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지화
무고(巫蠱)의 뜻
무고(巫蠱)는 무술사(巫師)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저주와 해를 입히는 행위를 말한다. 蠱(고)의 한자 고어체는 인데 글자모양처럼 벌레 먹은 것 즉 고독무술(蠱毒巫術, poisonous magic)을 의미한다. 증거를 날조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헐뜯는 무고(巫蠱)는 반악(潘岳)의 서정부(西征賦)에서의 “吊 戾園 于 湖邑 諒遭世之巫蠱”(조려원어호읍 량조세지무고) 구절 표현처럼 BC 91년에 일어난 무고지화 여태자 반란 사건을 가르키기도 하다.
반악의 서정부 무고지화 구절
반악 서정부 구절 | 문선 이선 주 |
弔戾園於湖邑 諒遭世之巫蠱 探隱伏於難明 委讒賊之趙虜 加顯戮於儲貳 絕肌膚而不顧 作歸來之悲臺 徒望思其何補 | 〈漢書曰:戾太子據與江充有隙。會巫蠱事起,充遂至太子宮,掘得桐木人。太子無以自明,乃斬江充。與丞相劉屈氂戰,兵敗,東至湖邑,自縊而死。車千秋訟太子冤。上憐太子無辜,乃作思子宮,為歸來望思之臺於湖。宣帝即位,謚曰戾,以湖邑閿鄉為戾園。又太子罵充曰:趙虜乃亂吾父子也。蒼頡篇曰:委,任也。尚書,王曰:弗迪有顯戮。漢書,疏廣曰:太子,國儲副君。宋均元命苞注曰:儲君,副主。言設以待之。王命論曰:高四皓之名,刻肌膚之愛。幽通賦曰:雖覆醢其何補?〉 |
호현에 위치한 여태자 능원을 조문하노니 무고지화의 여태자 반란 사건 그 때가 생각난다.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기란 무척 어렵다. 참소한 적이 있는 조나라의 포로 출신을 고관으로 임명해줬더니, 부자지간을 이간질시키고 황태자를 사형에 처해서 핏줄의 정마저 영영 끊으려고 하는가? 죽은 영혼이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슬픔의 망대를 짓고, 걸으며 지나간 과거를 사모해 본들 어찌 한번 죽은 목숨이 되살아난다는 것일까? |
한무제 때의 무고지화 반란에 대한 설명에 앞서 권력암투의 생생한 예시로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기묘사화를 조선왕조실록 기사로 인용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기묘사화와 走肖爲王(주초위왕)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년) 기묘년에 일어난 권력 투쟁 사화(士禍)이다. 사림파 조광조(趙光祖),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이 사약의 극형을 당했고, 김안국 김정국 형제, 정광필, 안당 등 조정 중신들도 피해를 입었다. 기묘사화의 상징적 사건은 “走肖爲王”(주초위왕)이었다. “走肖”(주초)는 “趙”(조)의 파자(走+肖= 趙)에 해당하고 따라서 주초위왕은 “趙爲王”(조위왕) 즉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에 오른다’는 숨어 있는 의도가 들어 있는 문구이라는 것이다. 나뭇잎에 단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적은 뒤, 이 부분을 벌레가 갉아먹게 만들어 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동산 냇물에 흘려 내리면 왕이 그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곧 해당자들을 처벌하게 될 것을 기도한 권력 투쟁 음모론이다. 남곤은 조광조 등에게 앙심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일 음모를 기도하였다. 이에 나뭇잎의 단감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모와서 나뭇잎에 쓴 “走肖爲王”(주초위왕) 글자 부분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무제의 무고지화 난리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기도하였다. 선조실록에 실린 이 기묘사화 권력투쟁 음모론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은 국편위 번역을 여기에 카피해 온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109021_002
