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자선 charity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영미국인의 기부와 자선의 전통
월 스트리트 최고 부자 세계 갑부 서열 1위에 2위에 올라 있는 빌 게이츠, 웨런 버핏은 자신의 모든 부를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 가진 것 중에서 자기 입고 먹고 살고 남은 것 그 중에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작은 돈을 내놓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세상의 부귀를 다 가진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가진 돈을 자신의 핏줄도 아닌 다른 자선 단체에 기부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부자들이 자기 가진 재산을 모두 다 내놓는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고? 하지만 영미국에선 그게 가능하다. 영미국인에게 있어서 자식에 대한 믿음은 덜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 원칙을 추구하는 법정이 바로 형평법이다. “법과 정의 law and equity”는 “보통법과 형평법”의 두 법원을 말한다. 이 두 법체계는 오늘날에는 하나의 사법부인 법원으로 통합되었다. 영미국인의 기부 자선의 문화, 전통, 법제도의 심연을 파악해 들어가 보자.
“믿음 소망 사랑”의 고린도 전서 13장에 대한 킹제임스성경의 새로운 번역
고린도 전서 13장은 가장 잘 알려진 성경 말씀이다. “믿음, 약속, 자선,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이다. And now abideth faith, hope, charity,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믿음 소망 사랑”의 이 구절에 대해서 1611년의 킹제임스성경은 faith, hope, charity”으로 번역했다. 왜 17세기 당시 성경번역자들은 “사랑”을 “charity”로 번역했을까? 성경의 “charity”를 “love”로 새롭게 번역하게 된 시기는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신학자 프리스틀리와 에드워즈는 각각 킹제임스성경에서 새롭게 번역한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석을 강조하였다. 산업 혁명이 도래하고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 시작하기 이전까지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는 오로지 교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교회의 존재 기반은 사람들의 자선과 기부에 의해서였다. 자선과 기부가 없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고 따라서 사회적 약자 또한 살아갈 길이 없었다. 따라서 자선은 생명과도 같이 중요했다. 오늘날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1] 킹제임스성경[2]이 출간된 17세기 당시 상황을 감안하여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번역하고자 한다.
1 내가 일반인들이 쓰는 언어와 천사들이 쓰는 언어로 말할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변죽만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 내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졌고, 모든 신비를 꿰뚫고, 모든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또 완전한 믿음을 가져서 태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요,
3 가난한 사람들을 먹일 만큼 많은 재산을 내가 축적해 놓았을지라도, 또 내 몸을 불사르는 희생을 감수할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4 자선은 오래 가고, 공감하는 것이며, 자선은 더 가지려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며, 자선은 뽐내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며, 자선은 부풀리는 것도 아니다.
5 관례에 어긋나게 행하지 말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며, 쉽사리 즉흥적으로 나서지 말며, 악의적인 의도를 품지 말라.
6 나쁜 짓을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진리를 추구하라.
7 모든 것을 주며, 모든 것을 진실로 믿으며, 모든 것을 확신하며, 모든 것을 참고 헤쳐나가야 한다.
8 자선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 반면 신의 계시자라고 떠드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냥 말로만 떠드는 것은 곧 그치고 만다. 자신이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곧 사라지고 만다.
9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요, 우리가 예견하는 것도 부분적인 것 밖에 아니다.
10 그러나 완전한 전체가 되면, 그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없어 지니라.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깨달으며, 아이처럼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처럼 유치한 것들은 내가 모두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다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되리라.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나 다음에는 내가 모든 것을 알게 될 터이고 또한 내가 이해하였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될 것이다.
13 따라서 믿음 faith, 약속 hope, 자선 charity, 이 세가지는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이다.
