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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10장 한왕신(韓王) 한신(韓信)

by 추홍희블로그 2022. 1. 1.

10장 한왕신(韓王) 한신(韓信)

 

   
太史公曰韓信盧綰非素積德累善之世徼一時權變以詐力成功遭漢初定故得列地南面稱孤內見疑彊大外倚蠻貊以為援是以日疏自危事窮智困卒赴匈奴豈不哀哉
 
陳豨梁人其少時數稱慕魏公子及將軍守邊招致賓客而下士名聲過實周昌疑之疵瑕頗起懼禍及身邪人進說遂陷無道於戲悲夫夫計之生孰成敗於人也深矣
索隱述贊韓襄遺始從漢中剖符南面徙邑北通穨當歸國雒有功盧綰親愛群臣莫同舊燕是王東胡計窮
태사공 사마천 저자의 의견:
“한왕(韓王) 한신(韓信)과 연왕(燕王) 노관(盧綰)은 본래 조상 대대로 공덕을 쌓고 베푼 집안이 아니며, 한때의 임기응변식 요행과 사술로 공을 이루고, ()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 그 시기를 타서 개국공신이 되어 봉지를 받고 제후국의 왕조를 열었다. 안으로는 강대하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밖으로는 남만과 북방의 예맥족 이민족을 원조자로 여기고 그들에 의지했다. 이 때문에 날마다 한나라 조정과 소원해지고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여 마침내는 막다른 길에 들어서는 사단이 일어나고 외교적 계책도 동이 나고 말라버려, 결국 국경선 너머 흉노족의 땅으로 달아났으니 어찌 슬프고 애달프지 않겠는가?
  (): 요행.
權變(권변): 임기응변.
詐力(사력): 사술과 무력.
南面稱孤(남면칭고): 국가를 창건하고 국가의 우두머리에 오름
蠻貊(만맥): 남과 북쪽에 위치한 이민족

 

한왕신(韓王信)

한신(韓信) 노관(盧綰) 진희(陳豨) 이들 세 사람은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통점으로 한데 묶어 기술한 것이다. 한왕(韓王) 한신(韓信)은 회음후 한신(韓信)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이 두사람은 죽은 해도 BC 196년으로 서로 같아서 구분하는데 혼동하기 쉽다. 한왕신(韓王信)은 성은 희(), 씨는 한(), 이름은 신()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한()나라 양왕(襄王, BC 321-BC 296)의 후손이다. 한나라 유방에 의해 한왕(韓王)으로 봉해졌다. 한왕신이 흉노와의 화친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조정에서 오판하자 흉노의 군대와 연합하여 한()나라의 변경을 침입했다. 한왕신은 BC 196년 봄 흉노의 기병들을 이끌고 삼합(參合)을 점령했으나 한나라의 시무(柴武)에게 참수되었다.

 

 

사기 열전 번역
韓王信者故韓襄王孽孫也長八尺五寸及項梁之立楚後懷王也魏皆已前王唯韓無有後故立韓諸公子橫陽君成為韓王欲以撫定韓故地項梁敗死定陶成奔懷王沛公引兵擊陽城使張良以韓司徒降下韓故地得信為韓將將其兵從沛公入武關
 
 
한왕신(韓王信)은 한양왕(韓襄王)의 첩이 낳은 손자인 얼손(孼孫)이며, 키가 여덟 자 다섯 치나 되었다. 항량(項梁)이 초왕(楚王)의 후계자를 회왕(懷王)으로 세우게 되자, ()•()•()•()도 모두 이미 이전의 왕의 후계자로 왕을 세웠으나 오직 한()나라만이 후사가 없어서, 한나라의 여러 공자(公子)들 가운데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나라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했다. 항량이 정도(定陶) 전투에서 패해 죽었고, 한성은 초회왕에게로 달아났다. 패공(沛公)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양성(陽城)을 치고, 장량(張良)을 한나라의 사도(司徒)로 삼아 한()나라의 옛 땅을 복속시켰으며, 이때 장량은 한신을 만나 한()나라의 장수로 삼았고 한신은 병사를 이끌고 패공을 따라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孽孫(얼손): 서출의 손자.
楚後(초후): 초왕(楚王)의 후계자.
撫定(무정): 평정하다
沛公(패공): ()나라 유방(劉邦)
沛公立為漢王韓信從入漢中乃說漢王曰:「項王王諸將近地而王獨遠居此此左遷也士卒皆山東人跂而望歸及其鋒東可以爭天下。」 BC 206년 패공이 항우(項羽)에 의해서 한왕(漢王)으로 봉해지자, 한신(韓信)은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가서 한왕을 설득하였다.
“항우는 여러 장수들을 가까운 땅의 왕으로 봉했는데 왕께서만 홀로 멀리 이곳에 있으니, 이는 좌천입니다.
병사와 사졸들은 모두 산동(山東) 출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발을 들어 바라고 있으니, 칼날을 동쪽으로 겨눈다면 천하를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
  (): 발돋움하다, 기도하다.
漢王還定三秦乃許信為韓王先拜信為韓太尉將兵略韓地
 
