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영미국인의 기부와 자선의 전통과 법제도의 기원
월 스트리트 최고 부자 세계 갑부 서열 1위에 2위에 올라 있는 빌 게이츠, 웨런 버핏은 자신의 모든 부를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 가진 것 중에서 자기 입고 먹고 살고 남은 것 그 중에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작은 돈을 내놓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세상의 부귀를 다 가진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가진 돈을 자신의 핏줄도 아닌 다른 자선 단체에 기부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부자들이 자기 가진 재산을 모두 다 내놓는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고? 하지만 영미국에선 그게 가능하다. 영미국인에게 있어서 자식은 못 믿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법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 원칙을 추구하는 법정이 바로“equity 형평법”이다. “법과 정의 law and equity”는 “보통법과 형평법”의 두 법원을 말한다. 이 두 법체계는 오늘날에는 하나의 사법부인 법원으로 통합되었다. 영미국인의 기부 자선의 문화, 전통, 법제도의 심연을 파악해 들어가 보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제1장에서 “자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이 낳은 위대한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그의 소네트 제 1장에서 “자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의 1장처럼 누구나 시작하는 제1장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리라. 1장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1장에서 자선을 말하고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셰익스피어는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면서 왜 남에게 동정심을 보이고 자선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박애 정신의 기독교적 사랑은 자선을 행하는 것으로써 외부로 표현된다. 더구나 셰익스피어 시대 당시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 사라져 버린 대전염병 흑사병이 창궐했던 때임을 상기하라. 자선은 영미국인의 전통, 문화적 관습, 일상적 태도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으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1장을 현대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풍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법,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고 또 영원히 지속된다.
하지만 사람은 노년기를 지나면 사라지고,
젊은 후계자가 그의 유업을 이어 받는다.
그런데 넌, 자기 혼자만의 풍요를 위해
연료를 독점하고 삶의 불꽃을 혼자만 이어가려 하느냐!
자기 혼자만 챙기다 보면 고대광실도 곧 사라지고 마는 법,
따라서 그런 태도는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넌 지금 세계 최첨단 패션으로 치장하고,
젊고 멋진 자태를 뽐내며 봄의 전령사인양 설쳐대고 있으니,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묻어버리려 하는구나!
이보게, 젊은이, 타인을 무시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죽이는 거라오.
세상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보여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탐욕자라고 지탄받을 거외다.
죽고 나서 좋은 평가를 들으려면 이 우주만물의 법칙을 잊지 마시오.
왜 세계 최고 갑부들은 모든 재산을 다 내놓고 자선을 행하는 갈까? 그 이유는?
세계 최고 갑부인 빌 게이츠가 아프리카 기아 해방을 위해서 자선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그 동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일신의 편함을 추구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요, 자기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동정심이 넘쳐서 불현듯 자기의 모든 재산을 자선 사업에 쏟아 부은 것은 아니리라. 세계 최고의 갑부인 카네기, 버핏, 게이츠 등 수많은 월 스트리트 재산가들이 자기가 평생 모은 모든 재산을 모두 공익 자선 사업에 선뜻 내놓은 동기가 무엇일까? 그들이 자선 사업을 펼치게 만드는 것-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담 스미스의 통찰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이익 추구도 아니고,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동정심만으로도 부족하고, 최고 부자인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보다 강력한 힘은 이기주의 이타주의를 초월한 그 무엇에 있다. 여기의 그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람들마다 각자의 개념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 여기에는 자선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포함된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살아 있는 박애정신의 약한 불꽃 즉 인류동포에 대한 사랑인 휴머니즘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불러 일으키는 데는 그보다 훨씬 강력한 동기인 인간의 내부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양심 conscience이다.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결론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라는 두 개의 서로 배타적인 이분법적 구분의 함정에서 벗어나 제3의 해결 구조를 열어주는 것이 창문이고 열쇠가 된다. 아담 스미스의 인구에 회자되는 저 유명한 구절을 다시 보자.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양조장,빵집 주인의 자비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that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하지만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기애의 본성”에만 머무르는 개념이 아니었다. 양심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의 힘에 속한다. 