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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BKS/왜 사마천은 위대한가?

맹가의 엄마가 3번 이사를 다닌 이유-맹모삼천

by 추홍희블로그 2011. 4. 16.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Knowledge is POWER.  우리는 이제 다시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중에 “孟母三遷之敎”가 있다.  세익스피어의 “헴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독백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만약 햄릿이 맹모의 삼천지교의 교훈을 깨우쳤다면 아마도 그런 회의는 하기 힘들었으리라!  맹가의 어머니는   맹자가 태어나자 3번째 이사를 다녔다. 

 

우리는 맹모의 3번째 이사간 동네인 학교에 포인트를 두고 있어서 맹모의 1번째 이사간 곳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면이 있다.  맹모가 처음 이사간 곳은   묘지가 있는 시골 동네이었다.  맹모가 두번째로 이사간 동네는 사람이 붐비는 도시의 “시장”근처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3번째 “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사가기 전에 이사를 간 곳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맹모가 가장 먼저 삶의 교훈을 가르친 것은 “삶과 죽음”의 의미이었다.  이를 위해서 맹자의 어머니는  장의사들이 몰려사는 죽음의 동네로 이사갔다.   맹자는 어려서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경험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슬픔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었던 것이다.   다음번 이사를 가기 전 맹모가 맹자에게  배움을 확인해 간 것 같다.  맹자의 직접적인 답변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맹모가 맹자의 모습을 보고서 이사를 결정하였다는 것을 볼 때 맹모는아들의 행동을 통해서 교육효과를 측정한 것 같다.

 

맹자의 어머니가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간다면그는 결코 강남 8학군으로 이사를 가질 않을 것이다.  “맹모삼천”은 교육 환경의 중요성보다  스스로의 공부에 보다 강조를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맹모가 맹가에게 어머니가 베틀 짜듯이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고 타이른 후에야 맹가가 회심하여 도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면 그렇다.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원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求學的道理,就和我織布的道理一樣,要一絲一絲的織上去,才能織成一塊有用的布。你讀書也是一樣,要努力用功,經過長時間的積累,才能有成就。像你這樣不用功,怎麼能夠成就大業呢?” 이렇게 보면 맹자가 친구들하고 어울려서가 아니라 맹가 자신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학문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맹모의 교육 방식은 고대서양의 전설과 통하는 면이 있다.  중세 유럽의 일화를 보자.  한 마을에서 토지의 경계선을 정하는  날에 어린 아이를 경계석 위에 앉히고 주위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도록 한 뒤에 그 아이의 빰을 갑자기 세게 때렸다. 갑자기 충격을 줌으로써 수십냔 뒤에 경계 다툼이 일어날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경게를 정하는 구역의 위치를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어린아이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방법이 현대에서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충격요법과 기억의 관계를 말하며 문서가 없었던 고대에는  사람의 기억에 주로 의존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역사적 일화로써 수긍이 간다.

 

잠재된 기억의 문제는 현대 심리학에서 토론되는 이슈중 하나다.  어렸을 적 뚜렷한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잠복되어 있다가 성인이 되면 어떤 계기에 의해서 되살려진다는 정신분석이론(Recovered memory syndrome )이 있다.    기억 이론은 아직 확고하게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서양 고대 일화처럼 정신적 충격에 의한 강렬한 기억 남기기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요즘 세상에는 “돈이 전부”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이런 세태에서는 경제 서적들이 잿빛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다. 그것처럼  희망의 소재를 한 영화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반면에 죽음의 주제로 하는 영화는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물론 베르만 감독의 “제7의 봉인”같은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추구한 고전적인 영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주제로 다룬 이색적인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Departures”라는 제목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차원높은 수작이다.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찾으려면 먼저 죽음의 의미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오쿠리비토”영화에서 무언가를 느끼리라.

 

<오쿠리비토> http://blog.daum.net/blacksilk/13376188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는 맹모삼천지교가 전하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테마는 “공황”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테마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회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시대 가장 성공한투자 귀재  워렌 버핏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 “증권 분석”이란 책도 초판이 나온 후 약 70년이 지난 후에야 “공황”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황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면, 무익한 토론과 논쟁으로 결정을 늦추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문명의 붕괴”)에 따르면문명이 사라지는 재앙은 4가지 형태의 실수에 의해서 벌어진다고 한다. 첫째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실수, 둘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실수, 셋째 문제를 인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지 못한 실수, 넷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지 못한 실수 이 4가지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위기 상황을 냉철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잘못한 실수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진실한 답을 찾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행동하는 양심”이다.  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라”라는 표현과 같은 내용이다.  가슴에 손을 얹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할 때 즉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사람의 행동은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서 나온다.   불멸의 시인 단테는 말했다, “신의 정의는 냉혈한의 죄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자의 죄를 다른척도로 가늠한다”.

 

이성은 뜨거운 가슴에 손을 얹고서 나올 때 강력하다.  감성과 이성을  총합적으로 판단할 때 최상의 이익을 얻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나타나는 많은 위기들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하고자 한다.  위기가 닥치고 위기가 지나가는 과정에서 위기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것을 통탄해 하거나, 또는  위기가 지나간 뒤 자기합리화를 하는  즉 심리학용어로 “인지부조화”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TS 엘리어트의 말은 타당한 것 같다.  “세상이 끝나는 소리는 꽝하는 소리가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이다”.  세상의 종말은 불이나 빛으로 폭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절망의 잿빛 구름”을 가져오는 것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우리자신내부에 있다.  아마겟돈전쟁은 우주의 침입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

 

http://blog.daum.net/blacksilk/13376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