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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Think Like a Lawyer

13장 투후 김일제 秺侯 金日磾

by 추홍희블로그 2021. 10. 17.

12. 투후 김일제

 

1.        사기 년표 《史記年表》 투후 김일제 秺侯 金日磾

 

사기 년표에 다음과 같은 김일제를 투후로 봉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後元元年 二月己巳,光祿大夫霍光為大將軍 博陸侯 都尉金日磾為車騎將軍 秺侯 太僕安陽侯上官舛為大將軍

 

후원원년 이월 기사일

광록대부 곽광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박륙후에 봉하고, 도위김일제를 거기장군에 임명하고 투후에 봉하며, 태복 안양후 상관천을 대장군에 임명함.

 

2.        한서 서전하(敘傳下) “秺侯狄孥”(투후적노) 해석

 

한서 서전하(敘傳下)秺侯狄孥 虔恭忠信 奕世載德 貤于子孫”(투후적노 건공충신 혁세재덕 이우자손): 투후는 적()의 자식으로, 성실하고 정성을 다해 충성을 바치고 믿음을 지켰고. 누대에 걸쳐 대대로 덕을 쌓고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반고의 편제에 따라서 여기의 투후는 김일제를 지칭한다.

 

: 子女, 奕世: 累世, 代代, 載德: 積德, : , 延展

 

3. 경후(敬侯) 김일제(金日磾)-한서, 김일제전

 

한서 김일제전에서 김일제의 시호는 경후(敬侯)라고 했고, 한서 공신표에는 투경후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서, 김일제전  
 
輔政歲餘病困大將軍光白封日磾臥授印綬一日賜葬具冢地送以輕車介士軍陳至茂陵諡曰敬侯 일제는 남은 생을 보좌하다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은 작위에 봉함을 일제에게 알렸다. 일제는 죽음의 병상에서 인수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망했다. 장례용품과 장지를 하사받았고 관을 이끄는 수레와 따르는 용사들을 장지인 무릉에 딸려 보냈고 시호는 경후라고 했다.
 
金日磾夷狄亡國羈虜漢庭而以篤敬寤主忠信自著勒功上將傳國後嗣世名忠孝七世內侍何其盛也本以休屠作金人為祭天主故因賜姓金氏云
 
김일제는 한나라의 적국 오랑캐 출신으로 나라가 망해서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나깨나 진실로 한왕을 섬기고, 진심으로 믿음을 다해 섬긴 결과 큰 공을 세우고 높은 계급의 장군이 되었다. 후대 자손에게 봉읍지를 전해주고, 충성과 효성이 높은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황제의 곁을 지키는 높은 벼슬의 궁중 내시를 대대로 지냈으니 그와같이 집안이 번창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김일제의 본관은 휴도왕이 청동금상을 만들어 하늘님(천주)에게 제사를 지내는 바 이에 따라서 황제가 금씨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4. 한서 공신표에서의 투경후 금일제

 

투후 김일제에 관한 한서 공신표의 기록을 보자. “투경후 김일제로 적혀 있다.

한서 공신표

투경후 김일제 부마도위 때 시중 망하라의 반란 기도를 적발한 공로로 봉후 작위를 받음 봉읍 호수는 2218 시원2(87) 후작위 받음 작위 받은 날이 병자일이었는데 그 다음 날 사망함   원시4년 제후 작위를 증손 김상이 이어받음 봉읍은 1천호였음. 왕망이 망하자 작위는 취소되고 없어짐  
             
秺敬侯金日磾 以駙馬都尉發覺侍中莽何羅反侯,二千二百一十八戶。 始元二年侯,丙子封,一日薨。 元始四年,侯常以日磾曾孫紹侯,千戶,王莽敗,絕。  

 

5. 한서 김일제전에서의 투후 봉작 사실-武帝遺詔以討莽何羅功封日磾為秺侯 日磾以帝少不受封


한서의 기록에는 한무제가 김일제에 대한 투후 작위를 유언으로 남겼지만 김일제는 황제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투후 작위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日磾以帝少不受封”-을 함께 적고 있다. 한서 김일제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武帝遺詔以討莽何羅功封日磾為秺侯 日磾以帝少不受封
무제는 임종 전에 망하라를 토벌한 일제를 秺侯(투후)로 봉하라는 遺詔(유조)를 남겼으나 일제는 소제가 아직 어리다며 작위를 받지 않고 사양했다.
輔政歲餘 病困 大將軍光白封日磾 臥授印綬 一日 賜葬具冢地 送以輕車介士 軍陳至茂陵 諡曰敬侯 일제는 남은 생을 보좌하다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은 작위에 봉함을 일제에게 알렸다. 일제는 죽음의 병상에서 인수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망했다. 장례용품과 장지를 하사받았고 관을 이끄는 수레와 따르는 용사들을 장지인 무릉에 딸려 보냈고 시호는 경후라고 했다.

 

6. 한서 김일제전 번역

 

김일제는 어떻게 투후가 되었는가?

