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한왕신(韓王) 한신(韓信)
太史公曰:韓信、盧綰非素積德累善之世,徼一時權變,以詐力成功,遭漢初定,故得列地,南面稱孤。內見疑彊大,外倚蠻貊以為援,是以日疏自危,事窮智困,卒赴匈奴,豈不哀哉! 陳豨,梁人,其少時數稱慕魏公子;及將軍守邊,招致賓客而下士,名聲過實。周昌疑之,疵瑕頗起,懼禍及身,邪人進說,遂陷無道。於戲悲夫!夫計之生孰成敗於人也深矣! 【索隱述贊】韓襄遺孽,始從漢中。剖符南面,徙邑北通。穨當歸國,龍雒有功。盧綰親愛,群臣莫同。舊燕是王,東胡計窮。 |
태사공 사마천 저자의 의견: “한왕(韓王) 한신(韓信)과 연왕(燕王) 노관(盧綰)은 본래 조상 대대로 공덕을 쌓고 베푼 집안이 아니며, 한때의 임기응변식 요행과 사술로 공을 이루고, 한(漢)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 그 시기를 타서 개국공신이 되어 봉지를 받고 제후국의 왕조를 열었다. 안으로는 강대하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밖으로는 남만과 북방의 예맥족 이민족을 원조자로 여기고 그들에 의지했다. 이 때문에 날마다 한나라 조정과 소원해지고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여 마침내는 막다른 길에 들어서는 사단이 일어나고 외교적 계책도 동이 나고 말라버려, 결국 국경선 너머 흉노족의 땅으로 달아났으니 어찌 슬프고 애달프지 않겠는가? |
徼(요): 요행. 權變(권변): 임기응변. 詐力(사력): 사술과 무력. 南面稱孤(남면칭고): 국가를 창건하고 국가의 우두머리에 오름 蠻貊(만맥): 남과 북쪽에 위치한 이민족 |
한왕신(韓王信)
한신(韓信) 노관(盧綰) 진희(陳豨) 이들 세 사람은 흉노와 연합하여 한(漢)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통점으로 한데 묶어 기술한 것이다. 한왕(韓王) 한신(韓信)은 회음후 한신(韓信)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이 두사람은 죽은 해도 BC 196년으로 서로 같아서 구분하는데 혼동하기 쉽다. 한왕신(韓王信)은 성은 희(姬), 씨는 한(韓), 이름은 신(信)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한(韓)나라 양왕(襄王, BC 321-BC 296)의 후손이다. 한나라 유방에 의해 한왕(韓王)으로 봉해졌다. 한왕신이 흉노와의 화친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조정에서 오판하자 흉노의 군대와 연합하여 한(漢)나라의 변경을 침입했다. 한왕신은 BC 196년 봄 흉노의 기병들을 이끌고 삼합(參合)을 점령했으나 한나라의 시무(柴武)에게 참수되었다.