한왕이 군사를 돌려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에게 한왕(韓王)이 되는 것을 허락하고, 그에 앞서 신()을 한()나라 태위(太尉)에 임명해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 땅을 공략하게 했다.
項籍之封諸王皆就國韓王成以不從無功不遣就國更以為列侯 항우가 봉한 제후 왕들은 모두 자신의 봉지로 갔으나 한왕성(韓王成)은 항우를 따라가지 않아 공을 세우지 못해 봉국을 받지 못하고 다시 열후(列侯)가 되었다.
及聞漢遣韓信略韓地乃令故項籍游吳時吳令鄭昌為韓王以距漢 항우가 한()나라가 한신(韓信)을 보내 한()의 옛 땅을 공략하게 한다는 말을 들고서 예전의 오()나라에 머물 당시 오현의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나라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漢二年韓信略定韓十餘城漢王至河南韓信急擊韓王昌陽城昌降漢王乃立韓信為韓王常將韓兵從 한왕 2(BC 205)에 한신(韓信)이 한()나라의 10여 성을 공략해 평정했다. 한왕(漢王)이 하남(河南)에 이르자, 한신(韓信)이 급히 한왕(韓王) ()을 양성(陽城)에서 공격했다. 정창이 항복하자, 한왕(漢王)이 한신(韓信)을 한왕(韓王)에 봉했다. 한신은 늘 한()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한왕(漢王)을 수행했다.
三年漢王出滎陽韓王信周苛等守滎陽及楚敗滎陽信降楚已而得亡復歸漢漢復立以為韓王竟從擊破項籍天下定 한왕 3년에 한왕(漢王)이 형양(滎陽)을 빠져나가자, 한왕(韓王)()과 주가(周苛) 등이 형양을 지켰다. 형양에서 초나라에 패하자 한신은 초나라에 항복했으나 얼마 후 달아나 다시 한()나라로 돌아가니 한()나라에서는 다시 그를 한왕(韓王)에 봉했다. 마침내 한왕(漢王)을 따라서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五年春遂與剖符為韓王王潁川 한왕 5년 봄에 부절을 쪼개어 그를 한왕(韓王)에 봉하고, 영천(潁川)을 봉읍지로 주었다.
  周苛(주가): 유방(劉邦)을 따라 내사(內史)가 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옮겼다. 초한전쟁 때 위표(魏豹), 종공(樅公)과 함께 형양(滎陽)을 지켰다.
  剖符(부부): 직위를 증명하는 부절(符節), 부신(符信)을 쪼개다 즉 신표(信標)를 둘로 갈라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간직하고 출정한다.
明年春上以韓信材武所王北近鞏南迫宛東有淮陽皆天下勁兵處乃詔徙韓王信王太原以北備御胡都晉陽
 
