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투후는 ?侯 (투후)인가?
1. ?侯 (투후/타후) 金日磾(금일제)
북송(宋) 때 977-984년 사이에 편찬된 사서 太平御覽(태평어람)의 관직(職官部) 시중(侍中) 편에서 金日磾(금일제)를 ?侯(투후)로 봉했다는 삼보고사의 기사를 인용해 놓고 있다: 《三輔故事》曰 金日磾字翁叔 封?侯 有忠勤之節 七葉侍中 (삼보고사 왈 금일제 자 옹숙 봉 투후 유 충근지절 칠엽시중).
金日磾字翁叔 封?侯 有忠勤之節 七葉侍中 |
금일제의 본명 이외의 흔히 부른 이름 자는 옹숙이었고 ?侯(투후)의 봉작을 받았다. 그는 충성심이 깊고 마음을 다해 성실하게 근무한 예의를 갖춘 사람이었고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살피는 궁정내시라는 높은 관직을 지냈다. |
시중(侍中)
시중(侍中)은 진(秦)나라 때부터 설치한 관직이름으로 왕의 곁을 따르며 왕이 먹고 입고 자는 모든 일상적 일을 책임지며 왕명을 받드는 최측근이다. 조정의 어전회의에도 왕의 좌우에서 곁들며 보살피며 국정을 논하는 왕의 측근 높은 대신이었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경호실장과 부속실장을 겸하는 국왕의 최측근이었다. 궁정내외를 오가며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고대에선 納言(납언)으로 불리기도 했다. 권력은 권력자와의 지근거리에 비례한다는 문지방 측근권력의 법칙에 따라 그 폐단이 심한 경우가 적지 않게 많았다. 왕의 최고의 신임을 받아 구중궁궐내 궁정내시로서 고관대작에 해당하여 충성심뿐만 아니라 높은 도덕심이 요구되는 자리였지만 궁정내시 중에 왕의 총애를 받아 전권을 쥐고 국정농단을 자행한 역사상 사례가 많이 나타났다. 한대의 멸망을 가져온 十常侍(십상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七葉侍中(칠엽시중)
七葉(칠엽)은 문무왕릉비 비문속의 “부칠엽”과 같은 의미 즉 칠엽귀신(七葉貴臣), 칠엽중신(七葉重臣)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시중은 국왕의 좌우 곁에 서서 왕명을 출납하는 왕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으로서 비싼 담비가죽으로 된 초선(貂蟬)의 관을 머리에 쓰고 있어 그 신분을 쉽게 알 수 있는 고관대작의 위용을 뽐낸 사람이었다. 문무왕릉비문의 칠엽은 칠엽귀의 준말임을 알 수 있다. 傅(부)는 스승 부 한자로 태부, 또는 소부의 준말이다. 太傅(태부)나 소부는 태자(태자가 후에 제왕의 자리에 오르니 태부라고 말하면 국왕의 스승이 되는 셈이다)의 교육을 책임진 최고의 대신 최고의 귀족출신이 맡는 고관대작이다. 따라서 문무왕릉비 비문의 “傅七葉(부칠엽)은 태부칠엽귀의 준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문무왕릉비 비문의 글자 판독은 지금까지 해석한대로의 “전칠엽(傳七葉)”이 아니라 “傅七葉(부칠엽)”이다. 傳(전) 글자와 傅(부) 글자는 자세히 살피면 점 하나 차이가 있고 해서 구별이 가능한 글자이긴 하지만 중국인들 책에서도 서로 보기에 헷갈리기 쉽고 혼동하기 쉬운 한자에 속한다고 분류에 놓고 있는 한자이다. 언뜻 잘못 판독하면 전(傳)과 부(傅) 글자 차이를 혼동하기 십상이다.