《선조실록》 선조 1년(1568) 9월 21일(양력 10월 11일) 정묘 2번째 기사
當初袞求交於趙光祖等 光祖等不許 袞積憾 欲殺光祖等 求得木葉上食甘之蟲 以蜜多書走肖爲王四字於木葉上 放蟲而使之食 如漢 公孫病已之事 有若天成者然 袞家在白岳山下景福宮後 自其家泛水 而流送於闕內御溝 使中廟見而大驚 因告變以成其禍 中廟實錄或爲遺漏 故於此略爲載錄 |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 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
*주: 한(漢)나라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 병이는 무제(武帝)의 증손인 선제(宣帝)의 어릴 때 이름. 그가 태어난 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무고사건(巫蠱事件)이 일어나 그의 조부 여태자(戾太子) 이하 전 가족이 화를 당하고, 병이는 강보에 쌓여 군저옥(郡邸獄)에 수감되었다. 운기(運氣)를 점치는 술사(術士)가 장안(長安) 옥중에 천자기(天子氣)가 있다고 말하니, 무제가 사자(使者)를 보내 무고 사건에 연루된 장안의 모든 죄수를 조사하여 가차없이 다 죽였다. 이 때 병이는 정위감(廷尉監) 병길(邴吉)의 보호를 받아 살아났고 뒤에 곽광(霍光)의 주선으로 소제(昭帝)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한서(漢書)》 권8 선제기(宣帝紀). |
한무제 때의 무고지화(巫蠱之禍)
BC 92년 12월 무고 사건이 발생했다. BC 128년 위자부가 위태자를 낳고 황후에 올랐고, BC 122년 나이 7세의 려태자(戾太子) 유거(劉據)가 황태자에 올랐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육세양육세한이고 육대를 넘어 칠대가 최전성기에 해당한다. 한무제는 한나라 칠대황제였다. 천하의 한무제도 집권 햇수가 50년을 넘어가고 나이가 들어가니 국정 장악력에 틈이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벌였던 수많은 전쟁에 대한 후유증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쟁이 심화되고 무고한 옥사, 익명 투서, 저주와 무고의 주술 등의 궁중 암투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태부의 직위에 있던 승상 공손하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은 군대 보급품을 가로챈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때 위청을 잡았던 경사대협 주안세(朱安世)에 대한 추포 명령이 떨어졌다. 공손하는 주안세를 체포해 속죄하려고 했다. 체포된 주안세는 공손경성과 위황후의 딸인 양석공주가 사통해 무제를 저주하는 무고를 저질렀다고 까발렸다. 이에 한무제가 대노해 춘정월 공손하(公孫賀) 부자를 옥사시켰고, 위황후가 낳은 공주와 조카들까지 연루돼 이들 모두 91년 윤4월 주살됐다. 무고(巫蠱)지화의 난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1] 한편 BC 91년은 사마천의 사기가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무고지화는 조선 중종 때 기묘사회에서 잘 나타나듯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권력투쟁의 한 단면이다. BC 122년 황태자에 오른 여태자이었지만 BC 117년 곽거병이 25세로 급사하였고, BC 106년 위청이 병으로 죽은 이후, BC 97년 유박이 창읍왕(昌邑王)에 봉해지는 등 누가 한무제의 자리를 물려받을지 알 수 없는 혼돈의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궁중에 저주의 굿판과 무고의 독기(蠱氣)가 서려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한무제는 엄격한 충성파 측근들인 수형도위 강충(江充), 안도후(按道侯) 한열(韓說), 태감 소문, 어사 장공(章贛) 등을 시켜 엄격한 수사를 지시했다. 강충은 권력 높은 귀척들을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엄격하게 법을 받드는 봉법불아(奉法不阿)의 강직한 신하였다. 한열(韓說)은 韓王信(한왕신)의 증손이고, 조부는 궁고후 한퇴당(韓頹當)이었다.