양심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고 있는 도덕감정론 3부3장 중 간단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소극적인 감정들은 거의 언제나 이처럼 야비하고 이처럼 이기적일 때, 어떻게 사람의 적극적인 천성들은 흔히 그처럼 관대하고 그처럼 고귀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보다도 자기 자신에 관련된 일에 의해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면, 무엇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도록 촉구하는가? 자기애의 가장 강한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휴머니즘의 물렁한 힘이 아니며, 신이 인간의 마음에 밝혀준 박애정신의 약한 불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요구되는 것은 보다 강렬한 힘이고 보다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67] 그것은 이성, 법칙, 양심, 가슴속의 살아 숨쉬는 것, 인간 내면 흉중에 있는 것,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는 최후의 판단자이고 조정자이다.[68]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인 것이다. 개인은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사람들이 그처럼 수치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 말이다.[69]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로지 이 중립적인 관전자 impartial spectator로 부터이고 이 중립적인 관전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기애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70]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의 추악성, 자기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자기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71]
많은 경우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사람들 자신의 성격 속에 들어 있는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72]
9. 자선 charity은 무엇을 말하는가?-“믿음 소망 사랑”의 고린도 전서 13장에 대한 킹제임스성경의 새로운 번역
고린도 전서 13장은 가장 잘 알려진 성경 말씀이다. “믿음, 약속, 자선,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이다. And now abideth faith, hope, charity,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믿음 소망 사랑”의 이 구절에 대해서 1611년의 킹제임스성경은 faith, hope, charity”으로 번역했다. 왜17세기 당시 성경번역자들은 “사랑”을 “charity”로 번역했을까? 성경의 “charity”를 “love”로 새롭게 번역하게 된 시기는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신학자 프리스틀리와 에드워즈는 각각 킹제임스성경에서 새롭게 번역한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석을 강조하였다. 산업 혁명이 도래하고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 시작하기 이전까지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는 오로지 교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교회의 존재 기반은 사람들의 자선과 기부에 의해서였다. 자선과 기부가 없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고 따라서 사회적 약자 또한 살아갈 길이 없었다. 따라서 자선은 생명과도 같이 중요했다. 오늘날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마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가 건설되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국가의 실현은 요원하다. 복지국가의 건설은 맨 처음의 원칙으로 되돌아가서 다시금 짚어볼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킹제임스성경이 출간된 17세기 당시 상황을 감안하여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번역하고자 한다.
1 내가 일반인들이 쓰는 언어와 천사들이 쓰는 언어로 말할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변죽만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 내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졌고, 모든 신비를 꿰뚫고, 모든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또 완전한 믿음을 가져서 태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요,
3 가난한 사람들을 먹일 만큼 많은 재산을 내가 축적해 놓았을지라도, 또 내 몸을 불사르는 희생을 감수할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4 자선은 오래 가고, 공감하는 것이며, 자선은 더 가지려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며, 자선은 뽐내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며, 자선은 부풀리는 것도 아니다.
5 관례에 어긋나게 행하지 말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며, 쉽사리 즉흥적으로 나서지 말며, 악의적인 의도를 품지 말라.
6 나쁜 짓을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진리를 추구하라.
7 모든 것을 주며, 모든 것을 진실로 믿으며, 모든 것을 확신하며, 모든 것을 참고 헤쳐나가야 한다.
8 자선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 반면 신의 계시자라고 떠드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냥 말로만 떠드는 것은 곧 그치고 만다. 자신이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곧 사라지고 만다.
9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요, 우리가 예견하는 것도 부분적인 것 밖에 아니다.
10 그러나 완전한 전체가 되면, 그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없어 지니라.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깨달으며, 아이처럼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처럼 유치한 것들은 내가 모두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다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되리라.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나 다음에는 내가 모든 것을 알게 될 터이고 또한 내가 이해하였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될 것이다.
13 따라서 믿음 faith, 약속 hope, 자선 charity, 이 세가지는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이다.