BC 121년 여름. 곽거병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기련산 일대를 공략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3만 이상을 사살하고 수천명을 포로로 노획했다. 흉노의 선우가 패배에 대한 책임을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묻자 이들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작정하였다. 투항하기 전에 휴도왕이 마음을 바꿔 동조하지 않자 혼야왕이 휴도왕을 살해하고 4만여명의 흉노족을 이끌고 곽거병군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日磾)와 그의 동생 윤()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로 잡혀왔다. 이들은 교외 밖에서 궁정용 말을 키우는 노예의 천한 일을 맡았다. 그러던 어느 후 무제가 연회를 베풀며 달리는 말을 사열하는 과정에서 꼿꼿한 자세를 견지한 일제를 발견하고 그를 궁정 무사로 발탁하였다. 노획한 흉노왕이 섬기는 하늘님 천주(天主)의 청동동상(金人)-“休屠作金人為祭天主”-을 고려하여 한무제가 김씨성을 하사하였다. 한자는 흑색 염색용 검은 숫돌을 지칭하는 글자이고, 서양인의 몸에서 나는 노린내를 없애주는 남성용 방향제를 금제향(金磾香)-당나라 때의 통명기에 의하면 김일제는 궁궐 드나들 때 의복을 청결히 소제하고 서양인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이 금제향을 뿌리고 다녔다-說郛》:金磾香洞冥記金日磾 既入侍 欲衣服香潔 變胡虜之氣 自合此香”-. 금제향으로 부른 것 또 검은 먹물로 문서를 지우는 것 또 조작된 문서를 흑서(黑書)-백서의 반대말-라고 부르는 것 등 어원을 고려해 본다면 금일제(金日磾)는 은밀한 역사를 은폐 조작하고 미화하는 흑서의 검은 장막을 함의한 말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민자는 살아남기 위하여 과거 역사를 은폐 조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은 진화론의 적응하는 동물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서 김일제전 번역

한서 김일제전  
金日磾字翁叔本匈奴休屠王太子也武帝元狩中票騎將軍霍去病將兵擊匈奴右地多斬首虜獲休屠王祭天金人其夏票騎復西過居延攻祁連山大克獲於是單于怨昆邪休屠居西方多為漢所破召其王欲誅之昆邪休屠恐謀降漢休屠王後悔昆邪王殺之并將其眾降漢封昆邪王為列侯 김일제의 자는 옹숙이고, 본래 흉노족 휴도왕 태자이다. 한무제 원수중(BC 122 –BC 117) 표기장군 곽거병이 장병들을 흉노족 우측을 공격하게 하고 대거 적의 목을 베고, 휴도왕의 제사 드리는 청동동상을 노획했다. 그해 여름철 곽거병은 거연산을 거쳐 다시 서쪽으로 들어가 기련산을 공격했고 대거 노획을 거두었다. 곤야왕와 휴도왕의 서쪽이 한나라 군에 대파당하자 선우가 이둘을 원망하고 주살하고자 했다. 이에 곤야왕과 휴도왕은 두려워서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했다. 휴도왕이 이를 후회하자 곤야왕이 그를 죽여버리고 부하들을 데리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곤야왕은 열후에 봉해졌다.
日磾以父不降見殺與母閼氏弟倫俱沒入官輸黃門養馬時年十四矣 일제는 아버지가 투항하지 않고 피살되자 어머니 알씨와 동생 륜과 함께 궁전밖 황문 말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천한 일을 했다. 이때 일제의 나이 14세였다.
久之武帝游宴見馬後宮滿側日磾等數十人牽馬過殿下莫不竊視至日磾獨不敢 세월이 흐른 후 무제는 연회를 베풀고, 후궁들이 가득찬 가운데 사육하는 말들을 사열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제각기 자신이 사육한 말을 끌고 전각 아래를 지나갔다. 힐끔힐끔 훔쳐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일제만은 훔쳐보려고도 않고 지나갔다.
日磾長八尺二寸容貌甚嚴馬又肥好上異而問之具以本狀對上奇焉即日賜湯沐衣冠拜為馬監遷侍中駙馬都尉光祿大夫日磾既親近未嘗有過失上甚信愛之賞賜累千金出則驂乘入侍左右貴戚多竊怨:「陛下妄得一胡兒反貴重之!」上聞愈厚焉 김일제는 82촌의 장신에다 용모가 준엄했다. 그의 말은 살찌고 뛰어나 무제는 기이하게 여기고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다. 무제는 기특하게 여기고 목욕재계하게 하고 의관을 하사했다. 일제는 馬監(마감)에 제수받고,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로 고속 승진해갔다. 일제는 무제의 곁에 있었고 잘못 하나 없이 수행했다. 무제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매번 하사금을 받아 수천금에 이르렀다. 외출 순시할 때마다 황제의 마차에 배승했고, 환궁하면 좌우에서 시중했다. 귀척들이 이런 일제를 질투하고 시기하여 말하길: “폐하는 오랑캐의 자식 하나를 어찌 이다지도 귀하게 중용하십니까!”라고 하였지만, 무제는 이를 듣고도 물리치고 더욱 후하게 아꼈다.
日磾母教誨兩子甚有法度上聞而嘉之病死詔圖畫於甘泉宮署曰休屠王閼氏。」日磾每見畫常拜鄉之涕泣然後乃去 일제의 모친은 두 자식 교육에 열심이었고 법도를 갖추라고 했다. 무제는 이를 치하하였다. 모친이 병으로 죽자 무제는 감천궁에 초상화를 그려두게 했다. 초상화의 제목은 휴도왕 알씨였다. 일제는 매일 모친의 초상화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절을 올렸다.
日磾子二人皆愛為帝弄兒常在旁側弄兒或自後擁上項日磾在前見而目之弄兒走且啼曰:「翁怒。」上謂日磾何怒吾兒為?」其後弄兒壯大不謹自殿下與宮人戲日磾適見之惡其淫亂遂殺弄兒弄兒即日磾長子也上聞之大怒日磾頓首謝具言所以殺弄兒狀上甚哀為之泣已而心敬日磾 일제는 아들 두명을 애지중지했고 무제의 노리개 아이로 항상 무제 곁에 두었다. 이 아들이 무제의 목을 껴앉고 있는 것을 일제가 직접 똑바로 보자 아이는 달아나 울면서 말했다: “옹이 분노했어요”. 이에 무제가 일제에게 말했다: “내 아이에게 어찌 화를 낸다는 것인가?” 그 후 아이가 자라나 장성해지자 조신하지 못하고, 궁전앞에서 궁인들과 희롱을 즐겼는데 이를 일제가 목격했고 일제는 음란한 것을 싫어하여 자식을 바로 죽여버렸다. 이 아이는 일제의 장남이었다. 무제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자 일제는 머리를 땅에 대고 석고대죄 사과를 하며 자식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말했다. 무제는 심히 슬퍼하였고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이는 일제의 마음을 울렸다.
莽何羅與江充相善及充敗衛太子何羅弟通用誅太子時力戰得封後上知太子冤乃夷滅充宗族黨與何羅兄弟懼及遂謀為逆 망하라와 강충은 서로 원래 사이가 좋았고 강충이 위태자를 공격할 시 동생 망통과 함께 태자반란군에 맞서 역전분투하여 봉작위를 받았다. 그 후에 무제가 태자의 억울함을 인지하고서 강충의 종족을 주멸하였고 이에 망하라와 망통은 두려움이 앞서 역모를 꾸몄다.
日磾視其志意有非常心疑之陰獨察其動靜與俱上下何羅亦覺日磾意以故久不得發 일제는 평소 그런 낌새를 채고 망하라의 행동을 의심쩍고 예의주시했다. 일제는 몰래 그 동정을 살폈다. 망하라 역시 그런 일제의 마음을 읽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역모를 꿰할 수 없었다.
是時上行幸林光宮日磾小疾臥廬何羅與通及小弟安成矯制夜出共殺使者發兵明旦上未起何羅亡何從外入日磾奏廁心動立入坐內戶下須臾何羅袖白刃從東箱上見日磾色變走趨臥內欲入行觸寶瑟日磾得抱何羅因傳曰:「
莽何羅反上驚起左右拔刃欲格之上恐并中日磾止勿格日磾捽胡投何羅殿下得禽縛之窮治皆伏辜繇是著忠孝節
 