무고의 증거물들인 파묻어둔 저주의 인형들이 속속 드러나자 려태자는 소부 석덕의 계책을 따라 먼저 선수를 쳐서 강충과 한열 등을 죽여버렸다. 려(戾글자는 포악暴惡하고 죄罪行를 지었다는 뜻이다)태자 이름은 유거(劉據)인데 이름의 글자가 증거(證據)물의 거(據)자이다. 바람 핀 남녀의 상열지사가 불심 검문에 걸려 빼도박지도 못한 증거가 나오면 죄를 지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거나 무고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때처럼 자기의 죄가 들어날 것이 두려워 무고한 상대방을 참소하는 것을 무고죄라고 부른다. 려태자가 애초에 반란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그들을 죽였다는 점이 들어나 사후 복권되긴 하였지만 태자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는 직감(정화2년 한무제가 마음 속으로는 총애하는 구익부인 조첩여가 낳은 어린 막내 아들 여덟살의 유불릉을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했다)이 들어서 반란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겠는가?[2]
여태자가 강충을 다그친 말은 이것이었다: “趙亡虜 亂趙國父子未足邪 今乃亂吾父子” “조나라의 도망자여! 조나라의 국왕과 부자 사이를 이간시키고 난리치더니 그것도 모자라 우리 부자(한무제와 여태자) 사이마저 어지럽히느냐?” 한무제는 여태자가 애초에 반란을 일으킬 이심은 가지지 않았다고 하여 태자가 죽은 곳에 사자궁(思子宫)을 짓고 사후 복권시키기는 했지만, ‘권력이란 부자사이에도 서로 함께 나눌 수 없다’는 말처럼,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대의멸친”(大義滅親)의 법으로써 사형을 당했다. 여태자는 증거가 드러나자 수형도위 강충과 안도후 한열을 죽이고, 황제 조서를 위조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칠월 임오일(양력 9월 1일) 난리를 일으켰다. 무고의 증거가 여태자궁에서 발견되자 궁지에 몰린 위태자는 소부 석덕이 진시황제의 장자 부소가 이사와 조고의 계책에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고사를 떠올리며 강충 등을 먼저 칠 것을 권했다. 강충과 한렬은 여태자에 의해서 참수당했지만 환관 소문과 어사 장공은 장안을 탈출하여 한무제가 머루고 있는 감천궁으로 도망쳐서 위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긴급사태를 한무제에게 알렸다. 이에 감천궁에서 피서를 즐기던 한무제는 승상 유굴리에게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유굴리는 삼월 정사일(양력 BC 91년 4월 9일) 탁군(涿郡)태수에서 승상으로 임명되고 팽성후(彭城侯)에 봉해졌다.
태자 반란군은 수도 장안성 내에서 정부군과 시가전을 벌려 5일 동안 장안대전이 벌어지고 쌍방간에 수만명의 살상자가 발생했다. 칠월 십칠일(양력 9월 9일) 반란군이 패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의 빈객 모두와 과거 태자궁을 출입한 사람들 모두를 잡아다가 사형에 처했다. 위황후 등은 자살하였고 위청 세력은 제거되었다. 위태자 일행은 호현까지 도망쳤지만 팔월 팔일(양력 9월 30일) 지방군에 포위되자 자결했다. 태자의 핏줄이라고는 강보에 싸인 사황증손 유병이(劉病已)만이 병길(丙吉)의 도움을 받아 민가에 숨겨져 살아남게 되는데, 후에 한선제로 등극하게 된다. 여태자가 호현 신발장사꾼 집으로 도피했는바 이는 위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신발을 바꿔 신다의 속담처럼 신발을 벗어 던지는 것은 배신의 행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위태자 반란이 일어나 양측간에 5일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간에 수만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결과를 볼 때 무고지화의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컸음이 능히 짐작된다.
사마천의 “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 편지의 당사자로 유명한 임안은 태자의 부절을 받았지만 북문을 걸어 잠그고 전세를 관망하였다. 이런 임안의 모습에서 반란의 이심이 있었다고 의심을 받아 임소경은 그해 12월 사형을 당했다.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투후의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봉읍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했다. 대홍려 상구성은 마차와 배 수송병사들을 반란군 진압에 투입하였다. 상구성은 반란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반란세력의 주동자인 장광을 붙잡았다. 상구성은 반란이 완전 진압된 구월(양력 10월)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하였다. 시랑 망통은 장안으로 들어가 반란주동자 여후를 추격하여 체포하고 같은 흉노족 사람들에게 ‘반란세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는 표지는 거짓이니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외쳤다. 망통이 여후의 목을 베고 난 후 기마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입성하여 대홍려 상구성에게 알려서 마차와 배 수송병사들을 반란군 진압에 투입하게 하였다.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마통을 따라서 여후를 함께 체포하고 반란세력의 주요인물인 태자소부 석덕을 체포한 공로로 덕후에 봉해졌다.
