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의 “의무론” 비판
1. 키케로의 "의무론"에서 제기하는 질문
2. 모방과 창의성의 관계- 에라스무스의 꿀벌의 비유
13. 키케로와 “키케로 추종자”에 대한 비판
13.1. 키케로는 “완벽한 법조인”의 롤 모델인가?
13.2. “완벽한 정치인 perfect orator”의 모델은 실재하는가?
13.3. “Caveat emptor 케비어트 엠토”이란 무엇인가?
13.4. “침묵은 금 silence is golden”인가?
13.5. 키케로 “의무론”-단기적인 이익 vs 장기적인 이익
1. 키케로 의무론에서 제기하는 질문
“자기 이익을 쫓는 행위가 도덕적인 올바름과는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충돌은 불가피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타협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심도 있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어보겠다. 옛날 그리스 로우즈 섬에 흉년이 들어 먹을 양식이 부족해지자 곡물가격은 폭등했다. 이 때 어떤 정직한 사람이 지중해 건너편 외국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배로 곡물을 가득 수입해 왔다고 보자. 다른 곡물 수입상들도 곡물을 가득 싣고 오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그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가 항해 중에 곡물을 가득 실어오는 상선들을 실제로 보았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이 수입업자는 로우즈섬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밝혀야 할까? 아니면 입 다물고 침묵한 채 자기가 수입해 온 곡물을 가장 비싼 시장 가격으로 팔아 해치워도 될까? 내가 들고 있는 예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임을 가정하고 있어 만약 그가 사실을 감추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로우즈섬 사람들에게 사실을 감추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은 당연할 터인데 내가 여기서 질문하는 것은 그러한 침묵이 정말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인지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의심이 드는 경우에 그가 어떤 이유와 근거에서 로우즈섬 사람들에게 사실을 감추지 않을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Cicero, De Officiis. 3.12.50.)
2. 모방과 창의성의 관계
사람의 본성은 창조적인 일을 남기려 하지 모방하는 일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남의 텍스트를 그대로 “모방 copy”하는 일은 창조적이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타인이 이미 발표한 것을 모방하여 공표하는 것은 저작권법이 일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허용되지도 않는다. 그 주된 이유는 모방은 창조적인 일과는 다르고, 창조적인 일은 진짜이지만, 모방은 가짜이고, 가짜로는 인간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창의적인 존재로서 자기만의 것을 가꾸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정치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자유와 속박의 문제로써 자유는 창의이고 속박은 모방에 해당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앞서간 위인들의 작품을 읽고 골방에 틀어박혀서라도 암기하고 모방하는데 있는 힘을 다해 애쓰는가? 호이징거의 “호모 루덴스”라는 “놀이 인간”의 개념이 시사하듯이 인간에게는 주어진 것을 따라 하는 놀이가 필요할 테고, 또 그런 습득과 놀이의 과정의 새로운 창조를 낳은 진화의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모방과 창조적인 일을 비유로써 쉽게 설명하는 데 벌꿀의 예를 자주 들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들고 있는 벌의 비유를 읽어 보자.
“자연계에서 한 예를 보자. 벌은 벌집에 꿀을 모이기 위해서 하나의 수풀에서 재료를 모와 오는가? 그게 아니라 벌은 온갖 종류의 꽃, 잡목, 수풀 모두를 정말 열심히 날아다니지 않는가? 또 벌이 모아온 것 그것이 바로 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벌은 그들이 모아온 재료를 자신의 기관을 이용하여 액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이전의 꽃이나 수풀이 가졌던 향기나 맛은 가려낼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재료들이 적당한 비율로 서로 혼합된 것인데 벌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암양은 한 가지 풀로 뜯어 먹고서 우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암소는 온갖 가지 풀을 뜯어 먹고 또 풀에서 즙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즙에서 변화된 우유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Erasumus, Ciceronianus (The Ciceronian) at 82)[1]
13. 키케로와 “키케로 추종자”에 대한 비판
13.1. 키케로는 “완벽한 법조인”의 롤 모델인가?
