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출신 당나라 흑치준 장군 묘지명(706년)의 “秺侯”(투후)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차례
1. 당나라 백제 흑치준 묘지명 국사편찬위원회 번역
2 흑치준(黑齒俊) 묘지명 추홍희 번역
3. 흑치준 묘지명 구절 국사편찬위원회 번역과 추홍희 번역 비교
4. 추홍희 번역 역주
5 흑치준 묘지명의 “투후”와 문무왕릉비 비문의 “투후”관계
백제 출신 당나라 흑치준 장군 묘지명(706년)의 “秺侯”(투후)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흑치준 묘지명(大唐故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黑齒府君墓誌銘幷序)에 나타난 “秺侯入仕 西戎孤□(臣/家)” (투후입사 서융고신)의 해석
1. 당나라 백제 흑치준 묘지명 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소재 당나라 신룡(神龍)이년(706년)의 백제 출신 당나라 장군 흑치준(黑齒俊) 묘지명(大唐故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黑齒府君墓誌銘幷序)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於維后唐 求賢以理 頹當 秺侯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片善斯紀 其一.
이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於維后唐, 求賢以理, 頹當, 秺侯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片善斯紀. 其一
“아아, 堯 임금은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니, 頹當이 쓰여지게 되었고 金日磾가 벼슬을 얻었구나. 西戎의 외로운 … 이고 東夷의 자손으로서, 구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는 듯이 끝없이 하였으니, 여기에 그의 조그마한 착한 일들을 기록해두노라. 이것이 첫째이다.”
后唐: 堯 임금을 가리킨다. 頹當: 漢 7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장군이 되었던 사람. 秺侯: 金日磾를 이른다. 莽何羅를 토벌한 공으로 漢 武帝가 내린 작호이다(『漢書』권68 김일제전 참조).
(역주자 송기호, http://db.history.go.kr/id/gskh_008_0010_0100_0040).
2. 흑치준(黑齒俊) 묘지명 추홍희 번역
나는 위와 같은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을 반박하고 투후는 동이족 출신의 상구성(商丘成)임을 밝혀낸다.
추홍희 번역
於維后唐 求賢以理 頹當 秺侯 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片善斯紀
당나라 황제가 마땅히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이치를 깨닫고 동이족 출신 한퇴당 같은 뛰어난 인물을 썼도다. 동이족 한(韓)나라 후손 투후 상구성이 한나라 조정에 출사하였다가 서쪽 먼 변방의 구석진 곳까지 서정을 나갔는데, 같은 동이족의 자손으로서 공적이 그들에 미치지 못함이 없을 정도로 구했으니 여기에 그들 보다 조금 뛰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기념한다.
3. 흑치준 묘지명 구절 국사편찬위원회 번역과 추홍희 번역 비교
흑치준 묘지명 구절 | 국사편찬위원회 번역 | 추홍희 번역 |
於維后唐 求賢以理 頹當 秺侯 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片善斯紀 | 아아, 堯 임금은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니, 頹當이 쓰여지게 되었고 金日磾가 벼슬을 얻었구나. 西戎의 외로운 … 이고 東夷의 자손으로서, 구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는 듯이 끝없이 하였으니, 여기에 그의 조그마한 착한 일들을 기록해두노라. 이것이 첫째이다. | 당나라 황제가 마땅히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이치를 깨닫고 동이족 출신 한퇴당 같은 뛰어난 인물을 썼도다. 동이족 한(韓)나라 후손 투후 상구성이 한나라 조정에 출사하였다가 서쪽 먼 변방의 구석진 곳까지 서정을 나갔는데, 같은 동이족의 자손으로서 공적이 그들에 미치지 못함이 없을 정도로 구했으니 여기에 그들보다 조금 뛰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기념한다. |
국사편찬위원회와 추홍희의 번역 차이점은 동방의 동이족 출신으로서 서쪽 원정을 한 장군-투후 상구성-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서쪽 변방 흉노 출신에서 한나라 조정에 들어가 고관대작을 역임한 사람-투후 김일제-를 지칭하는가의 사실 판단에 달려 있다. 추홍희와 국편위 번역 차이점 키포인트는 동이족 즉 동쪽 나라의 출신으로서 서쪽으로 원정을 가서 죽은 사람 즉 투후 상구성인가? 아니면 서쪽 변방의 흉노족 출신으로 한나라로 귀순한 김일제를 지칭하는가? 이것에 있다. 상나라를 세운 설(契)은 제곡고신씨의 아들 알백이다. 제곡(帝嚳)고신씨의 자식으로 동쪽으로 간 알백(閼伯) 설(契)이 있었고, 실크로드를 따라서 서쪽으로 간 동생 실침(實沈)이 있었다. 알백이 상나라를 건설하면서 수도를 상구(商丘, 오늘날 산동성 하택시 부근, 이곳 제음군에 투후(秺侯)의 봉지 투성(秺城)이 위치한다)에 정했다.
