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학 대혁명/역사 혁명

“敎”(교)의 의미 ● 희망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by 추홍희블로그 2021. 9. 18.

56 ● 위대한 한국 문무대왕릉비 연구

③ 왜 여지껏 큰 성과와 발견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창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가?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유명 대학도서관 그리고 전자도서관 검색 등의 방법을 통해서 관련 연구서들을 섭렵하고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저자가 찾고 싶었던 연구 결과 내용에 가까운 자료는 찾질 못했다. 그리하여 황야를 걸으며 혼자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또 나의 생각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하는 글들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일이 자구 하나 하나 해석을 스스로 확인해 나갔고 또 다른 사람들이나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였다. 대신 나의 글을 완성한 후, 세상의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1] [2] [3]에서의 태도를 견지하며, 평가받을 것을 스스로 약속했다. 이러한 나의 자세는 상앙의 상군서에서 스스로 배웠고, 상군서의 구절을 각주로 인용한다.[4]

새로운 발견은 외부적 시각에서 전혀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한 성취해내기 쉽지 않다는 와호장룡의 어려움이 있거나 또는 어떤 직관적이거나 계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직관력을 가지기 힘든 이유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습관적 태도에 있다. 만약 나의 연구 결과 가운데 직관이나 계시적인 생각이 통했다면 그것은 한국과 여러 외국의 문물과 사고를 직접 겪어 보고 스스로 통찰한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발견의 과정에서 어떤 내적 가슴 속에서 나오는 영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내가 우주천체의 근원적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성적 능력으로써가 아니었다. 지성은 발견의 과정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적 가슴 속에서 튀어 오르는 무언가에 있는데-그것을 직관 또는 무엇을 하려는 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해결책이다.”[5]

우주 질서의 법칙은침묵하고 있다. 다만 인간은 거기에 이미 존재한 진리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삶을 발전시켜 왔다. 우주는빅뱅하고 원자 분자 운동처럼 잠시도 쉬지 않지만, 뉴튼 아인슈타인 등 위인들이 말해주듯이 인간은 침묵 속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천체를 관측한 뒤 그가 발견한 진리를 담은 책 제목을별의 메신저라고 붙인 것은 사람은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천체 관측과 원자 운동(DNA 나선구조)의 발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외양과 실체는 다를 수 있다. 사람의 논리와 감성과 이성에 의한해석 작업’(interpretive process)이 없다면 진리는 발견되기 힘들다.

권위에 짓눌려 완전성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니이체의 지적을 참고로 적어둔다.

 

 

60 ● 위대한 한국 문무대왕릉비 연구

④ 문무왕릉비 비문 앞면 원문

1

□□國新羅文武王陵之碑 國學少卿臣金▨▨奉敎撰

2

□□□通三後兵殊▨▨▨配天統物野經圻積德▨▨匡時濟難應神▨▨▨▨

靈命□□□

3

□□□□□□□□□□□□□□派鯨津氏映三山之闕東拒開梧之境南

▨▨接黃龍駕朱蒙▨▨▨▨承白武仰□□

4

□□□□□□□□□□□□□□問盡善其能名實兩濟德位兼隆地跨八夤勲

巍巍蕩蕩不可得而稱者▨▨▨▨我新▨▨ 

5

□□□□□□□□□□□□□□君靈源自継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

▨▨枝載生英異侯祭天之胤傅七葉以

6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7

□□□□□□□□□□□□□□大王思術深長風姿英拔量同江海威若雷霆

▨▨▨方卷蹟停烽罷候萬里澄.克勤開

8

□□□□□□□□□□□□□□□□?之德內平外成光大之風邇安遠肅

 

 