무제가 임광궁에 행차했을 때 일제가 수행했고 때마침 일제는 객사에 누워 있었다. 망하라와 망통 그리고 다른 형제 안성은 가짜로 칙명을 조작하고 야출하여 사자를 죽이고 거병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무제가 아직 침상에서 잠자고 있을 때 망하라가 어디에선가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마침 측간 변소에 가던 일제는 직감적으로 의심이 들어 궁전 안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순간 품 속에 칼을 품고 침입하는 망하라가 일제를 보고 얼굴색이 변해 침실내로 잠입하고자 하는 것을 발견했다. 비상암구호를 묻자 아무 반응이 없어 일제는 망하라를 덮친 후 “망하라 모반!”이라고 전달했다. 무제가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좌우의 시위가 모여들어 칼을 대고 물리치려고 했다. 무제가 그가운데 일제가 있는 것을 알고 공격을 멈추게 했다. 일제가 망하라를 전각아래로 내던지고 제압하고 포박했다. 이들 모두 죄를 묻고 사형에 처했다. 이로서 충효와 그 인과관계는 절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日磾自在左右目不忤視者數十年賜出宮女不敢近上欲內其女後宮不肯其篤慎如此上尤奇異之 일제는 무제의 좌우 곁에서 보좌했고 십수년을 옆으로 눈길 하나 흐트리지 않았다. 궁녀가 하사되었지만, 일제는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무제는 은근히 내심으론 후궁으로 삼을려고 했는데 일제는 응하지 않았다. 일제의 중후근심이 이와 같았고 무제는 특별히 경이스럽게 여겼다.
及上病屬霍光以輔少主光讓日磾日磾曰:「臣外國人且使匈奴輕漢。」 무제가 중병에 걸린 후 요절한 곽거병의 동생 霍光(곽광)에게 어린 후계자 황제의 보좌를 부탁했다. 하지만 곽광은 일제에게 양보하자 일제는 신은 본래 외국인인데 그것은 흉노가 한나라를 가볍게 보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사양했다.
於是遂為光副光以女妻日磾嗣子賞 이 때 일제는 곽광의 부하로 2인자이었고 곽광은 자신의 여식을 일제의 둘째 아들 김상의 아내로 삼았다.
武帝遺詔以討莽何羅功封日磾為秺侯日磾以帝少不受封 무제는 임종 전에 망하라를 토벌한 일제를 秺侯(투후)로 봉하라는 遺詔(유조)를 남겼으나 일제는 소제가 아직 어리다며 작위를 받지 않고 사양했다.
輔政歲餘病困大將軍光白封日磾臥授印綬一日賜葬具冢地送以輕車介士軍陳至茂陵諡曰敬侯 일제는 남은 생을 보좌하다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은 작위에 봉함을 일제에게 알렸다. 일제는 죽음의 병상에서 인수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망했다. 장례용품과 장지를 하사받았고 관을 이끄는 수레와 따르는 용사들을 장지인 무릉에 딸려보냈고  시호는 경후라고 했다.
   