“믿음, 소망, 사랑 faith, hope, charity” 이들 단어를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3 단어 모두 “trus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의 구절은 성경본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의 하나이다. 여기서 믿음은 loyalty 즉 기독교 교리에 순종한다는 뜻이고, 소망은 내가 미래에 기부하겠다는 의사가 있는데 그렇게 할 것을 분명하게 약속한다는 뜻의 “약속, 확신, 자신감 confidence”을 말하며, “사랑”은 “아가페”를 말하는데, 킹제임스성경에서는 아가페란 단어를 “채리티 charity”로 번역했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루어졌으므로 새로운 번역에 따라 “자선”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실천 없는 사랑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킹제임스성경에서 그리스어 “아가페”를 “Charity”라고 번역한 것이라면 그것은 적절하고 타당하였다고 여긴다. 더욱이 17세기 당시에는 교회가 구제를 전담하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분명하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라고 부르기 어렵거니와 외부적으로, 결과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선의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꿈 속에서 선을 행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또 반대로 악몽을 꾸고서 악몽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큰 믿음을 가졌고, 또 그 믿음에 따라서 미래에 자선을 행하고 재산을 기부할 것을 굳게 맹세하고 약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즉 그런 믿음과 약속도 중요하지만 지금 바로 ‘자선’을 실천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지금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 자선인 것이고, 이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자선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영미법상의 트러스트 Trust 법제도와 비교하여 보면 더욱 구체적이고 쉽게 이해가 되리라. 영미법상의 트러스트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성경 구절이 더욱 쉽게 이해되리라. 기부가 법적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자기 재산을 공공 목적의 자선 단체에 기부하겠다는 ‘기부 의사’와 목적을 문서로써 표시하고, 해당 재산을 내놓으면 기부자하고는 상관없이 자선 단체가 독립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는데 이런 구조가 트러스트 제도다. 트러스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법제도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트러스트는 표면만을 보고서는 트러스트를 움직이는 내막을 자세하게 알기 어려운 이중의 법체계를 갖고 있다. 트러스트는 등기상의 명의와 실질적인 소유자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개념을 영어를 써서 반복하면, 트러스트(신탁)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신탁자 기부 의사 intention, 기부 대상의 신탁 재산 특정 gift, certainty of subject matter, 신탁 수혜자 certainty of objects의 특정 이렇게 최소한 3가지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Knight v Knight 49 ER 58 (1840). 하지만 일단 기부 재산부터 먼저 내놓으면 다른 2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법적으로 신탁이 설정될 수 있다. 법원은 되도록이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이루게 해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would rather than not that a will's provisions should fail").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부 재산을 공공목적으로 내놓았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법은 자선의 실체를 인정하고 보호해 준다. 트러스트 법제에서는 형식적으로 갖추어야 할 직인이 누락되었다는 등의 형식적인 흠결을 이유로 신탁의 설정을 부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또 기부자가 기부약정을 통해 기부목적이나 사용방법을 지정했다면 그런 경우 기부금 운영자가 기부자의 의도를 소홀히 하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미법 국가는 교회, 회사, 국가의 운영과 구조는 기본적으로 트러스트이고 따라서 트러스트 법제에 내재된 기초적인 형평법 법원칙에 의해서 운용 유지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영미법상의 트러스트 Trust 법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금융상품의 상사 트러스트 제도가 도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영미법상의 일반법상의 트러스트 법제하고는 차이가 있다) 자선과 트러스트 관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영미국인들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배경에는 트러스트 법 제도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거의 국가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한 재산 규모를 가진 실체이었고, (교회가 곧 국가이었던 이유는 교회가 형평법원의 시초였다는 것에서 짐작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회사’가 가장 큰 재산을 가진 실체이다. 영미법 국가에서는 대학과 학교의 모든 교육 기관 (공립이든 사립이든)은 그 구조와 운영이 기본적으로 트러스트 법 제도에 따른다. 작은 개인 회사일지라도 회사를 운영하는 관리자는 트러스트 법원칙에 따른다. 작은 공동체 운영이든 국가 정책 결정자이든 이들은 트러스트의 법제에 의해 통제된다. 트러스트를 세우고 운용하고 유지해 나가는 실체는 변호사들이다. 교회, 회사, 국가를 이어주는 실체적 손발이 변호사(법원)인 것이다. 영미국을 “사법부 통치 국가”라고 말하는 근원이 이런 구조에서 연유한다. 재산이 힘과 권위를 가져다 준다는 말이 변함없는 진실이라면, 변호사들(법원)이 힘과 권위를 가진 실체라는 결론은 자연스런 도출이다. 이와 같이 영미판례법국가는 변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사회가 움직여지고 있으므로 영미법은 국가와 개인이 정반합의 관계를 갖고 서로 발전적 관계에 놓여 있다. 영미법상의 변호사들은 대륙법국가의 국가공무원의 신분이 아니지만 이들은 국가 공무 (예컨대 등기 업무 수행이 대표적이다-우리나라는 등기업무를 국가공무원이 법원조직이 담당하고 있다)를 수행하는 위치에 있다. 이는 대륙법의 국가의 개인의 일체관계하고 대조 대비되고, 이런 구조적 장점에 의해서 세계초강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본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믿음, 소망, 사랑”을 추상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들이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자기 재산을 내 놓을 리는 만무할 테고 따라서 자기가 죽으면 당연히 교회 재산이 된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지만 또 미래 시점에 기부하겠다는 그런 약속의 말도 믿을 수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우선 지금 즉시 기부하는 자선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확실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국가는 교회는 일치되는 개념이다. 영미국의 기독교 국가는 교회와 국가가 일치한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는 달리 미국독립 전쟁을 통해서 국가와 종교는 분리된다고 헌법상 선언하고 있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트러스트 법제에 의해서 국가와 공익 추구의 종교는 일치된다.