무고지화 여태자 반란을 진압했던 승상 유굴리는 삼족이 멸문당하고, 소문은 광교 다리에서 화형당하고, 투후 상구성은 대불경죄로 자결하고, 망통, 망하라, 경건 등은 BC 89년 반란을 공모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한무제 사후, 권력은
곽광 김일제 상홍양 상관걸의 탁고대신 사인방[3]이 차지하고 득세하게 되었다.
한서 공신표에 기록된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여태자의 무고의 반란을 진압 타도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진 사람은 상구성과 마통 그리고 경건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봉작 사실을 적고 있는 한서의 기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무제소제선제원제성제 공신표》
시호성명 | 제후 후작을 받게 된 구체적 공적 내용과 봉읍의 호수 | 봉작을 작위받은 시기 | 봉읍지 |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 대홍려 직위에 있던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하고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했다. |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옮겨 떨어져 있으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구나”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제음현 |
중합후 마통 | 시랑의 직위를 맡고 있는 마통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자들을 추격하여 반란세력 주동자인 여후를 잡은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을 수여받았고, 그 봉읍의 호수는 4천8백7십호수에 달했다. 。 | 같은 날 7월 계사일에 제후 작위에 봉했고, 2년 후 정화4년 도위 궤 등과 모의하여 군사 반란을 기도한 죄로 후작이 취소되고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 발해 |
덕후 경건 |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마통을 따라서 여후를 함께 체포하고 반란세력의 주요인물인 태자소부 석덕을 체포한 공로로 덕후에 봉해졌고, 봉읍의 호수는 3천7백35호에 달했다. | 7월 계사일에 제후 봉읍 작위가 수여되었고, 2년 후 정화4년 마통과 함께 반란을 공모하고 기도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 제남 |
한서 유굴리전에 기재된 투후 상구성 기록
유굴리에 대한 기록은 漢書 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에 실려 있다. 유굴리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上曰 侍郎莽通獲反將如侯 長安男子景建從通獲少傅石德 可謂元功矣 大鴻臚商丘成力戰獲反將張光 其封通爲重合侯 建爲德侯 成爲秺侯 諸太子賓客 嘗出入宮門 皆坐誅”. 이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무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랑 망통은 반란세력의 주동자 여후를 체포하였고,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망통을 따라서 반란세력의 주요 협력자인 태자의 소부 석덕을 체포하였으니 가히 그 공이 크다.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반란세력의 주동자인 장광을 붙잡았다. 이런 공로로 망통을 중합후에 봉하고, 경건을 덕후에 봉하며, 상구성을 투후에 봉한다’.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의 빈객 모두와 과거 태자궁을 출입한 사람들 모두를 잡아다가 사형에 처한다.”
또 이 유굴리전에는 상구성에 관련된 대한 또 다른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侍郎莽通使長安 因追捕如侯 告胡人曰 節有詐 勿聽也 遂斬如侯 引騎入長安 又發輯濯士 以予大鴻臚商丘成”. 이 구절을 번역하면, “시랑 망통이 장안으로 들어가 반란주동자 여후를 추격하여 체포하고 같은 흉노족 사람들에게 ‘반란세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는 표지는 거짓이니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외쳤다. 망통이 여후의 목을 베고 난 후 기마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입성하여 대홍려 상구성에게 알려서 마차와 배 수송병사들을 반란군 진압에 투입하게 하였다.”