로마법은 영미법의 재판 실상과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영미국에서 키케로는 모범적인 변호사의 모델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영미국의 학교와 대학에서 키케로를 배우고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2] 키케로를 극구 모방하고자 하는 “키케로 추종자”의 모습을 보이는 대륙법국가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19세기 영미국의 모범적인 법조인상에 대한 논문을 참조해 보면 그 차이점을 알 수 있다.[3]
키케로는 영미법국가에서 법조인의 롤 모델인가?
역사상 자료인 키케로의 연설은 영미국의 판례법 재판의 현실적 모습과는 크게 동떨어진 면이 많이 보인다. 판례법 재판 진행은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증인 심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진실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지, 판례법의 재판과정에서 변호사가 일장연설을 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동류의 보통 사람들이 상식과 이성적인 판단력에 따라서 사안을 판단하지,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 신파극으로 유명했던 “검사와 여선생”의 한 장면처럼 방청객의 “심금을 울리는” 일장연설은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에 가깝다. 물론 법정 재판에서 모두 연설과 최후진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증인의 법정 증거의 도입과 결론을 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취조심문이나 반대심문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극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것은 증인에 대한 질문과 대답 과정에서 나오는 대화의 일부에서 포착되는 것이지, 검사나 변호사나 판사의 일장연설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판례법 재판에서는 키케로가 재판의 승소 요인으로써 든 수사학적 유머 능력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영미국인들은 모든 사람들은 진실을 파악할만한 인식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며 따라서 진실은 자연스럽게 발견된다는 사고를 갖고 있다. 영미국인들은 겉모양의 포장에 의해서 진실이 호도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하며, 또한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작이나 선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유창하게 말을 잘하면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을 역으로 해석하면 상대방을 조작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말이 된다. 영미인은 자기 주관적인 자기 결정권을 가진 자신의 판단력을 믿기 때문에 “검사와 여선생” 같은 감동적인 연설에 의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 정의, 기본 상식 truth, justice, common sense이 통하는 사회가 영미국인의 공동체 현실이 아니던가? 따라서 “말 잘하는” 선동가의 일장연설로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고 믿는 경우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법이 법조 실무하고 동떨어져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키케로처럼 독방에서 홀로 책을 통해서 “완벽한 웅변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진실은 표현기교로써 호도되거나 감춰질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설령 그런 기교나 지식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고 해서 개인이나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을 능력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영미국의 판례법 교육(로스쿨)은 시험 기술, 말 잘하는 웅변술, 수사학 기교 등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영미법 시스템과 법 현실은 진실을 추구하고 따라서 법조인에게 요구되는 법조 윤리를 강조한다.
13.2. “완벽한 정치인 perfect orator”의 모델은 실재하는가?
우리나라 같이 대륙법의 전통이 지배라는 문화에서는 시험공부를 통해서 완벽한 perfect 사람이 탄생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영미국인은 키케로의 완벽한 인간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4] 물론 모든 장점을 갖춘 이상형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거나 또 그런 이상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완벽한 이상적인 인간형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그런 이상형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모방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능력에 비추어 완전무결한 인간이 될 수 없음은 인간 역사상 당연한 것인데도 시험공부를 통해서 완전한 인간이 태어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하루 이틀 살아온 존재도 아니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재 70억이 넘는 인구 중에 그렇게 완전무결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보면 키케로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완벽한 인간형은 현실적인 인간형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키케로가 상정한 완벽한 모범적인 사람이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방으로써 완벽한 인간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은 흠결이 있고 또 거짓말이라고 여기게 되며 따라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신뢰받기 어렵다.[5] 영미국인들에게 말 잘하는 선동꾼은 진실한 면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트롤로페의 저서 “키케로의 생애”를 읽어보면 19세기 영미국 법조인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말만 번지름하게 잘하는 사람은 신뢰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겼다.
영미인들은 남에게서 모방한 것을 가지고서 마치 자기 창작물인양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크게 멀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배경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진실성이 우선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성이 담보되지 않는 외형적 발전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문화는 학문 추구의 장이든 일상적 사회 생활면에서 엄격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데 인색한 측면이 나타난다고 보고된다. 흔히 한국에서 여지껏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한 한국의 한계를 거론하는 데 그 이유 하나가 여기에 있을 지 모른다. 한 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법적 허구가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는데, 어떤 부정한 수단을 써서라도 일단 챙기고 보자는 목전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 기저에 깔려 있고 또 팽배된 것 같다.