3. 나는 어떻게 비밀을 풀었는가? ● 61

功盛▨▨▨於將來粹凝貞 垂裕於後裔

9

□□□□□□□□□□□□□□□挹宀舍謙乃聖哲之奇容以撫人寬以御物

▨▨知其際承德者咸識其隣聲溢間河

10

□□□□□□□□□□□□□□□□峯而幹契半千而涎命居得一以

▨▨▨▨▨照惟幾於丹府義符惟興洞精鑒▨」

11

□□□□□□□□□□□□□□□□□□□□□▨輔質情源湛湛呑納

於襟▨▨▨▨握話言成範容止加觀學綜古

12

□□□□□□□□□□□□□□詩禮之訓姬室拜梓之▨▨▨▨▨▨▨▨▨

▨▨▨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13

□□□□□□□□□□□□□宮車晏駕密在辰以

14

□□□□□□□□□□□□舜海而霑有截懸堯景以燭無垠

15

□□□□□□□□□□□▨▨▨而光九列掌天府以□□

16

□□□□□□□□□□感通天使息其眚蘋安然利涉□□□□

17

□□□□□近違好頻行首鼠之謀外信

 

 

62 ● 위대한 한국 문무대왕릉비 연구

18

□□□□□□□□□□□□熊津道行軍大摠管以君王□□

19

□□□□□□□□□□□□□□列陣黃山蝟聚張欲申距

20

□□□□□□□□□□□□□□至賊都元惡泥首轅門佐吏

21

□□□□□□□□□□□□□□□□三年而已至龍朔元年

22

□□□□□□□□□□□□□所寶惟賢爲善最樂悠仁▨□

23

□□□□□□□□□□□□朝野娛縱以無爲無▨□□□

24

□□□□□□□□□□□□□更興泰伯之基德

25

□□□□□□□▨之風北接婁蜂▨▨

26

□□□□□□□□□□□□▨詔君王使持節▨」

27

□□□□□□□□□□□▨軍落於天上旌▨」

28

□□□□□□□□□□□之謀出如反手巧

 

 

()의 의미 ● 63

”()의 의미

인간 사회의 부족과 잘못은 교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가? 그런데 왜 여지껏 그토록 신음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가? 한쪽에서는 많아서 넘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부족해서 굶어 죽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사람들의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즉 문제해결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공정한 기회 마저 박탈당하고 상실된 사회로 변해 버렸지 않는가? 교육은 받는 학생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양자의 존재가 필수이기에 교육에는 큰 돈이 들어간다. 교육은 도로 건설처럼 돈과 시간이 크게 들어가는 국가의 기간 인프라이고 돈과 시간이 없으면 교육의 기회를 갖질 못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내려고 하면 우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여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세상사람들에게 알릴만한 능력과 용기를 가진 선지자들은 성경시대에나 존재했던 과거지사로 보일 뿐이다. 지금 세상에서 먼저 나라의 의를 구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찾아 보기란 가물에 콩 나듯이 거의 전멸되었거나 화석에서나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면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예 잊혀진 것은 아닌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아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말할 수 조차 없는 자기 존재 또는 사회 존재 의미에 대한 무관심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고통과 아픔이 극에 달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서서 포효처럼 소리 높여 외칠 뿐, 그 메아리는 어디에도 반향을 찾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천애의 낭떠러지에서 외쳐본들 메아리는 계곡 속에 함몰되고 만다. 사람들은 고대광실만 찾을 뿐 계곡의 정신을 잊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귀 기울려 주고 관심을 갖겠는가? 지금 세상은 돈과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철저한 헤게모니 구조가 작동된다. 따라서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낙오되고 배제된다.

 

 

64 ● 위대한 한국 문무대왕릉비 연구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아픔은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죽음의 진리 그리고 산모의 고통 같은 것인데 그것들은 우리 모두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오직 당사자만이 겪는 경험이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가 없다. 설령 당사자라고 해도 그 아픔의 강도를 감정적 표현의 언어 수단적 제약성 때문에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기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명확하게 재현해 낸다고 해도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뿐 사람들은 지식과 교육에 접근할만한 금전적 여유마저 없어 무지, 가난, 차별의 사회적 올가미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만족하든 아니하든 생각을 깊이 할 시간적 공간적 여유마저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어서 교육을 통해 실수를 제거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린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 맴도는 순환론적인 한계에 빠지게 되고, 결국 해보니 별수 없다는 체념 상태인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에 이르게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의 보통 사람들의 본 모습은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판단을 내리는 데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것도 그런 실수와 잘못을반복적으로행하게 된다. 행태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Real people make mistakes systematically.” 하지만 사람들은 실수를 반복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또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낼 수가 있다. 여기에 미래의 희망이 놓여 있다. 실수는 실수를 하게 되는 원인을 찾아내면 그것을 교정시켜내는 교육을 통해서 시정하고 예방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보와 발전이 기대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제한성과 가능성의 조건을 발견하는 것은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의 성격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과 통한다. 인간 사회의 살아 있는 역동성과 그 힘을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은 유한하고 미약한 갈대이지만 반면 생각의 무한한 가능성의 힘 바로 이 제한성과 가능성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의 의미 ● 65