日磾兩子俱侍中與昭帝略同年共臥起賞為奉車建駙馬都尉及賞嗣侯佩兩綬上謂霍將軍曰:「金氏兄弟兩人不可使俱兩綬邪?」霍光對曰:「賞自嗣父為侯耳。」上笑曰:「侯不在我與將軍乎?」光曰:「先帝之約有功乃得封侯。」時年俱八九歲宣帝即位賞為太僕霍氏有事萌牙上書去妻上亦自哀之獨得不坐元帝時為光祿勳亡子國除元始中繼絕世封建孫當為秺侯奉日磾後  
 
日磾所將俱降弟倫字少卿為黃門郎早卒日磾兩子貴及孫則衰矣而倫後嗣遂盛子安上始貴顯封侯  
安上字子侯少為侍中惇篤有智宣帝愛之頗與發舉楚王延壽反謀賜爵關內侯食邑三百戶後霍氏反安上傳禁門闥無內霍氏親屬封為都成侯至建章衛尉賜冢塋杜陵諡曰敬侯四子  
明皆為諸曹中郎將常光祿大夫元帝為太子時敞為中庶子幸有寵帝即位為騎都尉光祿大夫中郎將侍中元帝崩故事近臣皆隨陵為園郎敞以世名忠孝太后詔留侍成帝為奉車水衡都尉至衛尉敞為人正直敢犯顏色左右憚之唯上亦難焉病甚上使使者問所欲以弟岑為託上召岑拜為郎使主客敞子涉本為左曹上拜涉為侍中使待幸綠車載送衛尉舍須臾卒敞三子  
涉明經儉節諸儒稱之成帝時為侍中騎都尉領三輔胡越騎哀帝即位為奉車都尉至長信少府而參使匈奴匈奴中郎將越騎校尉關都尉安定東海太守饒為越騎校尉
涉兩子皆侍中諸曹將大夫而涉之從父弟欽舉明經為太子門大夫哀帝即位為太中大夫給事中欽從父弟遷為尚書令兄弟用事帝祖母傅太后崩欽使護作職辦擢為泰山弘農太守著威名平帝即位徵為大司馬司直京兆尹帝年幼選置師友大司徒孔光以明經高行為孔氏師京兆尹金欽以家世忠孝為金氏友徙光祿大夫侍中秩中二千石封都成侯
 
時王莽新誅平帝外家衛氏召明禮少府宗伯鳳入說為人後之誼白令公卿將軍侍中朝臣並聽欲以內厲平帝而外塞百姓之議欽與族昆弟秺侯當俱封  
當曾祖父日磾傳子節侯賞而欽祖父安上傳子夷侯常皆亡子國絕故莽封欽當奉其後  
當母南即莽母功顯君同產弟也當上南大行為太夫人欽因緣謂當:「詔書陳日磾功亡有賞語當名為以孫繼祖也自當為父祖父立廟賞故國君使大夫主其祭。」時甄邯在旁庭叱欽因劾奏曰:「欽幸得以通經術超擢侍帷幄重蒙厚恩封襲爵號知聖朝以世有為人後之誼前遭故定陶太后背本逆天孝哀不獲厥福乃者呂寬衛寶復造姦謀至於反逆咸伏厥辜太皇太后懲艾悼懼逆天之咎非聖誣法大亂之殃誠欲奉承天心遵明聖制專壹為後之誼以安天下之命數臨正殿延見群臣講習禮經孫繼祖者謂亡正統持重者也賞見嗣日磾後成為君持大宗重則禮所謂尊祖故敬宗』,大宗不可以絕者也欽自知與當俱拜同誼即數揚言殿省中教當云云當即如其言則欽亦欲為父明立廟而不入夷侯常廟矣  
進退異言頗惑眾心亂國大綱開禍亂原誣祖不孝罪莫大焉尤非大臣所宜大不敬秺侯當上母南為太夫人失禮不敬。」莽白太后下四輔公卿大夫博士議郎皆曰:「欽宜以時即罪。」謁者召欽詣詔獄欽自殺  
邯以綱紀國體亡所阿私忠孝尤著益封千戶更封長信少府涉子右曹湯為都成侯  
湯受封日不敢還歸家以明為人後之誼益封之後莽復用欽弟遵封侯歷九卿位  
贊曰 霍光以結髮內侍起於階闥之間確然秉志誼形於主受襁褓之託任漢室之寄當廟堂擁幼君摧燕王仆上官因權制敵以成其忠  
處廢置之際臨大節而不可奪遂匡國家安社稷擁昭立宣光為師保雖周公阿衡何以加此! 。  
然光不學亡術闇於大理陰妻邪謀立女為后湛溺盈溢之欲以增顛覆之禍死財三年宗族誅夷哀哉  
昔霍叔封於晉晉即河東光豈其苗裔乎  
金日磾夷狄亡國羈虜漢庭而以篤敬寤主忠信自著勒功上將 김일제는 한나라의 적국 오랑캐 출신으로 나라가 망해서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나깨나 진실로 한왕을 섬기고, 진심으로 믿음을 다해 섬긴 결과 큰 공을 세우고 높은 계급의 장군이 되었다.
傳國後嗣世名忠孝 후대 자손에게 봉읍지를 전해주고, 충성과 효성이 높은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七世內侍何其盛也 황제의 곁을 지키는 높은 벼슬의 궁중 내시를 대대로 지냈으니 그와같이 집안이 번창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本以休屠作金人為祭天主故因賜姓金氏云 김일제의 본관은 휴도왕이 청동금상을 만들어 하느님(천주)에게 제사를 지내는 바 이에 따라서 황제가 금씨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七世內侍

七世(칠세)七葉(칠엽)과 같은 말이다. 七葉(칠엽)은 문무왕릉비 비문속의부칠엽과 같은 의미 즉 칠엽귀신(七葉貴臣), 칠엽중신(七葉重臣)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내시와 시중은 국왕의 좌우 곁에 서서 왕명을 출납하는 직무를 하는 높은 벼슬의 사람이다. 왕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으로서 비싼 담비가죽으로 된 초선(貂蟬)의 관을 머리에 쓰고 있어 그 신분을 쉽게 알 수 있어 칠엽대신이라는 말을 쓴다.