태부(太傅)
태부(太傅)는 관직명이다. 삼공(三公)의 위치에 있는 벼슬로서 황제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 미래의 권력 황태자를 교육하는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익숙한 고관대작을 이른다. 태부는 국왕의 교육을 맡는 관리로서 대개 국왕과 같은 혈통의 종실출신이 맡는다. 태부는 그만큼 중요한 자리이기에 봉건왕조의 특성상 왕의 최고신임을 받고 있는 최측근이 대대로 맡은 고관대작이었다. 신라의 시조를 연결하는 문무왕릉비문의 구절속의 “傅七葉(부칠엽)”이 “태부칠엽귀”의 준말인 “傅七葉(부칠엽)”로 해석된다는 사실은 김해김씨의 김씨문중 족보에서 김씨시조를 “알지 대보공((閼智 大輔公)”으로 불러온 바 여기의 대보공(大輔公)이 국왕의 스승 태부를 뜻하는 말이라는 사실에 부합된다. 大輔(대보)는 천자를 보좌하는 대신(大臣) 즉 고관대작을 의미하는 단어이니 대보공은 태부의 벼슬을 지낸 사람을 이른다. 또 傅(부) 글자는 견훤(甄萱)에 의해서 옹립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휘가 傅(부)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원문구절 “敬順王諱傅”을 보라. 傅(부)는 師傅(사부), 傅國(부국)이란 말에서 알듯이 보필(輔弼) 보좌(輔佐)하다는 뜻의 글자이다. 傅(부)는 설문해자에서 재상(宰相), 수상(首相) 등 다른 사람을 보좌(輔佐)하는 의미 상(相)의 뜻으로 풀이했다. 좌전에 정장공이 왕을 보좌하다는 뜻으로 쓰인 “鄭伯傅王”(정백부왕)이 그 예이다.
궁정내시 금일제
또 하나 덧붙여 설명한다. “秺侯祭天之胤 傳七葉”(투후제천지윤 전칠엽)으로 해석하여 문무왕릉비문 속의 투후는 흉노 출신의 금일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사료적 근거로써 한서의 금일제(金日磾)전을 들고 있다. 한서의 저자 반고의 논평인 해당 구절은 “金日磾夷狄亡國 羈虜漢庭 而以篤敬寤主 忠信自著 勒功上將 傳國後嗣 世名忠孝 七世內侍 何其盛也 本以休屠作金人為祭天主 故因賜姓金氏云”인데 여기서 보이듯이 “七世內侍(칠세내시)”라고 적었다. 말세, 말엽이라는 우리말 단어에서 보여지듯 엽(葉)과 세(世) 글자는 서로 통용된다. 한서는 곽광과 금일제전을 함께 싣고 있는데 곽광과 김일제의 가계를 대조대비해서 교훈을 설명하고 있는 한서의 편찬 의도에서 본다면 칠세(七世)내시는 칠대(七代)내시로 해석된다. 곽광과 금일제는 뿌리깊은 본토토박이 군벌호족 외척세력과 뿌리기반없는 외국이민자 노비출신이라는 출신배경의 큰 차이뿐만 아니라 한서의 영행전(총애받은 내시들이 국정을 전횡한 사례들)에서 금일제와 금일제 아들을 거명하면서 비록 이들이 각각 한무제와 한선제에게 ‘총애를 받은 내시이긴 하였지만 그 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측면에서 다른 총애받은 내시들의 삶과는 다르다고 논평한 구절(“昭帝時 駙馬都尉秺侯金賞 嗣父車騎將軍日磾爵為侯 二人之寵取過庸 不篤”, 한서, 佞幸傳)을 참조하라.
?(투)와 秺(투) 한자
?(투)는 옥편 사전에서 陀(타)의 와전된 글자이고 또 秺(투)의 이체자로 쓰인 글자로 서로 같은 의미의 글자이다. 왕의 총애를 받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질투와 시기를 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권력이란 좇는 사람은 많고 오를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관료제 속성상 질투와 시기심을 완전히 배제해 낼 수 없는 구조적 결점이 내재되어 있다.
중국의 김씨 족보상 시조를 금일제(金日磾, BC 134-BC 86) 타후(?侯)로 적고 있다.
?侯金日磾公像, https://www.360kuai.com/pc/detail?url=91d9c54b873fe5c70&cota=1&sign=360_e39369d1
2. ?侯(투후) 복강백(伏羌伯)
?侯(투후)는 서쪽 변경의 외부 족속의 반란을 굴복시켰거나 또는 거기에서 귀순해 온 우두머리 수령을 지칭한다.