 

희망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인간 사회는 혼자서 살아 갈 수 없고, 또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의 창출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공감은 자기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진실로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진 앵무새같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런 속박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할 때 소통이 이뤄질 수 있고 또 이것이 인간사회의 진보와 발전의 조건일 것이다. 이 점을 나의 느낌으로 말해보자. 셰익스피어의 지혜를 따라서 본다면, 마땅히 해야 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느낀 그대로를 말해야 한다. 파스칼의 다락방에서 하늘의 별을 보고, 몽테뉴의 정원에서 꽃을 가꾸듯이 순수의 생각을 자신의 가슴, 마음, 감정, 영혼, 마음 속에서 느낀 바 그대로를 말하자. 문무왕릉비 비문에서 이러한 공감의 미학과 공감의 역사 그리고 위대한 언어의 마술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까치밥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6]

 

 


[1] THE MORAL OBLIGATION TO SPEAK THE TRUTH
“Some one will say: Yes, Socrates, but cannot you hold your tongue, and then you may go into a foreign city, and no one will interfere with you? Now I have great difficulty in making you understand my answer to this. For if I tell you that to do as you say would be a disobedience to the God, and therefore that I cannot hold my tongue, you will not believe that I am serious; and if I say again that daily to discourse about virtue, and of those other things about which you hear me examining myself and others, is the greatest good of man, and that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you are still less likely to believe me. Yet I say what is true, although a thing of which it is hard for me to persuade you.”

[2]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이 침묵하고 외국으로 나간다면 아무도 당신을 말리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여러분을 납득시키기에 큰 어려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말하는 식으로 내가 말한다면, 나는 하나님에게 불복종하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나는 내 입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심각하게 말한대도 당신은 날 믿으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 만약 사람의 도덕성이란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아름다움에 부합하는 영혼의 활동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 최상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담론과 또 이 법정에서 행해진 나에 대한 심문과 다른 증인들의 심문에 대해서, 물론 여기 이 법정에서 나와서 증언하지 않는 사람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매일 다시 토론한다고 해도 당신들은 그래도 나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합니다. 비록 이것은 내가 당신들을 설득시키기가 어려울지라도 말입니다.” 이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을 인용한 나의 번역에 대해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인구에 회자되는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철학적 탐구의 자세를 말한 그런 번역과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즉 법정 용어로 번역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생의 마지막에 직면했을 때는 오로지 영혼 즉 양심만이 남는다.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도덕적 의무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양심이고 영혼이다.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은 법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영혼의 울림으로써 말한 것이다. 사마천이 죽음으로써 거짓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말한 임소경에 대한 편지의 내용과 같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없어지지만 그 영혼은 살아 있다. 소크라테스, 사마천, 그것은 문무왕의 유언과 같다. 영혼의 울림 말이다. 나는 문무왕의 유언에 대해서 진실을 캐냈다. 나의 진실은 나의 죽음과도 같이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의 법정에 서지 않으려고 지구 끝까지 도망을 치면서까지 반대심문을 받을 기회를 꺼려했다. 하지만 결코 운명의 끈은 피할 수 없다. 내가 죽음의 사선을 넘고 눈사태 속에서도 살아 돌아온 감사함으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의 말을 믿어준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대하지 않을 것이고, 또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달리 대할 이유가 없다. 나의 말을 믿어준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믿어달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고 또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해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감사함을 가지고 있고 또 내가 죽는 날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은 하지 않겠는가?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음으로. 당신은 살기 위해.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을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The hour of departure has arrived, and we go our separate ways, I to die, and you to live. Which of these two is better only God knows).