말세, 말엽이라는 우리말 단어에서 보여지듯 엽()과 세() 글자는 서로 통용된다. 곽광과 금일제전을 함께 싣고 있는데 곽광과 김일제의 가계를 대조대비해서 교훈을 설명하고 있는 한서의 편찬 의도에서 본다면 칠세(七世)내시는 칠대(七代)내시로 해석된다. 곽광과 금일제는 뿌리깊은 본토토박이 군벌호족 외척세력과 뿌리기반없는 외국이민자 노비출신이라는 출신배경의 큰 차이뿐만 아니라 한서의 영행전(총애받은 내시들이 국정을 전횡한 사례들)에서 금일제와 금일제 아들을 거명하면서 비록 이들이 각각 한무제와 한선제에게총애를 받은 내시이긴 하였지만 그 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측면에서 다른 총애받은 내시들의 삶과는 다르다고 논평한 구절(“昭帝時 駙馬都尉秺侯金賞 嗣父車騎將軍日磾爵為侯 二人之寵取過庸 不篤”, 한서, 佞幸傳)을 참조하라.

무제는 임종 전에 망하라를 토벌한 일제를 秺侯(투후)로 봉하라는 遺詔(유조)를 남겼으나 일제는 소제가 아직 어리다며 작위를 받지 않고 사양했다.

일제는 남은 생을 보좌하다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은 작위에 봉함을 일제에게 알렸다. 일제는 죽음의 병상에서 인수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망했다. 장례용품과 장지를 하사받았고 관을 이끄는 수레와 따르는 용사들을 장지인 무릉에 딸려보냈고  시호는 경후라고 했다.

 

7. 한무제의 죽음의 병상에서 내린 유조

한무제의 죽음의 병상에서 내린 유조에 대한 한서 곽광전 구절은 다음이다: “后元二年春上游五柞宮病篤光涕泣問曰:“如有不諱誰當嗣者?”上曰:“君未諭前畫意邪立少子君行周公之事.”上以光為大司馬大將軍磾為車騎將軍及太仆上官桀為左將軍搜粟都尉桑弘羊為御史大皆拜臥內床下受遺詔輔少主. 明日武帝崩太子梟尊號為孝昭皇帝. 帝年八歲政事一決于光遺詔封光為博陸侯.”

 

8. 송서(宋書) 부융(傅隆)秺侯何得流名百代”(투후하득유명백대) 의미 해석 

대의멸친의 봉건법 질서를 석작과 김일제를 예로 들고 설명하고 있는 송서 부융전 기록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宋書·傅隆傳》
秺侯何得流名百代구절
번역 해설
  傅隆(부융)369451년): 남조 송()나라 때 문신. 남조 송나라는 군벌세력인 송무제 유유(363- 422)가 동진을 쓰러뜨리고 세운 나라로 420- 479년간 존속했다.
將父子孫祖 互相殘戮 懼非先王明罰 咎繇立法之本旨也 向使石厚之子 日磾之孫 砥鋒挺鍔 不與二祖同戴天日 則石碏 秺侯何得流名百代 以為美談者哉 부자지간에 할아버지와 손자지간에 서로 죽여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형벌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고도씨가 법을 만든 근본적인 취지였다. 예컨대 석작의 아들인 석후와 김일제의 핏줄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 비록 직접적 혈연관계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하늘아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갈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므로 죽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자식마저도 죽였던 대의멸친의 석작과 투후였기에 이들의 이름이 수백년이 흐르도록 전해내려오는 그 이유가 아니겠는가?
先王明罰(선왕명벌): 형벌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법질서를 확립한다는 明罰勑法(명벌칙법)의 말과 같은 뜻이다.
 
咎繇(구요, BC 2220-BC 2113): 咎陶(구도), 皋陶(고도), 皋繇(고요)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태평성군 시대를 구가했던 삼황오제 중 순임금님 시대에서 법을 체계화하여 현신으로 이름난 인물로서 법의 대명사, 감옥의 옥신(獄神) 즉 처용신으로 여겨진다. 또 신라 육부와 같은 육안국(六安國)의 시조로 여겨진다.
 
向使(향사): 예컨대, 가령(假令).
 
石厚(석후): 춘추시기 ()나라 대부 石碏(석작)의 친자인데 임금을 시해한 반란에 가담했다가 후에 아버지에게서 죽임을 당했다. 석작은 석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日磾(일제): 금일제(BC 134-BC 86). 日磾 이름을 중국에서는 密低”(밀저)로 발음해 왔다고 한다. 중국 책에서 금일제 발음을 密低로 읽는다고 토를 다는데 그 연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砥鋒挺鍔(지봉정악): 마도발검 즉 칼을 뽑는다의 뜻으로 무력 반항 즉 반란을 의미하는 성어.
 
戴天(대천): ()조상을 받들어 모시다의 뜻인 尊奉(존봉), 推崇(추숭)과 같은 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서로 함께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원한이 깊은 원수지간을 뜻하는 不俱戴天(불구대천)이라는 성어에 그 의미가 잘 들어 있다.
 
秺侯(투후): “石厚之子 日磾之孫 砥鋒挺鍔 不與二祖同戴天日 則石碏 秺侯何得流名百代이 구절은 대의멸친을 설명하는 사례로 쓰인 문맥상 의미로 보면 김일제를 지칭한다. 석작과 금일제를 대의멸친의 대표적 사례로 들어서 설명한 당나라 우희제의 石碏論”(석작론)을 참고하라. 참고로 우희제(牛希濟, 872-)는 오대십국시대 전촉(前蜀)의 관리로 전촉이 망하자 925년에 후당(後唐)으로 투항한 사람이었다.