명나라 丘濬(구준)의 애도시 “만복강백(挽伏羌伯)” 중에 ?侯(투후) 단어가 들어 있는 싯구절이 등장한다. “一代知名將 三邊屢建功 帝怜何力義 人比?侯忠 (일대지명장 삼변루건공 제령하역의 인비투후충)” 구절이 그것이다. “만복강백”은 죽은 강백에 대해 애도를 표한 만가시이다. 복강백(伏羌伯)은 귀순해 온 서쪽 변경에 살고 있는 유목민족인 강족의 우두머리 수령을 말한다. 伏羌伯(복강백)은 명사(明史)에 등장하는 감숙성 무위 출신의 군대 장수인 모충과 모예를 지칭한다. 모충(毛忠)은 1468년 반란 진압전에서 전사했고 복강백 모예(毛銳)는 할아버지인 모충의 작위를 이어받았는데 반란에 패한 장수로 죄를 지었고 1523년에 죽었다. 복강백은 금일제의 고향 무위 출신이니 무위 출신으로 한무제 때 총애를 받아 고위직으로 출세해 역사적 인물이 된 금일제와 쉽게 연결된다. 그래서 애도시에서 보통사람들은 투후와 연결해서 그를 애도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侯(투후)는 서북쪽 변경의 외국족속으로 중국으로 귀순항복해 와서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 금일제를 지칭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투)는 秺(투)의 이체자로 쓰이고 태평어람에서 금일제로 투후(?侯)로 봉했다는 기사를 인용한 사료에 의거하여 여기의 투후(?侯)는 한대의 금일제로 해석하는 것이 명확하다. 丘濬(구준)의 만복강백(挽伏羌伯) 애도시 구절은 서쪽 유목부족 강(羌)족의 우두머리 복강백의 죽음을 같은 서융의 한 갈래인 흉노족에서 귀순항복해 온 한나라 때의 금일제에 비유하여 애도하는 만가이다.
?侯 伏羌伯(투후 복강백)은 백제가 망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서쪽 변방의 수비를 맡았던 흑치준의 묘지명에 등장하는 “秺侯入仕 西戎孤(臣)(투후입사 서융고신)의 구절의 의미와 통용된다. 西戎孤臣(서융고신)은 춘추전국시대 진목공(秦穆公, BC 683-621)의 치세에 공헌한 유여(由余)를 가르킨다. 유여는 부모가 진나라에서 서쪽 변방으로 도망간 장군으로 융족에서 귀순하여 진목공의 대신이 되었다. 흑치준도 유여도 복강백도 금일제도 모국이 망한 후 중국에 귀순해서 고관대작을 습작했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만복강백(挽伏羌伯)의 한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一代知名將 三邊屢建功 帝怜何力義 人比?侯忠 (일대지명장 삼변루건공 제령하역의 인비투후충) |
한 세대를 풍미한 명장이었네. 북서남 변경 국경지대에 높은 누대를 건설한 큰 공을 이루었네. 국왕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의사라고 아까워하고 사람들은 충성을 다한 투후에 견준다네. |
《太平御覽》(북송宋 977-984년 편찬) 《職官部》《侍中》 편에서 金日磾(금일제)를 ?侯(투후)로 봉했다는 삼보고사의 기사를 인용해 놓고 있다: “《三輔故事》曰 金日磾字翁叔 封?侯 有忠勤之節 七葉侍中 (삼보고사 왈 금일제 자 옹숙 봉 투후 유 충근지절 칠엽시중)”.
중국 입장에서 三邊(삼변) 즉 변경의 세 방향 변경에 위치한 외국은 흉노 남월 조선이고 사기에서 삼변을 이와 같은 의미로 썼고 후한서와 자치통감에서는 삼변을 동 서 북쪽의 변경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다.
