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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7장 “文武王陵碑”(문무왕릉비)의 “秺侯”(투후)는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商丘成”(상구성)이다

by 추홍희블로그 2021. 12. 30.

文武王陵碑”(문무왕릉비)秺侯”(투후)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商丘成”(상구성)이다

글 차례

들어가기

1.        한서 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 秺侯 商丘成(투후 상구성)

2.        漢書(한서) 劉屈氂(유굴리)전에 기재된 투후 상구성 기록

3.        한서 양창(楊敞) 양운(楊惲) 열전의副帝隸 秺侯御”(부제례 투후어) 해석

4.        자치통감商丘成力戰獲張光 封成為秺侯”.

5.        반악의西征賦”(서정부) “秺侯之忠孝淳深”(투후지충효순심) 단락과 투후 상구성, 반악의 서정부에서 투후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1.         반악의 서정부 투후지충효순심 단락 원문

2.         서정부 단락 한글 번역

3.         서정부 거론 인물군 분류

4.         서정부 단락 단어 해석

5.         인물 분류

6.         서정부에서 투후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7.         被髮左袵 奮迅泥滓(피발좌임 분신니제) 해석

8.         서정부 단락에서 열거한 인물 리스트 약술

9.         투후와 육가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10         장건과 소무를 같이 한 묶음으로서 거명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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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속의 秺侯”(투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새롭고 획기적으로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투후를 한서(漢書) 김일제(金日磾)전에 기록되어 있는 김일제로 인식하여 김일제가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 출신의 한나라에 귀순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신라의 김씨들은 흉노족의 후예라고 내세우는 견해가 다수이다. 하지만 필자는 한서 유굴리전과 한서공신표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투후는 商丘成”(상구성)임을 최초로 제시하고 해설한다.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임을 문언해석적으로 입증하여 신라는 흉노족의 후예라는 가설을 역사학적으로 통박하고, 신라는 상나라 동이족의 후예라는 역사적 사실을 문언해석적으로 입증한다. 1716년에 나온 강희자전 옥편을 펼쳐보면【史記年表】秺侯金日磾【前漢•功臣表】秺侯商丘成”-이렇게투후 김일제투후 상구성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학계에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투후 상구성에 대해서 탐구해내지 못했다. 필자는 투후를 상구성으로 맨처음으로 제시하며 신라는 흉노족의 후예라는 가설을 여지없이 깨부숴버린다.

 

투후 상구성 秺侯商丘成

 

1.    한서 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 秺侯 商丘成(투후 상구성)

 

商丘成(상구성)秺侯(투후)에 봉해진 기사는 반고의 한서 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나타난다.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투후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봉읍호수는 222십 호에 달했다. 이와 같이, 여태자의 무고의 반란을 진압 타도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진 사람은 상구성과 마통 그리고 경건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봉작 사실을 적고 있는 한서의 공신표 기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무제소제선제원제성제 공신표》             

시호성명 제후 후작을 받게 된 구체적 공적 내용과 봉읍의 호수 봉작을 작위받은 시기 봉읍지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대홍려 직위에 있던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하고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호수는 222십 호에 달했다. 정화 2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옮겨 떨어져 있으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구나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음현
중합후 마통 시랑의 직위를 맡고 있는 마통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자들을 추격하여 반란세력 주동자인 여후를 잡은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을 수여받았고, 그 봉읍의 호수는 487십호수에 달했다. 같은 날 7월 계사일에 제후 작위에 봉했고, 2년 후 정화4년 도위 궤 등과 모의하여 군사 반란을 기도한 죄로 후작이 취소되고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발해
덕후 경건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마통을 따라서 여후를 함께 체포하고 반란세력의 주요인물인 태자소부 석덕을 체포한 공로로 덕후에 봉해졌고, 봉읍의 호수는 3735호에 달했다. 7월 계사일에 제후 봉읍 작위가 수여되었고, 2년 후 정화4년 마통과 함께 반란을 공모하고 기도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제남

 

