 이 “ひとはいちだいなはまつだい”, “人は一代名は末代”, “히토하이치다이나와마쭈다이” 표현의 영어 번역은, “Man lasts but one lifetime, his name for all eternity.”
충신장 제1막 줄거리
가오요는 모로나오에게 와카 글짓기를 첨삭 지도해 주기를 바라고, 이에 모로나오는 아름다운 미녀인 그녀에게 연정을 품게 되는데 (연정을 품으면 빨간 복사꽃같이 얼굴에 홍조를 띠게 된다- 젊은 아카루 부부의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그리하여 한시로 사랑을 고백하는데, 가오요는 거절하는 화답시를 보낸다. 이에 한간의 상사인 모로나오는 가오요의 남편을 갈구며 보복을 하게 되는데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 성격의 젊은 무사 한간은 이에 격분하여 모로나오에게 칼을 겨누게 된다.
같은 가문에서 다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훤화양성패” 법률
‘궁중 안에서는 누구도 칼을 휘두를 수 없다’는 엄격한 무사의 내부 규율 법률이 존재하였기에, 일단 칼을 뽑았다면 칼을 뽑은 목적을 달성해야 했을 것이다. “훤화양성패”의 법률은 일찍이 중세 시대에서부터 확립된 무사 규율법인데, 평화시대로 접어들면서 칼부림을 더욱 엄격하게 금지하게 된다. “훤화양성패” 법률이란 일단 칼부림 다툼을 한 당사자는 다툼이 일어난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양쪽 모두를 똑같이 처벌하게 된다는 무사 내부 규율을 말한다.
충신장의 시대적 배경
충신장의 시대적 배경은 천황세력이 가마쿠라 막부 정권(1185-1333)을 타도하고 1333년 천황의 친정을 수립한 후 천황의 개혁 조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천황에 반기를 든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사와 천황에 충성하는 닛타 요시사다 군사 사이에 엎치락 뒤치락 혼전(1336년 1월 닛타 요시사다 군이 아시카가 다카우지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으나, 1338년 7월 다시 다카우지가 다시 교토를 탈환한다)을 겪다가 결국 아시카가 군이 요시사다 군을 토벌하여 새로이 아시카가 막부 시대를 연 1338년 이후, 천황 세력과 막부 세력이 서로 전쟁을 하던 남북조 시대가 충신장의 시대적 배경이다.
충신장의 기본적 모델은 인형극 浄瑠璃 “기반태평기”이다. 『碁盤太平記』는 近松門左衛門이 저자이다. “태평기”의 시대적 배경은 1354년이다.
왜 아시카가는 할복자살을 선택하였는가?
아시카가는 1335년 11월 가마쿠라 막부 집궘 세력이었던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 , 1333년 자결함)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려는 명분으로 가마쿠라로 입성하였다가 오히려 왕자(護良親王)를 살해하고 천황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를 토벌하려는 명령을 내렸고, 엔야 항간은 요시사다 군에 예하 부대로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엔야 한간은 요시사다 군에서 이반하고, 교토의 천황 세력을 공격하게 되는데, 한간이 아시카가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1338년 고다이고 천황은 나랑으로 탈출하여 남조를 세우고, 북조의 막부정권과 대립한다. 천황 세력에서 이반한 엔야 한간은 승리의 공신으로 오키 섬을 관장하는 영주가 되고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직책을 맡는다.
1341년 3월 엔야 항간이 갑자기 교토를 떠나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데 이에 막부는 무슨 음모가 있다고 의심을 하고서 모모노이 와카사노스케 (“충신장”에서 上野의 야마나 토키우지(山名時氏)와 桃井直常의 두 장군을 합하여 모모노이 와카사노수케 桃井若狭之助로 창조한 극중 인물)에게 엔야를 추적하게 한다. 엔야가 추적당하는 중에 아코에 (1701년 아코(赤穂)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산 속에서 자결을 하게 된다.