“믿음, 소망, 사랑 faith, hope, charity” 이들 단어를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3 단어 모두 “trus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의 구절은 성경본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의 하나이다. 여기서 믿음은 loyalty 즉 기독교 교리에 순종한다는 뜻이고, 소망은 내가 미래에 기부하겠다는 의사가 있는데 그렇게 할 것을 분명하게 약속한다는 뜻의 “약속, 확신, 자신감 confidence”을 말하며, “사랑”은 “아가페”를 말하는데, 킹제임스성경에서는 아가페란 단어를 “채리티 charity”로 번역했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루어졌으므로 새로운 번역에 따라 “자선”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실천 없는 사랑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킹제임스성경에서 그리스어 ”아가페”를 “Charity”라고 번역한 것이라면 그것은 적절하고 타당하다고 여긴다. 더욱이 17세기 당시에는 교회가 구제를 전담하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분명하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외부적으로, 결과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선의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꿈 속에서 선을 행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또 반대로 악몽을 꾸고서 악몽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큰 믿음을 가졌고, 또 그 믿음에 따라서 미래에 자선을 행하고 재산을 기부할 것을 굳게 맹세하고 약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즉 그런 믿음과 약속도 중요하지만 지금 바로 “자선”을 실천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지금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 자선인 것이고, 이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자선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영미법상의 트러스트 Trust 법제도와 비교하여 보면 더욱 구체적이고 쉽게 이해가 되리라. 영미법상의 트러스트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성경 구절이 더욱 쉽게 이해되리라. 기부가 법적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자기 재산을 공공 목적의 자선 단체에 기부하겠다는 “기부 의도”와 목적을 문서로써 표시하고, 해당 재산을 내놓으면 기부자하고는 상관없이 자선 단체가 독립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는데 이런 구조가 트러스트 제도다. 트러스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법제도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트러스트는 표면만을 보고서는 트러스트를 움직이는 내막을 자세하게 알기 어려운 이중의 법체계를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트러스트는 등기상의 명의와 실질적인 소유자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개념을 영어를 써서 반복하면, 트러스트(신탁)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신탁자 기부 의사 intention, 기부 대상의 신탁 재산 특정 gift, certainty of subject matter, 신탁 수혜자 certainty of objects의 특정 이렇게 최소한 3가지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73] 하지만 일단 기부 재산부터 먼저 내놓으면 다른 2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법적으로 신탁이 설정될 수 있다. 법원은 되도록이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이루게 해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would rather than not that a will's provisions should fail").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부 재산을 공공목적으로 내놓았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법은 자선의 실체를 인정하고 보호해 준다. 트러스트 법제에서는 형식적으로 갖추어야 할 직인이 누락되었다는 등의 형식적인 흠결을 이유로 신탁의 설정을 부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또 기부자가 기부약정을 통해 기부목적이나 사용방법을 지정했다면 그런 경우 기부금 운영자가 기부자의 의도를 소홀히 하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미법 국가는 교회, 회사, 국가의 운영과 구조는 기본적으로 트러스트이고 따라서 트러스트 법제에 내재된 기초적인 형평법 법원칙에 의해서 운용 유지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영미법상의 트러스트 Trust 법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금융상품의 상사 트러스트 제도가 도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영미법상의 일반법상의 트러스트 법제하고는 차이가 있다) 자선과 트러스트 관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영미국인들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배경에는 트러스트 법 제도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거의 국가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한 재산 규모를 가진 실체이었고, (교회가 곧 국가이었던 이유는 교회가 형평법원의 시초였다는 것에서 짐작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회사”가 가장 큰 재산을 가진 실체이다. 영미법 국가에서는 대학과 학교의 모든 교육 기관 (공립이든 사립이든)은 그 구조와 운영이 기본적으로 트러스트 법 제도에 따른다. 작은 개인 회사일지라도 회사를 운영하는 관리자는 트러스트 법원칙에 따른다. 작은 공동체 운영이든 국가 정책 결정자이든 이들은 트러스트의 법제에 의해 통제된다. 트러스트를 세우고 운용하고 유지해 나가는 실체는 변호사들이다. 교회, 회사, 국가를 이어주는 실체적 손발이 변호사(법원)인 것이다. 영미국을 “사법부 통치 국가”라고 말하는 근원이 이런 구조에서 연유한다. 재산이 힘과 권위를 가져다 준다는 말이 변함없는 진실이라면, 변호사들(법원)이 힘과 권위를 가진 실체라는 결론은 자연스런 도출이다. 이와 같이 영미판례법국가는 변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사회가 움직여지고 있으므로 영미법은 국가와 개인이 정반합의 관계를 갖고 서로 발전적 관계에 놓여 있다. 영미법상의 변호사들은 대륙법국가의 국가공무원의 신분이 아니지만 이들은 국가 공무 (예컨대 등기 업무 수행이 대표적이다-우리나라는 등기업무를 국가공무원이 법원조직이 담당하고 있다)를 수행하는 위치에 있다. 이는 대륙법의 국가의 개인의 일체관계하고 대조 대비되고, 이런 구조적 장점에 의해서 세계초강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본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믿음, 소망, 사랑”을 추상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들이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자기 재산을 내 놓을 리는 만무할 테고 따라서 자기가 죽으면 당연히 교회 재산이 된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지만 또 미래 시점에 기부하겠다는 그런 약속의 말도 믿을 수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우선 지금 즉시 기부하는 자선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확실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국가는 교회는 일치되는 개념이다. 영미국의 기독교 국가는 교회와 국가가 일치한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는 달리 미국독립 전쟁을 통해서 국가와 종교는 분리된다고 헌법상 선언하고 있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트러스트 법제에 의해서 국가와 공익 추구의 종교는 일치된다.