13.3. “Caveat emptor 케비어트 엠토”이란 무엇인가?
매매는 매도자와 매수자라는 쌍방의 두 당사자가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매도자와 매수자는서로 대립하는 당사자인데 매매계약에서 누가 주의 의무를 다해야 되는지 그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을 두고서 대륙법국가는 로마법의 정신에 입각하여 매도자가 책임을 다해야 함을 강조한 반면 영미법은 로마법의 입장과는 다르게 매도자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의무를 다해야 할 주체는 매수자이고 매수자가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여긴다.
매매과정에서 매수자가 매도자보다 주의를 더 크게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는 이 “매수자 책임 원칙”은 일찍이 영국에서 확립되어 영미법의 원칙의 하나로 굳게 자리잡았다. 이 원칙은 매매 계약에서 매수자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매수자는 거래가 끝나기 이전에 매매물건을 직접 살펴보는 등 매수자가 사전에 모든 주의를 다해야 한다는 법의 일반 원칙을 말한다. 이를 라틴어 “caveat emptor”의 법률 용어로 부르고 영어로는 “Let the buyer be aware”으로 번역된다.
이 케비어트 엠토 원칙이 영미법상 처음 나타난 때는 영국의 에드워드 1세 때의 법률이고 그 후 여러 사례를 통해서 확립되었다. 미국에서 이 케비어트 엠토 원칙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 판결로는 1869년의 미국연방대법원 판결인 Barnard v. Kellogg 77 U.S. 383 (1869) 케이스가 있다. 물론 그 이전의 여러 케이스에서 법원칙으로 확립되어 있었음은 법률교과서에서도 확인된다.
미국의 1834년 법률교과서에서 정의한 케비어트 엠토 개념을 보자. “in the absence of an agreement between the parties, the seller is responsible for defects only when he has been guilty of fraud. 당사자 사이에 다른 별도의 특약 사항이 없는 매매 계약에서 매도자는, 사기를 치지 않는 이상, 물건의 하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계약법 일반 원칙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caveat emptor 매수자 책임 원칙”은 대륙법국가와 대비되는 영미법의 분명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매수자 책임 원칙이 가장 크게 나타난 거래는 예로부터 토지 거래와 주택 거래 분야이었다. 토지와 주택은 생활과 생산의 필수적 요소에 해당하기에 투기적 수요가 일어나기 어려웠고, 또 거액의 금액이 수반되는 거래이므로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는 토지와 주택을 함부로 매매하는 경우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토지와 주택은 대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적 지식으로 잘 알고 대상이고 또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성격을 가졌으므로 토지와 주택의 매매는 매수자가 직접 점검하기 용이하다. 따라서 매수자가 미리 점검한다면 어떤 하자가 있는지에 대해서 찾아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배경에서 매수자 책임 원칙은 간결하고 분명한 법원칙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토지 거래나 주택 매매 분야를 넘어서 일반적인 상거래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케비어트 엠토 caveat emptor 원칙이 나오게 된 요인을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매도자는 생산비나 투자비를 회수하고자 하는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서 물건을 판다. 매수자 또한 마찬가지로 사지 않는 것보다 사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기므로 매수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쪽 당사자는 각자가 취하는 이익이 서로 존재하기 때문에 매매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②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판단 능력을 갖고 있고 또 그에 따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린다. 계약 상대방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서 누구나 갖고 있는 보통사람의 상식적인 신중함과 자신의 의사 판단력을 동원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가 일상생활에서의 거래의 기본이고 또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이런 행태가 에서 작동되는 인간의 일반 원칙에 가깝다. 매수자가 매수를 하고자 원할 때는 자기가 직접 손수 물건의 품질을 꼼꼼히 살펴보거나 검사하고 나서 자기가 사고자 하는 목적에 적당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매수를 그만 둘 것이다. 이와 같이 설령 물건에 대한 하자 책임이 매도자에게 있다고 해도 매수자는 자기가 사고자 하는 물건에 대해서 직접 점검을 하는 것이 매수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매도자는 매수자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③ 사람들의 의식주에 관한 일상 생활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상거래가 일어난다.