엔야 항간이 자결을 하게 된 이유는 대충 다음과 같다고 알려졌다. 엔야의 처는 고다이고 천황을 섬긴 궁녀였는데, 절세 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고, 또 불륜설이 퍼져 있었다 한다. 아시카가의 오른팔 격인 고사직이 이 소문을 듣고 엔야의 저택에 몰래 잠입하였다가, 목욕하고 있는 엔야의 처의 요염한 자태에 그만 넋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 고사직이 그녀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지만, 그녀는 고사직의 응큼한 수작을 거절해 버린다. 이에 고사직은 앙심을 품고 아시카가의 동생(당시 아시카가 형은 군사를 맡았고, 동생인 직의에게는 사법 행정권을 맡겨서 이인 분할통치 체제가 작동했다)에게 엔야가 모반을 하였다고 거짓 고발해 보복을 한다.
마침내 엔야가 코너에 몰리게 되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군사를 일으키려고 도망을 치는데, 그 사이에 엔야의 처자식은 모모이 와카사노스케 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처자식을 붙잡은 와카사노스케 군이 처를 욕보이려고 칼을 그녀의 몸에 들이 대고 협박을 하니까 처는 자결을 해버렸다. 엔야는 처자식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더 이상 도망을 칠 이유가 없다고 억울해 하며 자결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상이 대강의 역사와 태평기에서 확인되는 사실인데, 엔야는 “대부판관”으로 불리웠던 그의 별명이 함의하듯이, 천황의 공가 세력 즉 구세력 문관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신흥 무사 세력인 아시카가 형제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그의 죽음의 과정과 이유는 고다이고 천황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돌아간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상은 충신장의 극중의 배경이고, 충신장의 실제 모델은 1701-03년에 일어난 아코 사건으로써 이 때는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수립된 지 100여 년이 지난 평화의 시대였다.
아코 사건과 충신장의 배경
아코 사건에 대한 내용은 아코 사건 직후 얼마 지나지 않는 1706년에 인형극 무대 상연이 처음 시도되었으나, 상연 직후 막부로부터 상연 금지 명령이 내려졌고 그와 같은 엄격한 언론통제가 막부가 무너진 1868년의 명치유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사건 3년 뒤인 1706년 6월에 오사카 다케모토 극단에서 지카마쓰 몬자에몬이 집필한 “碁盤太平記(바둑판 태평기)가 상연되었다. 이 때까지 아코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할 수 없었다. 충신장은 아코 사건이 일어난 지 47년이 지난 1748년에 처음으로 인형극 무대에 올려졌다. 이 때도 아코 사건을 막부에 대항한 반역 사건으로써 막부에 의해서 사건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언론 통제 명령이 계속된 상황이었으므로, 충신장의 시대적 배경을 훨씬 이전인 3-4백년 전의 가마쿠라 막부 말기 시대로 거슬려 올라간 사건으로써 상정하였고, 등장인물 또한 가명을 쓰는 등 배경을 달리 해야만 했었다.
47인 아코 무사 할복 사건
아코사건은 1703년2월4일 전원 할복 명령을 받으면서 에도 시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부터 12일 후인 1703년2월16일에 에도 나카무라 극단에서 “아코 사건”과 “소가복수담”을 섞은 “소가의 심야습격(曙曽我夜討)”이 상연되었는데, 막부로부터 바로 이틀 후인 2월18일 상연중지처분을 받았음이 “歌舞伎年表” 1권 290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 구체적 검토가 어렵지만 추측해 본다면 아코 사건의 10여일만에 이에 대한 내용이 연극으로 상연될 준비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인간사회의 권력 추구의 역사적 유사성 측면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개창과 말기에 일어났던 복수극, 그리고 일본의 3대 복수극의 알려진 이야기들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소재가 서로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소재와 희곡적 가공의 이야기들이 혼합되어 있어 다수의 사람들이 상호 유사점을 논하기가 어렵지 않게 보인다.
“하치만구 신사”
“하치만구 신사”는 오진 천황과 신공황후를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로써 일본의 4대 신사 (宇佐神宮, 石清水八幡宮, 筥崎宮, 鶴岡八幡宮)에 속하고 그 중에서도 최고의 국가 신사(国幣中社)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오진천황과 신공황후*는 일본이 고대 가야국이 위치했던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중심적 인물이다. 하치만신은 군사적 전쟁의 신뿐만이 아니라 어업과 상업의 주신이기도 하다.
