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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월스트리트변호사 스토리

창힐 倉頡의 첫 창조와 소나기와 눈물과 자비

by 추홍희블로그 2017. 2. 16.

창힐 倉頡의 첫 창조와 소나기와 눈물과 자비

이 책은 논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움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에 이 책을 내놓음으로써 나의 당찬 기대는 나의 손끝을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많이 사람들에게서 학술적 탐구가 새로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고 비판과 격려가 그치지 않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비판과 격려가 없다면 어느 누가 그토록 매혹적인 진리의 전당에 들어서려고 줄을 설 결심을 할 수 있겠는가
?  진리의 찾는 목표지점에 결코 도착할 수 없을지 모른다.  끝없는 우주의 신비가 펼쳐진 그 엄숙한 우주와 생명의 진리 앞에 어찌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작은 이 탐구 작업의 결과가 큰 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길 중에 정상을 향하는 길로 인도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한다.


이와 같은 기대로 부족한 느낌이 많지만 일단 붓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자
,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질 것 같다.  성경의 선언과 같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1]  그 말씀을 기록할 문자가 없었으면 과연 인류의 문명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나같은 미물이 감히 사마천이 느꼈던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 땀을 거론할 수 없겠지만, 한자를 처음으로 만든 창힐이 새로운 문자를 창조하고 나서 비가 퍼붓었다고 하는데 내가 이 책의 붓을 놓는 순간 그 같은 소나기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비는 또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샤가 자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과 같이 자비의 의미가 있다.  나의 부족한 것에 한없이 자비를 구한다. 
자비慈悲의 참다운 의미는 용서를 베품으로써 권력이라는 힘을 결코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비는 절대 법 권력보다 상위에 위치한다.  자비는 우리 영혼을 파고드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2]


노아의 방주처럼 새로움은 회개의 눈물의 소나기가 없으면 창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 


“4
월의 감미로운 봄비가 내리면

3월의 가뭄을 해갈하고

어린 나무 가지를 달콤한 소나기로 흠뻑 적시며

꽃봉오리를 터트리며 꽃을 피워낸다

서녘 산들바람이 녹녹하게 불어오면

들판과 산속의 기도원과 

상큼한 나무잎새들이 설레인다

태양은 겨울철 황소자리를 반 정도 지나 왔고

작은 새들은 저마다 노래 부르고

즐거워서 밤새 뜬 눈으로 잠을 설치며

나무와 담장 위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렇게 좋은 봄날 왜 사람들은 성지 순례 여행을 떠나고

순례자들은 외국 문물에 마음을 뺏기며

메마른 땅 먼 곳의 성지를 찾아 나서는 것일까[3]



[1]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복음 1:1-1:14).

[2] “The quality of mercy is not strained in pleading that power loses nothing by granting pardon. Mercy is above this sceptred sway. It is enthroned in the heart.”

(sceptred sway: 왕권과 같이 세상 법에 있어서 절대적인 최고 권위를 말한다.)

[3] 유명한 TS 엘리어트의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시 구절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4
월은 잔인한 달

마른 땅에서 라일락꽃나무의 새싹을 틔우고,

봄비로 추억과 희망을 뒤섞고

잠자던 뿌리를 일깨운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