④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살 것이므로 매수자는 자기가 모르거나 또는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는 물건은 사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일반적인 지식 수준을 갖고 있다. 매수할 때도 당연히 그런 수준의 지식을 행사할 것이다. 따라서 물건에 흠이나 하자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판단으로 알아낼 수 있거나 또는 직접 점검해 보면 찾아 낼 수 있거나, 만약 흠이나 하자가 숨어 있을 경우에는 흠이나 하자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여 매매당사자 사이에 특약을 맺고 해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흠이 있으니 매매가격을 낮추는 등). 이와 같이 물건에 대한 점검기회를 이용하면 보통사람이 갖고 있는 신중한 판단력과 지식으로 흠결 여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⑥ 이렇게 해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흠결이 깊이 숨어 있다면 매수자는 위험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물건의 하자가 알 수 없는 요인에 의해서 생긴 경우라면 매수자는 운이 없다고 여길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한 흠결을 매도자도 모르고 있었던 경우라면 매도자에게 손해를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매도자는 그 물건을 팔기 위해서 물건을 생산하는데 비용을 지출했음을 생각해 보라.
⑦ 물론 여기서 분명한 원칙은 매수자의 자유 의사에 따라 신중한 자기 판단력으로 매수를 결정했다고 해서 매도자가 사기를 친 경우까지 매수자가 책임을 덮어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매도자가 매수자를 속인 경우에 어떤 매수자가 사기를 당하고서도 매수 계약을 하였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허위나 사기가 개입된 경우라면 당연히 매수하지 않았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따라서 매도자가 사기를 친 경우라면 매도자가 그 책임을 당연하게 부담하는 것이다.
이렇게 매수자가 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매수자 책임 원칙 caveat emptor”은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타당한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같은 대륙법 국가들은 이러한 영미법의 원칙과는 다른 원칙을 갖고 있다. 대륙법국가들은 매매 계약의 성격을 정해 놓고 있고, 매매 계약에 있어서 매수자에게 “신의 성실 good faith”의 원칙을 부담시키고 있으며, 매매 계약은 당사자간의 특별 관계에 기초한다는 사고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매매 계약에서 매수자가 물건에 대한 흠이나 하자가 없음을 보증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만약 물건에 흠이나 하자가 발견되는 경우 매매를 취소할 수 있다고 여긴다. 또 매도자는 자기가 팔려고 하는 물건에 대한 가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에 따라 매도자는 매수자에게도 물건의 가치와 정보를 그대로 알려주어야 한다고 간주한다. 다시 말해 매수자는 물건을 사기 전에 꼼꼼히 챙겨 보지 않고 있다가, 대신 매수자는 매도자를 믿고 산다고 말하면서, 사고 나서 조그만 흠이라도 발견되거나 또는 사정이 달라지게 되면 매매를 취소해 달라는 하는 것이 대륙법 국가의 기본적인 가정이고 이것이 대개의 현실의 모습이다.
이렇게 대륙법 국가의 사람들은 매매계약에서 신의 성실의 원칙상 매도자는 허위 또는 사기를 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매가격에 대한 정보도 매도자가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적극적으로 사기 치거나 또는 허위 과장 광고하는 행위는 금지될 뿐만 아니라 흠이나 부실을 숨기는 것도 금지되는 것은 분명하다.
또 매도자가 물건의 가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므로 매도자가 폭리 수준으로 가격이 정해서는 아니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도자가 제시하는 가격 정보가 사고난 이후 내재 가치하고 달라진 경우 매수를 하고 나서도 매매를 취소할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상업 행위의 기본 속성상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단골 고객이거나 특수한 납품거래상이거나 하청인 경우 등) 한번 팔고 난 물건을 취소하고자 하는 매도인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설령 취소를 한다고 해도 취소 비용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매수자가 주의 의무를 게을리한 경우에도 매수자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기 보다는 매도자에게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상거래의 속성상 어느 쪽이 유리하겠는가?
13.4. “침묵은 금 silence is golden”인가?