“믿음, 소망, 사랑” 표현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변치 않는 법칙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즉 기독교의 “교의 교리”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글로 옮긴 성경과 동일하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쓰여진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소망”은 미래에 기부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말한다. 소망은 미래의 기부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신뢰이고 그 신뢰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 confidence”을 나타낸다. “사랑”은 사랑하는 내적 마음의 추상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재산을 지금 바로 내놓는 기부행위를 지금 실천하는 “자선”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음 소망 사랑”을 이해한다면 “믿음, 소망, 사랑”은 “과거, 미래, 현재”라는 말로 서로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과거 (성경은 과거에 기록됐다)에 해당하고, 약속은 다음에 실천하겠다는 다짐이므로 미래에 해당하고, 사랑은 지금 바로 실천한다는 현재의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된다. “과거, 미래, 현재”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현재”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추측은 별도의 추가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수긍할 것이다. 위와 같이 근거들로 보면 “믿음, 약속, 자선”으로 성경의 말씀을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 된다. “믿음 약속 자선” 이 3 가지가 모두 필요하고 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 현재 바로 행동하고 실천하는“자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은 “faith, hope, charity”으로 번역했을 것 같다. 이를 우리말로 보다 충실하게 번역한다면“믿음, 약속, 자선”이 되지 않을까? 기독교의 복음과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했던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텍스트를 충실하게 따라서 편견 없이 번역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그렇게 올바르게 성경을 번역한 번역의 위대한 힘에 의해서 킹제임스성경은 400년 이상을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떨쳐 온 것이 아닐까. 킹제임스성경의 “faith, hope, charity”의 한글 번역을 “믿음, 약속, 자선”으로 번역한다면 “자선”과 기부를 실천하는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랑”이라는 말의 쓰임새가 산업사회와 후기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현재 너무 “진부해져” “사랑”의 본래적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변질되었다는 현실 인식에서, “믿음 약속 자선”으로 새롭게 번역하여 “원래의 의미로 되돌아가자 Back to basics”[74]는 제안을 하고 싶다.
킹제임스성경 번역자가 “추상적인”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구체적인” “자선”을 지금 행동으로 옮기는 것으로 번역한 것은 문맥상이나 법적이나 기독교 교의적으로 모두 완전하게 일치하게 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은 기독교 전래가 시기상 늦었고 또 영미국의 현실과는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400년 동안 영미국인에게 가장 심오하게 영향을 끼친 킹제임스성경에서 “Charity”로 번역한 그 의미를 놓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1 내가 일반인들이 쓰는 언어와 천사들이 쓰는 언어로 말할지라도, 자선[75]을 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변죽만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1 Though I speak with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and have not charity, I am become [as] sounding brass, or a tinkling cymbal.
2 내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졌고, 모든 신비를 꿰뚫고, 모든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또 완전한 믿음을 가져서 태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요, 2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ve mountains, and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3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릴 만큼 많은 재산을 내가 축적해 놓았을지라도,[76] 또 내 몸을 불사르는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3 And though I bestow all my goods to feed [the poor],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 burned, and have not charity, it profiteth me nothing.
4 자선은 오래 가고, 공감하는 것이며,[77] 자선은 더 가지려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며, 자선은 뽐내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며, 자선은 부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4 Charity suffereth long, [and] is kind; charity envieth not; charity vaunteth not itself, is not puffed up,
5 관례에 어긋나게 행하지 말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며, 쉽사리 즉흥적으로 나서지 말며, 악의적인 의도를 품지 마십시오. 5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seeketh not her own, is 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6 나쁜 짓을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진리를 추구하십시오.[78] 6 Rejoiceth not in iniquity, but rejoiceth in the truth;
7 모든 것을 주며, 모든 것을 진실로 믿으며, 모든 것을 확신하며, 모든 것을 참고 헤쳐나가야 합니다. 7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8 자선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79] 반면 신의 계시자라고 떠드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냥 말로만 떠드는 것은 곧 그치고 맙니다. 자신이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곧 사라지고 맙니다. 8 Charity never faileth: but whether [there be] prophecies, they shall fail; 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 whether [there be] knowledge, it shall vanish away.
9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요, 우리가 예견하는 것도 부분적인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9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10 그러나 완전한 전체가 되면, 그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없어 지게 됩니다. 10 But when that which is perfect is come, then that which is in part shall be done away.[80]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깨달으며, 아이처럼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처럼 유치한 것들은 내가 모두 버렸습니다. 11 When I was a child, I spake as a child, I understood as a child, I thought as a child: but when I became a man, I put away childish things.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다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으나 다음에는 모든 것을 알게 될 터이고 또 내가 이해한대로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81] 12 For now we see through a glass, dark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but then shall I know even as also I am known.
13 따라서 믿음, 약속, 자선, 이 세가지는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입니다. 13 And now abideth faith, hope, charity,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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