號諡姓名 功狀戶數 始封 曾孫 玄孫
秺侯商丘成 以大鴻臚擊衛太子 力戰 亡它意 侯 二千一百二十戶 延和二年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為詹事侍祠孝文廟 醉歌堂下曰 出居 安能鬱鬱 大不敬 自殺       濟陰
重合侯莽通 以侍郎發兵擊反者如侯 侯 四千八百七十戶 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發兵與衛尉潰等謀反 要斬       勃海
德侯景建 以長安大夫從莽通共殺如侯 得少傅石德 侯 三千七百三十五戶 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共莽通謀反 要斬       濟南

 

 

2.    漢書(한서) 劉屈氂(유굴리)전에 기재된 투후 상구성 기록

 

유굴리(劉屈氂)에 대한 기록은 漢書 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에 실려 있다. 유굴리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上曰 侍郎莽通獲反將如侯 長安男子景建從通獲少傅石德 可謂元功矣 大鴻臚商丘成力戰獲反將張光 其封通爲重合侯 建爲德侯 成爲秺侯 諸太子賓客 嘗出入宮門 皆坐誅”. 이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무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랑 망통은 반란세력의 주동자 여후를 체포하였고, 장안의 사대부 경건은 망통을 따라서 반란세력의 주요 협력자인 태자의 소부 석덕을 체포하였으니 가히 그 공이 크다.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반란세력의 주동자인 장광을 붙잡았다. 이런 공로로 망통을 중합후에 봉하고, 경건을 덕후에 봉하며, 상구성을 투후에 봉한다’.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의 빈객 모두와 과거 태자궁을 출입한 사람들 모두를 잡아다가 사형에 처했다.”

 

또 이 유굴리전에는 상구성에 관련된 대한 또 다른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侍郎莽通使長安 因追捕如侯 告胡人曰 節有詐 勿聽也 遂斬如侯 引騎入長安 又發輯濯士 以予大鴻臚商丘成”. 이 구절을 번역하면, “시랑 망통이 장안으로 들어가 반란주동자 여후를 추격하여 체포하고 같은 흉노족 사람들에게반란세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는 표지는 거짓이니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외쳤다. 망통이 여후의 목을 베고 난 후 기마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입성하여 대홍려 상구성에게 알려서 마차와 배 수송 병사들을 반란군 진압에 투입하게 하였다.”

 

()는 騎兵(기병), ()은 군사력을 동원하다의 뜻이고, ()는 생사여탈(生殺與奪)이라는 말의 뜻과 같이 주다의 급여(給與), 알리다의 예고(予告)의 뜻이다. 力戰(역전)은 역전분투(努力奮戰)의 뜻으로써 이 말이 쓰인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반란 세력의 규모가 매우 컸고 전투 상황이 치열한 접전 상황이었음을 능히 짐작된다. 위태자 반란이 일어나 양측간에 5일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리하여 양측간에 수만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결과를 볼 때 무고지화의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컸다. 당연히 반란 진압의 결과가 미친 영향 또한 클 수 밖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輯濯(집탁)은 수레 마차 배 등-行船(행선), 가선행사(駕船行駛)- 수송 수단을 관장하고 있던 관서 명칭이다. 안사고의 주해는輯與楫同 濯與棹同 皆所以行船也 令執楫棹人為 越 歌也이라는 설명이 있다.

 

大鴻臚(대홍려)는 제후왕들과 주요 관리들을 접대하고 관리하는 업무, 그리고 국가 제례와 황실 종친의 의례를 맡고 있던 중앙 관서 중의 최고위직 우두머리로서 후대의 6조판서 제도로 분류한다면 예조판서에 해당하고 오늘날로 치면 외교부 문화부 업무를 책임지는 장관에 해당한다. 주례(周禮)에 기술된大行人”(대행인)의 관직을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엔 典客(전객)으로 개칭했다가 한경제 때 大行令(대행령)으로 또 한무제 때인 BC 104년에는大鴻臚”(대홍려)로 다시 바꾸었다. 한경제 때 주요 제후국의 제후왕들이 오초칠국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던 오초칠국의 난 역사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대행려직을 개칭하는 직제개편의 배경에는 대홍려직의 주요 업무가 제후왕들과 그들의 빈객들을 접대하거나 또는 황실 종친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어서 즉 황제의 권력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제후국의 동향이나 그들의 빈객들과 정부 고관들을 접대하는 업무를 관장하고 있어서 정권이 바뀌면 그에 따라 대홍려직을 개편할 필요성이 있었다. 대홍려는 국내외 민정 동향에 밝은 외교통으로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대제후국 관리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주례(周禮, 秋官 大行人)에서大行人掌大賓之禮及大客之儀 以親諸侯”(대행인장대빈지례급대객지의이친제후)으로 기술하고 있다. 