(*일본의 제15대 천황으로 알려진 오진 천황(応神天皇)은 “오진” 천황이라고 일본어 발음으로 표기하면서, 신공황후(神功皇后)는 “진구 황후(じんぐうこうごう)”라는 표현 대신에 “신공” 황후라는 한글 발음으로 표기하는 까닭을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신공황후는 오진천황의 어머니로서 알려진 인물인데, “고사기”의 기록에서도 실존연대가 불분명하고, 또 비너스의 여신상으로서 신화적 요소가 강한 측면이 있는 인물이기에 “신공”황후라는 한자어 우리말 발음으로 특기할 이유가 설득력 있게 존재한다고 여겨서 또 한일관계의 역사성에서도 본다면 외래어 표기법 준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원래적 우리말 표기법에 해당할 것이므로 나는 이와 같이 계속 표기한다.)
가마쿠라 막부 정권을 개창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みなもと の よりとも, 1147-1199)는,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가 1063년 시주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를 1180년에 북쪽 산기슭으로 옮겨, 원씨 가문의 조상을 모시는 사찰로 정비했다. 무가의 신을 모시는 하치만구 신사는 가문의 뿌리가 청화 원씨인 덕천가강의 에도 막부 시대에서는 불교(불교는 막부가 지원한 종교)의 건축물이 많이 들어섰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신교가 국교로 올라서고 신불분리 법령이 제정되어 불교 승려에게는 환속 명령이 내려졌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 역사의 배경
역사상 일본은 한반도를 대략 4번 침입했는데, 그 첫 번째가 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 도래, 두 번째가 백제 멸망직후 백제의 재건을 노린 오늘날 장항 군산 지역인 백천강 전투, 3번째가 풍신수길의 임진왜란이었고, 4번째가 한일합방으로써 조선을 식민지 지배에 성공하게 된 역사적 과정이 있다. 한일합방은 일본의 침략 입장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둔 일이었는데 그것은 실패했던 임진왜란을 교훈삼아 오랜 시간에 걸쳐서 군사적 공격의 필요 없이 상대방의 실수와 물밑 작업을 통하고 점진적인 방법으로써 목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첫 번째 한반도 남부 접근로 확보를 목적으로 했던 신공황후 때의 출병은 목적 달성에 반반의 성공을 한 것으로 간주되고, 두 번째의 출병은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적 협공에 초토화되어 완전한 군사적 패배를 겪었으며, 3번째 임진왜란 출병은 거창한 침입 목표를 달성하기는 커녕 용두사미로 패퇴하고 말았으나, 4번째 한일합방 때는 오랜 시기에 걸쳐 은밀하고 교묘한 국제간의 외교적 술수와 군사적 양동작전의 접근방법을 통해서 성공시킬 수가 있었다.
첫 번째 일본의 군사적 진출이라고 믿는 신공황후 때의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영토적 거점을 확보했다는 주장인데 그 시기가 2세기에서 4세기 때이어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기록으로 확인되지 못하고 있는 논란이 큰 주장이다.
하치만 신사는 일본의 대외 원정 즉 군사적 또는 무역적으로 해외 진출을 실행하고 장려하는 종교적 사상적 철학적 정치적 이론을 제공하는 그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신사에 해당한다.
충신장의 정치사상적 배경은 현재 세가 부족하고 힘이 없는 세력-도전자, 언더독(underdog)이 마침내 승리할 수 있게 되는지 즉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론을 철학적으로 제시한 것에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현 막부 정권에 대항하여 천황세력이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국제적으로는 변방소국이 중원을 차지하는 방법 즉 작은 나라-일본-가 큰 나라-중국-를 이기는 방법을 함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복수극으로써 충신장은 전쟁론-병법서의 내용을 깔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특히 자객열전과 오자서열전과 손자병법 등의 여러 사례를 거론하고 있으며, 그 사례들에 함의되어 있는 내용과 의미를 통해서 천황 세력과 막부 세력간의 정권 교체를 목표로 서로 대립 경쟁하는 정치적 사상적인 기초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Just because you can’t see it doesn’t mean it’s not there.”
[2] it indicates the thinning of loyalty and trust and the beginning of disorder. As for the Foresight (like prophecy), it is the flower (appearance) of Tao and the beginning of ignorance.
[3] Therefore the true man dwells in the thick instead of the thin and dwells in the fruit instead of the flower. Therefore he leaves the latter and takes the former.
[4] “One cannot understand even a holy man's teachings without study; one cannot know the abilities of a great man without putting him to use; one cannot know the delicious taste of fine food without eating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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