流名(유명): 높은 명성이 전해 내려오다.
한서에서 곽광과 금일제를 같은 편에 실고 있는 그 이유는 곽광과 금일제 가계의 상술은 반란은 반란을 낳는 피비린내는 권력투쟁의 산물인 대의멸친의 봉건법질서를 강조하는 의미에 있을 것이다. 親親故尊祖尊祖故敬宗敬宗故收族收族故宗廟嚴宗廟嚴故重社稷重社稷故愛百姓: 어버이를 친히 하면 조상을 존중하게 되고, 조상을 존중하면 종을 공경하게 되며, 종을 공경하게 되면 친족을 거둘 수 있으니 친족이 거두어지면 종묘가 엄격해지고 종묘가 엄격해지면 사직이 중해지며 사직이 중하면 백성을 사랑하게 된다.
곽광과 같은 뿌리가 깊은 토착세력 출신과 김일제와 같은 뿌리없는 외국인 출신이라는 이 둘의 상대적인 개인사는 섭정 외척세력의 발호와 그 처단의 역사 즉 정통과 비정통간의 궁중내 권력암투의 투쟁사를 압축해 놓고 있는 전형으로 읽히기도 한다.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절은 요순우 삼황오제의 시대이다. 도교를 신봉하던 요순우 임금은 자신의 핏줄인 자기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대신 임금의 자격이 있는 최고의 선인을 골라서 왕위를 물려준 선양의 전통을 실천하였다. 한편 적장자 상속의 전통은 유교적 질서에 합당한 왕위 계승 방법론이었다. 장자상속의 종법제도는 경제학적 이론으로 평가해도 우수한 가계 적통 계승방법이니 만큼 농자천하지대본야의 농업적 향촌 도덕질서에 부응한 사림의 정권유지론에 부합하였다. 그러기에 유교는 도교의 천도무친 상여선인모토 대신 예기의 人道親親故尊祖尊祖故敬宗(인도친친고존조 존조고경종) 적장자계승의 원칙을 내세운다. 그래서 太宗亡嗣擇支子孫賢者 (대종망사 택지자손현자위사).[1] 종법제도는 첫째 아들 적장자(嫡長子)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해 대종(大宗)이 되고, 둘째 아들 이하는 소종(小宗)이 되는 친족제도의 형식이다.
 
불구대천의 원수지간
반란죄를 범해 부모인 석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석후의 아들이나 자신의 아버지가 음란죄를 범했다가 할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한 금일제의 손자의 경우는 부모와 조부가 같은 하늘아래 함께 살아갈 수 없었던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다. 영조가 자신의 친자식인 사도세자를 죽였기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손자가 조부를 잇는 왕통이므로 장자상속의 정통질서에는 어긋난다. 祖宗(조종) 질서에서 정조()가 되었고, 임진왜란의 무능한 왕 선조는 적자정통이 아닌 서자출신이었으므로 선조()가 되었다. 권력투쟁의 산물인 반란죄의 경우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같은 핏줄인 친족까지도 함께 멸했던 대의멸친(大義滅親)의 봉건왕조 시대의 군신간의 법질서 이념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9. 우희제(牛希濟, 872), “石碏論

 

衛莊公寵州吁也,且又縱之。石碏諫曰:「臣聞愛子,教以義方,弗納於邪。驕奢淫佚,所自邪也。四者之來,寵祿過也。君若與之即將定,若猶未也後將悔。」公不聽,州吁竟殺其君而自立。石碏之子厚與籲遊,禁之不可。春秋之世,有弒君之子,或朝於王,預諸侯之盟,不複加討。是以厚問定君於石子,曰:「王覲為可。」曰:「何以得覲?」曰:「陳桓公方寵於王,若朝陳使請,必可得也。」厚從州吁如陳。石碏使告於陳曰:「衛國褊小,老夫耄矣。此二人者,實弒寡君,敢即圖之。」陳人執州吁於濮。石碏使其宰獳羊肩蒞殺石厚於陳。君子曰:「石碏純臣也。愛其君而厚與焉,大義滅親。」其是之謂乎?

父子之道,天性也;君臣之道,人義也。石子諫莊公也以義方,教子厚之為也,無義方之訓哉。且厚非弒君之謀,為亂之首,州吁既立,仍從之遊,州吁之為君也,命石子遊。必將從之,況於厚乎?己為大臣,國有亂賊,而不能討之,忘其君也。父子相欺,以成殘忍之計,是忘其親也。工業為臣不忠,為父不慈,將使衛國之人,父子相爭屠矣。是以先見之明,知州吁之必能為亂也,當戮力以誅之,豈止一諫而己哉!知石厚必從惡也,當嚴毅以討之,無使必陷於戮,不能救亂以安其國,不能謀君以全其子,莊公之亡也,州吁之戮也,石厚之死也,皆石子忍(闕)況其君乎?或曰:「周公之誅二叔,聖人之教也。石碏之棄愛子,賢人之事也。若不如是,將何以止於亂乎?」夫周公知二叔之心,不利於成王,必危於宗廟,故先除之。以保天子之尊,以安大本,豈若石子弒莊公而後欺而誅之。日磾怒其子與宮人戲,蓋防淫亂之本,以靜於國。石子成其亂而誅之,必不使從篡之黨而後誅之也。然周公聖人也,日磾賢人也,知其必至於亂,皆不得己而行之。且周公、日磾防其亂而先誅之,以靜於國;石子成其亂而誅之,無益於理,反為相欺之計,殘忍之行,無父子之慈,滅天屬之道。且厚能問其父以定君之計,是知是非理亂之理也。是尊父子之道,無疑父之心也。疑父之心,逆天之道也。今乃欺之,令朝於陳,以行誅討,斯人心之熟忍之矣。不若告其子以理,且曰:「州吁為子弒其父,為臣弒其君也,天地所不容者。人之子不可與之為伍也,是以吾禁子之遊。且吾為大臣,欲誅弒君之賊,以報其國。不討其賊,是吾有殺君罪也。能使州吁朝陳,且勿往,我將報之。」石厚尚能求計於其父,豈必陷父於惡?若然者,可以保其子,全父子君臣道之道矣。今石碏以殘忍之性,亂君臣父子之理,以安其身,以求其名,而曰「大義滅親」。為罪莫大於亂國,不孝莫大於絕嗣。今石子亂其國而殺其子矣。及後樂羊為魏將伐中山,中山殺其子而遺之一杯羹。樂羊坐於幕下,食之以盡,乃拔中山。文侯賞其功而疑其心。貪其功忘骨肉之痛,蓋石子之流也。