騎는 騎兵(기병), 發은 군사력을 동원하다의 뜻이고, 予(여)는 생사여탈(生殺與奪)이라는 말의 뜻과 같이 주다의 급여(給與), 알리다의 예고(予告)의 뜻이다. 力戰은 역전분투(努力奮戰)의 뜻으로써 이 말이 쓰인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반란 세력의 규모가 매우 컸고 전투 상황이 치열한 접전 상황이었음을 능히 짐작된다. 위태자 반란이 일어나 양측간에 5일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리하여 양측간에 수만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결과를 볼 때 무고지화의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컸다. 당연히 반란 진압의 결과가 미친 영향 또한 클 수 밖에 없었다.
輯濯(집탁)은 수레 마차 배 등-行船(행선, 가선행사駕船行駛)- 수송 수단을 관장하고 있던 관서 명칭이다. 안사고의 주해는 “輯與楫同 濯與棹同 皆所以行船也 令執楫棹人為 越 歌也”이라는 설명이 있다.
大鴻臚(대홍려)
大鴻臚(대홍려)는 제후왕들과 주요 관리들을 접대하고 관리하는 업무, 그리고 국가 제례와 황실 종친의 의례를 맡고 있던 중앙 관서 중의 최고위직 우두머리로서 후대의 6조판서 제도로 분류한다면 예조판서에 해당한다. 주례(周禮)에 기술된 “大行人”(대행인)의 관직을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엔 典客(전객)으로 개칭했다가 한경제 때 大行令(대행령)으로 또 한무제 때인 BC 104년에는 “大鴻臚”(대홍려)로 다시 바꾸었다. 한경제 때 주요 제후국의 제후왕들이 오초칠국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던 오초칠국의 난 역사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대행려”직을 개칭하는 직제개편의 배경에는 대홍려직의 주요 업무가 제후왕들과 그들의 빈객들을 접대하거나 또는 황실 종친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어서 즉 황제의 권력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제후국의 동향이나 그들의 빈객들과 정부 고관들을 접대하는 업무를 관장하고 있어서 정권이 바뀌면 그에 따라 대홍려직을 개편할 필요성이 있었다. 대홍려는 국내외 민정 동향에 밝은 외교통으로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대제후국 관리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주례(周禮, 秋官 大行人)에서 “大行人掌大賓之禮及大客之儀 以親諸侯”으로 기술하고 있다.
윤대의 죄기조(罪己詔)
죄기조(罪己詔)는 황제가 신하나 백성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반성문이다. 윤대의 죄기조에 등장하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朕即位以來 所爲狂悖 使天下愁苦 不可追悔 自今事有傷害百姓 糜費天下者 悉罷之”: 짐이 즉위한 이후 망령되고 그릇된 일을 많이 저질러 천하의 백성들을 근심케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후회가 막급하다. 오늘 이후 백성을 힘들게 하고 국가의 재력을 낭비하는 일을 일체 중단하노라.
무고지화 자치통감 기록
資治通鑑, 한무제 정화3년 | 자치통감 |
(辛卯)三年,春正月,匈奴寇五原、酒泉。三月,遣李廣利等將兵擊之。 | 한(漢)나라 한무제 정화 3년, 봄 정월에 흉노가 오원과 주천을 침입했다 삼월에 이광리(李廣利)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물리치게 하였다. |
夏,赦 | 여름에 사면(赦免)을 실시했다. |
發西域兵擊車師,盡得其王、民卸。 | 서역(西域)의 군대를 징발하여 거사국을 공격하게 해서 그 왕과 백성의 무리를 모두 사로잡아 돌아왔다. |