羌(강)족은 한자에 양 갓머리부수가 있는 것이 시사하듯이 양을 목축하는 서쪽 변방의 오랑캐를 뜻한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 중 ‘어디서 들려오는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로 번역되는 구절이 “一聲 羌笛(일성강적)”인데 서쪽변경에 사는 강적의 피리소리를 말한다. 서쪽이 아니라 동남쪽의 왜놈들이 쳐들어와 사면초가의 백척간두에 놓인 임진왜란, 항우가 패해 처한 사면초가, 625전쟁 때 한밤중에 피리 불고 처내려온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위력에서 보듯이 서쪽 변경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2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개시 시그널로 쓰였던 바이올린 음악처럼 삶과 죽음의 순간을 구슬프게 울려주기도 하지만 주검 앞에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 장단으로 북치고 장구친 장자의 죽음관이 돌고도는 생사화복의 인간사 법칙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3. 䅊侯澤正長(투후택정장)
秺侯(투후)는 䅊侯(투후) 즉 강호무림(江湖武林)의 고대광실에 사는 지위가 높은 사람 䅊侯澤正長(투후택정장)
명(明)나라 시대 佘翔(사상)의 “항주(무림)로 돌아가는 김장군를 환송하며”라는 “送金開府還武林(송김개부환무림)”제목의 오언율시 5수가 있는데, 이 한시 가운데 “䅊侯(투후)”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䅊(투) 한자는 강희자전에서 찾아보면 秺(투)의 이체자로 쓰이는 한자로써 광이 따린 큰 저택이나 언덕위의 하얀 집 고대누각처럼 확트인 집-(屋之開張者)을 뜻하는 글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武林(무림)은 물의 도시로 이름난 강소성 항주의 별칭이고, 개부(開府)는 군인으로 군대에 근무하는 높은 계급의 장군을 뜻한다. 澤(택)은 습지 물가 호수를, 正長(정장)은 최고 책임자 마스터를 뜻하니, 澤正長(택정장)은 큰 호수나 해안바닷가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지역의 최고 사령관을 지칭한다. “䅊侯澤正長(투후택정장)” 구절이 들어 있는 이 한시를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
心事明天日 才猷邁伯王 暫抛魚鳥陣 一臥水雲鄉 葛井丹初熟 䅊侯澤正長 安危須將相 元是郭汾陽 |
심사명천일 재유매백왕 잠포어오진 일와수운향 갈정단초숙 투후택정장 안위수장상 원시곽분양 |
薜荔園詩集(벽려원시집)에 수록된 사상의 한시를 우리말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군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 보았고, 군사전략을 짜내는 재능은 항우를 능가하였네.
고기떼군진이나 기러기진법을 치는 훈련은 잠시 물러 두고,
물가의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서,
갈대밭이 붉게 물들어 갈 때까지 누워 있으면 어떠하리.
그대 투후는 호수와 해안가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장군이여!
안전과 위험이란 장군과 고관대신들에게 동시에 따르는 법!
일찍이 곽자의(당나라 때 안록산 난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운 유명한 명장) 장군이 그 예가 아니던가!
삶에서 安危(안위)의 의미
이 시에서 “安危須將相(안위수장상)”이라고 말했다. 요즈음은 공무원은 철밥통이라고 말하지만 고위공직자나 군대의 장군의 운명은 언제 그 목이 날라갈지 모르는 생명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다들 평소에는 그렇게 말로는 위험이 닥칠 때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사람들일지라도 막상 자기 자신에게 큰 위험이 닥치게 되면 몸사리고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도망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갖고 있다. 리스크 없는 투자는 없고,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투자격언이 말해준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백천간두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마지막 남은 12척의 전선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사즉생의 자세로써 구국의 영웅으로 불멸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치욕의 궁형을 당하고서 사기의 역사를 완성하였으며, 공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가장 곤궁할 때 춘추의 역사를 썼으며, 굴원은 배척받고 유배를 당했을 때 죽음을 시사여귀로 여기고서 불멸의 문장 이소부를 지었으며, 좌구명은 두 눈이 멀어 책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불후의 국어를 편찬했으며 손자는 다리가 잘려서 전쟁에 나갈 수 없을 때 지피지기백전백승의 손자병법을 체계화했다. 수백년 이룩해 놓은 문명을 한 순간에 파괴시켜 버린 팬데믹 역병과 세기적 전쟁 속에서도 인류는 살아 남았고 역사는 전진하고 진보해왔다. 인류의 몸속에는 위기 속에서 해결을 찾아내는 정반합 제3의 길 생존 본능 발전 본능의 유전자(DNA)가 들어있다.