屈突通當隋室之亂,未從王師,太宗使其子召之。通反弓射之曰:「昔與汝為父子,今與汝為仇讎。」既而舍弓矢於地,再拜號泣以別隋後曰:「臣智力俱困,非敢負陛下也。」然後來歸。此又能全君臣父子之道也。且能殘其子為仁義之人者,未之有也。為仁義之人能殘害其子者,亦未之有也。邱明修千載王化之文,欲開父子相疑之心,親親相滅之理,大非聖人之心乎。

 

 

10. 김일제 등용책과 조선 영조의 탕평책

《宋書》와 南史》의 두기(杜驥)에 기록된 김일제 충효순심 한조막급(金日磾忠孝淳深 漢朝莫及) 해석

 

《宋書》 沈約(441-513, 蕭梁),
南史(당나라 태종 시대 이연수(李延壽) )
번역
杜驥,字度世,京兆杜陵人也。高祖預,晉征南將軍。曾祖耽,避難河西,因仕張氏。苻堅平涼州,父祖始還關中。兄坦,頗涉史傳。高祖征長安,席捲隨從南還。太祖元嘉中,任遇甚厚,歷後軍將軍,龍驤將軍,青、冀二州刺史,南平王鑠右將軍司馬。晚度北人,朝廷常以傖荒遇之,雖復人才可施,每為清塗所隔,坦以此慨然。嘗與太祖言及史籍,上曰:「金日磾忠孝淳深,漢朝莫及,恨今世無復如此輩人。」坦曰:「日磾之美,誠如聖詔。假使生乎今世,養馬不暇,豈辦見知。」上變色曰:「卿何量朝廷之薄也。」坦曰:「請以臣言之。臣本中華高族,亡曾祖晉氏喪亂,播遷涼土,世葉相承,不殞其舊。直以南度不早,便以荒傖賜隔。日磾胡人,身為牧圉,便超入內侍,齒列名賢。聖朝雖復拔才,臣恐未必能也。」上默然。
北土舊法,問疾必遣子弟。驥年十三,父使候同郡韋華。華子玄有高名,見而異之,以女妻焉。桂陽公義真鎮長安,辟為州主簿,後為義真車騎行參軍,員外散騎侍郎,江夏王義恭撫軍刑獄參軍,尚書都官郎,長沙王義欣後軍錄事參軍。
유유(劉裕, 363-422): 송무제(宋武帝) 405년 환현(桓玄)을 격파하고 420년 송(420-479)나라를 건국하고, 권문세가를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책을 추구했다.
전란으로 시대가 혼미하고 인구이동이 잦았던 남북조 시대에 막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주해온 두기 형제는 권문세족으로서 유명한 서진의 진남장군 두예(杜預, 222-285)의 후손이었고 군벌 유유(劉裕)의 정벌에 참여하였지만 전전하며 막차를 탄 바람에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지 못함을 탄식했다. 어느날 유송의 3대 황제 유의륭(宋文帝劉義隆, 407-453)과 김일제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다음과 같다.
 
유의륭(太祖): “김일제는 충효의 마음이 깊었고,  한나라 당시 조정엔 그를 넘어설만한 사람이 없었다. 지금 조정에는 김일제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못함에 통탄함을 금치 못하겠구나
두탄: “김일제의 미덕이란 열과 성을 다해 성스런 조정의 부름에 답한 것입니다. 그가 오늘날 다시 살아난다면 말을 키우니라고 바빠 한숨의 틈도 없을 것이며 그래서 어찌 그가 인정받고 발탁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얼굴색을 변하며 말하길: “경은 어찌 조정이 야박하다고 말할 수 있소이까?”
두탄: “청컨대 신에게 물어본다면 한 마디 하겠습니다. 신은 본래 중원의 권문사족 출신입니다. 증조부가 서진의 팔왕지란에 희생되었고, 5호 시대에 국토를 전전하며, 조상 대대로 한 계통을 이어받으며 옛것을 지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맨 늦게 남쪽으로 내려온 바람에 배척받고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김일제는 흉노 오랑캐 출신으로 비록 몸은 말을 키우는 노비이었지만 일찍이 궁중의 내시로 들어가는 행운을 입어 유명한 사람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성상이 인재를 발탁한다고 해도 신은 거기에 미치지 못함을 황공하게 여깁니다.”
이에 송태조는 말없이 묵묵부답이었다.
晚渡: 傍晚時分 渡口, 傍晚, 黄昏
傖荒: 남북조시대 남인들이 북인들에 대한 멸칭
歷涉: 度越: 넘다, 통과하다
清途: 清貴 仕途
牧圉: 牛馬, 播遷中 君王車駕, 養牛馬 人
見知: 알려지다, 인정받다
涼土: 서진 말년에서 북위(北魏)에 이르기까지 서북쪽 건립 할거 정권 ((전、후、남、북、서)

 