[3] 880여년 전, 740여년 전 기재되어 그토록 오랫동안 국사의 위치로 점해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재 내용을 정면 반박하고, 또 문무왕릉비 파편이 발견된 이후 220여년이 지나는 동안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축적한 기존의 문무왕릉비 비문 해석에 대해 정면 반박하고, 1,340여년 전의 오래된 고문자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그동안 국가와 학계가 정해놓은 기존의 국사 지식을 정면으로 격파하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고 그만큼 어려운 일에 속하지 않겠는가? 이런 전차로 나는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진술을 준비했다. 사실 내가 법과대학에 입학하고서 맨 처음 읽은 책이소크라테스의 변명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소크라테스에 집착한 이유가 무언가 있었지 않을까?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표현한대로 우리 인생에서 앞서간 성현들의 위치가 이토록 남다를 수 있다는 것인지? 유신은 말했다. “天道回旋 生民預焉 死生契闊 靈光巍然밤하늘의 별자리가 돌고 돌듯이 우리들의 삶 또한 예정되어 있고 돌고 돌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잠자리 비행기가 빙빙 맴돌듯이, 바다의 배가 선회하듯이. 삶과 죽음이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안개속을 헤메일 때처럼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하늘에는 신비한 광채가 빛나고 선조들이 남긴 덕택으로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위대한 성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만큼 분명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과 그림 하나로 유럽의 화단을 놀랍게 변화시킨 세잔느, 사과나무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튼, 빌헬름텔의 화살로 사과 맞추기 게임, 아담과 이브의 사과는 인류의 발전을 이룬 인간본성의 영광(靈光)이다. 그래서 영광은 영원히 빛난다. 靈光.(영광규연)!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나의 이름이 바다처럼 넓고 크게 빛나라! 이러한 뜻의 이름이 내 이름 “홍희”!

[4] “상군서”의 영어 번역은 J.J.L. Duyvendak, “The Book of Lord Shang” (1928), 'He who is concerned about the highest virtue is not in harmony with popular ideas; he who accomplishes a great work, does not take counsel with the multitude.'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거사에 참여하기를 머뭇거리는 사람은 어떠한 공훈도 얻지 못한다. 새로운 법을 신속하게 제정하는 결단을 내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판 여론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훌륭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할 수 있고, 독자적인 지식체계로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우둔한 사람은 일을 끝내놓고도 그것에 대한 이해를 전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싹이 트기도 전에 그 사유를 먼저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 세상 사람들과 의논을 나누기 보다 일을 먼저 성취해 놓고 그 기쁨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보다 낫다. 개혁정책에 성공한 곽언은 말했다: 최고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에게 유행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대단한 사람은 다수군중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 “商君書”, 更法. “臣聞之 疑行無成 疑事無功 .定變法之慮 殆無顧天下之議之也 且夫有高人之行者固見負於世 有獨知之慮者 必見.於民 語曰 愚者闇於成事 知者見於未萌民不可與慮始 而可與樂成 郭偃之法曰 論至德者 不和於俗 成大功者 不謀於衆”.

[5] “I did not arrive at my understanding of the fundamental laws of the universe through my rational mind. The intellect has little to do on the road to discovery. There comes a leap in consciousness, call it intuition or what you will, and the solution come to you.”

[6] 송수권, “까치밥시 가운데 인용. 송수권의 깊은 정서적 이해와는 완전 딴판으로 삼국유사는 “射琴匣(사금갑) 기사를 통해서 민족 고유의 명절과 민속인 정월대보름달 불꽃놀이와 까치밥의 의미에 대한 깊은 정서적 이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왜곡하였다. 삼원절은 후손들이 목욕 재계하고 조상을 기리는 忌日(기일)이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런 신성한 기일날 궁중에서 남녀가 정을 통하는 불륜극을 삽입하여 우리 선한 민족성과 사회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저자의첨성대 연구책에서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