“믿음, 소망, 사랑” 표현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변치 않는 법칙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즉 기독교의 “교의 교리”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글로 옮긴 성경과 동일하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쓰여진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소망”은 미래에 기부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말한다. 소망은 미래의 기부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신뢰이고 그 신뢰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 confidence을 나타낸다. “사랑”은 사랑하는 내적 마음의 추상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재산을 지금 바로 내놓는 기부행위를 지금 실천하는 “자선”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음, 소망, 사랑”을 이해한다면 “믿음, 소망, 사랑”은 “과거, 미래, 현재”라는 말로 서로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과거 (성경은 과거에 기록됐다)에 해당하고, 약속은 다음에 실천하겠다는 다짐이므로 미래에 해당하고, 사랑은 지금 바로 실천한다는 현재의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된다. “과거, 미래, 현재”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현재”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추측은 별도의 추가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수긍할 것이다. 위와 같이 근거들로 보면 “믿음, 약속, 자선”으로 성경의 말씀을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 된다. “믿음 약속 자선” 이 3 가지가 모두 필요하고 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 현재 바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자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은 “faith, hope, charity”으로 번역했을 것 같다. 이를 우리말로 보다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믿음, 약속, 자선”이 되지 않을까? 기독교의 복음과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했던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텍스트를 충실하게 따라서 편견 없이 번역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그렇게 올바르게 성경을 번역한 번역의 위대한 힘에 의해서 킹제임스성경은 400년 이상을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떨쳐 온 것이 아닐까. 킹제임스성경의 “faith, hope, charity”의 한글 번역을 “믿음, 약속, 자선”으로 번역한다면 “자선”과 기부를 실천하는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랑”이라는 말의 쓰임새가 산업사회와 후기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현재 너무 “진부해져” “사랑”의 본래적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변질되었다는 현실 인식에서, “믿음 약속 자선”으로 새롭게 번역하여 원래의 의미로 되돌아가자 Back to basics[3]는 제안을 하고 싶다.
킹제임스성경 번역자가 추상적인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구체적인 자선을 지금 행동으로 옮기는 것으로 번역한 것은 문맥상이나 법적이나 기독교 교의적으로 완전하게 일치하게 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00년 동안 영미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킹제임스성경에서 (the word is used for a disposition to give to the poor) “charity”로 번역하였다는 그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1 내가 일반인들이 쓰는 언어와 천사들이 쓰는 언어로 말할지라도, 자선[4]을 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변죽만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1 Though I speak with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and have not charity, I am become [as] sounding brass, or a tinkling cymbal.
2 내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졌고, 모든 신비를 꿰뚫고, 모든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또 완전한 믿음을 가져서 태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요,
2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ve mountains, and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3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릴 만큼 많은 재산을 내가 축적해 놓았을지라도,[5] 또 내 몸을 불사르는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3 And though I bestow all my goods to feed [the poor],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 burned, and have not charity, it profiteth me nothing.
4 자선은 오래 가고, 공감하는 것이며,[6] 자선은 더 가지려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며, 자선은 뽐내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며, 자선은 부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4 Charity suffereth long, [and] is kind; charity envieth not; charity vaunteth not itself, is not puffed up,
5 관례에 어긋나게 행하지 말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며, 쉽사리 즉흥적으로 나서지 말며, 악의적인 의도를 품지 마십시오.