사기 열전 | 번역 |
韓王信者,故韓襄王孽孫也,長八尺五寸。及項梁之立楚後懷王也,燕、齊、趙、魏皆已前王,唯韓無有後,故立韓諸公子橫陽君成為韓王,欲以撫定韓故地。項梁敗死定陶,成奔懷王。沛公引兵擊陽城,使張良以韓司徒降下韓故地,得信,以為韓將,將其兵從沛公入武關。 |
한왕신(韓王信)은 한양왕(韓襄王)의 첩이 낳은 손자인 얼손(孼孫)이며, 키가 여덟 자 다섯 치나 되었다. 항량(項梁)이 초왕(楚王)의 후계자를 회왕(懷王)으로 세우게 되자, 연(燕)•제(齊)•조(趙)•위(魏)도 모두 이미 이전의 왕의 후계자로 왕을 세웠으나 오직 한(韓)나라만이 후사가 없어서, 한나라의 여러 공자(公子)들 가운데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韓)나라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했다. 항량이 정도(定陶) 전투에서 패해 죽었고, 한성은 초회왕에게로 달아났다. 패공(沛公)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양성(陽城)을 치고, 장량(張良)을 한나라의 사도(司徒)로 삼아 한(韓)나라의 옛 땅을 복속시켰으며, 이때 장량은 한신을 만나 한(韓)나라의 장수로 삼았고 한신은 병사를 이끌고 패공을 따라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
孽孫(얼손): 서출의 손자. 楚後(초후): 초왕(楚王)의 후계자. 撫定(무정): 평정하다 沛公(패공): 한(漢)나라 유방(劉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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沛公立為漢王,韓信從入漢中,乃說漢王曰:「項王王諸將近地,而王獨遠居此,此左遷也。士卒皆山東人,跂而望歸,及其鋒東鄉,可以爭天下。」 | BC 206년 패공이 항우(項羽)에 의해서 한왕(漢王)으로 봉해지자, 한신(韓信)은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가서 한왕을 설득하였다. “항우는 여러 장수들을 가까운 땅의 왕으로 봉했는데 왕께서만 홀로 멀리 이곳에 있으니, 이는 좌천입니다. 병사와 사졸들은 모두 산동(山東) 출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발을 들어 바라고 있으니, 칼날을 동쪽으로 겨눈다면 천하를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 |
跂(기): 발돋움하다, 기도하다. | |
漢王還定三秦,乃許信為韓王,先拜信為韓太尉,將兵略韓地。 |
한왕이 군사를 돌려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신(信)에게 한왕(韓王)이 되는 것을 허락하고, 그에 앞서 신(信)을 한(韓)나라 태위(太尉)에 임명해 군대를 이끌고 한(韓)나라 땅을 공략하게 했다. |
項籍之封諸王皆就國,韓王成以不從無功,不遣就國,更以為列侯。 | 항우가 봉한 제후 왕들은 모두 자신의 봉지로 갔으나 한왕성(韓王成)은 항우를 따라가지 않아 공을 세우지 못해 봉국을 받지 못하고 다시 열후(列侯)가 되었다. |
及聞漢遣韓信略韓地,乃令故項籍游吳時吳令鄭昌為韓王以距漢 | 항우가 한(漢)나라가 한신(韓信)을 보내 한(韓)의 옛 땅을 공략하게 한다는 말을 들고서 예전의 오(吳)나라에 머물 당시 오현의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漢)나라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
漢二年,韓信略定韓十餘城。漢王至河南,韓信急擊韓王昌陽城。昌降,漢王乃立韓信為韓王,常將韓兵從 | 한왕 2년(BC 205)에 한신(韓信)이 한(韓)나라의 10여 성을 공략해 평정했다. 한왕(漢王)이 하남(河南)에 이르자, 한신(韓信)이 급히 한왕(韓王) 창(昌)을 양성(陽城)에서 공격했다. 정창이 항복하자, 한왕(漢王)이 한신(韓信)을 한왕(韓王)에 봉했다. 한신은 늘 한(韓)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한왕(漢王)을 수행했다. |
三年,漢王出滎陽,韓王信、周苛等守滎陽。及楚敗滎陽,信降楚,已而得亡,復歸漢,漢復立以為韓王,竟從擊破項籍,天下定。 | 한왕 3년에 한왕(漢王)이 형양(滎陽)을 빠져나가자, 한왕(韓王)신(信)과 주가(周苛) 등이 형양을 지켰다. 형양에서 초나라에 패하자 한신은 초나라에 항복했으나 얼마 후 달아나 다시 한(漢)나라로 돌아가니 한(漢)나라에서는 다시 그를 한왕(韓王)에 봉했다. 마침내 한왕(漢王)을 따라서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