 
그 이듬해 봄 고조(高祖)유방은 한신(韓信)처럼 재주와 용맹이 있는 사람이 북쪽으로는 공()과 낙() 지역에 가깝고, 남쪽으로는 완()과 섭() 지역에 가까우며, 동쪽으로는 회양(淮陽)이 있어서 모든 왕조에서 정예부대를 진주시킨 곳이어서, 조서를 내려 한왕신(韓王信)을 태원(太原) 북쪽으로 옮겨 오랑캐를 막도록 하고, 진양(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材武(재무): 재능(才能)있고 용맹(勇武)스럽다, 재능과 무예(武藝)를 갖추다
勁兵(경병): 정예 부대, 예리한 무기
信上書曰:「國被邊匈奴數入晉陽去塞遠請治馬邑。」上許之信乃徙治馬邑 그러자 한왕(韓王)신이 글을 올렸다: “나라가 변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흉노가 자주 침입하고, 진양은 변방의 요새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도읍을 마읍(馬邑)으로 옮기게 해주십시오.” 고조가 허락하자, 한신은 곧 마읍으로 치소를 옮겼다.
匈奴冒頓大圍信信數使使胡求和解漢發兵救之疑信數閒使有二心使人責讓信 이해 가을, 흉노 묵특(冒頓)이 대규모로 한신을 포위하자, 한신은 여러 차례 오랑캐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려 했지만 한신이 자주 흉노에게 몰래 사자를 보낸 것을 두 마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의심해 사자를 보내 한신에게 책임을 따지고 질책했다.
  責讓(책양): 배척(斥責), 견책(譴責), 책임을 따져 꾸짖다
信恐誅因與匈奴約共攻漢以馬邑降胡擊太原 한신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흉노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한나라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켜 마읍을 오랑캐에 내주어 항복한 뒤 태원을 공격했다.
七年冬上自往擊破信軍銅斬其將王喜信亡走匈奴與其與白土人曼丘臣王黃等立趙苗裔趙利為王復收信敗散兵而與信及冒頓謀攻漢匈奴仗左右賢王將萬餘騎與王黃等屯廣武以南至晉陽與漢兵戰漢大破之追至于離石復破之 한고조 7년 겨울에 고조(高祖)가 직접 출정해 한왕신(韓王信)의 군대를 동제()에서 격파하고, 장수 왕희(王喜)의 목을 베었다. 한신은 흉노로 도망쳤다. 한왕신(韓王信)의 장수인 백토(白土) 출신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이 조()나라의 후예인 조리(趙利)를 조왕으로 세우고, 한왕신(韓王信)의 패잔병을 수습해서 한신 및 묵특(冒頓)과 모의해 한()나라를 공격했다. 흉노는 좌현왕과 우현왕에게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황 등과 함께 광무(廣武) 남쪽에 진을 치고, 진양으로 내려와서 한()나라의 군사와 싸웠으나, 한나라 군사가 그들을 대파하고 이석(離石)까지 추격해 다시 격파했다.
  亡走(망주): 도망가다. 달아나다.
苗裔(묘예): 후예. 자손.
冒頓(묵특): 匈奴(흉노)冒頓(모돈)
匈奴復聚兵樓煩西北漢令車騎擊破匈奴匈奴常敗走漢乘勝追北聞冒頓居代高皇帝居晉陽使人視冒頓還報曰可擊」。上遂至平城上出白登匈奴騎圍上上乃使人厚遺閼氏
 