5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seeketh not her own, is 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6 나쁜 짓을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진리를 추구하십시오.[7]
6 Rejoiceth not in iniquity, but rejoiceth in the truth;
7 모든 것을 주며, 모든 것을 진실로 믿으며, 모든 것을 확신하며, 모든 것을 참고 헤쳐나가야 합니다.
7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8 자선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8] 반면 신의 계시자라고 떠드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냥 말로만 떠드는 것은 곧 그치고 맙니다. 자신이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곧 사라지고 맙니다.
8 Charity never faileth: but whether [there be] prophecies, they shall fail; 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 whether [there be] knowledge, it shall vanish away.
9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요, 우리가 예견하는 것도 부분적인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9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10 그러나 완전한 전체가 되면, 그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없어 지게 됩니다.
10 But when that which is perfect is come, then that which is in part shall be done away.[9]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깨달으며, 아이처럼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처럼 유치한 것들은 내가 모두 버렸습니다.
11 When I was a child, I spake as a child, I understood as a child, I thought as a child: but when I became a man, I put away childish things.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다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으나 다음에는 모든 것을 알게 될 터이고 또 내가 이해한대로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10]
12 For now we see through a glass, dark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but then shall I know even as also I am known.
13 따라서 믿음, 약속, 자선, 이 세가지는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입니다.
13 And now abideth faith, hope, charity,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왜 미국의 최고 갑부들은 가진 재산을 기부하고 자선을 행하는 걸까?
“보이지 않는 손”-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위대한 양심의 힘
월 스트리트는 자선과 교육 사업을 통해서 끊임없이 부가 증대되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세계 최고 갑부인 빌 게이츠가 아프리카 기아 해방을 위해서 자선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그 동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일신의 편함을 추구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요, 자기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동정심이 넘쳐서 불현듯 자기의 모든 재산을 자선 사업에 쏟아 부은 것은 아니리라. 세계 최고의 갑부인 카네기, 버핏, 게이츠 등 수많은 월 스트리트 재산가들이 자기가 평생 모은 모든 재산을 모두 공익 자선 사업에 선뜻 내놓은 동기가 무엇일까? 그들이 자선 사업을 펼치게 만드는 것-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담 스미스의 통찰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이익 추구도 아니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동정심만으로도 부족하고, 최고 부자인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보다 강력한 힘은 이기주의 이타주의를 초월한 그 무엇에 있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살아 있는 박애정신의 약한 불꽃 즉 인류동포에 대한 사랑인 휴머니즘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불러 일으키는 데는 그보다 훨씬 강력한 동기인 인간의 내부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양심 conscience이다.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결론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라는 두 개의 서로 배타적인 이분법적 구분의 함정에서 벗어나 제3의 해결 구조를 열어주는 것이 창문이고 열쇠가 된다. 아담 스미스의 인구에 회자되는 저 유명한 구절을 다시 보자.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양조장,빵집 주인의 자비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that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하지만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기애의 본성”에만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양심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의 힘에 속한다. 양심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고 있는 도덕감정론 3부3장 중 간단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소극적인 감정은 거의 언제나 이처럼 야비하고 이처럼 이기적일 때, 어떻게 사람의 적극적인 천성들은 흔히 그처럼 관대하고 그처럼 고귀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보다도 자기 자신에 관련된 일에 의해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면, 무엇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도록 촉구하는가? 자기애의 가장 강한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휴머니즘의 물렁한 힘이 아니며, 신이 인간의 마음에 밝혀준 박애정신의 약한 불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요구되는 것은 보다 강렬한 힘이고 보다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11] 그것은 이성, 법칙, 양심, 가슴속의 살아 숨쉬는 것, 인간 내면 흉중에 있는 것,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는 최후의 판단자이고 조정자이다.[12]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인 것이다. 개인은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사람들이 그처럼 수치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 말이다.[13]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로지 이 중립적인 관전자 impartial spectator로부터 이고 이 중립적인 관전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기애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14]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의 추악성 자기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자기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인 관전자이다.[15]
많은 경우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사람들 자신의 성격 속에 들어 있는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16]
신중함의 가치와 보수성의 가치-아담 스미스의 견해
“자선은 불확실성이 따르는 미래의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결정을 할 때에는 낙관주의보다 비관주의에 따라야 하고 또 미리 조심하고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인 ‘삶의 지혜 원칙’과 ‘보수성의 원칙’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뛰어난 안전장치가 된다.” 이 견해에 대해서 좀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삶의 지혜의 원칙’
자선이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에 해당한다든지 그런 다른 고차원적인 해석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선은 ‘삶의 지혜의 원칙’에 따라서도 행하는 것이 옳다. 부모님 말씀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하지만 세상 지혜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성경의 이소처럼 그렇게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도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부모님 말씀을 들어서 손해 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경험을 통해서 대체로 다들 동의하지 않는가? 사람이 살면서 축적해온 그런 경험적 법칙에 속하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을 현자라고 말한다. 성현의 말씀은 우리들이 듣고 따라 행하는 것은 결코 손해 보지 않는 지혜로운 원칙에 해당한다. 따라서 자선은 지혜의 원칙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보호해 주는 안전 장치에 해당하는 것이니만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자선이 행하는 것이 좋다. 세상 지혜의 원칙은 십계명 같은 절대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지혜의 말씀을 모아놓은 잠언이나 격언 같은 정도에 해당하는 좋은 원칙이다.