䅊侯(투후) 의미
이 한시에서 군대 장수인 김개부를 “䅊侯澤正長(투후택정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䅊(투) 한자는 강희자전에서 찾아보면 秺(투)의 이체자로 쓰이는 한자로써 광이 따린 큰 저택이나 확트인 큰 집-(屋之開張者)을 뜻하는 글자로 설명한다. 중국의 동쪽 해안가 지방은 호수가 많은 평지 지역이고 호수와 바다가 운하와 뱃길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강과 호수와 바다가 있는 물가의 지역에 살아온 동이족의 중심지역으로 사람과 물건이 한데 모여서 예로부터 부유하고 풍요를 구가해 온 인류의 정신문화와 물질 문명의 발상지이고 개화지역이다. 부유하고 풍요를 구가하기에 큰 광이 딸린 대저택과 확트인 누각을 짓고 살아갈 수 있다.
䅊(투) 글자는 秺(투)의 이체자로 쓰이는 한자로써 광이 열려있는 큰 저택을 의미한다. 秺(투) 글자는 가을날 추수기에 논밭에 세워두는 볏단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秺(투) 한자에 들어 있는 뜻은 볏단을 의미하므로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형님먼저 동생먼저 서로 볏단 갖다 주는 화합의 미풍양속을 말해주는 그 볏단 나르기 미담에서 알 수 있듯이 부와 풍요를 상징한다. 그래서 글자의 발음이 질투하다 시샘하다의 妒(투)로 발음하는 글자이다. 누구나 최고지위에 오르게 되면 누구에게든지 선망의 대상이 된다. 질투와 시샘이 지나치면 투서를 하거나 무고를 하기에 이르는 잘못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최고를 지향하고자 하는 발전과 풍요의 추구 DNA가 없다면 어찌 생존의 가치와 그 방법이 따르겠는가?
예로부터 사람과 생산물이 집중되어 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지역인 제음 지역에 투후가 봉해졌고 투후가 사는 고장에 투성(秺城)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 문무왕릉비 비문 속의 “투후제천지윤” 투후는 금일제의 고장인 중국 서북쪽 변경 사막 지역의 감숙성 무위(武威)군 지방이 아니라 상나라 동이족의 풍요의 고장 산동성 제음군 성무(成武)현을 본고장으로 한다. 투후는 무위 출신의 금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무 출신의 상구성을 말한다. 삼변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하는 주비산경(周髀算經)의 구고정리(句股)가 잘 보여주듯이 변경이 아니라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백가제해”의 의미로 국호를 정했다는 백제의 제(濟)는 중간에 낀 지역 즉 중원을 의미한다. 물자와 사람이 쉼없이 드나들고 역사를 통해 정권이 수없이 뒤바뀌기를 반복하는 중원 지역이다. 중원은 쟁투지역이다. 중원은 주비산경에 들어 있는 3-4-5 직각삼각형의 구고정리의 그림을 보라.
4. 유득공의 투후 제천지윤 해석
유득공(柳得恭)은 그의 古芸堂筆記(고운당필기)권6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侯 祭天之胤 傳七葉 云云 依倚考其上下文義 似敍其世次也 然則以鷄林之金爲金日磾之金歟” (투후 제천지윤 전칠엽 운운 의의고기상하문의 사서기세차야 연즉이계림지금 위금일제지금여)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侯 祭天之胤 傳七葉”(투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구절을 적고 있는데 이 문장의 앞 뒤 선후 관계를 따라 문장의 뜻을 살펴보면 아마도 조상의 세대를 적고 있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金日磾의 金이 계림(鷄林)의 김(金)이지 않을까?”
유득공(1748-1807)의 견해는 1760년 영조(재위 1725-1776) 36년 경주부윤이 된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가 탁본한 문무왕 비문을 보고서 그러한 견해를 나타냈을텐데, 탁본상 뚜렷한 “星漢王”(성한왕) 부분의 한(漢) 글자를 공란으로 비워 두고 있다는 사실과 또 탁본의 “秺侯”(투후)를 “?侯”(타후)로 적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유득공의 견해는 진실로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 비록 유득공은 ‘비문의 전체 문장 내용 전문(全文)을 볼 수 없으므로 당분간은 딱히 증거하지 못하겠다’-“未見全文姑不敢證也”-고 말하긴 하였으나, 훗날 일제 식민사학계의 “흠미석전(釋典)”이라고 끼워넣기 조작의 범죄를 저지른 금사룡 같은 이가 유득공의 견해라고 끼워맞추기 식으로 삽입했을 가능성마저 배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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