 
흉노가 누번(樓煩) 서북쪽에 군대를 다시 모으자, 한나라는 전차와 기병부대에게 명하여 흉노를 격파시켰다. 흉노가 번번이 패해 달아나자, 한의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였으며, 묵특이 대곡(代谷)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진양에 있던 고조가 사람을 시켜 묵특의 실정을 엿보게 했는데 첩자가 돌아와서공격해도 되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고조가 드디어 평성(平城)에 도착했다. 고조가 백등산(白登山)으로 나가자 흉노 기병들이 고조를 포위하니, 고조가 사람을 시켜 흉노의 왕후 알씨(閼氏)에게 후한 예물을 보냈다.
閼氏乃說冒頓曰:「今得漢地猶不能居且兩主不相居七日胡騎稍引去時天大霧漢使人往來胡不覺 그러자 알씨가 묵특을 설득했다. “지금 한나라의 땅을 얻더라도 아직은 거주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두 군주가 서로 출로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7일이 지나자 흉노의 기병이 점차 물러났다. 그때 하늘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 한나라에서는 사자를 왕래하게 했지만 흉노는 알아채지 못했다.
  乘勝追北(승승추배): 승승장구하여 패주(敗走)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상구): 서로 겹겹이 포위하다. 서로 출로를 막다
護軍中尉陳平言上曰:「胡者全兵請令彊弩傅兩矢外向徐行出圍。」入平城漢救兵亦到胡騎遂解去漢亦罷兵歸韓信為匈奴將兵往來擊邊 호군중위(護軍中尉) 진평(進平)이 고조에게 아뢰었다. “흉노는 병사는 모두 긴 창과 활을 쓰니, 강한 쇠뇌에 화살을 두 개씩 매긴 후에 밖으로 향하게 하고, 천천히 걸어서 포위를 벗어나십시오.” 고조가 평성으로 돌아오자 한나라의 구원병도 도착했고, 흉노의 기병이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한나라 역시 군사를 거두고 돌아갔다. 이때 한신이 흉노를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오가면서 한나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 부설 부착하다.
漢十年信令王黃等說誤陳豨十一年春故韓王信復與胡騎入居參合距漢 한고조 10(BC 197)에 한신이 왕황 등에게 진희(陳稀)를 장단점을 들어서 설득토록 했다. 한고조 11년 봄 이전의 한왕신(韓王信)이 다시 흉노 기병과 함께 삼합성(參合城)을 점거하고 한나라에 대항했다.
漢使柴將軍擊之遺信書曰:「陛下寬仁諸侯雖有畔亡而復歸輒復故位號不誅也大王所知今王以敗亡走胡非有大罪急自歸!」 ()나라는 시장군(柴將軍)에게 그들을 치게 하자 시장군이 한신에게 글을 보냈다. “폐하는 너그럽고 어진 분이며, 제후 가운데 비록 배반하여 도망하는 자가 있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번번이 예전의 지위와 칭호를 돌려주고 목을 베지 않으셨습니다. 대왕께서도 이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싸움에 패해 흉노로 달아났을 뿐 큰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니 빨리 스스로 돌아오십시오!”
  畔亡(반망): 배반하고 도망가다
韓王信報曰:「陛下擢仆起閭巷南面稱孤此仆之幸也滎陽之事仆不能死囚於項籍此一罪也及寇攻馬邑仆不能堅守以城降之此二罪也今反為寇將兵與將軍爭一旦之命此三罪也 한왕신이 답장을 보냈다.
“폐하께서는 저를 서민 가운데서 뽑으시고 나라를 열고 왕으로 불리게 하셨으니 이는 나에게 행운이었소. 형양의 전투에서 저는 죽지 못하고 항우에게 사로잡혔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요. 흉노가 마읍을 공격해 왔을 때 저는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성을 들어 항복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요. 지금은 오히려 흉노를 위해 군사를 이끌고 장군과 한순간에 목숨을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요.
  (): 뽑다. 발탁하다.
閭巷(여항): 향리민간(鄕里民間), 평민백성
夫種蠡無一罪身死亡今仆有三罪於陛下而欲求活於世此伍子胥所以僨於吳也今仆亡匿山谷閒旦暮乞貸蠻夷仆之思歸如痿人不忘起盲者不忘視也勢不可耳。」遂戰柴將軍屠參合斬韓王信 무릇 대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는 한 가지 죄도 없으면서 죽거나 도망쳤는데, 지금 저는 폐하께 세 가지 죄를 지었는바 이 세상에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에서 못쓰게 되고 쓰러져 죽은 이유와 같은 것이오. 지금 저는 달아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이적의 만이에게 아침저녁을 구걸하며 지내고 있으니 제가 돌아갈 마음을 갖는 것은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섰던 때를 잊지 못하고, 장님이 눈에 보이던 그 때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정세로 보아 돌아갈 수 없소.” 그리고는 드디어 전투를 했다. 시장군이 삼합성을 도륙하고, 한왕신의 목을 베었다.
  (, ) : 월나라의 대부 문종(文種)과 책사 범려(范蠡)
(): 넘어지다, 부도(仆倒) 쓰러지다, 파괴(破壞), 죽다 僵死.
痿人(위인): 앉은뱅이.
信之入匈奴與太子俱及至穨當城生子因名曰穨當韓太子亦生子命曰嬰至孝文十四年穨當及嬰率其眾降漢漢封穨當為弓高侯為襄城侯吳楚軍時弓高侯功冠諸將 한신이 흉노에 의탁했을 때 태자와 함께 갔다. 퇴당성(頹當城)에 이르렀을 때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퇴당(穨當)이라고 했다. 한태자도 아들을 낳고 영()이라고 이름 지었다. 효문제 14(BC 166)에 한퇴당과 한영이 그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퇴당은 궁고후(弓高侯), 영은 양성후(襄城侯)에 봉하였다.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했을 때 여러 장군들 가운데 궁고후의 공이 으뜸이었다.
傳子至孫孫無子失侯嬰孫以不敬失侯 그 작위를 아들에게 전해 손자에 이르렀지만, 손자는 아들이 없어 후작의 지위를 잃었다. 한영의 손자는 불경죄로 후작의 지위를 잃었다.
穨當孽孫韓嫣貴幸名富顯於當世其弟說再封數稱將軍為案道侯 퇴당의 서출의 손자인 한언(韓嫣)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명성과 부귀를 당대를 떨쳤다. 그의 아우 열()은 다시 제후에 봉해졌으며, 여러 차례 장군으로 부름받고 안도후가 되었다.
子代歲餘坐法死後歲餘說孫曾拜為龍頟侯續說後 그 아들이 대를 잇더니, 한 해 남짓 지나 죄를 저질러 죽임을 당했다. 한 해 남짓 뒤에 한열의 손자 증()이 용액후에 임명되어 열의 뒤를 이었다.
  坐法(좌법): 죄를 짓고 처벌을 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