六月,丞相屈氂棄市。李廣利妻子下吏。廣利降匈奴,詔族其家。 | 6월에 승상 유굴리(劉屈氂)가 기시(棄市)형을 당하고 이광리의 처자식은 옥리에 회부되었다. 이광리가 흉노에 항복하자 황제의 명령으로 그의 종족을 멸하였다. |
初,貳師之出也,丞相劉屈氂為祖道, 送至渭橋。廣利曰:「願君侯早請昌邑王為太子;如立為帝,君侯長何憂乎!」 屈氂許諾。昌邑王者,貳師將軍女弟李夫人子也;貳師女為屈氂子妻,故共欲立焉。 |
처음 이사장군 이광리가 출전할 적에 승상 유굴리가 노제(路祭)를 지내주고 전송하러 위교(渭橋)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광리가 당부하기를 “원컨대 군후(君侯)께서는 속히 창읍왕 유하(劉賀)를 태자로 삼도록 청하십시오. 만일 창읍왕이 황제가 된다면 군후는 영원히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하니, 유굴리가 이를 허락하였다. 창읍왕은 이사장군의 여동생인 이부인의 아들이었는데, 이사장군의 딸이 유굴리의 며느리가 되었으므로 함께 창읍왕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
會內者令郭穰告「丞相夫人祝詛上及與貳師共禱祠,欲令昌邑王為帝」,按驗,罪至大逆不道。六月,詔載屈氂廚車以徇, 要斬東市, 妻子梟首華陽街; 貳師妻子亦收。 | 이때 마침 ‘유승상의 부인이 황제를 저주하고 또 이사장군과 함께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 창읍왕을 황제가 되게 하려고 했다’는 곽양의 고발이 있었다. 조사하여 죄가 대역무도(大逆無道)함에 이르렀다. 6월에 유굴리는 조리돌림을 당하고 동시에서 요참(腰斬)형을 당했고 처자식은 효수형을 당해 화양가에 전시되었다. 이사장군의 처자식 또한 그렇게 되었다. |
貳師聞之,憂懼,其掾胡亞夫亦避罪從軍,說貳師曰:「夫人、室家皆在吏,若還,不稱意適與獄會, 郅居以北,可復得見乎!」 貳師由是狐疑,深入要功, 遂北至郅居水上。 虜已去,貳師遣護軍將二萬騎度郅居之水,逢左賢王、左大將將二萬騎,與漢兵合戰一日,漢軍殺左大將,虜死傷甚衆 | 이사장군은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이광리의 보좌관 호아부 또한 죄를 짓고 종군하고 있었는데, 이사장군에서 말하길: “부인과 관리를 맡은 가족들은 죄다 좌천되거나 무고하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공을 세워 속죄하지 않으렵니까? 郅居水(질거수) 북쪽을 다시 수복하지 않으시렵니까?” 이사장군은 회의가 들었지만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기에 질거수 북쪽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흉노의 좌현왕과 좌대장 2만 기병을 만나 회심의 일전을 하루 동안 벌였다. 한나라 군사가 좌대장을 죽였고 오랑캐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였다. |
軍長史與決眭都尉煇渠侯謀曰:。「將軍懷異心,欲危衆求功,恐必敗。」謀共執貳師。貳師聞之,斬長史,引兵還至燕然山。 | 이사장군의 보좌관 비서와 결휴도위가 같이 아뢰길: “장군은 배반의 딴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무리가 공을 세우길 원하니 필히 패배할 것이 두렵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이사장군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사장군이 이를 듣고 비서의 목을 베고 회군하여 연연산(燕然山)에 이르렀다. |
單于知漢軍勞倦,自將五萬騎遮擊貳師,相殺傷甚衆;夜,塹漢軍前,深數尺, 從後急擊之,軍大亂;貳師遂降。 | 선우가 직접 5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사장군을 가로막고 공격할 적에 밤중에 한나라 군대의 앞에 몇 자 높이의 깊은 참호를 파놓고 뒤에서 맹렬히 공격하니, 한나라 군대가 크게 혼란에 빠지고 패해서 이사장군은 마침내 항복하였다. |
單于素知其漢大將,以女妻之, 尊寵在衞律上。宗族遂滅。 |
