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투후 상구성 전기
투후 상구성(商丘成)은 누구인가?
투후 상구성 전기
상구성(商丘成)은 성은 상구(商丘) 이름은 성(成)이다. “열선전”에 상구자서(商丘子胥)라는 선인이 소개되어 있고, 상구는 복성이다. 상나라의 수도가 상구였다. 투성이 위치한 성무현이 이 근처이고 오늘날 산동성 하택(荷澤)시 부근이다.
상구성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대홍려와 어사대부를 지낸 관직 경력과 무고의 난 때 한고조 묘지기를 지낸 전천추(?-BC 77)의 기록을 통해서 대략 추측해 보면 BC 2세기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한서 기록에 따르면 한문제(BC 202-BC 157) 묘지기 첨사로 재직 중 설화를 입어 BC 88년 황제에 대한 불경죄의 판결이 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구성은 한무제 때 조선시대로 치면 예조판서에 해당하는 자리였던 “大鴻臚”(대홍려)의 관직을 지내고 있을 때인 BC 91년 무고지화의 태자 반란이 일어나 어사대부 폭승지가 투옥된 후 자결하자 폭승지의 후임으로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상구성은 어사대부를 상홍양이 물려받을 때까지 BC 91년부터 BC 88년까지 지냈다.
BC 91년 음력 7월 역사상 유명한 무고지화(巫蠱之祸) 황태자 유거(劉據)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구성은 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투후(秺侯)의 작위를 받았다.
秺侯商丘成: 以大鴻臚擊衛太子 力戰 亡它意 侯 | 투후 상구성: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다 |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한서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
상구성이 투후에 봉해진 기사는 한서 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나타난다.
시호성명 | 제후 후작을 받게 된 구체적 공적 내용과 봉읍의 호수 | 봉작을 작위받은 시기 | 봉읍지 |
투후 상구성 (秺侯 商丘成) | 대홍려 상구성은 반란을 일으킨 위태자 일당을 추격 역전분투하여 일망타도한 공로로 제후 작위를 수여받았고 제음현이 그 봉읍지로써 봉읍호수는 2천2백2십 호에 달한다. |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찌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겠나”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제음현 |
號諡姓名 | 功狀戶數 | 始封 | 子 | 孫 | 曾孫 | 玄孫 |
秺侯商丘成 | 以大鴻臚擊衛太子 力戰 亡它意 侯 二千一百二十戶 | 延和二年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為詹事侍祠孝文廟 醉歌堂下曰 出居 安能鬱鬱 大不敬 自殺 | 濟陰 |
여태자의 무고지화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진 사람은 상구성과 마통 그리고 경건이었다.
상구성은 위태자 반란이 진압된 후 9월 이 때 폭승지(暴勝之)의 후임으로 한나라 제32대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상구성은 삼년여 동안 어사대부를 지냈다. 상구성의 후임 어사대부는 한무제의 네명의 고명대신에 속했던 상홍양(桑弘羊)이었다. 상홍양은 한무제의 탁고지신뿐만 아니라 국가주도 경제부흥론자로 염철론 이론 투쟁 가운데 국가주도파의 대부에 속한 인물로, 농업주도파 유교사림학파와 이론적인 대립 투쟁을 전개하다가 어사대부를 지낸 지 약 구년만인 BC 80년 곽광에 의해서 피살된 인물이다.
상구성이 어사대부를 지낼 시기인 BC 90년 정화3년 음력 1월 북쪽의 흉노족이 오원, 주천에 침입해서 이 두 곳의 도위들을 사살했다. 음력 3월 이광리 장군에게 군사 7만을 이끌고 오원을 출정하게 하였고, 어사대부 상구성에게는 2만(한서 흉노전에는 3만명의 군사로 기술되어 있다) 군사를 이끌고 서하에서 출정하게 하였으며, 중합후 마통에게는 4만 군사를 이끌고 주천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상구성이 준계산에 이르러 적과 접전을 벌여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다. 마통은 천산에 이르러 적이 물러가고 거사국이 항복해 옴에 따라서 이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한편 이광리 장군은 적군에 패해서 흉노에 투항하였다.