신중함의 가치, 보수성의 원칙
“신중의 원칙” 또는 “보수성 Prudence의 원칙”은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6부1편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건강, 재산, 지위,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울이는 신중함은 그것만으로 정말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보기에는 부족하고, 신중함이 그보다 더 훌륭한 가치라고 평가 받는 용기, 박애정신, 정의감과 함께 결합할 때 그 가치가 빛난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미덕은 자기 절제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지혜롭고 분별있는 행동이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 명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욱 크고 고상한 목적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매우 적절하게 추구하는데 나타날 때 이것을 신중함이라고 말한다.”[17]
보수성의 원칙을 회계학 개념으로 설명해보자. 재무 재표 작성 기준으로 “불확실성 uncertainty”이 존재할 때에는 낙관주의보다 비관주의를 택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익은 예상에 의하여 인식하지 말아야 하고, 손실에 대한 충당금의 설정은 예상될 경우 반드시 인식되어야 한다. 자산 평가는 저가로, 부채와 경비는 고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계 원칙은 과대 표시는 과소 표시보다 위험하다는 가정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낙관주의에 의해서 잘되면 좋은 거고, 비관주의에 의하여 그러한 가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를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미래 일은 누구라도 알지 못하므로 미래의 일은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위험과 리스크가 따르게 된다. 불확실성의 위험과 리스크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보수성의 원칙이 지배하게 된다. 법이나 부모님 같은 보수주의자는 보수성의 원칙에 대개 지배당한다. 자기 자식을 해치려고 하는 부모나 법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일을 추진하면 그대로 좋은 거지만 만약 비관주의적 견해가 존재하는 경우 그러한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손해가 된다. “자선을 행하면 복 받는다”고 가정하고서 자선을 실현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경우 비록 복은 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벌은 받지 않기 때문에 (물론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벌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파스칼의 “내기”의 확률 이론처럼 벌 받을 지 안 받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미리 자선을 행하면 마음이라도 편한 것 아닌가?) 따라서 자선은 행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헌금은 하나님 명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고차원적인 신학적 이론은 차치하고서라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조심하라”는 이런 보수성의 원칙은 세상 경험칙상 대개 옳은 것으로 확인된다. 자선은 적선이 될지언정 결코 낭비는 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도 자선은 대개 좋은 일이다.
위에서 설명한 보수성의 원칙은 변호사가 “악마의 대변인 devil’s advocate”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경솔함의 비싼 대가
아담 스미스는 신중함보다 경솔함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전쟁 영웅과 강도살인자는 똑같이 사람을 죽이는 폭력을 행사하지만 사람들은 전쟁 영웅들에게는 갈채를 보내는 반면 강도살인자에게는 경멸과 증오를 보내는 그 차이점이 바로 어리석음과 경솔함에 있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한다. 흔히 많이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의 이 견해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스미스의 생각은 분명히 재음미되어야 할 것 같다. 해당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위대한 정복자들의 폭력과 불의한 행동을 보고는 흔히 어리석은 경이와 찬탄을 하게 되지만, 좀도둑이나 강도 살인자들의 폭력과 불의는 언제나 경멸과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전자는 후자보다도 수백 배나 유해하고 파괴적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가장 영웅적인 대담성을 가진 업적으로 간주되곤 한다. 후자는 언제나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천박하고 무가치한 범죄일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되며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전자의 불의한 행위는 적어도 후자의 불의만큼 크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전자의 어리석음과 경솔함은 후자의 그것들만큼 크지 않다.[18]
사악하고 무가치한 재주꾼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은 신임을 받으면서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사악하고 무가치한 바보들은 언제나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신중함이 다른 미덕들과 결합하면 가장 고상한 성품을 구성하는 것처럼, 경솔함이 다른 악덕과 결합하면 모든 성품 중에서 가장 사악한 성품을 차지한다.[19]
동기 motive의 중요성
“사람들은 질투심 때문에, 또한 노여움 때문에, 또한 증오 때문에, 또한 이기심 때문에, 또한 영적으로 교만한 마음 때문에 살인죄를 저질러왔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극악무도한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고상한 동기를 찾을 수 없다면,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모든 인간은, 특히 성질 급한 사람은 사랑과 박애정신을 바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멜빌은 이와 같이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토마스 홉스의 주장이기도 하다.