五年春,遂與剖符為韓王,王潁川。 | 한왕 5년 봄에 부절을 쪼개어 그를 한왕(韓王)에 봉하고, 영천(潁川)을 봉읍지로 주었다. |
周苛(주가): 유방(劉邦)을 따라 내사(內史)가 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옮겼다. 초한전쟁 때 위표(魏豹), 종공(樅公)과 함께 형양(滎陽)을 지켰다. | |
剖符(부부): 직위를 증명하는 부절(符節), 부신(符信)을 쪼개다 즉 신표(信標)를 둘로 갈라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간직하고 출정한다. | |
明年春,上以韓信材武,所王北近鞏、洛,南迫宛、葉,東有淮陽,皆天下勁兵處,乃詔徙韓王信王太原以北,備御胡,都晉陽 |
그 이듬해 봄 고조(高祖)유방은 한신(韓信)처럼 재주와 용맹이 있는 사람이 북쪽으로는 공(鞏)과 낙(洛) 지역에 가깝고, 남쪽으로는 완(宛)과 섭(葉) 지역에 가까우며, 동쪽으로는 회양(淮陽)이 있어서 모든 왕조에서 정예부대를 진주시킨 곳이어서, 조서를 내려 한왕신(韓王信)을 태원(太原) 북쪽으로 옮겨 오랑캐를 막도록 하고, 진양(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
材武(재무): 재능(才能)있고 용맹(勇武)스럽다, 재능과 무예(武藝)를 갖추다 勁兵(경병): 정예 부대, 예리한 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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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上書曰:「國被邊,匈奴數入,晉陽去塞遠,請治馬邑。」上許之,信乃徙治馬邑。 | 그러자 한왕(韓王)신이 글을 올렸다: “나라가 변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흉노가 자주 침입하고, 진양은 변방의 요새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도읍을 마읍(馬邑)으로 옮기게 해주십시오.” 고조가 허락하자, 한신은 곧 마읍으로 치소를 옮겼다. |
秋,匈奴冒頓大圍信,信數使使胡求和解。漢發兵救之,疑信數閒使,有二心,使人責讓信。 | 이해 가을, 흉노 묵특(冒頓)이 대규모로 한신을 포위하자, 한신은 여러 차례 오랑캐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한(漢)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려 했지만 한신이 자주 흉노에게 몰래 사자를 보낸 것을 두 마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의심해 사자를 보내 한신에게 책임을 따지고 질책했다. |
責讓(책양): 배척(斥責), 견책(譴責), 책임을 따져 꾸짖다 | |
信恐誅,因與匈奴約共攻漢,反,以馬邑降胡,擊太原。 | 한신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흉노와 함께 한(漢)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한나라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켜 마읍을 오랑캐에 내주어 항복한 뒤 태원을 공격했다. |
七年冬,上自往擊,破信軍銅鞮,斬其將王喜。信亡走匈奴。與其與白土人曼丘臣、王黃等立趙苗裔趙利為王,復收信敗散兵,而與信及冒頓謀攻漢。匈奴仗左右賢王將萬餘騎與王黃等屯廣武以南,至晉陽,與漢兵戰,漢大破之,追至于離石,復破之。 | 한고조 7년 겨울에 고조(高祖)가 직접 출정해 한왕신(韓王信)의 군대를 동제(銅鞮)에서 격파하고, 장수 왕희(王喜)의 목을 베었다. 한신은 흉노로 도망쳤다. 한왕신(韓王信)의 장수인 백토(白土) 출신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이 조(趙)나라의 후예인 조리(趙利)를 조왕으로 세우고, 한왕신(韓王信)의 패잔병을 수습해서 한신 및 묵특(冒頓)과 모의해 한(漢)나라를 공격했다. 흉노는 좌현왕과 우현왕에게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황 등과 함께 광무(廣武) 남쪽에 진을 치고, 진양으로 내려와서 한(漢)나라의 군사와 싸웠으나, 한나라 군사가 그들을 대파하고 이석(離石)까지 추격해 다시 격파했다. |