려태자가 반란의 이심은 애초에 없었다는 차천추의 상소를 받아들여 죽은 위태자를 사후복권 시키고 사자궁을 지어 죽은 영혼을 위로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지화 반란 진압 공신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BC 89년 6월 정사일에 대홍려 차천추를 승상에 임명하고 한무제가 무고지화 반란 사태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되었다. 전천추는 한고조의 종묘 묘지기 첨사 낭중을 지내고 있었는데 천추는 꿈에서 본 이야기로 상소를 올렸다. 한무제는 위태자가 놀라고 두려웠을 뿐이고 다른 딴마음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마침 한고조 묘지기 전천추가 특별 상소를 올려 태자의 억울함을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자식이 아버지의 병기를 가지고 희롱하면 죄가 태형(笞刑)에 해당합니다. 황제의 아들이 과실착오로 사람을 죽이면 무슨 죄에 해당하겠습니까? 신이 꿈속에서 한 백발노인을 만났는데, 신으로 하여금 이것을 황제께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무제가 마침내 크게 느끼고 반성하고 깨달아 전천추를 불러 이르기를: “부자간의 일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공(公)이 홀로 그렇지 않음을 명백히 밝혔으니, 이는 한고조의 신령이 공으로 하여금 나에게 가르쳐주게 한 것이다. 공은 마땅히 마침내 나를 가까이서 보좌하기 바란다.” 한무제는 즉석에서 전천추를 대홍려에 임명했다. 정화3년 12월 강충의 삼족이 멸족당했고 소문은 위수 광교 다리에서 화형당했다. 여태자 반란을 진압했던 승상 유굴리는 삼족이 멸문당했다. 상구성은 첨사로 좌천당했고, 그후 한문제 사당에서 술에 취해 "出居安能郁郁”(출거안능욱욱)이라고 말한 것이 황제에 대한 저주라고 모함을 받고 재판에 넘겨져 대불경(大不敬)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BC 88년 음력 6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延和二年七月癸巳封 四年 後二年 坐為詹事侍祠孝文廟 醉歌堂下曰 出居 安能鬱鬱 大不敬 自殺 | 정화 2년 (BC 91) 음력 7월 계사일에 봉했다, 이후 2년 뒤인 정화 4년(BC 89)에 투후 상구성이 효문제 묘를 지키는 첨사로 좌천되었다. 상구성이 효문제묘 첨사로 있을 때 술에 취해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 가운데 “멀리 옮겨 떨어져 있으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구나”라는 말이 황제에게 무례를 범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망통, 망하라, 경건 등은 BC 89년 반란을 공모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시중복야 망하라와 그 동생 망통은 모반을 기도했다가 시중부마도위 김일제, 봉거도위 곽광, 기도위 상관걸에게 진압당한 것이다. 한무제의 탁고대신 4인방(곽광,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은 무고지화 위태자 반란을 진압한 공신들을 물리치고 한무제 사후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 해석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 이 말이 황제에 대한 대불경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상구성은 자결했다.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이라는 말에서 “出居”(출거)는 ‘거처를 옮기다’의 뜻 즉 遷居(천거)나 移居(이거)와 같은 말이다. 또 出居(출거)는 ‘부모와 떨어져 산다는 別居(별거) 分居(분거)의 뜻이 있는 말이다. 鬱鬱(울울)은 숲이 울창하다는 뜻이 있는 단어이다. 또 鬱鬱(울울)은 숲이 꽉꽉 막혀 있는 것처럼 마음이 꽉 막혀 있어 무척 ‘울적하다’, ‘우울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이다. 이런 ‘울울’의 뜻과 같은 말로는 “郁郁”(욱욱)이 있다. 여기서 욱(郁)은 우리말의 평소 마음이 답답한 상태에서 ‘욱하다’, ‘울컥하다’는 말과 같은 어원이다. 풀이 빽빽하게 무성하게 자라나면, 헝클어진 머리칼이 무성해지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울적해지지 않는가? 상심하고 번민한 그 모습 말이다. 安能(안능)은 참아내다의 뜻 즉 寧(영)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出居安能鬱鬱(출거안능울울)은 ‘(어사대부에서 첨사로 좌천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찌 울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의 뜻으로 해석된다.