동기 motive는 to induce a certain action 어떤 행동을 낳은 원천을 말한다. “원인 없는 결과 없다”는 자연 법칙에서 동기는 원인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범죄 동기는 수사관의 수사방향이나 변호인의 무죄입증에 또는 검사의 유죄입증에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기도 하고 판사의 선고형량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동기는 형법상 요구되는 의도 intent, 기도(선동죄나 무고죄에는 이러한 기도가 입증되어야 한다)와는 약간씩 다른 차이가 있다. 범죄 행위를 입증할 시 대개는 행동을 일으킨 동기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민사 사건이나 대부분의 범죄는 범죄의 행동에서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에 별도로 무슨 목적으로 또는 어떤 동기에 의해서 범죄 행위를 저질렀는지 까지를 추궁할 필요는 없다. 과실치사나 부주의에 의한 재난재해로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다. 살인죄에서 동기를 찾는 이유는 살인죄는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인간으로서 가장 최고의 범죄이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살인 사건의 경우 (과학에서 원자를 발견해 들어가듯이) 그 배경과 동기까지 거슬려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 예방적인 처방전을 발견해 내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지금껏 살인에는 수많은 동기를 찾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여러 범주로-생물학적 사회적 개인적 범주로 나눠서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사람의 행위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이러한 범주에 거의 들어가게 되고 따라서 살인 동기는 거의 찾아질 수 있다. 하지만 살인이 비난 받는 이유는 살인의 동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살인 행위가 일어났다는 행위 (그로 인해 상대방이 죽었다) 그 자체에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살인 동기의 존재 여부에 따라 고의적 살인 murder과 과실치사 manslaughter로 구분되고 이에 따라 비난과 처벌의 강도가 달리 적용된다.
[2] 영국은 1604년 교회성직자임명법을 제정하며 로마 카톨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를 받아온 영국이 로마 교황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을 욕구를 실현시키는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극단적인 대립과 극심한 내전의 과정을 겪어야 했는데 ‘의사당 폭파 기도 Gunpowder Plot 사건’(1605년11월5일)이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다. 7년간의 고된 작업 끝에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성경은 이후 4백년 간 영어 영문학의 발전에 놀라울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킹제임스성경은 라틴 언어가 아니라 일반 민중 언어인 영어로 번역한 성경이었다. 원전에 기초하여 새롭게 번역한 킹제임스성경 번역의 원래 취지는 그 때까지 혼재해 사용되어 오던 여러 본의 성경 번역물에서 나타난 성경 해석의 다툼을 해소하고자 하는 통합의 사고에 있었다. 킹제임스성경에서 구약은 유태인 언어인 히브리 원어를, 신약은 그리스어 텍스트를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
[4] “믿음 소망 사랑”의 유명한 성경 구절에서 ‘사랑’의 그리스어 텍스트는 ‘agape’이고, 이를 킹제임스성경은 ‘charity’라고 번역했다. 에드워즈는 ‘charity’를 ‘love’로 바꾸는 것이 보다 낫다고 제안하였다. “But, then, the word “charity,” as used in the New Testament, is of much more extensive signification than as it is used generally in common discourse. What persons very often mean by “charity,” in their ordinary conversation, is a disposition to hope and think the best of others, and to put a good construction on their words and behavior. Sometimes the word is used for a disposition to give to the poor.”