4. 추홍희 번역 역주
추홍희 역주 | |
維后唐 | 維后唐: 당나라 황제 |
求賢以理 | 맹상군의 구현령, 조조의 구현령 등 널리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탕평책 인사 원칙 |
頹當 | 頹當: 한퇴당(韓頹當). 한퇴당은 한왕신의 아들로, 한왕신이 BC 200년에 흉노로 달아나 그곳 퇴당성(頹當城)에서 낳았기에 그 퇴당성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퇴당으로 지었다. 퇴당성은 음산(陰山) 산맥의 북부에 위치한다. 음산은 곤륜산(崑崙山)의 북쪽 지맥으로 내몽골 자치구 고비 사막 동부의 남쪽 경계와 호북성의 북쪽 경계를 형성하는 산맥이다. 이곳은 요나라의 선조가 출생한 곳으로 “음산칠기도”가 있는데 이것은 요나라 선조의 역사를 말해준다. 한퇴당은 한문제 시기에 한왕신의 형의 아들 한영과 함께 흉노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해 한문제 16년(BC 164) 6월 병자일에 궁고후(弓高侯)에 봉해졌다. 한퇴당은 오초칠국의 난에서는 주아부(周亞夫)의 명령을 받고 주력 기마병 경기병으로 오나라와 초나라의 양도를 끊는 작전에 참여했고, 오나라와 초나라 반군은 결국 양효왕의 봉지의 마지막 반격에 패퇴했다. 한퇴당은 반란군 교서왕 유앙(劉卬, ?-BC 154)을 질책하고 이에 유앙(유방의 손자)은 자결했다. BC 156년에 손자 한칙이 작위를 계승하고 그가 BC 124년에 후사 없이 죽어 궁고후국은 없어졌다. |
秺侯 入仕 | 秺侯: 투후 상구성(商丘成)을 지칭한다. 상구성(?-BC 88)성은 상구(商丘)이고 이름은 성(成)이다. 상구성은 한무제 때 BC 104년 한경제 때의 대행령(大行令)을 개칭한 대홍려(大鴻臚)를 지냈다. 대홍려는 6조판서의 예조판서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소수민족 출신의 우두머리이거나 제후왕들의 연락책의 임무를 맡았고 녹봉은 2천석이었다. 상구성은 BC 91년 7월 무고지란이 발생할 때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투후(秺侯) 봉작을 받았다. 식읍은 2천1백2십호. 태자 반란군이 완전 진압된 9월 상구성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했다. BC 90년 흉노 정벌 전에 7만 병력의 이광리에 이어 2만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흉노를 지름길로 달려 추격했으나 더 이상 적군을 발견하지 못해서 철수하고 되돌아왔다. BC 89년 흉노정벌전을 그만둔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 사건 때 상구성은 한문제의 첨사로 좌천당했다. 이후 BC 88년 6월 한문제 묘지기 첨사로 지낼 때 부하에게 한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이란 말이 황제에 대한 저주(詛咒)라는 모함을 받고 이것이 대불경(大不敬) 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자 스스로 자결했다. |
西戎 |
서융: 중국 서북쪽의 소수이민족을 총칭한다. |
孤□ | 孤□: 孤(臣/魂/雁/家/雊/雌) 孤□: 마멸된 글자는 (臣/魂/雁/家/行/雊/雌) 등으로 메꾸어 볼 수 있다. 孤臣(고신), 孤魂(고혼), 孤雁(고안), 孤家(고가), 孤雊(고구), 孤雌(고자), 孤行(고행)의 단어들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는 즉 멀리 떨어진 변방의 외톨이 신하(또는 독립국가)라는 뜻이다. |
東夷 | ① 중국 중원(中原)의 동쪽 거주 각 종족 통칭-동이족이 세운 상나라가 대표적이다. 《禮記‧曲禮下》: “其在東夷、北狄、西戎、南蠻, 雖大曰子” ② 위촉오 삼국시대 오(吳)나라 지칭. 曹植<王仲宣誄>: “嗟彼 東夷 憑 江 阻湖 騷擾邊境 勞我師徒” 李善 注: “ 東夷 謂 吳” ③ 중국 東方의 朝鮮, 日本 等 國家 지칭 |
東夷之子 | 東夷(동이)는 중국 중원을 둘러싼 동서남북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와 그 족속의 통칭으로 쓰였다. 東夷(동이)는 島夷(도이)로서 동쪽의 이민족을 지칭하고 위촉오 삼국시대에는 손권의 오(吳)나라를 가르킨다. 조식의 왕중선뢰(王仲宣誄)에 등장하는 구절 “嗟彼 東夷 憑 江 阻湖 騷擾邊境 勞我師徒”의 이선(李善)은 “東夷 謂 吳”로 주해를 달았다. 동이는 후대에 이르러 중국의 동방국 즉 조선 일본 왜구 등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였다. 도이는 서경 우공(禹貢) 편에 “大陸既作 島夷皮服” 표현이 나타난다. 島夷(도이)는 宋 、 齊 、 梁 、 陳 、 魏 、 齊 、 周 、 隋 왕조 시대에 북조 국가들이 남조를 멸시하는 의미로 불렀다. 한편 남조는 북조를 색로(索虜)로 멸칭했다. |