또 한신처럼 천하 쟁취를 다투는 國士無雙(국사무쌍) 걸출한 영웅호걸이 좌천되어 답답한 변방 구석에 갇혀 있는 신세라고 여기면, 한고조 유방이 말한“安能鬱鬱久居此乎”(안능울울구거차호: 어찌 답답하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 수 있겠소)라는 의문부사의 쓰임새에 따라서, ‘변방 외지로 거처를 옮기니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한편으론 후한서 하창(何敞)전에 나오는 “其出居者 皆歸養其父母”의 구절 이에 대한 이현의 주해 “出居謂與父母別居者”의 뜻으로 出居(출거)의 의미를 새겨서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영 울적하구나!” 이와 같은 뜻으로 새길 수 있다.
史記, 淮陰侯韓信列傳 | |
王曰:「若所追者誰?」何曰:「韓信也。」王復罵曰:「諸將亡者以十數,公無所追;追信,詐也!」何曰:「諸將易得耳;至如信者,國士無雙。王必欲長王漢中,無所事信;必欲爭天下,非信無可與計事者。顧王策安所決耳!」 | 국왕: “그대가 뒤쫓은 자는 누구인가?” 소하: “한신입니다.” 국왕이 꾸짖듯이 재차 말했다. “장수들 중에 달아난 자가 십여 명인데 공은 이들을 쫓은 적이 없었소. 그러니 한신을 쫓아갔다는 것은 거짓말이오.” 소하: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한신과 같은 사람은 그에게 견줄만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국사무쌍(國士無雙) 최고의 무사입니다. 왕께서 기어이 한중(漢中)의 땅을 차지하고 이 곳의 왕이 되려고 하신다면 한신을 쓸만한 일은 없겠지만, 기필코 천하를 다투어 쟁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그 일을 계획하고 이루어낼 만한 사람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오로지 왕께서 어떤 책략을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王曰:「吾亦欲東耳,安能鬱鬱久居此乎!」何曰:「計必欲東,能用信,信卽留;不能用信,終亡耳。」王曰:「吾為公以為將。」何曰:「雖為將,信不留。」王曰:「以為大將。」 何曰:「幸甚!」 | 국왕: “나 또한 동쪽으로 가고자 하오. 어찌 답답하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소?” 소하: “왕께서 끝내 동쪽으로 상승해 가려 하신다면 한신을 능히 중용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한신은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하지만 한신을 중용하지 못한다면 한신은 마침내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국왕: “그대의 뜻을 따라 한신을 장군으로 삼겠소.” 소하: “비록 장군으로 삼는다고 해도 한신은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국왕: “그렇다면 대장군으로 삼겠소.” 소하: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
於是王欲召信拜之。何曰:「王素慢無禮;今拜大將,如呼小兒,此乃信所以去也。王必欲拜之,擇良日,齋戒,設壇場,具禮,乃可耳。」王許之。諸將皆喜,人人各自以為得大將。至拜大將,乃韓信也,一軍皆驚。 | 이에 국왕은 한신을 불러 대장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소하: “왕께서는 평소 오만하고 무례하셔서 지금 대장을 임명하시기를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 같으시니, 이것이 바로 한신이 떠난 이유입니다. 왕께서 반드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시려면 길일을 택해서 목욕재계하고, 제단을 설치하고 예를 다해 갖추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왕이 이러한 일을 허락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서로 자신들이 대장으로 임명될 것처럼 모두가 기뻐했다. 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한신이어서 온 군대가 모두 놀랐다. |
史記, 韓王成韓信 盧綰 한신노관열전 | |
沛公立為漢王,韓信從入漢中,乃說漢王曰:項王王諸將近地,而王獨遠居此,此左遷也。士卒皆山東人,跂而望歸,及其鋒東鄉,可以爭天下 | 패공이 한왕(漢王)으로 봉해지자, 한신은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가서 한왕을 설득하였다. “항우는 여러 장수들을 가까운 땅의 왕으로 봉했는데 왕께서만 홀로 멀리 이곳에 있으니, 이는 좌천입니다. 병사와 사졸들은 모두 산동 출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발을 들어 바라고 있으니, 칼날을 동쪽으로 겨눈다면 천하를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 |
투후 김일제는 잘 알려진 반면 투후 상구성은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
투후 상구성은 대불경죄로 자결한 사람이다. 상구성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측이었으므로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서에 그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무고지화 여태자 반란을 진압했던 승상 유굴리는 삼족이 멸문당하고, 소문은 광교 다리에서 화형당하고, 투후 상구성은 대불경죄로 자결하고, 망통, 망하라, 경건 등은 BC 89년 반란을 공모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한무제가 죽은 뒤, 조정권력은 곽광 김일제 상홍양 상관걸의 탁고대신 사인방[1]이 차지하고 득세하게 되었다.