[5] “가난한 사람들을 먹일 만큼 많은 재산을 내가 축적해 놓았을지라도” 이 구절은 우리나라 성경번역에서는 거의 일률적으로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내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영어 번역 “bestow all my goods to feed” 중 ‘bestow’라는 단어를 ‘주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라고 번역하는 것 같다. 하지만 ‘bestow’라는 단어를 영어 사전에 찾아보면 첫 번째 “to present as a gift or an honor; confer”라는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축적하다, 쌓아놓고 저장하다”는 뜻의 “to store, or house”의 의미가 있다. 앞의 ‘bestow’를 ‘준다’고 해석하면 뒤에 나오는 “자선(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와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가난한 자’를 ‘먹여 살리다’라고 말할 때 ‘가난한 자’ 부분의 단어는 그리스어 원문에 나오지 않는 것을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이 문맥이 통하도록 추가한 것이고, 이런 사실을 그 해당 부분의 단어를 이탤릭체로 표기해 놓았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 만큼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해도 직접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가 무슨 이익을 받을 수 있겠는가?-이런 해석이 보다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6] 우리나라 성경 번역은 일률적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long’은 ‘오래 간다’,’지속’의 의미이다. 교회는 개인 재산이 아니다. 교회는 신탁 재산이다. 신탁재산(트러스트)은 몇 백년을 지나 영구히 지속되어 내려왔다. 신탁은 한 사람의 목숨처럼 일시적이고 유한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Kind’를 흔히 ‘친절하다’고 번역하는데 ‘kind’의 의미는 남이 나의 잘못을 꾸짖고 훈계할 때 그것을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하는 뜻을 갖고 있다. 교육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나의 잘못을 깨우쳐 줄 때 그래서 내가 나의 잘못을 시정하는 그 결과에 있다. 남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말은 남이 나의 잘못을 꾸짖을 때 내가 화내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적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또한 그러한 남의 친절에 공감하여 그대로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이런 열린 태도를 사도 바울은 가르쳤다. ‘kind’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kind’의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더욱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Let the righteous smite me; it shall be a kindness: and let him reprove me; it shall be an excellent oil, which shall not break my head: for yet my prayer also shall be in their calamities. 의로운 사람이 내가 뉘우치도록 책망하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나를 비판하고 꾸짖으면 그것은 내 머리 속의 윤활유가 되는 것이지, 결코 내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내가 또 원하는 것은 나쁜 사람들은 재난을 당하고야 만다는 사실이니 그것을 보여 주길 바랍니다.” (시편 141:5). “현대인의 성경”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의로운 자들이 나를 치고 책망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좋게 여기며 거절하지 않을 것이나 악인들의 악한 행위는 내가 대적하고 항상 기도하리라.“ “공동번역 성경”은 “의인에게 매를 맞고, 그 사랑의 벌을 받게 하소서. 나의 머리 위에 악인들이 기름 바르지 못하게 하소서.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반대하여 기도 드립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Kind’라는 단어는 나의 잘못을 책망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뜻한다. 이렇게 ‘kind’의 의미는 ‘관용’과 ‘오픈 마인드’의 의미하고 맞닿는다.
[7] 우리나라 성경 번역자들은 거의가 일률적으로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rejoice’ 단어를 ‘기뻐하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rejoice’를 영어 사전에 찾아보면 “To have or possess“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번역자들은 ‘가지고 있다’라는 뜻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번역한 것 같다. 특히 ‘rejoice in’이라고 분명히 ‘in’이 붙어 있는데도 그저 ‘기뻐하다’로 단순하게 번역하는 것 같다. 킹제임스성경의 번역대로 ‘rejoice in’은 ‘가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킹제임스성경 번역대로 “기꺼이 진리를 추구하되, 나쁜 짓을 행여 마음 속에 품지도 말라”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8] 자선은 영원하다. 실패하는 법도 없다. 다시 말해 재산을 일단 내놓으면 공공목적으로 쓰여지지 결코 사적으로 쓰여지는 경우란 있을 수가 없다. 신탁(트러스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신탁자 ‘기부 의사 intention’, ‘기부 대상의 신탁 재산 특정 gift’, ‘신탁 수혜자 certainty of objects의 특정’ 이렇게 최소한 3가지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재산’부터 먼저 내놓으면 다른 2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적으로 신탁 설정이 거부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법원은 되도록이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이루게 해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would rather than not that a will's provisions should fail"). 가장 중요한 재산이 공공목적으로 내놓았으면 그 순간 법은 charity trust을 인정하고 보호해 준다. 반면 트러스트 제도가 없는 대륙법나라들에서는 형식적인 요건의 흠결을 이유로 예컨대 직인 누락이라든가, 문서로 증명이 안된다든가 하든 이유 등으로 신탁의 설정을 부정하는 경우가 간혹 나타난다.