亡走(망주): 도망가다. 달아나다. 苗裔(묘예): 후예. 자손. 冒頓(묵특): 匈奴(흉노)의 冒頓(모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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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復聚兵樓煩西北,漢令車騎擊破匈奴。匈奴常敗走,漢乘勝追北,聞冒頓居代(上)谷,高皇帝居晉陽,使人視冒頓,還報曰「可擊」。上遂至平城。上出白登,匈奴騎圍上,上乃使人厚遺閼氏。 |
흉노가 누번(樓煩) 서북쪽에 군대를 다시 모으자, 한나라는 전차와 기병부대에게 명하여 흉노를 격파시켰다. 흉노가 번번이 패해 달아나자, 한의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였으며, 묵특이 대곡(代谷)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진양에 있던 고조가 사람을 시켜 묵특의 실정을 엿보게 했는데 첩자가 돌아와서 “공격해도 되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고조가 드디어 평성(平城)에 도착했다. 고조가 백등산(白登山)으로 나가자 흉노 기병들이 고조를 포위하니, 고조가 사람을 시켜 흉노의 왕후 알씨(閼氏)에게 후한 예물을 보냈다. |
閼氏乃說冒頓曰:「今得漢地,猶不能居;且兩主不相緱」居七日,胡騎稍引去。時天大霧,漢使人往來,胡不覺。 | 그러자 알씨가 묵특을 설득했다. “지금 한나라의 땅을 얻더라도 아직은 거주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두 군주가 서로 출로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7일이 지나자 흉노의 기병이 점차 물러났다. 그때 하늘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 한나라에서는 사자를 왕래하게 했지만 흉노는 알아채지 못했다. |
乘勝追北(승승추배): 승승장구하여 패주(敗走)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相緱(상구): 서로 겹겹이 포위하다. 서로 출로를 막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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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軍中尉陳平言上曰:「胡者全兵,請令彊弩傅兩矢外向,徐行出圍。」入平城,漢救兵亦到,胡騎遂解去。漢亦罷兵歸。韓信為匈奴將兵往來擊邊。 | 호군중위(護軍中尉) 진평(進平)이 고조에게 아뢰었다. “흉노는 병사는 모두 긴 창과 활을 쓰니, 강한 쇠뇌에 화살을 두 개씩 매긴 후에 밖으로 향하게 하고, 천천히 걸어서 포위를 벗어나십시오.” 고조가 평성으로 돌아오자 한나라의 구원병도 도착했고, 흉노의 기병이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한나라 역시 군사를 거두고 돌아갔다. 이때 한신이 흉노를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오가면서 한나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
傅(부): 부설 부착하다. | |
漢十年,信令王黃等說誤陳豨。十一年春,故韓王信復與胡騎入居參合,距漢。 | 한고조 10년(BC 197)에 한신이 왕황 등에게 진희(陳稀)를 장단점을 들어서 설득토록 했다. 한고조 11년 봄 이전의 한왕신(韓王信)이 다시 흉노 기병과 함께 삼합성(參合城)을 점거하고 한나라에 대항했다. |
漢使柴將軍擊之,遺信書曰:「陛下寬仁,諸侯雖有畔亡,而復歸,輒復故位號,不誅也。大王所知。今王以敗亡走胡,非有大罪,急自歸!」 | 한(漢)나라는 시장군(柴將軍)에게 그들을 치게 하자 시장군이 한신에게 글을 보냈다. “폐하는 너그럽고 어진 분이며, 제후 가운데 비록 배반하여 도망하는 자가 있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번번이 예전의 지위와 칭호를 돌려주고 목을 베지 않으셨습니다. 대왕께서도 이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싸움에 패해 흉노로 달아났을 뿐 큰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니 빨리 스스로 돌아오십시오!” |
畔亡(반망): 배반하고 도망가다 | |