투후 상구성은 사서에 단독적 전기가 실려 있지 않고, 반란죄로 삼족이 멸한 유굴리 전기 속에 몇 개 사실이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투후 김일제의 전기는 곽광과 함께 한서《漢書》 《霍光金日磾傳》 열전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반해 투후 상구성은 반란죄로 사형당한 유굴리의 전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치적 역사적 기억 속에서 멀어졌던 것으로 사료된다. 투후 상구성은 사서 열전에 단독 전기로써 실려 있지를 못하고, 그릇이 작은 두소(斗筲) 지기 그만그만한 무리들 그리고 반란죄를 지어 처형된 사람들의 전기인 《漢書》 《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 즉 公孫賀(공손하), 劉屈氂(유굴리), 田千秋(전천추), 王訢(왕흔), 楊敞(양창), 蔡義(채의), 陳萬年(진만년) 鄭弘(정홍) 전기 속 이 중에 특히 유굴리 전기 속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투후 상구성에 대한 진실된 역사를 접근하는데 애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굴리(劉屈氂, ?-BC 90)는 한무제의 이복형 중산정왕의 아들이다. 정화 2년(BC 91), 탁군태수에서 승상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려태자 유거가 무고지화 반란을 일으켰다. 한무제는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유굴리에게 명했다. 정화 3년(BC 90), 유굴리의 사돈인 이사장군 이광리가 황제 칙명을 받들어 흉노 토벌에 나섰다. 이 때 이광리는 유굴리에게 자신의 누이동생의 소생인 창읍왕 유박이 무제를 잇는 황태자가 되게끔 손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곽양(郭穰)의 상소로 유굴리의 아내가 황제를 저주하고 창읍왕 등극 음모가 있다는 것이 탄로나서 결국 유굴리는 요참형을 당했고 처자식도 효수되고 말았다. 이광리의 아내와 딸도 이연년과 함께 주살되었고, 이런 소식을 들은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하였다.
같은 흉노족 출신이지만 김일제와는 반대파인 망통과 망하라는 김일제에 의해서 반란 기도가 발각되어 요참형을 당했고, 무고지화 여태자 반란을 진압했던 승상 유굴리는 삼족이 멸문당하고, 소문은 광교 다리에서 화형당하고, 투후 상구성은 대불경죄로 자결하고, 경건은 망통 망하라와 BC 89년 반란을 공모한 죄로 요참형으로 처형되었다. 상구성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측이었으므로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서에 그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칼 포퍼의 글을 참조하라. 이에 대한 포퍼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왜 권력의 역사만 선택되었고, 예를 들어, 종교나 문학의 역사는 빠졌을까?
“왜 권력의 역사만 선택되었고, 예를 들어, 종교나 문학의 역사는 빠졌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 하나는 권력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문학은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들은 권력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권력숭배는 사람들의 우상 숭배 중 가장 나쁜 것에 속하는 것으로 사람을 노예로 가두었던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권력 숭배는 두려움에서 나오는데 이 두려움의 감정이란 심한 증오나 반감과 같은 것이다. 정치권력이 ‘역사’의 핵심으로 만들어진 세번째 이유는 권력을 가진 정치가들이 숭배받기를 원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강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장군이나 독재자들의 검열감독을 받으며 역사를 썼다.”[2]
황태자 유거(劉據)가 반란을 일으킨 무고지화(巫蠱之祸) 난리통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려태자의 손자인 유병이가 훗날 한선제로 등극한 결과로 인해서 투후 상구성 등 무고지화의 반란을 진압한 공신들은 역사상 반란자로 몰리게 되었다. BC 91년 음력 7월 역사상 유명한 무고지화(巫蠱之祸) 황태자 유거(劉據)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구성은 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투후(秺侯)의 작위를 받았다. 상구성은 위태자 반란이 진압된 후 9월 이 때 폭승지(暴勝之)의 후임으로 한나라 제32대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상구성은 삼년여 동안 어사대부를 지냈다. 상구성의 후임 어사대부는 한무제의 네명의 고명대신에 속했던 상홍양(桑弘羊)이었다.