선우가 이사장군에게 딸을 아내로 삼게 하고 위율(衞律)보다 더 총애하였다. 이에 이사장군의 집안은 마침내 멸족을 당하였다. |
秋 蝗 | 가을에 메뚜기 재해를 입었다. |
以田千秋爲大鴻臚 族滅江充家 | 전천추(田千秋)를 대홍려로 삼았다. 강충(江充)의 집안을 멸족하였다. |
吏民以巫蠱相告言者,案驗多不實。 | 관리와 백성들 중에 무고(巫蠱)를 서로 고발한 자들을 조사하여 징험해보니, 사실과는 다른 것이 많았다. |
上頗知太子惶恐無他意,會高寢郎田千秋上急變,訟太子冤 曰: | 한무제는 위태자가 놀라고 두려웠을 뿐이고 다른 딴마음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마침 한고조 묘지기 전천추가 특별 상소를 올려 태자의 억울함을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
:「子弄父兵,罪當笞。天子之子過誤殺人,當何罪哉!臣嘗夢一白頭翁敎臣言 | “자식이 아버지의 병기를 가지고 희롱하면 죄가 태형(笞刑)에 해당합니다. 황제의 아들이 과실착오로 사람을 죽이면 무슨 죄에 해당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꿈속에서 한 백발노인을 만나보았는데, 신으로 하여금 이것을 황제께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
上乃大感寤,召見千秋,謂曰:「父子之間,人所難言也,公獨明其不然。此高廟神靈使公敎我,公當遂為吾輔佐。」立拜千秋為大鴻臚, | 무제가 마침내 크게 느끼고 반성하고 깨달아 전천추를 불러 이르기를: “부자간의 일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공(公)이 홀로 그렇지 않음을 명백히 밝혔으니, 이는 한고조의 신령이 공으로 하여금 나에게 가르쳐주게 한 것이다. 공은 마땅히 마침내 나를 가까이서 보좌하기 바란다.” 즉석에서 전천추를 대홍려에 제수했다. |
而族滅江充家,焚蘇文於橫橋上; | 강충의 집안을 멸족하였고, 소문(蘇文)을 위수의 다리 광교에서 불태워 죽였다. |
及泉鳩里加兵刃於太子者,初為北地太守,後族。 | 위태자 호현 천구리에 이르러 지방군에 포위되었다. 태자에 해를 가한 자가 처음엔 북지태수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후 주살되었다. |
上憐太子無辜,乃作思子宮,為歸來望思之臺於湖, 天下聞而悲之 | 무제는 위태자가 죄없이 죽은 것을 가엾게 여겨 마침내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능원 무덤을 호현(湖縣)에 지으니, 세상 사람들이 듣고 슬퍼하였다.“歸來望思”(귀래망사)는 마음 속으로 바라보고 생각하여 행여 태자의 영혼(靈魂)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추념하는 것을 말한다. |
[1] 《漢書》 《武帝紀》, “秋七月 桉道侯韓說 使者江充等掘蠱太子宮 壬午 太子與皇后謀斬充 以節發兵與丞相劉屈氂大戰長安 死者數萬人 庚寅 太子亡 皇后自殺 初置城門屯兵 更節加黃旄 御史大夫暴勝之 司直田仁坐失縱 勝之自殺 仁要斬 八月辛亥 太子自殺于湖.”
[2] 려태자는 진시황 사후 태자 부소가 밀려난 사건을 상기하고 있었다. 한서《武五子傳》 時上疾,辟暑甘泉宮,獨皇后、太子在。太子召問少傅石德,德懼為師傅并誅,因謂太子曰:「前丞相父子、兩公主及衛氏皆坐此,今巫與使者掘地得徵驗,不知巫置之邪,將實有也,無以自明,可矯以節收捕充等繫獄,窮治其姦詐. 且上疾在甘泉,皇后及家吏請問皆不報,上存亡未可知,而姦臣如此,太子將不念秦扶蘇事耶?」太子急,然德言.
[3] 한서, 곽광전, “光為大司馬大將軍,日磾為車騎將軍,及太仆上官桀為左將軍,搜粟都尉桑弘羊為御史大”.
'저서-------- > 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후는 ?侯 (투후)인가? (0) | 2022.01.01 |
---|---|
투후 김일제 (0) | 2022.01.01 |
한기(韓暨) 번역 (0) | 2022.01.01 |
10장 한왕신(韓王) 한신(韓信) (0) | 2022.01.01 |
투후 상구성(商丘成)은 누구인가? (0) | 2021.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