 

봉선 의식은 제례를 통해서 천자와 제후국들간의 권력의 균형과 통제 기능이 숨어 있다. 천자와 제후국간의 힘의 균형과 통제라는 정치 권력의 작동되는 분야인 황제와 제후왕들 간의 중요한 문제나 그들의 만남과 교제를 관장하는 대홍려직이었기에 오늘날 외교부장관의 업무처럼 세밀한 절차와 관례 규정 등에 정통해야 했고 또 정치 외교 전문 지식과 감각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3.    한서 양창(楊敞) 양운(楊惲) 열전의 副帝隸 秺侯御”(부제례 투후어) 해석

양운의 아버지는 오랫 동안 승상을 지낸 양창이고, 양창의 아내인 사마영이 그의 어머니이다. 양운의 어머니 사마영은 사마천의 딸이니 사마천은 양운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고서 자신의 딸에게 소중한 사기의 한 질을 맡겨 전했다고 하는데, 양운은 어려서부터 영특해서 그의 외조부가 남긴 사기를 읽고 자랐다고 반고의 한서는 적고 있다. 양창은 염철론의 대토론장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지 않았을 정도로 뚜렷한 정치 소신을 갖추지 못했는데,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 덕분인지 치열한 권력 투쟁의 장에서 살아 남았던 인물이다.

 

楊惲
班固, 漢書, 楊敞, “副帝()〔肄〕 秺侯御
張湛列子注曰:隸,猶群輩也。一云,徒隸,賤人也。
 
鄭玄禮記注曰:御,猶主也。
長樂者 宣帝在民間時與相知 及即位 拔擢親近 長樂嘗使行事隸宗廟 還謂掾史曰 我親面見受詔 副帝隸 秺侯御 人有上書告長樂非所宜言 事下廷尉
 
대장락이라는 사람은 한선제가 황제에 추대되기 전 민간인으로 살고 있을 때 서로 알고 지냈던 사람으로서 선제가 황제로 즉위된 즉시 황제를 보좌하는 주요 직책에 발탁된 사람이다. 대장락이 과거 황실 종친의 종묘 제사 행사를 주관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를 회고하면서 해당 관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는 부제(태자)가 투후 밑에서 황실 제사 지내는 방법을 배웠다’. 이에 대해 어느 누군가가 그런 말은 대장락이 발설해서는 아니된다고 하여 투서를 한 바 대장락을 사법 처리하라고 관련 부처에 넘겼다.

 

한서 양창전에서 말한 副帝隸〔肄〕 秺侯御”(부제례 투후어)의 투후는 누구를 가르키는가?

 

황실 종친의 종묘 제사 행사를 주관한 사람은 대홍려의 직책을 맡고 있던 사람이다. 부제(태자)가 투후 밑에서 황실 제사 지내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한 것으로 봐서 투후는 대홍려를 맡고 있던 상구성을 지칭한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경호원 시중내시의 직책을 맡고 있었고 따라서 황실 종친들과의 관계 각 제후들과의 관계 황실 제사 등의 업무에는 관련이 없다. 이런 업무는 대홍려가 담당하고 있었다.

 

 

 

4.    자치통감 商丘成力戰獲張光 封成為秺侯”.

 

정화2(BC 91) 상구성을 투후에 봉했다는 자치통감 기사는 다음과 같다:

 

庚寅 太子兵敗 南奔覆盎城門 長安男子景建從通獲石德 商丘成力戰獲張光 封通為重合侯 建為德侯 成為秺侯”.

 

5.    반악의 西征賦”(서정부) “秺侯之忠孝淳深”(투후지충효순심) 단락과 투후 상구성, 반악의 서정부에서 투후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