상구성이 어사대부를 지낼 시기인 BC 90년 정화3년 음력 1월 북쪽의 흉노족이 오원, 주천에 침입해서 이 두 곳의 도위들을 사살했다. 음력 3월 이광리 장군에게 군사 7만을 이끌고 오원을 출정하게 하였고, 어사대부 상구성에게는 2만(한서 흉노전에는 3만명의 군사로 기술되어 있다) 군사를 이끌고 서하에서 출정하게 하였으며, 중합후 마통에게는 4만 군사를 이끌고 주천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상구성이 준계산에 이르러 적과 접전을 벌여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다. 마통은 천산에 이르러 적이 물러가고 거사국이 항복해 옴에 따라서 이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한편 이광리 장군은 적군에 패해서 흉노에 투항하였다.
BC 89년 6월 정사일에 대홍려 차천추를 승상에 임명하고 한무제가 무고지화 반란 사태에 대해 재평가를 하고 죽은 위태자를 사후복권시켰다. 이 과정에서 무고지화 반란 진압 공신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상구성은 첨사로 좌천당했고, 한문제 사당에서 술에 취해 "出居安能郁郁”(출거안능욱욱)이라고 말한 것이 황제에 대한 저주라고 모함을 받고 재판에 넘겨져 대불경(大不敬)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88년 음력 6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시중복야 망하라와 그 동생 망통은 모반을 기도했다가 시중부마도위 김일제, 봉거도위 곽광, 기도위 상관걸에게 진압당했다. 이들 한무제의 탁고대신 4인방(곽광,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이 위태자 반란을 진압한 공신들을 물리치고 한무제 사후에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한무제 아들 5형제 중에서 위태자는 강충 등을 죽이고 반란을 기도했고, 연날왕 유단(燕剌王 劉旦)과 광릉여왕 유서(廣陵厲王 劉胥)는 후계자가 될 수 없을 만큼 죄과가 컸고, 창읍왕 유박은 BC 88년 죽었으니, 한무제의 죽음의 병상에는 어린 막내 아들 유불릉만이 후계자로 남게 되었다.
현실실리론자의 조정권력파가 명분의리론으로 무장한 사림파에 밀리게 되었다. 상구성은 어사대부를 지내 염철주세의 국가전매제도를 찬성하는 중앙사대부에 속했다. 상구성의 일화가 요참형을 당한 승상 유굴리의 전기 속에 들어 있는 배경과 그 이유를 무고지화의 설명글에서 참조하라. 상구성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한서 공손하, 유굴리, 전천추, 양창, 양운, 채의, 진만년, 정홍의 전기의 한고의 찬글은 환관의 염철론을 인용하고 있음을 참조하라.[3]
염철론(鹽鐵論)
염철론(鹽鐵論)은 중앙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대부들의 국정론과 지방 사림 현랑파의 의리론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정권 다툼의 이론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 책은 환관이 정리해서 내려온다.
사림파는 공자의 유가 사상을 좇는다. 전쟁을 반대하며 검소하고 절약을 강조하며 근면하고 검소하면 일반백성들이 보다 부유하게 잘 살게 된다고 믿는다. 농업을 장려하고 관영의 상공업 진흥책을 반대한다. 정치는 민생의 안정에 있다고 믿고 인의도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정책을 편다. 농자천하지대본으로 믿어 농업을 장려한다. 상공업을 멀리하는데 소금과 철강, 필수품 도로 수송, 평준법 시행, 주류 전매 등 국가 독점공급책은 민간 사업자의 이윤 추구와 서로 다투는 영역으로 이를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사림파의 주장을 오늘날의 현대경제학적 입장으로 설명한다면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보수우파 시카고 경제학파에 가깝다.
중앙정권의 대부파는 상인 출신의 승상 상홍양(桑弘羊)을 대표로 하는데, 국가권력이 계획 경제를 담당하여 국가 곳간을 충실히 하며 전쟁 비용을 충당하게 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는 정책을 편다. 국가 권력이 계획 경제를 담당하면 그에 대한 역기능으로 소수 독점 권력이 부패된다는 점인데 이는 마르크스 공산주의가 망한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이다. 전매품 국가 독점으로 전쟁 비용이 충실해지므로 흉노 정벌 등 강경책을 추구한다. 국가권력이 민간을 통제하고 염철 등 필수품을 관리하여 상공업을 장려하며 부국강병책을 펼친다. 하지만 독과점에는 부패가 나타나기 마련인바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투후 김일제”의 사기 공신표 기록이 정확한가? 한서 공신표의 “투후 상구성”의 기록이 더 정확한가?
