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하는가?
근거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왕의 두 아들이다. 왕은 아우인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국왕의 명령"이라며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는 것을 내켜하지 않아 숨어버렸으므로 백성들은 중자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그 후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이 노인을 배려하고 극진히 모신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막상 이르고 보니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문왕이라 칭하고 주변국 은나라 주왕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옳은 말을 아뢰었다.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하려고 하니 이 어찌 孝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시해하려고 하시는데, 이 어찌 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왕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은 이 두 사람의 목을 즉시 쳐야 한다고 말했으나 태공망이 말하기를 “이들이야말로 義人이다"하며 일으켜 세워 보냈다. 무왕이 은의 반란을 평정하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하지만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주나라로부터 녹봉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 산속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오늘도 저기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캤네.
폭력에 폭력으로 맞써고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모르는 무왕이니.
신농, 순, 우 임금 시절의 황금기는
홀연히 사라졌네.
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할꺼나?
아아 가자, 죽음의 길로.
쇠잔한 나의 운명이여!
이런 유시를 남겨 놓고 이들 형제는 끝내 수양산에서 단식하다가 절명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과연 두 사람의 마음 가운데 어떤 원한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말하길, "천도天道는 공평 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 하지만 백이와 숙제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스스로 단식하고 죽음을 택했다. 또한 공자의 제자 칠십인 가운데 속하는 중니는 안연이 학문에 가장 제격인 인물이라고 추천하고 칭찬했다. 그러나 회는 가끔 쌀 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면 이런 사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되는 것일까?
한편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는 등 성격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자하여 수천 명의 도적떼들을 모아 세상을 어지럽혔으나 천수를 다하고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덕행을 쌓았기 때문에 천수를 누렸단 말인가?
이러한 것을 볼 때 극명한 사례이긴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서도 소행이 道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죽을 때까지 편안하고 행복을 누리며,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이와 달리 발언기회가 주어질 때만 골라서 마땅한 말을 사려서 발언하고, 항상 큰 길을 걸고, 공명 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의분을 일으키지 않고, 시종일관 근엄하고 강직하게 행동을 한 사람이 오히려 큰 재앙과 화를 입는 일이 부지기수로 많이 일어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하늘의 이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해 공자는 "도를 같이하지 않는 사람끼리는 서로 논의하지 않는다."라고 답을 주었다. 이 말은 곧 각자 자기 의사에 따르라는 뜻이다.
공자는 또 말을 덧붙였다. "부귀라는 것이 뜻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마부와 같은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바라는 대로 도를 행하고 덕을 쌓겠다."
또 공자는 이런 말을 했다. "차가운 계절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러 조락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When the year become cold, then we know how the pine tree
and the cypress are the last to lose their leaves.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이 말은 세상이 오염되고 흐려져 혼란된 그 때에 청렴한 선비가 드러나게 된다는 세상의 이치를 말해준다. 이것은 곧 세속 사람이 부귀를 그렇게 중하게 여기는데 비해 청렴한 선비는 그 부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공자의 말과 같이 군자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름이 칭송되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나라의 가자는 '탐욕아 큰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정의감이 넘치는 의사와 열사는 명예에 목숨을 걸고, 권세욕이 강한 사람은 그것에 끌려 죽고, 일반 평범한 사람은 목숨 지키기에 안주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쳐주고, 같은 종류의 만물은 서로 구하고, 구름은 용을 따라 용솟음치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나타나 만물이 이를 우러러보는 것처럼' 백이와 숙제가 현인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송을 얻음으로써 그 이름이 더욱 더 드러났고, 안연은 누가 추켜세워주지 않아도 이름난 선비이지만 공자의 덕으로 그 덕행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 이와 같이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 숨어 사는 덕망이 높은 선비가 그 진퇴에 시운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묻혀버리고 칭송되지 못하는 수가 많은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시골벽촌에 살면서 행실을 닦고 이름을 떨치고자 하더라도 공자와 같은 성현의 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까지 오래도록 남길 수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면, 사마천의 역사인식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사마천 자신의 삶은 뼈아픈 사정으로 흥건히 젖어 있다. 그는 모든 손님들의 청탁을 거절하고 오로지 한 마음 한 뜻으로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면서 천자의 신임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이릉을 위해 변호한 것도 국왕을 위로하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한 의도로 행한 행동에 대해서 상응한 보답은 커녕 오히려 반대로 궁형이라는 남자로서 가장 처참한 형을 당하게 되었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굴욕과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적으로 겪은 충격과 아픔에 깊은 생각으로 선한 의도를 가진 착한 사람이 그에 걸맞게 좋은 보상을 받는 반면 악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된다는 전통적인 믿음 체계 즉 인과응보론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와 의문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생각은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결과도 함께 상응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그런 인과응보론은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고 다만 “그래야 됨”을 교훈적으로 가르치는 당위론의 “시적 정의 Poetic Justice”에 불과할지 모른다.
조선 시대 초기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을 폐위하자 성삼문은 의분강개하며 다음의 시조를 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숙제를 한탄하노라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어디에 난 것인가
아무리 풋나물이라고 한들 그 뉘 땅에 났더냐?
성삼문의 이 견해는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무저항의 행동을 했던 백이숙제를 비판한 뜻이 들어 있다. 백이숙제가 주무왕이 불의의 쿠데타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신하된 도리로 막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분연한 자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타당했다는 그의 주장이다. 성삼문은 자신의 견해에 따라 쿠데타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하지만 성삼문의 시조에 대해 한 참 세월이 지난 뒤인 숙종 때 남곡이 지은 댓글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굶주려 죽으려고 수양산에 들렸거니
설마 고사리를 먹으려고 캤으리오
본래에 구부러져서 펴주려고 캔 것이네.
사실 백이숙제는 단식투쟁하다 죽었으므로 남곡의 이 견해가 옳은지도 모른다.
이들의 해석 차이는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남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느냐 아니면 은둔하는 문인의 죽음과 이에 대해 그 자리에서 스스로 할복을 택하는 일본 무사도의 문화적 차이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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