이와 같이 송서에서는 투후를 쓰지 않고 대신金日磾( 김일제)라는 인명을 썼다: “金日磾忠孝淳深 漢朝莫及”, “日磾之美 誠如聖詔”. “日磾胡人 身為牧圉”).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북인 출신으로 남조 왕조에서 출세하지 못한 까닭은 이미 먼저 내려온 사람들로 다 차 있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젊은 세대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유는 먼저 내려온 이민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급암적신”(汲黯積薪)이라는 성어가 있지 않는가? 한서 급암전에 “黯褊心 不能無少望 見上 言曰:‘陛下用群臣如積薪耳 后来者居上’ 구절이 있듯이 겨울철 장작 나무를 쌓아 올릴 때는 늦게 온 나무가 위로 올라가는데 그것과 같이 원로들이 신진세력에게 밀려나는 것을 보라. 전쟁이 나고 인구이동이 급격하게 진행되는 변화의 시대에선 기존 질서의 기득권세력은 힘을 쓰지 못하고 혼란한 시대를 틈탄 사람이 출세할 수 있다. 기회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이다.

탕평책을 실시한 영조의 영조실록에서 전하듯이, 인재는 위에서 먼저 알아봐 주고 발탁하는가 아니면 아랫 사람이 스스로 기회를 찾아서 오를 수 있는가? 요즈음 부모 찬스 쓰는 음서의 시대에서 개천에서 용 나듯이 김일제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가? 아니면 한무제가 김일제를 먼저 알아봐서 발탁할 것처럼 윗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인가?  위든 아래든 여튼 김일제 같은 사람은 스스로 수신제가를 한 덕분에 발탁될 수 있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인데, 어찌 수신제가 하지 않고서 평천하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재발탁의 요건에 대해서 영조실록에 기록된 김일제 관련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1. 영조 13년 김일제 거론과 탕평책

영조실록 45, 영조 13년 윤9 3일 무오 2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

주강과 석강을 행하다. 인재 등용을 위해 임금이 자성할 것을 다짐하다

 

영조실록 45, 영조 13년 윤9 3 국편위 번역
行晝講 又行夕講 上曰: 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今世取人 專以門閥科甲 如是而得人才乎 朝著之間 亦必有可用之材 而予旣無恭默思道之誠 不能得築巖之良弼 又乏則哲之明 不能如漢帝知金日磾 是宜自反 而以人事君 專在廟堂 其勉之 "지금 세상에서는 사람 뽑는 것을 오로지 문벌(門閥)과 과거(科擧)로 하는데, 이렇게 하여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조정 사이에 또한 반드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것이나, 내가 이미 공묵(恭默)하게 도()를 생각하는 정성이 없어 축암(築巖) 어진 보필[2]을 얻지 못했고, 또 명철한 지감(知鑑)이 부족하여 한()나라 무제(武帝)가 김일제(金日磾)[3]를 알아보는 것에 미치지 못했으니, 스스로 반성함이 마땅하다.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은 오로지 묘당에 달려 있으니, 힘쓰도록 하라."하였다.

 

12. 한무제의 현량조칙(賢良詔)

 

朕聞昔在唐虞,畫象而民不犯。日月所燭,罔不率俾。周之成康,刑措不用,德及鳥獸;教通四海,海外肅慎。北發渠搜,氐羌來服。星辰不孛,日月不蝕,山陵不崩,川谷不塞。麟鳳在郊藪,河洛出圖書。嗚呼!何施而臻此乎?

今朕獲奉宗廟,夙興以求,夜寐以思,若涉淵水,未知所濟。猗歟偉歟!何行而可以彰先帝之洪業休德?上參堯舜,下配三王,朕之不敏,不能遠德,此子大夫之所睹聞也。賢良明於古今王事之體,受策察問,咸以書對。著之于篇,朕親覽焉。

 

13. 자치통감 투후 김일제(秺侯金日磾) 기록

 

九月 車騎將軍 秺侯金日磾卒 武帝以日磾捕反者馬何羅功 遺詔封爲秺侯 秺 音妒 班志秺侯國, 屬濟陰郡.” 磾以帝少 不受封 及病困 白封之 臥受印綬 一日薨 諡曰敬

9월에 거기장군 투후 김일제 ()하였다. 한무제 김일제가 반역을 도모한 망하라를 체포한 공() 있다 하여 유조 내려 秺侯(투후) 봉하게 하였다. 음이 ()와 같. 한서 지리지(地理志)秺侯(투후)국은 濟陰郡(제음군)에 속하다기록되어 있. 김일제는 소제(昭帝)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제후국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이 위독하게 되자, 곽광이 제후에 봉한다는 사실을 알려온 바 김일제는 죽음의 병석에 누워 관작 인수를 받았다. 다음날에 사망했다. 시호를 경후()이라 하였다.

 


[1] 한서 宣帝紀, “光奏議曰人道親親故尊祖尊祖故敬宗 大宗毋嗣擇支子孫賢者孝武皇帝曾孫病已有詔掖庭養視至今年十八師受詩論語孝經操行節儉慈仁愛人可以嗣孝昭皇帝後奉承祖宗子萬姓

[2] 축암(築巖)의 어진 보필: ()나라 고종(高宗) 때 어진 재상인 부열(傅說)을 말함. 고종이 꿈에 성인(聖人)을 보고는 온 나라에서 찾도록 했는데 부암(傅巖)에서 담장을 쌓고 있는 그를 찾아냈다 함.

[3] 금일제(金日磾) : 한대(漢代) 사람. 본래 흉노(凶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휴도왕은 항복하지 않아서 살해되고 금일제는 잡혀서 한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그의 예절이 바르고 용모가 엄숙한 것을 보고 무제(武帝)가 벼슬을 주어 시중 부마 도위(侍中駙馬都尉)가 되었음. 그 후 구경(九卿)의 지위를 지내고 죽을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조금도 과오가 없었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