[9] 신탁 trust은 부분적이라도 해석을 통해서 법을 통해서 완전하게 만들어진다. 이것이 형평법의 기초이다. 설령 부분적으로 부족하더라고 해도 전체적으로 평가해서 전체를 위해서 부분 부분을 이어서 완전하게 만들어 내어질 수 있다. 부분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개체가 모여서 전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체에서 개인을 내동댕이쳐 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 하나 하나가 모여서 국가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벌집처럼 하나의 벌꿀은 각자의 영역이 있고 각자의 할 일이 있어 자신들은 자신들 부분밖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국가공동체 전체적으로 하나님같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The whole is greater than the sum of its parts.” 개인은 공동체 전체에서 조망할 때 비로소 각자의 이익과 각자의 몫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 카톨릭 교회에서 고해성사할 때 자신의 몸을 숨긴다. 희미한 창문 밖으로 형체만 보여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마찬가지로 트러스트의 액면 그대로, 표면 위의 사항으로는 트러스트를 움직이는 배후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을 직접 맞대고 이야기하면 더욱 확실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트러스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므로 누가 트러스트를 움직이는 실체인지 잘 알기 어려운 경우가 흔하다.
[11] When we are always so much more deeply affected by whatever concerns ourselves, than by whatever concerns other men; what is it which prompts the generous, upon all occasions, and the mean upon many, to sacrifice their own interests to the greater interests of others? It is not the soft power of humanity, it is not that feeble spark of benevolence which Nature has lighted up in the human heart, that is thus capable of counteracting the strongest impulses of self-love. It is a stronger power, a more forcible motive, which exerts itself upon such occasions.
[12] It is reason, principle, conscience, the inhabitant of the breast, the man within, the great judge and arbiter of our conduct.
[13] It is he who, whenever we are about to act so as to affect the happiness of others, calls to us, with a voice capable of astonishing the most presumptuous of our passions, that we are but one of the multitude, in no respect better than any other in it; and that when we prefer ourselves so shamefully and so blindly to others, we become the proper objects of resentment, abhorrence, and execration.
[14] It is from him only that we learn the real littleness of ourselves, and of whatever relates to ourselves, and the natural misrepresentations of self-love can be corrected only by the eye of this impartial spectator.
[15] It is he who shows us the propriety of generosity and the deformity of injustice; the propriety of resigning the greatest interests of our own, for the yet greater interests of others, and the deformity of doing the smallest injury to another, in order to obtain the greatest benefit to ourselves.
[16] It is not the love of our neighbour, it is not the love of mankind, which upon many occasions prompts us to the practice of those divine virtues. It is a stronger love, a more powerful affection, which generally takes place upon such occasions; the love of what is honourable and noble, of the grandeur, and dignity, and superiority of our own characters., TMS, III.I.47.
[17] Wise and judicious conduct, when directed to greater and nobler purposes than the care of the health, the fortune, the rank and reputation of the individual, is frequently and very properly called prudence. (TMS, VI.1.16.)
[18] The violence and injustice of great conquerors are often regarded with foolish wonder and admiration; those of petty thieves, robbers, and murderers, with contempt, hatred, and even horror upon all occasions. The former, though they are a hundred times more mischievous and destructive, yet when successful, they often pass for deeds of the most heroic magnanimity. The latter are always viewed with hatred and aversion, as the follies, as well as the crimes, of the lowest and most worthless of mankind. The injustice of the former is certainly, at least, as great as that of the latter; but the folly and imprudence are not near so great. A wicked and worthless man of parts often goes through the world with much more credit than he deserves. A wicked and worthless fool appears always, of all mortals, the most hateful, as well as the most contemptible. As prudence combined with other virtues, constitutes the noblest; so imprudence combined with other vices, constitutes the vilest of all characters.
[19] As prudence combined with other virtues, constitutes the noblest; so imprudence combined with other vices, constitutes the vilest of all charac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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