求如不及 | 求如不及: 求之如弗及 황제께서 인재들을 널리 등용하기 위해 찾으면서 구할 수 없을까봐 마음을 애태웠다. 즉 아무리 많아도 미치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여길 정도로 인재라면 모두 구해 등용했다는 의미이다. 통일 당나라는 조조(曹操)의 “求賢令”과 같이 나라 안팎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백제나 신라의 인재들을 두루 등용하였고, 당나라 후기에 이르러 외국인 출신의 인재 등용 정책이 그치자 최치원 같은 신라 출신 인재들이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
片善 | 片善: 微小 優點, 당나라 백거이의 부(賦)에 나타나는 구절: “微才無忽, 片善是求” |
斯紀 | 斯: 여기에 this, 紀: 기록하다, 기리다, 기념하다 |
5. 흑치준 묘지명의 “투후”와 문무왕릉비 비문의 “투후”관계
현재 문무대왕 왕릉비문 속에 등장하는 “秺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을 “투후 김일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투후 김일제"라고 떠드는 이들이 넘쳐나서 그 혼란스러움이 극한 상황에 다다른 지경이다. 탈-진실사회에서 활개치는 인터넷 가짜글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식민사학자들이 판치고 진행시켜 온 특히 KBS 방송 역사 스페셜 등 각종의 신문 방송들에서 문무대왕 왕릉비문의 “투후 제천지윤”을 “투후 김일제”로 해석하여 “신라인은 흉노족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떠들어댄 이유 중 하나는 공자도 칭찬해 마지 않았던 우수한 한반도 백이숙제 동이 민족을 침략자 서방강족 흉노족으로 변신시켜 민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만들어 내고, 그리하여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잠재하고 전해 내려온 자유민주주의 정통 민족성을 말살시키고, 또 식민지로 전락시켜 온국민을 노예화시키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탈-진실 사회의 역기능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문무대왕릉 비문 속의 “秺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 구절은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을 지칭한다는 추홍희의 문무대왕릉 비문 해석 논지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고, “투후 제천지윤”은 “투후 김일제”가 아니라 “투후 상구성”을 지칭한다는 추홍희의 주장이 진실한 역사로써 곧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된다.
문무대왕릉 비문과 흑치준 묘지명의 “투후”가 투후 김일제를 지칭하느냐 아니면 투후 상구성을 지칭하느냐를 두고서 누가 진짜 투후인지를 입증해 내는 그 임무는 순전히 역사가의 몫에 달려 있다. 이 일은 역사를 모르면 해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고,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그리고 진서와 남북사 자치통감까지 여러 사서들을 통합한 결론으로써 문무대왕 왕릉비 비문과 흑치준 묘지명의 “투후”는 “투후 상구성”을 지칭한다는 사실이 역사학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1716년에 나온 강희자전 옥편을 펼쳐보면 ““【史記•年表】秺侯金日磾【前漢•功臣表】秺侯商丘成” 이렇게 “투후 김일제”와 “투후 상구성”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
흑치준 묘지명에서 투후와 한퇴당의 관계를 올바로 고찰해냄으로써 문무대왕릉 비문에서의 “투후”의 정체를 보다 정확하게 “투후 상구성”임을 결론지은 것이 추홍희 저자의 주된 요지이자 의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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