대륙법국가에서는 키케로의 격언처럼 “침묵은 금 silence is golden”이라는 덕목을 가르쳐 왔다. 자기 자신의 정보는 말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고, 토론에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발언하는 것을 삼가는 경향이 크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본성이라면 어느 누가 자기 결점을 스스로 밝히려고 하겠는가? 인간 본성상 자기 부족함은 감추고 자기 우월함은 자랑하려고 할 것이다.
소금이나 일용할 양식을 매도자가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전제국가에서는 매도자가 물건에 대한 하자가 없다는 것을 보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폭리를 취할 가능성을 제거해야 할 것으로 매도자에게 의무를 부담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왕이나 가진 자들이나 상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본적인 본성을 포기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점은 폭리를 낳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소금이나 우유 등 생필수품마저도 매수자가 필요해서 물건을 산다는 측면을 감안해 보면 매도자의 신의성실에 기대하기 보다 매수자가 스스로 모든 주의를 다해야 한다는 원칙이 보다 옳은 것 같다.
여기에서 오해하거나 혼동해서는 아니될 것은 영미법에서도 근대 대량 생산 공업 사회로 전환되면서 매도자의 품질 보장과 허위 과장 광고에 대한 규제 등 영미법에서도 당연하게 “매도자의 책임 caveat venditor”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미법에서 “소비자 보호법” 등 매도자 (공업 제품뿐만 아니라 금융상품을 포함한다)의 책임을 강력하게 부담시키는 법률이 존재하고, 토지나 주택 매매에서도 매도자가 공시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명확하게 법률로 규제하는 등 매도자가 불법적인 사기나 허위 행위를 분명하게 단속하고 있다.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세상이라는 것을 다들 알면서도 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침묵은 금”이라는 속담과 같이 침묵은 항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일까? 셰익스피어 희곡 “리차드 3세”에 나오는 대사를 보자.
“그러니 참 이 세상은 정말 거꾸로 돌아가는 거지요! 이렇게 뻔히 사기치는 짓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자기가 알고 그대로 감히 말했다가는 돌아올 피해가 무서워서 모두들 눈감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 세상은 정말 사악한 세상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도 못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 리차드 3세, 3막 5장).
이 대사에서와 같이, 지금은 불의와 불법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고, 그렇지만 누군들 설령 진실을 알고 있다 해도 진실을 말할 용기를 내기란 무척 어렵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말 한마디 했다가는 자기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임을 모두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혁명적인 행동이다” In a time of universal deceit, tell the truth is a revolutionary act.“ 그런데 역사상 혁명이 일어난 경우는 거의 없다. 왜? 혁명이 그렇게 쉽다면 누군들 못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군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우기는 권력과 진실을 말하는 순진한 바보
솔직하게 진심을 말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이라고 한다.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을 일본말로 “바카 쇼지키 馬鹿正直”이라고 하는데 바카 쇼지키는 사슴을 말이라고 말하는 것에 숨어 있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stupidly honest”, “바보스런 솔직”, “우직스런’을 뜻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마록”을 있는 단어 뜻 그대로 번역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고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자 고사성어 “지록위마”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등장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을 이용해 잘못된 것을 끝까지 우긴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예컨대 “정부가 비행기나 함정 폭파 사건 등 대형 참사가 일어났을 때 진실 규명을 외면하거나 단순 사고 사건으로 치장해 버리며 정부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의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가르킬 때 쓰인다.