사기 공신표는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재정리한 공신표
사기 공신표는 (“後元二年 二月己巳 光祿大夫霍光為大將軍 博陸侯 都尉金日磾為車騎將軍 秺侯 太僕安陽侯上官舛為大將軍”으로 적었는데 이 공신표 기사는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재정리한 공신표에 해당한다.
한서 기록에는 김일제는 투후가 아니라 “투경후”로 기록되어 있다. 그 한서 공신표에는 다음과 같이 “투경후 김일제”로 적혀 있다.
한서 공신표 기록
투경후김일제 | 부마도위 때 시중 망하라의 반란 기도를 적발한 공로로 봉후 작위를 받음 봉읍 호수는 2천2백1십8호 | 시원2년(87년) 후작위 받음 작위 받은 날이 병자일이었는데 그 다음 날 사망함 | 시원2년 아들 김상(金賞)이 제후 작위 이어받음, 42세에 사망. | 孫 | 원시4년 제후 작위를 일제 증손 김당(金當)이 이어받음 봉읍은 1천호였음. 왕망이 망하자 작위와 봉읍이 말소됨 | |
秺敬侯金日磾 | 以駙馬都尉發覺侍中莽何羅反侯,二千二百一十八戶。 | 始元二年侯,丙子封,一日薨。 | 始元二年,侯賞嗣,四十二年薨,亡後。 | 孫 | 元始四年,侯常以日磾曾孫紹侯,千戶,王莽敗,絕。 |
[1] 한서 곽광전, “光為大司馬大將軍,日磾為車騎將軍,及太仆上官桀為左將軍,搜粟都尉桑弘羊為御史大”.
[2] “But why has just the history of power been selected, and not, for example, that of poetry? There are several reasons. One is that power affects us all, and poetry only a few. Another is that men are inclined to worship power. But there can be no doubt that the worship of power is one of the worst kinds of human idolatries, a relic of the time of the cage, of human servitude. The worship of power is born of fear, an emotion which is rightly despised. A third reason why power politics has been made the core of ' history ' is that those in power wanted to be worshipped and could enforce their wishes. Many historians wrote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generals and the dictators.”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 책은 2013년 프린스턴대학출판부에서 증보판이 나왔다. 책 257쪽, 제25장 “역사의 의미”, 쪽수 인용은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Complete: Volumes II” 런던 1945년 판본이다.
[3] 贊曰:所謂鹽鐵議者,起始元中,徵文學賢良問以治亂,皆對願罷郡國鹽鐵酒榷均輸,務本抑末,毋與天下爭利,然後化可興。御史大夫弘羊以為此乃所以安邊竟,制四夷,國家大業,不可廢也。當時相詰難,頗有其議文。至宣帝時,汝南相寬次公治公羊春秋,舉為郎,至廬江太守丞,博通善屬文,推衍鹽鐵之議,增廣條目,極其論難,著數萬言,亦欲以究治亂,成一家之法焉。其辭曰:「觀公卿賢良文學之議,『異乎吾所聞』。聞汝南朱生言,當此之時,英俊並進,賢良茂陵唐生、文學魯國萬生之徒六十有餘人咸聚闕庭,舒六藝之風,陳治平之原,知者贊其慮,仁者明其施,勇者見其斷,辯者騁其辭,齗齗焉,行行焉,雖未詳備,斯可略觀矣。中山劉子推言王道,撟當世,反諸正,彬彬然弘博君子也。九江祝生奮史魚之節,發憤懣,譏公卿,介然直而不撓,可謂不畏彊圉矣。桑大夫據當世,合時變,上權利之略,雖非正法,鉅儒宿學不能自解,博物通達之士也。然攝公卿之柄,不師古始,放於末利,處非其位,行非其道,果隕其性,以及厥宗。車丞相履伊呂之列,當軸處中,括囊不言,容身而去,彼哉!彼哉!若夫丞相、御史兩府之士,不能正議以輔宰相,成同類,長同行,阿意苟合,以說其上,『斗筲之徒,何足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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