韓王信報曰:「陛下擢仆起閭巷,南面稱孤,此仆之幸也。滎陽之事,仆不能死,囚於項籍,此一罪也。及寇攻馬邑,仆不能堅守,以城降之,此二罪也。今反為寇將兵,與將軍爭一旦之命,此三罪也。 | 한왕신이 답장을 보냈다. “폐하께서는 저를 서민 가운데서 뽑으시고 나라를 열고 왕으로 불리게 하셨으니 이는 나에게 행운이었소. 형양의 전투에서 저는 죽지 못하고 항우에게 사로잡혔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요. 흉노가 마읍을 공격해 왔을 때 저는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성을 들어 항복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요. 지금은 오히려 흉노를 위해 군사를 이끌고 장군과 한순간에 목숨을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요. |
擢(탁): 뽑다. 발탁하다. 閭巷(여항): 향리민간(鄕里民間), 평민백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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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種、蠡無一罪,身死亡;今仆有三罪於陛下,而欲求活於世,此伍子胥所以僨於吳也。今仆亡匿山谷閒,旦暮乞貸蠻夷,仆之思歸,如痿人不忘起,盲者不忘視也,勢不可耳。」遂戰。柴將軍屠參合,斬韓王信 | 무릇 대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는 한 가지 죄도 없으면서 죽거나 도망쳤는데, 지금 저는 폐하께 세 가지 죄를 지었는바 이 세상에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에서 못쓰게 되고 쓰러져 죽은 이유와 같은 것이오. 지금 저는 달아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이적의 만이에게 아침저녁을 구걸하며 지내고 있으니 제가 돌아갈 마음을 갖는 것은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섰던 때를 잊지 못하고, 장님이 눈에 보이던 그 때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정세로 보아 돌아갈 수 없소.” 그리고는 드디어 전투를 했다. 시장군이 삼합성을 도륙하고, 한왕신의 목을 베었다. |
種,蠡(종, 려) : 월나라의 대부 문종(文種)과 책사 범려(范蠡) 僨(분): 넘어지다, 부도(仆倒) 쓰러지다, 파괴(破壞), 죽다 僵死. 發僨 痿人(위인): 앉은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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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之入匈奴,與太子俱;及至穨當城,生子,因名曰穨當。韓太子亦生子,命曰嬰。至孝文十四年,穨當及嬰率其眾降漢。漢封穨當為弓高侯,嬰為襄城侯。吳楚軍時,弓高侯功冠諸將。 | 한신이 흉노에 의탁했을 때 태자와 함께 갔다. 퇴당성(頹當城)에 이르렀을 때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퇴당(穨當)이라고 했다. 한태자도 아들을 낳고 영(嬰)이라고 이름 지었다. 효문제 14년(BC 166)에 한퇴당과 한영이 그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퇴당은 궁고후(弓高侯), 영은 양성후(襄城侯)에 봉하였다.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했을 때 여러 장군들 가운데 궁고후의 공이 으뜸이었다. |
傳子至孫,孫無子,失侯。嬰孫以不敬失侯。 | 그 작위를 아들에게 전해 손자에 이르렀지만, 손자는 아들이 없어 후작의 지위를 잃었다. 한영의 손자는 불경죄로 후작의 지위를 잃었다. |
穨當孽孫韓嫣,貴幸,名富顯於當世。其弟說,再封,數稱將軍,卒為案道侯。 | 퇴당의 서출의 손자인 한언(韓嫣)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명성과 부귀를 당대를 떨쳤다. 그의 아우 열(說)은 다시 제후에 봉해졌으며, 여러 차례 장군으로 부름받고 안도후가 되었다. |
子代,歲餘坐法死。後歲餘,說孫曾拜為龍頟侯,續說後。 | 그 아들이 대를 잇더니, 한 해 남짓 지나 죄를 저질러 죽임을 당했다. 한 해 남짓 뒤에 한열의 손자 증(曾)이 용액후에 임명되어 열의 뒤를 이었다. |
坐法(좌법): 죄를 짓고 처벌을 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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