정부의 변명이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우기는 격이라고 국민들은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권력은 외양 치장으로 진실을 가릴 교묘한 거짓말 skillful lying을 부릴 수 있는 능수능란한 자원을 가졌고 따라서 만약 진실을 그대로 말한다면 자기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순진한 바보”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왜 사슴을 보고 있는 그대로 사슴이라고 말하는 것이 “순진한 바보”에 해당하는가? 말하는 사람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
“지록위마” 고사성어의 유래를 살펴보자. 진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가 실권을 장악하고 태자를 폐하고 대신 미련한 아들 호해를 왕의 자리에 앉혔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누구인지 떠보려고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했다. 이에 왕이 말했다. "승상도 농담을 하는가?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 指鹿爲馬. 신하들이여, 그대들 눈에도 말처럼 보입니까?” 왕의 물음에 대해서 사슴이라고 바른말을 한 신하들은 조고에게 모함을 당해 목숨을 잃었고, 말의 ‘외양 pretence’을 보고 말이라고 대답한 즉 거짓말을 한 신하들은 살아남았다는 역사를 사마천은 기록하였다. 물론 여기서 사마천은 조고는 새로이 등극한 왕에게 피살되고 만다는 역사의 심판을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사람들의 말은 외양 속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숨은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13.5. 키케로 “의무론”-단기적인 이익 vs 장기적인 이익
당장 눈 앞의 단기적인 이익을 쫓는 행위와 장기적인 이익의 관점 차이-자기 이익추구와 도덕적 판단-자기 이익 고수와 공동체 이익 추구-short-term vs long-term 관점의 차이
앞에서 영미법상의 매수자 책임 원칙이 대륙법의 매도자 책임 원칙에 비해서 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을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도자 책임 원칙이 기본적인 법체계를 형성하고 있고, 키케로의 “의무론”을 강조하고 있다. 키케로의 “의무론” 부분을 부연 설명 없이도 의미가 충분하게 설명된다. 우리나라에서 키케로의 “의무론” 부분이 대학입시 시험 문제에 등장할 만큼 (서울대 입시 논술고사 99년 출제) 크게 강조되고 있음을 볼 때 이 부분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키케로의 “의무론”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자기 이익을 쫓는 행위가 도덕적인 올바름과는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충돌은 불가피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타협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심도 있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어보겠다. 옛날 그리스 로우즈 섬에 흉년이 들어 먹을 양식이 부족해지자 곡물가격은 폭등했다. 이 때 어떤 정직한 사람이 지중해 건너편 외국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배로 곡물을 가득 수입해 왔다고 보자. 다른 곡물 수입상들도 곡물을 가득 싣고 오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그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가 항해 중에 곡물을 가득 실어오는 상선들을 실제로 보았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이 수입업자는 로우즈섬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밝혀야 할까? 아니면 입 다물고 침묵한 채 자기가 수입해 온 곡물을 가장 비싼 시장 가격으로 팔아 해치워도 될까? 내가 들고 있는 예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임을 가정하고 있어 만약 그가 사실을 감추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로우즈섬 사람들에게 사실을 감추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은 당연할 터인데 내가 여기서 질문하는 것은 그러한 침묵이 정말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인지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의심이 드는 경우에 그가 어떤 이유와 근거에서 로우즈섬 사람들에게 사실을 감추지 않을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Cicero, De Officiis. 3.12.50.)
“… 안티파테르의 견해는 모든 사실은 공시되어야 한다는 것 즉 매도자가 알고 있는 사실은 매수자에게도 그대로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디오게네스의 견해는 매도자는 물건에 하자가 있는 경우 그것을 외부로 밝혀야 하는데 외부 공시의 방법과 정도는 국내법률의 규정에 미리 정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률 규정에 의해 제한된 경우 이외에는 매도자가 매도할 물건에 대해서 불법적인 사기나 허위 또는 과장 광고가 없는 이상,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가격으로 팔 수 있다는 입장이 디오게네스의 주장이다.
디오게네스: “나는 곡물을 먼 외국에서 수입해 와서 곡물을 매도하고 있는데, 다른 경쟁자들의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팔지 않고 있으며, 시장에 공급이 넘칠 경우에는 가격을 더 낮춰서 매도할 것입니다. 이런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안티파테르: “무슨 말씀입니까? 각자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동포 형제들의 이해관계까지를 고려해야 하고 또 공동체에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사회 공동체의 조건 아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이 준수하고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내재적인 자연 법칙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르 개인의 이익은 사회 공동체의 이익이 되는 것이며, 반대로 공동체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땅한 사실들을 참작해도, 모두에게 풍족할 만큼의 곡물이 곧 도착할 거라는 좋은 소식을 동포 형제들에게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디오게네스: “하지만 감추는 것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은 분명히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에서 상품의 내용이나 가장 좋은 품질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사람들에게 뭘 감추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비밀을 아는 것은 곡물의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는 정보를 아는 것보다 매수자들에게 더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매도자인 나는 매수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모든 정보에 대해서 그것을 다 알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안티파테르: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하늘의 이치에 따라 맺어진 사회적 유대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고 보는데 이점은 수긍하리라 봅니다.”
디오게네스: “나도 그런 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유대감’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사유 재산이라는 개념이 전연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뜻하는 겁니까? 만약 그런 사회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결코 팔아서는 아니 되고 다만 공짜로 모두 나눠주어야 할 것입니다.” (Cicero, De Officiis. 3.12.51-3).
어떤 정직한 사람이 자신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어떤 결점 때문에 자기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 집은 오염되어 사람이 사는데 문제가 많은 집인데도 건강에 나쁜 영향이 없는 좋은 집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 방마다 뱀들이 기어 나오는 집인데도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 또 목조 건물 구조에 문제가 있어서 붕괴 위험이 있음에도 이런 사실은 매도자인 집주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경우라고 가정하자. 만약 매도자가 주택 매수자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매수자가 생각하는 주택의 적정 가격 보다 훨씬 더 높게 팔려고 하는 경우 이 매매를 부당한 거래 또는 ‘사기 fraudulent’ 매매에 해당된다(따라서 매수자가 매매를 취소할 수 있다거나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Cicero, De Officiis, 3.13.54.)
“안티파테르: “물론 부당한 거래에 해당합니다. 매수자에게 서둘러 거래를 끝내게 유인함으로써 매수자에게 주택을 점검할 기회를 주지 않은 잘못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매수자를 착각에 빠트린 행위에 해당합니다.”
디오게네스: “매도자가 집을 사라고 부추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경우에도 매도자에게 집을 사라고 강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매도자는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팔려고 내놓았습니다. 매수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매입했습니다. 만약 좋은 집도 아니고 잘 지어진 집도 아니면서 “주택 매매. 멋진 집임. 구조 튼튼함.” 이런 선전 문구를 걸어 놓는 것이 불법적인 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자기가 팔려고 내놓은 집에 대해 어떤 말도 언급하지 않고 그저 침묵한 것은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매도자가 사기를 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자신의 판단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도 모든 것을 다 그대로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말 한 마디 조차 꺼내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매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물건을 팔려고 내놓은 매도자가 그 물건이 지닌 결점을 모조리 밝히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택 경매인이 집주인의 말이라고 하면서 “자 여기에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하기 않은 집 한 채가 지금 매물로 나와 있습니다”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Cicero, DeOfficiis. 3. 13. 55.)
“그럼 키케로가 생각하는 해결책을 말해보겠다. 미곡상인은 로데스인들에게 사실을 감추어서는 아니될 의무를 부담하고 있고 또 주택 매도자도 마찬가지로 매수자에게 사실을 말해야 될 의무가 있다. 단순하게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실은 적극적으로 비밀을 감추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도자가 알고 있는 사실이 매수자에게 알려지면 매수자에게 유리할 경우 매도자가 자기 이익을 위하여 타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적극적으로 사실을 감추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감추는 행위에 해당하는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그런 감추는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그런 사람은 솔직하고, 성실하고, 올곧고, 똑바르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믿을 수 없고, 은밀하고, 요령 좋고, 간교하고, 속임수를 쓰고, 교활하고, 사기와 배반에 물든 사람들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열거한 것과 같은 그리고 그보다 더한 비난의 수식어가 붙는다면 그게 과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Cicero, DeOfficiis. 3. 13. 57.)
단기적인 이익 vs 장기적인 이익
위와 같이 키케로의 “의무론” 중에서 매도자 정보 제공 의무에 관한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했다. 키케로의 의무론를 통해서 영미법상의 “매수자 책임 caveat emptor” 원칙과의 차이점을 충분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본성과 상거래의 기본적인 성격에 비추어 본다면 상거래에서 매도자보다 매수자가 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결론에 쉽게 수긍되지 않는가? 매매 거래에서 매수자에게 책임 의무를 부담시키고 있는 영미법상의 “매수자 책임 원칙 caveat emptor”이 대륙법국가에서 기반하고 있는 “매도자 책임 원칙 caveat vendito”에 비해 보다 현실적임은 분명하다. 특히 주식 증권 시장의 구조와 생리를 이해한다면 매수자 책임 원칙의 타당성과 그 중요성은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본주의 상업의 속성상 매도자에게 “신의 성실 good faith”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정보 제공 의무를 매도자에게 부담시키고 있는 대륙법의 기본적인 태도는 인간 본성과 자본주의 상업 거래의 기본적 특성을 간과하고 있는 측면이 크다. 물론 매수자 책임원칙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고,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영미법의 입법 추세는 소비자 보호법 등 매도자의 책임을 강화시켜 오고 있다. 또 현재 양 제도상의 장점은 서로 수렴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는 법제도의 핵심에서 서로 차이점이 존재하고 또 이런 차이점이 다른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
아담 스미스가 논증한 바대로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은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는 시키는 것에 있다. 사람들이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익의 크기와 그 실현 시기를 언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영미국인은 “파이를 더 크게 키워서 더 큰 이익을 서로 나누자”의 사고에 쉽게 공감하여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반면 대륙국가 사람들은 “남의 손의 백 마리 새보다 내 손 안의 한 마리의 새가 더 가치 있다”고 여기며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사람은 모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은 같지만 그 이익의 크기를 언제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의 관점에서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이익의 관점을 단기적으로 상정하느냐 아니면 정기적인 관점에서 보느냐의 차이에 따라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altruism’가 가름된다. 사람들은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기 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익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되고, 이에 따라서 참되고 행복한 인간 사회가 펼쳐질 수 있다는 점을 역사가 웅변해 주고 있지 않는가? 영미판례법에 기초한 대영제국과 미국이 세계를 제패한 이유와 그 정신적 토대가 바로 여기에서 발견된다.
[1] If Cicero s method is not convincing, let us consider an example from nature. Do bees gather the material for their honeycomb from one shrub? Do they not rather fly about all kinds of flowers, shrubs, bushes, with wonderful zeal, frequently seeking from afar what they may store in their hive? Nor is what they bring straightway honey. They fashion a liquid with their organs, and after it is made their own, they give that forth in which you do not recognize the taste or the odor of flower or shrub but a product mingled in due proportion from them all.
Nor do the she-goats feed upon one kind of foliage that they may give milk like only to these; but they feed on every kind of leaf and give forth not the juice of herbs but milk transformed from them.
No. Yet it makes a difference where the bee gathers the liquid, or upon what leaf the she-goat feeds. If, indeed, yew-tree honey is made from the yew-tree, will not likewise the taste of the milk from the she-goat savor of oak leaves and willows?
Bu: Well, take artists. Do those who seek fame in plastic or graphic art devote themselves to the imitation of only one master or do they take what they please from each for the perfection of art, so imitating that they may possibly surpass? What about the architect? Does he, when preparing to build some great house, take all the details from a single building? Not at all, he selects from many what he finds to his taste, else no great praise would he gain when the spectator recognizes this or that building reproduced. And yet to be a slave to the copy in art is more tolerable than in oratory. What is the reason then that we have devoted ourselves so religiously to Cicero alone? They sin twice who not only set themselves to just one copy but also, being ignorant of rhetorical rules, read no one except Cicero and nothing outside to teach them how to appreciate him. For what profits it to have your eyes fixed on Cicero if you have not skillful eyes? What would it profit me who am ignorant of the art of drawing, if I should look whole days at the pictures of Apelles and Zeuxis?
[2] “We learn our Latin from him at school; our style and sentiments at the college.”, Middleton, Conyers, The Life of Marcus Tullius Cicero, III, (Boston- Wells & Lilly, 1818), 313.
[3] Mary Rosner, “Reflections on Cicero in Nineteenth-Centuiy England and America”, Rhetorica: A Journal of the History of Rhetoric, Vol. 4, No. 2 (1986), pp. 153-182;
William McDermott, “Reflections on Cicero by a Ciceronian”, The Classical World, Vol. 63, No. 5 (1970), pp. 145-153.
[4] “The “perfect orator” is, we may say, a person neither desired nor desirable. We, who are the multitude of the world, and have been born to hold our tongues and use our brains, would not put up with him were he to show himself.” (Anthony Trollope, “The Life of Cicero”, Ch xi, Cicero’s Rhetoric.)
[5] “Trollope labels Cicero a liar and a scoundrel: a liar because he has not acquired "that ... aversion to a lie which is the first feeling in the bosom of a modem [Victorian] gentl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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